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동네.세상2014. 4. 25. 16:37



아침밥 차리는 엄마 옆에 세 녀석이 옹기종기 붙어서 놀던 중에.


연수: 엄마, 우리 이제부터 말 끝에 다 '파워~!'붙여서 말하기 하자!

연호: 좋아! 나도 할래~!

엄마: 그래.

연수: 그래~파워! 해야지!

엄마: 알았어~파워.

연수: 엄마, 사랑해~파워!!

엄마: ^^.. 엄마도 사랑해 파워.

연호: 사랑해 사랑해 똑같은 말 두 번하기 없기야!

연수: 아니야, 있어. 사랑해 사랑해 두번 하기 있지이~~~(엄마)?

연호: 으응~!! 있지이!


쿡. 웃음이 터졌다.

방금전까지 제가 같은 말 두번 하기 없다고 해놓고, 

형이 동의를 구할 때마다 쓰는 '있지이이~~?'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리는 말투로 물으니 저 한 말은 금새 까먹고 '으응~~!'하고 맞장구쳐주는 네살배기 연호가 귀여워서 웃었다.

엄마한테 '사랑해에~ 파워!'하고 외쳐주는 일곱살 아들이 고마워서 웃었다. 

형들 따라 '우오우오아으~'하고 뭐라뭐라 저도 얘기하는 꽃같은 막내둥이가 예뻐서 웃었다.


웃다가 다시 심장이 읔. 하고 아팠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인데.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살 부비고 안아주며 키워온 자식을 하루 아침에 잃은 것이다.


세월호 사고 후 열흘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계속 지금 내가 서있는 현실과 지금 이 순간 진도 앞 바다에서 수많은 부모들이 멀쩡히 두 눈 뜨고 자식을 잃으며 오열하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 사이를 오고가며

웃다가 울다가 멍해졌다가 가슴이 쓰렸다가 분노했다가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참담했다.


내 눈앞에서 뛰어 놀고 웃고 먹고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초록 잎사귀가 어느새 무성해진 봄나무들과 꽃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문득 가슴이 저며와 숨을 골라야했다. 


우리는 모두 저 시간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으로. 


차가운 물속에 우리 심장의 한 부분을 담궈둔 것처럼 

그렇게 시시때때로 오싹해지는 추위와 소름을 몸의 일부로 붙이고 살아갈 것이다.


아이들 키워온 칠년동안

거의 보지않았던 뉴스를 매일밤 아이들 재운 후 컴퓨터를 켜고 보았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9 을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그동안 너무 데모를 안했구나' 하는 반성을 혼자 했었더랬다. 

내가 무슨 대단한 운동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소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해야하는 작은 동참, 

비상식적인 일들에 문제 제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기위해 함께 즐겁게 시도하고, 정당한 목소리를 모으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기위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일 같은 것을 너무 방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아이들 키우는데만 급급하고 바빠 

다른 아이들을, 내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고 참여하는데 게을렀던 것을 반성했다.


아이들을 잃고.. 나는 부끄럽다.

너무나 미안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것이다.

조용히. 내 자리에서. 반기를 들고.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3. 8. 26. 00:44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집은 서울시에서 임대하는 장기전세아파트다.

이 집에 들어온지 이제 꼭 2년반이 되었다.

둘째 연호를 임신하고 있을때 신혼부부특별청약으로 신청해서 당첨이 되었고, 완공되고 바로 이사와 얼마후에 연호를 낳았으니 이 집은 연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처음 입주할 때는 아직 공사중이었던 냇가가 이제는 많이 다듬어졌다.

진짜 하천은 바로 옆 자전거도로 밑에 파묻힌 시멘트관속으로 흐르고, 이 냇물은 조경을 위해 흘려보내는 수도물과 아파트 단지안에서 나오는 빗물들이 모여 흐르는 것이라 깨끗하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 힘든 애매한 가짜냇물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 냇가를 참 좋아한다.

봄가을로는 냇물에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겨울에는 얼음 구경하고 눈썰매타며 놀 수 있어 참 좋다.

그리고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발도 담그고 심지어 몸도 담근다. ^^;;

 

시골에서도 이제는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드물텐데, 발만 담가도 금새 흙탕물이 되고마는 먼지 많고, 뭔가 찜찜한 냇물에 어린 아이들이 첨벙거리도록 놔두는 엄마를

지나가는 어른들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처음에는 나도 애들을 말리는 시늉을 좀 했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나한테, 우리한테 중요한게 뭘까.. 하고.

냇물이 더럽다면 집에 가서 깨끗하게 씻으면 된다. 길어봐야 30분쯤, 어쩌다 하루 이 물에서 첨벙거렸다고 아이들이 잘못되지는 않을거다.

물론 수질검사를 해서 아주 깨끗하다고 판정이라도 받으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지만 

사람사는 집 가까이에 보기 좋으라고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냇물인데 뭐 그렇게까지 절대 몸에 묻히면 안되는 물이기야하랴..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중요한건

이 작은 냇물이 내게 정말 큰 위안을 준다는 것이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있기만 해도 나는 답답했던 마음이 한순간 어디 산속의 계곡물 곁에 와있는듯 청량해지곤 했다.

냇가 양 옆으로 우거진 풀밭에는 여름 풀벌레소리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그 물 속에서 웃는 모습은 또 얼마나 보기만해도 시원한가.

그래서 나는 괜히 주눅든 사람처럼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되도록 남들은 안 쳐다보고, 예쁜 아이들 모습만 쳐다보기로 했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고 아이들과 함께 물위를 헤엄치는 소금쟁이들과, 수면 가까이 날아다니는 잠자리들 그리고 연수가 찾아주는 고동들을 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순간에 연제는 대개 유모차에서 자거나 내 등에 업혀서 잠들어있곤 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아직도 더운 오후에 아이들은 한번씩 냇가에서 옷을 적시고 놀다가 '이제 춥겠다, 집에 가자'하면 맨발로 긴 나무 계단을 걸어올라와 벤치와 작은 산책로를 지나 106동 우리집 현관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이 냇물 때문에 나는 우리 아파트가 좋다.

아니, 이 냇물과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푸른 소나무 한그루 때문에 나는 우리집을 견디며 산다고 해야 맞다.

살수록 나는 아파트가 싫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아파트에 살고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더 아파트에 살 계획을 세우고 있는건 순전히 좋은 대안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아보고, 남편도 나도 어려운 상황들을 좀 감내할 결심을 해야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텐데 지금까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우선은 이 집에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다행히 냇물이 있으니 여기서 자주 놀면서 아이들은 가공된 자연이라해도 흐르는 물의 느낌을 조금은 알고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냇가옆 길을 걸으면서 양쪽으로 높이 솟은 아파트 풍경이 참 삭막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풍경도 예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프랑스 삽화가인 장 자끄 상페가 그린 건물들 그림이 생각나면서 그런 느낌으로 이 냇가와 양쪽으로 서있는 아파트들을 그려보면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제가 조금 더 크면.. 아이들과 같이 이 길에 앉아서 연필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두 아이 데리고, 그리고 지금은 세 아이 데리고 거의 매일 이 길을 오고가면서 고단하고 힘들던 순간 마다 바라보면 늘 위로가 되었던 하늘, 먼 산..

그리고 우리의 작은 집이 끼여있었던 빽빽한 아파트 건물과 함께 놀던 냇가를 그려봐야지.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 그리는걸 참 좋아한다.

많이 큰 아이들과 스케치북을 들고 이 길에 나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이번 여름에 집고민을 좀 많이 할 일이 있어서 집중적으로 하다보니 아파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더운 여름밤, 사람들이 잔뜩 쏟아져나와있는 아파트 마당 한켠에 앉아있다가 문득

나만의 마당이 없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달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공간, 집 안 말고 잠시 바깥바람을 쐬며 조용히 좀 서성이고 싶을 때 편안하게 현관문열고 나갈 수 있는 마당, 내 의자, 내 뜨락...

도시의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조용한 성찰의 공간이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는 큰 마당과 벤치들이 많지만 그 어느 곳도 오롯한 나만의 공간은 아니며 늘 타인들과 같이 점유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불밝힌 아파트 집집에서 내려다보는, 혹은 주위를 오고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공간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조용한 자기만의 시간, 공간이 필요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나에게 집중해볼 수 있는 시공간이.

도시는 여간해서는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작은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하철이나 버스같은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끼고싶을 때, 잠시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을때

그럴때 스마트폰은 몸은 아직 거기 있지만, 정신만큼은 훌쩍 그 장소와 사람들 속을 벗어나 스마트폰안의 내 세상으로 탈출하게 해주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그토록 현대인에게 절실해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용히 내 집 마당에 앉아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들의 삶은 훨씬 차분해지고 생의 깊은 의미를 찾으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작은 마당이라도 뜨락이 있고 수돗가가 있고 내 하늘이 있는 마당 생각이 참 간절해지던 밤이었다.

 

아파트는 어쩔 수 없이 획일적인 생활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하는 행동,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모두 유심히 보고,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어른들도 비슷하다. 공동주택은 비슷한 삶의 사이클, 비슷한 삶의 양식 속에서 저도 모르게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거기서 조금 벗어나려고하면 나도 모르게 이질적인 존재가 될 것 같은 불안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너무 밀집해있고 너무 거리들이 가까우니까 영향력도 크다.

