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12.01.27 아프고 고마운 명절 3
  2. 2012.01.06 깊고도 조용한 밤 8
  3. 2011.09.24 가을 텃밭 8
  4. 2011.09.17 시댁 이야기 8
  5. 2011.05.17 상추 수확과 새 식구 14
  6. 2011.05.01 얼마만큼 자랐나 4
  7. 2011.04.23 밭이 생겼어요!! 12
  8. 2011.03.17 동네 순례 11
  9. 2011.03.03 서울 횡단 14
  10. 2011.02.24 봄 준비, 이사 준비 16
신혼일기2012. 1. 27. 23:37









명절 얼마전부터 좀 아팠다.
그전 주말에 반가운 지인들을 만나느라고 밤늦게까지 조금 무리한 외출을 하기도 했고, 
주중에는 나름대로 명절 준비를 한다고 좀 부산하게 움직였더니 몸에 탈이 난 것이다.

사실 제사며 명절에 대식구 지낼 준비야 지방에 계신 시어머니께서 다 하시고, 나는 아이들데리고 짐꾸려 내려가기만 하니 명절준비라 말하기 부끄럽다.
그저 오랫동안 빨지 못했던 연수 겨울파카와 연호 아기띠, 겨울담요, 포대기 같은 겨울장비들을 욕조에 넣고 발로 좀 밟고 손으로 북북 문질러 찌든 때를 빼는 애벌빨래를 한게 다다. 
밖에 나가면 어떻게든 흙바닥을 찾아 엎드리고마는 연수의 겨울파카는 하필 흰색이라 어찌나 새까맣게 떄가 묻었는지 힘을 잔뜩 줘서 한참 세게 비뼈빨아야했고, 형한테 물려입은 연호 겨울옷과 담요며 수유쿠션커버 같은 것들도 자주 손빨래를 하지 못하는 게으른 내 성정상 모처럼 한번 빨자니 부끄러울 정도로 떄가 많았다.ㅠ
그것들 빨고, 며칠 모은 천기저귀 빨아 삶고 차례로 세탁기에 돌린 다음날 팔이 욱신욱신하더니 그 길로 몸살이 와버렸린 것이다. 에구.. 이 부실한 인사같으니라구..

명절에 꼭 새옷을 입어야만 설빔이랴, 게으른 엄마가 모처럼 손빨래 좀 해서 우리 아이들 깨끗한 옷을 입혀주자..
자주 뵙기 어려운 시부모님 오랫만에 뵈러갈때 아이들 옷도 제일 꺠끗하게 입히고, 아기 물건도 깨끗한 것 보시면 어른들도 흐뭇하시겠지.. 깨끗이 빤 포대기로 어머니가 연호 업고 외갓집 마실가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연수 데리고 미용실가서 머리까지 예쁘게 깍아 돌아오니 이제는 가방쌀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아직도 할 줄 아는게 없어서 명절이 널널하기만한 며느리의 명절 준비는 이렇게 끝났다.









명절 앞두고 시작된 몸살감기는 시댁에 가서 한층 심해졌다. 재채기에 콧물에... 코가 막히니 눈물도 덩달아 자꾸 났다.
안그래도 연호가 엄마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터라 제사 음식 준비도 연호 낮잠잘때 겨우 튀김 조금 거드는 것으로 끝났는데, 대식구 식사준비며 설겆이까지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께 내 감기 걱정까지 하시게 해 참 면목없었다.
어머니는 잠시 앉을 짬도 없이 바쁘게 종종거리시는 중에도 떡국끓일 사골국물 냄비뚜껑위에 배즙팩을 얹어 따뜻하게 데웠다가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연호도, 연수도 엄마 감기 옮지 않고 건강하게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면서 3박4일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사촌들같은 대가족에 둘러싸여 재미나게 지내다 돌아왔다는 것이다.
나도 오히려 집에 있을때보다 더 편하게 매끼니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맛있는 음식먹고, 연수는 나랑 뚝 떨어져 아빠나 사촌형이랑 노는 동안 연호만 이리저리 안고 업고 놀면 되었기때문에 감기앓는 것이 괴롭긴 하였지만 그래도 수월하게 앓을 수 있었다. 고모네가 온 뒤로는 시댁에서도 종가집 큰며느리 노릇하느라 쉴틈없이 고단하게 일했을 고모가 친정에 와서도 어린 조카달고있는 내 대신 설겆이며 어머니 도와 이런저런 일들을 다 해주었다.  







+ 연수가 제 이마에 '상주곶감' 라벨을 붙이고는 '엄마, 나 로이같지?'하고 포즈를 취하길래 너무 웃겨서 쓰러질 뻔했다. 연호랑 아빠에게도 붙여주겠다해서 그러라고 하고 '상주곶감 삼부자' 사진을 찍었다. ㅎㅎ 연수는 다같이 '로이놀이'를 해야하는데 깔깔 웃기만 한다고 사진찍을 때는 그만 삐져버렸다. 아무튼 상주곶감은 맛있다. ^^ 많이 사랑해주세요~~~! (저, 곶감하는 분들 많이 압니다. 혹시 명절에 선물로 주문하시고프면 제게 연락하셔도 돼요~. ㅎ)




어머니는 일이 많아 힘들었고, 나는 아파서 힘들었던 설 명절을 쇠고 올라오며 한가지 결심을 했다. 
다음 명절에 내려갈 떄는 꼭 내 손으로 몇가지 음식을 장만해서 내려가야지..
대식구의 식사 챙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제사 음식도 준비하면서 매 끼니 돌아오는 식사 준비를, 그것도 모처럼 모이는 가족들이니 뭐하나라도 맛있는 국이나 반찬거리를 챙겨서 차린다는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급한데로 맛있는 식당이라도 가서 한끼 별식으로 해결하고 올 수있으면 좋겠지만 돌도 안된 어린 아기들이 달려있는 집이니 그도 쉽지 않다.

나도 참 철없는 며느리고 엄마다 싶다.
어머님이 하도 편하게 해주시고 솜씨좋은 분이라해도 그렇지 어쩜 그리 마음놓고 그저 얻어먹을 생각만 하고 내려갔는지...
다음에는 꼭 내가 연수삼촌 좋아하는 '돼지고기냉이볶음'도 재워가고, 불고기도 재워가고, 실버스푼 돈까스도 몇팩 싸가서 제사음식하느라 바쁜 날에는 튀김하던 기름에다 돈까스도 얼른 튀겨 식구들 점심밥상으로 차려내고 해야지.
 
아버님은 모처럼 작은댁 삼촌들까지 어린 아기낳아서 다 데리고 제사모시러 온 것이 너무 기쁘셔서 
설날 낮에도 조카들과 약주하시고, 저녁에는 외갓집가서 또 약주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작은 집 아들이 오니 내가 얼매나 기분이 좋은지, 나는 기분 최고다! 기분 최고!!'하는 말씀을 연신 하셨다.

아버님의 그 마음, 오래 뵙지는 못했지만 집안의 사정을 이제 조금은 알게된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형제가, 자손이 내집, 작은 방들마다 그득그득하게 모여 다정한 얘기 나누고 아이들 재롱보며 함께 웃는 명절.
그보다 행복한 날이 또 있을까.
아버님 행복해하시던 모습 오래 기억하고 싶고,
그 행복 이해하고 누구보다 공감하시면서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작은 몸으로 혼자 감당하셨던 고된 일감이 너무 많아
아버님과 같이 웃지 못하시던 어머님 모습도 마음에 아프게 오래 남을 것 같다.

다음 명절엔... 내가 더 잘해야지. 
아프지 말고, 씩씩하게,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보듬어야지..

새해, 모두 복 많이 받으세요.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2. 1. 6. 23:10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0^)




하고싶은 얘기가 참 많았다.
사는 일, 살았던 일, 생각나는 사람들.. 오늘 있었던 마음 부글부글해지던 일들과 반짝!하고 마음안에 행복의 불이 켜지는 것같던 순간들.

밤이 되면 서둘러 저녁밥차려 먹고 졸린 아이들 재우고 나와 그 얘기들을 길게길게 풀어놓고 싶었는데..

7개월에 접어든 연호는 윗니 3개가 거의 동시에 새로 나느라고 낮이나 밤이나 뭘 빨고물고뜯느라 한껏 예민해서 고단한 밤잠이 살풋 깰때마다 옆에 엄마가 없으면 바로 '앙~!'하고 울며 엄마를 찾았다.
어느새 만43개월을 꽉 채운 '다섯살' 김연수는 요즘 아빠의 퇴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가 아빠가 오면 조금이라도 더 같이 놀려고 애쓰는 통에 연수까지 다 재워야 컴퓨터앞에 앉을 수 있는 엄마의 애를 태웠다.  
이 와중에 내가 주로 사진을 저장하고 글을 쓰는 서재 컴퓨터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버벅거려 잠깐 컴앞에 앉아보는 그 황금같은 시간을 날려버리기 일쑤였고,
결정적으로 아이들 잠들고나면 그때부터 거실 소파에 누워 노트북을 배위에 올려놓고 자러갈 떄까지 꼼짝도 않으시는 김준철씨가 노트북을 빌려주지 않은 결과!

한달 가까이 블로그 글을 쓰지 못하고 살았다.
('75살과 105살' 글은 낮에 연수가 만화영화볼 때, 잠든 연호를 등에 업고 급히 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강릉에서 돌아왔고, 셋이 동그마니 집안에서 종일을 보내다 고향가족들이 그리워서 울었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갔고, 연수가 감기와 장염을 앓았고, 그 사이 새해가 왔고, 작은 눈이 여러차례 왔었다.
남편이 부비동염이라는 축농증때문에 생긴 두통으로 고생하다 병원 약을 먹고 거의 나아가고 있는 중이고, 
그 진단을 알기전에 연말 송년회들에서 과음하고 새벽에 들어와서는 머리가 아프다며 주말에도 거의 잠만 자는 일로 내가 속이 상해 한껏 미워했고.. 

연수를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보내고픈 유치원에 연수연호와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연수도 맘에 들어하고 나도 참 좋아서 꼭 가고싶다.. 했는데 알고보니 선생님이 한분 더 충원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상황이었다. 입학신청 시기가 진즉 있었는데 그때는 별생각이 없어서 놓치고 지나갔고, 전화했을때 '지금 와서 상담하시면 된다'는 말을 나는 바로 신청해서 3월부터 갈 수있다는 얘기로 알아들었었다. 대기자 명단만 올려놓고 터덜터덜 오래 걸어서 택시정류장을 찾아오는데 날은 추웠고 연수가 실망했을까봐 걱정했었다.

새해를 맞으며 가족들이 다들 아프니 새해 소망이 단촐해졌다.
건강한것.. 모두 건강한것.
모두 건강해서 마음껏 투정부리고, 웃고, 지지고볶으며 살 수 있는 것.

2011년의 마지막 날쯤에 남편이 내게 물었다. '올해 기억나는 일 세가지만 꼽으라면 당신은 뭘 꼽을래?'
'음... 연호 낳은거. 연호낳기 전에 연수랑 신나게 놀러다닌거.. 연호낳고나서 셋이 맨날 뒹굴뒹굴 논 거..^^;'
대답하고나서 나도, 남편도 많이 웃었다. 
정말 기억나는 일이 딱 그 일들이었다.
내 매일의 일상이었으며 내게 제일 즐겁고 짠하고 뭉클했던 시간들. 

남편이 참석한 동문회모임에서 돌아가며 그 얘길 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둘째 태어난 것, 직장 옮긴 것, 나꼼수들은 것'을 말했다했다.
2011년의 큰 일 세가지를 꼽으라면 나도 조금 다르게 꼽을 것 같다.
'연호를 낳은 것. 생활의 터전을 옮긴 것.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살림님, 고래님같은 너무 좋은 인연들을 만난 것.'

블로그의 예전 글을 뒤적여 찾아보니 2011년을 시작하며 내가 가졌던 새해소망은 두 가지였다.
'평화가 태어나기 전까지 반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어느 시절보다 '평화'로운 시절이 되기를..
평화가 태어난 후의 반년은 그 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진정 '평화'로운 시절이 되기를'

이토록 어렵고 이토록 두루뭉실한 새해소망을 품었었네, 내가...
지난 1년동안 내 마음이 늘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크고작은 고민과 갈등으로 복닥복닥 씨끄러울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평화란 것이 갈등이 전혀 없는 상황만 말하는건 아닐 것도 같다.
갈등도 있지만, 어렵사리 한 매듭을 풀고 서로 마음 다독이고 안아주며 삶의 고비들을 구비구비 넘어가는 것.. 
어쩌면 그 과정 전체가 평화인지도 모른다.

2011년의 새해소망대로 2011년의 내 삶은 연호의 출산을 기점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뉘었고, 돌아보면 그 두 시기 모두 참 즐겁고 행복했다.
연수와 함께 마음껏 걷고 웃고 텃밭에 씨를 뿌리고 블로그친구들과 광화문으로 세곡동으로 쏘다녔던 그 봄의 평화와 행복.
'아 정말로 귀한 생명을 내가 낳았구나'하고 절절이 느끼며 연호를 온몸으로 안고, 보드라운 그 살을 만져보던 가을날의 평화와 행복. 비록 긴 힘든 시간속에 찾아오는 짧은 행복의 순간들이라해도 언제든 돌아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벅찬 감동을 기억하고 있으니 내 꿈은 그것으로 충분히 이뤄진 것이다.

2012년에는 좀 작은 계획들을 세워보고 싶다.

올해에는...
우선 '운전연습'을 하고싶다. 그래서 내년쯤에는 내가 운전해서 연수 유치원도 데려다주고 아이들 태우고 친구들도 찾아가고, 숲이나 호수, 공원으로 가고 싶다.

