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2011. 2. 24. 00:58








날이 참 포근하다.
이제는 봄이 온 걸까.

겨우내 들었던 습관대로 온종일 집안에만 있다가
저녁 무렵, '안되겠다 잠깐이라도 바깥공기 좀 쐬자'하고 연수를 업고 복도에 나와 별도 찾고 달도 찾고
저기 복도끝 엘리베이터까지 어슬렁어슬렁 다녀와도 발가락이 하나도 시렵지 않다.
맨발에 슬리퍼만 달랑 신었을 뿐인데.

날로 따셔지는 봄햇살이 잠들었던 몸과 정신을 살살 흔들어 깨우는 것 같은 이즈음에 우리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결혼해 신혼살림을 차려 꼬박 3년을 살아온 집.
이 집을 떠난다는 것이 아직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이 집말고 다른 집이 우리 집이 된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집에 신혼가구들을 들여놓고 처음 살림을 시작했던 겨울날이 생각난다.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처음으로 싸보고, 초여름에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블로그를 시작했던 날들.
연수를 낳고 첫 날들을 함께 보내며 땀도, 눈물도 참 많이 흘렸던 집. 
그 때 내가 하루중 가장 많이 보았던 풍경은 바로 이 둥근 베란다 창으로 바라보이는 앞산 풍경이었다.  











소파에 앉아 젖을 먹이고, 잠든 아이를 깰까봐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대로 수유쿠션 위에 뉘어놓은채 책도 보고, 블로그도 보고, 베란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오후 햇살을 바라보던 때.
예상치 못했던 고립과 고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이 작은 집안은 온통 자라나는 아이의 경이로움과 처음으로 부모가 된 사람들의 고달픈 행복과 웃음으로 참 풍요로웠다.

여름, 가을, 겨울, 봄... 계절이 한바퀴를 돌고 나서야 나는 걷기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비로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지나 아파트 놀이터까지... 우리의 세계는 참으로 조금씩 넓어졌었다.











앞산인 봉산은 작년 여름, 연수가 두돌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처음 올라가 보았다.
아주 낮은 산둘레 길만 걷고 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연수에게는 처음으로 가본 산이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나무숲은 육아에 지친 엄마에게 다른 세상에 와있는것 같은 청량한 기쁨을 주곤 했다. 

굽이굽이 이어져있는 좁은 동네길도 연수와 함께 참 많이 걸어다녔다.
모험처럼, 여행처럼 낯선 골목을 기웃거려보다가 동네 슈퍼앞에 쭈그리고 앉아 우유 한잔으로 목을 축이던 날들. 
젖끊을 무렵, 칭얼거리는 연수를 재워보려고 유모차에 태워 하염없이 돌아다녔던 골목도 나중에 생각하면 얼마나 그리울까.  











15층 우리집 베란다에 붙어서서 연수는 저 아래 놀이터에 누가 있나 살펴보기를 좋아했다.
때로 반가운 친구들이나 이웃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일때면 "엄마, 준태랑 아줌마랑 나왔어! 우리도 나가자!"를 외치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나와 함께 서서 한참동안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이 아이와 나를 보살펴주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
도시의 작은 집에서 꾸려가는 단촐한 살림이지만 그래도 베란다에 작은 장독대를 마련하고
아이의 생일날이나 새해가 시작되는 날에는 장독대위에 물한그릇 떠놓고 이 집에 깃든 어떤 기운들을 향해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보살펴달라고 빌곤 했다.

우리가 아플때면 가족같이 걱정해주고 기꺼이 보살펴주었던 이웃들도 잊지 못할 것이다. 
뜨거운 한여름의 긴 낮을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선선해질 해거름이면 아파트 마당에 모두 모여 아이들 노는 모습 지켜보며 함께 웃고 위로했던 이웃들... 그 사람들 덕분에 얼마나 사람사는 것 같은 날들이었던가.  
멀리 연신내까지 나와 연수를 보러 와주었던 친구들과 선배들.. 생각하면 이 집에는 그이들의 기운도 늘 남아있었다.
신혼살림을 차리며 시작한 블로그를 통해 연수가 자라는 모습을 늘 지켜봐주고 나를 격려해주었던 블로그 이웃들은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블로그 이웃들은 이사를 가도 계속 이어지는 인연이라 더 고맙고 든든하다.

