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2011. 11. 28. 23:32




 


비오는 토요일, 낮12시가 돼도 남편은 안 일어난다.
시계를 쳐다보다가 마음을 정했다.
"우리 먼저 먹자.. 아빠건 남겨놓고."

언제까지 자는지 한번 놔둬볼 참이었다. 
비도 오고 마침 맛있는 국수도 생겼고 밤새워 술마신 사람에게도 뜨끈한 국물 먹이면 좋을 것 같아 
점심메뉴는 국수로 정했는데 남편은 점심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아이와 아침 일찍부터 복닥거린 나는 배가 딱 고팠다. 
부엌쪽으로 막 일어나 가려는데 안방에서 부시시한 얼굴로 남편이 걸어나왔다.
"몇 시나 됐어? 뭐야, 벌써 12시가 넘었네...?"
 
국수삶을 물을 가스렌지에 올렸다.
아이들과 아침먹으면서 미리 끓여두었던 멸치다시국물 냄비에도 불을 켰다.  
화르르...
불꽃이 일고 조금 있으니 물이 부글부글 끓는다.

문득 '사는 일이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울 때 뜨거운 국수 한그릇 내어놓는 일.
일주일 내내 기다리던 아빠가 드디어 일어난 것이 너무너무 반가운 연수가 아빠 등에 매달리고
미안하니까 괜시리 어제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나눈 얘기를 궁금하지도 않은 나에게 큰 소리로 얘기하던 남편이
별대꾸없는 내 대신 아빠랑 눈맞추며 웃는 연호를 향해 고맙다는듯 벙글 웃는 한낮.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이 국수거품처럼 화르르 끓어오르는 곳에 찬물 한바가지를 붓는다.
그리고 궁금했다.
뜨거운 국수 한 젓갈을 후후 불어 입에 넣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안의 여러 감정들을 다시 목구멍 속으로 삼켜 넣었을까.
시장통 국수집에 앉아 하얗게 김이 오르는 국수 한그릇을 들이키는 사람들..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깃들어있을까.










얼마전에 실버스푼에서 '태양에 말린 황룡시장표 국수'를 보내주셨다.
밤늦게 도착한 택배박스를 열자 푸른빛이 한가득 쏟아졌다.
'하늘과 계란'농장에서 키운 노지 브로콜리 네 개, 실버스푼 주인장의 아버님께서 지리산 골짜기에서 손수 키우신 커다랗고 커다란 양배추 한통..
아이들은 다 잠들고, 남편은 아직 퇴근하지않은 늦은 밤.
나는 현관에 앉아 그 푸르고 생기어린 것들을 쳐다보며 크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시골에 친척이 살면 이런 기분일까.
남도의 땅기운과 바람기운을 잔뜩 받고 자란 먹거리들에 둘러싸여 나는 코끝이 찡할만큼 행복해졌다.

박스 제일 아래, 비닐포장까지 든든하게 여러겹 싼 그 속에 꼼꼼하게 풀을 붙인 빳빳한 종이봉투에 담긴 국수가 있었다.
이번엔 남도의 태양이구나.
잘 마른 굵은 국수가닥에서는 햇빛 냄새가 나는 듯했다.









함께 온 홍보물에서 제일 내 눈을 끈 것은 밀가루가 뽀얗게 앉은 하얀 팔뚝과 그 아래 붉은 손.
40년간 국수를 만들어온 손. 저 팔뚝에 감겼던 국수타래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손으로 직접 반죽을 하고, 기계에서 길게 뽑아져 나오는 국수가닥들을 직접 걸고 자르고 햇빛과 바람에 말려 포장하는 일까지 모두 사람의 손으로 해내는 재래시장의 국수.
멀리 전남 장성 황룡시장에서만 만드는 이 국수를 서울 강일동 끝자락의 내 집 부엌에 서서 편히 받아 끓여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신기하기만 하다.









끓이면서 익었나 보려고 한 가닥 건져먹어보았다.

맛있다...!

한가닥 또 건져먹고 또 건져먹었다.
국수 삶으면서 다 익기도 전에 이렇게 많이 건져먹어보긴 처음이다.
짭쪼롬하고 쫄깃한 맛.
이런게 손맛이구나... 싶다.









