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곧 말썽이요'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조르바가 혼자 지껄였다.
'두목, 계산 같은 건 이제 그만하쇼. 숫자 놀이는 그만두고 저울은 부숴 버리고, 구멍가게는 문을 닫아 버리라고요....(중략)' (148-149쪽)
'하느님은 있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두목,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있다면(뭐,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목,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외다. 나는 하느님이 꼭 나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나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힘이 세고, 좀 더 돌았겠지요. 그리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있겠네. 부드러운 양피 무더기 위에 떡하니 앉아 있는데 그 양반 오두막은 하늘이야...(중략)... '제발 그만둬! 그런 소리라면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그러고는 처덕처덕 물 적신 스펀지로 문질러 죄를 몽땅 씻어 버리시고 혼령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천당으로 냉큼 꺼져라. 여봐라, 베드로. 이 잡것도 넣어 줘라!'
아시겠지만 하느님은 굉장한 임금이십니다. 굉장한 임금이시란 게 뭡니까?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조르바가 이 심오한 객설을 지껄이던 그날 저녁, 기억하기로는,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굉장한 임금님>으로서의 하느님은 내 속에서 틀이 잡히면서 자비심 많은, 관대하고 전능하신 분으로 성숙을 거듭했다. (154-155쪽)
조르바를 읽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에는 가벼운 이야기에도 깊은 사색이 깃들어있고, 무겁고 처절한 주제 속에도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숨을 고르며 깊이 빠져 읽었습니다.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은 입에 착착 붙는 입말 그 자체여서 생생하게 크레타 해변에 저를 데려다주었고요.
조르바의 전반부를 읽고 있던 어느 밤, 문득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보니 노란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엷게 펼쳐진 흰 구름이 달 주위를 지나 푸른 밤하늘 멀리로 흘러가고 있었고요. 아름다웠습니다. 그 순간,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도 저 달을 바라보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달은 언제나 거기 있었지요. 우주가 태어나고, 지구와 달이 이렇게 자리를 잡은 이후,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많은 사람들이 올려다보고 그 달빛 아래를 걸었던 달이 이 밤에도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서울 강일동 냇가 옆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달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저는 많이 행복했습니다. '자연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한동안 일상에서 못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날밤은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조르바 덕분이구나.. 생각했어요.
예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셋째 출산을 앞두고 밤에 냇가 옆길을 열심히 걸어다니며 운동을 했습니다. 눈이 아직 안녹아 미끄러운 곳을 피해 마른풀이 덮힌 흙땅을 밟았는데 뭉클했습니다. 흙. 이 흙 속으로 들어가면.. 지구의 중심을 지나 저 반대편 라틴아메리카 어느 땅의 흙으로 통하겠지. 그러니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흙은 지구 반대편의 흙과 이어진 흙, 내가 지구 반대편을 걷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나는 지금 아르헨티나 어디께를 걷고 있다.. 공기도 대륙과 바다를 넘어 흘러다니고, 땅은 이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밤, 어찌보면 매일 반복되는 정해져있는 일상의 틈바구니 안에서 무한한 연결감, 시공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떄는 우연히 한 생각이었는데, '조르바'를 읽으면서 문학이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새삼 알았습니다. 연결감. 세대를 넘고, 시공을 초월하는 연결감. 조르바를 읽는 동안 많이 느꼈습니다.
날이 더워졌습니다. 열이 많은 아이들은 집에서 제일 시원한 곳을 찾아, 베란다 타일 바닥 위로 굴러가 잠이 듭니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와 열린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밤기운에 의지해 종일 뛰어놀아 고단해진 몸에 휴식을 줍니다. 잠든 아이들을 하나씩 방안의 이불위로 안아다 눕히면서 이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크레타 해변'에서 보내는 인생의 한 시절이, 몇 달이, 몇 년이 있기를 가만히 빌어보았습니다. 자기만의 '조르바'를 만나기를, 해변의 자갈 위에서 시원하게 잠들는 날이 있기를. 파도소리와 조르바의 산투르 연주와 이야기와 춤과 포도주와 스프 속에서 '인생에 대한 따뜻한 열정'이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적시는 날들이.