이 집을 떠나며 우리가 받았던 그 모든 사랑과 보살핌에 깊이,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3년동안 첫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게 해주었던 집, 둘째 아이를 갖게 해준 집. 부모와 부부라는 길에 처음 들어서 헤메고 고전하는 날들이었어도 남편과 내가 서로 아끼고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집.
정말 고맙다...











"이 집이 무척 그리울꺼야... 그지?"
며칠전 연수가 잠들고 난 뒤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집을 둘러보던 남편이 말했다.
그저 짧게 "응.. 정말..."하고 대답하고 말았지만 나는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신혼 첫집이라 유난히 정이 많이 들었던 집과 헤어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하지만
엄혹하기 그지없는 전세대란의 시절에 참으로 운좋게도 서울시에서 공급하는 장기전세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어 하는 이사니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다.  
내집이 아니니 언젠가는 떠나야했을 신혼집을 적절한 시점에, 고마운 마음만 안고 떠날 수 있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그동안 우리 가족을 따뜻이 보살펴준 이 집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려니.. 생각하니 더 고맙고 애틋하다.    

주인에게 이만저만해서 나가게 되었다 얘기하고 얼마 안있어 새로 전세들어올 사람과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거실과 부엌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며 마음으로 이 집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어. 잊지 못할거야, 우리의 첫집. 연수의 첫집.










지난 주말에는 이사할 집에 가서 거실과 방안 곳곳에 양파를 두고 왔다.
그리하면 새가구 냄새가 좀 덜해진다고 아가씨가 일러주어서 입주청소를 하기전에 한번 둘러보기도 할겸 겸사겸사 다녀왔다.
새 집은 4층이고, 또 앞뒤 동이 가까운 편이라 집에서 멀리 내다볼 수있는 풍경이 없다.
아는 이웃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 적응할 일이나 새집증후군 같은 것이 걱정되기도 하고,
새롭게 만날 인연들과 풍경들을 상상하면 설레기도 한다.
오후 햇살이 집안을 따뜻이 비쳐주는 것은 여기와 같다. 이 집에서 나는 둘째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키우게 되겠구나..
잘 부탁한다.. 새 집. 잘 부탁해요, 모두들..










연수는 단지 안에 새로 만들어져있는 놀이터가 무척 좋다고 했다. 
"연수야, 새 놀이터가 마음에 들어?"하고 물었더니 "응! 좋아~! 마음에 들어!!"하면서 키를 잡고 돌릴 수 있는 큰 배모양의 놀이기구를 떠날 줄 모른다. 
아파트 단지에서 큰길 하나만 건너면 오래된 주택가와 작은 컨테이너박스들을 죽 이어붙인 긴 시장골목이 펼쳐지는데 거기서 아주 맛있는 잔치국수집을 발견했다.
봄이 온다해도 아직은 바람이 찬 오후, 뜨거운 국수 국물을 훌훌 마시며 낯선 동네에서 마음 붙일 작은 터전을 그렇게 하나둘 마련하고 돌아왔다.











이사는 일요일이다.
포장이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집을 치우고 짐정리도 해야할텐데 임신 7개월로 접어든 엄마는 아직 아무 것도 손대지 못했다.
연수와 그저 따뜻한 볕을 쬐며 봄기운만 느끼고 있다.
내일부터는 조금씩 짐도 싸고, 겨우내 복도에 세워놓아서 먼지가 새까맣게 앉은 연수 장난감 자동차와 자전거들도 좀 씻어야지.
새집은 계단식 아파트라 이렇게 마음편히 물 써가며 장난감 청소를 할 수있는 복도가 없다.
이사가면 비오고 눈오는 날에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고, 한낮이든 한밤중이든 칭얼거리는 아이 업고 한없이 오고가며 재울 수 있었던 이 복도가, 특히 아름다운 북한산과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다 내것 같았던 이 복도가 제일로 아쉽고 그리울 것같다.











어느 눈내린 날.
"연수야, 앞산에 하얗게 눈이 내렸네~" 했더니 연수가 "엄마, 북한산은?" 하고 물어서 "어, 그래, 가보자!"하고 현관문 열고 나와 찍었던 사진. 
그러고보니 북한산은 연수가 제일 처음 배운 산이름이네.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능선으로 지친 마음에 늘 지표가 되어주었던 든든한 산.  
"연신내 우리집. 갈현동 현대아파트 102동 1509호" 이제야 막 연수가 집주소를 외우게 되었는데 이사라는 것이 안타깝다며 남편과 둘이 웃다가 언제고 잊지못할 주소란 생각에 마음 한켠 먹먹해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연신내에서의 마지막 날들이 가고 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