다 삶아진 면을 찬물에 헹궈서 그릇에 담고 생면 좋아하는 연수를 불러 한가닥 먹여주었다.

'엄마, 맛있어!'

맛있는거 알아보는데는 연수만한 녀석이 없다.

'그전에 먹던 국수보다 이게 더 맛있어!'

^^
그래. 엄마도 같은 생각이야.
연수는 국물을 넣지 않은 찬 면부터 한접시 뚝딱 해치웠다.









황룡시장표 국수 포장지에는 밀가루의 원산지 표시가 되어있다. '호주산, 미국산'
아쉬웠다.
이렇게 맛있는 국수가 우리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수입밀보다 우리밀이 더 맛있고 건강에 좋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자급률 1%에 도달한 우리밀. 수입밀보다 훨씬 비싼 우리밀로 재료를 바꿀 수 있는 여력이
안그래도 어려운 재래시장 국수공장에 과연 있을까..
말하면서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전국에서 찾는 맛, 남도에서 국수 좀 먹는다는 사람들만 찾는다는 황룡시장 국수가
우리밀국수로 변화한다면 황룡시장 국수에게도, 우리밀 농업에도 서로를 살리는 정말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쫄깃쫄깃 부드러운 황룡시장표 국수가 한 봉지 남았다.
이번 주말에 강릉내려갈 때 들고가서 국수 좋아하시는 친정엄마아부지께 한그릇 끓여드려야지.


+ 옛날방식. 태양건조 황룡시장표 국수를 구입하고 싶은 분들은 '010-9697-5420'으로 연락하시면 된다.
실버스푼에서도 가끔 판매하는데 회원들께는 그때그때 문자로 알린다.
(황룡시장 국수 '3일간' 팝니다..하고. 연락왔을때 바로 사는게좋다, 3일은 금방 가므로 어물쩡하다가는 놓치고말리~^^;)
 


 

 







 ++ 명이 이모와 미페이 삼촌께


양배추 잎사귀가 정말 컸어요. 연수가 '우산이다~!'하면서 집안에서 쓰고 뛰어다녔지요.
겉잎 두 세장을 떼고보니 속잎에 고치 하나가 매달려있었어요.
어느 나비 애벌레의 고치일 것 같았지요.
연수불러 구경시켜주고, 더이상 잎을 뜯지 못하고 겉잎 다시 덮어 한동안 부엌 베란다에 놔두었습니다.
연수는 매일 한번씩 고치가 어찌됐나 보자고 했지요.
'엄마, 오늘쯤엔 나비가 됐을 것 같은데?' 하면서요.

연호 이유식 국물내려고 양배추 잎을 조금 더 뜯었습니다.
고치붙은 잎사귀는 다른 겉잎들과 함께 잘 포개서 따로 종이상자에 담아 베란다에 두었고요.
어찌해야할지 고민이랍니다. 어떻게든 고치가 나비로 커서 날아가도록 해주고 싶은데 말예요.
공기나쁜 서울에서 제 고향 지리산을 그리워할게 안쓰럽기도 하지만
우리집까지 온 생명인데 슥 버리게 잘 안되더라구요.
연수가 매일 잘 들여다보고 있으니 연수랑 의논해서 좋은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브로콜리도 너무 맛있었어요.
다른 야채들이랑 같이 들기름넣고 살짝 볶아서 야채볶음 한것도 잘 먹고, 케챱넣고 만든 브로콜리햄케찹볶음밥도 연수가 참 잘 먹었어요. 고소하기도 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일반 브로콜리하고는 다른 노지 브로콜리만의 생생한 맛인 듯해 좋은 먹거리 맛보게 해준 두 분께 고마운 마음이 그득했답니다. 하늘과 계란 농장은 무엇이든 참 건강하게 키워내시는군요. 양배추랑 같이 연호 이유식에도 잘 넣어 먹일께요. 

고마워요.
앞에도 썼듯이 늦은 밤. 하루의 고단함을 잊을만큼 신나게 웃었어요.
꺼내도 꺼내도 자꾸 나오는 푸른 것들 앞에서 시들어가던 마음도 일순간 푸르게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고마워요.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