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우리를 바다에 자주 데려가셨다.
짙푸른 동해바다 앞에 서면 뭔가 모르게 마음안에 맺혀있던 답답한 응어리가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돌아올 떄는 시원한 파도소리에 씻어낸듯 마음 자리가 맑고 담담했다.
그것이 체념이나 포기였다고 해도 파도 속에, 바다 앞에 내려놓을 때는 부끄럽지 않았다. 큰 일 하나 끝내는 듯이, 버거웠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듯이 홀가분했다.
먼 길을 떠날때는 바다에 들러 꼭 인사를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내 결심을 밝히고 다짐한 적도 많았다.
강릉에서 보낸 유년기동안 나는 자연에게 말을 거는 법을 익혔다.
바다에게, 멀리 보이는 태백산맥의 능선에게, 경포호수 안에 있는 바위에게.
우리집 마당에서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이던 태백산맥의 능선은 '어머니'라고 불렀고, 아빠가 아침마다 오빠와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시던 길에 만나는 경포호수안의 바위 조암은 '바위 아저씨'라고 불렀다.
집의 뒷산으로 이어지던 길에 있던 작은 히말라야시타 나무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은 후로 '슈르르까'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가만가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읊조리던 어린 소녀는 이제 서른넷,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건다.
이전처럼 고향에 자주 내려가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찾아가 만나면 한없이 반가워서 오랜 친구만난듯 마음속의 이야기가 터져나온다. 현재의 소망들을 얘기하고, 그들이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보살펴주기를 빈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나이도 들고, 자연이 겪는 고통을 이전보다 조금은 더 알아차리는 나이가 되어서 내가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순간도 새로이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생겨난 이런 생각과 태도가 세상 만물에는 모두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아름답고 큰 대자연 앞에서 작은 인간으로서 느낀 경외심 같은 것에다가 무엇을 향해서건 내 속의 이야기를 건네고싶은 마음,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했던 독백을 누군가는 들어주고, 깊이 공감해주고, 나를 응원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바다앞에 데려가셨을 적에는 내게 그런 시원한 소통의 공간, 언제고 변치않는 마음의 벗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아버지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사셨던 아버지에게 들판과 산맥과 바다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들의 얄팍한 계산과 악다구니와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 노련하셨던 아버지지만 땀흘려 땅을 일구고, 이따금 바다앞에 서서 번잡하고 시끄러운 생각들을 시원하게 내려놓고 중요한 것만 남겨서 새롭게 다잡고 오는 시간을 사랑하셨다.
서울에 와서는 어린 시절처럼 자연에게 말을 걸며 살지 못했다.
일종의 준비기였던 10대 소녀 시절이 끝나고 몸으로 부딪히는 행동의 20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두운 술집과 골방과 집회의 앰프소리가 울리는 광장에서 사람들을 보며 전율하는 것에 내 젊은 마음이 온통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정 곳곳에 가득했던 오래된 숲들과 키큰 나무들이 참 아름다웠던 것은 기억한다.
서른에 결혼하면서 얻은 연신내 신혼집에서는 수려하고 웅장한 북한산의 능선이 한눈에 잘 보였다. 이 잘생긴 산은 내게 큰 기쁨과 힘이 되었지만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신혼집 앞산인 봉산은 낮지만 꽤 넓게 우리 마을을 감싸고 돌아 퍽 아늑했다. 갓난아이를 안고 거실에 앉아 봉산의 사계절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더없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도 말을 걸지는 못했다.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연물이란 것도 어느 시절, 어떤 특정한 성장의 시기에만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자연의 친구를 만나게 해주고 싶다.
둘째 아이 평화를 가지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며칠전에는 문득 우리 가족이 모두 인디언 이름같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딴 이름, 혹은 그의 성정을 잘 표현해주는 이름.
인간 역시 우주와 대자연의 한 부분임을 이름을 부를때마다 숨을 쉬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이름 말이다.
소녀시절에 감동깊게 봤던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늑대와 춤을', '주먹쥐고 일어서'같은 이름은 내가 거의 처음 알게되었던 인디언 이름들이었다.
그후 '작은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 아이가 전통인디언의 방식으로 산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기를 담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책을 읽으면서 그 이름이 너무 좋아 혼자 가만가만 불러보기도 했다.
앉은 소, 구르는 천둥, 빨간 윗도리, 검은 새, 열 마리 곰, 느린 거북, 방랑하는 늑대... 이들은 모두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에 나오는 인디언 추장과 전사들의 이름이다.
우리 가족의 인디언 이름을 짓는다면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의 인디언 이름은 내가 꾸었던 태몽을 생각해서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연수를 가질 적에 나는 아주 하얗고 예쁜 구름 하나가 나를 향해 쓩-하고 날아오더니 내 품에 와락 안기는 꿈을 꾸었다. 차고 상쾌한 구름속에 내가 실은 폭 싸안긴 것이었다. 그 시원한 느낌이 깨고 나서도 생생했다. 그 꿈을 따서 연수는 '흰구름'이라고 부르면 좋겠다.
