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지냈던 지난 일주일 동안
강릉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아이들은 정말 잘 뛰어놀았고 나도 참 잘 쉬었다.
외가집 마당에 펼쳐놓은 물놀이장을 몇번씩 들락거린 더운 날도 있었고,
아빠와 함께 경포바다에 가서 올여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해수욕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다니고, 할머니와 함께 밭에 배추모종과 무씨도 심었다.
경포 호수가를 신나게 뛰어보고, 소나무숲속 까페에도 여러번 다녀왔다.
일주일 사이에 아이들이 모두 물씬 큰 것같다.
우리는 오늘 서울로 돌아왔다.
고단했던지 아이들 모두 일찍 잠들었고, 연호는 자다깨서 좀 울기도 했다.
강릉 사진들을 블로그에 정리했다. 이번주에는 그 얘기를 하나씩 써야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아버지 곁에서 차를 마시고, 고향집 마당과 논길을 오고가는 동안
조금씩 힘이 충전되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날 만에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상처만 남은 것 같은 여름이지만 그 여름 사이에도 우리는 자랐으리라.
상처가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이 무엇인지 차분히 짚어보는 가을을 살아야겠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집은 서울시에서 임대하는 장기전세아파트다.
이 집에 들어온지 이제 꼭 2년반이 되었다.
둘째 연호를 임신하고 있을때 신혼부부특별청약으로 신청해서 당첨이 되었고, 완공되고 바로 이사와 얼마후에 연호를 낳았으니 이 집은 연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처음 입주할 때는 아직 공사중이었던 냇가가 이제는 많이 다듬어졌다.
진짜 하천은 바로 옆 자전거도로 밑에 파묻힌 시멘트관속으로 흐르고, 이 냇물은 조경을 위해 흘려보내는 수도물과 아파트 단지안에서 나오는 빗물들이 모여 흐르는 것이라 깨끗하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 힘든 애매한 가짜냇물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 냇가를 참 좋아한다.
봄가을로는 냇물에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겨울에는 얼음 구경하고 눈썰매타며 놀 수 있어 참 좋다.
그리고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발도 담그고 심지어 몸도 담근다. ^^;;
시골에서도 이제는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드물텐데, 발만 담가도 금새 흙탕물이 되고마는 먼지 많고, 뭔가 찜찜한 냇물에 어린 아이들이 첨벙거리도록 놔두는 엄마를
지나가는 어른들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처음에는 나도 애들을 말리는 시늉을 좀 했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나한테, 우리한테 중요한게 뭘까.. 하고.
냇물이 더럽다면 집에 가서 깨끗하게 씻으면 된다. 길어봐야 30분쯤, 어쩌다 하루 이 물에서 첨벙거렸다고 아이들이 잘못되지는 않을거다.
물론 수질검사를 해서 아주 깨끗하다고 판정이라도 받으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지만
사람사는 집 가까이에 보기 좋으라고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냇물인데 뭐 그렇게까지 절대 몸에 묻히면 안되는 물이기야하랴..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중요한건
이 작은 냇물이 내게 정말 큰 위안을 준다는 것이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있기만 해도 나는 답답했던 마음이 한순간 어디 산속의 계곡물 곁에 와있는듯 청량해지곤 했다.
냇가 양 옆으로 우거진 풀밭에는 여름 풀벌레소리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그 물 속에서 웃는 모습은 또 얼마나 보기만해도 시원한가.
그래서 나는 괜히 주눅든 사람처럼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되도록 남들은 안 쳐다보고, 예쁜 아이들 모습만 쳐다보기로 했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고 아이들과 함께 물위를 헤엄치는 소금쟁이들과, 수면 가까이 날아다니는 잠자리들 그리고 연수가 찾아주는 고동들을 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순간에 연제는 대개 유모차에서 자거나 내 등에 업혀서 잠들어있곤 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아직도 더운 오후에 아이들은 한번씩 냇가에서 옷을 적시고 놀다가 '이제 춥겠다, 집에 가자'하면 맨발로 긴 나무 계단을 걸어올라와 벤치와 작은 산책로를 지나 106동 우리집 현관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이 냇물 때문에 나는 우리 아파트가 좋다.
아니, 이 냇물과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푸른 소나무 한그루 때문에 나는 우리집을 견디며 산다고 해야 맞다.
살수록 나는 아파트가 싫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아파트에 살고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더 아파트에 살 계획을 세우고 있는건 순전히 좋은 대안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아보고, 남편도 나도 어려운 상황들을 좀 감내할 결심을 해야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텐데 지금까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우선은 이 집에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다행히 냇물이 있으니 여기서 자주 놀면서 아이들은 가공된 자연이라해도 흐르는 물의 느낌을 조금은 알고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냇가옆 길을 걸으면서 양쪽으로 높이 솟은 아파트 풍경이 참 삭막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풍경도 예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프랑스 삽화가인 장 자끄 상페가 그린 건물들 그림이 생각나면서 그런 느낌으로 이 냇가와 양쪽으로 서있는 아파트들을 그려보면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제가 조금 더 크면.. 아이들과 같이 이 길에 앉아서 연필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두 아이 데리고, 그리고 지금은 세 아이 데리고 거의 매일 이 길을 오고가면서 고단하고 힘들던 순간 마다 바라보면 늘 위로가 되었던 하늘, 먼 산..
그리고 우리의 작은 집이 끼여있었던 빽빽한 아파트 건물과 함께 놀던 냇가를 그려봐야지.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 그리는걸 참 좋아한다.
많이 큰 아이들과 스케치북을 들고 이 길에 나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이번 여름에 집고민을 좀 많이 할 일이 있어서 집중적으로 하다보니 아파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더운 여름밤, 사람들이 잔뜩 쏟아져나와있는 아파트 마당 한켠에 앉아있다가 문득
나만의 마당이 없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달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공간, 집 안 말고 잠시 바깥바람을 쐬며 조용히 좀 서성이고 싶을 때 편안하게 현관문열고 나갈 수 있는 마당, 내 의자, 내 뜨락...