저에게 '조르바'는 단 한명 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이, 슬픔과 열정과 기쁨과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며 그 속에서 길어낸 보석같은 애정을 저에게 건네준 사람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저의 '조르바'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한 '조르바' 이야기를 함께 책읽은 분들께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그 분은 저희 마을 도서관 요가 선생님이세요. 올해로 나이가 일흔이세요. 유연한 몸, 씩씩한 마음, 끝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인상적인 분이세요. 주민자치센터에서 '사주명리학' 강의도 하십니다. '캘리그라피' 강사 자격도 가지고 계시지요. 쉰이 넘고, 거친 생업의 세계를 일정하게 마무리하신 뒤에 선생님은 해보고싶었던 여러가지를 한가지씩 해보셨데요. 하실 때는 꼭 '강사 자격'을 딸 때까지 하셨고요. ^^
남쪽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담배밭에서 일할때 너무 힘드셔서 '엄마, 나는 꼭 나중에 농사일 안하고, 다른 일 하면서 살꺼야' 하셨데요. 어머니가 '뭘 배워서 그렇게 할래?'하시면서도 '그래, 그럼 너는 그만 나가서 식구들 점심 준비해라' 하시면 밭일 안하는게 고맙고 좋아서, 집에와서 열심히 팥칼국수를 끓이셨데요. 그래서 팥칼국수를 엄청 맛있게 잘 끓이십니다. 저희 도서관 운영위원회때 한 냄비 끓여주셨지요. 칼국수 면도 직접 밀어 슥슥 자르신 것인데, 며느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을때 많이 끓였다가 남았다고 저희 집에 한 냄비 갖다주셔서 저는 진즉 그 맛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토요일 오전마다 도서관에서 요가하는 시간은 제가 딸린 아이들 없이 모처럼 홀가분하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예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는 동안에는, 집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나오면 되는 도서관 유아실 넓은 마루에서 요가매트에 앉아 저는 한시간 반쯤 크레타해변에 앉아있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팔 다리를 지그시 뻗고 누르며 호흡하는 힘든 시간 중에 선생님은 물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뭘까요?'
'황금?' '아이들?' 여러가지 답이 오고가는 중에 선생님이 내놓으신 답은 '자유!'
한 시간 반정도의 즐겁고도 힘든 요가를 마무리할 때 우리는 선생님이 틀어놓으신 트로트(?)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보는 거지요. 리듬을 타보려고 해도 저는 잘 안 돼요. 발도 꼬이고, 팔은 그저 막 휘젓는 수준입니다. ㅎㅎㅎ 선생님은 아름답게 움직이셔요. 한국무용과 밸리댄스도 배워보셨던 선생님의 몸짓은 가볍고 아름다워요. 신나는, 어찌보면 조금 슬프기도한 음률에 맞춰 춤을 추다가 선생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살면서 세 가지 정말 중요한 <금>이 있대요. 뭘까요?'
'소금', '황금' 요가를 함께 하는 마을 언니와 동생이 하나씩 잘 맞춥니다. 이제 제 차례인데, 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요. 역시 지혜로운 우리 언니가 마지막 답을 찾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소리지르며 선생님과 한데 모여 끌어안고 뱅글뱅글 돌며 웃었습니다.
지금! 지금!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운 적도 있었어요.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아오신 선생님은 아파트 옆 고덕천을 예전부터 많이 걸으셨데요. 때로는 외로움에 울며, 비오는 날 일부러 눈물이 가려지도록 비를 맞으며 걷기도 하셨데요. 사는 동안 괴롭고 아픈 날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쁜 모자를 쓰고 선생님이 도서관에 오시면 우리는 깔깔깔 재밌는 이야기를 주고받조으며 웃습니다. 지금. 웃을 수 있는 지금 함께 웃습니다.
겨울,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을때 우리는 작은도서관에서 작게나마 '신영복 도서전'을 열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윤독하는 시간을 가졌었어요. 우리 요가 선생님은 신영복 선생님에 대해 처음 들어보셨다고 하셨는데, <사색>의 편지글들을 읽으시면서 참 좋아하셨습니다. 탄복하고, 어린 시절 '시골 장' 이야기에 공감하고, 글씨의 '관계'에 대해 '정말 그렇다'며 좋은 작가, 글을 알게된 것을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내내 하고싶은 얘기가 참 많았어요. 좀 신기할 정도로요.. 저의 20대를 함께 보냈던 여러 그리운 이들과 많이 고민했던 주제들이 실은 100년 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 벌써(?) 썼던 내용이라는 것이 놀랍고 멋쩍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희가 굉장히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는줄 알았거든요. ^^;;;;
그래서 더 정리해두고 싶은데, 오늘은 이 정도 밖에 못 적겠어요.
다른 작품들을, 또 계속해서 읽어가면서 제의 여러 작은 경험들도 나름의 의미를, 자리를 잡아갈 수 있겠지요.
<인문학 읽고쓰기>시간에 함께 하는 것은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인데 가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제 이야기만 보내서 죄송합니다.ㅠㅠ
다음 책, 또 함께 만나보아요..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