다 똑같이 사는게 좋은 것도 아니며, 나와 다른 삶을 포용할 때 뭔가 배우고 새롭게 자랄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가 될 것 같은 외로움과 불안감을 곧잘 느끼는 나로서는

아파트의 가깝고도 무책임한 관계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아파트의 또 한가지 안타까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요즘 신축아파트들은 조경을 잘 한다. 키 큰 소나무들도 많이 옮겨다 심어놓고, 정자며 인공연못 같은 공간도 많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의 키 큰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왠지 안쓰럽고 미안하다.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도 바로 옆에 서있는 높다란 아파트 건물에 비해보면 너무 작다.

소나무를 압도하는 아파트 건물들 때문에 소나무는 몹시 왜소하고 위축되어 보인다.

사람이 그 밑에 서서 올려다보면 나무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외스러운 생명체다.

모든 생명과 자연이 그렇지..

그래서 주위 자연과 어울리는 건축이 아쉽다.

자연에 무심한 구조물 속에 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무지하게, 무감해지게 되는 우리들이 안타깝다.    

 


 

 

 

아파트와 집 생각을 자꾸 하다보니 몇가지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우선, 아파트 1층집들에게는 마당을 주면 어떨까.

저마다의 조그만 마당을. 신축아파트 1층 어린이집들이 그렇게 하듯이 베란다 난간 한끝을 여닫이로 해서 나무계단 같은 것을 놓고 마당으로 바로 내려설 수 있게 하면 아파트 1층집들은 조그만 자기 마당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단점(?)이 있다하여 분양가도 제일로 싼 1층인데

자기 마당을 준다하면 안그래도 아이들이 많아 층간소음 걱정으로 어디 아파트1층없나.. 찾게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꼭 들어가고 싶은 아파트가 될텐데...ㅎㅎ

작은 마당이지만 내가 꽃도 가꾸고 오고가는 이웃들에게 좋은 구경(?)도 시켜주고, 여름에는 물놀이 풀장도 하나 내놓고 오고가는 아파트 이웃아이들도 와서 같이 놀고가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

그래도 프라이버시가 걱정되면 나무 울타리 같은걸 할 수도 있고..

 

두번째는 아파트 정원에 과실수를 많이 심는 것이다.

철따라 여러 과일이 달리는 과실수를 심어서 아파트 아이들에게 어떤 나무에 어떤 열매가 어느 철에 열리는지 알게 해주는 거다.

우리 아파트에는 매실과 모과가 달려서 연수와 나는 봄, 여름으로 그 열매들을 열심히 찾으며 지낸다.

앵두도 있고, 살구도 있고, 사과 복숭아 감 대추 배 밤나무들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 나무들에는 팻말이 잘 달려있기도 한데, 아예 처음부터 자연학습장처럼 여기저기 다양한 나무들을 심어놓고, 아파트 나무 지도같은걸 만들어서

아파트안에 있는 어린이집들에 팜플렛이나 책으로 나눠주면 아이들이랑 선생님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나무 구경하고 열매구경하고 꽃보고 풀보고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재밌고 알찬 자연공부, 자연놀이가 되지 않을까.

나는 우리 아이들과 그러고 시간을 잘 보내는데 자연의 놀이감들과 함께 놀다보면 정말 시간도 잘 가고 아이들도 재미있어한다.

아파트가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그들의 고향집이 되어가고 있는 도시에서

아파트 공간을 그렇게 자연과 조금 더 가까운, 우리 곁의 자연을 알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어른들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 더,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참 많이 오가고 전기도 꽤 많이 들것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한강과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고 그래서 건물들 안에 '필로티'라고 부르는 빈 공간이 꽤 있다.

바람이 지나갈 수있게, 건물이 위험해지지 않게 비워놓는 뻥 뚤린 공간인데

그만큼 바람이 센 곳이니까 작은 풍력발전기들을 좀 놓을 수는 없을까?

태양열을 이용해서 온수를 공급하거나, 세대마다 뭔가 대안적인 에너지생성 시설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우선 공동공간인 가로등 불빛이나 엘리베이터 전력이라도 바람이나 태양에너지 같은 것으로 공급할 순 없을까?

아파트는 워낙 큰 건축물이므로 그런 대안적인 시설도 하려고하면 개인집에 설치하는 것보다 더 규모있게 할 수 있진 않을까?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조금씩 현실에서 더 구현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더 대체에너지나 기후변화 같은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관련된 여러 일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배우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내 아이들도 모두 아파트가 나고 자란 고향집인 아이들이 되었다.

나중에 자라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게 되든 유년의 첫 집과 그 마을의 느낌은 오래도록 아이들 마음에 남을 것이다.

답답하고 어렵지만.. 아이들과 힘껏 행복해지려고, 마음 기댈 곳 찾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야겠다.

내 생각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우리집을 포근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곳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아파트에 살면서도 아이들이 조금더 자연의 품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하며 지내고싶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1. 5. 7. 02:10










5월이 왔다. 
잠잠하던 느티나무들이 어느날 갑자기 푸른잎을 확 피워올렸다.

사흘이나 계속 되었던 올봄 최악의 황사가 지나가고 맞은 아침.
다음날로 다가온 어린이날 소풍 준비를 하러 연수와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황사가 계속되는 동안 내 마음에도 온통 뿌연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아침마다 거실 창문앞에 서서 '오늘은 냇가 너머 먼산이 어느만큼 보이는지' 연수와 얘기하고, 그래서 오늘도 밖에 나갈 수가 없겠다고 한숨쉬고 돌아서는 일의 반복..
집안에 갇혀있던 그 3일동안 자연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왜소한 처지를 거듭 확인하면서도 
자연재해 수준의 이 황사가 실은 인간이 초래한 사막화와 산업화 같은 것들에 의해 날로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문명이,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세상과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져서 어깨에 힘이 빠지기 일쑤였다.












동네 꼬마들의 발길이 닿기에는 아직 이른 오전.
놀이터 나무밑을 누군가 깨끗하게 빗질 해놓으셨다.

황사 기간동안 뒤늦게 읽은 방사능 오염에 대한 글들때문에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
정부의 '안심하라'는 발표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찜찜하긴해도 아주 큰일이야 있겠나.. 싶어 큰 동요없이 지내왔었다. 
다만 연수와 비오는 날 외출만 삼가해왔다.
예전에는 비오는날 장화신고 우산쓰고 엄마와 우중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리던 연수는 왜 이제는 비를 맞으러 나갈 수 없는지 물었다. 
"비 속에 아야아야 하는 물질이 섞여있어서 맞으면 아플 수도 있대.." 하고 대답하고, 비온 다음날은 돌멩이나 나뭇가지도 한동안은 줍지 못하게 하다가 얼마전 다시 줍게 했더니 
"이제는 아야아야하는 물질이 없어? 만져도 괜찮아?" 하고 물어서 "응..."하고 자신없이 대답하는 내 마음이 찡하게 아팠다.   

비에 섞여 내리는 방사능 낙진이 제일 위험하고, 외출할때 되도록이면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집안에 숯같은 공기정화기능이 있는 것도 들여놓고... 필수지방산이 많이 들어있는 음식들을 먹으면 체내에 들어온 방사능을 배출하는데 좋고...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읽으며 좀 멍해졌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할거라는 일본의 원전사고 발생지점으로부터 사실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우리는 강한 영향권안에 들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연수는.. 평화는.
일본의 사고원전에서 복구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우리는 모두 10년 뒤에 암에 걸릴꺼야'라고 서로 얘기한다는데
일본과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얼마나 무서운 후유증들이 우리와 다음세대를 덮칠까.

세계가 한순간에 멸망한다는 것은 두려운 상상이긴해도 비현실적이라 그만큼 거리감도 들고, 또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섬광처럼 모든 것이 끝날테니 그때는 아픔도, 고통도 길게 남지 않을 것같아 외려 덤덤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천천히 나빠지는 것들 앞에서는.. 삶이 오래오래 그 고통과 절망을 견뎌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 난치병 발병률이 높아지고, 어린 몸과 정신들이 이름모를 고통과 싸우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부모들의 아픔.. 같은 것들을 생각하니 미래가 무서워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욱한 황사에 갇혀 그렇게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은 황사가 걷히고서야 천천히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 살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내곁에 찾아와주는 아름다운 것들에 감사하면서, 숨쉴 수 있는 것에 고마워하면서..  
날이 개고 황사가 그치면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초록색 무성한 잎사귀들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같이 견디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

연수와 함께 성당밖 놀이터에서 조금 놀다가 성당안 놀이터에도 잠시 들렀다.
5월의 성모상 앞에는 색색의 꽃들이 가득했다.











머리에 화관을 쓴 성모. 그 품에서 노는 아기 예수.
성모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지극히 적지만... 그 분이 엄마라는 것, 생명을 낳고 키운 분이라는 것때문에
아기엄마가 된 뒤로는 성모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좀 남달라졌다.
당신에게 꽃을. 세상의 모든 엄마들께 꽃을..
이 고난의 시대에 부모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아파트 돌담 틈새에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엄마, 제비가 죽어서 제비꽃이 핀거야?"

할머니 무덤가에 할미꽃이 피고, 백일동안 님을 그리워하던 아가씨가 죽은 뒤 백일홍꽃이 피었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은 뒤
어느날 제비꽃을 본 연수가 이렇게 물었었다.
이 날도 물었다. 제비가 죽으면 제비꽃이 되느냐고...
글쎄다... 아이야.
먼 길을 여행하던 푸른 제비가 고운 날개를 접고 쉬게되면, 오래오래 잠이 들어서 깨어나지 않게되면.. 그 자리에 정말 이 보랏빛 여린 꽃이 필지도 모르지. 정말 그럴 것 같구나.. 네 얘기를 그대로 따라가면 마음속으로 고운 그림 한편 그려볼 수도 있구나.