밤에 아이들 재우고나면 10분씩이라도 요가나 체조를 해야겠다.
서른다섯살이 되서 그런가...(여기저기서 가소로워하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만.. 흠흠. ㅎㅎ) 요즘 들어 부쩍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 어깨, 팔, 다리, 허리.. 저녁이 되면 정말 몸이 안아픈데가 없다. 지금 10kg, 앞으로 더 쑥쑥 자랄 연호를 업고 안고 지내는 시간도 여전히 많고, 집안일도 많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된다.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해서 내 몸을 살펴야겠다.

가족 모두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아이들 모두 엄마를 저 혼자 온통 차지하고 마음껏 응석부리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연수에게도, 연호에게도.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저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니까.. 종일 셋이 같이 붙어있다보니 어떨때는 연수에게, 어떨 때는 연호에게 미안해진다. 주말에 아빠가 있을때 번갈아 한명씩 보는 식으로, 내가 연수를 데리고 놀러나가거나, 아빠가 연수를 데리고 놀러나가거나 해서 연수 연호가 각각 엄마와 둘이서만 눈맞추고 얘기하고 손잡고 안고 노는 시간을 가져야지.. 물론 그건 아이들에게 아빠랑 단 둘이 노는 시간도 될 것이다. 
김준철씨와도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사실 밤에 아이들 재우다 내가 애들과 같이 잠들어버릴 떄도 많고, 다행히 깨서 나온다해도 그날 지낸 얘기를 잠깐 하고 나서는 나는 나대로 모처럼 블로그도 쓰고 책도 보고 남편은 남편대로 인터넷보고 하느라 같이 뭘하며 노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늘 두 아이들과 함께 복작복작 밥먹고 집치우고 같이 노는 와중에 아이들 얘기와 이런저런 집안일 얘기를 나누는게 다였다. 올해에는 남편과 일주일에 하루쯤은 애들 재우고 집에서나마 같이 영화도 보고, 요가 같은 운동도 하나 같이 하고, 뭔가 '프로그램(?)'을 짜서 같이 놀고 싶다.^^ 옛날 데이트하던 시절처럼 약속을 정해서 놀기. 그런거 좋지 않을까? ㅎㅎ

그리고 일기를 쓰고싶다.
지금도 블로그를 쓰고 있지만 더 편하게, 짧더라도 성실하게 매일 조금씩 쓰고 싶다. 
아이들과 지내며 떠오르는 생각들, 연수와 나눈 대화 같은 것을 메모하는 습관도 키우고 싶다.
솔직한 글쓰기. 마음 깊이 꿍쳐둔 생각과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풀어내고 싶다.
 
블로그 이웃인 미탄님께서 작년에 출간한 새책의 제목인 '나는 쓰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나도 믿는다.
이렇게 써놓았으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나와 준철씨는 서른다섯살을 살고, 연수는 다섯살, 연호는 두살의 날들을 살게되는 올해.
연호가 걸음마를 시작할 것이고, '엄마'하고 부르며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걸어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돌잔치도 하겠지..
연수는 유치원에 갈지도 모르고 또 엄마와 그대로 집에서 지낼지도 모른다. 수영을 배울 수도 있고, 축구공도 전보다 제법 잘 찰 것이고,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엄마, 동생과 함께 여기저기 공원과 온데 숲을 누비고 다닐 것이다.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 소박하고 담백한 사람이 되었으면.. 살림도 그렇게 하게 되었으면.

2011년에는 두 아이들 덕분에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웃고 더 여유롭고 더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살림님, 고래님을 만나고 그분들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역시 두분 덕분에 계간지 '민들레'와 '녹색평론'을 읽게 되어 아이들도 세상도 더 깊고 따뜻하게 바라보고 품어줄 수 있게 되었다.
고맙고 또 고맙다.
언제나 제일로 든든하고, 또 가끔은 제일로 밉기도했던 남편도 고맙고
친정어른들과 형제들, 시어른들과 형제들.. 보살펴주고 힘이 되어준 분들도 정말 감사하다.   
 
2012년도 잘 살자.
서른 다섯살의 욱. 두 아이의 엄마 욱.
화이팅이다.






 
(저, 다섯살 됐습니다! 뿌듯뿌듯~^--------^)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9. 24. 00:05








지난 일요일 아침, 텃밭에 다녀왔다. 
아파트 건물들이 늘 시야를 가로막는데 익숙해져 있다가 
하늘이 막힘없이 탁 트여있고, 멀리 산자락들이 달려가는 풍경을 눈에 가득 담을 수 있는 곳에 나오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집에서 차로 10분만 달리면 이렇게 너른 평지가 펼쳐져있는데
답답한 아파트 단지안에만 갇혀지내는 삶이 안타까웠다.  

연호낳고 여름내 못와본 텃밭에는 어느새 가을이 가득 펼쳐져있었다.
우리 텃밭은 이모님께서 살뜰하게 가꾸신 덕분에 배추며 열무같은 가을작물들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모님은 무덥고 비많던 지난 여름, 연수를 데리고 가끔 텃밭을 돌아보셨다.
연수는 가지 두어개, 고추 여남은개, 파 한웅큼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와서는 
"엄마, 우리 밭에서 딴 거야!"하고 자랑스럽게 내밀곤 했다. 
비료도, 약도 뿌리지않는 우리 밭에서 자란 작고 못생긴 그 열매들을 보면서 나는 참 뭉클했었다.
초여름 어린 모종을 심던 날도 생각났고, 영성농법이라고 박수쳐주고 돌아다녔던 만삭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작은 수확이나마 텃밭좋아하는 조카며느리가 기뻐할 걸 생각하시고 챙겨보내주시는 이모님의 다정한 마음도 느껴졌었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온 들판에는 작디작은 국화과의 꽃이 넝쿨을 이루고 피어있었다.
나는 그저 쳐다보고 '아 예쁘다'하는데 이모님은 자분자분하게 꺽어서 저렇게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주셨다. 
연수와 나는 오래오래 그 꽃을 보면서 지냈다. 작은 컵에 꽂아서 식탁위에 올려두고 밥먹을때마다 쳐다보았다. 

작은 꽃한다발로 이렇게 가을이 풍성해지는구나... 알았다.
나도 아이에게 이렇게 예쁜 들꽃 다발을 만들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싶다.










등에 업힌 연호에게도 들꽃향기를 맡게해주고 싶었다.
연호야, 예쁘지... 꽃이란다. 예쁜 들꽃..










일요일 텃밭 나들이는 늘 오전 9시쯤 시작된다. 
이 날도 집에 돌아오니 열시 반. 
일요일은 아이스크림 먹는 날! 연수가 일주일동안 손꼽아 기다리던 바로 그 날. ^^
고대하던 '콘'(꼭 정문앞 슈퍼에서 사야한다. 생협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맛있단다ㅠ)을 하나 들고 연수는 한껏 행복해했다.
주말이면 연수와 둘도없는 짝꿍이 되어 놀이터로, 도서관으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빠도 콘 하나 먹고 으쌰으쌰!










일요일 아침 텃밭의 행복. 아이스크림의 행복. 
네살 연수가 기억할 순 없더라도 행복한 그 기운만큼은 연수 마음안에 마르지않는 우물로 남아있다가 
나이든 어느날 고단할때 찰랑찰랑 차있는 그 물을 마시고 기운차릴 수 있었으면..











텃밭에서 솎아온 여린 배추잎으로 된장국을 끓여먹었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밭이 있다. 작은 밭이.
도시의 뿌리뽑힌 삶이지만 작은 조개발 하나만큼, 꼭 그만큼은 땅을 딛고 살고있는 기분이다.
작은 발바닥으로 전해져오는 땅의 기운, 땅의 온기를 받으며 몸과 마음 모두 큰 위로를 받는다.
 
올 가을, 연수연호와 더 자주 밭에 나가봐야겠다. 
가래여울의 하늘만 보고와도 남는 장사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9. 17. 01:49








화요일 저녁7시에 상주에서 출발해 10시에 서울집에 도착했다.
잠든 두 아이를 한 사람이 하나씩 껴안고 집으로 올라왔다.
방에 들어가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보니 남편이 주차장을 오가며 올려놓은 짐들이 부엌에 가득했다.
그중에 이 상자를 보고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젖먹이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치른 명절의 고단함, 밤늦은 귀경길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청상할머니가 챙겨주신 고추, 큰 호박, 집에서 키우신 콩나물만 봐도 웃음이 나는데 
자른 수박조각까지 집에두면 먹을 사람 없다고, 아이들 잘 먹으니 가져가라고 부득부득 넣어보내셨을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상주시댁을 떠나기전에 청상외가에는 남편 혼자 다녀왔기때문에 나는 이 짐을 못 봤었다. 
시외할머니인 청상할머니는 큰 물김치 한통과 추석 전날 연수까지 아빠와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같이 캤던 고구마 한박스, 들기름 한병까지 챙겨보내 주셨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셨으리라.. 
당신 손으로 키워낸 여러명의 손주손녀들중에 비록 외손주이긴하지만 첫 손주며느리이자 하나뿐인 손주며느리에게 우리 시어머니가 챙겨주시는 것에 조금이라도 더 보태서 챙겨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증손주의 백일을 같이 보내려고 마음먹고 내려왔다가 그러지못하고 올라가게 된 손부와 증손주가 안쓰럽기도 하셔서 부득부득 더 뭔가를 챙겨주셨을지도.

우리 시어머니는 청상외할머니의 큰 딸이다.
위로 오빠가 둘인데 제일 큰오빠는 아주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큰외숙모님이 딸 셋을 키워서 위로 둘을 시집보냈고 막내시누는 올가을에 결혼을 앞두고있다. 두 딸은 모두 아이를 둘씩낳고 열심히 잘 산다. 돌아가신 큰외삼촌은 인물도 참 좋으시고 아주 똑똑하셔서 동네에서 다들 칭찬하는 재목이셨다는데 안양에 있는 가죽회사에 취직해 일하시다 과로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마음에 제일 큰 기둥이었을 큰아들을 일찍 잃은 청상외할머니의 마음이 어떠셨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둘째아들인 평택외삼촌은 언제뵈도 다정하고 참 좋은 분인데 외숙모께서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를 갖고 계셔서 명절이나 제사같은 집안행사에 일절 참가하지 않으신다. 외삼촌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셨는데 그중 큰 아들은 어머니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있어 병역을 거부해 대신 감옥살이를 했다. 작년 설인가에 그 사촌을 처음 보았는데 뽀얀 피부에 맑고 여린 인상이었다. 그댁 시누도 역시 조금은 핏기없는 하얀 얼굴에 고요하고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었어서 아마 내가 한번도 못뵌 외숙모님이 그런 분인가 짐작해보았다.
그리고 셋쨰가 우리 시어머니, 그 아래가 서울이모님, 그 아래는 구미이모님, 그리고 막내가 서울에 계시는 외삼촌이다.
서울이모님은 일찍부터 동대문에서 이모부님과 함께 가죽옷장사를 해오셨고 구미이모님은 아이들키워놓고 지금은 큰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신다. 서울외삼촌은 6남매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는데 그 첫등록금을 돌아가신 큰외삼촌이 직장다니실때 내주셨다. 본인이 돈이 없이 대학을 못간것이 큰 한이었던 큰외삼촌이 막내외삼촌만큼은 꼭 대학에 보내주겠다고 안양집으로 불러 데리고 살면서 대학 등록금도 내주셨던 것. 그러던 중에 큰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막내외삼촌은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다행히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실 수 있었다. 회사는 순조롭게 성장했고 막내외삼촌은 회사의 중역이 되셨다. 막내외삼촌은 돌아가신 큰외삼촌의 딸들, 특히 그 딸들이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돌잔치같은 대소사를 치를때는 자신이 그네들의 친정아버지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해주셨을만큼, 아니 그 이상의 재정적 후원을 하는 것으로 큰외삼촌께 받은 대학등록금의 오래된 정을 되갚고 계신다. 종교적인 이유로 제사를 모시지않는 둘째 외숙모를 대신해 막내외숙모께서 제사도 모시고 든든하게 집안살림을 꾸리고 계셔서 청상외할머니께 참 다행한 일이지만, 다른 자식들의 형편은 그리 좋지않은터라 청상외할머니는 그것이 또 마음이 많이 쓰이실 터이다. 






(이번 명절에는 사진을 찍지못했다. 이 사진들은 지난 3월 청상할머니 생신때 시댁식구들과 단양에 놀러갔을떄 연수삼촌이 찍어준 것이다.)



우리 시어머니는 식당일을 하신다.
올해 연세가 쉰일곱. 아주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녁6시부터 새벽2시까지 곱창불판을 닦고 서빙을 보고 아르바이트생들을 지휘해가며 장사잘되는 곱창집의 2층홀 전체를 책임지고 일을 하시는 것은 작은 어머니의 몸에 무리하고 고된 일이다.
남편이 어릴때 시아버지는 오토바이가게를 하셨다. 새오토바이도 팔고 오토바이 수리도 하는 '현대오토바이'란 간판이 걸린 작은 가게앞에서 어린 삼남매를 나란히 세워놓고 찍은 사진을 나도 보았다.
가게는 잘 되었고 어머니는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셨다. 우리 어머니는 요리를 참 잘하시는데 아마 그때 남편과 시동생들은 참 즐거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뚝딱뚝딱 오토바이 고치는 모습도 구경하고,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께 귀여움도 받으며 다정한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으며 작은 집이지만 깔깔거리며 함께 뒹굴었겠지.. 휴일이면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삼남매와 젊은 엄마까지 모두 같이 타고 시원한 바람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공원이나 절로 나들이를 갔을 것이다. 남편의 어린시절 사진에는 그런 모습이 가득하다.

