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팥시루떡을 제일 좋아한다.
어린 시절 집에서 시루째 쪄내던 팥시루떡은 얼마나 맛있었던지.
내가 자란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는 매년 깊은 겨울 어느 날인가에 지내는 '기도'라는 제사날이 있었다.
그 날은 저녁 내내 엄마와 어른들은 팥시루떡을 찌고 준비를 하시다가 밤12시쯤 되면 아이들까지 모두 깨워 집안 곳곳과 외양간 같은 곳을 돌며 복을 빌고, 그 떡을 나누어 먹었다.
김이 펄펄 오르는 갓찐 시루떡을 뜨거운 동태국물이나 시원한 동치미국물과 같이 먹던 한겨울밤의 즐거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연신내 이 집에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팥시루떡을 맞추는 일이었다.
큰 신혼가구들이 들어오는 날, 동네떡집에 맞춰놨던 떡을 받아 이웃집들과 경로당, 관리사무소에 돌리던 새댁은
신혼집을 떠나는 날 아침, 다시 팥시루떡 한 말을 맞췄다.
자그마한 내 장독대 위에 따뜻한 떡 한 접시를 올려놓고 그동안 우리를 잘 보살펴줘서 너무나 고마웠다고.. 이 집의 모든 기운들께 작별인사를 하는 것으로
내가 '서울 횡단'이라고 이름붙인 이사 프로젝트(?)의 날은 시작되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해보는 이사인데 비까지 내리니 걱정은 더 많아졌지만 비구름에 싸여 흐릿해진 북한산을 보니 산도 나처럼 이별을 서운해하는 것 같아 왠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쨍하게 맑은 날 이별했으면 더 섭섭했을까.
서울의 서북쪽 끝인 연신내에서 남동쪽 끄트머리(?)인 강동구 강일동으로의 이사.
지도를 보면 가로로 길쭉한 서울을 한강을 따라 동서로 비스듬하게 횡단하는 셈이다.
연신내집에서는 작은 앞산 하나만 돌아가면 고양시였는데, 강일동에서는 단지 바로 옆 큰 도로를 따라 10분만 걸어가면 경기도 하남시니 우리는 늘 서울의 가장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달랑달랑 붙어사는 셈이다.
서울에 꼭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집을 구하고보면 늘 서울시의 금 안에 겨우 들어와 있다. 다음에는 길을 건너 한결 여유롭고 한적한 경기도땅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나. 무튼 수도시민의 꼬리표는 이번에도 달게 됐다.
학기초라 자취방에 학생들을 받느라 바쁜 친정엄마가 그래도 몸무거운 막내딸의 이사를 도와주신다고 전날 서울에 올라와주셨다.
이 집에 이사온 첫날에도 나는 신혼가구들을 받으며 엄마와 함께 잤는데, 마지막 밤에도 엄마와 함께 잤다.
이사올때, 갈때를 제외하고 지난 3년동안 엄마가 우리집에 와서 주무셨던 것은 연수를 낳고 산후조리를 했던 1주일뿐이지만
그래도 이 집에는 엄마의 기운이 따뜻하게 깃들어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나이들어 부쩍 쇠약해지셨지만 엄마의 기운, 엄마 냄새, 엄마 목소리, 엄마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일을 치르는 마음이 더없이 든든하다. 그러니 당신은 나의 어머니, 나는 언제나 당신의 품에서 자라난 아이.
오늘은 연수가 엄마 품에서 그 기운을 흠뻑 받고 있다.
팥시루떡을 맞출거라 했더니 "그거 참 잘 했다"하시고는 반말은 적을 것 같으니 아예 한말 맞춰서 넉넉하게 돌리고, 남겨놓고 먹으라 하시던 엄마. 기어코 떡값은 또 본인이 내셨다.
덕분에 정말 넉넉하게 이웃들께 떡 잘 돌리고, 연수랑 나도 잘 먹고있다.
