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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02 할머니 안녕 2
  2. 2018.01.31 서울 눈
  3. 2018.01.31 노력
  4. 2017.12.18 겨울 소나무 2
  5. 2017.10.12 지난 여름
  6. 2017.09.18 마지막 유치 3
  7. 2017.09.14 외할머니의 수건
  8. 2017.09.11 요양원을 지나며 2
  9. 2017.09.02 신을 닮은 구름
  10. 2017.09.02 외출길 단상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2017년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겨울답지않게 햇살이 참 따뜻하고 포근한 날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길에 본 산자락에는 하얀 눈들이 덮여있었고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며칠 전까지의 매서운 추위가 잠시 한숨 고르는 듯 포근하고 아름다운 날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아프셨던 가을 동안 나는 가끔 할머니 생각을 하며 목이 메이곤 했다. 

가을이 깊어가며 날이 추워질때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보내고 떨면서 들어올 때는 

'병원에 계신 할머니는 이 추위를 모르시겠구나.. 날이 추워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도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할머니가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평생을 몸으로 느껴온 계절이 오고 가는 것, 시절의 변화에 따라 해야하는 크고작은 생활의 단도리들.. 이런 것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슬펐다. 


정 호자 원자, 정호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우리 할머니는 아흔두해를 사셨다. 

1925년, 강릉에서 가까운 주문진 행호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여덟살에 결혼해 모두 여섯명의 자녀를 두셨다.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은 갓난아기일때 잃은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 자라서 할머니 곁을 오래오래 지켰다. 많은 손주손녀들의 결혼과 증손주들까지 기쁘게 맞아주시고 생애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셔주셨다. 


바닷가가 멀지않은 농촌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일본어로 수업하던 소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할머니의 남자형제들이 모두 청소년기가 되자 서울로 가서 혜화동에 집을 마련하고 공부할 때, 할머니의 부모님은 할머니도 그 집에 가서 같이 지내기를 바라셨는데 할머니는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때 서울에 가지않은 것을 두고 할머니는 그 때 나이많은 친척 조카가 '고모는 천치야, 나같으면 당장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며 조금 후회스럽게 말씀하셨었다. 

어릴때 들은 그 얘기를 나는 자라서 가끔 혼자 생각해보곤 했었다. 할머니가 그때 서울에 가셨더라면 이화학당이나 연희전문 같은 곳을 다니셨을까.. 그럼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신여성이나 지식인이 되었을 수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때니 어려움을 겪을셨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할머니의 인생은 무척이나 달라지셨겠지..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버지를 낳고 우리들의 할머니가 되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니 가보지못한 할머니의 '신여성'으로서의 멋진 삶이 왠지 아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안도하게 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일찍 결혼을 하셨다. 우리 할아버지의 살림은 그당시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본래 땅과 재산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일제 초기에 토지 개간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땅을 모두 잃었다고 작은할아버지께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던 증조할아버지를 손목에 매를 앉혀서 다니시던 늠름하고 멋스러운 분으로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재력가였던 증조할아버지는 강릉의 이름난 부잣집이었던 강릉 최씨 '가매집'의 따님과 결혼했다. 평생 단정하고 고운 하얀 한복에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지내셨던 우리 증조할머니는 이 가매집의 이름난 수재였던 최장집 교수님의 고모이시기도 하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땅도 많이 잃어 살림이 어려울 때였는데 '가매집 외손'이라는 타이틀로 중신(중매)을 넣었었다고 할머니는 회고하셨다. 나는 대학원을 다닐때 최 교수님의 민주주의 관련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분은 나를 모르시지만 나는 생전에 나와 늘 가깝게 지내셨던 증조할머니의 조카분이라는 사실때문에 괜시리 큰 친근감을 느끼곤 했다. 


결혼 초기 살림은 어렵고, 시동생들도 많고, 할아버지는 지역신문 기자일과 청년단체 활동으로 바쁘셨던 때에 할머니는 첫아이로 우리 아빠를 해방이 되던 1945년에 낳으셨다.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할머니는 어린 아기를 업고 아빠의 손목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셨는데 그 길에서 어린 둘째를 잃으셨다. 피난 떠나기 얼마전, 할머니의 친정 아버지께서 잠시 딸을 찾아오셔서 만나보고 가셨다는데, 그때 제일 큰 시동생인 우리 작은할아버지께 '자네가 이 집에서 제일 중요하네. 부디 잘 도와주게' 당부하셨던 것을 작은할아버지는 오래 기억하셨고 내게 이야기해주셨었다. 나는 만나본 적이 없는 아빠의 외할아버지. 어떤 분이셨을까. 할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오래동안 못 만났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셨을까. 시어머니와 남편도 만나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자유롭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무척 가부장적인 분이셨고 화도 잘 내셔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지내셨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시게 된다면 할머니가 더 당당하게 씩씩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부모님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노년에 가깝게 지내셨던 인쇄소집 할머니와도 다시 만나 좋아하시는 화투도 재미있게 치시면서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목소리가 참 예쁜 분이셨다. 살짝 장난기가 어린 것 같은 반짝이는 눈을 갖고 계셨고 얌전하고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할머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정말 재미있게 옛날 얘기를 잘 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매일 밤 할머니 곁에 누워 깔깔깔 웃다가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만 더 해줘~ 하나만~~" 하고 졸랐었다.