남편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시아버님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술을 드신채로 오토바이를 타다가 그만 사고가 난 것이다.
시아버님은 오래 입원을 하셨고 오토바이가게도 접으시게 되었다. 그때 다치셔서 지금은 한쪽 다리를 살짝 저신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는 잠시 식당을 여셨다가 잘 되지않아 이내 접으셨다한다. 
그 뒤로 한동안이 우리 시댁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마침 그떄 시골집에 혼자 사시던 시할머님이 치매에 걸리셔서 시내에 있는 작은 아파트인 우리 시댁에 모셔와 시어머니가 시할머니 수발까지 드셔야해서 시어머니에게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말로 힘든 몇년이 흘러갔다.
그때 어머니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일찍 철든 딸, 바로 우리 시누였을 것이다.
남편과 시동생이 대학생이었던 시절, 시누는 여상을 나와 일찍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누이는 적은 월급을 쪼개 알뜰하게 저축하고 자기 생활을 꾸리는 한편으로 어려운 엄마에게 돈을 부쳐주었다. 
학생운동한다고 대학을 6년씩이나 다니는 오빠에게도 용돈을 보내주고 결혼한 후에는 한동안 같은 지역의 대학에 다니던 친정동생을 자기집에서 거두기까지했던 시누. 언제보아도 속깊고 현명하고 다정한 시누..







시아버님은 오토바이가게를 접으신 후로 친척조카가 하는 작은 건설업체에 취직해 건설노가다를 해오셨다. 주로 시골별장같은 단독주택이나 황토집을 짓는데 아버님은 워낙 어떤 기계도 잘 다루시고 손놀림이 좋으셔서 일감은 늘 많으신 것 같다. 아버님 연세가 올해 예순. 조금만 더 있으면 집짓는 일이 힘에 부치실 것이다.
우리 아버님 성함이 김자 영자 구자, '김영구'이신데 젊은 시절 동네에서 별명이 '영구박사'였단다. 어떤 기계든, 어떤 일감이든 척척 잘 고치고 해내셔서 그랬다는데 어린시절 또 동네에서 참 알아주는 신동(?)이었던 남편도 꿈이 '박사'였다. '박사'란 굉장히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자기는 커서 꼭 박사가 되겠다고 말해서 열심히 사는, 그러나 가난한 젊은 부부였던 시부모님의 삶에 큰 희망이고 기쁨이었던 큰아들.   

큰아들은 오래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그 빈소에 내려가지 못했다.
대신 경찰서 형사들이 장례식장 주변에서 3일을 함께 보냈다.  
시아버지는 그때 얘기를 종종 하신다. 원래 말수가 별로 없으신 분인데 그 얘기는 워낙 마음에 맺히셔서 그런지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있다 남편이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어서 수배되었을때 이야기가 나오면 할머니 장례식 얘기를 빼놓지않고 하신다. 
막내외삼촌과 어머니도 남편을 데리러 학교에 오셨을때의 이야기를 하신다.
이번 명절에 그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연호가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연호의 등장으로 할머니할아버지가 온통 갓난아이에게 마음을 뺏기셨고, 연수와 시누의 두 아이들까지 이제는 넷이나 되는 손주들을 돌보고 그 재롱에 웃고 말썽에 야단치고 하다보니 명절 연휴가 휘리릭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에 어머니는 내게 명절쇠고 며칠더 시댁에 있다가 주말에 연호 백일상을 같이 차려서 하고 올라가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바로 '좋아요, 어머니. 감사합니다'했다. 그래서 시댁에서 일주일 지낼 요령으로 연호 기저귀며 아이들 옷같은 짐을 넉넉히 싸서 내려갔다. 연수 때는 백일에 시부모님과 시누 가족이 모두 서울 우리집으로 오셔서 같이 백일을 치뤘었다. 그때는 우리가 차가 없어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내려갈 방법이 없기도 했고 연수가 첫손주라 어른들이 꼭 오셔야겠다고 어렵게 일을 빼고 시간을 내서 찾아오셨었다.
연호때는 그냥 우리 가족끼리 서울에서 밥한끼 정성껏 지어서 먹자고 처음에 어머니랑 얘기했었는데 막상 백일이 가까워오니까 정많은 어머니께서는 둘째손주의 백일상도 직접 차려주고 싶으셔서 내게 내려와서 같이 지내자고 하신 것이었다.

시댁에 내려가 지내는 것이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는 편하다. 시어머님이 먹을 것을 다 챙겨주시고 낮에는 연수를 데리고 놀이터에도 틈나는대로 나가주실 것이니 나는 어린 연호만 돌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머님이 너무 힘드시다는 것..
어머니는 저녁6시에 출근해 새벽2시에 퇴근하시는데 씻고 이것저것 정리하고나면 새벽3시쯤 잠이 드신다.
아버님은 새벽6시반에 일어나 출근을 하신다. 보통때는 아버님은 거실에서, 어머님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아버님은 어머니를 깨우지않고 혼자 조용히 밥을 차려드시고 나가신다. 그러면 어머니는 조금 늦은 아침까지 잠을 주무시고나서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드시는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가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안방을 내주신다.
작은방이 하나 더 있지만 요즘은 일본지진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중단하고 돌아온 시동생이 잠시 다녔던 직장도 문을 닫는 바람에 다시 상주집에서 지내고있는터라 어머니는 천상 거실에서 주무셔야한다. 그러면 새벽에 아버님이 출근할때 잠을 깨시게되고, 또 연이어 아침일찍 일어나는 연수와 연호도 깨서 할머니를 찾을터이니 어머님이 제대로 쉬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어머님 성격에 손주들 돌보느라 평소에 너무 고생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를 며칠이라도 맛있는것 해서 먹여주고, 손주들하고 많이 놀아주려고 하실게 분명한데 그러면 낮에도 제대로 쉬지 못해 저녁일하는 어머니에게 너무 무리한 며칠이 될 것이었다.

마침 어머님은 이번 명절 내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셨다.
갑상선이 안좋아 몇년째 약을 드시고계신 어머니는 피로가 많이 몰려오면 두통도 심해지시는 듯하다.
명절이란 것이 오랫만에 모인 가족들에게는 참 반갑고, 맛있는 음식에 거나에게 술잔 기울이며 취할 수도 있고, 아이들 재롱보며 즐거워할 수있는 시간이지만
대식구의 식사를 계속 차리고, 설겆이와 청소와 빨래를 해내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고된 노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명절 전날과 명절날 딱 이틀만 식당일을 쉬실 수 있었던 어머니. 그러나 그 이틀동안 식당에서 일할때보다 더 힘들게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가족들을 먹이고, 좁은 집에서 어린아이들의 칭얼거림에 밤잠을 설치셔야했던 어머니는 연휴 마지막날, 너무 힘들어서 안되겠다며 미안하지만 그냥 서울로 울라가는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미안해하시지 말라고, 괜찮다고, 어머니가 너무 힘드신데 제가 일을 덜어드리지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연휴 마지막 날, 어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못하고 식당으로 나가시면서 우리가 먹을 저녁밥을 다 차려주고 가셨다. 
설겆이는 힘드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고...

어머니가 볶아주신 불고기 반찬을 해서 우리 가족은 모두 든든하게 저녁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그 시간, 식당에서 반찬없는 저녁밥으로 식사를 하셨을 것이다.
나는 설겆이를 했다.
내가 조금더 단단한 사람이어서, 어머니께 부담을 드리지않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 시부모님께 차려드리고 내 아이들도 먹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껄... 그러면 어머니께서 우리가 시댁에서 지내는 것을 조금은 덜 걱정하셨을지도 모르는데..
내년 설에는 연호도 좀더 컸을 것이고, 나도 좀더 능숙한 주부가 되어서 어머니께서 내 밥 차려줄 걱정은 안하시게 하면서 시댁에서 지내다 와야겠다... 그런 생각도 했다.

상주를 떠나며 어머니께 문자를 썼다. '어머니 저희 인제 출발했어요 명절쇠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잘계셔요 어머니'
금방 답장이 왔다. '내가 많이 미안하구나 형편상어쩔수가 없구나 내체력도따라주지못해 보내니 마음이너무아프구나 조심해서가고 도착하면전화하렴 미안하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 쿵하고 내 마음에도 아프게 와서 부딪혔다.
집에서 우리에게 챙겨주실 전이며 과일보따리를 싸시면서도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보내놓고나면 또 마음이 그렇게 아파'라고 말씀하셨었다. 어머니.. 고된 일로 손가락끝이 모두 뭉툭하게 닳은 어머니가 더 해주지못해 마음이 아프시다고 한다. 어머니를 그렇게 마음아프시게했다는 사실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

다시 문자를 썼다. 
'어머니 힘드신데 저희가 더 보탬이 돼드리지못해 제가 더 죄송해요 건강조심하시고요 연호연수 모두 이번에 할머니할아버지 사랑을 많이받아서 더 잘 클것같아요 감사해요 어머니'하고 빨간 하트를 하나 붙였다. 

다음날 전화할때 어머니는 '괜히 보냈다 싶어 하루종일 마음이 안좋았다. 고단해도 며칠만 참으면 되는데.. 미안해서 어쩌나'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울음이 살짝 섞인것 같았다.

연호낳고 2주동안 어머니가 우리집에 와서 산후조리를 해주고 내려가실때, 엘리베이터앞에서 배웅하면서 나는 울었다.
감사해서, 그 다정한 정이, 우리를 위해 쏟아주신 수고가 감사하고 그리워서 펑펑 울었었다.
연수를 낳았을때도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해주러 오셨었다가 삼일만인가, 연수 황달떄문에 조리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서 일찍 내려가셨었다. 그때 병원에서 어머니와 헤어질때도 눈물이 났었는데 그때는 연수도 걱정되고 나도 왠지 무섭고 첫아이를 낳은후의 두려움에 어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서글픈 마음이 컸었다.
연호낳고 2주동안 함께 지낸 것이 시어머니와 내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지내본 것이었다.
그 기간동안 힘든 것보다는 고마운 것이 훨씬 많았고, 불편한 것보다 정겹고 든든한 마음이 훨씬 컸다.
우리 어머님이 워낙 며느리에게 잘해주려 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둘째아이라 그런지 내마음이 훨씬 여유롭기도 해서 어머님하시는 젖모자라지 않을까, 분유 좀 먹이지 하는 걱정같은 것도 신경곤두세우지않고 들을 수 있었다. 연수를 보살피는데는 철없는 연수가 할머니께 버릇없이 굴고 할머니 싫다 어쩐다해도 할머니만큼 든든하고 살가운 분이 없었다. 
그 2주가 지난후 나는 어머니를 지난3년보다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연호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고 하셨다. 
지난 명절동안 두통으로 힘들어하시면서도 연호를 볼 때만큼은 정말로 환하게, 아픈 것도 모두 잊은듯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나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명절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연호에게 젖을 먹이며 연수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으로.

서울집에 도착해, 신생아파트단지의 삭막한 콘크리트벽들 사이로 들어서며 문득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가붙이도, 다정한 친지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내가 왜 살고있지.. 하는 생각. 
가족들속에, 복도에만 나오면 상주를 둘러싸고있는 아름다운 산의 능선들과 하늘과 연호가 배속에 있었던 지난 설에는 정말 잘생긴 매 두마리가 멋지게 하늘을 나는 모습도 오랫동안 볼 수 있었던 상주시댁을 떠나온 직후라
서울, 그것도 이제 막 둥지를 튼 썰렁한 신축 아파트 단지가 참 쓸쓸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다시 지지고볶는 일상으로 돌아오니 서울집에 대해 느꼈던 이질감, 소외감같은 것은 빠르게 잊혀졌다.
더운 밥 해먹고, 아이들 키우고,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살림하는 집.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곳이지, 이 집은.
이웃들과 만나 담소도 하고 명절에 생긴 먹거리들도 서로 나누고.. 연수듣는 문화체육관 수업도 다녀오고 하다보니 주말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어머니도 일상으로 잘 돌아가셨기를..
오래 마음아파하시지말고, 잘 쉬시고.. 고단한 생활속에서도 작은 행복들을 느끼시기를.

명절 생각을 하다보니 시댁 이야기가 하고싶었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글이 너무 기니까.. 다음에 또 해야겠다.
시댁의 여러 식구들과 그 삶과 사연을 통해 나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는지, 얼마나 아픈 이야기가 많은지를 배우고 느끼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때로는 내게 힘이 되기도하고,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근심하게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이 더 커지고 깊어지기를 부디 바라고 있다.

나는 우리 시댁식구들이 좋다.
어쩌면 버거울수도 있지만 지금 내 작은 그릇안에 그 분들이 담아주시는 따뜻한 사랑이 고맙고 좋다.
속깊은 시누이와 꿈많은 시동생도 좋다.
사는 것이 너무 고단하다보니 서로에게 짜증내거나 퉁명스러울 때가 많은 시부모님의 모습이 안쓰럽기도하고 애잔하기도하다. 약주 좋아하시는 시아버님, 화도 잘내고 웃기도 잘 하시는 시어머님도 좋다. 

연수와 연호가 할아버지할머니를 더많이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이 글을 보고 할머니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와 많은 이모삼촌할머니할아버지들의 사연을 조금은 더 알고, 애정과 이해를 키울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요즘 할머니가 제일 보고싶으실 연호 얼굴을 한장 더 올린다. 사진으로나마 아이들 잘 크는 모습 많이 보여드려야지..)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5. 17. 00:27









2주만에 다시 찾은 우리 텃밭.
멀리서부터 밭이 뭔가 달라져있다는걸 알 수있었다. 와... 이 기대감~!
연수야, 상추가 많이 자랐네~~! ^^










이모할머니께서 연수에게 상추따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와. 저 탐스러운 상추들~!