우리집에서 가까운 상일동역을 지나 한살림 매장이 있는 고덕역까지 가는 길에는 한쪽으로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다른 한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계속 같이 달린다.
연수와 나는 산자락쪽 길을 택해서 주로 가는데 가다가 마음내키면 유모차를 세워두고 잠시 산에 오른다.
 











연수는 산을 좋아한다. 뛰고, 걷고... 가끔 나무 등걸에 앉아 쉰다.

우리 동네 산들에는 큰 나무들이 많이 쓰러져있다.
작년 여름 태풍 콘파스가 서울을 휩쓸고 지나갈때 그 강풍에 부러지고, 밑둥까지 뿌리째 뽑힌 것들도 많다. 

연수와 쓰러진 큰 나무 등걸에 나란히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엄마, 나무가 왜 쓰러졌지?"

"작년 여름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쓰러졌대.." 

"나무가 죽었어?"

"응... 죽었어."

".... 아니야, 잠자는거 같은데?"

".... 잠자는 것 같아?"

"응! 누워서 잠자는거야."

"그렇구나.. 정말 잠자는 것 같네.." 


봄이 오는 숲, 까맣게 누운채 잠들어있는 나무.
조용히 웃었다. ^^ 
마음이 무거울 때, 때때로 천진한 아이의 말에서 참 큰 위로를 받는다. 고마운 녀석..












여기저기 구경 한참씩 하고 놀면서 걸어오다보니 버스로는 5분 거리인 고덕역까지 오는데 2시간이 걸렸다. ^^;;;
점심때가 다되어 고덕역에 도착했다. 마침 바닥분수에서 물이 나오고 있었다.
이사온지 두 달.. 여기 분수에 물나오는 것은 처음 본다. 이제야 날이 좀 더워졌는가보다.
뜻하지 않게 분수를 만난 연수는 어디 큰 공원이라도 온듯 신이 났다. ^^











처음에는 구경만 하더니... 이내 가까이 가서 물을 만져본다.
집앞 징검다리에서 논다고 신고 나온 장화가 그야말로 '물 만났다'. ㅎㅎ











"앗 차가워~~!!" 
생각보다 물이 찬지 깜짝 놀라서 돌아온다.
그래도 분수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들고 싶어하는 것을 '다음에 갈아입을 옷 가지고 왔을때 더 놀자'고 열심히 달랬다.











"엄마, 너무 신나~!"
좋아하는 꽃까지 따들고 물 옆을 뛰어다니는 연수. 어린 얼굴이 즐거움으로 빛난다.
세상이 밝고, 아이도 환한 날.. 이런 날이 엄마도 제일 좋다.












어렵사리 한살림 명일매장에 도착해 어린이날 장을 봤다.
지난 주 인터넷주문할 때까지는 미처 생각못했던 소풍이라 산책도 할겸 직접 장도 볼겸 겸사겸사 나선 길...  
유부초밥거리도 사고 과일도 사고, 빵이랑 쥬스까지 사고나니 장바구니가 묵직하다. 소풍 전날 기분이 난다. ^^
시어머니께서 어린이날에 연수 맛있는거 사주라고 하시며 부쳐주신 5만원을 뜻에 맞게(?) 쓴다는 훌륭한 명분까지 있어서 
연수가 사달라는데로 한살림 과자들도 넉넉하게 사주었다. ㅎㅎ 












마침 점심때라 배가 딱 고픈데 어디서 뭘 먹을까... 하다가 한살림 매장 바로 옆에 있는 '맛깔손'이라는 유기농 반찬가게에 들어갔다. 금방 싼 큼직한 김밥 한줄을 사서 가게 안에 있는 작은 식탁에 앉아 먹었다.
맛있다. 역시 소풍에는 김밥이 제격인데.. 재주없는 엄마가 간단한 유부초밥으로 대신하려 하니.. 김밥은 이렇게라도 미리 맛봐야겠다.
한살림이 공급하는 식재료들을 가지고 김밥과 반찬 등을 만들어 파는 이 가게는 한살림 서울생협에서 지역조합원들과 함께 일구어낸 멋진 '일터'이기도 하다. 보람도 있고, 수익도 창출해서 나누는 좋은 일자리까지 함께 만들어가는 생협 사람들...
덕분에 나같이 어린 아이 데리고 나와서 맘편히 좋은 밥한끼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은 참 고맙고 좋다.  











두 가게를 이어주는 복도. 오월의 좋은 볕 아래서 배추잎이 마르고 작은 다육식물 화분들이 잘 자란다. 
이 매장에 두어번 와본 연수는 어느새 매장앞 소파에 편히 앉아 볕도 쬐고, 긴 나무복도를 오고가며 혼자 놀기도 잘 한다.
엄마 따라온 누나나 친구들이 보이면 반가운 마음에 어느새 그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있다.











분수대가 있던 고덕역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한살림 매장이, 오르편으로 가면 '아름다운 가게'와 역시 재활용품 가게인 '리싸이클 시티'가 있다.
어린이날을 맞아서...는 아니고, 실은 내가 편히 입을 옷을 좀 사고싶어 들린 아름다운 가게.












엄마가 옷을 고르는 동안 연수는 제 흥미를 끄는 물건들이 쌓인 곳으로 가서 기웃기웃 하더니....











이내 한가지를 골라들고 내려놓지 않는다.
'그게 뭐야?'하고 물어더니 '로켓'이란다.
흠... 독해가 힘든 엄마가 겨우 읽어낸 것은 '과학 로켓'이라는 큰 글씨.
여러가지 부품이 들어있고, 만 6세 이상 권장, 만3세 이하는 불가.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래, 그럼 어린이날 선물로 이걸 사줄까?" 물었더니 연수는 너무 좋단다. 
5500원. 아름다운 가게에서 나름 고가품인 이 로켓으로 연수의 네살 어린이날 선물을 장만했다. 뿌듯하다~^^;; 












아름다운 가게에는 옷이 많은데, 고르다보니 '응? 이거 내가 기증한 그 옷인가?' 싶은 옷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니었지만 비슷하기도 하고, 내가 관심가는 옷이 또 비슷비슷해서 이러다 예전 내 옷을 다시 사올수도 있겠다 싶었다. ^^;;
아름다운 가게에는 새옷을 기증하는 의류업체도 많아서 예전에도 모자달린 새 가디건을 3500원주고 산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쁜 새 반팔티셔츠를 3500원에, 임부복 원피스 위에 따뜻하게 입을까 싶어서 검은색 가디건을 또 3500원주고 샀다.
연수 옷은 주위의 형아들에게 물려받는게 워낙 많아 아름다운가게를 이용할 일이 별로 없는데 혹시라도 생기면 새 옷사는 습관을 좀 떨쳐내고, 소비가 기부가 되는, 멀쩡한 물건을 쉬이 버리지않고 오래 쓸 수있게 도와주는 재활용 가게를 더 이용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평소 연수가 늘 갖고싶어 하던 얼레를 뒤늦게 발견해서 그것까지 '어린이날 선물'에 끼워 하나 더 샀다.
가격은 1000원. ^^ 동네 문구점에서 멋진 독수리연도 하나 샀는데 그것도 1000원.
도합 7500원으로 연수의 행복한 어린이날 준비가 끝났다.

유모차에 장바구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연수는 따뜻한 오후 공기 속에 잠이 들었다. 
녹음이, 이렇게 말하기에는 아직 색이 좀 연한 것도 같지만... 
연초록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는 나무 터널 아래를 걸어 돌아오는 길이 참 좋았다. 











우리 곁으로 전동 휠체어를 탄 여성 장애인 한분이 지나갔다.
연한 연두색 외출복이 아름다웠다.
얼마만의 외출일까.. 한번 외출할 마음을 먹고 준비해서 나서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오월의 세상은 얼마나 눈부신지 그 순간 우리가 모두 밖에 나와있다는 사실에 벅찬 기분이 들었다. 
바퀴달린 것들이 마음껏 굴러갈 수있는 길이 있다는 것도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나중에 지나와보니 자전거들이 많이 세워져있는 지하철 계단 옆은 그 틈이 좁아 유모차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애인 휠체어가 지나가기엔 비좁았을 것 같다. 

 
오월, 푸른 오월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긴 추위를 지나 갑자기 훌쩍 만개한 초록잎들처럼... 생명은 참 경이롭고 씩씩하다.
때로 두렵고 힘이 들어도... 나도 그런 생명답게 살자고 마음먹는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1. 4. 18. 23:45


 







잉어를 먹었다. 
예로부터 아이가진 어미가 먹으면 눈이 크고 예쁜 아기를 낳는다해서 정성껏 달여 임신부에게 먹이던 보양식, 그 잉어다.
첫째때도 못 먹어본 잉어를 내가 둘째를 갖고서 먹게된 것은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멀쩡히 잘 살아있는 강을 '살린'다는 명목하에 강과 강에 깃든 무수한 생명과 영혼들을 죽이고 있는 4대강 사업. 
포클레인이 밤낮없이 헤집고 파헤치는 4대강중에 내 시댁이 있는 상주도 품고 가는 경상도의 젖줄 낙동강이 있다.