지금도 살짝 기억나는 이야기는 어떤 바보신랑이 장가들던 날 이야기. 신부집에서 처음 먹어본 가자미 식혜가 너무 맛있어서 밤에 몰래 일어나 정지(부엌)으로 가서 살금살금 식혜단지를 찾아 손을 쑥 넣었는데 그게 개똥그릇(?)이었던데다가 그만 들켜서 도망가는데 개는 쫒아오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손에 묻은 똥이 식혜인줄 알고 싹싹 핥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다는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너무 우습고 재미있었다. 

텔레비젼이 있다해도 아이들이 볼 것이 별로 없고, 밤이면 일찍 누워 모두 잠들던 시골 한옥집 사랑방에서 우리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속의 여러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긴 겨울밤을 즐겁게 보냈었다. 

사랑방 큰 창문밖으로는 밝은 보름달이 뜨고 별도 예쁘게 빛났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밤들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생고구마를 숟가락을 삭삭 긁어주시면 한 숟갈씩 돌아가며 맛있게 받아먹던 기억. 친감, 곶감, 큰 가마솥에 끓여주시던 엿, 그런 것이 어린 시절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들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잃었다. 

내가 유머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조금쯤은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건 우리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일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뒤 나는 길을 걷다가 이따금 눈물이 툭 쏟아졌다.  

며칠동안 털이 수북히 달린 패딩잠바의 모자를 덮어쓰고 저녁에 운동을 하러가면서 울었다.

할머니가 보고싶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립다. 

친정집에 가면 '욱이 왔나~'하고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실 것 같고, 한동안은 햇살이 환한 날이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원해계시던 요양병원, 그 병원에 가면 여전히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할머니를 본 날, 할머니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나에게 "욱아, 행복하게 잘 살아."하고 아파서 가늘어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할머니 말씀대로 하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늘 집과 마을회관을 오가며 정정하게 잘 지내주셔서 나는 더 오래 할머니가 우리 곁에 계실거라고만 생각했다. 조금 더 자주 뵈러가고, 할머니랑 좀더 놀껄.. 얘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랬듯이 할머니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낼껄... 그러면 할머니가 좋아하셨을거란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할머니를 참 좋아하니까.. 이제 더는 할머니와 놀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는 연수, 연호, 연제를 모두 갓난아기 시절에 많이 안아주셨다. 

팔십이 넘으셨어도 아이들을 폭 안아서 잘 재워주시곤 하셨고, 내가 어린시절에 할머니 품에서 들었을 자장가와 여러 노래들을 부르며 얼러주셨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친정에서 돌아올때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연수야, 외가에 또 와~"하고 다정하게 여러번 당부하시고, 용돈도 아이들 손에 쥐어주셨었다. 

친정집에서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때 할머니는 많이 아프셨던 때라 아이들이 인사를 하는데 꺼내줄 용돈이 옆에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게 미안하셔서 "연수야, 다음에 오면 꼭 용돈줄께. 외가에 꼭 또 와.."하셨다. 

다음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를 뵈러갔을 때 할머니는 나에게 "왜 아이들은 안 데리고왔냐.. 연수, 연호, 연제. 너희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내가 천원짜리를 따로 놔뒀는데.."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큰돈은 필요없다고 작은 동전지갑에 천원짜리 몇장만 넣어서 옆에 두고는 아이들이 오면 한 장씩 주려고하셨던 것이다. 지난 번에 용돈을 못 줬던게 마음에 걸리셔서 병원에 누우셔서도 잊지않고 챙겨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참고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올께, 할머니. 얼른 나아.."하고 대답했었다. 그때는 또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일찍 다시 갔었야했는데... 

그날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의 1층 로비까지 갔다가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들은 면역이 약해 면회가 안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지 못하고 로비에 기다리다 돌아왔다. 연호가 "난 증조할머니가 안 아픈게 좋아.. 그러면 증조할머니한테도 용돈을 받을 수 있잖아" 했다. 아이들이 외가집에 가서 증조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만원이든, 천원이든 그 돈은 증조할머니의 마음이고, 정이다. 아이들도 자라면 그 마음을 알 것이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와서 아이들 겨울 옷을 정리하다가 연제가 더 어릴때 입었던 겨울 파카를 꺼냈는데 거기에 빳빳한 새 돈 5천원짜리 두 장이 접혀서 들어있었다. 

그 돈을 보고 나는 많이 울었다. 연제가 외갓집 다녀올때 증조할머니가 주셨던 돈인 것 같아서였다. 설날 지나고 외가집에 갔을때 증조할머니가 연제에게 세배돈으로 주신 새 돈. 나는 그 돈을 잘 넣어놓고 쓰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가 찾아서 전해주신 돈같아서.