연수가 처음으로 수확해본 상추. ^^
엄마아빠는 신혼초에, 그러니까 연수가 태어나던 그 봄에 아파트 베란다에 작은 스티로폴 상자텃밭을 마련해서 상추와 방울토마토를 심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연한 연두빛 상추잎들을 몇번 따서 쌈싸먹던 기억이 새롭다.
그게 엄마아빠의 첫 농작물 수확이라면 수확인데.. 연수의 첫 수확은 음. 때깔부터 아주 다른.. 정말 씩씩하고 풍성한 상추 수확이다.










이모할머니와 연수가 함께 씨를 뿌렸던 쑥갓도 어느새 싹이 돋아 예쁘게 자라있었다.
참 신기하다.. 고 작고 마른 씨앗들에서 이렇게 푸르고 싱싱한 잎들이 피어오르다니...
이모할머니 얼굴도 무척 즐거워보이신다.










ㅎㅎ
중요부위를 가려주지도 못하고.. 미안하다, 연수야. ^^;;;
그래도 네가 거름뿌린 그 땅에서 토마토랑 가지랑 고추랑... 모두모두 잘 자라줄거야. 

옛부터 오줌똥은 참 귀한 거름이라 오줌은 급하면 할수없이 남의 밭에도 싸지만 똥은 꼭 참았다가 자기 집 뒷간에 와서 싸라고 어른들이 이르셨다는데 앞으로 연수도 텃밭갈때는 미리 집에서 싸지말고 참았다 밭에 싸도록 일러야겠다. ㅎㅎ

 









60포기 상추의 첫 수확이 얼마나 푸짐했는지 커다란 마트비닐봉지 세 개가 가득 찼다.
일주일만 지나면 또 쑥 자라있을 것이라 해서 옆으로 벌어진 제법 큰 잎들은 거의 다 땄다.
따기전과 딴 후의 부피 차이가 저리도 크다.

참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작은 모종을 사다 심은 것 뿐인데, 나머지는 모두 하늘이 햇빛과 비를 주고 땅이 양분을 주었고
그리고 상추 제안의 힘으로 저렇게 자라주었다.
자연은 이렇게 거저 주다시피 고마운 식량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구나... 정말 고마워해야겠구나...
이 자연을 함부로 대해서는 절대 안되겠고, 작은 수고라도 더하는데 정성을 다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깊이 했다.











주말농장 수돗가 근처에 있는 이 나무는 열매를 보고서야 앵두나무인 것을 알았다.
처음 왔을때 하얗고 작은 꽃이 정말 많이 달려있었는데 오늘은 꽃진 자리마다 초록색 앵두 열매가 얼마나 오밀조밀하게 달려있던지... 
고향집 뒷동산에는 큰 앵두나무가 있어서 나는 자라는동안 해마다 그 열매 따먹는 즐거움이 참 컸다. 
연수에게는 앵두열매 따먹는 즐거움을 알려줄 길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주말농장에 오면 그 기쁨을 누리게해줄 수 있겠구나 싶어 무척 기뻤다.
6월이 오면 앵두가 익겠지.. 엄마는 평화보느라 혹시 못 오더라도 연수는 아빠와 함께 와서 상추도 따고, 앵두도 따서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가져다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 










주말농장에서 연수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바로 이 공동농기구창고. 
연수에겐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이 곳에서 이런저런 연장들을 구경하고, 차례로 꺼내서 흙을 파헤쳐보는 일은 해도해도 질리지않는 연수의 놀이다.  











어른들이 새 모종을 심고, 물을 주느라 바쁜 동안 연수는 농기구창고앞에 쭈그리고 앉아 갈퀴질에 여념이 없었다.










저도 나름대로 무엇을 심고, 또 그걸 캐내는 일에 흠뻑 빠져있다.











토마토 모종에 노란 꽃이 피었다.
토마토꽃을 보니 성주에 계신 토마토새댁님 생각이 나서 얼른 사진 한장 찍었다.
언니~, 저도 토마토를 심었어요! ^^
겨우 모종 5개 심어놓고 '아~ 나도 인제 토마토 농사를 짓는다!' 하고 으쓱거리는 철부지새댁. ^^
그래도 비료를 좀 써야되지 않을까... 넌지시 이야기하시는 이모님께 화학비료 안쓰고 잘 키워보자고, 제가 아는 분께 천연거름만드는 법을 배워오겠노라고 말씀드려 놓았기 때문에 얼른 토댁언냐 블로그에 가서 효소발효시켜 만드는 천연영양제(?) 비법을 배워와야한다. 언니, SOS~~!!!
  











주말이나 되야 다시 비가 온다기에 상추랑 여러 모종들에게 최대한 넉넉하게 물을 뿌려주고 왔다.
힘쓰는 일은 이모님과 신랑이 도맡아 해주시고... 새댁은 역시나 박수만 열심히 치면서 '모두 너무 고맙다, 앞으로도 잘 자라다오~' 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나누며 '영성농법'만 실천하고 왔다. ^^;;;











돌아오는 길, 텃밭 옆에 있는 여러 농장의 비닐하우스들 중에는 저리 예쁜 들꽃들만 한가득 키우고 있는 곳도 있었다 
연수를 세워놓고, 이모할머니께서 'V'를 가르쳐주셨다.  
아이 웃음이 꽃만큼 환하다.











앗~!!! 그런데 이게 왠 일~~~!
차에 타려고 하는 순간, 우리집 몫으로 꾸린 상추봉지 안에 들어와앉은 달팽이 한마리를 보았다.
"앗, 달팽이다!"
내 말을 듣고 쪼르르 달려온 연수는 달팽이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 어쩌지.. 제 살던 곳에 두고가야하나... 우리집에 데리고 갈까?
연수는 집에 데려가자고, 연수가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잘 보살피겠다고 하고.. 나도 연수에게 달팽이를 가까이서 보여주고싶은 마음에 갈등하면서도 그대로 데리고왔다. 











집에 와서 작은 유리그릇 안에 상추잎과 함께 넣어주고 물을 좀 뿌려주었다.
연수는 자주자주 달팽이집 안을 들여다보며 '엄마, 달팽이가 어디 갔지? 달팽이 왜 안 움직여?"하고 물으며 궁금해했다.
달팽이는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유리병에도 붙었다가, 상추잎 위에 올라가기도 하며 갑자기 바뀐 환경에 어리둥절해하는 분위기다.
나는 저 녀석을 원래 살던 곳에 돌려보내야하지 않을까... 내내 갈등하면서도
연수가 달팽이가 집에 있어서 너무 좋다고 얘기하며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살아있는 무언가에 마음쓰고, 보살펴주고싶어 하는 모습이 좋아서 못이기는척 그냥 두고 있다.
신랑도 퇴근해서는 달팽이집을 들여다보고 '연수야, 달팽이가 상추 먹었네! 상추잎에 구멍이 났어~'하고 불러서 둘이 또 들여다보고 얘기하는 모습도 반갑고 예쁘다.
새식구가 있다는 것, 생명이 하나 더 같이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뭉클하고 고마운 일이다.
달팽이에게는 갑자기 천지개벽해서 낯설고 답답한 곳에 끌려와있는 무서운 날들일까봐 미안하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우선은 달팽이집에 흙을 좀 넣어주고.. 그리고 다음 주말에 텃밭갈때 다시 데려가서 풀어줘야지... 싶은데 연수와 잘 얘기를 해봐야겠다. 
 











어제 아침에 수확한 상추를 흙도 안 털어내고 봉지째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점심에는 결혼식에 다녀왔다.
블로그로 우리 텃밭 이야기도 늘 같이 해왔던 신랑의 친구들께 '우리 오늘 상추 수확했어요~ 우리집 가서 삼겹살구워먹어요!' 했더니 두 가족이 즐겁게 놀러와주었다.
연수친구 가원이네와 쭌이모네와 함께 뚝딱뚝딱 삼겹살에 그야말로 상추만 놓고 저녁밥을 먹었는데 갓 따온 상추는 정말 싱싱하고 맛있었다.
다른 반찬이 너무 없어 미안하였지만 상추만큼은 여섯명이 먹고도 반절쯤 남을만큼 푸짐했다.
먼길 흔쾌히 와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준 친구들, 모두 고마워요~!^^ (상추 많이 먹어준 것도 감사감사~ㅎㅎ)
 









상추 사진 좀 찍어달라했더니 육식을 사랑하는 연수아부지.. 고기에 초점을 맞춰버리셨네~^^;;

상추는 다음 주말에도(비가 많이 오면 어렵겠지만) 수확할 예정이다. 
다음주엔 토마토에 버팀목도 세워주고, 부추랑 쪽파랑 호박도 조금씩 심기로 했다. 
네 평 텃밭인데 심을 수 있는 것도, 먹을 수 있는 것도 얼마나 많은지... 땅은 정말 보물창고.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다른건 없어도 갓딴 맛있는 상추쌈과 상추 겉절이 푸짐하게 차려서 밥 한그릇 같이 뚝딱 먹어요~! ^^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5. 1. 22:17









밤새에 꽃나무가
얼마만큼 자랐나?

아기가 아장아장
꽃밭으로 가보네.

밤새에 병아리가
얼마만큼 자랐나?

아기가 갸웃갸웃
닭의 어리 엿보네.

밤새에 우리 아기
얼마만큼 자랐나?

해님이 우리 마당
밝게 비춰 보시네.


- 윤석중 동시 '얼마만큼 자랐나' 전문.











텃밭에 상추심고 일주일 뒤였던 지난 24일.
세 식구가 오전에 주말농장에 다녀왔다. 

상추가 많이 컸을까, 쑥갓 씨앗은 싹을 틔웠을까... 도란도란 얘기하며 가는 길이 즐거웠다.
가보니 상추들은 아주 조금 큰 것도 같았고(?^^;), 쑥갓 씨앗은 잠자고 있는지 소식이 감감했다. 
그래도 그게 밖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 잠잠한 것이지 땅 속에서는 지금 부단히 땅을 뚫고 여린 새싹을 내보내려고 씨앗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상추도 고만고만 해보이지만 새로운 땅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짧은 일주일 사이에 잎사귀도 전보다는 넓혀놓았으니 대단하고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이 날은 작물을 더 심으려고 간 것은 아니고 그저 궁금해서 보러 간 길이라 딱히 할일은 없어 그저 상추들 얼굴보며 웃고만 있었다. 
그래도 연수는 아쉬운지 농기구창고에서 삽을 꺼내달라더니 저렇게 몇번 밭을 다지고 두드렸다.
나는 영성농법을 실천하느라 박수를 힘차게 여러번 치면서 '잘 커라, 고맙다' 얘기하고 왔다. ^^











밭일 대신 이 날은 우리 텃밭 바로 건너편에 있는 한강을 만나러 가보기로 했다. 
주말농장이 있는 이 마을에는 '가래여울'이란 예쁜 이름이 붙어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근방 강가에 가래나무가 많고, 예전에 올림픽대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지금 강동대교 근처가 물살이 아주 센 여울목이었어서 '가래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고 적혀 있었다.

갈대와 잡풀이 무성한 언덕위로 자전거들이 달리는 것이 보였다.
차들은 다닐 수 없게 철문이 닫혀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녀 길이 만들어진 곳으로 들어와 올라서니 자전거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자전거도로를 건너면 만나는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 
큰 강을 본 연수. 조금은 얼떨떨하다.  










내려가보자~!
햇빛은 좋고, 강은 푸르다. 더구나 여기는 시멘트 싹 발라진 인공 제방이 아니라 흙과 물이 그대로 만나는 자연의 강. 
갑작스레 펼쳐진 강 풍경에 나도 놀라고, 마음이 시원해졌다. 
 










연수, 뛰어간다.











강물이 잘그락, 잘그락.. 자갈을 흔들고 있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강물 자락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게 얼마만인지.
작년 여름 여행 이후로 강가에는 처음 서보는 것 같다.
이사오고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두어번 가긴했지만 그곳도 아무래도 인공의 물인지라 이토록 여린 강의 느낌은 받지 못했다. 
강이, 한강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을 걸고 있었구나.. 
 










연수는 조금 무서운지 아빠에게 손을 잡자고 해서는 강물 아주 가까이 가서 돌멩이를 몇번 던져보았다.
 










하늘과 구름도 참 예쁜 날이었다.











아빠, 좀 더 놀자~!
연수야.. 그만 가야해...











마음 같아서는 이 그림같은 강가에 오래도록 자리펴고 앉아 강물과 하늘을 쳐다보다 오고싶었지만...
우리가 여기를 빨리 떠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는 바로 이 사진 한가운데, 갈대밭 입구에 서있는 작은 팻말 때문이다.
팻말에는 작은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뱀조심"

헉!!! 뱀이라니!!!! -.-;;;;;
정말이야? 정말? 아~~~ 뱀이라니~~~~!!!

뱀은 내가 제일로 무서워하는 생물.
인공의 공원과 제방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여기부터는 한강의 생태계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마우면서도
아... 뱀이라니... 생각만해도 소름이 오싹 돋아 나는 그만 '어서 가자, 어서 가자'하며 아이를 채근해 풀밭을 떠나고 말았다.
강가에서 사진 몇장을 찍은 것도 실은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림같은 강가를 떠나와 자전거도로로 올라가는 삭막한 이 시멘트 길위에서
그나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방에 싸온 간식을 먹었다...ㅠㅠ
 
그리고 두번째 이유인, 이날 오후에 우리집에 오시기로한 손님들을 맞으러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


일주일이 지나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문득 궁금해진다.
한강의 뱀들.. 잘 있을까?
들쥐도 잡아먹고, 개구리도 잡아먹으면서 그 녀석들은 오늘 하루 잘 살았을까.
황사는 이리 심하고, 올봄은 날도 춥고... 방사능비까지 내리는 이런 힘든 세상에 그 녀석들도 얼마나 살기가 고단할까..

