하루2020. 7. 22. 11:24


긴 장마를 지나가고 있다.
예전에는 장마하면 6월 말에 시작해서 7월 초에 끝나는 보름 남짓 되는 시간이었는데
요즘은 장마가 한 달 가까이 계속 되는 식으로 우리나라 기후가 변한 모양이다.

안그래도 아이들과 집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긴데 비까지 왔다갔다하니 더 밖에 나가기가 어렵다. 하루에 한두번은 마스크를 쓰고라도 놀이터에 나가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바람을 좀 쐬고오면 좋은데 어떤 날은 꼼짝못하고 집안에서만 복작복작 뒹굴거리게 되기도 한다.

비가 오고 세상에 온통 물안개가 엷게 차있는 것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나는 어린 시절에 아빠와 함께 찾아갔던 삽당령 생각이 난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에서는 양봉을 오랫동안 하셨다. 한옥집에 살때는 마당 아래 밭이 시작되는 곳 정도에 벌통을 쭉 놓고 키우셨고, 양옥집으로 이사온 후에도 차고 옆, 지금은 아이들의 모래놀이터가 있는 곳에 벌통들이 예쁘게 조로록 놓여있었다.
그리고 벌통 곁에는 늘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의 전용 의자라고 할 수 있는 양철로 된 작은 삼발이 의자를 놓고 할아버지는 벌통 곁에서 앉아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오래오래 들으셨다.
벌을 지키는 것인지, 쉬시는 것인지, 라디오를 들으며 세상 소식을 접하시는 것인지.. 그 모두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할아버지는 그곳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나이가 드신 후에는 벌들을 돌보는 일이 할아버지의 중요한 노동이셨던 것이다.

더운 여름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더위를 피해 벌들을 데리고 삽당령이라는 깊은 산속으로 가서 지내다 오셨다.
삽당령은 이제 인터넷에 찾아보니 강릉에서 정선쪽으로 갈 때 넘어가게 되는 높은 고개로 행정구역은 강릉시 왕산면에 속해있다. 왕산은 강릉에서도 태백산맥쪽으로 붙어있어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한 지역이다.
벌들도 불볕더위에는 지치고 힘들어서 잘 지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이 있는 삽당령 골짜기에 벌통을 갖다놓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동네의 빈집을 빌려서 한 달정도 살다가 오셨다.
가끔 아빠는 트럭을 몰고 삽당령에 가셔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필요한 생필품이나 반찬을 가져다 드리기도 하고, 벌들을 살피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고 오셨다. 그리고 어린 내가 가끔 그 길에 동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시절이었다. 핸드폰도 없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빌려쓰시던 작은 집은 허름했는데 가스나 전기가 제대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가스 곤로 같은 것에 냄비밥을 끓여드셨을까? 전기밥솥은 있으셨을까?
작은 단탄방과 부엌이 있었던 것 같은 그 집의 벽에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삼양라면이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걸려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전화도 없는 집이었을 것이라 아빠는 이따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 계신지 보기 위해서라도 몇일에 한번씩 삽당령에 다녀오셨을 것이다. 아마 산골 동네 어느 집엔가는 전화가 있는 집도 있었을테니 급한 일이 생기면 할아버지가 연락을 하실 수는 있었겠지만 별일없이 잘 계시면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참... 그렇게도 살았네. 옛날에는..^^;;




깊은 산속의 여름은 시원하고 축축했다.
강릉 우리 동네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날씨였어도 삽당령에 들어서면 비구름 속에 들어선듯 안개가 밀려올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집은 안개가 엷게 덮여있어 축축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그 동네에서도 잘 나왔을까? 산에서는 전파가 잘 안 잡혔을지도 모른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셨던 할머니는 옥수수를 삶아주시고 나는 그것을 까먹으며 다시 아빠와 차를 타고 한 치 앞도 안보이는 안개로 덮인 구불구불한 산속도로를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밝히고 천천히 헤치며 내려왔었다.
벌들은 고지대에는 아직도 피어있는 싸리꽃들을 찾아다니며 사리꿀들을 만들어주었던 것 같고.. 나는 아홉살 무렵의 어린 아이였으니 30년도 더 전 이야기인 것이다.

삽당령에 따라가면 어른들이 일을 하시는 동안 나는 천천히 할아버지 집 주변의 계곡에 내려가보기도 하며 안개 속을 살살 돌아다녔다.
그 때처럼 천천히 깊은 안개 속에 오래 있어본 적은 없었다. 이제는 마흔이 훌쩍 넘은 어른이 되었지만 ‘안개’라는 말을 생각하면 삽당령에서 어린 날 만나보았던 안개를 떠올린다. 자연의 여러 현상을 생생한 감각으로 만나보았던 경험은 오래 남는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안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TV에서 본 적은 있겠지만 그 차갑고 사르르한 느낌은 모를 것 같다. 안개 속에 완전히 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안개는 그만큼 깊고 아득한 것이라는 것을 그 안에 있어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다.




삽당령을 오고 가는 길에 나는 트럭의 앞자리에 앉아 아빠와 무어라무어라 종알종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말 좋았다. 아빠는 내가 물어보는 것들에 잘 대답해주셨고,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셨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사물들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농작물이면 언제 심어 언제 거두는지, 산골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볼거리, 이야기거리는 끝이 없고 그래서 나는 아빠와 차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이 좋았다.
학교에 다녀오다가 오죽헌 옆 길 쯤에서 트럭을 세우시고 “욱아, 아빠랑 어디 갈래?” 하고 소리치셨던 날이 있었는데 나는 신나고 기뻐서 “네!”하고 얼른 뛰어갔던 날의 풍경도 눈에 선하다.