이 겨울동안 우리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은 아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엄마아빠는 언제 죽는지, 자기들은 또 언제 죽는지.. 100살까지 살거라고, 죽고나면 자기들은 다시 아이로 태어날 거라고.. 하루는 이 생각을 하고, 다음날에는 또 다른 생각이 났다며 조잘조잘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날 연호는 엄마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서 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기는 엄마의 아이로 다시 태어날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럼 되겠지, 엄마?"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얘기하며 연호의 어린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래, 그러자"하고 나도 대답하며 웃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중에 내 손녀로 다시 태어나.. 그럼 내가 재미있는 옛날 얘기 많이 해줄께. 

할머니가 늘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많이 예뻐해주고, 칭찬해주고, 대견해해줄께..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같이 놀아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할머니 안녕..!

Posted by 연신내새댁
umma! 자란다2018. 1. 31. 20:01




밤에 눈이 몇번 왔다.
강아지처럼 뛰어나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달래 저녁밥부터 먹이고서
나는 아빠 마중간다는 핑계삼아 옷을 단단히 입혀 마당에 나간다.

바닥에 벌렁 누워 눈천사도 만들고
눈덩이를 굴려 눈공, 눈사람도 만들고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는 아이들.

내가 눈 먹지말라고, 먼지 많이 섞여있을지 모르니 먹지말라고 해도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입 속에서 녹는 눈이 시원하고 맛있어서
자꾸만 먹는다.
받아도 먹고 쌓인 눈은 퍼먹기도 한다.

나는 혼을 내다가 미안해졌다.
눈을 먹어보는 것은 어린시절의 권리같은 것 아닌가.
건강하게 잘 자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아이들에게는 눈을 맛보고 뛰어놀 권리도 있는거 아닐까.

미안해진 내가 “서울 눈은 안 깨끗해서 그래.. 나중에 엄마가 깨끗한 눈보면 먹게 해줄께..”하고 말하니
“언제? 어디 눈은 깨끗해?”하고 묻는 아이들을 보며
또 미안해진다.

눈이 깨끗한 곳에서 아이들을 키워줘야 하는데..
나는 아이들 교육때문에 서울을 못 떠나는 것도 아닌데..
남편의 직장, 우리 가족 생계 궁리에
서울을 못 떠나는 것인데
아이들을 생각하면 공기좋은 지방에 가서 살고싶다.

올겨울 눈은 몇번이나 더 올까.
아이들을 자꾸 혼내게 돼서 미안한 눈.
그래도 곱게 몇번 더 와줬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umma! 자란다2018. 1. 31. 19:41




아이들은 즐겁게 살기위해
순간순간 정말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날이 추워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면
집안에서라도 어떻게든 움직여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친구들을 못 만나 심심도 할텐데
셋이 종일 싸웠다 풀렸다하며
깔깔거리고 뒤엉켜논다.

난리부르스가 된 집과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아이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즐거움을 만들어내려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즐겁게 살려고 작은 몸으로 충실히도 애쓰는 그 노력이
자주 지치고 화내고 가라앉아 있는 나에게
오늘은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을 키우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루하루 감당해야할 어려움, 헤쳐나가야할 삶의 과제들을
걱정하고 짐지고 사느라
마음이 무거워지고 얼굴은 굳어질 때가 많았다.
그 사이 즐거움은 자주 만나기 힘든 친구처럼
잊어버리고 살다가 아주 가끔만 아쉽게 떠올리는 무엇이 되고만 것 같다.

나도 아이들처럼 노력해야겠다.
즐거움을 찾기 위해.. 즐겁게 살기 위해.

어제 아침 집을 치우다가
‘삶이 나를 가두는 감옥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는데
바로 뒤이어
‘나를 가둘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지. 나 자신말고는’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조금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
인간이 짊어지게되는 삶의 무게는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들수록 조금씩 배우게 된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마음,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이.

새해 첫달을 마감하며 가만히 짚어본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17. 12. 18. 10:01


우리집 앞에는 나무가 많다.
봄여름가을에는 창문 바로앞 느티나무가 초록잎과 단풍 풍경을 곱게 보여준다.
새들도 자주 날아오고, 아파트 뜰 건너 교회와 학교 건물위로 하늘과 구름도 본다.





겨울이 와서 느티나무 잎이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남으면
비로소 뜰 끝에 서있던 소나무들이 보인다.
키큰 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르고
단정히 서서 눈을 맞는다.




소나무가 많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소나무는 고향같은 나무다.