도시의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조용한 성찰의 공간이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는 큰 마당과 벤치들이 많지만 그 어느 곳도 오롯한 나만의 공간은 아니며 늘 타인들과 같이 점유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불밝힌 아파트 집집에서 내려다보는, 혹은 주위를 오고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공간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조용한 자기만의 시간, 공간이 필요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나에게 집중해볼 수 있는 시공간이.
도시는 여간해서는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작은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하철이나 버스같은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끼고싶을 때, 잠시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을때
그럴때 스마트폰은 몸은 아직 거기 있지만, 정신만큼은 훌쩍 그 장소와 사람들 속을 벗어나 스마트폰안의 내 세상으로 탈출하게 해주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그토록 현대인에게 절실해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용히 내 집 마당에 앉아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들의 삶은 훨씬 차분해지고 생의 깊은 의미를 찾으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작은 마당이라도 뜨락이 있고 수돗가가 있고 내 하늘이 있는 마당 생각이 참 간절해지던 밤이었다.
아파트는 어쩔 수 없이 획일적인 생활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하는 행동,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모두 유심히 보고,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어른들도 비슷하다. 공동주택은 비슷한 삶의 사이클, 비슷한 삶의 양식 속에서 저도 모르게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거기서 조금 벗어나려고하면 나도 모르게 이질적인 존재가 될 것 같은 불안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너무 밀집해있고 너무 거리들이 가까우니까 영향력도 크다.
다 똑같이 사는게 좋은 것도 아니며, 나와 다른 삶을 포용할 때 뭔가 배우고 새롭게 자랄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가 될 것 같은 외로움과 불안감을 곧잘 느끼는 나로서는
아파트의 가깝고도 무책임한 관계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아파트의 또 한가지 안타까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요즘 신축아파트들은 조경을 잘 한다. 키 큰 소나무들도 많이 옮겨다 심어놓고, 정자며 인공연못 같은 공간도 많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의 키 큰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왠지 안쓰럽고 미안하다.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도 바로 옆에 서있는 높다란 아파트 건물에 비해보면 너무 작다.
소나무를 압도하는 아파트 건물들 때문에 소나무는 몹시 왜소하고 위축되어 보인다.
사람이 그 밑에 서서 올려다보면 나무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외스러운 생명체다.
모든 생명과 자연이 그렇지..
그래서 주위 자연과 어울리는 건축이 아쉽다.
자연에 무심한 구조물 속에 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무지하게, 무감해지게 되는 우리들이 안타깝다.
아파트와 집 생각을 자꾸 하다보니 몇가지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우선, 아파트 1층집들에게는 마당을 주면 어떨까.
저마다의 조그만 마당을. 신축아파트 1층 어린이집들이 그렇게 하듯이 베란다 난간 한끝을 여닫이로 해서 나무계단 같은 것을 놓고 마당으로 바로 내려설 수 있게 하면 아파트 1층집들은 조그만 자기 마당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단점(?)이 있다하여 분양가도 제일로 싼 1층인데
자기 마당을 준다하면 안그래도 아이들이 많아 층간소음 걱정으로 어디 아파트1층없나.. 찾게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꼭 들어가고 싶은 아파트가 될텐데...ㅎㅎ
작은 마당이지만 내가 꽃도 가꾸고 오고가는 이웃들에게 좋은 구경(?)도 시켜주고, 여름에는 물놀이 풀장도 하나 내놓고 오고가는 아파트 이웃아이들도 와서 같이 놀고가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
그래도 프라이버시가 걱정되면 나무 울타리 같은걸 할 수도 있고..
두번째는 아파트 정원에 과실수를 많이 심는 것이다.
철따라 여러 과일이 달리는 과실수를 심어서 아파트 아이들에게 어떤 나무에 어떤 열매가 어느 철에 열리는지 알게 해주는 거다.
우리 아파트에는 매실과 모과가 달려서 연수와 나는 봄, 여름으로 그 열매들을 열심히 찾으며 지낸다.
앵두도 있고, 살구도 있고, 사과 복숭아 감 대추 배 밤나무들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 나무들에는 팻말이 잘 달려있기도 한데, 아예 처음부터 자연학습장처럼 여기저기 다양한 나무들을 심어놓고, 아파트 나무 지도같은걸 만들어서
아파트안에 있는 어린이집들에 팜플렛이나 책으로 나눠주면 아이들이랑 선생님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나무 구경하고 열매구경하고 꽃보고 풀보고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재밌고 알찬 자연공부, 자연놀이가 되지 않을까.
나는 우리 아이들과 그러고 시간을 잘 보내는데 자연의 놀이감들과 함께 놀다보면 정말 시간도 잘 가고 아이들도 재미있어한다.
아파트가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그들의 고향집이 되어가고 있는 도시에서
아파트 공간을 그렇게 자연과 조금 더 가까운, 우리 곁의 자연을 알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어른들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 더,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참 많이 오가고 전기도 꽤 많이 들것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한강과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고 그래서 건물들 안에 '필로티'라고 부르는 빈 공간이 꽤 있다.
바람이 지나갈 수있게, 건물이 위험해지지 않게 비워놓는 뻥 뚤린 공간인데
그만큼 바람이 센 곳이니까 작은 풍력발전기들을 좀 놓을 수는 없을까?
태양열을 이용해서 온수를 공급하거나, 세대마다 뭔가 대안적인 에너지생성 시설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우선 공동공간인 가로등 불빛이나 엘리베이터 전력이라도 바람이나 태양에너지 같은 것으로 공급할 순 없을까?
아파트는 워낙 큰 건축물이므로 그런 대안적인 시설도 하려고하면 개인집에 설치하는 것보다 더 규모있게 할 수 있진 않을까?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조금씩 현실에서 더 구현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더 대체에너지나 기후변화 같은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관련된 여러 일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배우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내 아이들도 모두 아파트가 나고 자란 고향집인 아이들이 되었다.
나중에 자라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게 되든 유년의 첫 집과 그 마을의 느낌은 오래도록 아이들 마음에 남을 것이다.
답답하고 어렵지만.. 아이들과 힘껏 행복해지려고, 마음 기댈 곳 찾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야겠다.
내 생각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우리집을 포근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곳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아파트에 살면서도 아이들이 조금더 자연의 품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하며 지내고싶다.
아이들의 특정 행동에 내가 확 폭발할 때가 있다.