자연이 풍부한 시간이었다.
우리 동네도 논과 밭과 뒷산, 앞산을 마음껏 오가며 놀 수 있는 곳이었는데
더 깊고 높은 산 속으로도 부모님을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러 오갈 수 있었던 날들.
도시의 아파트에서 단지 안의 나무 몇 그루와 새소리와 공원의 작은 호수물 정도만 접하며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좀 가엾게 느껴진다.
깊은 숲과 산허리를 둘러싼 안개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이 아이들은 알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것이 편리해졌고, 물자가 풍족하고, 여러 면에서 안전하고 살기좋아진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 한켠에서는 자연이 날로 파괴되고, 사람의 삶에서 멀어지고, 전염병과 기후 위기가 극심해지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비가 오는 날, 상념이 깊다.
아이들이 자연과 행복하게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날을 어른들이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싶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20. 7. 11. 07:13


호수 물이 반짝이며 흘러간다.
잠수하고 나온 가마우지들이 날개를 활짝 펴서 말린다.
걷는 사람들, 뛰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꽃들이 눌 피었다 진다.
큰개미취도 이제는 까만 씨앗이 더 많이 보이고
푸른 붓꽃도 거의 다 졌다.
나팔꽃과 달맞이꽃, 개망초는 수수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을 담고 아직 아침 호수가에 피어있다.

노래기는 많이 줄었다.
쥐며느라가 많이 보이는 아침. 이제는 노래기를 밟게 될까봐 무서워 호수에 못 나오는 우리집 큰아이도 호수에 나올수 있겠다.
제 자전거 바퀴에 행여 노래기가 깔려죽을까봐, 그러면 노래기가 불쌍하니까 호수 공원에서 자전거를 못 타겠다는 아이 말을 들으며 ‘ 저 마음도 쓰일 데가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여리고 두렵고 생명가진 모든 것들을 애틋해하는 마음도 살다보면, 세상 어딘가에는 쓰임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태양이 떴다.
구름이 빛난다.

여름 한복판을 향해 가는데도 이른 아침에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벚나무에서 마른 잎들이 떨어져 날리는 것을 보니 아직 멀리 있는 가을 느낌이 언뜻 난다.
계절이 하루 안에도 여럿 들어있는 것 같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생명/한살림.농업2020. 6. 30. 20:52


고향 부모님들이 감자를 캐서 보내주셨다.
감자가 오면 하지가 지났다는 것이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 것이고, 순하게 비가 잘 지나가기를 빌면서 어둑한 집에서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기며 감자전을 부쳐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4월 봄에 심어서 6월 하지 무렵에 캐는 고향집 감자가 익는 동안 앞산에서는 멧비둘기가 ‘구구우~ 구구’ 하고 여러번 울었을 것이고, 친정집 밭 옆에 있는 고속도로로는 차들이 씽씽 달렸을 것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오고가는 차들도 좀 적었으려나.. 고향집 밭 흙기운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은 감자를 만져보며 물어본다.





감자가 오면 아이들이 바쁘다.
큰 감자 사이사이에 섞인 작은 감자들을 찾아내 따로 양푼에 담는다.
호미에 찍힌 상처가 있거나 빨리 먹어야할 것 같은 감자들도 따로 담아서 오늘 감자전을 하기로 한다.
두고 먹을 감자들은 젖은 박스에서 빼내서 검은 자루에 담아둔다. 연호와 연제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잘 분류하고 잘 담았다.




연수는 오늘 먹을 감자를 씻어서 깍는 담당.
너무 잘하면 담에 강릉갔을때 외할머니가 자꾸 시킬 것같아서 안된다며 일부러 천천히 한다.




형이 필러로 깍아준 감자를 엄마가 칼로 쪼개주면 연호와 연제가 녹즙기로 간다.
그러면 건더기와 물이 따로 분리되서 나온다. 따로따로 큰 그릇에 모아준다. 감자 간 물 밑에는 뽀얗고 말캉말캉한 녹말이 잔뜩 고여있다. 윗물을 따라서 다른 그릇에 부어두고 처음 만졌을때는 딱딱하지만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면 말캉하게 떠올려지는 하얀 녹말은 감자 건더기쪽에 합쳐준다. 쫄깃한 감자전이 되도록..
올해로 감자갈기 경력이 최소 5년 정도 되는 연호는 이 과정을 잘 한다. 연제도 가르쳐가며...^^




이 과정을 위해 신문지 깔고 녹즙기 갖다놓고 조립하며 세팅하고, 뒷마무리하고, 중간중간 아이들 장난치는거 말리고, 자기만 많이 못 갈았다며 삐지는 막내 달래는 등의 수발드는 것이 내 역할이다.
한바탕 소동끝에 감자가 다 갈아지면 건더기 모은 것에 녹말과 물을 적당히 잘 섞고, 소금도 넣고, 야채가 있으면 좀 잘라 넣어서 감자전 반죽을 만들고 부친다.




식구가 여럿이니까 후라이팬을 두개 정도 놓고 부친다. 감자전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해먹는 것은 내가 강릉 사람이고, 아이들이 많고, 밖에는 장마비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멀리 살고 아이들 많은 막내딸을 위해 가장 큰 박스를 갖다놓고, 자꾸만 감자를 더 채우고 채워가며 자주 보지 못하는 딸 생각을 하셨을 부모님을 나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위 속에 고향집 밭에 앉아 감자를 캐고, 리어카에 싣고오셔서 차고 뒤에 깔아놓은 돗자리위에 감자를 쏟아 널어놓고 말린뒤에, 박스에 차곡차곡 넣고 신문지로 덮고, 박스를 닫은 후에 테이프를 단단히 붙여서 동네 택배 사무실까지 싣고가서 택배용지에 주소를 단단히 써서 붙여 보낼 때까지.. 다리가 아픈 아버지와 어깨가 아팠던 엄마의 손길과 발걸음을 따라가며 나는 아이들과 감자를 씻고 갈고 부쳐서 먹는다.