오늘 아침은 함박눈이 내려 혼자 조용한 집에서
눈 사이로 소나무 풍경을 한참 구경했다.
문득 대학교 입학원서 넣던 날 생각이 났다.
한 대학의 본고사를 보기위해 수시 접수는 안하기로 마음먹고 서울 언니에게 엄마와 같이 놀러가있다가
마침 그 대학을 다니고있던 친척언니와의 통화에서
관심없는 학과에 점수맞춰서 가면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에 마음을 바꿔 수시접수를 하기로 했다.
새벽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가서
마중나오신 아빠와 함께 고등학교로 갔다.
교무실에서 안된다는 담임선생님께 아빠가 화를 내시며 “아이가 가고싶다고 하잖습니까” 하시던 모습.
아빠가 강하게 말씀하시자 담임선생님도 어쩔수 없이 원서를 써주셨고
그 봉투를 들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와서
지하철안에서도 뛰어
간신히 5시 마감전에 원서접수 창구에 원서를 넣었던 날.
겨우 숨돌리고 나와 엄마랑 대학앞 박리분식에 앉아 참을 먹었던 기억.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으시지만 필요할 때는 강하게 말씀하실 줄 알았던 아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셨던 엄마아빠.

좋은 날들을 살아왔다.
돌아보면 참 좋은 시간들이었다.

눈이 살짝 그쳤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산책을 나왔다.
소나무를 보며 나도 저렇게 푸르게 서있어야지 생각한다.
내 아이들 곁에 든든하게.
이제는 내가 엄마아빠의 편이 되어드리고,
원하는 것을 함께 해드리면서.

고향에도 눈이 왔을까.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여름 친정에 갔을때
조카와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할머니방에 누워서 드라마보시는 엄마 모습을 그렸었다.
할머니는 오후에는 늘 그러셨듯이 마을회관에 놀러가시고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가 거실에서 북적거리면서 노는걸 봐주시다가
잠깐 할머니 방에서 쉬시는 참이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오후에 회관에 못가시고
할머니 방에도 매트리스와 작은 소파가 들어와
방 풍경이 바뀌었다.

그림을 그릴때만해도 바로 얼마후에 이렇게 달라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림으로만,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어떤 시절.

할머니가 조금씩이라도 부디 나으셨으면 좋겠다.
바깥 출입을 못하시는 할머니 곁을 지키며 보살펴드리고 있는 엄마도 힘내시길..!

Posted by 연신내새댁
umma! 자란다2017. 9. 18. 22:24




연수의 마지막 유치가 빠졌다. 

제 몸에 관심이 많은 연수는 윗쪽 어금니가 살짝 흔들릴 때부터 "엄마, 나 이 이빨까지 빠지면 이제 유치 다 빠지는거다~"하고 알려주었다. 

얼마후 갔던 치과 정기검진에서도 선생님께 "인제 연수 유치가 다 빠지는구나. 어른이는 충치 안생기게 양치 정말 잘 해야한다~"고 당부를 듣고 양치질 방법까지 꼼꼼히 교육받고 왔다. 

사진은 이가 빠지기 전날밤, 연수가 "엄마, 인제 진짜 많이 흔들려, 봐봐~~!" 하더니 "엄마, 나 이 이빨 사진으로 찍어줘. 내 마지막 유치잖아" 하고 부탁해서 찍은 것이다. --;;


그 날 밤에 애들 재워주려고 불을 끄고 옆에 앉아있는데 연수가 훌쩍훌쩍 울면서 나를 찾아서 깜짝 놀랐다. 

"엄마, 나 유치 빠지는거 싫어... 어른이 되는거 싫어.. 난 계속 아이로 살고 싶어. 나이 먹어서 어른이 되는 것도 싫고, 죽는 것도 싫어.. 난 계속 아이로 살꺼야.. 엉엉엉..."

갑작스러운 대성통곡에 나도 놀라고, 연호도 놀랐다. 일찍 곯아떨어진 연제만 세상 모르고 자고 있고.  


연수는 한참 울었다. 

이럴땐 뭐라고 말해줘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우선 나온 말은 "엄마는 어른이 돼서 좋은데..." 였다. 

"왜~?" 훌쩍거리면서 연수가 물었다. 

"응.. 어른이 됐으니까 너희들도 낳았잖아. 연수, 연호, 연제.. 엄마는 너희들 낳고 이렇게 같이 있어서 참 좋은걸.." 

"흑흑.. 그래도 난 어른이 되기 싫어.. 난 아이로 살꺼야.. 아이가 좋아"


'나도 그래' 라는 말이 마음 속을 맴돌았는데 미처 못했다. 

엄마도 아이일 때 참 좋았어.. 어른인 지금도 좋지만.. 가끔 다시 아이가 되고 싶기도 해.. 하고 말해줬으면 연수에게 더 위로가 되었으려나.


우는 형아 옆에서 뒹굴뒹굴 거리던 연호는

"그럼 나중에 어른 돼서 죽지않고 계속 살 수 있는 약이 개발되면 그걸 먹으면 되잖아.. 아님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나중에 그런 약 만들어지면 다시 깨워달라고 해서 그 때 먹으면 어때.." 하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진지하게 건넸다. 


