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류장. 죄인처럼 고개 숙인 사람들이 많다.
스마트폰 보느라.. 죄도 없는데.
고개들고 앞을 보는 사람이고 싶다.
근데 나도 전화기 꺼내서 사진찍었다.
(햇볕이 넘 좋길래.. 노트꺼내 벽에 기대 세워놓고. ^^;)
#2.
정류장에서부터 다정히 노모를 챙기던 아들.
버스에 타서도 자리가 없자 어머니한테 "멀리 가지 마세요, 여기 잡으셔요." 한다.
어머니는 "응. 곧 내리니까" 하신다.
사위인가..? 너무 다정해. 그리고 존댓말을 쓰잖아. ^^
#3.
버스가 지하철 공사장 옆을 지난다. 불꽃 튀기며 큰 철관을 용접하신다.
어제 아이들과 자전거타고 바로 이 길 옆 인도를 지날 떄
현장에서 일하다 퇴근하시는 것 같은 젊은 아저씨 한 분 곁을 지났는데
손에 들고가는 작업모에 이름이 쓰여 있어서 눈길이 갔다.
이름이 쓰여있는 모자.
위험한 곳에서 일하다 위험한 일을 겪을 때 나를 알려줄 내 이름이 쓰인 모자. 마음이 아련해졌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근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에 안쓰러움과 안도감이 함께 들었었다.
그 생각을 하며 오늘 아침, 군인들도 철모에 이름이 써있나.. 문득 궁금했다.
더 열악한 곳에서는, 더 이름없이, 아무 안전장비없이 일하는 분들도 많지...ㅠㅠ
돼지 분뇨를 치우는 작업을 하다 숨진 이주노동자들처럼...
#4.
어린이집 등원하는 아이를 데리고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나처럼 볼살이 많이 빠졌다.
가느다란 몸매. 가끔 이런 엄마들을 본다.
어린 아기 키우느라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건 모두 비슷하겠지만
체질 때문인지, 부실한 식사 때문인지, 어디가 아파서인지
살이 빠지고 마르는 사람들.
아이들 좀 크고 많이 쉬면 괜찮아질까. 살이 찔까.
살이 빠져도 아파보이지 않으면... 힘이 있으면 괜찮지.
아이데리고 매일 버스로 등하원시키는게 쉬운 일이 아닐텐데.. 힘들겠다. 애쓴다.
신도시 미사에는 지금 유치원도 부족하고, 입학을 해도 차량에 자리가 없어서, 또 학기중에 이사와 그전 동네 어린이집으로 직접 등하원하는 엄마들이 꽤 있는 것 같다.
내가 엄마가 된 뒤로는 엄마들 모습이 눈에 자주 들어오는데,
엄마들 참 예쁘다.
정말로 아름답다.
육체적 아름다움에 더해서 어떤 기품 같은 것이, 어머니가 된 여자에게서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나름 아픈 시간을 겪은 것, 힘든 수고를 해내고 있는 사람이 받은 선물 같은 것.
그런 아름다움이리라고 생각한다.
#5.
지하철 객차 안에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좋은 목소리로, 맨 앞 객차 맨 앞 문옆에 서셔서 여러 곡의 찬송가를 구슬프고 아름답게 부르셨다.
기관사 아저씨의 자제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온 후에야 아주머니를 노래를 멈추시고 다음 역에서 내리셨다.
처음 든 생각은 저 분도 마음 속에 지금 피를 흘리고 계신가보다.. 하는 것이었다.
마음안에 남에게 말하지못하는 슬픔이, 힘겨움이 있어서 저렇게 노래로 울고 계시는거 아닐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저 선교, 포교 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이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은 옛날에, 내가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이렇게 지하철을 타서
시민들께 유인물을 나눠드리면서 정치연설(?) 같은 것을 하는 지하철 선전활동을 꽤 자주, 많이 했는데
그때는 기관사 아저씨들이 한번도 방송을 안 하셨다는 것.
지하철 노조 조합원이셨을까. 우리가 탔던 모든 지하철의 기관사 분들이 노조원인 것은 아니었다면
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반의 사회분위기리는 것은
그 정도의 정치집회, 선전활동은 그럴 수 있다고 용인해주는 분위기였던걸까.
왕십리역까지 오고가는 전철 안에서
연습장을 꺼내 가방위에 올려놓고 앉아서 글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후딱 가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갔을 단상이
못그려서 민망하지만 내게는 큰 즐거움을 주는 내 그림과 함께 남았다.
옆자리에 앉았던 강릉 임계에서 올라왔다는 고등학생에게 반갑다고 말을 걸어(정동진에 가까운 임계에서 온 이 친구는 강릉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얘기가 나에게도 들려서;;) 잠시 이야기도 나눌 정도로 마음에 용기가 있었던 외출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