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1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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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밤, 철분제를 먹고 한참 토하고 설사한 날이 있었다.
임산부 빈혈을 예방하기 위해 먹어야하는 철분제는
꼭 첫 날에는 복통과 구토를 일으킨다.
처음 먹을때도 그랬는데, 한 통을 다 먹고 종류를 바꿔 새 약을 먹기 시작한 첫 날도 그랬던 것이다.

밤새 끙끙거리는 내 옆에서 안절부절하다 잠이 든 신랑이
아침에 쌀죽을 끓여 주었다.
김치 한쪽에 따뜻한 쌀죽 한 숟가락씩-
꼭꼭 씹어서 먹어주니 밤새 불안과 복통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이
봄눈녹듯 스르륵 풀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문득 그 쌀죽 사진을 다시 보니
말갛고 뜨겁던 온기가 다시 느껴지는 듯 하다.

저녁먹고 앉아 펼쳐보다 울컥했던 정호승씨의 시 한편도 같이 올린다.

*


그리운 목소리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귀 대어보면
나무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Posted by 연신내새댁
신혼일기2008. 3. 13. 09:33
어제는 오랫만에 봄밤 외출을 다녀왔다.

종종 좋은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늦도록 밖에 머무는 일이 있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밤이나 새벽에 귀가하던 어떤 시절들에 비해보면
정말 가뭄에 콩나듯 밤외출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또 한가지, 요즘 밤외출에는 꼭 든든한 동행이 한 명 붙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 동행이 없으면 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고
혼자 걷다보면 쉽게 기진맥진해져서 밤외출할 엄두가 도통 안난다.
^^

어제는 오랫만에 신랑과 그의 좋은 벗들과 유명한 미술전을 보고
꽤 유명한 듯한 '마늘소스 통닭'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술전의 감상은 따로 쓰기로 하고..
어제 외출의 여독으로 아직 몸이 노곤한 오늘 아침에는 어젯밤 마주쳤던 풍경들에 대한 단상만 쓰려한다.

풍경1.
시청역 11번 출구 근처 골목의 밤풍경.
밤 11시쯤 되었는데도 거리는 술집으로 향하는 직장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11시면.. 새댁은 이제 잘 준비를 슬슬 하는 시간이고,
신랑은 언제 오나..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쳐다보는 시간이다.
아마 그들의 가족들도 그렇게 졸린 눈을 비비며 가장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종일 일거리와 사람에 치일대로 치여
일그러진 얼굴과 피곤한 어깨를 한 그들은
업무의 연장이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가벼운 한잔이든
이 봄밤, 술 한잔을 마저 마시지 않을수 없는 상황인 듯 했다.
비틀비틀.. 취한 봄밤이 우리 가장들의 고단한 어깨위에 네온사인 불빛과 함께 내려앉는 풍경.

풍경2.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버스 안에서 거리를 구경하는데
술집들말고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일련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빵집들이다.
다른 가게들은 다 셔터를 내리고 돌아갔는데 유난히 환한 빵집들의 불빛이 눈을 끌었다.
이것참.. 장발장도 아닌데, 나라도 그 빵집 앞을 그냥 지나치진 못할 것 같은 기분.
밤늦게 귀가하는 취한 아버지, 피곤한 어머니, 삼촌이모들, 아들딸들이
무거운 피로를 떨쳐내고  저 빵처럼 가벼운 희망이라도 한봉지씩 사들고
잠든 아이들과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일까.
'빵집 알바들.. 엄청 힘들겠다... 야간 수당들은 받나...? 못 받겠지..? 받아야할텐데..'
길게 늘어선 빵집 행렬을 보니 궁금한 것들도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풍경3.
다행히.. 우리 동네 학원가의 창문들은 어두웠다.
내 학창시절은 밤10시 야자를 마치면 독서실 봉고차에 몸을 싣고 독서실로 가
다시 새벽 1시, 2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봉고차에서 내려 독서실의 약간 어두운듯 환한 창문들(개인 책상에서 나오는 스탠드 불빛만 창문에 어리므로)을
올려다보던 순간의 작은 절망감.
학원들은 그래도 밤 12시까지 불이 켜져있진 않구나.. 안도스러웠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서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서울시의회에서 서울 학원들의 24시간 영업을 허용하는 조례개정안을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모양이었다.
본회의 통과도 일사천리일 것 같단다.
다음에 밤외출을 하고 돌아올때는 학원들이 많은 우리집 앞거리는
12시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게 될까..
그 시간까지도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학원 책상앞에 붙들려 앉아있는 모습을 봐야할까.
아이들은 피곤에 절어 통조림속의 참치들같이 퍽퍽해지고
어른들은 그 학원비를 벌기 위해 몸과 생의 모든 윤기들을 다 쥐어짜이게 될 것이다.
...

화려하고 밝은 도시의 밤.
그러나 잠들어야할때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삶이
그 시간에도 흔들리며 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와 지하철 안에 흘렀다.
       
오랫만의 밤외출-
몸은 노곤하였으나 공기는 사람들 입김처럼 따뜻했다.
힘든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고, 또 하루를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별 것 아닌 내 위로라도 보내고 싶은 날이다.
 
... 아무쪼록 올해의 봄밤은
사랑하는 이에게 긴 편지를 쓰거나
또 하루 늙어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주거나
새로운 세상과 꿈을 위해 불밝히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