동생을 때리거나 아프게 할 때.. 소리를 빽 지르며 큰 애를 때리거나 현관문 밖으로 쫓아낸다..
나중에 후회할만큼, 아니 화를 내는 그 순간에 이미 후회하고 있으면서도 멈춰지지가 않는다.
엄마의 분노지수가 너무 높다는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두렵고 무섭게 하는지 우리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알겠다.
오늘은 제가 동생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팔꿈치로 눈을 쿡쿡 찍어가며 때리는 엄마를 연수가 정말 말간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 '아... 내가 뭐하는거지...' 싶었다.
연호가 태어난 뒤로 연수에게 내가 진심으로 분노를 느끼는 떄는 주로 연수가 연호를 때리거나 아프게 할 떄였다.
막 세돌이 지났던 네 살무렵부터 연수는 동생을 때리는 순간 엄마로부터 모질게 얻어맞거나 안방 문밖으로 쫓겨났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패턴은 늘 동일하게 반복됐다.
하지 말라고, 안된다고 해도 끝내 아이들은 고집을 부려 기어코 동생을 때리거나 깔아뭉개려할 때가 있었고, 어른인데도 나는 늘 번번히 같은 상황에서 심리적 극한을 느끼며 폭발하고, 아이를 때리거나 쫓아내고, 울고불고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공포심에 오들오들 떠는 아이를 다시 집안에 들여놓으며 남은 분노와 후회와 가책이 뒤범벅이 되어 넝마처럼 되어버린 정신으로 멍해질 떄가..
그럴 때가 있다.
소위 '눈이 확 뒤집히는' 이런 떄가 일관되게 있다는 건 분명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일거다.
병원에 가보거나 상담을 받아봐야할까..
연호는 아직 엄마에게 맞아보지는 않았다.
차마 이제 두돌 막 지난 어린 아이를 때릴 정도로 내가 이상해지지는 않았다.
대신 근래 들어 두 번쯤 현관문 밖으로 쫓아냈다.
잠겨진 문 밖에서 연호는 많이 울었고, 공포의 메세지가 어린 마음에 아주 분명하게 각인된 듯 연제를 아프게 하는 장난은 치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하다가도 엄마가 '또 쫓겨난다'고만 말해도 움찔하며 '아니 할꺼야. 연호 아니 쫓겨날꺼야..'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가여우면서도 다행스럽다. 내가 다시 폭발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연수는 그렇지 않다.
연호만큼, 아니 어쩌면 연호 이상으로 공포는 느끼면서도 연수는 이미 분노 조절을 잘 못하는 엄마를 닮아버린 것 같다.
연호에게 뭔가 화가 나면 기어코 때려서 응징을 하려고 한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라고 말하고 도대체 내 큰아이가 왜 그럴까.. 고민하지만 이런 밤에 생각해보면 엄마인 내가 저에게 보여준 그 분노의 기운을 고스란히 동생에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오싹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맞는게 아주 싫었다.
누가 죽도록 나를 때린 것도 아닌데, 한두대 가끔 맞는 것도 그렇게 싫었다.
두살 위인 오빠가 나를 아프게 떄리는 것도 싫었고,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때리는 것도 공포스러웠다.
엄마에게 맞은 회초리는 그래도 그렇게 무서운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은데, 제일 싫었던 것은 오빠한테 맞을 때였던 것 같다.
청소년기가 되기 전의 남자아이들에게는 뭔가 이성으로 제어되지 않는, 순화되지 않는 폭력성이 있는 것 같다고 나는 그 무렵의 내 오빠와 지금 어린 연수를 보며 생각한다.
연수가 연호를 때리는 데는 정말로 아프게, 저보다 약한 존재를 짓밟아보려고 하는 잔인한 기운이 있다.
여섯살밖에 안된 아이를 두고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 싶기도 하겠지만 인간에게는 여러 심성이 공존하고 어린 인간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어리기에 더 곱고 순수하고 여린 심성도 있지만 자기 방어, 혹은 경쟁의 측면에서 승부욕이 들거나 뭔가 마음의 분노를 느끼면 더 폭력적이 되는 것도 어린아이인 것 같다.
맞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아프고 그래서 무섭고 싫은 것이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드는 모욕감과 수치심도 참 싫었다.
대학시절에 집회현장에서 보았던 공권력의 폭력은 죽을 것 같은 심리적 공포를 경험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싫었다. 어릴때부터 그랬다. 억눌리는 것이 싫었고, 공포를 조장하는 것, 그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하는 것이 싫었다. 집안이나, 교실이나 그 순간들이 참 싫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가끔 아이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야멸차게 모욕을 주고, 저희들이 행한 폭력보다 몇배는 더 센 힘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증오하는데 되풀이한다.
지금 내가 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잘못들은 분명히 내가 과거에 아주 싫어하던 바로 그 것들이다.
한 선배언니는 어릴때 엄마가 발가벗겨서 문 밖에 쫓아냈던 기억을 얘기했었다.
'우리 엄마 정말 너무 하지 않았냐, 어린 딸을 (아마도 추운 날) 발가벗겨 집 앞에 세워놓다니...' 정말 너무 했다. 나도 우리 엄마에게 섭섭하고 슬펐던 내 어떤 기억을 언니에게 얘기했다. 뭐였을까, 숟가락 놓다가 상에 떨어뜨릴 때마다 폭풍처럼 야단쳤던거? 어린 마음에 일을 도우려고 그랬던 건데 엄마는 내게 '너는 왜 맨날 그러냐'며 야단쳤었지..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야단 절대 안 치고 싶었는데 어느새 연수는 약간 그런 기미가 보인다. 엄마한테 맨날 같은 야단맞기...
무튼 지금은 그 언니 엄마의 심정이 이해될 것 같다.
언니 엄마도 아마 나처럼 어떤 심리적 극한에 내몰렸을지 모른다. 아마 그럴거다..
한 후배는 엄마의 우울증 얘기를 해주었었다.