시골서 자라 떡 좋아하고, 떡 돌리는 건 더 좋아하는 나는 동네에 단골떡집을 정해두고 이사떡, 연수 백일떡, 돌떡을 다 거기서 맞췄다. 오고가며 이 떡 저 떡 사먹기도 많이해서 친해졌던 단골떡집 아줌마 아저씨와도 인제 이별이다.
이사짐센터 분들이 짐을 싸는 동안 나와 연수는 사는 동안 늘 의지가 되고 고마웠던 이웃들께 떡을 돌렸다.
정들자 이별이라고, 섭섭해서 어쩌나.. 하시며 연수에게 기어코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주시던 이웃 할머니와 애기엄마들.
떡이라도 건네며 굳이 인사하지 않았으면 겨우내 자주 못보다가 말도 없이 훌쩍 가버렸다고 서운해하셨을텐데 이렇게라도 인사하고 떠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이별의 의미를 아직은 잘 모를 것 같은 연수.
제가 태어나서 줄곧 자란 이 집말고 다른 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 아파트 놀이터에서 늘 같이 놀던 그 친구들을 이제는 만나기 어렵다는 것.. 그런 것들을 채 다 실감하지는 못해도 뭔가 적지않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느끼는 듯 했다.
33개월 연수에게 '정든 곳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남을까.. 궁금해진다.
이사 한참 전부터 어른들이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이사얘기를 많이 하자 연수도 덩달아 이사 얘기를 많이 했다.
특히 제가 어릴때부터 쌍둥이네서 빌려 가지고 잘 놀던 작은 미끄럼틀을 돌려주고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나머지 제 물건들, 놀이감과 책, 책장들은 모두 가지고 가는 것인지 무척 궁금해했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 그럼 연수는? 연수도 가지고 가?"하고 물었다.
"그럼~. 연수는 당연히 가야지!"했더니 엄마가 놀라는 것이 재미있어서 씩~ 웃으며 "왜?"하고 물었다.
"연수는 엄마아빠의 제일 큰 보물이니까!"
그 뒤로 집안의 물건들을 가리키며 '이것도 가져가? 저것도 가져가?' 하고 쭉~ 물은 뒤에 마지막으로 '그럼 연수는?'하는 질문을 하루에도 몇번씩 엄마, 아빠에게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하면 깔깔 웃고, '왜?'하고 물어서 "연수는 우리집에서 제일 귀한 존재니까", "연수가 안가면 큰일이지. 연수는 제일 먼저 챙겨서 가야지." 같은 여러가지 대답들이 나올 때까지 묻고 또 물으며 재미있어 했다.
우리집 보물 연수야, 새 집에 가서도 그렇게 깔깔 웃으며 재미나게 살자.
익숙한 공간인데도 이렇게 이사짐싸는 모습을 찍어놓고보니 문득 낯설다. 정말 떠나는구나.. 싶고, 새삼 참 작은 집이었구나 싶기도 하다.
짐싸고 내리는 동안 있을 데가 마땅치않았던 우리를 건우엄마가 불렀다.
비가 안왔으면 연수랑 할머니랑 놀이터에서 놀기라도 했을텐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좁은 차안에서만 몇시간을 보내자면 연수가 많이 힘들었을텐데 다행히 널찍한 건우네서 재미있게 놀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나이든 엄마도 비맞으며 고생하지 않게 되어서 참 고마웠다. 떠나는 날까지 이웃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옆동 10층인 건우네 창문으로 15층 우리집에서 내려오는 사다리차 짐받이가 보였다.
공동주택에 살다보니 이사 구경을 심심치않게 할 수 있어서, 연수는 어디서 사다리차 소리만 들리면 '엄마 구경가자~' 졸랐었는데 오늘은 그 이사를 우리집이 한다. 신기하다.
드디어 이사짐을 다 실었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 살펴보았다.
5톤 큰 트럭과 2.5톤 작은 트럭을 가득 채운 짐들.
세식구 사는데 무슨 짐이 이리 많은가.. 싶기도 하고, 또 저 차 두 대로 내 삶의 모든 공간이 순간 이동이 되는구나.. 싶어 갑자기 삶이 단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 평수치고는 짐이 많은 편이라는 이사짐센터 분들의 얘기를 들으며 뭐든지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내 습성을 다시 반성했다. 더 가볍고 단촐하게 살아야하는데...