상주 경천대에 올라 둥그렇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푸른 낙동강 줄기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흰 백사장을 양쪽으로 넉넉하게 거느리고 돌아나가는 연푸른 그 물길은 꼭 뽀얀 엄마 젖가슴에 선명하게 돋아있는 푸른 핏줄기같았다.
그 강물에 지금은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 상주보'가 건설되고 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삭막하고 차가운 직선으로 만들며 지금 죽이고있는 생명과 앞으로 죽어갈 생명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이 꼭 감아진다. 지금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지 않아도 그 죽음의 아우성이 보고 들리는 것 같아 가슴이 후드득 떨린다. 

이 난리 와중에 낙동강 푸른물에서 자유롭게 새끼낳고 헤엄치며 살던 물고기들도 무사할 수가 없어서 
날선 포크레인이 막아놓고 간 어느 한 물구덩이에는 어른 팔뚝만큼 큰 잉어들이 잔뜩 몰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퍼덕이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다 잡아갈 수도 없을만큼 많은 잉어들.. 그중 몇마리를 누군가 큰 물통에 싣고 시내에 와서 팔고, 더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또 잡아다주고 했던 모양이다. 
일하시는 식당에서 그 얘기를 들은 우리 시어머니는 아이가진 며느리가 생각나 얼른 전화를 걸어오셨다. 
"아야, 너 먹을 수 있겠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먹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기뻐하시며 곧 보낼테니 기다리라고 하셨다. 
시아버지께서는 그 잉어를 사다가 건축자재를 넣어가지고 다니시는 아버님의 큰 차 짐칸에 싣고는 시외할머니가 계시는 청상 시골집으로 가셨다. 
청상 할머니는 아궁이에 걸린 큰 가마솥에 펄펄 뛰는 잉어를 넣고 할머니가 기르시던 토종닭 한마리도 같이 넣어서 오래오래 푹 고으셨다. 손부에게 먹일 잉어 한마리를 다 고는 동안 할머니가 마신 매캐한 연기는 얼마나 많았을까.  
그렇게 고은 잉어를 시아버님이 다시 집으로 받아오시고, 어머니는 비닐팩에 봉지봉지 담아서 얼려두셨다가 아이스박스에 담아 내게 택배로 보내주셨다. 
  
이것이 상주 경천대 아래 푸른 낙동강에 살던 잉어 한마리가 서울 우리집 식탁 위까지 오게된 사연이다.  











+ 4대강 사업으로 죽어가는 강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진집 <사진, 강을 기억하다>(아카이브 발행, 2011년) 에서 '낙동강 상주보' 건설 현장을 찾아보았다. 사진작가 김흥구씨의 작품으로 2010년 7월 19일에 촬영했다고 써있었다.



나는 천천히, 한 달남짓한 기간에 걸쳐 양이 꽤 많던 잉어고은 물을 감사히 잘 먹었다.
따뜻하고 진한 그 국물을 훌훌 마시며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애교도 없고 살갑지도 못한 며느리, 아직은 낯설고 서먹한 마음의 거리를 다 좁히지 못한 못난 며느리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시고 싶어하시는 시어른들.. 어려운 형편과 고단한 생활속에서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더없이 극진한 그 분들을 생각했다. 
평화에게 그리고 평화를 키우고 있는 내 몸안에 그 분들의 따뜻한 기운이 오롯이 남아있어서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날들동안 그 분들을 더 사랑하고, 더 아껴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평화에게 낙동강 푸른물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마지막 잉어의 평화롭고 강인한 생명력이 전해지기를 빌었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던 저녁강의 은빛 물결, 하얀 백사장에 남아있는 따뜻한 한낮의 온기, 깊고 푸른 강물의 차고 시원한 기운.. 경천대 잉어가 보고 느꼈던 아름다운 강의 기억이 어린 생명, 너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비록 그 잉어의 마지막은 참으로 무섭고 슬픈 것이었지만.. 인간인 우리가 저지르는 이 안타까운 살육의 책임은 또 우리가 고스란히 져야할 것이므로.. 
잉어의 아픔도 너와 나에게 올올이 전해져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그 아픔을 갚는 심정과 실천을 늘 생각하고 행할 수 있기를!












지난주 목요일에는 외할아버지의 제사가 있어 외할머니와 우리 시어머니께서 서울에 올라오셨다.
외할아버지 제사는 잠실에 있는 외삼촌댁에서 지낸다. 나와 연수도 어른들을 뵈러 잠실로 건너갔다.
제사 음식 장만을 거의 끝내놓고, 아직 해가 남아있는 늦은 오후에 식구들이 모두 석촌호수로 벚꽃구경을 나갔다.  
진한 연분홍 잠바를 입으신 분이 청상 외할머니시다.
내게는 시댁에서 제일 큰 어른이신데, 예전에도 몇번 블로그에 쓴 것처럼 나는 사실 이 분이 시댁 어른들중에 제일로 좋다.
왠지 뵐때마다 제일로 마음이 푸근하고 애틋하다. (청상, 생일, 봄냉이)
전화드리면 "응~, 손부라?"하고 물어주시는 그 음성이 좋고, 내가 이 분께 첫 손부라는 것이 괜히 뿌듯할 정도다.











연수는 증조할머니가 낯설어서 그런지, 저와 잘 놀아주지 못해서 그런지.. 증조할머니께 살갑게 굴지 않는다.
어린 것이 철없이 구는 것을 두고 야단치기는 그렇지만, 손부와 증손주에게까지 늘 따뜻하게 마음써주시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가 괜시리 부끄럽고 죄송해진다. 야단을 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니 어서 철이 들어서 증조할머니 고마운 것을 알게됐으면 좋겠다.  












할머니 품에 안긴 연수.
아직 환갑이 안되신 우리 시어머님은 씩씩하고 젊으시다. 그래도 워낙 고생스런 일을 많이 하셔서 몸 구석구석 안아프신데가 없는데 아직은 생활비도 본인의 노동으로 버셔야한다.
그래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죄송하고 안타까운데 그런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나는 괜찮다. 아직 젊어 일할 수있으니 얼마나 좋으니. 돈벌어 나 쓰고싶은데 쓸수있는게 너무 고맙고 좋다. 아무 걱정마라' 하신다. 그러나 그 돈의 많은 부분이 수입이 불규칙한 아버님을 대신해 두 분의 기본적인 생활비를 충당하고, 어머니의 여러가지 아픈 곳을 치료하는데만도 빠듯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도 가끔 만나는 자식과 손주들에게 맛있는 것, 옷 한가지 더 사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이런 분을 마음으로라도 더 아껴드리지 못하는 내 작은 그릇이 안타까워지곤 한다.  
 












연수는 신이 났다.
몸이 무거운 엄마는 맨 뒤에서 청상할머니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따라가고, 연수는 씩씩한 이모할머니와 달리기 경주를 한다. 
벚꽃 아래로 뛰어가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엄마의 마음도 꽃빛처럼 환해지는 것 같았다.  













석촌호수를 반쯤 돌고나서 내내 잘 뛰던 연수가 힘들다고 주저앉았던 모양이다.
"주스 먹고 싶어~~'하는 연수에게 외숙모할머니가 천원짜리 한장을 주시며 얼른 저기 매점까지 가서 사먹자 하셨던 모양이다. 주스 사먹으라는 말에 기뻐진 연수가 돈을 흔들며 엄마에게 뛰어온다. ^^












열망하던 쥬스병을 손에 꼭 쥔 연수와 할머니.
저리 세워놓고 보니 또 훌쩍 큰  것 같네..^^














빌딩숲에 둘러싸인 도시의 호수 위로 석양이 비친다.
몸은 비록 이 도시의 갇힌 물을 보고 있어도
내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연의 강물, 흐르는 강물, 본래 생긴 모습 그대로 부드럽게 굽이치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이, 그 노래가 들렸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런 강물을 알고 그리워하는 아이로 자라게 될까.
4대강이 저렇게 죽어가는 시대에, 그마저도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지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고 도시 한복판에서 깜깜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되어갈까.
낙동강에서 진행되는 4대강사업 현장의 사진을 찍은 김흥구 작가는 저 책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은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것의 가치를 깨닫고 후회할 뿐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이제 사진첩으로만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게 될까.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데리고 강으로 가야겠다..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라도 보태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1. 3. 29. 15:38



3월 29일은 특별한 날이다.
90년대 후반, 연세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거나 학생회.동아리 활동을 하며 20대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1996년 3월 29일. 종로 거리에서 '등록금인상 반대, 교육재정 확보'를 외치며 시위중이던 청년 한명이 경찰의 진압에 쫓기다 목숨을 잃었다.
연세대 법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스물한살 노수석 군이었다.

나는 그 뉴스를 고3교실에 틀어져있던 TV에서 보았다. 워낙 먼 현실이라 깊이 생각할 여력은 없었지만 짧은 순간에도 앳된 청년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내가 이 교정에 처음 들어섰던 봄에 그의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2월, 연수를 데리고 오랫만에 다시 백양로를 걸어보았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시절의 짝꿍 친구와 학교에서 보자고 약속하고 나선 길이었다.

쌀쌀했지만 백양로에는 벌써 봄이 시작된 것 같았다.
마침 신입생들이 오리엔테이션을 떠나는 날이라 백양로에는 푸른 깃발을 앞세우고 무리지어 길을 내려가는 학생들의 행렬도 있었다.
14년이다. 벌써.. 새내기라는 풋풋하다못해 이제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워지는 저 고운 이름을 내가 지녀보았던 때로부터 벌써 14년이 지났다. 