'어릴 때였는데.. 엄마가 갑자기 막 울면서 나랑 내 동생한테 밥그릇이랑 숟가락젓가락을 줬어. 이거 가지고 옆집 아줌마한테 가서 밥 달라고 하라고... 그러면서 엄마가 우리를 막 떠미니까 우리도 엉엉 울면서 옆집 아줌마한테 가서 엄마가 시킨 대로 말했지. 그랬더니 아줌마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우리를 데리고 다시 우리집에 왔는데 엄마가 약(수면제?)을 삼키려고 하고있었어..'
그 후배의 결혼식날, 나는 후배의 어머니 얼굴을 잘 보고 싶었다.
젊은 엄마이자 아내로 살던 날에 어떤 괴로움이 엄마를 그렇게 몰고 갔을까..
어머니는 다행히 건강하게 지금까지 잘 계시고, 후배도 잘 지내지만 어린날, 동생과 밥그릇을 손에 들고 울면서 아파트 복도를 뛰어가던 날의 기억은 아마 오래도록 후배의 마음에 남아있으리라. 후배가 혹시 엄마가 된다면 그 기억의 의미가 그전과는 또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
연수도 나중에 커서 어린 저에게 분노하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할까.
연수는 내 성장과정에서 내가 저항하고 응징하고 싶었던 그 폭력의 주체들이 아니다.
아이들의 폭력에 분노하면서, 나는 실은 어린 시절에 내가 하지 못했던, 혹은 내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을,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잘 있다가, 밥 먹여주고 그림책 잘 읽어주다가 갑자기 폭발해서 '너 자꾸 그럴래!'하며 연수를 때리는 그 순간에,
내가 도를 넘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것은
내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처가 있고, 그토록 두렵고 싫은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실은 아직 나부터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여섯살, 세 살 아기들한테 낼 화가 아닌데
나는 지금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고 살고있는 것 같다.
상처없이 자랄 수는 없다해도
어른이 된 뒤에는 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
제발.
밤에도 무더운 열대야가 시작되었다.
오늘 낮에는 어찌나 더운지 아이들이 모두 낮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덕분에 세 녀석 모두 8시 무렵에 기진맥진해 곯아떨어졌다.
제일 늦게 잠든 연수가 나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잠든게 8시 반.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놓고 조금이라도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와주기를 바라고 있는터라
아이들이 깰까봐 조용조용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는데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오늘따라 연수가 무슨 마트놀이를 한다고 연호랑 둘이 장난감을 있는대로 거실에 늘어놓아서 혼자 왔다갔다하며 치우는데 30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ㅠ
그래도 둘이 그러고 신나게 노는 사이에 잠시 나는 연제 젖먹이며 집에 오는 시사주간지를 훑어보는 여유도 누리긴 했다.
연제 젖먹여 재우며 책을 읽으니 잠깐 더위도 잊혀지고 그 사이 해도 많이 떨어져서 그 뒤엔 아이들과 과일 좀 챙겨먹고 놀이터에 다녀오기도 했다.
휴.... 덥다.
에어컨 좀 틀면 시원할텐데 괜히 애들 고생시킨다 싶기도 하지만 더위도 겪어보고, 추위도 좀 겪으면서 자라고 여물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엄마 때문에 울 꼬맹이들 땀 깨나 흘린다.
연수가 엊그제부터 기침을 좀 콜록하고 연호도 이따금 기침을 해서 사실 에어컨을 틀기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왜 선풍기도 끄고 나야 밖에서 불어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제야 느껴지는 것 같을까.
고요하고 덥고.. 그럴 때 불어오는 가느다란 한 줄기 바람의 시원함. 그 맛이 좋다.
그동안은 덥다해도 긴 장마 속이라 비오면 좀 시원해지고, 밤으로는 또 서늘해서 문 열고 자다가 한밤중에 추워 닫고 자곤 했다.
아직도 비는 더 올 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8월 15일께까지,
절기로는 입추가 들어있지만 그래도 한 보름은 넘게 이제 불볕더위의 날들일 것이다.
이 날들을 우리는 꼬박 서울에서, 세 아이와 꼭 붙어서 살아내야 한다. 왠지 비장한 결의가 선다.ㅜ
그 뒤엔 강릉에 갈 거니까.. 그러니까 그 일주일간의 휴가 전까지.. 잘 버텨야지.
강릉에서 돌아올 때쯤, 처서쯤 가면 열대야는 끝날까.. 절기는 참 신기하게도 잘 맞지만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의 시대에는 그마저도 흔들릴까봐 두렵다.
오늘 저녁에는 입맛없는 애들에게 맛있는 것도 해줄겸, 주말에 먹었던 크림스파게티 재료들의 유통기한이 낼까지인 것도 생각나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놀이터에서 뜨거워진 애들을 욕조에 물받아 집어넣어놓고
연제 업은 채로 야채썰고 면삶고 볶고 지지고.. 하는데 날은 덥고 연제는 울고..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중간에 애들 씻겨 내놓았더니 배고프다고 빨리 달라고 아우성이고, 젖먹여 눕혀놓은 연제는 빨딱 뒤집고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힘들다고 앙앙 울고...
그 와중에도 스파게티 소스를 휘저으며 이게 참 뭐하는 짓인고... 싶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폭발 일보직전에서 몇 번 참고 위기의 순간들을 그럭저럭 넘겨서
평화롭게..... 평화롭게... 세 녀석 데리고 앉아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식빵 찍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정신없이 만들었어도 맛은 아주 좋았다.
애들도 잘 먹고, 나도 잘 먹고.. 연제도 수유쿠션에 누워 '오늘 젖은 크림맛이네~~'하며 먹었을 것이다. ㅎㅎ
어찌어찌 울며 구르며 지나가는 이 여름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어린 것들은 한번이라도 더 엄마 살에 제 살을 붙여보려고 다투어 매달리고
어제는 하루동안 흘린 땀을 씻지 못하고 잔 덕분에 머리속에 땀띠가 돋았다.
오늘도 오후부터 쌓인 설겆이거리가 개수대에 가득하다못해 넘치고 있지만
더워서 문도 못 닫는데 설겆이 소리에 애들 깰까봐, 애들깨면 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게 야근하는 남편이라도 돌아오고 나면 그때 설겆이도 하고 시원하게 목욕도 해야지...
하는 핑계를 대고 이렇게 블로그를 쓰고 있다.
