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야채가게가 새로 생겼다.
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운 상가쪽 모퉁이 자리다.
아직 비어있는 가게들이 많은 신도시의 신축건물들 사이에 드물게 새로 문을 여는 가게들.
코로나 시대에 문을 닫는 가게도 정말 많은데 새로 가게를 차리시기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그 마음이 짐작이 되어서 내가 들를만한 가게면 꼭 한두번은 가본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코로나 시대가 되고서는 더욱 큰 마트를 잘 안가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용하고 있는 한살림 생협에서 식재료 대부분과 어지간한 생필품은 모두 구입할 수 있고, 온라인주문을 하면 집으로 배송을 해주시기 때문에 밖에서 장볼 일이 거의 없다. 한살림에 없는 군것질거리들이나 생선, 육류 종류들이 좀 필요할 때 가끔씩 마트를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 긴 장마와 집중호우 피해들을 겪으면서 한살림 채소 수급에도 어려움이 커졌다.
한살림 생산지 농가들도 호우 피해를 많이 입으셨고, 또 코로나시대로 온라인 주문량이 많다보니 온라인 장보기에서는 내가 고른 야채들이 품절일 때가 많았다.
또 시중의 야채 수급에 어려움이 생겨서 야채값이 폭등하거나 할때 한살림은 연초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결정한 가격으로 가격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중보다 상대적으로 야채값이 싸다. 그래서 한살림 야채 소비가 평소보다 많아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상이 위험한 때문이니 공급되는 것들만이라도 받아서 감사하게 먹어야지..
가지, 감자, 고구마, 오이, 당근, 양파, 마늘 같이 우리 집에서 많이 먹는 야채는 다행히 한살림에서 잘 받았다.
그런데 호박과 대파, 쌈채소들은 품절이라 못받았다. 과일들도 아이들과 좀 더 먹고싶고 해서 동네에 새로 생긴 야채가게에 갔다.
키가 크고 털털한 인상에 목소리도 걸걸하신 주인 아주머니는 대파 한 단 달라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개업하신 직후쯤에도 아이들과 운동다녀오다가 한번 들러서 야채랑 과일 몇가지를 샀었는데 그 때 아주머니는 나와 아이들을 보며 "아고~ 아들이 셋이여? 너네 엄마 고생많겠다. 엄마 말씀 잘 들어야된다~! 나도 아들 둘 키우느라 진짜 힘들었는데.. 애기엄마 대단하네" 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한바탕 이야기를 하셨었다. 찌개에 넣어먹으라며 풋고추를 한 주먹 비닐봉지에 더 넣어주시며 "또 와요~!"하셨었다.
마스크를 꽁꽁 쓰고 다니고 벌써 한두주 전의 일이니 아주머니가 나를 기억하실 리는 없지만 나는 '또 오기'로 한 약속을 나름 지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냉장고에 든 야채를 보니 길쭉이 애호박 하나에 3500원이란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아이고..
그 옆에 동그란 애호박이 있어 "이건 얼마예요?" 하고 물으니 아주머니 대답.
"2000원이야"
"이건 좀 낫네요"
"응. 그래야지. 뭐 하나라도 싼게 있어야지~"
우리는 같이 웃었다. 그래.. 뭐 하나라도 싼게 있어야지. 그래야 선뜻 손이 가고, 집에 식탁에 반찬 한가지라도 좀 넉넉하게 올리지..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걸걸하게 쉰 목소리에는 눈물같은 땀기운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손님이 도대체 얼마나 왔을까.
이 가게 문을 열고난 후에.. 코로나로 안그래도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고, 야채값은 비싸고, 날은 뜨겁고, 과일은 자꾸 시들어가고...
아주머니는 포도를 사고싶어하는 나에게 "밖에 놔두니까 포도가 너무 빨리 말라. 이게 상한건 아니고 마른건데 그래도 씻으면 먹을만하고, 잼같은거 만들어 먹어도 좋을 것 같아 버리지 않고 놔뒀어. 5000원에 다 줄테니까 가져 갈라우?"
하고 물으셨다. 빨간 광주리 두 개에 가득 담긴 포도가 6송이는 넘어 보였다. 좀 오래돼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집 애들은 포도를 좋아하니까 씻어주면 하루이틀 안에 다 먹을 것 같았다.
버릴 수 없는 마음.. 알 수 있다. 살림하는 나도 그렇다. 잘 못 버린다. 먹을 수 있는건데... 그래서 5천원에 포도 두 바구니를 샀다. 아주머니는 박스에 있는 괜찮은 포도 한송이도 얼른 더 넣어주셨다.
바나나와 오이도 사고 둥근 애호박도 넉넉하게 두 개 사서 검은 봉지를 자전거 양쪽에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왔다.
애호박은 볶아서 반찬도 하기 좋고, 된장찌개나 국에 넣어 먹어도 좋고, 볶음밥이나 카레에도 넣어 먹어서 쓰임새가 많다.
한살림 애호박은 이번 주에도 품절이다.
다음 주에는 아주머니네 야채가게에 다시 호박을 사러 가야겠구나...
아들 둘을 키우느라 고생하셨던 아주머니가 신도시에 새롭게 차린 번듯한 자기 가게가 오래오래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라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뭐 하나라도 싼게 있어야지~' 같은 웃픈 이야기에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가 또 온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쉽지 않겠지만 부디 곱게 잘 지나가다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