작은 감자들로는 알감자 조림을 했다.
두고먹을 수 있는 반찬이지만 냉장고에 넣었다 꺼내니 감자가 너무 쫀득해졌다. 만들어서 바로 먹었을때가 제일 포슬포슬하고 맛있었다.
땅은 정말 신기하다. 땅에서 온 먹거리들을 맛있게 먹을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런 먹거리들이 만들어질까.




감자가 도착한 날 저녁밥은 감자전으로 대신했다.
알감자조림에 밥도 조금씩은 먹고, 감자전을 배부르게 먹고 수박도 먹었다.
내년에는 아이들과 함께 감자를 심고, 감자를 캐보기도 했으면 좋겠다.
고생스런 일이기도 하지만 땅이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것을 준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또 농작물을 키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먹는 것은 가족들의 짭짤한 손맛,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 땀, 감자의 생명력, 택배기사님들의 수고, 지구의 온기, 고향의 바람과 비, 태양.. 그 모든 것.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20. 6. 23. 10:48



냉장고의 냉동실이 고장났다.
이 냉장고가 몇년이나 됐지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이 강일동으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때
강릉 엄마가 선물로 보내주셨던게 떠올랐다.
강일동에서 5년, 하남으로 이사와서 또 5년째가 되는 올해 정도면 얼추 10년이 되어가는 셈이다.
벌써 10년이라니.. 늘 새것같은 기분인데.

이사할때 한번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다른 짐들도 정리하느라 바빠
거의 빼냈던 것 그대로 다시 집어넣었을 것이다.
그후 5년이 흐르는 동안 한번도 완전히 비워본 적이 없었던 냉동실을 요며칠에 걸쳐 처음으로 정리해보았다.

곰탕이나 홍합삶은 물을 비닐에 넣어서 얼려두곤 했는데 그게 잘못됐는지 어느날부터 냉동실 한 칸 뒤쪽에 성에가 끼고 국물 얼려둔 것들이 녹아서 물이 자꾸 고였다.

며칠전에 맨아래칸에 국물 얼렸던 것들을 다 꺼내 버리고 물을 닦아냈더니 다시 물이 생기지는 않았는데
성에는 계속 두껍게 얼어붙었고 어떤 것들은 잘 얼지 않았다.

AS 센터에 전화했더니 예약이 밀려있어서 7월 초나 되어야 출장서비스 예약이 된다고 했다. 그거라도 일단 예약을 해두고, 어제는 외근후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드디어 냉동실의 모든 음식들을 꺼냈다.
얼마전에 냉동식품 많이 할인하는 온라인행사를 보고 아이들 좋아하는 반찬, 간식거리들을 많이 주문했더니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배송이 왔었다.
그 아이스 박스에 냉동실의 여러칸에 어지럽게 쌓여있던 수많은 봉지들을 꺼내 담았다.
몇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얼려진 야채들, 이미 한쪽이 녹아서 먹을 수 없게된 음식들은 버렸다.

그래도 그동안 가끔 조금씩이라도 정리해온 덕분에 많이 버릴 것은 없었지만 생기는데로 꾸역꾸역 넣어두기만 했던 식재료들이 뭐가 얼마나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올봄에 시댁과 친정에서 받은 떡봉지들을 한 바구니에 모아보니 쑥떡이 12봉지, 팥떡이 한 봉지.
청국장은 다 먹었고, 콩비지 얼려둔 것이 5봉지.
치킨, 돈까스 같은 냉동식품들은 맨 아래칸에 다 모아두었다.
곶감이 2봉지, 블루베리 얼린 것이 3봉지.
그외에는 국물멸치, 잔멸치, 오징어채가 1봉지씩.
이번주에 반찬할 돼지고기 얼린 것들, 국거리용 소고기, 생선 한봉지.
미숫가루 한봉지.


 

뭐가 얼마나 있는지 알게된다는 것이 이렇게 개운한 기분을 주는지 몰랐다.

어제 성에를 남편이 다 녹이고, 떼어내고 닦아낸 뒤로 냉동실은 우선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판 뒤쪽으로 성에가 더 얼어있는 것 같고, 문도 좀 헐거워진 것 같아 7월에 수리 예약해둔 것은 받아야할 것 같다.
특냉실이 특히 냉동이 안되고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기사님이 오시면 냉장고 전원을 끄고 냉동실을 한번더 다 비워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에 한번 정리를 해두고나니 기사님오셨을때도 훨씬 수월하게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 미리미리 냉동실에 있는 것들을 우선 많이 먹고, 냉장실 먹거리도 많이 먹어서 비워야지..

무엇이 얼마큼 있는지 알기도 어려울만큼 내가 정신없는 시간을 살아왔구나.. 싶다.
매일을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데리고 다니며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데만도 급급해서 정신없고 바쁠 때가 많았다. 집안 살림이든 내 마음이든, 아이들 자라는 모습이든 꼼꼼히 구석구석 살피기는 어려웠다.