글 쓰는 것도 덥다... ㅜ
연호가 연제만 했던 시절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잘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지금 이 날들도 금방 지나가고, 금방 잊혀질 것이다.
연호 태어나 5개월 무렵은 겨울이었을텐데 그 겨울을 우리가 어찌 보냈더라.. 궁금하고 그립다.
그런 것이다. 연제와 함께 보내는 이 뜨거운 첫 날들도 그렇게 그리워질 것이다.
그래서 적어놓는다. 아이들하고 나하고 남편하고 이렇게 살았다고.. 나중에 알 수 있게.
5개월을 꼭 채운 연제는 정말 예쁘다. 젖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되뒤집기를 해보려다 뱅글뱅글 도는 모습도 얼마나 기특하고 귀여운지 모른다.
26개월 연호도 너무 예쁜 시절이고, 너무 화만 내고 야단만 자꾸 치게돼서 미안하면서도 보고있으면 성질나는 장난꾸러기 연수도 아직은 어리고 귀여운 여섯살이다.
더운 여름, 집에서 지지고 볶는 평일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고,
어느 주말 하루는 아이들이 고대하던 물놀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튜브도 장만하고, 그늘막용 작은 텐트까지 하나 장만해서 엄마는 그 안에서 연제 젖도 먹이고
강바람 맞으며 우리 가족의 첫 텐트 안에 누워 하늘에 구름을 바라보던 행복한 시간도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툴툴대지 말고 살아야지.. 성질나더라도 참고..ㅠ
우리들의 여름이 이렇게 가고 있다.
고우니 미우니 해도 연수도 연호를 잘 챙겨준다.
연제 안고있는 엄마대신 가끔 연수가 연호 그네 밀어준다.
집안에서 놀 때는 엄마가 바쁘면 으레 연호는 형아 따라다니며 놀고, 연수도 어린 동생을 답답해할 때도 있지만 그럭저럭 가르쳐가며 같이 논다. '둘이 같이'라는 것이 좋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후에는 '셋이 같이'가 되겠지..
엄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늘 힘에 부쳐 버벅거리지만.. 너희들끼리는 그렇게 조금씩 더 위해주고, 아껴주고, 같이 노는 즐거움을 알아가면서 잘 지내주렴.
아이 셋을 낳고 나의 육아는 점점 더 형편없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더 자주 화를 내고, 더 조금밖에 못 놀아주고ㅜ) 그 큰 구멍을 부디 너희들이 어린 아이 특유의 보드랍고 따뜻한 성정과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메워주길... 부족한 엄마는 빌고있단다.
연수가 만들어두고 온 모래성.
장마비 속에 잘 있니? 모습은 허물어졌어도 고운 진흙, 둥근 조약돌들은 강물속에 여전히 누워있겠지.
비 그치고 여름이 깊어가면 우리 아이들 데리고 또 찾아갈께.
이 강가에 시원한 가을이 올 때까지, 억새가 눈부시고 하늘이 쨍하게 푸르러질 그 때까지..
아이들도, 나도, 조약돌들도 모두 잘 지내자.
어디에서, 어떻게 키워야할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지내야할까....
고민이 많은 밤이다.
부엌에 서서 설겆이를 하다가 문득 조용해 거실을 바라보니
연호는 놀이방에서 놀고있고 연제 혼자 저렇게 누워 뒹굴거리고 있었다.
때로 낑낑거리고, 때로 누워 제 주먹을 짭짭 빨기도 하며..
돌아누운 뒷모습이 참 예뻤다.
동그랗고 작은 몸.. 우리도 모두 갓난아기 시절에는 저렇게 작고 둥글고 보드라웠겠지..
형아들 돌보랴, 집안일 하랴.. 늘 바쁜 엄마는 가끔씩 이렇게 눈길로만 연제를 보듬어본다.
혼자 누워 뒹굴뒹굴 놀아주는 고마운 아기 뒷모습만 오래오래 마음에 담는다.
백일 즈음부터 뒤집고 싶어 끙끙거리던 연제는 백일하고 9일째 되던 날 저 혼자 드디어 휘익~ 하고 뒤집었다.
끙끙거리던 시절에는 무지하게 힘들어보여 '아직 뒤집으려면 멀었겠다..' 싶었는데 막상 뒤집을 때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쓰윽~ 뒤집었다.
아하.. 이게 연제 스타일인가.. 태어날때도 쉽게(?) 쓰윽~ 나오더니 많이 준비하고 벼른 뒤에는 가볍게 한큐에 해내는 스타일..? ㅎㅎ
성장의 여러 고비들도 그렇게 시원하게 넘어가 주었으면... 엄마는 바래본다.
뒤집고 바라보는 세상은 어때? ^^
이불에 구멍나겠다... 뚫어지게도 본다. ㅎ
셋째는 바빠서 모빌도 못 달아주고 키웠다.
형아들 서슬에 남아날 모빌도 없을 것 같고, 오고가는 식구들 구경만 해도 눈이 바쁘겠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역시 미안하다. ㅠㅠ
연제야, 예쁘고 고운 것... 우리 함께 많이 보자.. 앞으로 엄마가 많이많이 보여줄께..
냠냠.. 엄마, 내 손 정말 맛있어요! 엄마 젖 다음으로요..^^
에구.. 귀여워~! 갓난아기가 엄마한테 씌우는 콩깍지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ㅋㅋ
요리 이쁜 녀석을 내가 낳았다니~!! 하면서 아무리 바빠도 저 입가에 침 닦아주고, 뽀뽀하고, 볼 부비지 않을 수 없게하는 요 아가들의 힘!
뒤집고 낑낑거리게 된 뒤로 혼자 '끄윽~' 트름도 시원하게 잘 하지만, 그전에는 거의 안하던 토를 엎드려서 곧잘 조금씩 한다.
덕분에 안고 업고 다니는 엄마 옷에서도 젖냄새에 더해 아가 토냄새가 늘상 배게 되었다.
다행히 아가들과 같이 곯아떨어지지 않고 깨어있는 밤이면 모처럼 샤워도하고 양치도 하고 인간답게 자는데(ㅜㅜ)
나에게서 나는 진한 아가 냄새를 맡으며 지금은 이 냄새가 내 삶의 냄새구나..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이 커서 저희들의 길을 가고, 나도 또 내 일을 하며 내 길을 가게되면 그때는 또 다른 삶의 냄새가 나겠지만
지금은 이 젖냄새, 토냄새가 내 삶의 냄새다.. 확인한다.