한강이 살아있는 강이었을 때는
강변의 모래들이 자정작용을 해줘서 물도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여름에는 해수욕하는 인파도 참 많았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가래여울'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니 예전에는 여기에 나루터가 있어서
멀리 강원도 정선에서부터 나무파는 사람들이 굵은 나무기둥을 묶어만든 뗏목을 타고 내려와 가래여울을 지나 마포로 갔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 사람들이 강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던 그 날들에는 외려 뱀있는 강가에 내려가는 일도 지금보다는 덜 무서웠겠지.
뱀들도 사람 많은 곳에는 나오질 않았겠지..
한강을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린후 살곳잃은 뱀들은 개체수도 많이 줄었을테고, 그나마 남은 녀석들이 여기, 가래여울부터 두물머리로 이어지는 그나마 남은 야생의 강가와 풀밭에 어렵사리 모여살고 있겠지.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의 너구리들처럼 사람에게 쫓겨 평화롭게 살던 숲을 잃고 헤메고 또 헤메다 겨우 살아남았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이 녀석들을 야속해할 것도 아니고 되려 미안해해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무섭고 아쉬운건 어쩔수가 없네..ㅜㅜ
봄에는 연수를 데리고, 가을에는 평화까지 데리고 텃밭에 나와 푸성귀를 따고 이곳 강가에서 오래 바람을 쐬고 싶었던 내 꿈이
뜻밖의 뱀소식으로 주춤하게 된 것이..

자연은 좋지만 뱀은 포용할 수 없는 나의 편협한 자연관을 반성하며
예전에 보았던 최성각 작가의 산문집 <달려라 냇물아>를 다시 들춰보았다.
환경단체 '풀꽃세상'과 '풀꽃평화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작가에게도 뱀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이야기가 기억나서였다.

"뱀에 대한 공포는 학습된 것인지 본능적인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던 저로서야 뱀에 대한 공포가 학습되었을 리 없는 노릇이었습니다만, 뱀은 징그럽고 미끈거리고 독이 있다는 것마저 알았을 때에는 공포스러운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중략)..  하지만 "어떤 못된 뱀도 나쁜 사람보다는 착하다"는 말을 우연히 만난 이래, 제게 뱀은 더이상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사십 중반이 넘자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자들은 거기에 뱀이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어서 그 말에 대한 제 공감은 깊어지기만 합니다." (최성각, <달려라 냇물아> 134~145쪽, 녹색평론사)

흑. 아직 내가 삼십대중반이기 때문일까... 철없는 나는 아직 사람보다 뱀이 무섭다. ㅜㅜ  
하지만 이 분도 다른 글에서는 이렇게도 썼다.
 
"사람을 만나면 뱀이 더 놀란다는 말도 있고, 그 말에 십분 공감도 하지만 안 만나면 사실 더 좋은 생물이 바로 뱀이다. 뱀이 보이는 순간 그 일대의 공기 밀도가 달라진다...(중략)..  뱀 이야기를 카페에 올렸더니만, 정선에 사는 시 쓰는 한 선배가 "거위를 키우면 뱀이 안 나타난다"고 조언했다. 본시 나는 귀가 엷은데다 그 선배가 직접 거위를 키우고 계신 분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믿었다. 선배는 뱀이 종소리를 싫어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위를 구하는 일보다 종을 구하는 일이 더 쉬워서 나는 일단 철물점에서 작은 종을 얼른 구했고, 있던 풍경도 그 이음새를 다시 살핀 뒤 밤에 마당에라도 나갈라치면 소학교의 소사아저씨처럼 때 없이 흔들어대곤 했다. 그러면서도 "거위를 구해야지, 거위와 함께 살아야지". 다짐하기 시작했다." (같은책, 16쪽)


다음에 가래여울 한강가에 갈 때는 필히 종을 들고가야겠다.
그리고 행여 여러해후에 내가 꿈꾸는대로 마당있는 시골집에서 살게된다면.... 꼭 거위를 키우리라. 
 
이번 주말에는 비도 많이 오고, 황사도 심하다해서 텃밭에 다녀오지 못했다.
우리 상추들은 잘 있나... 그 여린 잎들이 이 비와 바람을 잘 견뎌내고 있을까.
이웃밭들에 있던 마찬가지로 어린 고추, 토마토, 로메인 같은 채소들도 궁금하고 걱정된다.
조그마한 우리집 울안을 넘어.. 관심가는 생명들이 이 봄, 더 생겼다. 감사한 일이다. 
어서 날이 좋아져서 텃밭에 나가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4. 23. 00:30



2월 어느날, 회사에서 지급받아 쓰던 맥북을 반납하게된 신랑이 내 기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맥북을 사야겠어!"

잠시 생각한후 내가 대답했다.

"응. 그럼 나는 밭을 사줘."
 
2월 중순께 남편은 꿈에 그리던 '맥북 에어'를 품에 안았고,
행여 흠질세라 조심조심 열어서는 나를 위해 강일동 근처에 있는 주말농장을 검색해주었다.










3월초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공고가 붙었다.
강일동 동사무소에서 주말농장을 분양한다는 소식이었다. 한강가에 있는 '가래여울'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마을의 텃밭이었다. 신청일 아침 8시부터 동사무소에서 선착순 140세대 분양.

평소 우리에게는 너무도 이른 시간인 7시 30분에 연수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동사무소에 도착하니 7시 45분. 음~ 이정도면 양호하겠지~? ^^ 어디로 가면되나... 궁금해하면서 동사무소로 들어선 순간, 
와. 동사무소 안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북적북적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직원분을 찾아 주말농장 신청하러 왔다고 하니 신청서를 한장 준다. 
신청서 윗머리엔 빨간 볼펜으로 177번이라고 써있었다. 백..칠십...칠??

새벽 동이 트기 전부터 줄을 선 176명의 어른들이 이미 동사무소를 다녀가셨던 것이다. 
나는 '꼭 안된다는 생각은 마시라'는 담당직원분의 말을 들으며 예비자 37번으로 접수를 해놓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이제 우리 밭이 생겨?" 하고 묻는 연수에게 뭐라 대답도 못하고 쓰린 가슴만 부여잡은채....ㅜ.ㅜ

돌아와서 아직 출근중인 신랑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했더니 신랑은 '허허'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 사실 나같은 젊은 새댁보다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께 텃밭이 훨씬 더 필요하다. 소일거리도 되고, 소소하게 살림에도 보탬이 되실 것이고.. 무엇보다 그분들이 나보다 채소들을 훨씬 정성껏 잘 키우시지 않겠나... 생각하니 그나마 좀 위로가 되었다.
그래그래, 잘 된 일이야.. 상황을 알았으니 내년에는 더 부지런히 신청해보자.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주말농장 일은 곧 잊혀졌다. 
다른 밭을 더 알아볼까도 싶었지만, 소망하던 맥북을 손에 넣은 뒤로는 나의 밭에 나날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던 신랑의 영향으로 나도 거의 '올해는 안되겠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 아침, 동사무소에서 문자가 왔다. 
앞서 신청한 분들 중 몇분이 포기하셔서 대기자인 나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다. 만세~!!!!!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텃밭이 생겼다!!  ^------------------^ 
 










아빠와 연수가 토요일에 동사무소에 가서 4만원(텃밭 4평을 4월부터 11월까지 빌리는 비용)을 내고 자리추첨을 했다. 
우리 자리는 16번, 텃밭 입구에서 가까운 좋은 자리라고 했다.
비록 짧은 기간동안 빌려짓는 것이지만 처음으로 생긴 내 밭,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일요일 아침, 잠실에 사시는 시이모님이 우리집으로 오셔서 함께 텃밭에 갔다. 
6월에 아이를 낳는 내가 기어코 올해 텃밭농사를 해보겠다고 나설 때는 마음 한구석 든든하게 믿는데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믿는 구석이 바로 시이모님이셨다.
잠실에서 오래 사신 시이모님은 송파구청에서 분양하는 주말농장을 신청해 10년 가까이 텃밭농사를 지어오셨다. 
연수를 가졌을 때 나는 시이모님네 텃밭에 가서 그 자리에서 바로딴 싱싱한 상추에 구운 삼겹살을 싸먹으며 행복한 오후를 보낸 적이 있었다. '아. 서울에 살면서도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구나..!' 그때부터 나는 작은 텃밭농사를 짓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이모님이 오랫동안 텃밭농사를 지어온 땅이 보금자리주택 부지로 결정되면서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이모님도 2년동안 텃밭농사를 짓지 못하고 계셨다. 새로운 주말농장을 신청해서 가보셨는데 주변 땅이 너무 오염되어있고, 텃밭안에도 쓰레기가 많아 도저히 지을 엄두가 안나셨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내심 나는 우리가 텃밭을 분양받게 되면 이모님께 도와달라고 부탁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모님은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청상외할머니의 둘째딸, 우리 시어머니의 바로 아래동생인 시이모님은 풍채만 뵈도 여장부의 기운의 느껴지는 분이다.
대학새내기 시절에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본 뒤로 나는 풍채좋은, 그러니까 키도 크고 몸집도 큰 여성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 분들의 씩씩한 기운을 대하면 나도 기운이 나고 존경심도 든다. 
어릴 때부터 힘든 농사일과 집안일을 척척 거들어온 둘째이모님은 일솜씨와 살림솜씨가 모두 대단하시다. 가끔 명절이나 제사, 시댁 가족여행같은 큰일이 있으면 미리 장을 보고, 대식구의 음식을 준비하는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신다. 
이모부님과 함께 동대문상가에서 가죽옷장사를 오랫동안 해오셨는데 역시나 이모님 정도의 씩씩한 기운이 아니었으면 헤쳐나오기 어려운 힘든 일이고,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혼자 짐작해보곤 한다. 
 
시골에서 자라신 이모님은 땅을 보면 안그래도 씩씩한 분이 더 활기를 띠신다.
나도 그렇다. 흙을 밟으면 기분이 좋고, 흙위에서 자라는 무엇을 보면 참으로 이쁘고 반갑다.
이모님의 지휘하에 우리는 우리몫의 퇴비를 밭에 뿌리고, 근처 농장에서 파는 상추모종을 사다 심었다.
올봄들어 햇빛이 제일로 쨍쨍한 것 같은 날이었다.
















이모님이 호미와 손장갑을 챙겨오시고, 나는 그저 집에 있던 모종삽 하나만 달랑달랑 들고 왔는데 (^^;;;)
와서보니 동사무소에서 장만한 공동 농기구들이 창고에 잔뜩 보관되어 있었다.
괭이와 갈퀴, 물뿌리개를 들고와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었다. 연수는 이것저것 만져보고, 흙도 파헤쳐보며 무척 좋아했다.






















사실 이모님이 어려우시다고 하면 나는 나 혼자서라도 텃밭 농사를 지어볼 생각이었다.
워낙 도회지분인 우리 신랑은 손에 흙도 안묻히고 자라셔서 농사일에 도움이 될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린 시절에 내가 우리 부모님의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물주전자 들고 따라다니는 길에 슬쩍 본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상추 좀 심고, 방울토마토도 좀 심고.. 가을에는 배추랑 무 심고, 고구마도 여력되면 심어보고...^^
블로그 이웃인 토마토새댁 언냐와 맑은물한동이님께 조언도 구하고 4평밖에 안되는 작디작은 땅이지만 나도 뭔가 내 입에 들어갈 것을 내 손으로 키워본다고 으쓱해서 자랑도 하면서 그렇게 지어보고 싶었다.
6월에 평화낳고나면 한동안 바깥출입도 못할텐데 그 푸성귀들을 어떻게 돌볼꺼냐고 신랑이 걱정하면 나는 언젠가 한실림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살림'에서 보았던 '영성농법' 이야기를 했다. 

아래는 <살림>지(2010년 가을호)에 실렸던 지리산생태영성학교의 교장 이병철 선생님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영성농법이라고 뭐 별 거 없어요. 만날 때마다 잘 자라라 힘내라 응원해주고 박수 쳐주면 식물이 알아듣고 잘 자라요."  
하지만 자칫 영성농법이 격려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안 자라면 곤란하다는 마음이 끼어들면 '협박농법'이 된다면서 개구장이처럼 웃는다....(중략) 다음날 아침 그는 텃밭에서 토마토를 따고, 논에 가서 박수를 세 번 힘차게 치면서 "힘내라! 잘 자라라!"라며 벼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선생이 자주 들여다보고 인사하는 앞 논의 벼는 이삭이 실하고 포기가 튼실한데, 조금 소홀했다는 윗논은 안쓰러운 만큼 부실해보였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속으로 '옳거니!'했다. 바로 내가 찾던(내가 할 수있는^^:;) 농법이 여기있구나~!
나는 걱정하는 남편에게 '내가 연수데리고 자주 밭에 가서 박수쳐주고 올테니 걱정말라'고, 일단 밭이나 사달라고 얘기하곤 했다. 신랑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텃밭)이웃들이 신고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

이런저런 사정은 다 맘에 걸리지만 그래도 나는 텃밭농사가 참 짓고 싶었다.
연수랑 어디 마음껏 파고 뒤지고 두드릴 수 있는 땅 한뙈기, 요만한 흙밭 하나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놀이터 마져도 푹신푹신한 바닥재로 싹 발라버려 마음붙일 모래땅 하나 찾기힘든 아파트의 메마른 삶에서
우리가 마음붙이고 밟아볼 작은 흙밭이 하나만 있었으면... 오래오래 바랬다.  
그 바램이 이뤄져서 너무 행복하다. 고맙다.