오늘 노수석 열사의 15주기 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아침에 문자로 들었을 때,
그 문자 안에 '아버님'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있는 바람에 나는 한달도 더 전에 다녀왔던 학교나들이 사진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아버님 어머님이었던 그 분들 얼굴이 떠올랐다.
해마다 봄에 우리와 중앙도서관앞 민주광장에서, 한열동산에 마련한 노수석열사 추모공간에서, 법대 강당에서 만나셨던 분.
그리고 광주 망월동에서 버스 한대를 겨우 채워 내려간 우리를 버스 두대쯤 되는 인원이 먹어도 남을만큼의 밥과 국과 떡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
해마다 줄어가는 인원이 죄송해 고개 못들던 우리에게 괜찮다고, 이렇게 기억하고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한명씩 손잡아주시고, 등 두드려주시던 분들. 
부모님이 장만해주신 음식들을 전세버스에 싣고 학교에 돌아오면 학교안에서 살던 수배자들이 며칠동안 먹는 든든한 양식이 되었었다.     



















9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은 참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87년 6월항쟁으로 대표되는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시대가 지나가고,
동구의 몰락이라는 이념적 충격속에 소비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가 서서히 의식 전반을 지배해가던 90년대 초반. 그래도 그때까지는 대학은 적어도 다른 생각과 대안적 가치들이 존중받던, 어찌보면 대학 울타리안은 무한생존경쟁의 살벌한 전장에서 살짝 보호받고 있던 시절도 지나
IMF와 함께 시작된 90년대 후반의 대학은 더이상 한 시절, 술이든 운동이든 연애든 어떤 것에 젊음을 던졌어도 졸업할때쯤에는 걱정없이 취직자리를 찾아들어갈 수있는 성역일 수 없었다.    

그 9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 조직들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됐고 학생회장이 된 친구들은 수배자가 되어서 4년, 5년씩 대학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정보과형사들이 운동권 학생들의 뒤를 미행하고, 어머니들은 학교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셨다. 때로는 그 어머님들이 투사가 되어 오래오래 집회와 농성을 하시기도 했다. 
80년대 운동을 다룬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이나 1980년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나 봄직한 이야기들이 내 20대 초중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80년대가 아니라 90년대 후반, 새천년이라는 2000년대 초반에 벌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참 낯설고도 살벌한 시대의 희극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문과대로 올라가는 이 길에는 '골고다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왼편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적혀있는 '동주시비'가 있다.
늦잠 많은 대학신입생은 아침9시에 시작하는 교양수업 출석체크에 늦지 않기위해 늘 뛰어야했다.
8시 50분쯤 신촌 전철역에서 시작된 달리기는 정문, 백양로, 본관앞 삼거리를 지나 이 골고다언덕에서 정점을 맞는다.
여기서 포기하면 오늘도 지각이나 결강이고, 이 고난을 견디고 올라가 인문관 강의실에 앉으면 다행히 학기말에 D는 맞을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정문부터 걸어올라온 연수의 씩씩한 걸음도 여기서 고비를 맞았다.
운동화에 들어간 돌멩이를 터는 것으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올라간다. 아직 바보계단도 남았다. 그리 올라가는 모든 사람의 보폭을 어정쩡하게 만드는 낮고 넓은 계단.























가만히 쳐다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참 사연도 많은 문독앞 복도.
 
저 벽에 담쟁이가 저렇게 무성했었나?
친구에게 물으니 예전에는 저정도는 아니었단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만 나이든게 아니고 담쟁이도 그 시간을 함께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갓난쟁이 키우는 후배가 아기를 안고 달려왔다.
단대 커플이었다 결혼한 둘이 중 남편은 문헌정보학과를 나와 지금은 학교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다. 그도 내 친구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전화를 했더니 얼른 나와 우리들에게 밥을 사주고, 새로 만들어진 도서관 건물도 구경시켜주었다.
그리고는 제 아내와 아기도 불러낸 것이다.























강의실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았던 과방.
노수석.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지금도 걸려있었다. 까마득히 어린 것만 같은 09학번, 10학번 후배들 지금 이 방의 주인인 낯모르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경찰의 과잉진압 과정에서 숨진 노수석 열사는 2006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뒤늦게라도 국가권력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보상에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고통, 나는 차마 다 짐작도 할 수 없는 그 아린 상처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엄마가 늘상 붙어살다시피 했던 과방 소파에 연수가 벌러덩 드러눕는 것을 보고 우리는 웃었다.
"옛날에 너희 엄마가 그 소파에 앉아서 수업도 참 많이 빼먹었지..." 
그랬지... 내가 대학시절중에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좋은 선생님들의 수업을 더 열심히 안 들은 것이다.   
소파에 앉아 기타를 배우고 짜장면을 시켜먹고 민중가요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부르다 밤이 되면 
이 소파가 이대로 하늘을 슝 날아서 나를 언니오빠와 함께 자취하던 반포집까지 좀 데려다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이 아득했다.  












원숭이 동산앞에서 친구와 사진을 찍었다.
이 날. 7, 8년만에 함께 한 학교나들이 뒤로 친구는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우리가 농활을 다녔던 경북 상주의 농촌마을로 아예 살림집을 옮긴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다 건강이 많이 안좋아진 친구는 잠시 쉴 곳이 필요했다.

우리와 함께 백양로에서 웃고 울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노동운동을 하기위해 노동자가 된 선배들과 친구들. 농민이 되어 농사를 짓고있는 사람들..
더러는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기도 하고, 통일운동이나 장애인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땀흘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어서 늘 고마운 생협에서 일하는 후배들도 있고, 진보정당에서 일하는 이도 있다.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공부를 계속 하면서 꿈을 향해 힘든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친구들도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가정을 꾸리고 코흘리개 아이들의 엄마아빠가 되었다.
바쁜 직장일에 쫓기고 어린 아이의 뒤치닥거리 하느라 참 정신없이 사는 와중에서도 아마 오늘 하루는 잠시 멍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은 그들 모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백양로에 한번씩은 다녀왔을 것이다.











학교 다닐때, 나는 백양로를 아무 일없이 천천히 한번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일정에 쫓겨 늘 종종걸음치며 오르내렸던 백양로를 아무 약속도 없이, 바쁜 일도 없이 천천히 걸어가보는 것. 
백양로 양쪽으로 오고가는 학생들과 삼삼오오 무리지어 앉아 웃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하릴없이 걸어보는 것.
서른넷, 이번에도 어린 연수가 찻길로 뛰어나갈까 마음졸이느라 꿈꿔왔던 걸음은 걷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내가 아주 나이가 많아지면 그런 날이 올까..
그때는 천천히 한열동산 벤취에 오래 앉아 보리라. 벚꽃이 날리는 청송대 길까지도 천천히 걸어보리라.
눈물이 난다면, 아마도 서글프거나 무엇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백양로에서 보냈던 내 이십대의 꿈결같은 날들이 애틋해서, 우리가 함께 꾸었던 그 꿈들이 아름다워서일 것이다.    


다시 아버님 어머님 생각을 한다.
그 분들이 내게 보여주셨던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오늘 저녁, 가서 뵙지는 못해도 멀리서 감사하다고, 건강하시라고... 마음으로 인사드린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0. 11. 30. 23:47











내가 사는 연신내에도 엊그제 첫눈이 펑펑 내렸다.
한밤중에 온 가족이 현관 밖으로 몰려나가 첫눈을 맞고 사진을 찍으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는데 아쉽게도 그 사진이 지금 컴퓨터에서 읽히지 않네..
첫눈을 기점으로 이제는 겨울이 시작됐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내게 있는 사진들은 가을 사진들뿐이다.
내 블로그는 조금 더 가을에 머물러 있어야할까보다.

가을을 마무리할 즈음의 일상은 단조롭고 평온했다.
그런데 글 쓸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이제 4개월에 접어든 배속의 평화는 그럭저럭 힘든 초기를 잘 견딘 모양이다.
나도 이전처럼 심하게 기운이 없거나 속이 많이 불편하지는 않다. 잘 움직일 수 있고 기분도 좋은데 여전히 낮에는 낮잠자기 바쁘고 밤에는 정신없이 쓰러져 연수보다 먼저 잠들기 일수였다.   

하루종일 제가 만든 상상의 동물들과, 상상의 상황들을 가지고 쫑알쫑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30개월 연수는 잘 웃고 잘 놀고 행복한 것 같다.
엄마가 그만 놀고 자자고 할때와 이 닦자고 할 때가 이 녀석이 하루중 제일로 괴로운 순간이다.
일찍 자고싶어하는 엄마 대신 야행성이고 유쾌한 아빠가 밤늦게 퇴근해 등장할 때가 이 녀석에게 제일로 극적인 순간인데 
그런 날은 아빠옆에 찰싹 달라붙어 제가 좋아하는 온갖 놀이들을 한번씩 더 하며 밤늦게까지 논 뒤에 다음날 하루종일 비몽사몽 기운없이 지내곤 했다.
   
그 사이 세상에는 참 큰일들이 많아서
연일 신문에는 폭격으로 불에 타는 집들과 전차들, 항공모함과 비행기들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TV를 보지 않는 우리집에서는 신문이 세상에서 제일 자극적인 매체인데
그 신문의 1면에 매일같이 타오르는 불길은 어린 연수에게 굉장히 놀랍고 궁금한 일인듯 했다.

"엄마, 왜 불이 났지?"
"음.... 폭탄이 떨어졌데.. 그래서 집이 부서지고 불탔데."
"왜 폭탄이 떨어졌지요?"
"그게... 우리 나라는 원래 하나였는데 강제로 둘로 나눠졌거든. 그래서 지금 사이가 좋지않아.. 그래서 가끔 싸울 때가 있어..."