힘들고 고단한 엄마의 자리.. 그래도 어설픈 내 품에 기대 세 아이가 자라고 있다.
기운내고 단단해져야해.. 마음 다독인다.
끙끙.. 고개를 들거야~~
며칠 사이에 금새 고개를 잘 들게 되었다.
셋째 참 빨리 큰다.
일 좀 하다 돌아보면 어느새 이만큼 커있고, 하루밤 자고나면 또 쑥 크는 것 같다.
종일 붙어있는 갓난아기라지만 정작 연제 얼굴 조용히 쳐다보는 시간은 너무 짧다.
연제도 아쉽고, 엄마도 아쉽다.
연제가 워낙 잘 자는 아이라 하루중에 대부분의 시간을 자고 있어 그렇기도 하고, 어쩌다 깨어있어도 엄마가 바빠 잠깐 기저귀 갈아주고, 젖주고 나면 금새 일어서 또 무언가 일을 하러 종종거리며 연제 곁을 떠나야한다.
아니면 업거나 안아서 데리고 다니거나... 그러면 연제는 엄마 등에서 조금 세상 구경하다가 또 곤히 잔다.
내려놓을 때까지 오래오래...
하루에 한번 목욕시킬 때가 연제 얼굴을 제일 오래 들여다보는 때인 것 같다.
엄마가 좋아서, 물이 좋아서 엄마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글생글 웃는 아가에게 마주 웃어주면서도 엄마는 자꾸 미안해진다.
이렇게 예쁜 아가인데.. 더 오래 눈맞추고,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가야...
순하고 고운 아기..
셋째 아기 키우는 일은 딱 아기 살결처럼 보드랍고 여리고 순하다.
이렇게 크는 아가도 있구나... 엄마에게 가르쳐주러 왔구나.
목욕시킨 뽀얀 녀석 사진 찍어보았다.
오래오래 기억해둬야지.. 갓난아기 고운 시절.
요녀석도 커서 제 형들처럼 씩씩하고 개구지고 뼈도 살도 모두 단단하다못해 살짝만 닿아도 아픈 고런 사내아이가 될테니...
지금 요 시절, 한번뿐인 말랑말랑 갓난아기 시절 마음껏 안아보고, 기억해둘테다.
엄청 컸다고 잘난척 할때 '너희들 모두 엄마 배속에서 나온 이렇게 조그맣고 이쁜 아가들이었거든~~!' 하고 말해줄테다. ㅎㅎ
뒤집고 있기 힘들어요, 엄마~~ 그만 사진찍고 나 좀...! ^^;;
연제 앞얼굴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
누구 닮았나...?
목욕 사진의 마지막은....
엊그제부터는 뒤집기고 목가누기가 아주 익숙해지더니 젖먹여 눕혀놓으면 혼자 놀다가 뒤집고 잠들기도 한다.
이렇게 든 잠은 참 달고 길어서
오래오래 연제가 곤히 자는 동안 엄마는 쌓여있던 집안일도 거의다 하고, 작은 형아와 오래오래 놀아주기도 하고
그래도 안 깨면 가끔 걱정돼서 살짝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조용한 오전시간을 보낸다.
어제와 그제는 밤새 한번도 깨지않고 자기도 했다.
이거 참.. 4개월 아가가 그래도 되는 건지.. 깨워서 젖을 먹여야하는건 아닌지 다시 육아책 뒤적여보며 행복한(?) 고민도 해봤지만..
자는 아기 절대 안 깨운다는 원칙으로 세 아이 키우고 있는 나로서는 절대 깨울 엄두는 안 낼 참이다.
되뒤집기를 할 수 있을만큼 크면 다시 자다 깨지 않겠어... 그리 길지는 않을 이 '통밤잠'의 시절을 그저 감사, 또 감사하며 지내고 볼 일이다. ^^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이따금 제 손가락을 촉촉 빨기도 하면서
곤히 자는 연제야.
고맙다..
지금은 엄마가 네 눈 맞춰주고 너와 얘기나누는 시간이 제일 짧지만
네가 크고 형들도 자라고나면
엄마 곁에 가장 오래 남아있을 아가는 너란다.
엄마가 오래오래 너와 함께 걷고 얘기하고 바라봐줄께..
사랑한다, 아가야.
연제가 태어난지 어느새 백일하고도 8일이 되었다.
웃는 연제 사진 보고있으니 나도 웃음이 난다. ^^
연제는 늘 그렇다.
연제를 쳐다보면 언제나 좋다. 연제도 엄마가 저를 바라보면 언제나 좋다.
이 아이와 나에게 한번뿐인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다정하고 행복한 것이어서 좋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이 시절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이미 형들을 키워보아서 알고있는 엄마인지라 더 아쉽고 애틋하다.
연제의 백일은 상주 시댁에 내려가서 했다.
혼자서 아이 셋데리고 막내 백일상까지 차리려면 내가 너무 고생할까봐
시어머니께서 시댁에서 백일을 지내자고 불러주셨다.
어머님이 나물이며 떡이며 정성껏 다 준비해주시고 나는 아이들 데리고 그저 내려가서 차려주신 상을 받기만했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백일하는 날 아침, 어머니는 삼신상을 따로 차려 연제 앞에 놓아주시고
'우리 연제 건강하게 잘 크게 보살펴주십시요..'하고 두 손을 모으셨다.
연수 백일에 갈현동 신혼집 베란다에 삼신상 가져다놓고 어머니가 혼자 가서 빌고오라 하셔서 뭔지 모르지만 머리 깊이 숙여 빌었던 일,
연호 백일에는 새벽 일찍 잠든 연호 머리맡에 삼신상을 차려놓고 혼자 오래 빌었던 생각이 났다.
그리 먼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그때의 연수, 연호와 꼭 닮은 연제가 우리 곁에 와있다.
나도 마음속으로 삼신할머니와 조왕신과 우리를 지켜주는 많은 신들께
부디 나의 막내아이가 건강하게 무탈하게 잘 크도록 보살펴보달라고 빌며 삼신상에 차렸던 미역국에 밥을 꾹꾹 말아 말끔하게 다 먹었다.