주말농장 안에는 주인이 심어놓았다는 과실수들이 군데군데 서있었다. 그 나무들이 밭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경계도 되어주고, 가방걸이도 되어준다.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면 그늘도 만들어 주겠다. 참 좋다. 

























연수는 제 손으로 상추 모종에 흙도 덮고, 물도 주었다.
더운날 힘들었을텐데도 끝까지 저도 하겠노라고 물주전자들고 낑낑거렸다. 연수도 농사일이 좋은가보다.
힘은 들어도, 푸른 하늘 아래 흙냄새 맡으며 오가는 일이 어린 아들 마음에도 드는 것 같아서 기쁘고 흐뭇했다.






















이모할머니와 연수는 쑥갓씨앗도 뿌렸다.
텃밭에서 돌아온 뒤 연수는 "엄마, 싹이 났을까? 싹이 나면 어떻게 해?"하고 가끔 물었다.
우리가 다녀온 뒤 화요일에도 한번 비가 왔고, 오늘도 또 비가 촉촉하게 많이 왔으니
쑥갓 씨앗들이 이제는 싹을 틔웠으려나.. 상추들은 그새 많이 자랐으려나.. 궁금하고 보고싶다.
연수야, 우리 곧 보러가자. ^^











까도남 연수아빠는 4평 농사를 시작하고 무척 감개무량해했다.
"야~ 요만큼 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몇천평씩 농사는 어떻게 짓냐~~"하고 너스레를 떨더니
나중에는 "상추 60포기 심어놓으니 마음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네~!"하면서 좋아했다. ^*^

웹개발 일을 하셨던 연수아부지 말씀하시길, 요즘 개발자들중에 귀농한 사람이 많아서 '와이파이' 터지는 밭이 그렇게 많대~~ 하더니..
여보, 우리도 텃밭농사 몇년 지은 뒤에는 '와이파이 터지는 밭'딸린 집을 장만해서 본격 시골생활을 해볼까나. 어때? ㅎㅎ



















텃밭 가에 핀 매화나무 꽃이 정말 화사했다.
따로 봄꽃구경을 가지 않아도 밭둑가 꽃그늘에 앉아보는 마음이 황송했다. 봄이구나.. 이렇게 예쁜 봄이 내 곁에 있구나.





















집에서 싸온 물과 토마토는 새참. 
 
아버지는 '벼는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었다.
자주 걸음하고, 자주 눈길주고, 조금씩 보살피는 손길... 
가래여울은 우리집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되는 마을버스 종점마을이다. 
연수와 손잡고 마을버스를 자주 타야겠다. 
다음에는 가래여울 텃밭에서 한강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길도 찾아봐야지..

우리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함께 가고 싶은 곳이 한군데 더 늘었다. 
우리 텃밭에서 상추 따가실 분, 함께 어린아이들 손목잡고 한강 나들이 가고픈 분들.. 
이 봄이 가기 전에 우리집에 어서 놀러오셔요~.
^^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3. 17. 01:01










볕이 좋은 일요일 오후. 아빠가 집에 있으니 연수가 좀처럼 낮잠잘 생각을 않는다.
모처럼 독서하는 아빠 옆에서 놀아달라고 낑낑낑.. 낮잠재우기를 포기하고 세 식구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천천히 동네 산책을 하자.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는 오래된 주택가가 있다.
그 한가운데에(주택가로 보면 끄트머리지만 새로 생긴 우리 아파트 단지까지 아울러서보면 동네 한가운데쯤 된다) 성당과 놀이터와 경로당이 도란도란 어깨를 붙이고 들어서있다.

처음 이 동네를 둘러볼 때부터 나는 이 공원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된 성당에 이웃해있는 풍경도 좋았지만, 큰 형아들이 많이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참 좋았다.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키 큰 동네형아들이 올망졸망한 꼬마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축구도 하고, 그네도 밀어주는 모습이 왠지 든든했다.
공부에 쫓기고, 그도 아니면 게임방 출입과 저들만의 문화에 바쁠법한 큰 형아들이 어린 동생들과 몸을 부대끼며 놀고 있는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동네 아이들이 모두 어울려놀던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 낯선 것만도 아니었다. 
때로는 부러 동생의 약한 힘에 끌려다니는척도 해주고, 떄로는 의젓하게 한 수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같이 어울리는 모습은 아직 이 동네에 놀이문화가, 아이들의 건강한 공동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것같았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형과 언니를 보고 배운다. 
고작 네살인 연수도 제가 아직 못하는 어려운 동작(?)들을 거침없이 해내는 형아들을 볼때면 그 눈빛이 한없이 초롱초롱하고 진지하다. 
그러니 놀이터에서는 형아들이 선생님이다. 큰 형아들께서 큰 선생님 노릇을 잘 해주기를 빌 뿐이다. 그래서 내 아이도 함께 어울려 놀면서 함께 자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기를...  
   










따신 오후. 낮은 그네에 눕다시피한채 제 힘만으로 그네를 밀어올리려고 애쓴다. 어느새 또 한가지 새로 시작하는 아이.











미끄럼틀을 빠져나오고 나니 정전기 덕분에 머리카락이 솔잎같이 뻗었다. ^.^  











할머니 기다리며 유모차도 해바라기한다.
어느 날은 세 대가 나란히 서있기도 했는데... 오늘은 친구 한분이 덜 오셔서 궁금하시겠다. 
어린 손주가 쓰다가 할머니께 물려드리는 딱 하나밖에 없는 물건 아닐까. 유모차. ^^; 












경로당 지나면 바로 고덕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있다. 
연수는 언제나 성모상 앞을 지나..











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성보나 유치원' 놀이터로 직행한다. ^^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왠지 성당유치원은 아이를 보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수녀님들이 따뜻하게 보살펴줄 것만 같고, 다른 곳보다 좀덜 상업적일 것도 같고....
글쎄. 연수가 유치원갈 나이가 되면 한번 진지하게 알아봐야겠지..











참 열심히도 오른다. 매달리고, 기어올라가고... 여자아이들도 그러는지 궁금하다.
그저 작은 놀이기구 하나만 있어도 제 힘을 온통 다 쏟아부어가며 참 열심히 논다.
제가 제일 좋아하고, 제일 하고싶은 '놀이'에 대한 성실함, 집중력, 호기심, 열정...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른인 내가 오히려 배워야겠다.. 싶어질 때가 많다. 











잠시 쉬나? 실은.. 저 나무판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궁리하는 중.











종교를 믿진 않지만 나는 절도 좋아하고, 성당도 좋아한다.
일상에서 자주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싶고, 집 가까이에 이렇게 잠시 찾아와 기도하고 갈 수있는 조용한 장소, 비일상적인 공간이 있는 것이 참 고맙다.
이 곳으로 이사와서 고마운 것이 정말 많다.
놀이터, 성당, 작은 산, 시장이 두루두루 어우러져있는 이 마을을 걸어다니며 나는 어떤 뜻깊은 곳을 '순례'하는 마음이 되곤 한다. 번잡하지 않게, 따뜻하게 어우려져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간이 모두 고맙다.
 
 









어느 조용한 날, 살며시 강당 문을 열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스테인드 글라스 안으로 비쳐들어오는 햇빛이 참 아름다웠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예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연수와 둘이 소강당의 유리창에 손을 가져다대고 우리의 손가락까지 물들이는 색유리의 빛깔을 바라보기도 했다.










종교를 갖고있진 않지만 아이와 함께 절이나 성당을 자주 찾고싶은 것은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싶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담긴 고요한 정적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절박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떨리는 어깨..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이해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겠지.  
















잠시 엄마를 따라 색유리 빛깔을 보는가싶더니 이내 아이는 쌩하고 뛰어나간다.
햇빛과 놀이터가 불렀나보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다만 많은 이들의 마음에 위로와 감동을 주었던 큰 스승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을 걸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려고했던 그의 노력과 사랑이
오랜 시간 이땅에서도 핍박받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려고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의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4대강사업과 최근의 구제역사태 등에 대해 생명존중, 자연만물과의 공생의 관점에서 문제제기하고 실천하는 천주교의 움직임이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고있는 이 곳, 동네성당에서는 어떤 소식이 들리나, 어떤 활동을 하나.. 지켜보고 함께 할 수 있어도 참 좋겠다.











성당 옆, 야트막한 동산은 길게 구릉구릉 이어져있다.
고덕시장, 상일동 역, 조금 더 가면 고덕역까지.. 작은 산은 때로 찻길에 낮은 쪽 몸을 내주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산책로라고 부르는게 더 적합할 완만한 등산로도 계속 이어진다. 마을 곳곳에서 연신 올라오고, 내려가는 길들은 중간중간 운동기구들이 모여있는 쉼터에서 모였다가 다시 다음 쉼터로 이어졌다. 
천천히, 아이들과 함께 이 산을 따라 걸어다녀볼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작은 산이라도 철마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뭇가지 찾았다. 가족 모두의 손에 쓸만한 나뭇가지를 하나씩 쥐어줘야 마음이 놓이는 연수.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내려다보인다.
한참 걷고 운동기구를 오르내리며 논 아빠와 연수가 배가 고프단다.
그럼 시장에 갈까.. 사람이 사는 마을의 백미, 구수한 순대국냄새와 잔치국수집 아주머니의 신비한 손맛이 있는 시장으로..!












왼편으로는 상가건물이, 오른편으로는 작은 컨테이너박스들이 쭉 이어진 고덕시장.
멀리에 '강일 1,2지구 입주를 축하합니다'라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오랜 시간 대단지 아파트 신축공사의 소음과 먼지에 시달리셨을 분들. 
그래도 새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 재래시장과 인근 상권이 활성화될거라 기대하며 더러 희망도 갖고, 각출해 모둔 상가연합회 예산으로 새 이웃들보라고 플랭카드도 큼지막하게 걸어주셨을 것이다.
어느날, 이 골목의 작은 정육점에 들어가 첫 집들이에 쓸 갈비와 수육고기를 샀던 내게 '2지구에 이사왔냐, 못보던 얼굴이라 그런것 같더라. 집들이하는가보다'하시며 환하게 웃어주시던 아주머니처럼.













잔치국수 한그릇 먹고 흐막하게 돌아오는 길.
꽃집앞에 나와있는 노란 수선화 화분에 눈이 갔다. 값을 치르고 화분을 받아드니 연수가 제가 꼭 들고 가야한단다. 
집까지 조심조심 소중히도 안고왔다.
 



+



노란 수선화 화분 하나가 며칠째 온집을 환하게 해준다.
일상은 이렇게 잔잔하고 고마운 일 투성인데 그 고마움을 미처 생각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오늘은 살아가는 일이 문득 눈물겨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연수 삼촌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작년 7월에 오랫동안 바라던 워킹홀리데이비자를 받아 일본에 가서 일을 하고있던 시동생이다.
지진 소식을 처음 들었을때 연수와 나는 우리가 곧잘 찾아보던 지구본에서 다시 '삼촌이 있는 일본'이 어디인가 찾아보고 삼촌이 괜찮아야할텐데.. 걱정했다.
전화는 불통이었지만 다행히 카카오통으로 연수아빠와는 연락이 잘 되어 무사히 잘 있고, 시동생이 있는 동네는 지진피해가 거의 없어 평온하다는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안도했었다.

그 뒤로 TV 안 보고, 이사오면서 그나마보던 일간지도 끊고 주간지와 월간지만 받아보는 나는 일본지진소식을 상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너무 마음아픈 일도 많고, 영상도 충격적이어서 당신은 안보는게 오히려 나을거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그 고통을 가만히 짐작만 해보았을 뿐이다. 

아마도 원전 사고가 제일 큰 두려움을 몰고오는 듯했다. 
별일없이 잘 있다던 시동생도 일찍 귀국하겠다 했고, 노심초사하던 가족들 모두 그 결정을 반겼다. 
시동생은 오늘 김포공항으로 잘 들어왔다. 

일본으로 가기전에 시동생은 일년정도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래서 연수는 지금도 우리 식구는 '아빠 엄마 연수 삼촌' 넷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우리집으로 올줄알고 나는 어제부터 공부방에 쌓여있던 짐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삼촌 이부자리를 가져다놓았다.
저녁 5시반에 공항에 도착한다니 저녁은 집에서 함께 먹겠구나 생각하고 갈비찜을 하고 냉이된장국을 끓였다.

그런데 저녁쯤 시이모님께 전화가 왔다.
시동생을 이모님댁에서 묵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시나.. 나는 그저 배부른 내가 밥차리기 힘들까봐 그러시는가 싶어 괜찮다고, 저희집에 오셔야죠 했다.  
그런데 이모님의 걱정은 방사능 유출이었다. 연수도 어리고, 배속의 아기도 있는 형집으로 가지말고 어른들만 계신 이모님댁에 와서 씻고, 빨래도 좀 하고 며칠 묵고갔으면 한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어안이 좀 벙벙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어른들이 지레 걱정이 많이 되셔서 그러는구나.. 싶었지만 새삼 그 정도인가.. 싶어 덜컥 겁도 났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안그래도 아침에 통화할때 시동생이 별일없겠지만 언론에서도 워낙 얘기하고 해서 자기도 조심스럽다면서 집으로 바로 안가고 어디 모텔같은 곳에 숙소를 잡아 하루이틀 씻고 빨래라도 좀 맡기고 들어가겠다 해서 '뭘 그러냐, 괜찮겠지. 집으로 오라'는 얘길 했노라고 했다. 도착하면 다시 통화하기로했으니 다시 얘기해보겠노라 했다.

머리속이 좀 어지러웠다. 
한국에 돌아왔지만 선뜻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시동생이 안쓰러웠다.  
별일없겠지... 하지만 스스로도, 다른 이들로부터도 불안한 시선을 받아야하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행여나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또다른 주홍글씨처럼 낙인이라도 받게되는건 아니겠지.. 시부모님이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잘 알지못하는 상황이 걱정만 커지게 하고 있었다.