여기까지 듣고 연수는 제 방에 가서 장난감 소방차를 가지고 왔다.
"연수가 불을 꺼줄께!"
"그래.. 얼른 불을 꺼야겠지.. 사람들이 사는 집인데.. 불이 났으니 큰 일이지."

그러자 연수는 또 방으로 뛰어가서 모래놀이 양동이와 삽을 가지고 왔다.
"연수가 새 집을 지어줄께! 이 집은 불에 타지 않는 집이야."
" (^^;;) 그래, 그런 집이 있으면 참 좋을꺼야."

이런 대화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연수는 매일같이 어딘가 불타는 곳의 사진을 보고, 불을 끄고,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나도 아이를 보며 불에 타지 않는 튼튼한 집에 대해 생각했다.
폭격이 있었던 날 저녁, 연수와 함께 외출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라디오에서 들었던 어느 정치학교수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도 생각했다. 

한 판 붙자는 듯이, 너 죽고 나 죽자는 듯이(아니, 실은 자신은 안 죽을 방법을 마련해둔것처럼 막무가내로 말하고 있었다) 
본때를 보여줘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학교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세 살배기 어린 아기와 배속의 3개월된 아이를 데리고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무책임하게 쏟아져나오는 라디오 목소리를 향해서라도 '다 죽자는 거냐'고 거칠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택시에서 내려서는데 날은 너무 추웠다. 

그 날 이후 나는 감기에 걸려 한 이틀 고생했고, 연수는 다행히 씩씩했다. 
내 아이들은 엄마보다 훨씬 더 야물고 단단하기를, 그래서 이 위험천만한 세상도 잘 헤쳐나가 주기를 빌었다. 
 
연수가 며칠동안 신문 사진을 보며 '불탄 집'과 '검은 연기'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을 보고 새삼 유년 시절의 체험이 갖는 강렬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50년 한국전쟁을 체험한 세대들, 직접 체험하지 않았더라도 그 폐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년시절에 맞닦드렸던 공포와 황폐함과 긴장감의 강도는 얼마나 강했을까. 그들의 삶에 얼마나 깊은 그늘을 드리웠을까. 
늘상 기억하며 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오래된 상처자리가 뜨끔하듯이 쿡하고 쑤셔오는 때가 수시로 있었겠지.

1945년생 해방둥이인 우리 아빠는 다섯, 여섯살의 어린 날들을 기나긴 피난행렬 속에서 보냈다.
엄마 등에 업혀 같이 떠났던 갓난쟁이 동생을 길위에서 병으로 잃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혼자만 엄마 손을 잡고 돌아왔다.  
아빠는 이번 사건을 보며 그 때의 공포를 다시 떠올리셨을까.
무섭다. 어린 소년에게 각인되었을 그 깊은 공포가 새삼 안타깝고 무서웠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되어보니 세상의 아이들이, 그 어머니들이 받는 상처와 고통이 비로소 무섭게 다가왔다.    

그런 날들을 보내던 어느날 밤에 연수가 잠들고 나자
나는 잠깐 틈을 내어 연수가 태어난 후에 늘 해야지 하면서 미뤄두었던 두가지 일을 했다. 
아름다운 재단과 평화박물관에 후원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인권에 대해서도 감수성이 필요하듯이, 평화에 대해서도 감수성이 필요한 것 같다. 
오랫동안 인권이나 평화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다보면 그게 어떤 건지, 얼마나 필요한지, 어째서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게 되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살아보고, 키워주고, 느껴봐야 '아 참 좋은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 공기같이 꼭 있어야하는 거구나... 싶어질 것 같다. 
엄마인 나도 아직은 그런 세상에서 별로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인권이 존중되어서 그런 가치들을 공기처럼 물처럼 숨쉬고 마시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런 가치들이 더 커지고 퍼져서 세상이 훈훈해지면 그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저희들이 체험한 소중한 세상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평화박물관은 어린이도서관들과 함께 평화책 전시회를 하고, 평화놀이터도 하고 위안부할머니와 같은 전쟁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아름다운 재단에서는 여러가지 기부와 나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중 '이른둥이'(미숙아)들의 성장과 치료를 위한 후원프로그램인 '다솜이 작은숨결살리기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연수를 낳은 후로 늘 하고싶던 일이었는데 이렇게나 오래 까먹고 미루던 일을 이제사 한다. '같이 살자'는 마음이 절박해진 덕분이 아닐까.

딸랑 1만원씩, 한달에 2만원 더 후원하게 된걸 가지고 무슨 큰 일이라도 한듯이 어깨 힘주려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래도 늘 적자인 살림통장을 보며 '뭐가 문제지...' 고민하는 아줌마로서 2만원은 큰 맘먹은 것이긴 하다. ^^;;)  
집에서 어린 아이를 키우며 지내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기도 하고, 혹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이웃들이 계시다면 함께 하자고 얘기하고 싶어 적어보았다.

연수에게, 평화에게 언젠가는 그 아이들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 후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해주는 날이 오겠지...
위험한 가을의 불안이 겨울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빌며 하루하루 살고 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0. 11. 15. 23:40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에는 남편의 외가가 있다.
내 시어머니의 친정이자 시아버지의 처가인 시골집에는 청상 외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다.

얼마전에 그 청상에서 택배가 왔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푸대자루에는 커다란 배추와 작은 무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올해는 배추.무가 하도 비싸다카이 내가 쪼메 부쳐봤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든한살 외할머님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청상 배추와 무로 끓이는 배추국과 무국은 요즘 연수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국에 말아주면 밥 한그릇 뚝딱이다.

산꼭대기 마을 청상의 이슬과 바람과 햇빛과
여든 한살 외증조할머니의 검버섯핀 손길과 마른 가슴팍으로 흘렀을 땀이 키운 배추와 무를 먹으며
내 몸속에도 그것들이 연하게 풀어진 된장국물과 함께 스며드는 기분이다. 

내일은 청상에서 사과가 온다고 한다.
어제 시아버님과 통화를 하다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다시 외갓집 앞 들판과 산허리와 개울가 대숲같은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추석에 청상에서 찍어온 몇 장의 사진 생각도 났다.
언제고 꺼내봐야지했던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청상은 아빠의 외가이니 연수에게는 진외가다.
진외가집 옆집에는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사는데 그 아이 엄마는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이주여성이다.
더 어릴때는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던 아이들이 올 추석에는 같이 어울려 뛰어다니며 잘 놀았다.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됐을 즈음에는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르는 이 이주여성의 아이들 중에서 이 세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작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이 아이들이 자연이 주는 천연의 감동을 제일 가까이 느끼고 받아들이며 자라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얼마전 미탄님의 블로그에서 보니 소설가 김영하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은 이 아이들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를 가장 날카롭게 직시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여러 요인들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아이들 중에 훌륭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청상 외가에는 아궁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아랫방 구들장에 불을 때는 용도고, 하나는 부엌옆 가마솥을 끓이는 용도다.
가마솥에서 나오는 음식은 하나같이 따라가기 어려운 깊은 맛이 나고, 아랫방 아궁이에서 구워먹는 고구마 맛도 죽여준다. 

눈이 오는 겨울밤에 청상 외가 구들장에 앉아 군고구마를 까먹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내 삶에 있을까.
외풍은 세고, 아궁이의 불이 바로 올라오는 아랫목은 너무 뜨거워 궁둥이를 데지 않을까 걱정해야하는 그 시골집에서
하루밤 느긋하게 자고오는 날이 있을까.
갓난이 조무래기들이 좀 더 크면?
어린 아기들이 달린 젊은 손주들은 명절에도 늘 따순 물 나오고 외풍없는 상주시내 우리 시댁 아파트로 돌아와 자곤 했다. 
명절에 모여 자는 어른만 해도 작은 시골집 방은 늘 복작복작하므로 젖먹이 딸린 사람들은 시내에 나와 자는게 서로서로 편한 일이긴 하다. 
그러니 이 시골집에서 호젓하게 하루밤 자고 싶다면 명절 아닌 어느 한적한 때에 청상에 가야하리. 
그 때는 내 손으로 외할머니께 따순 밥 한끼 대접해야할텐데, 아직도 철없는 손부는 할 줄 아는 것도 변변히 없으니 참 큰일이다.











추석 명절에 대처에서 청상으로 모여든 자손들은 연휴 내내 일에 바빴다.
할머니 혼자 짓는 농사일에도 모처럼 큰 자리를 좀 내놓아야 하고, 오래된 시골집은 겨울을 앞두고 손볼 데가 한두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문풍지를 바르는 아랫방의 문짝 네 개를 떼서 깨끗이 씻고, 새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 하얀 플랑천(내가 대학다닐때 딱 그용도로 쓰던 천인데, 원래 이 천 이름이 뭔지를 모르겠다ㅠㅠ)을 덧발라 햇볕에 쨍쨍하게 말리고 다시 문을 다는 일도 큰 일 중 하나였다. 
문틀에 밀가루풀을 바르고 청상 할머니가 잘라주는 한지와 천을 받아 붙이는 나를 연수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내심 이 일을 할 수 있어 나는 기뻤다. 
추석 명절에 설겆이와 전부치는 일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또다른 일이 있는 것이 고맙고 반가웠다.
더구나 이런 일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이다. 
 











새 문짝을 달아놓고 자손들은 모두 다시 도시로, 제 삶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겨울이 다 된 이 즈음에 할머니는 춥지 않으실까.
새 문짝은 산골짜기의 외풍을 어느만큼 막아주고 있을까.
할머니가 밀고 다니시는 낡디 낡은 유모차는 계속 잘 굴러갈까. 길이 얼면 미끄러울텐데..