추운 날에도, 더운 날에도 참 부지런히도 드나들었던 102동 현관.
바로 앞 경비실의 작은 창문을 열고 '연수 나왔구나~!' 반겨주시던 아저씨들.
정들었던 공간들을 사진 한장으로라도 남겨본다.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도 함께.
짐이 다 빠진 집을 둘러보려니 그만 눈물이 났다.
정말 안녕이구나. 잘 있어, 우리집.. 우리의 첫집.
우리가 이사오기 직전에 살았던 주인네에는 초등학생 큰 딸과 유치원생 아들, 그리고 갓 태어난 늦둥이 셋째 아들이 있었다.
이 집은 지금 주인부부가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었고, 또 늦게 막내아이도 얻은 집이라 왠지 좋은 기운이 많이 서려있는 것 같아서 나도 늘 마음이 좋았다.
이 집에서 우리 부부도 첫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도 얻었으니 좋은 기운을 조금은 더 보태고 가는 것 같아 기쁘다.
다음에 살러오시는 분께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고마운 집이 되기를..
(실은 살림을 깨끗이 잘 못하는 내가 사는동안 예뻤던 이 집이 너무 지저분해진 것 같아서 뒤에 오시는 분들한테 많이 미안했다ㅠㅠ)
주인집 큰 딸이 써놓은 것 같던 '우리집' 글씨와 웃는 얼굴그림이 내게는 늘 애틋했어서 사진으로 찍어보았다.
'안녕~'
떠날 무렵 연신내의 빗줄기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검은 구름이 북한산을 떠나는게 보였다.
복도에서 보이는 전망만큼은 서울에서 제일 좋을 거라는 자부심이 들게 해줬던 산, 어린시절 강릉 고향집에서 늘 바라보던 대관령과 태백산맥의 능선을 연상케했던 산, 그래서 연고도 없는 연신내에 둥지를 틀게된 제일로 큰 이유가 되어주었던 산.
안녕, 안녕. 고마웠던 산. 그리울거야..
강변북로를 지나 한강의 남쪽으로 건넜을 때는 빗줄기가 어마어마하게 굵어졌다.
이사짐도 걱정이었고, 그보다는 이사오시는 분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서(그쪽도 멀리서 비오는날 오자니 참 모두모두 힘든 이사날이었다) 잔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채 떠나온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처음 해보는 이사이고, 둘 다 금전관계에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우리 부부인지라 미리미리 알아보고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이사를 도와주러 오신 친정엄마와 시이모님의 마음까지 불안하고 무겁게 만들었다.
비구름이 우리 마음에까지 잔뜩 끼어있던 그 서울횡단의 길에 연수가 차안에서 내내 곤히 잘 자준 것이 제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돌이켜생각해보니 그 장대같은 빗줄기를 뚫고 새집에 사람도, 짐도 모두 무사히 도착한 것도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새집 싱크대와 하수구들에 엄마는 미리 챙겨두었던 굵은 소금을 뿌리셨다.
생각해보니 내가 고향집을 떠나와 서울에서 살았던 모든 집들의 싱크대에 엄마는 이사 첫날, 이렇게 소금을 뿌려주셨었다.
잠실에 사시는 시이모님께서도 조카네의 이사를 도와주기위해 달려와주셨다.
정신없이 대충 먹기 마련인 이사날 점심에 제대로된 밥 한끼 먹여주시려고 따뜻한 찰밥과 콩나물국, 맛있는 반찬들까지 넉넉하게 준비해오셨다.
참 고맙다.. 고맙고 고마운 분들 덕분에 오늘도 내 목과 아이들 목에 더운밥 넘겨주며 살고 있다.
비가 와서 밖에 나갈수가 없었던 연수는 이사짐을 푸는 내내 거실에 먼저 제자리를 잡은 소파에 앉아 외할머니와 책도 읽고,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놀았다.
오후에는 오빠가 엄마를 고속버스터미널에도 모셔다드릴겸 동생 이사에도 와볼겸 가족과 함께 새집으로 찾아왔다.