할머니가 며칠전부터 고민하고 준비하셔서 여러가지 전에, 갈비찜에, 갖은 과일과 떡을 올려 차려주신 백일상.
연제야, 나중에 사진보면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렴. 할머니 꼭 안아드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아고, 그만 우리 큰아들이 빠졌네~^^;;
동생들 데리고 슈퍼가셨던 할아버지를 찾으러 사촌형아와 밖에 나갔다가 그만 할아버지와 길이 엇갈렸다.
아쉽지만 우선 한 장 찍고...
연수 들어온 뒤에 우리 식구끼리도 기념사진 찍었다. ^^
와... 우리 식구 많~~다. 다같이 사진 한번 찍기도 쉽지 않네~~ㅎㅎ
할아버지와 연제.
나는 연제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음.. 아닌가? ^^;
할아버지의 아기 시절이 연제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님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셋째 아들이시다. 셋째... 참 예쁘다.
진외가의 증조할머니와 연제.
아이들이 꼬꼬할머니라 부르는 청상의 시외할머니.
우리 아이들에겐 증조할머니가 세 분 계신데, 막둥이 연제는 지금까지 두 분의 증조할머니를 뵈었다.
대구에 계신 나의 외할머니도 뵈러가야할텐데.. 할머니, 건강하세요. 연제까지 데리고 얼른 찾아뵐께요.
모두 팔순을 훌쩍 넘기신 증조할머니께 연제는 열번째, 열세번째, 그리고 열한번째 증손주..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어보니 그렇다. 많구나..
평생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과 이제 또 그 다음 세대 아이들까지 안고 얼러주시는 저 무릎이, 저 손길이 보통 손길이랴..
백일에 먼길을 내려가 어른들을 뵙고 오면서 아이에게 이 손길들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고마웠다.
깊고 따뜻한 품..
이제는 많이 약해지신 그 어른들의 품에서 어린 생명에게 보내주시는 지극한 정을 받고
아가의 곱고 따뜻한 기운을 어른들께 전해드릴 수 있어 참 좋다.
이모할머니 품에 안겨 연제도 아빠가 어릴때 뛰어놀던 청상 진외가의 시골길을 걸어보았다.
이만큼만해도 다 큰 것 같다. ^^
사실 연제는 그전부터 우리 가족들과 계속 같이 살아온 것처럼, 늘 있는듯 없는듯 우리들속에 가만히 들어와있는 아이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으면서 순하게 커주는 아이..
무슨 이런 신통방통한 아가가 다 있어요.. 하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싶은 아이.
'나도 이런 아가를 낳을 수 있다구~~~~! ^0^'하고 어디 좀 광고라도 크게 해야하는데 그만 엄마가 바빠서
블로그에도 어쩌다 겨우 한번 등장하니 이것 참..^^;;
고맙다, 연제야.
백일동안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정말 고마워..
지난 백일 지나오며 '연제가 엄마를 살려주는구나..' 생각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단다.
네가 엄마에게 찾아온 날부터 지금까지 사실 매일이 그랬지...
네가 있어 참 행복했고, 너와 함께 엄마가 하고싶은 일, 가고싶은 곳도 모두 참 씩씩하게 잘 다니고 해왔지.
네 이름에 '구할 제'자를 쓸 때,
너를 건강하게 자연출산으로 낳고 네가 엄마를 구해주었고, 너 스스로도 구했다는 생각에 '제'자가 더욱 엄마 마음에 와닿았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이름처럼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무엇보다 너 자신을 구할 수 있기를, 그런 지혜롭고 굳건한 사람이 되기를 빌고 있단다.
연제야, 나의 사랑하는 아가야.
우리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행복하게 지내자.
고맙다.. 고맙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성격때문에 예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예전에 우리 엄마가 나를 보고 '욱이는 성격이 참 좋아, 잘 삐지지도 않고 이해심도 많고..'하고 얘기하면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내가 성격이 좀 좋긴하지...'(ㅎㅎ)하고 생각했을 뿐 그 말의 깊은 의미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제 내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보니 그게 어떤 것인지 조금씩 더 알 것 같다.
내게도 그런 '성격좋은 아이'가 있다.
너무너무 예쁘고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서 짠한 우리 둘째, 연호 말이다.
연호는 아기때부터도 참 잘 웃었다. 아주 예쁘게, 빵긋! 웃는다. ^^
웃는 연호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고마워진다.
얼마전 외갓집에 갔을 때, 밭가의 흙길을 걸어오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걷는 일에만 신경을 쓰다가 문득 연호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이 아이는 어찌나 즐겁게 방긋! 웃고 있던지.. 제 곁에서 제 손을 잡고 걷는 엄마를 바라보며,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문득 근심많던 엄마의 마음에 따뜻한 햇살이 비춘듯 밝아지게 해주던 아이.
이제 곧 두 돌이 되는 연호.
우는 동생에게 '아가, 형아 찌찌! 형아 찌찌~!'(아가야, 형아가 찌찌 줄께!)하며 제 윗도리를 걷어올리기도 하는 어린 형아다.
연호는 아기때부터도 낯가림이 없는 아이였다.
어른들을 좋아하고 참 잘 따른다.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고 방긋 웃으며 다정하게 대한다.
자주 뵙지 못해 서먹할 수도 있는 할아버지할머니들께 아기때부터도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 안기고, 잘 따르고, 헤어지고나서도 잘 기억하고 그리워했다.
그래서 연호는 제가 있는 곳 어디서나 늘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런 연호가 내 곁에 있어서, 나의 아이로 태어나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무언가 제 눈에 곱고 좋은 것이 보이면 '우아!'(우와)하고 환호하는 아이.
다른 형제들과 집안일로 늘 바쁜 엄마가 잠깐 저와 놀아주려고 '연호야, 엄마랑 이거 하고 놀까?'하면 '아호!'(야호)하는 아이.
세살박이 연호가 아직도 너무나 귀엽고 여린 아가 목소리로 하는 '야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고맙고 예뻐서 눈물겹다.