얼마후면 이 마당에 다시 할머니의 세 딸들이 모여 김장을 할 것이다. 
제일 가까이, 상주 시내에 사는 큰딸인 우리 시어머니와 서울의 둘째 이모, 구미의 셋째 이모가 모여서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와 무를 솜씨좋게 양념에 비벼가며, 가마솥에서는 펄펄 끓는 물에 시래기를 삶고 따로 만든 국양념에 버무려서 즉석요리할 수 있는 국거리로 만들어내실 것이다. 
딸의 딸들과 며느리들에게까지 김장과 그 시래기국 건데기가 도착할 즈음이면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먹을것을 퍼주느라 수고롭고 고단했던 청상의 한 해도 서서히 마무리되어 갈 것이다.

작년에는 젓먹이를 달고 있다는 이유로 바람찬 청상집 마당에 아예 얼씬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나는
올해는 둘째를 품고 있는 까닭에 아마도 또 추운 날의 김장 전투에서 제외될 것이다.
김장같은 큰 일을 생각하면 겁부터 나는 아직도 철없는 초보주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일년내내 든든하게 대놓고 먹는 제일 큰 반찬을 그저 고스란히 앉아서 받아먹는 마음은 죄송하기도 하다.
곧 내 손으로 김장을 하는 날이 오겠지... 과연 올까? 아마도 어떻게 엄두를 내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막막하기만 하다.

끝도 없이, 식구들 입에 들어갈 그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데 한 생을 보낸 어머니들과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면 참 먹먹하기만 하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0. 9. 25. 17:41



종종 들려서 많이 배우고있는 블로그에서 반가운 소식을 보았어요. 
예전에, 연수가 아주 어리던 시절에요,
하루종일 아는 이웃 한명없는 아파트 안에서 아빠가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는 말나눌 사람도 없이 
연수랑 저랑 둘이서만 온종이 마주보고 있던 시절에
사람이 그립고, 아이를 데리고 편안하게 마실갈 이웃이 그리워서
'아.. 이런 곳이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던 게 있거든요.
그래서 포스팅도 했어요.(http://sadeak.tistory.com/entry/육아사랑방-만들면-어떨까요) <--연수의 5개월때 모습을 보니 ㅎㅎ 제가 봐도 넘 신기해요.

그런데 그게 정말 만들어졌더라구요?! ^^;
저만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구나.. 하고 기쁘기도하고
그 시절의 저처럼 힘든 엄마아빠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마음 짠하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시범적인 수준이라 시행하는 곳도 많지 않고(서울은 관악구 한곳인 것 같기도하고, 센터 홈페이지에 가보니 성동구도 시작한것 같긴했어요.) 
어떻게 진행될지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힘을 주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육아의 힘든 고비들은 더 수월하게 넘고, 육아의 행복은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됐으면..! ^^

전에 <3살까지는 엄마가 키워라>라는 책에서 외국에서도 이 비슷한 프로그램이 일찍부터 도입돼있다는 글을 본적 있는데,
더 가까이, 더 많이, 더 편안하고 즐거운 나눔터들이 우리 곁에도 많이 생겨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해요. 
(동사무소마다 한곳씩 있으면 딱 좋겠는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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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이의 마음을 여는 행복한 자녀대화법 | 소리없이
원문 http://faithluci.blog.me/10093221729
'공동육아나눔터'로 육아고민 해결한다
첨부파일:RPR20100830005700353_01.jpg


아이에겐 친구를 부모에겐 양육 노하우를

여성가족부는 지역사회 안에서 주민들간의 네트워크 강화를 통해 육아고민을 해결하고자 전국 5개 지역의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공동육아나눔터' 시범사업을 실시한다.

초보엄마가 아니더라도 아이와 하루종일 지내다보면 무얼해줘야 할지 막막하고, 자신의 교육방식이 맞는 건지 걱정되기도 한다.

아이를 기르는 일정기간동안 '나'란 존재는 간 곳 없고 아이만을 위해 내가 있는 듯한 생각에 빠지고 아이를 혼자 온전히 맡아 기른다는 데 대한 부담감 때문에 과도한 양육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빠가 양육의 책임을 맡은 경우 양육과 관련해 가까이에서 도움이나 조언을 받을 곳도 잘 몰라 더욱 어려움을 느낀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이들에게도 양보, 나눔, 배려 등이 배움은 중요하다.

따라서 집 근처에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안전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기쁜 일이다.

공동육아나눔터는 자녀돌봄 및 아동양육에 대한 서로의 경험과 정보를 함께 나누는 품앗이 형태로 운영되며 서로의 양육 노하우를 공유함은 물론 아동일시돌봄 서비스와 다양한 부모-자녀 참여 프로그램운영, 장난감 대여 및 도서관 운영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핵가족화 및 여성의 취업증가로 약해진 가족 내 돌봄의 기능 보완과 더불어 최근 늘어나고 있는 아동대상 성범죄 등의 사회적 문제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자녀를 부모가 직접 돌보고 교육함으로써 사교육비 절감과 부모-자녀간의 상호 신뢰관계를 증진시켜 건강한 부모-자녀관계를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다.

중앙건강가정지원센터 고선주 센터장은 "이웃들과 같은 관심과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은 가족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다. 공동육아나눔터의 확대로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형성은 물론, 지역사회가 양육을 함께 책임지는 문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하였다.

좀 더 질높고 즐겁게 양육을 할 수는 없을지 고민된다면 아이와 손을 잡고 공동육아나눔터를 방문해 보자.

공동육아나눔터는 취학전 아동과 부모가 참여할 수 있고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센터 사정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건강가정지원센터 홈페이지(www.familynet.or.kr) 또는 아래 전화를 이용할 수 있다.

<건강가정지원센터 공동육아나눔터 운영 센터>

서울특별시 관악구건강가정지원센터 02-883-9390
경기도 고양시건강가정지원센터 031-969-4041
충청남도 천안시건강가정지원센터 070-7733-8300
울산광역시 건강가정지원센터 052-274-3136
부산광역시 건강가정지원센터 051-330-3472

* 센터별 2∼5개의 공동육아나눔터 운영
(끝)

출처 : 중앙건강가정지원센터

본 콘텐츠는 해당기관의 보도자료임을 밝혀드립니다.
[2010-08-30 10:3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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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10. 8. 16. 23:55



신도림에 있는 오빠네에 가기위해 집을 나섰다.
제법 먼 길인데 어떻게 갈까.. 고민하다가 지하철을 타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게 쉽지 않지만 넓은 서울땅 안에서 택시만 타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어깨띠로 안고다닐 수 있던 갓난아기 시절에는 오히려 내 걸음이 자유로우므로 대중교통 이용이 더 쉬웠다.
그러나 아이가 크면 안고다니기가 어렵고 제 발로 걷는다해도 큰 길에서는 위험하기도 하고 멀리 못가 업어달라거나 해서 먼거리를 갈때는 유모차를 이용하는게 훨씬 좋다. 
그런데 유모차로는 버스를 타기는 정말 어렵고, 몇대없는 저상버스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타고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중 지하철이 장애인.노약자용 엘리베이터만 있으면 큰 어려움없이 다닐 수 있어 제일 요긴하다.
특히 어린 아기들은 대중교통을 타면 그 일정한 흔들림 때문인지 참 신기하게도 아주 쉽게 잠에 빠져드는데 그럴때 유모차가 없으면 참 힘들다.

오빠집에 가려면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6호선을 타고가다가 합정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신도림역에서 내리면 된다.
그동안은 집가까운 3호선들에서만 잠깐씩 유모차를 밀고 다녀봤었는데 환승까지 하면서 이렇게 멀리 가보는 것은 처음이다.
살짝 긴장이 되었다.








연수는 집을 출발하자마자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다.
낮잠을 안자고 계속 놀았던터라 고단했겠지.. 연수가 잠들어있으면 오히려 조용히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으니 나도 더 좋다.
마침 집에 놀러왔던 친구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연신내역에 도착했는데...
이럴수가. 역 밖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수리중이다...! 헉!!
다행히 친구가 옆에 있어 둘이 유모차를 함께 들고 긴 계단을 겨우 내려갔다.
친구가 없었다면 차마 그 길고 혼잡한 연신내역 계단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무거운 유모차를 함께 들고 내려갈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역 안에서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다행히 운행중이었다.

유모차를 밀고 지하철에 탈때는 뉴스에서 봤던 무서운 장면들- 지하철 문에 유모차가 낀다는가 하는-이 생각나 바짝 긴장하고 탄다.
지하철 안은 시원하고 낮시간이라 승객이 많지 않아서 편하게 앉아서 잘 갔다. 

드디어 2호선으로 갈아타는 합정역에 도착.
6호선 승강장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가니 앞에 작은 안내문이 붙어있다.
"교통약자를 위한 환승방법 안내" 제목을 읽으며 안심이 되었다. 막연히 어떻게든 갈 수 있겠지.. 했지만 막상 내리니 좀 막막했던 것이다. 어.. 그런데 약간 복잡하다.
일단 한층 올라가서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타고.. 2호선 개찰구를 지나 다시 2호선 엘리베이터를 탄다...
어떻게 하는건지 머리속에 빨리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채로 일단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건너편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는데 글쎄.. 그 다음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그만 잊어버렸다.
아기 엄마가 된후 건망증이 극심해진 탓도 있고, 지하철 안내문이 말하는 바가 얼른 이해가 안된 탓도 있다.