시동생은 짐을 찾는데만도 시간이 오래걸려 8시쯤 되어서야 공항을 빠져나왔고 오늘은 이모님댁으로 가겠다고 연락해왔다.
그 사이에 연수와 나는 먼저 냉이된장국에 밥을 말아 저녁을 먹었고 낮잠을 안잔 연수는 일찍 저녁잠이 들었다.  
손도 안댄 갈비찜 냄비를 시원한 베란다에 내놓으며 마음이 쓸쓸해져왔다. 

나는 그리 살갑고 편안한 형수는 아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잘 해준것보다는 그저 내 마음하나 불편하게 갖지 않으려고 나름의 애만 열심히 쓰며 살았다. 
어제오늘 돌아오는 시동생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다행스러운 마음, 반가운 마음보다 같이 지내는 동안 밥 잘 해줄 걱정과 불편해하지 말아야지.. 하고 내 맘 다잡을 생각이 앞서서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서도 편히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짠했다. 
살아가는 일이 때로 이렇게 눈물겹구나...
큰 일을 혼자 겪으며 무섭기도 하고, 가족들 곁으로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을까. 그런 사람을 더 반갑게 따뜻하게 맞아줘야하는데.. 그 마음을 못 먹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연수 잠든후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전사고는 현재까지는 일반인에게까지 방사능 피해를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앞으로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때에 일본사람들이 겪을 피해와 고통은 엄청난 수준일거란 내용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주변지역 모두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차대전 당시의 원폭피해만으로도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모두 공히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던가...
원폭피해 2세, 3세의 고통은 또 얼마나 깊었던가.. 그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되는데..

원자력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의 사고만으로도 이렇게 큰 위험과 고통, 공포가 따르는 원자력 대신 지속가능한 대체에너지 개발이 정말로 절실하다.  

부디 더 큰 사고가 없기를.. 원전도, 지진 피해도 무사히 잘 복구되기를..
 
오늘 문득문득 "삼촌 언제 와? 삼촌 어디 있어? 숨바꼭질하나~? 문 뒤에 숨었나~?"하며 놀던 연수.
경상도 남자답게 "연수 안녕! 많이 컸네~"하고 나면 쓱 자기 방에 들어가버릴 무뚝뚝한 삼촌이 보고싶다.
연수가 내내 기다리던 우리 삼촌은 하루이틀 늦어지겠지만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잘 돌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그곳이 나고자란 고향인 사람들, 거기서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우던 엄마아빠들... 그곳이 떠날수없는 삶의 터전인 낯모르는 이들의 안녕을 비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3. 3. 22:50








나는 팥시루떡을 제일 좋아한다.
어린 시절 집에서 시루째 쪄내던 팥시루떡은 얼마나 맛있었던지.
내가 자란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는 매년 깊은 겨울 어느 날인가에 지내는 '기도'라는 제사날이 있었다.
그 날은 저녁 내내 엄마와 어른들은 팥시루떡을 찌고 준비를 하시다가 밤12시쯤 되면 아이들까지 모두 깨워 집안 곳곳과 외양간 같은 곳을 돌며 복을 빌고, 그 떡을 나누어 먹었다.  
김이 펄펄 오르는 갓찐 시루떡을 뜨거운 동태국물이나 시원한 동치미국물과 같이 먹던 한겨울밤의 즐거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연신내 이 집에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팥시루떡을 맞추는 일이었다.
큰 신혼가구들이 들어오는 날, 동네떡집에 맞춰놨던 떡을 받아 이웃집들과 경로당, 관리사무소에 돌리던 새댁은 
신혼집을 떠나는 날 아침, 다시 팥시루떡 한 말을 맞췄다.

자그마한 내 장독대 위에 따뜻한 떡 한 접시를 올려놓고 그동안 우리를 잘 보살펴줘서 너무나 고마웠다고.. 이 집의 모든 기운들께 작별인사를 하는 것으로
내가 '서울 횡단'이라고 이름붙인 이사 프로젝트(?)의 날은 시작되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해보는 이사인데 비까지 내리니 걱정은 더 많아졌지만 비구름에 싸여 흐릿해진 북한산을 보니 산도 나처럼 이별을 서운해하는 것 같아 왠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쨍하게 맑은 날 이별했으면 더 섭섭했을까.
 
서울의 서북쪽 끝인 연신내에서 남동쪽 끄트머리(?)인 강동구 강일동으로의 이사. 
지도를 보면 가로로 길쭉한 서울을 한강을 따라 동서로 비스듬하게 횡단하는 셈이다. 
연신내집에서는 작은 앞산 하나만 돌아가면 고양시였는데, 강일동에서는 단지 바로 옆 큰 도로를 따라 10분만 걸어가면 경기도 하남시니 우리는 늘 서울의 가장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달랑달랑 붙어사는 셈이다. 
서울에 꼭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집을 구하고보면 늘 서울시의 금 안에 겨우 들어와 있다. 다음에는 길을 건너 한결 여유롭고 한적한 경기도땅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나. 무튼 수도시민의 꼬리표는 이번에도 달게 됐다.    











학기초라 자취방에 학생들을 받느라 바쁜 친정엄마가 그래도 몸무거운 막내딸의 이사를 도와주신다고 전날 서울에 올라와주셨다.
이 집에 이사온 첫날에도 나는 신혼가구들을 받으며 엄마와 함께 잤는데, 마지막 밤에도 엄마와 함께 잤다. 
이사올때, 갈때를 제외하고 지난 3년동안 엄마가 우리집에 와서 주무셨던 것은 연수를 낳고 산후조리를 했던 1주일뿐이지만
그래도 이 집에는 엄마의 기운이 따뜻하게 깃들어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나이들어 부쩍 쇠약해지셨지만 엄마의 기운, 엄마 냄새, 엄마 목소리, 엄마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일을 치르는 마음이 더없이 든든하다. 그러니 당신은 나의 어머니, 나는 언제나 당신의 품에서 자라난 아이.  
오늘은 연수가 엄마 품에서 그 기운을 흠뻑 받고 있다.











팥시루떡을 맞출거라 했더니 "그거 참 잘 했다"하시고는 반말은 적을 것 같으니 아예 한말 맞춰서 넉넉하게 돌리고, 남겨놓고 먹으라 하시던 엄마. 기어코 떡값은 또 본인이 내셨다. 
덕분에 정말 넉넉하게 이웃들께 떡 잘 돌리고, 연수랑 나도 잘 먹고있다. 
시골서 자라 떡 좋아하고, 떡 돌리는 건 더 좋아하는 나는 동네에 단골떡집을 정해두고 이사떡, 연수 백일떡, 돌떡을 다 거기서 맞췄다. 오고가며 이 떡 저 떡 사먹기도 많이해서 친해졌던 단골떡집 아줌마 아저씨와도 인제 이별이다.











이사짐센터 분들이 짐을 싸는 동안 나와 연수는 사는 동안 늘 의지가 되고 고마웠던 이웃들께 떡을 돌렸다.
정들자 이별이라고, 섭섭해서 어쩌나.. 하시며 연수에게 기어코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주시던 이웃 할머니와 애기엄마들.
떡이라도 건네며 굳이 인사하지 않았으면 겨우내 자주 못보다가 말도 없이 훌쩍 가버렸다고 서운해하셨을텐데 이렇게라도 인사하고 떠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이별의 의미를 아직은 잘 모를 것 같은 연수.
제가 태어나서 줄곧 자란 이 집말고 다른 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 아파트 놀이터에서 늘 같이 놀던 그 친구들을 이제는 만나기 어렵다는 것.. 그런 것들을 채 다 실감하지는 못해도 뭔가 적지않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느끼는 듯 했다. 
33개월 연수에게 '정든 곳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남을까.. 궁금해진다. 











이사 한참 전부터 어른들이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이사얘기를 많이 하자 연수도 덩달아 이사 얘기를 많이 했다. 
특히 제가 어릴때부터 쌍둥이네서 빌려 가지고 잘 놀던 작은 미끄럼틀을 돌려주고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나머지 제 물건들, 놀이감과 책, 책장들은 모두 가지고 가는 것인지 무척 궁금해했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 그럼 연수는? 연수도 가지고 가?"하고 물었다. 
"그럼~. 연수는 당연히 가야지!"했더니 엄마가 놀라는 것이 재미있어서 씩~ 웃으며 "왜?"하고 물었다.
"연수는 엄마아빠의 제일 큰 보물이니까!"
 
그 뒤로 집안의 물건들을 가리키며 '이것도 가져가? 저것도 가져가?' 하고 쭉~ 물은 뒤에 마지막으로 '그럼 연수는?'하는 질문을 하루에도 몇번씩 엄마, 아빠에게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하면 깔깔 웃고, '왜?'하고 물어서 "연수는 우리집에서 제일 귀한 존재니까", "연수가 안가면 큰일이지. 연수는 제일 먼저 챙겨서 가야지." 같은 여러가지 대답들이 나올 때까지 묻고 또 물으며 재미있어 했다.

우리집 보물 연수야, 새 집에 가서도 그렇게 깔깔 웃으며 재미나게 살자.











익숙한 공간인데도 이렇게 이사짐싸는 모습을 찍어놓고보니 문득 낯설다. 정말 떠나는구나.. 싶고, 새삼 참 작은 집이었구나 싶기도 하다. 












짐싸고 내리는 동안 있을 데가 마땅치않았던 우리를 건우엄마가 불렀다.
비가 안왔으면 연수랑 할머니랑 놀이터에서 놀기라도 했을텐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좁은 차안에서만 몇시간을 보내자면 연수가 많이 힘들었을텐데 다행히 널찍한 건우네서 재미있게 놀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나이든 엄마도 비맞으며 고생하지 않게 되어서 참 고마웠다. 떠나는 날까지 이웃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옆동 10층인 건우네 창문으로 15층 우리집에서 내려오는 사다리차 짐받이가 보였다.
공동주택에 살다보니 이사 구경을 심심치않게 할 수 있어서, 연수는 어디서 사다리차 소리만 들리면 '엄마 구경가자~' 졸랐었는데 오늘은 그 이사를 우리집이 한다. 신기하다.















드디어 이사짐을 다 실었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 살펴보았다.
5톤 큰 트럭과 2.5톤 작은 트럭을 가득 채운 짐들.
세식구 사는데 무슨 짐이 이리 많은가.. 싶기도 하고, 또 저 차 두 대로 내 삶의 모든 공간이 순간 이동이 되는구나.. 싶어 갑자기 삶이 단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 평수치고는 짐이 많은 편이라는 이사짐센터 분들의 얘기를 들으며 뭐든지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내 습성을 다시 반성했다. 더 가볍고 단촐하게 살아야하는데...











추운 날에도, 더운 날에도 참 부지런히도 드나들었던 102동 현관.
바로 앞 경비실의 작은 창문을 열고 '연수 나왔구나~!' 반겨주시던 아저씨들.
정들었던 공간들을 사진 한장으로라도 남겨본다.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도 함께. 














짐이 다 빠진 집을 둘러보려니 그만 눈물이 났다.
정말 안녕이구나. 잘 있어, 우리집.. 우리의 첫집.











우리가 이사오기 직전에 살았던 주인네에는 초등학생 큰 딸과 유치원생 아들, 그리고 갓 태어난 늦둥이 셋째 아들이 있었다.
이 집은 지금 주인부부가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었고, 또 늦게 막내아이도 얻은 집이라 왠지 좋은 기운이 많이 서려있는 것 같아서 나도 늘 마음이 좋았다.
이 집에서 우리 부부도 첫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도 얻었으니 좋은 기운을 조금은 더 보태고 가는 것 같아 기쁘다.
다음에 살러오시는 분께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고마운 집이 되기를..
(실은 살림을 깨끗이 잘 못하는 내가 사는동안 예뻤던 이 집이 너무 지저분해진 것 같아서 뒤에 오시는 분들한테 많이 미안했다ㅠㅠ)

주인집 큰 딸이 써놓은 것 같던 '우리집' 글씨와 웃는 얼굴그림이 내게는 늘 애틋했어서 사진으로 찍어보았다.










'안녕~'











떠날 무렵 연신내의 빗줄기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검은 구름이 북한산을 떠나는게 보였다.
복도에서 보이는 전망만큼은 서울에서 제일 좋을 거라는 자부심이 들게 해줬던 산, 어린시절 강릉 고향집에서 늘 바라보던 대관령과 태백산맥의 능선을 연상케했던 산, 그래서 연고도 없는 연신내에 둥지를 틀게된 제일로 큰 이유가 되어주었던 산. 
안녕, 안녕. 고마웠던 산. 그리울거야..


강변북로를 지나 한강의 남쪽으로 건넜을 때는 빗줄기가 어마어마하게 굵어졌다.
이사짐도 걱정이었고, 그보다는 이사오시는 분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서(그쪽도 멀리서 비오는날 오자니 참 모두모두 힘든 이사날이었다) 잔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채 떠나온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처음 해보는 이사이고, 둘 다 금전관계에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우리 부부인지라 미리미리 알아보고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이사를 도와주러 오신 친정엄마와 시이모님의 마음까지 불안하고 무겁게 만들었다.
비구름이 우리 마음에까지 잔뜩 끼어있던 그 서울횡단의 길에 연수가 차안에서 내내 곤히 잘 자준 것이 제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돌이켜생각해보니 그 장대같은 빗줄기를 뚫고 새집에 사람도, 짐도 모두 무사히 도착한 것도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새집 싱크대와 하수구들에 엄마는 미리 챙겨두었던 굵은 소금을 뿌리셨다.
생각해보니 내가 고향집을 떠나와 서울에서 살았던 모든 집들의 싱크대에 엄마는 이사 첫날, 이렇게 소금을 뿌려주셨었다.