얼마나 좋으면, 엄마와 함께 노는 것이 얼마나 기쁘면.. 때로는 너무 졸리고 고단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을 때 '엄마가 안아줄까?' 물으면 '아아호~' 하는 우리 둘째..
이번에 산후조리해주러 올라오셨던 시어머님은 한달을 우리와 함께 사시는 동안 연호와 제일 깊이 정이 드셔서 다시 상주로 내려가신뒤에 한동안 전화로 연호 목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왈칵 하셨다고 했다.
강릉 외가에서 2주를 지내는 동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도 정이 아주 듬뿍 들어서 집에 돌아와서도 '하삐, 어디? 함미, 어디?'하고 자주 찾았다. 자주 전화해 '하삐, 사탕! 할미! 사탕~!'하며 사탕달라고 조르는 연호 목소리를 들으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급기야 큰 아이스박스에 연호가 좋아하는 사탕과 과자를 잔뜩 넣어서(각종 밑반찬과 김치까지 한가득 넣어서ㅜ) 택배로 부쳐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정을 그리워하며 찾는 어린 연호에게 그렇게라도 하삐, 할미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시고 싶어서...^^
연호는 그 상자를 받고 너무너무 기뻐했다.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가 한두개씩 주시던 카라멜사탕을 먹으며 하삐, 할미 생각을 하고 좋아하는 아이. 연호는 그런 아이다.
연수와 연호는 정말 다르다.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늘 연수가 더 마음에 걸렸다.
첫 아이인 연수 키우면서 부딪히는 일들은 엄마도 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고, 그래서 늘 어렵고 걱정이 많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생이 태어난 뒤 동생에게 엄마를 많이 내어주어야하는 큰 아이 마음이 허전하고 섭섭하고 어린 동생에게 질투도 나고 할 것 같아 큰아이를 더 보듬어줘야겠다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연수가 워낙 예민하고 고집도 센 아이여서 연수를 둘러싼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아 머리 속에 늘 연수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연호는 아기때도 연수에 비하면 정말 순하게 잘 자고, 잘 먹고 잘 자라주었고 자라는동안 늘 밝게 웃고 잘 놀아주어서 그저 잠깐씩 쳐다보고 '아 이 아이는 참 예쁘구나..'하고 생각하는 일말고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어린아이 키우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니 연호 돌보다가 지치고 고단해지는 순간들도 많기는 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둘째가 첫째보다 훨씬 예쁘다면서요?'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글쎄... 나는 첫째가 더 예쁘던데..'였다.
사실 그랬던 것이 연수를 키우는 동안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순간이 많았던가, 힘들었던 순간들도 많지만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만큼 깊은 정이 든 첫아이인만큼 내 마음에서 연수 자리는 정말로 컸다.
연수는 어릴 때부터도 참 민감한 아이였다. 잠을 잘 안자는 것도 그랬지만, 낯가림도 심했다. 조금 커서는 낯선 어른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거나 몸에 살짝만 손을 대도 소리를 지르며 싫어할 정도였다. 할아버지할머니께도 살갑게 대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외갓집은 그래도 한번 가면 2주 정도씩 머물면서 할아버지할머니와 많이 놀고하니 잘 따르고 좋아했지만 명절에만 잠깐씩 뵙는 친가 어른들께는 아직까지 그리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다. 연제낳고 산후조리해주러 오신 할머니와는 내내 부딪히며 화를 냈다. 속마음으로는 저도 할머니와 다정하게 지내고 싶었을텐데 겉으로는 할머니가 야단치고 잔소리한다며 할머니를 싫다고하면서 버릇없이 굴었다.
그런 연수를 보고 있으면 나도 속도 상하고, 걱정도 되고.. 저 아이가 잘 클 수 있을까,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연수 걱정을 하다가 연호를 보면 연호가 낯가림이 없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 다정함으로 어른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기까지 하는 아이라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자꾸 엇나가는 연수가 안쓰러워 마음이 무거웠다.
무튼 '첫째가 더 예쁘다'고 말하면서 연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혹시 연호가 듣고 속상해하면 어쩌나.. 좀 더 조심해야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연수를 바라보고, 걱정하고, 또 큰 아이가 보여주는 빛나는 성장의 순간들을 쫓아가느라 어쩌면 둘째에게는 그만큼 마음을 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천천히, 연호가 엄마 마음속에 조금씩 제 자리를 키우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찍 동생이 생겨서 '이 아이의 아기 시절은 너무 짧겠구나..'하고 안쓰러워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부드럽고, 유연하고, 그러면서도 단단한 연호의 성격이 조금씩 드러나보이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그런 연호의 성격에 내가 깊이 위로받고 위안을 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였을까.
아. 이 아이는 이런 아이구나... 하고 내가 깊이 느끼면서부터 그전보다 연호가 더 고맙고 예뻐졌다.
둘째가 주는 깨달음이었다.
존재는 모두 다르다는 것. 제 고유의 빛나는 성격과 특징이 있다는 것.
그것이 충분히 사랑스럽고 너무나 빛나고 그래서 예쁘다는 것.
아이들은 모두 제 안에 깃든 고유한 아름다움들을 충분히 꽃피울 때 그 빛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되는 것이구나... 나는 연호를 보며 알게 되았다.
이제 누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나는 전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대답할 것 같다.
'아휴.. 그럼요, 우리 둘째가 얼마나 예쁘다고요.. 성격도 좋고, 잘 웃고.. 근데 첫째는 또 첫 정이 무섭다고 제일 미우면서도 제일 마음 많이 쓰이고.. 이뻐요. 지금은 못난 오리새끼같이 굴고 있지만 저 녀석도 얼마나 예쁜 녀석인지 나는 알지요. 겉으로 센 척해도 속은 제일 여려요, 첫째가.. 우리 둘째는 마음은 오히려 형보다 씩씩할껄요. 사람들한테 마음도 잘 열고 .. 따뜻하고 좀더 안정된 느낌이 들어서 둘째한테는 엄마가 많이 위로받아요...'
고맙다, 연호야.
나의 소중한 둘째 아기.
엄마 아이로 태어나줘서 고맙고, 엄마 곁에 함께 있어줘서 고맙다.
예쁘게 자라주는 너와 함께 엄마도 새로운 힘으로 또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