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때 우리 부부는 세탁기를 새로 사지 않았다.
남편이 자취하면서 쓰던 세탁기가 산지 몇 년 안된 비교적 새 것이라 그냥 쓰기로 했던 것이다.
비록 20만원 조금 더 줬다는 저렴한 모델이었지만 싸면 어떤가.. 빨래만 잘 되면 되지.
당시만해도 깨끗하고 용량도 10kg로 큰 세탁기라 결혼하고 지금까지 참 잘 썼다.
식구들 옷은 기본이요, 두 아이 천기저귀며 수시로 나오는 이불빨래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면서 정말 세탁기가 우리집에서 제일로 고생했다. ^^
그런데 얼마전부터 이 녀석이 그르렁그르렁 쿨럭쿨럭 힘들어하며 고장이 자꾸 났다.
갈현동 살 때도 고장나서 한번 AS를 받은 적이 있는데
수리기사님 말씀이 이 모델은 이제 단종됐고, 회사도 어려워져서 세탁기쪽은 거의 하지 않으니 다음에 또 고장나면 AS가 쉽지 않을것이라 하셨었다.
남편도 가전제품파는 가게에 있던 세탁기중 제일로 싼 모델이었으니 이만큼만 써도 참 쓸만큼 썼다고 세탁기를 새로 사자 했다.
나는 내심 '그래도 아직은 좀더 쓸 수 있지 않을까.. 겉은 정말 멀쩡해보이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가
힘든 이불 빨래끝에 물이 넘쳐 새었는지 누수로 정전까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안되겠다 싶었다.
세탁조에 찌든 때도 밖으로 보일 정도라 세탁조 청소를 한번 받아볼까.. 싶었는데 이래저래 수리비용아 더 들겠다싶어 새로 사기로 했다.
결혼하고 5년, 남편 자취시절부터 치면 8년을 함께 지낸 세탁기.
단순한 살림거리라 해도 오래 내 손길이 닿았던 물건을 내놓는 일에는 마음이 쓰인다.
고마웠다... 네가 빨아준 옷입고 남편도 나도 잘 지냈고, 아이들도 잘 컸어. 고맙다.. 좋은 곳에 가서 잘 쉬고 다시 좋은 물건으로 태어나렴...
사진을 한장 찍어두고 싶어서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세탁기랑 안녕하자..
연수는 세탁기가 새로 온다고 했더니 '지금 세탁기는?'하고 물었다.
지금 세탁기는 오래동안 일을 많이 해서 이제는 고장도 잘 나고 해서 더 쓸 수가 없다 했더니 '그럼 어떻게 해?'한다.
'새 세탁기 가져오는 아저씨들이 데려가실거야'
'어디로?'
'음...... 낡은 세탁기들 모아두는 곳으로...? 거기 가서 새로 고쳐 쓸 수 있는 부분은 쓰고, 안그런 부분은 녹여서 다른 물건 만들고... 그럴꺼야.'
'그냥 우리 집에 두면 안돼?'
'응.. 우리집에는 둘 자리가 없어.'
'내 방 뒤에, 거기 베란다에 두면 되지 않을까?'
'거긴 비상공간으로 가는 통로라 거기에 뭘 두면 안돼... 우리집에 세탁기를 두 대나 둘 필요도 없고...'
'그래도... 그래도 나는 이 세탁기가 좋단 말야. 우리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연수는 울었다.
연수는 사람에게도, 물건에게도 애착이 많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질 때는 엉엉 울고
오래 함께 있었던 물건, 제가 좋아하는 물건들도 버리기 힘들어한다.
한참 울던 연수는 세탁기가 어떻게 될지 여러번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대답을 정교하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북극 요정들이 헌 장난감을 손질해서 너무너무 멋진 새 장난감으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 세탁기도 그렇게 다시 고쳐질거다..
그러니 나중에, 나아중에 오늘 새로 오는 세탁기가 또 오래오래 써서 고장나고 힘들어해서 못 쓰게 되면
그떄는 꼭 지금 우리집의 이 첫 세탁기가 새로 고쳐져서 태어난(일종의 환생!^^;;) 세탁기를 데려오겠노라고
엄마가 꼭 그렇게 주문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연수는 세탁기를 꼭 껴안고 인사를 했다.
'세탁기야,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나중에 새 세탁기로 태어나서 우리집에 꼭 다시 와.. 잘 가, 잘 가 우리 세탁기..'
아저씨들이 새 세탁기를 가지고 오셔서 원래 세탁기를 들고 나가실 때
연수는 내게 아저씨들께도 이 세탁기를 잘 고쳐서 나중에 다시 우리집에 보내달라고 얘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나가시는 아저씨들 뒤에 대고 그렇게 얘기했다.
일하느라 바쁜 아저씨들이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자 연수는 다시 얘기하라고 했지만
나는 '이 분들은 세탁기를 배송만 해주시는 분들이라 세탁기 만드는 과정은 잘 모르실거야.. 그러니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데려오자'고 속삭여주었다.
우리 세탁기가 정말로 나중에 어떤 물건으로 새로 태어나서 우리집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스테인레스 세탁조든, 플라스틱 통이든 무언가 새로운 물건으로 태어난다면
우리들의 애정과 우리들 삶의 기운을 간직하고 잘 지내다가 다시 우리 아이들과 만났으면 좋겠다.
세탁기야, 고마웠다.
늘 산더미같은 빨래 돌리기만 바빴지 제대로 청소 한번 안해주는 주인 만나 네가 참 고생 많았다..
이제 푹 쉬고.. 다시 좋은 물건으로 태어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