냉동인간 이야기는 연수가 매달 받아보는 어린이 과학잡지에 실려서 며칠전 우리집 식탁 위에서 한참 흥미롭게 나눠진 화제였다. 

연호가 그걸 기억했다가 어른이 되면 죽게 되니까 자기는 어른이 되기 싫다고 우는 형아에게 뭔가 과학적 해법(?)을 알려주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다. 

평소같으면 뭔가 연호 말에 토를 달거나 그런게 아니라고 응수했을 연수인데

밤이고, 고단하고, 슬프고, 이는 흔들리고, 눈물은 자꾸 나서인지 연수는 아무 대꾸도 않고 

나를 붙잡고 한참 울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잠든 아이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갔다.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 사는 나라- 네버랜드에 있는 있는 피터팬을 생각했다. 

아이들에게는 다들 그런 마음이 조금씩 있나보다.. 어른이 되고싶지 않은 마음. 나도 그랬었나..? 

어른은 멋있고 힘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고달프고 서러운 존재이기도 하다는걸 아이들은 다 간파하고 있는걸까?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 같은 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감정인가보다..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언젠가는 이 모든 것과 헤어져야 할 거라는 사실. 

인간의 피해갈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  


연수에게 이 얘기도 해주었다. 

"연수야,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죽음 때문에 인간을 부러워했데.." 

"왜?ㅠㅠ"

"인간은 끝이 있다는걸 알기 때문에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산다고.. 신은 죽지 않는 존재니까 그러지 못하는데. 그래서 인간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데.."

연수는 별로 납득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신이 더 좋지, 결국은 죽게되는 인간이 뭐가 부러워...ㅠㅠ 열살 아들의 머리속은 이랬을까. 


역시 '엄마도 그래.. 엄마도 죽기 싫어..'하고 솔직하게 말해주느니만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울고 잠들었는데 

다음날 학교 다녀와서 오후 간식으로 아껴놓은 치즈케잌을 먹다가 그 유치가 그만 덜컥 빠져버리고 말았다. 


"엄마, 이 빠졌어~!!! 헤헤~ 치즈케익을 먹다가 빠졌네~" 

연수는 웃었다. ^^

나도 웃음이 나왔다. 


자전거 타러 나가서는 신나게 씽씽 가면서 

"아~ 앓던 이가 빠졌다는게 바로 이거네~ 엄청 시원해, 엄마!" 했다. 


"아니, 밤에는 유치 빠지는거 싫다고 그렇게 울더니.." 했더니 

저도 민망한지 헤헤 웃으며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한다. 

^^ 


그래.. 우는 순간도 있고 웃는 순간도 있는 것이지. 

그게 삶이지. 





가을 들어서며 서늘해지는 날씨에 콧물재채기를 하던 연수는 며칠 배앓이도 했다. 

학교에서 양호실에 한시간 누워있다 괜찮아졌다는 날도 있었고, 병원약을 먹고 그럭저럭 나아진 뒤에도 한동안은 배속이 불편해 힘들어했다. 심하게 아픈건 아닌데 자꾸 아팠다 말았다 하니까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루만 쉬면 안되냐고 며칠을 졸랐다. 

그래서 또 아침에 학교가기전에 배가 아프다는 날, 하루를 쉬게 해주었다. 


학교를 쉬기로 하자마자 싹~ 낫는 꾀병성(?)이 짙은 배탈이었지만 엄마랑 둘이, 동생들 없이 오전을 보내게되었다고 좋아하는 연수를 보니 '이런 날도 있어야지..'싶어 웃음이 났다. 

그래서 처음으로 연수와 둘이 나들이를 갔다. 

잠깐 병원이나 다른 볼일보러 연수만 데리고 외출한 적이 한두번 있긴 했지만 

둘이서만 놀러를 간 적은 처음이었다. 


동생들 유치원끝나기 전까지 한나절, 짧은 외출이라 가까운 '강풀만화거리'에 갔다. 

우리집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면 갈 수있는 강동구 성내동, 전철역 '강동역'(4번 출구) 근처에 있다.  

쓸 일이 거의 없는 초등학생용 버스카드를 제 카드지갑에 잘 챙겨넣고, 엄마와 손을 잡고 가는 나들이. 

연수가 즐거워하고 나도 모처럼 큰아들과 오붓이, 내가 좋아하는 만화거리에 다시 가니 즐거웠다. 

강풀 만화의 여러 등장인물들이 그려진 벽화들과 예쁜 조형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는 만화거리는 

작은 골목길들을 굽이굽이 돌아다니며 숨겨진 벽화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풀 만화 <바보>의 주인공인 '승룡이'의 이름을 딴 만화카페 '승룡이네 집'에 들러 뒹굴뒹굴 만화책을 봤다. 

연수는 주호민의 '신과 함께(이승편)'을, 나는 마쓰다 미리의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을 재미있게 보았다. 