십년쓴 냉장고가 살짝쿵 탈이 나면서 한번 그 속을 살펴보고 좀 숨이 통하게, 비우고 정리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 집에는 더 비워야할 곳들이 많다.
오래된 아이들 책이 쌓여있는 책장도 그렇고, 작아진 옷가지들도 계절마다 조금씩 비우긴하지만 더 많이 비워내야 한다.
묵은 장난감들도...
아이 셋이 만들어낸 온갖 미술작품들과 오래도록 가지고 놀다 망가진 장난감 쪼가리들도 나는 애틋해서 쉽게 버리지 못하고 다 모아두고 쌓아두며 살았다.
작은 구슬 한 알에도 우리들의 추억이 깃들어있고,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있으니 쉽게 버려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집이 온통 오래된 물건들로 꽉 차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 정리해서 내놓고, 꼭 필요한 것 말고는 물건을 너무 많이 사지않고.. 그래서 바람이 통하고 시원한 집을 유지해가야지.

집도 가볍게, 생활도 가볍게.
홀가분한 집에서 생각이, 마음이 자유롭고 깊게 오고갔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4월에 오랫동안 벼르던 안방베란다 화분 정리를 했다. 선반을 설치해서 작은 화분들을 올려두고, 큰 화분들 사이를 조금씩 띄워주었다. 크고 작은 화분들이 모두 한번씩 움직이는 동안 바닥 타일도 오랫만에 깨끗하게 물청소를 해주었다.
원체 화분이 많아서 정리를 해도 베란다에 자리가 많아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발디디기가 쉽지않지만 그래도 화분들 끼리는 조금 여유롭게 자리를 벌리고 지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5월에 친정에 다녀올때 키가 엄청 커버린 인삼벤자민 아기의 줄기를 가지치기해서 부모님께 갖다드렸다. 뿌리가 잘 나서 잘 자랄 수 있을지.. 부모님은 워낙 화초와 나무를 잘 키우시니까 인삼벤자민도 강릉에서 새롭게 잘 뿌리내리고 지내주기를.
처음 우리집에 왔던 엄마인삼벤자민도 올봄에 가지가 많이 무성해져서 그중 큰 가지 하나를 잘라 물화분에 넣어두었다. 뿌리가 조금 생기면 흙화분에 옮겨심어봐야겠다. 잎이 좀 떨어져서 죽으려나.. 걱정되기도 하는데 5월중에 어서 흙을 마련해서 심어줘야겠다.
작은 화분들은 선반으로 이사한후 다들 조금씩 안정감있게 자라주는 것 같다. 부지런한 쟈스민은 또 꽃송이를 피워올렸고, 아스파라거스는 선반의 철망 사이로 가늘고 긴 줄기를 무럭무럭 키워올리고 있다. 머리카락같은 아스파라거스를 요리해 먹어봐야할텐데... 어떤 요리에 넣지? 그냥 데쳐서 쌈장찍어 먹으면 되나..

아이들은 안방베란다가 정리되기 전부터도 화분이 많은 베란다를 ‘우리집 식물원’이라고 불렀다.
선반을 설치하고 화분들이 좀더 깔끔하게 자리를 잡으니 더 식물원 같아졌다고 좋아한다.
나도 참 좋다. 아침에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열면
아주 좋은 냄새가 난다. 달콤하기도 하고 향긋하기도 한 식물들의 냄새. 흙냄새.

벌레들도 좀 다니고, 관음죽은 아래쪽 잎이 많이 말라버린 것을 보니 뭔가 병충해 약이 필요한 것도 같은데, 식물과 사람 모두에게 나쁘지않은 것으로 잘 알아봐서 구해야겠다.

고추도 잘 자라고, 밤나무도 1그루 더 싹이 나서 먼저 자란 큰 나무 옆에 바싹 붙어 자라고 있다. 밤나무를 키울 수 있는 흙화분이나 땅을 찾아봐야겠다.

봄이 지나는 동안, 바깥 세상에는 여름이 오는 동안 우리집에서도 조용하고 치열한 성장의 나날이 흘러갔다.
고맙고, 더 애써봐야겠다. 함께 자라고 살아가기 위해.

Posted by 연신내새댁

 

동교동 하나로마트가 지금도 있을까.
신촌로터리에서 그랜드마트쪽 출구로 나와 홍대 방향으로 조금 걸어올라가다보면 큼지막한 하나로마트가 있었다.
그 동네에서 스물다섯살부터 서른까지 5년쯤 살았다.
어느날, 한가한 토요일 저녁쯤이었을까. 천천히 걸어서 장을 보러갔다. 식빵을 사고, 계란과 우유, 토마토 정도가 그때 내가 보던 장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마트를 나오다가 마트 앞마당에 넓게 펼쳐져있던 화분 시장에 쭈그려 앉았다.
멀리서 마트가 보일 때부터, 봄이었나, 고무나무며 산세베리아같은 공기정화식물들, 색색깔의 꽃화분, 아기자기한 여러 식물들이 나를 맞아주는 것 같아 맘이 설레었던 것이다.

돈도 많지 않고, 집도 작고, 햇볕도 옆건물에 가려 조금 밖에 들지않는 내 자취방 창가에 놓을만한 친구를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가 딱 두개, 양 옆으로 벌어져있는 관음죽 한 뿌리가 갈색 플라스틱 화분에서 호젓하게 자라고 있었다. 2천원이었던 것 같다. 작지만 야자수 나무처럼 생긴 뿌리가 튼튼해보였고 초록색 잎사귀도 싱싱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 우리 같이 살자.

그 날 하나로마트 앞마당에 쭈그려앉아 화분을 고를 때 초록 식구를 맞을 생각에 내 맘은 설레고 행복했던 것 같다.
그 뒤로 이십년이 어떻게 흐를지는 까맣게 몰랐지.
누구나 모른다. 자신의 삶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그런데 스물대여섯살 쯤에는 특히 모르는 것 같다. 짐작도 못했지..
신생 진보정당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하고 일주일에 세번은 동네보습학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칠 무렵이었나. 밤에는 홍대앞에 있는 연습실에서 탱고를 배우기도 했고, 나중에는 정당 일을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 어느날 쯤에 관음죽을 사서 함께 살기 시작한 거였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 5년 정도의 신촌 자취시절중의 어느 날인 것이다.