잠실에 사시는 시이모님께서도 조카네의 이사를 도와주기위해 달려와주셨다. 
정신없이 대충 먹기 마련인 이사날 점심에 제대로된 밥 한끼 먹여주시려고 따뜻한 찰밥과 콩나물국, 맛있는 반찬들까지 넉넉하게 준비해오셨다. 
참 고맙다.. 고맙고 고마운 분들 덕분에 오늘도 내 목과 아이들 목에 더운밥 넘겨주며 살고 있다. 
    










비가 와서 밖에 나갈수가 없었던 연수는 이사짐을 푸는 내내 거실에 먼저 제자리를 잡은 소파에 앉아 외할머니와 책도 읽고,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놀았다.  











오후에는 오빠가 엄마를 고속버스터미널에도 모셔다드릴겸 동생 이사에도 와볼겸 가족과 함께 새집으로 찾아왔다.
큰조카는 연수와 함께 채 다 풀리지도 않은 이사짐 속에서 장난감들을 찾아내 재밌게도 놀았다.











아이들은 어수선한 상황이 더 재미있는지 이것저것 놀이감들을 작은 공집안에 다 집어넣고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어디서든 잘 노는 아이들이 고맙다.
아빠는 잔금을 받기위해 멀리 연신내까지 비속에 다시 한번 서울을 횡단하러 떠나고,
엄마는 이사짐 놓을 곳들을 여기저기 알려드리느라 바쁜 와중에
외할머니와 외사촌누나가 연수를 데리고 잘 놀아준 것이 참 다행이었다.
시이모님은 몸무거운 조카며느리를 대신해 집 구석구석에 걸레질을 다 해주시고, 가구들까지 깨끗하게 닦아주고 가셨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이사는 모두 끝났다.
비가 많이 와서 짐을 올릴때는 사다리차를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짐을 모두 나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덕분에 이사짐센터 분들도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해주시면서도 연수에게 웃으며 얘기도 걸어주시고, 마무리까지 참 깔끔하게 잘 해주셨다.

이사를 도와주러 오셨던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짐도 어지간히 정리된 뒤에 세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새 집에서 세식구가 함께 먹는 첫 식사..

무거운 짐 하나 옮기지 않고, 방바닥에 걸레질도 한번 안하며
그저 사진찍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분주했던 하루였는데도 '서울횡단'을 마치고난 밤에는 참으로 고단했다.
새집에서의 첫밤은 그래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곤한 연수는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지만 아빠엄마는 얼떨떨하기도하고, 힘들고 우여곡절 많았던 하루가 무사히 끝난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밤늦도록 새집에 불을 밝혀놓고 있었다.











새집에서 처음 맞은 아침 풍경.
4층 우리집의 거실창에서는 키큰 소나무와 화단이 잘 보인다.
멀리 주택가와 낮은 동산의 능선도 아련하게 보인다.

어제 내린 비로 세상은 아직도 온통 젖어있었다. 
"연수야, 비가 와서 땅이 다 젖었어" 했더니 "그럼 땅이 목욕하는건데?" 한다.
그렇구나.. 땅이 목욕했네. 깨끗하고 예쁜 얼굴로 새봄을 맞으려고 땅도 시원하게 목욕했나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도 묵은 삶의 먼지랑 때를 씻어내느라 그렇게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이사를 했나보다.











이사후 삼사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갔다.
이사 당일에는 정신이 없어서 여기저기 아무곳에나 받아두었던 짐들을 다시 정리해넣고, 그러면서 새삼 이제 필요없다 싶은 물건들을 버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려고 따로 모으고보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다.
이사 덕분에 살림이 조금은 가뿐해질 것 같다.

큰짐들은 얼추 다 자리를 잡았지만 작은 짐들은 아직도 풀고 정리할 것이 산더미다.
쉬엄쉬엄 한다고 하는데도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아직은 어수선하다.
연수도 "여기가 이제 우리집이야? 왜?"하고 자주 묻는다.
특별한 이유를 달지 않아도 그저 '여기는 우리집'하고 마음이 푹 놓이는 날이 올때까지는
연수도 나도 더 적응하고, 익숙해지고 정을 붙여야하겠지.. 












햇살이 좋다.
새집에서는 전보다 햇빛이 오래 든다. 거실과 안방에 모두 한낮부터 해질때까지 환하게 빛이 들어온다.
서울횡단의 긴 길을 견디느라 고생한 화분들도 어제에야 모두 거실에 내놓고 물도 주고, 햇빛도 마음껏 받게 해주었다.
연수는 분무기가 좋아서 어제부터 줄곧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터전에서의 삶.
33개월 연수도, 서른네살 엄마아빠도, 7개월에 접어든 평화도 함께 시작한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잠드는 네 식구의 날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행복한 성장의 날들이 되기를.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좋은 기운을 듬뿍 얻고 나눌 수 있기를...

이 봄, 새롭게 시작하는 모두들- 화이팅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11. 2. 24. 00:58








날이 참 포근하다.
이제는 봄이 온 걸까.

겨우내 들었던 습관대로 온종일 집안에만 있다가
저녁 무렵, '안되겠다 잠깐이라도 바깥공기 좀 쐬자'하고 연수를 업고 복도에 나와 별도 찾고 달도 찾고
저기 복도끝 엘리베이터까지 어슬렁어슬렁 다녀와도 발가락이 하나도 시렵지 않다.
맨발에 슬리퍼만 달랑 신었을 뿐인데.

날로 따셔지는 봄햇살이 잠들었던 몸과 정신을 살살 흔들어 깨우는 것 같은 이즈음에 우리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결혼해 신혼살림을 차려 꼬박 3년을 살아온 집.
이 집을 떠난다는 것이 아직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이 집말고 다른 집이 우리 집이 된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집에 신혼가구들을 들여놓고 처음 살림을 시작했던 겨울날이 생각난다.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처음으로 싸보고, 초여름에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블로그를 시작했던 날들.
연수를 낳고 첫 날들을 함께 보내며 땀도, 눈물도 참 많이 흘렸던 집. 
그 때 내가 하루중 가장 많이 보았던 풍경은 바로 이 둥근 베란다 창으로 바라보이는 앞산 풍경이었다.  











소파에 앉아 젖을 먹이고, 잠든 아이를 깰까봐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대로 수유쿠션 위에 뉘어놓은채 책도 보고, 블로그도 보고, 베란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오후 햇살을 바라보던 때.
예상치 못했던 고립과 고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이 작은 집안은 온통 자라나는 아이의 경이로움과 처음으로 부모가 된 사람들의 고달픈 행복과 웃음으로 참 풍요로웠다.

여름, 가을, 겨울, 봄... 계절이 한바퀴를 돌고 나서야 나는 걷기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비로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지나 아파트 놀이터까지... 우리의 세계는 참으로 조금씩 넓어졌었다.











앞산인 봉산은 작년 여름, 연수가 두돌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처음 올라가 보았다.
아주 낮은 산둘레 길만 걷고 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연수에게는 처음으로 가본 산이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나무숲은 육아에 지친 엄마에게 다른 세상에 와있는것 같은 청량한 기쁨을 주곤 했다. 

굽이굽이 이어져있는 좁은 동네길도 연수와 함께 참 많이 걸어다녔다.
모험처럼, 여행처럼 낯선 골목을 기웃거려보다가 동네 슈퍼앞에 쭈그리고 앉아 우유 한잔으로 목을 축이던 날들. 
젖끊을 무렵, 칭얼거리는 연수를 재워보려고 유모차에 태워 하염없이 돌아다녔던 골목도 나중에 생각하면 얼마나 그리울까.  











15층 우리집 베란다에 붙어서서 연수는 저 아래 놀이터에 누가 있나 살펴보기를 좋아했다.
때로 반가운 친구들이나 이웃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일때면 "엄마, 준태랑 아줌마랑 나왔어! 우리도 나가자!"를 외치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나와 함께 서서 한참동안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이 아이와 나를 보살펴주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
도시의 작은 집에서 꾸려가는 단촐한 살림이지만 그래도 베란다에 작은 장독대를 마련하고
아이의 생일날이나 새해가 시작되는 날에는 장독대위에 물한그릇 떠놓고 이 집에 깃든 어떤 기운들을 향해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보살펴달라고 빌곤 했다.

우리가 아플때면 가족같이 걱정해주고 기꺼이 보살펴주었던 이웃들도 잊지 못할 것이다. 
뜨거운 한여름의 긴 낮을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선선해질 해거름이면 아파트 마당에 모두 모여 아이들 노는 모습 지켜보며 함께 웃고 위로했던 이웃들... 그 사람들 덕분에 얼마나 사람사는 것 같은 날들이었던가.  
멀리 연신내까지 나와 연수를 보러 와주었던 친구들과 선배들.. 생각하면 이 집에는 그이들의 기운도 늘 남아있었다.
신혼살림을 차리며 시작한 블로그를 통해 연수가 자라는 모습을 늘 지켜봐주고 나를 격려해주었던 블로그 이웃들은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블로그 이웃들은 이사를 가도 계속 이어지는 인연이라 더 고맙고 든든하다.

이 집을 떠나며 우리가 받았던 그 모든 사랑과 보살핌에 깊이,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3년동안 첫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게 해주었던 집, 둘째 아이를 갖게 해준 집. 부모와 부부라는 길에 처음 들어서 헤메고 고전하는 날들이었어도 남편과 내가 서로 아끼고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집.
정말 고맙다...











"이 집이 무척 그리울꺼야... 그지?"
며칠전 연수가 잠들고 난 뒤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집을 둘러보던 남편이 말했다.
그저 짧게 "응.. 정말..."하고 대답하고 말았지만 나는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신혼 첫집이라 유난히 정이 많이 들었던 집과 헤어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하지만
엄혹하기 그지없는 전세대란의 시절에 참으로 운좋게도 서울시에서 공급하는 장기전세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어 하는 이사니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다.  
내집이 아니니 언젠가는 떠나야했을 신혼집을 적절한 시점에, 고마운 마음만 안고 떠날 수 있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그동안 우리 가족을 따뜻이 보살펴준 이 집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려니.. 생각하니 더 고맙고 애틋하다.    

주인에게 이만저만해서 나가게 되었다 얘기하고 얼마 안있어 새로 전세들어올 사람과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거실과 부엌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며 마음으로 이 집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어. 잊지 못할거야, 우리의 첫집. 연수의 첫집.










지난 주말에는 이사할 집에 가서 거실과 방안 곳곳에 양파를 두고 왔다.
그리하면 새가구 냄새가 좀 덜해진다고 아가씨가 일러주어서 입주청소를 하기전에 한번 둘러보기도 할겸 겸사겸사 다녀왔다.
새 집은 4층이고, 또 앞뒤 동이 가까운 편이라 집에서 멀리 내다볼 수있는 풍경이 없다.
아는 이웃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 적응할 일이나 새집증후군 같은 것이 걱정되기도 하고,
새롭게 만날 인연들과 풍경들을 상상하면 설레기도 한다.
오후 햇살이 집안을 따뜻이 비쳐주는 것은 여기와 같다. 이 집에서 나는 둘째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키우게 되겠구나..
잘 부탁한다.. 새 집. 잘 부탁해요, 모두들..










연수는 단지 안에 새로 만들어져있는 놀이터가 무척 좋다고 했다. 
"연수야, 새 놀이터가 마음에 들어?"하고 물었더니 "응! 좋아~! 마음에 들어!!"하면서 키를 잡고 돌릴 수 있는 큰 배모양의 놀이기구를 떠날 줄 모른다. 
아파트 단지에서 큰길 하나만 건너면 오래된 주택가와 작은 컨테이너박스들을 죽 이어붙인 긴 시장골목이 펼쳐지는데 거기서 아주 맛있는 잔치국수집을 발견했다.
봄이 온다해도 아직은 바람이 찬 오후, 뜨거운 국수 국물을 훌훌 마시며 낯선 동네에서 마음 붙일 작은 터전을 그렇게 하나둘 마련하고 돌아왔다.











이사는 일요일이다.
포장이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집을 치우고 짐정리도 해야할텐데 임신 7개월로 접어든 엄마는 아직 아무 것도 손대지 못했다.
연수와 그저 따뜻한 볕을 쬐며 봄기운만 느끼고 있다.
내일부터는 조금씩 짐도 싸고, 겨우내 복도에 세워놓아서 먼지가 새까맣게 앉은 연수 장난감 자동차와 자전거들도 좀 씻어야지.
새집은 계단식 아파트라 이렇게 마음편히 물 써가며 장난감 청소를 할 수있는 복도가 없다.
이사가면 비오고 눈오는 날에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고, 한낮이든 한밤중이든 칭얼거리는 아이 업고 한없이 오고가며 재울 수 있었던 이 복도가, 특히 아름다운 북한산과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다 내것 같았던 이 복도가 제일로 아쉽고 그리울 것같다.











어느 눈내린 날.
"연수야, 앞산에 하얗게 눈이 내렸네~" 했더니 연수가 "엄마, 북한산은?" 하고 물어서 "어, 그래, 가보자!"하고 현관문 열고 나와 찍었던 사진. 
그러고보니 북한산은 연수가 제일 처음 배운 산이름이네.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능선으로 지친 마음에 늘 지표가 되어주었던 든든한 산.  
"연신내 우리집. 갈현동 현대아파트 102동 1509호" 이제야 막 연수가 집주소를 외우게 되었는데 이사라는 것이 안타깝다며 남편과 둘이 웃다가 언제고 잊지못할 주소란 생각에 마음 한켠 먹먹해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연신내에서의 마지막 날들이 가고 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