평화는 블로그에도 썼듯이 푸른 들판을 산책하다가 알곡이 실하게 잘 달린 푸른 벼이삭을 손으로 쥐어보는 꿈을 꾸었었다.
평화는 '푸른 벼'라고 부르고..
그리고 또 철없는 내 꿈 하나를 보태서 내가 만약 셋째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깊고 푸른 바다 꿈을 꾸고 가져서 '푸른 바다'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나와 남편의 이름은 한자어의 뜻을 풀어 지으면 어떨까.
내 이름인 '욱(旭)'의 한자어 뜻은 '빛날 욱, 아침해 욱'이다. 아침햇살이 치밀어 오를때의 기세 같이 씩씩한 느낌을 담은 글자다. 나는 초겨울인 음력 11월 초이레날, 아침 여섯 일곱시쯤 한옥이었던 시골집에서 태어났다. 그해 서른한살이었던 엄마가 나를 낳고 나니, 동편이 밝아오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고 했다. 8살 무렵까지 살았던 내 생애 첫집인 그 집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젊은 날의 엄마아빠가 살았던 안방은 해가 떠오르는 앞동산 쪽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니 내 생애의 첫 순간에는 겨울 여명의 첫 햇살정도가 막 엄마 몸을 열고나와 뜨거운 김이 나는 작고 여린 것의 이마를 건드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인디언식 이름을 '아침해'라고 부를 수 있겠지.
남편의 이름인 '준철(俊鐵)'은 '좋은 쇠'라는 뜻이다. 시어머니는 신랑을 가질 적에 태몽으로 붉은색 용이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고 하셨다. 남편은 '좋은 쇠'라고 불러도 좋고 '붉은 용'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쓰다보니 태몽 얘기들이 참 재미있는데, 내가 연수를 가질 적에 시어머니는 고구마밭에 가서 크고 붉은 고구마들을 한아름 따는 꿈을 꾸셨고, 친정엄마는 옛날 우리집 방앗간 옆에 있는 밤나무 밑에 가서 큰 밤알들을 줍는 꿈을 꾸셨다고 했다. 그 꿈들을 전해듣고 나는 "연수는 농부가 될 건가봐!"하고 웃음을 터트렸었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될때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신비로울만큼 생생한 자연물의 꿈을 꾼다는것도 참 신기하지 않은가.
아침해, 붉은 용, 흰 구름, 푸른 벼...
이런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며 우리 가족이 긴 여행을 함께 하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좀 크면 도보로 전국일주도 해보고 싶고, 제주 올레도 걷고, 멀리 산티아고 길도 걸어보고 싶다.
백두산도 가보고 싶고, 안나 푸르나도 가보고 싶다.
그 곳들을 만날 때는 우리가 서로를 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만나는 경이로운 자연들에게 우리 모두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건네고, 듣고, 위로받고, 격려하고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유명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가 만나는 자연도 좋지만 제일 좋은 것은 아이들의 고향집, 아이들의 생활 공간에 마음 붙일 수 있는 아름답고 시원한 자연이 있는 것이겠지.
얼마 후면 북한산과 봉산이 있던 연신내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는 어떤 자연을 만나게 될까.. 지금은 집을 따라 가는 이사이지만, 다음에는 자연을 따라 가는 이사였으면 좋겠다.
인디언의 이름을 하나씩 마음에 품고, 자연과 생명앞에 한없이 감사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려 했던 인디언의 삶의 철학과 자세를 배우려고 애쓰면서 살고 싶다.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어느 해보다 춥다는 2011년 새해, 구제역 파동을 생각하면 마음 속까지 추워지는 새해를 보내면서 해보는 다짐 하나다.
지난해 연말, 친정집에 가있을때 아빠와 연수와 함께 경포바다를 찾았었다.
이제는 제법 큰 연수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밀려오는 파도앞에 용감하게 섰다.
파도가 바로 앞까지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이 젖지않게 도망쳐나오는 저 놀이를 나도 어릴때 무척 좋아했다. 추운 겨울에도 몇번은 결국 발을 적시곤 했다. 덜덜 떨며 집에 돌아와도 시원하고 재미있었다.
이제는 연수가 내 아빠와 그 놀이를 한다. 더 겁이 없고, 더 신나한다.
참, 우리 아빠 이름은 별 성(星)자에, 비 우(雨)자를 쓰시니 내 방식대로 아빠의 인디언 이름을 짓는다면 '별비'가 되겠다. ^^
별비 아빠... 오늘밤에는 막내딸 걱정없이 편히 잠이 드셨는지.
아빠, 편히 주무세요. 내일은 막내딸 '아침해'가 씩씩하게 전화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