큰조카는 연수와 함께 채 다 풀리지도 않은 이사짐 속에서 장난감들을 찾아내 재밌게도 놀았다.
아이들은 어수선한 상황이 더 재미있는지 이것저것 놀이감들을 작은 공집안에 다 집어넣고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어디서든 잘 노는 아이들이 고맙다.
아빠는 잔금을 받기위해 멀리 연신내까지 비속에 다시 한번 서울을 횡단하러 떠나고,
엄마는 이사짐 놓을 곳들을 여기저기 알려드리느라 바쁜 와중에
외할머니와 외사촌누나가 연수를 데리고 잘 놀아준 것이 참 다행이었다.
시이모님은 몸무거운 조카며느리를 대신해 집 구석구석에 걸레질을 다 해주시고, 가구들까지 깨끗하게 닦아주고 가셨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이사는 모두 끝났다.
비가 많이 와서 짐을 올릴때는 사다리차를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짐을 모두 나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덕분에 이사짐센터 분들도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해주시면서도 연수에게 웃으며 얘기도 걸어주시고, 마무리까지 참 깔끔하게 잘 해주셨다.
이사를 도와주러 오셨던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짐도 어지간히 정리된 뒤에 세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새 집에서 세식구가 함께 먹는 첫 식사..
무거운 짐 하나 옮기지 않고, 방바닥에 걸레질도 한번 안하며
그저 사진찍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분주했던 하루였는데도 '서울횡단'을 마치고난 밤에는 참으로 고단했다.
새집에서의 첫밤은 그래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곤한 연수는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지만 아빠엄마는 얼떨떨하기도하고, 힘들고 우여곡절 많았던 하루가 무사히 끝난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밤늦도록 새집에 불을 밝혀놓고 있었다.
새집에서 처음 맞은 아침 풍경.
4층 우리집의 거실창에서는 키큰 소나무와 화단이 잘 보인다.
멀리 주택가와 낮은 동산의 능선도 아련하게 보인다.
어제 내린 비로 세상은 아직도 온통 젖어있었다.
"연수야, 비가 와서 땅이 다 젖었어" 했더니 "그럼 땅이 목욕하는건데?" 한다.
그렇구나.. 땅이 목욕했네. 깨끗하고 예쁜 얼굴로 새봄을 맞으려고 땅도 시원하게 목욕했나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도 묵은 삶의 먼지랑 때를 씻어내느라 그렇게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이사를 했나보다.
이사후 삼사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갔다.
이사 당일에는 정신이 없어서 여기저기 아무곳에나 받아두었던 짐들을 다시 정리해넣고, 그러면서 새삼 이제 필요없다 싶은 물건들을 버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려고 따로 모으고보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다.
이사 덕분에 살림이 조금은 가뿐해질 것 같다.
큰짐들은 얼추 다 자리를 잡았지만 작은 짐들은 아직도 풀고 정리할 것이 산더미다.
쉬엄쉬엄 한다고 하는데도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아직은 어수선하다.
연수도 "여기가 이제 우리집이야? 왜?"하고 자주 묻는다.
특별한 이유를 달지 않아도 그저 '여기는 우리집'하고 마음이 푹 놓이는 날이 올때까지는
연수도 나도 더 적응하고, 익숙해지고 정을 붙여야하겠지..
햇살이 좋다.
새집에서는 전보다 햇빛이 오래 든다. 거실과 안방에 모두 한낮부터 해질때까지 환하게 빛이 들어온다.
서울횡단의 긴 길을 견디느라 고생한 화분들도 어제에야 모두 거실에 내놓고 물도 주고, 햇빛도 마음껏 받게 해주었다.
연수는 분무기가 좋아서 어제부터 줄곧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터전에서의 삶.
33개월 연수도, 서른네살 엄마아빠도, 7개월에 접어든 평화도 함께 시작한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잠드는 네 식구의 날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행복한 성장의 날들이 되기를.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좋은 기운을 듬뿍 얻고 나눌 수 있기를...
이 봄, 새롭게 시작하는 모두들-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