지나온 역사를 공부하고 한국사회를 고민은 했을지언정
당장 몇년 뒤의 내 인생, 내 미래에 대해서는 오리무중, 감도 못 잡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공부도 그리 잘 하진 못했지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시간은 참 쏜살같이도 흘렀다.
정신없이 바쁜 순간도 있었고, 아이들은 참 예뻤고, 몸은 퍽 고단하였다.
그저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에 대한 환상 비슷한 기대만 있었을뿐 현실의 어려움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육아는 주변의 선배들이 키우는 아가들이 예쁘다는 생각만 했지 얼마나 고달프고 얼마나 어려운 것일지 짐작도 못했다.

이십대 후반에 내가 다녔던 대학원에는 NGO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이 함께 있어서 시민단체나 학교에서 일하시던 40대의 직장인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친하게 지냈던 석, 박사 과정의 여자 선배 중에는 그래서 꽤 큰 아이들을 키우는 분들도 계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 고등학생 큰 아이와 초등학생 둘째를 키우며 대구에서 멀리 서울까지 일주일에 이틀 수업을 들으러 ktx를 타고 오가는 분도 있었다.
내가 지금 그 분들의 나이가 되었다. 내 아이들이 열세살, 열살, 여덟살.
그 때 나는 그 분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얼마나 쉽지않은 일상을 꾸리며 공부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인지 다는 몰랐다. 막연히 멋지시다.. 고 생각했을 뿐 그 분들이 어떤 삶의 시간을 지나온 것인지, 지나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대학원을 수료만 한채로 결혼을 하며 그 분들께 축하 선물을 받고, 큰아이를 낳고 또 선물을 받고 격려의 인사를 들으며 지내오는 동안 종내 졸업논문은 쓰지 못했다. 아이들은 자라고, 관음죽 화분은 여러차례 분갈이를 하며 크고, 나도 나이를 먹었다.

하나로마트 마당에 앉아 관음죽을 고르던 그 저녁에, 내가 그 뒤로 펼쳐질 십칠팔년의 시간을 주르륵 그려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는 크게 다르게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삶을 살았을 것 같다.
그래도 미리 생각을 좀더 해봤더라면, 인생과 여성과 결혼에 대한 책이라도 좀더 읽었더라면, 아니 그냥 인생이 짧다는 것과 사람들은 떠난다는 것과 아쉬운 많은 일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큰 틀에서는 같더라도 조금은 더 내밀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에너지와 시간을 나눠쓰며 살진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대체로 부질없다.
조금 의미가 있다면 앞으로의 시간을, 40대 중반의 이 시간을 내가 관음죽을 만날 즈음에 함께 만났던 그 분들처럼 용감하게, 알뜰하게, 지혜롭게, 어렵지만 굳세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때 나보다 하나로마트에 더 가까이, 바로 그 앞 골목에 살던 후배가 있었다.
그 친구의 자취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구석에 높다랗게 쌓여있는 책더미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녹색평론’을 보았었다.
안방 베란다 안에서 여러 화분들에 둘러싸여있는 관음죽에게 조금 더 바람이 통하도록 자리를 정리해주고, 올 봄에는 늘 쌓아두기만한 녹색평론을 제대로 읽어야겠다.

함께 긴 시간을 건너와준 관음죽.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고마웠다.
후회는 없지만 어쩌면 나는 그렇게 인생을 몰랐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아채는 20년지기 친구 곁에서
묵묵히 온힘을 다해 자라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같이 잘 건너가자. 용감하게.




 

Posted by 연신내새댁

아이들이 가끔 학교와 유치원에서 화분을 받아온다.
유치원의 특별활동으로 진행되는 과학수업에서 식물 키우고 관찰하는 단원이 있을 때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둘째와 셋째가 다닌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화분 선물(?)하기를 무척 좋아하셨다.
봄이면 봄꽃 화분, 가을에는 들국화, 겨울에는 포인세티아 화분...
아이들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건강한 에너지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유치원의 고마운 교육관에 나는 대체로 공감하고 지지하는 엄마이지만.. 밀려오는 화분들을 잘 키우기는 쉽지않았다.

 

 

이 친구는 작년 봄쯤에 온 ‘애플 민트’라는 허브 식물이다. 물을 자주 주면 안되고 햇볕을 좋아한다.
그래서 잘 자랐다. ^^
햇볕 잘 드는 거실 피아노 책상위에 올려놓고 잊어먹고 몇 주쯤 물을 안줘도 이 녀석은 잘 살아있었다.
잎을 건드리면 향긋한 사과향이 퍼져서 좋다.
그래도 한때 너무 물을 못 줘서 시들려고하기에 안방 베란다로 옮겨준 후에 다행히 기운차리고 더 부쩍 잘 자랐다. 봄에는 분갈이를 해줘야할 듯..

 

 

 

이 친구는 작년 봄에 온 장미.
고운 분홍꽃송이를 많이 달고 우리집에 왔다.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두기가 안쓰러워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했고, 가을까지 분홍 장미를 집안에서 보는 호사를 누리게 해주었다.
그런데 겨울에 춥고 너무 물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병에 걸린건지 잎이 다 떨어지면서 죽을 것 같았다. ㅜㅜ
꽃나무 키우기는 내가 특히 못하는 일중에 하나라 어쩔 수 없이 너도 이별해야하나보다... 했는데 어찌어찌 겨울을 견디고 살아있더니 얼마전부터 연초록 새잎을 조금씩 내밀기 시작했다.
이번 겨울이 많이 춥지않았고 안방베란다에 햇볕이 잘 비친 것이 장미에게는 다행이었던걸까.
함께 5월을 기다리고 있다.