차도 마시고, 승룡이네 집에 비치된 '강풀만화거리 벽화 지도' 팜플렛을 들고 본격 벽화 탐방에 나섰는데 

골목골목 찾아다니며 번호가 붙은 벽화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연수에게는 이런 오래된 주택가의 골목길이 낯설 것이다. 

숨어있는 벽화들처럼 숨어있는 예쁜 마음들, 아픈 사연들, 빛나고 어두운, 그러나 모두 소중한 삶의 순간들이 골목을 수놓는다. 

우리의 한 시절도 여기 잠시 깃들다 간다.  





연수는 이제 어린이와 청소년의 딱 중간 즈음에 서 있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아직도 다섯살 막내동생 만큼이나 어리광을 부리고 딱 그 수준에서 같이 싸우고 삐진다. 

또 어느 날은 제가 알게된 크고 작은 과학 상식들과 컴퓨터 게임과 세상의 일들에 대해 엄마에게 열심히 설명해주고, 물어보며 애써 이해해가기도 한다. 

언제 좀 의젓해지나... 한숨나오기도 하다가, 지금 이대로 딱 이 시절이 좋다.. 싶기도 하다.

유치하고 귀여운 열살.

마지막 유치가 빠졌다. 얼마 후엔 어른이가 모두 나겠지. 

자란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들어 간다는 것.. 모두에게 쉽지않은 이 길들을 잘 걸어나가길. 

그 길에 내가 한동안 계속 너의 친구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얘야.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17. 9. 14. 23:11



화장실 수건걸이에 고운 분홍색 수건이 걸려있는데 

'용계2동 노인회 봄놀이 기념'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예전에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 받아온 새 수건들 중에 하나인 모양이다. 


용계동은 우리 엄마가 결혼한 직후(?) 정도에 외할머니가 삼랑진에서 대구로 이사하시면서부터 살아온 동네다. 

그래서 어린 시절 우리에게 외할머니는 '용계동 외할머니'였고, 외갓집은 항상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찾아가는 용계동에 있었다.

용계동 외갓집에는 젊은 막내외삼촌의 책들이 많이 쌓여있는 벽장이 있는 작은 방이 있었고,

꽃이 예쁘게 핀 작은 화단과 수돗가가 있는 마당이 있었고

누군가 한 가족, 혹은 한분이 세들어 살던 작은 툇마루가 딸린 건넌방이 있었다. 


연호가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던 적이 있다. 

내 결혼식때도 외할머니는 연로하셔서 멀리 서울까지 못 오셨었고 

나도 결혼 뒤로 어린 아기들 낳고 키우느라 외갓집까지는 잘 안 가보았어서 

외할머니를 한번 뵙고 싶어서 강릉 엄마와 우리 네 식구가 함께 모처럼 대구 외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많이 편찮으셨다가 다행히 좀 나아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어릴때 외갓집 갈 때처럼 엄마랑 여행하는 기분으로 찾아간 곳은 

용계동이 아니고 조금 떨어진 옆동네였다. 

외할머니는 이사를 하셨던 것이다. 


오래된 집을 할머니 혼자 돌보며 지내시기에는 힘들겠다고 생각한 외삼촌들이 의논하셔서 

외할머니께 가까운 동네의 아파트 1층집을 구해드린 것이다. 

외할머니도 자식들의 의견을 따르셔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하셨는데 

그 얼마 후에 아프셔서 한동안 고생하시다가 다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 즈음에 우리가 찾아간 것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 외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불고기볶고 시금치나물 무쳐서 차려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엄마와 외할머니 모시고 시장에 갔었다. 

엄마가 옷을 사드리는 동안 외할머니는 시장 옷집 아주머니에게 "둘째딸이 왔다"고 하셨고, 아주머니는 "딸이 오니 얼굴이 환해졌다"며 같이 반가워해주셨다.

옷도 사고, 할머니 좋아하시는 멍게살도 사고는 할머니 가고싶은 곳- 용계동 집을 보러 갔다. 


한동안 비어있었어도 용계동 외갓집은 깨끗했다. 할머니 사실 때처럼 깔끔했고, 마당의 화초도 싱싱했다. 

용계2동 마을회관에 두유 한박스를 사들고 놀러가니 외할머니의 친구들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둘째 딸이고, 둘째 손녀고, 손주사위고, 증손주들이고.. 소개를 쭉 하고 할머니들이 꺼내다주신 음료수를 한병씩 먹는 동안

외할머니와 친구분들은 요즘 노인정에 누가 오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얘기들을 나누셨다. 

외할머니는 평소의 밝고 높은 목소리 톤으로 돌아가 계셨다. 


분홍 수건을 보며 그 날의 풍경이 후루룩 떠올랐다. 

할머니는 슬프셨을 것이다. 

삼십여년을 산 정든 집을 떠나는 것이, 정든 마을과 이웃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지하철 두 정거장을 지나 찾아와야하는 거리. 