지하4층 승강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본 그 '교통약자를 위한 환승방법' 안내문이 지하3층에도 또 붙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엘리베이터 안에라도.
나뿐만 아니라 나이많은 어르신들도, 장애인들도 여러번 읽으며 잘 찾아갈 수 있게.

일단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내 뒤를 따라 나이 지긋한 어머니와 젊은 딸이 탔다.
딸은 앞을 못보는 장애인이었고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고 함께 길을 찾아가고 계셨다.
나에게 이리로 가면 '홍대'에 갈수 있냐고 물으셨다.
"글쎄요.. 저도 길을 찾고 있어서요.. 일단 같이 가보셔요." 어정쩡하게 대답한 후 함께 내렸는데 역시나 이곳은 그저 6호선 플랫폼일 뿐이다.
다행히도 플랫폼 엘리베이터 앞에는 다시 안내문이 있다. 
지하2층으로 올라가서 아예 개찰구를 통과해(카드를 찍지는 않고) 2호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한다. 
그래.. 아까 내려오는게 아니라 올라가야했구나.

그런데 함께 내린 모녀분들은 6호선 플랫폼에서 그냥 열차를 타려고 하셨다.
이곳은 6호선이라 하니 '마포에 가면 된다'고 하셔서 나는 마포역으로 가려하시는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엘리베이터에 타고난뒤 얼마 안있어 이 분들도 엘리베이터에 타셨다. 
"홍대에 가려면 여기말고 2호선에서 갈아타야한다네요.."
어머니가 또 다른 분께 들었는지 좀 난감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네.. 저랑 같이 가셔요. 위로 올라가서 2호선 엘리베이터 타고 홍대가는 방향으로 내려가셔요."
여전히 나도 아리송했지만 어쨌든 이 분들과 나는 같은 길을 찾아가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와 함께 타셨던 또 다른 아주머니께서 한층 올라가 지하3층 문이 열리자 "2호선 갈아탄다고요? 그럼 여기서 내려야해요"하고 얘기하며 얼른 내리라고 우리를 재촉했다.   
나는 "지하2층으로 가야 한다는데요"하고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단호했다. 
"2호선은 여기서 갈아타는 거예요!" 
결국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모녀는 내렸고 나는 남았다. 나는 앞서 분명히 '지하2층'이라고 읽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지하2층은 아예 밖으로 나가는건데.. 거기선 2호선 못 갈아타요"라고 거듭 얘기했다.
아마 다시 2호선 개찰구를 통과해야하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듯 한데 그건 안내문에도 써있던 내용이다.

지하2층에서 잠시 방향을 살핀 뒤에 2호선쪽 엘리베이터를 찾아가니 그 앞에 '교통약자 환승용' 개찰구가 있다. 
카드를 찍지 않고 지나가면 '삐'하고 소리는 한번 나지만 차단봉 같은 것은 없어 그냥 통과할 수 있다. 
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여전히 헤메고 계실지도 모르는 앞 못보는 딸과 지하철 지리에 어두운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딸이 앞을 못보므로 계단을 이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우실텐데... 나와 함께 와서 저 건너편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는 것인데...
더 강하게 얘기하지 못한 나의 망설임이 죄송했고, 또 전후사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도와주려고 나섰던 아주머니도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교통약자를 위한 환승안내문이 좀 더 여러 곳에, 크게 붙어있었으면 이런 눈밝고 목소리큰 아주머니들도 좀 잘 알고 제대로 도와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2호선에 올라탔다. 전철은 곧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노라면 언제나 마음이 시원해지기도 하고 짠해지기도 한다. 내가 서울에 살고있다는걸 제일 실감하게 되는 때도 한강을 건널 때다. 넓은 강물과 먼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살이의 고달픔이 진하게 느껴진다.

신도림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서울의 모든 전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많은 교통약자들이, 훨씬 쉽게 많이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고, 새로운 기회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의 권리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아기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신도림역 플랫폼에서는 에스컬레이터에 유모차를 비스듬히 태우고 올라왔다. 
내릴때 유모차가 밀리지 않게 주의해야한다. 무섭다.
하지만 그나마 유모차는 이렇게라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있지만 휠체어는 어림없으므로 리프트(넓은 철판)에 올라타 온 역사에 울리는 '따리리 라리리 라라 따따 라라라라' 노래를 들으며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 시설은 위험하기도 위험하지만 쏟아지는 시선을 받는 것도 큰 고역이다. 장애인 이동권을 다룬 어느 단편영화의 제목이 오죽하면 '음악감상'이겠는가.
신도림역 밖으로 나올때는 잠시 기다렸다 지나가는 젊은 청년에게 부탁해서 유모차를 함께 들고 올라왔다.

엄마가 진땀을 빼며 연신내에서 신도림까지 오는 동안 연수는 세상모르고 곤히 잤다.
그래... 이런 세상의 고달픔은 차라리 네가 몰랐으면 좋겠구나..

신도림역을 빠져나오는데 내 앞으로 또다른 장애인 모녀가 지나갔다. 
역시 딸이 장애인이고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
아이가 장애가 있으면,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면 열살, 스무살, 서른살이 되어도 어머니가 그 손을 잡고 함께 가야한다..

장애인이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은 언제 올까. 
내 아이가 비장애인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있을게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아울러 모든 교통약자가 교통강자들만큼 자유롭고 쉽고 안전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정도의 세상이라도 하루 속히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빠네에 도착하자 연수는 그제야 부시시 잠에서 깨서 저보다 두 살 많은 사촌누나를 따라다니며 연방 깔깔거리고
신이 나서 지치지도 않고 저녁내내 잘 놀았다. 먼 길, 고달프게 간 보람이 있다. 
강릉에서 서울까지 모처럼 큰 출입을 하신 팔순의 우리 할머니, 그 주름진 손을 한번 더 잡아보고 그 어깨에 기대볼 수 있어서 내게도 참 귀한 나들이였다.  
그래... 힘들고 어려워도 그리운 사람들을 찾아, 아름다운 세상 구석구석을 만나러 너랑 나랑 더 씩씩하게 다녀보자.  
교통약자 세살 아기와 그 엄마.. 화이팅이다.



+ 서울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내를 찾아보니 이 사이트가 눈에 띈다.
서울지하철의 직원 한분의 개인 홈페이지 인데 장애인 편의시설과 각 환승역별로 '환승코스' 등을 일일이 표로 작성해놓으셨다.
표만 읽고 집에서 미리 숙지한다는데 매우 어려워보였는데 이 홈페이지를 소개한 장애인 여행까페에는 '너무나 도움이 되는 고마운 정보, 집을 나서기전에 잘 읽어보고 가야겠다'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그래.. 어떤 이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집에서 미리 메모를 해서 나가야하는 고마운 정보인 것이다. 나도 지금 그렇다. 다음에 어디 환승역 갈 일이 있으면 미리 확인하고 적어서 가야겠다(너무 잘 까먹으므로ㅠㅠ). 링크를 붙여놓는다.     

http://www.intersubway.com/



Posted by 연신내새댁
이웃.동네.세상2009. 7. 28. 11:24


지난 주에는 가족들과 휴가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잠시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니 반갑게 맞아주는 자연도 좋고, 모처럼 한데 모인 가족들의 얼굴도 밝았습니다.
충북 단양의 남천계곡물은 어찌나 쨍하고 차던지 햇살이 아주 뜨거운 한낮을 빼고는 오래 발을 담그고 있기가 어려웠어요.
콸콸콸 물소리가 귀속까지 시원하게 씻어주는듯 했습니다. 

똑순이와 엄마아빠가 자연과 가족의 품속에서 쉬고있던 그 때, 
미디어법은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고, 쌍용자동차 농성장에서는 노동자대회가 열렸다지요.
새댁도 움직이는 차안에서 잠깐씩 뉴스를 들었습니다.

단양은 남한강이 동그랗게 빙 돌아나가는 참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강변의 절벽들도 아름답고, 강을 따라 굽이굽이 도는 길에서 내려다본 산등성이와 건너편 마을은 '한국의 알프스'란 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싶을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산빛을 받아 청초록으로 흐르는 큰 강을 따라가며 그러나 우리는 '이 강도 4대강살리기에 들어가 파헤쳐지는건 아닐까'하는
불안한 농담을 주고받고 웃음과 한숨을 교차로 내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아름다운 것들을 그냥 즐길수도 없고, 휴식마저 사치같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똑순이는 여전히 밥을 많이 흘리기때문에 밥먹을때마다 식탁밑에 신문지를 3장씩 깔아줍니다.
어느날, 그 신문지에서 이 글을 보았습니다.
신문 펴다말고 똑순이 식탁밑에 쭈그리고 앉아 끝까지 다 읽고, 코끝이 찡해졌더랬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선언의 시대.. 오늘 신문에는 출판문화인들의 선언이 실렸더군요.
천주교 사제, 신부, 수녀님들의 '전국 시국기도회'가 열렸다는 소식도 보았고,
남편의 갈아입을 옷을 챙겨들고 서서 수갑에 채인채 끌려가는 남편에게 황망히 손을 내밀던 언론노조위원장 부인의 사진도 보았습니다. 
그 사진을 위원장의 초등학생 딸이 찍었다는 기막힌 얘기도 읽었습니다.

똑순이 식탁밑에 그 모든 기막힌 소식들을 펼쳐주며 엄마가 쉬는 한숨을 똑순이는 이해할까요.
아마도 이해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있으니까요.

이것은 사람의 말.. 이 뜨거운 시대의 문장을 언젠가는 우리 아이도 읽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여기에 옮겨적어둡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