 

 

 

치자 나무와 포인세티아, 이 친구들도 유치원에서 온 친구들.
포인세티아는 둘째가 일곱살 크리스마스 즈음에 받아온 것 같으니 올해로 3년차 식구네.
치자도 같은 해에 온 것 같다. 치자가 하얀 꽃이 피면 향기가 어마무시하게 좋다는걸 알고있어서 기대하며 분갈이를 했건만 2년 넘도록 꽃은 안 피었다. 그래도 신혼초에 키우던 치자가 죽었던 기억이 있어서 푸르게 잘 살아있어주기만 해도 고마운 녀석이다.
포인세티아를 셋째도 작년 크리스마스에 유치원에서 받아왔는데 그 녀석은 부엌 아일랜드 위에 장식으로 두었다가 많이 말라서 잎이 너무 많이 떨어졌다..ㅠ
살 수 있을까.. 지금은 안방베란다에서 요양중.

 



화분을 키우며 아이들도 나도 생명도 배우지만 죽음도 배운다.
생명이란 강하기도 한 것이고 여리기도 무척 여린 것이어서
어떤 생명이 오래 잘 살아간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면서도 기적같은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똑같은 것 같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매일을 함께 보내다 어느 날은 눈부신 꽃을 피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쓸쓸히 잎을 떨구기도 한다.
고요한 것 같지만 늘 꿈틀대며 약동하는 것이 생명이고 식물이다.

 

 

 

2년 쯤 전에 첫째가 방과후 과학수업에서 받아온 ‘아스파라거스’는 푸르게 자라면 잘라서 요리에 넣어 먹으라고 하셨다는데 아직 한번도 먹어보진 못했다.
제때 잘 잘라줘야 줄기가 굵어지면서 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굵기까지는 안되도 어느 정도는 자랄 것 같은데 늘 푸실푸실하게 넝쿨지며 키만 멀쑥이 크게 방치하는 아줌마와 사는 관계로 우리집 아스파라거스는 언제나 파슬리같은 느낌이다.
꽃대를 자주 올리며 붉은 꽃을 피우고 또 지고 또 피우는 제라늄 꽃화분도 유치원 친구.
이제 드디어 막내까지 유치원을 졸업했으니 우리집 베란다 정원에 당분간은 새식구가 좀 줄겠지..

하지만 의외의 복명- 학교 방과후 과학수업이 아직 남아있다.
작년 가을 우리집 베란다를 술렁이게 했던 그들이 언제 또 돌아올지 모른다.

 

 

 

생명의 세계는 정말 놀랍고도 신비하여라...
과학 수업의 영역도 무궁무진하다.
느타리버섯은 그래도 잘 수확해 요리해 먹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오늘 그림2020. 3. 19. 16:57

 

요즘 동요를 많이 듣는다.
내가 원래 동요를 좋아하기도 하고,
긴 방학을 보내는 아이들과 같이 듣고 부르고 싶어서 동요CD를 가끔 틀어놓는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즈음 아침에 라디오를 듣다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 우리동요 베스트 123>이라는 좋은 동요 음반이 소개되는 것을 듣고 ‘아 이거 듣고싶다!’ 하고 얼른 주문을 했었다.

 

 

 

어릴때 엄마와 언니와 함께 동요를 불렀던 기억이 많다. 어느 한가한 저녁 엄마와 같이 시골길을 산책삼아 걸으면서 함께 손잡고 동요를 불렀던 기억, tv에서 방송되던 ‘MBC 창작동요제’를 열심히 챙겨보고 거기에서 상을 받았던 노래들을 언니를 통해 배우기도 했었다. 꼭 동요가 아니더라도 집에 있었던 <세계 명곡집>같은 책을 시작부터 끝까지 넘기면서 오래된 가곡이나 세계 민요(로렐라이 언덕, 즐거운 나의 집, 애니 로리 같은..)들을 엄마나 언니와 함께 부르며 길고 지루하던 겨울방학의 한낮을 보내던 기억도 있다.

삶이란 바쁘고 힘겨운 순간이 많지만 그럴수록 고운 노래 한 가락이, 내 마음 같은 가사 한 구절이 주는 위로와 공감이 절실한 법이다.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노래는 꼭 필요하고
서로의 노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기도 한다.

이 노래집에는 내가 어릴 때 불렀던 동요들이 많다.
우리 아이들은 처음 들어보는 노래도 있고, 들어본 적은 있지만 가사는 잘 몰랐던 노래들도 많다.
이 오래된 동요들이 내 유년시절의 정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큰 울림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긴 요즘, 아이들에게 가끔 동요 가사를 쓰는 공부(?)를 시킨다. 아이들은 짧은 것을 골라 쓰려고 애쓰지만 나는 아이들이 동요에 담긴 고운 가사에서 고운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숙제를 낸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다가 나도 한 편 써보았다.
그림도 같이 그려넣었다.

 

 

 

엄마가 이 글을 보시면 한번 불러보시겠네.. ^^
코로나가 부디 잠잠해지고 얼른 부모님을 만나서 얼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씩씩하게 아이들과 밥을 잘 챙겨먹으면서
우리집에서 가사를 쓰고, 부르고 있어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인삼벤자민은 신혼집 집들이선물로 받았다.
남편 회사분들의 집들이가 있던 날 낮에 먼저 우리집에 배달로 도착했던 작은 화분.