예전처럼 아침 저녁으로, 아니 거의 하루 종일 드나들며 얼굴보고 이야기나눌 수 있었던 익숙하고 좋은 사람들과 

그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것이 슬프고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서 아프셨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작년에 리엔파크를 떠나 미사로 이사오며 슬펐던 것처럼

그리고 이내 몸 어딘가가 아파져 한동안 고전했던 것처럼

할머니도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고 나는 이제야 분홍수건을 보며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5년전에 외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줄 몰랐다. 

내 생각처럼 그래서가 아니라 그저 연로하셔서, 혹은 몸 어디가 특별히 약해지셔서 아프셨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사가 할머니께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셨을지 그때의 나는 가늠해볼 줄 몰랐던 것이다.


그때 외할머니는 새로 이사간 아파트의 경로당에는 아직 잘 안 나간다고 하셨었다. 

낯설고 서먹하셨겠지..

그 뒤로 사촌동생이나 엄마를 통해 드문드문 들은 소식은 외할머니가 건강히 잘 지내신다는 것과 

외할머니의 1층집이 동네 할머니들이 많이 놀러오셔서 같이 밥도 드시고 화투도 치시며 즐겁게 지내시는 사랑방처럼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올여름에 외할머니를 만나고온 엄마는 외할머니도 허리를 많이 아파하신다고 알려주셨다.


다시 외할머니를 뵈러 가고 싶다. 

내년 봄쯤에는 엄마를 모시고 찾아뵈러 가야지.  


자매애.. 라는 것이 여성이 살아가는데 정말로 중요하구나.. 하고 요즘 많이 느낀다.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 친구, 아이들 친구 엄마들, 다양한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여성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서로 도와주고 마음을 나누면서 쌓아가는 자매애.

자기애 만큼이나 어떤 여성들에게는 절실하고 중요한 관계이고 감정인 것 같다.  


내 삶을 오늘도 함께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자매들이 고맙고

1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조금은 아픈 마음 자리를 들여다보며 조용히 손을 얻어 따뜻하게  만져주고픈 밤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17. 9. 11. 11:20



내가 버스를 타고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 요양원이 두 곳 있다. 

둘 다 건물이 아주 크다. 

먼저 만나는 갈색 건물의 요양원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이고, 작은도서관 가려고 버스에서 내릴 때 앞에 서있는 푸른 건물은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한다. 

안에 계신 어르신들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 두 곳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안에 있을 어르신들 생각을 잠깐 한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다 오신 분들일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그러니 저 큰 건물에는 정말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겪고 느끼며 살아온 수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예전에 아빠가 아빠의 작은아버지, 그러니까 나에게 작은 할아버지께서 요양원에 계시다해서 한번 뵈러 서울에 다녀가셨다고 했다. 

몸이 많이 편찮으시고 치료와 돌봄이 필요하셔서 자제분들이 시설 좋은 요양원에 모신 것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젊을 때 고향인 강릉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잡으시고 자식들 키우며 오래도록 살아오신 분이셨다. 

강릉에서 조카가, 이제는 그도 칠십이 된 조카가 안부를 여쭈러 찾아왔을 때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잘 가늠하기가 어렵다. 

누군가가 찾아온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했던 한 시절이, 혹은 그 사람과 깊이 연관된, 내게도 깊은 인연을 지닌

어떤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닐까. 

할아버지에게는 조카가 아주 어리던, 형님이 아주 혈기왕성하던, 본인이 너무도 젊었던 

강릉에서의 청년시절로 잠시 데려간 만남은 아니었을까. 


요양원이 처음 생겼을 때 아이들과 고덕천을 산책하다 운동기구가 있는 벤치에 앉아 쉬노라면 

걸어가다 힘드신 할머님들이 옆에 앉아 잠시 쉬시면서 

요양원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시기를 

"저기 가면 끝이야, 끝. 나가 다니지도 못하고.. 들어가지 말고 살아야해" 하셨었다. 

그리 생각하시는구나,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들으며 생각했는데 

살뜰히 돌봤던, 힘들어 겨우겨우 꾸리며 살았던지 간에  

익숙한 자기 집을 떠나 낯선 공간에 적응한다는 것, 마음 대로 출입할 수 없다는 것, 정든 관계들과 단절된다는 것, 

편안하고 안전하다 해도 분명히 많이 힘들고 마음 아프실 것 같다. 

하지만 그 곳에도 여전히 삶은 있고, 어떤 마음들로, 어떤 인연들을 나누며 오늘을 보내고 계실까.

버스를 타고 지나며 한번씩 바라보게 된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17. 9. 2. 23:40





저녁 무렵, 구름이 참 멋졌다. 

하얗게,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꼭 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토록 슬픔이 많은, 고통이 많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며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놀이터에서 만난 어린 여자아이는 처음 보는 나를 향해 너무 친근하게 활짝 웃어주어서 마음속으로 조금 놀랐는데

조금 더 지켜보니 장애가 있는 것 같았다. 

아이 옆을 지키는 엄마의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엄마란 어느만큼 힘든 것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어둑해지는 아파트 길로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강하고도 슬퍼보여서 오래 바라보았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17. 9. 2. 23:36

#1. 