찾아보면 아마 이 블로그 예전 글 어디쯤에 이 화분이 처음 우리집에 온날 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럼 우리 벤자민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볼 수 있겠네^^
한번 찾아서 나중에 링크를 걸어놓던지 해야겠다.
(찾아보니 처음 온날 포스팅은 없고 첫 분갈이때 쓴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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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풀꽃들이 손짓할 때 - https://sadeak.tistory.com/m/entry/%EA%B8%B8%EA%B0%80%EC%9D%98-%ED%92%80%EA%BD%83%EB%93%A4%EC%9D%B4-%EC%86%90%EC%A7%93%ED%95%A0-%EB%95%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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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로 1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삼벤자민은 우리 가족과 함께 성장해왔다.
연신내 갈현동에서 첫째가 태어나고 자랄 때 인삼벤자민도 조금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했다.
그리고 두번째 집인 강동구 강일동으로 이사와서 지금의 큰 화분으로 두번째 분갈이를 했다.
둘째와 셋째가 태어나고 세번째 집인 지금 하남집으로 이사오기까지 벤자민은 언제나 우리집의 큰 화분중 하나로 씩씩하게 잘 자라주었다.

몇 번 위기는 있었지만... 거실이나 방에 있을 때 벤자민은 가끔씩 내가 물주는 것을 게을리해서 잎이 새들새들 마르곤 했다.
한참만에 미안한 마음에 물을 듬뿍 주면 그 물이 물받이 밖으로 넘쳐서 강화나무로 된 마루바닥에 검게 얼룩을 남기며 스며들곤 했다.
그럼 황급히 다른 자리로 옮기고.. 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금씩만 주는 날이 오래되면 어느새 벤자민 잎사귀가 말라서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다.

하남 집에 와서는 안방에 두었다가 빛도 잘 못보고 물도 잘 못 줘서 많이 시들었다.

오래 우리와 함께 지낸 인삼벤자민이 힘이 없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파서
결국 방 안에 예쁘게 두기보다는 베란다로 옮겨서 요양(?)을 하기로 했다.
안방 베란다는 햇볕도 잘 들고 무엇보다 물을 가끔씩 흠뻑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집 반려식물들에게는 가장 살기좋은 곳이다.
어지간히 시들하던 화분들도 안방베란다로 오면 신선한 공기, 햇볕과 물을 듬뿍 마시며 친구들 사이에서 싱싱하게 기운을 차리곤 했다.

인삼벤자민도 다행히 다시 잎의 윤기를 되찾고 살아났다.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이제는 벤자민보다 키가 더 커진 벤자민 아기가 옆에 함께 있다. ^^

 

 

초록색 그로우백안에서 팔을 쑥 뻗으며 자란 인삼벤자민 아기.

이 녀석은 엄마 벤자민의 가지가 쑥쑥 자랄때 가지치기를 해서 잘려진 가지를 그로우백에 심어본 것이다.
(내가 했는지, 아빠가 해주신 건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만큼 자랄 때까지 꽤 오래 그로우백에서 시간이 걸린걸 보면 아빠가 하남집 이사하고 처음 오셨을때 잘라주신 것 같기도 하다^^;;)
함께 잘린 여러개의 가지를 잎을 좀 떼고 물에 며칠 담가두었다가 같이 심었는데 그중에 이 한 녀석만 살아서 자랐다.

나는 가지치기를 못한다. ㅠㅠ
천성이 정이 많고 겁도 많은 나는 무엇을 버리거나 잘라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어지러운 안방베란다 사진을 본 분들이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버리지 못하는 나는 무엇이든 최대한 모으고 쌓아둔다.
자잘한 화분들도 버리지 못해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모아두고, 이제는 버려도 될 법한 지난 날의 물건들도 한구석에 쌓아둔다. 언젠가는 쓰일 데가 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큼직한 창고가 있고, 마당도 있다면야 이 모든 화분들과 부속품들이 좀 더 정돈되어 지낼 수 있겠지만
도시의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두세번을 이사를 하면서도 끝끝내 들고 다닌 화분들과 흙주머니들과 버팀목으로 쓰는 막대기들 사이에서 우리집 반려식물들은 오늘도 오밀조밀 아웅다웅 살아간다.

엄마 벤자민은 그나마 한번씩 친정부모님이 우리집에 오셨을 때 두어번 크게 가지치기를 해주셔서 그럭저럭 모양이 잡혔지만
그로우백에서 정말 제 멋대로 자란 아기 벤자민은 삐죽하니 키만 크지 전혀 모양이 없는 채로 가지를 벌려간다.
한번 잘라주어야할텐데..
그리고 그 잘린 가지들을 다시 심어서 또 다른 벤자민 아기들을 키워보는게 좋을 것 같은데...
여름이 오기 전에 엄두를 내봐야겠다.
아니, 친정 아빠가 한번 하남 우리집에 오시는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처음 이 벤자민 화분을 받았을 때 나는 결혼생활이 어떠하리란건 1도 몰랐던 것 같다.
지금은 아냐고 하면.. 역시 잘 모르겠다.
13년.. 내가 살아온 만큼은 알 것 같지만 가보지않은 앞으로의 길은 또 모르는 거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앞날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혀 모른다는 건 똑같지만
달라진 것도 있다.
그때의 나는 조금더 힘이 있고 씩씩했던 것 같다. 용감했던 것도 같다.
아이 셋을 낳고 키우며 힘들어도 즐겁게 웃으며 살아왔다. 기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벤자민에게서도 이제는 시간이 느껴진다.
그녀도 몰랐겠지. 13년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이렇게 여러 곳을 오가며 우리 가족이 자라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살게 될 줄은.
이제는 햇볕좋은 베란다에서 오래전에 그녀가 떨군 잎사귀들을 이불처럼 덮고 오래되어 터진 줄기 옆으로 새로 진한 갈색의 줄기들을 감아올리며 살아가고 있는 벤자민.
우리, 애썼다고.. 앞으로도 잘 지내자고 말을 건네본다.
그전만큼 젊지는 않지만 다시 봄을 맞아 가지 끝으로 여린 연두색 새잎을 밀어올리는 벤자민처럼 나도 오늘의 새 잎을 키워내며 더 깊은 초록빛을 간직한채 살아가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우리집에는 꽤 그럴싸한 화분도 여러개 있다.
공기정화도 되고 멋있기도 한 큰 식물들이 자라는 그 화분들은 주로 이사할때 선물로 받거나 한 것들이다.
아이들이 과학수업에서 받아온 작은 화분들도 꽤 많다.
그 중 누구 이야기부터 할까... 고민하다가
며칠전 나에게 “또?!”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게한 이 친구 이야기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큰아이 연수가 ‘마법의 텃밭’이라고 부르는 스티로폴 상자 텃밭이다.
크지않은 스티로폴 상자 두 개에서 지난 2년동안 우리가 수확한 것은 방울토마토 여러개, 초록고추 몇 개가 다다.
아이들은 학교나 유치원에서 가끔 모종을 받아온다.
방울토마토 모종은 재작년, 그러니까 연수가 4학년때 체험학습을 갔다가 받아왔다.
토마토는 키가 엄청 잘 자라는 식물이다. 지지대를 해서 묶어주면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조금은 구불구불하게 엉키면서 잘 자란다.
노란 꽃이 조로롱 달렸을 때 작은 붓으로 몇번 건드려주면 수정이 되어서 초록색 토마토 열매가 달린다. 우리집 베란다는 여름이면 나름 밀림이 되어서 작은 날파리들도 좀 날아다니는지라 꽃들을 그냥 놔둬도 수정이 되기도 한다.

연수는 편식이 심해서 채소를 잘 먹지 않는다. 그런데 제가 받아온 토마토는 자라는동안 좋아하며 지켜보더니 열매가 달리자 씻어서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토마토를 잘 먹게 되었다!
이 편식 심한 열두살이 잘 먹는 몇 안되는 생채소는 오이, 토마토, 상추 정도인데 다 텃밭농사에서 직접 키우고 수확해본 것들이다. 베란다에서라도 텃밭농사를 계속해온 보람이 있다.

2년을 자란 토마토는 이번 겨울에 가지가 말라서 많이 잘라낸 뒤에 죽는가 싶었다.
그런데 오늘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연한 초록 새 가지가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닌 건 식물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텃밭에서 뭐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ㅎㅎ
왜냐면... 우리 꼬마들이 가끔 아무 씨앗이나 여기에 가져다 심기 때문이다.
사과를 먹다가 나온 사과씨도 심고, 망고 씨앗도 저 깊이 어디 묻혀있다.
밖에서 날아온 클로버나 이름모를 풀들이 자랄때도 많다.

그중에 며칠전에 내가 발견하고 크게 웃은 것은..
밤나무다.

막내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고추모종을 심어서 쑥쑥 자라고 하얀 꽃이 피고 초록 고추가 달리기를 여러번, 겨울을 지낸 지금도 지난 가을부터 빨갛게 익다 못해 비틀어지고 있는 붉은 고추와
얼마전 따뜻해진 날씨에 새로 핀 하얀 꽃송이를 함께 달고있는 고추 나무 옆으로
비죽이, 언제 자랐는지도 모르게 키가 쑥 큰
밤나무 싹이 자라있었다.

정말 웃을 수 밖에 없다.
우리집 냉장고 저장실에 넣어둔 밤에서는 왜 뾰족이 싹이 트며
싹이 난 밤알을 ‘아이구 모르겠다’ 하고 상자 텃밭에 쏟아붓고 묻어두면 왜 나무가 자라는 것인지...

나에게는 ‘나무를 심는 사람’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우리집으로 온 밤알들, 도토리 씨앗들은 모두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우월한 유전자들을 타고난 씨앗들인건지.
아니면 연수의 말마따나 우리집 상자텃밭은 무엇이든 자라게하는 ‘마법의 텃밭’인 것인지?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죽던지 살던지 모르겠다, 너 맘대로 해라 하고 내버려두는 무심한 반려인간들 옆에서
애써서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향해 잎을 뻗으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우리집 반려식물들의 숙명인건가.

저 밤나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디에 옮겨심으면 자랄까?
그냥 저기서 자라게 두어야할까?
겨울난 고추들은 이제 그만 따야지.. 빨간 고추 3개를 따서 잘 씻어서 썰어서 얼려두어야겠다.
가끔 반찬에 넣으면 예쁘고 맛도 있겠지.
토마토가 자라는 상자안에는 어떤 허브 같은 풀이 한구석에서 잘 자라고 있던데 뭘까?

상자텃밭에 들어있는 흙은 예전에 내가 강릉 친정에 갔을때 화분에 쓸 흙이 필요하다고 하니 엄마가 집옆의 밭에서 큰 비닐봉지로 한봉지 담아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식물들이 우리집에 와서 살다가 죽거나하면 그 마른 가지와 뿌리, 흙까지 모두 쏟아부어서 합쳐진 것들이다.

고향의 바람과 햇볕과 풀씨들이 담긴 흙, 그리고 어느 하우스의 배양토와 퇴비와 꽃씨가 함께 섞여있는
우리집 상자텃밭에는 많은 마음들이 함께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고향 부모님의 마음과 잠시 예쁘게 자라고 꽃피었던 많은 생명들의 꿈이
작은 스티로폴 상자 텃밭에 마법의 숨결을 불어넣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사는 일이 다 마법이지.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