정류장. 죄인처럼 고개 숙인 사람들이 많다. 

스마트폰 보느라.. 죄도 없는데.

고개들고 앞을 보는 사람이고 싶다. 

근데 나도 전화기 꺼내서 사진찍었다. 

(햇볕이 넘 좋길래.. 노트꺼내 벽에 기대 세워놓고. ^^;)




#2.

정류장에서부터 다정히 노모를 챙기던 아들.

버스에 타서도 자리가 없자 어머니한테 "멀리 가지 마세요, 여기 잡으셔요." 한다. 

어머니는 "응. 곧 내리니까" 하신다. 

사위인가..? 너무 다정해. 그리고 존댓말을 쓰잖아. ^^




#3.

버스가 지하철 공사장 옆을 지난다. 불꽃 튀기며 큰 철관을 용접하신다. 

어제 아이들과 자전거타고 바로 이 길 옆 인도를 지날 떄

현장에서 일하다 퇴근하시는 것 같은 젊은 아저씨 한 분 곁을 지났는데 

손에 들고가는 작업모에 이름이 쓰여 있어서 눈길이 갔다. 

이름이 쓰여있는 모자. 

위험한 곳에서 일하다 위험한 일을 겪을 때 나를 알려줄 내 이름이 쓰인 모자. 마음이 아련해졌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근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에 안쓰러움과 안도감이 함께 들었었다. 

그 생각을 하며 오늘 아침, 군인들도 철모에 이름이 써있나.. 문득 궁금했다. 

더 열악한 곳에서는, 더 이름없이, 아무 안전장비없이 일하는 분들도 많지...ㅠㅠ

돼지 분뇨를 치우는 작업을 하다 숨진 이주노동자들처럼... 





#4. 

어린이집 등원하는 아이를 데리고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나처럼 볼살이 많이 빠졌다.

가느다란 몸매. 가끔 이런 엄마들을 본다.

어린 아기 키우느라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건 모두 비슷하겠지만 

체질 때문인지, 부실한 식사 때문인지, 어디가 아파서인지

살이 빠지고 마르는 사람들.

아이들 좀 크고 많이 쉬면 괜찮아질까. 살이 찔까. 

살이 빠져도 아파보이지 않으면... 힘이 있으면 괜찮지.

아이데리고 매일 버스로 등하원시키는게 쉬운 일이 아닐텐데.. 힘들겠다. 애쓴다. 

신도시 미사에는 지금 유치원도 부족하고, 입학을 해도 차량에 자리가 없어서, 또 학기중에 이사와 그전 동네 어린이집으로 직접 등하원하는 엄마들이 꽤 있는 것 같다. 

내가 엄마가 된 뒤로는 엄마들 모습이 눈에 자주 들어오는데, 

엄마들 참 예쁘다. 

정말로 아름답다. 

육체적 아름다움에 더해서 어떤 기품 같은 것이, 어머니가 된 여자에게서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나름 아픈 시간을 겪은 것, 힘든 수고를 해내고 있는 사람이 받은 선물 같은 것.

그런 아름다움이리라고 생각한다.






#5.

지하철 객차 안에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좋은 목소리로, 맨 앞 객차 맨 앞 문옆에 서셔서 여러 곡의 찬송가를 구슬프고 아름답게 부르셨다. 

기관사 아저씨의 자제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온 후에야 아주머니를 노래를 멈추시고 다음 역에서 내리셨다.

처음 든 생각은 저 분도 마음 속에 지금 피를 흘리고 계신가보다.. 하는 것이었다. 

마음안에 남에게 말하지못하는 슬픔이, 힘겨움이 있어서 저렇게 노래로 울고 계시는거 아닐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저 선교, 포교 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이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은 옛날에, 내가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이렇게 지하철을 타서

시민들께 유인물을 나눠드리면서 정치연설(?) 같은 것을 하는 지하철 선전활동을 꽤 자주, 많이 했는데

그때는 기관사 아저씨들이 한번도 방송을 안 하셨다는 것. 

지하철 노조 조합원이셨을까. 우리가 탔던 모든 지하철의 기관사 분들이 노조원인 것은 아니었다면

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반의 사회분위기리는 것은 

그 정도의 정치집회, 선전활동은 그럴 수 있다고 용인해주는 분위기였던걸까. 



왕십리역까지 오고가는 전철 안에서

연습장을 꺼내 가방위에 올려놓고 앉아서 글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후딱 가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갔을 단상이 

못그려서 민망하지만 내게는 큰 즐거움을 주는 내 그림과 함께 남았다.

옆자리에 앉았던 강릉 임계에서 올라왔다는 고등학생에게 반갑다고 말을 걸어(정동진에 가까운 임계에서 온 이 친구는 강릉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얘기가 나에게도 들려서;;) 잠시 이야기도 나눌 정도로 마음에 용기가 있었던 외출길이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