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친구에게서 책선물을 받았습니다.
똑순이와 함께 보라는 그림책 두 권이었어요.
그림책을 보는 동안 우리는 참 행복했습니다.
함께 마음을 졸이기도 했고, 함께 기뻐하기도 했고, 쿡쿡 웃기도 하며 책 두권에 푹 빠져 지냈어요.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같습니다.
그러다 문득 잊고 한참 안보게 되더라도 언젠가 책장에 있는 많은 책들중에 우연히 다시 꺼내 펴보게 되면
또 새롭게 더 좋아하게 될 책들, <엄마 마중>과 <넉 점 반> 입니다.
|
엄마 마중 -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한길사 | |
추워서 코 끝이 새빨개진 아이가 전차 정류장으로 엄마 마중을 나옵니다.
모자도 단단히 쓰고, 두터운 겉옷도 입고.. 겨울입니다.
아이는 정류장 팻말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정류장 팻말 기둥에 붙잡고 빙빙 돌기도 하다가
전차가 땡떙! 하고 도착할 때마다 차장에게 묻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소쿠리를 든 아줌마가 누나 손을 잡고 내리기도 하고, 학교 파한 형아들이 장난치며 뛰어내리기도 하며
전차가 여러대 지나갔는데 기다리는 엄마는 내리지 않습니다.
차장 아저씨들은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하고 지나갈 뿐입니다.
똑순이와 저는 살며시 겁이 납니다. 엄마가 얼른 오셔야할텐데..
추운날 정류장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따순 방안에 앉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다정한 차장 아저씨가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구나."하고 전차에서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얘기해주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요..
그러나 그 다음부터 정말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는 동안 우리는 그만 울고싶은 마음이 됩니다.
한군데만, 가만히, 서 있어야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에 정말 꼼짝도 않고 서있는 아가 옆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정류장에 오도카니 서서 길건너 높은 건물들을 바라보는 아기는 얼마나 작아보이는지요.
눈이 옵니다.
아기가 걸어나온 동네골목길에도 눈이 쌓입니다.
처음에 저는 아이가 엄마를 만나지 못한 채로 그림책이 끝난줄 알고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똑순아, 어쩌니.. 아이는 엄마를 만났을까? 만났을꺼야, 그럼.. 만났겠지.."
그러나 마지막 그림에서, 눈이 펑펑 오는 골목길에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가 조그맣게 그려져있는 것을 찾아내고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습니다.
"이것봐! 엄마야!! 똑순아, 아이가 엄마를 만났어! 아이가 엄마랑 손을 잡고 가네. 이쪽 손에는 사탕도 들고있네.. 엄마가 사탕을 사주셨나봐.. 그럼 그럼, 기다리면 엄마는 꼭 와..."
똑순이도 웃고, 저도 웃고 우리는 너무 행복해져서 그림속의 모자처럼 손도 잡아보고 안아도봅니다.
똑순이는 그림속의 아이가 먹는 사탕을 가리키며 매일 한개씩만 먹기로한 자기의 비타민 사탕을 달라고하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사탕을 가져다줍니다. "흥흥흥~" 똑순이가 좋아하면서 사탕을 먹습니다. 행복한 저녁입니다. ^^
|
넉 점 반 -
이영경 그림, 윤석중 글/창비(창작과비평사) | |
네 살쯤 됐을까요... 어린 여자아이가 호박 넝쿨옆에서 놀고 있습니다.
아이는 무척 심심해 보입니다.
아직 어린 호박을 따볼까 싶어 한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다 자라지도 않은 호박을 따면 엄마한테 야단맞을텐데.. 알면서도 너무 심심하니 어쩔수 없이 하는 일일 것입니다.
언니오빠들이 다 학교에 가고 없는 오후, 엄마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에 바쁘고 강아지만 아이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이가 당기는 호박줄기가 팽팽하니 끊어질 것만 같은 그 때,
엄마가 갑자기 아이를 부르며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께 몇신지 여쭤보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엄마는 정말 시간이 궁금했을까요..?
아이처럼, 엄마도 너무 시간이 안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건 아닐까.. 문득 생각했어요.
저도 가끔 똑순이가 낮잠잘 시간이 다 됐는데 안자고 자꾸 엄마에게 붙어 놀자고만 하고, 똑순이 재워놓고 해야할 집안일은 밀려있는 한낮쯤되면 유난히 시간이 안가는것 같아 자꾸만 시계바늘을 쳐다보곤 하거든요.
젖먹이 막내를 얼른 재워놓고 저녁 준비를 해야하는데, 바로 위 딸아이가 젖먹이는 엄마 곁과 마당가를 맴맴 도는 통에
동생도 잠이 안들고, 아이는 어린 호박을 따는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바로 그 순간.
이 엄마도 퍼뜩 아이에게 작은 심부름겸 놀거리를 주어 온통 재밌는것 투성이인 세상 속으로 살그머니 밀어넣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이는 시간을 알아오라는 이 재미난 심부름거리를 받아들고 타박타박 가겟집에 갑니다.
없는것 빼고는 다 있는, 동네 복덕방도 겸하는 '구복상회'를 향해가는 아이의 표정이 살짝 신납니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가겟집 문을 나서 오른쪽으로 꺽으면 바로 집인데 그만 왼쪽에는 가겟집앞에 묶어놓고 파는 닭이 있습니다.
대야에 올라서서 톡톡 물을 쪼아먹는 닭 옆에는 닭장에서 떨어졌는가.. 죽은 지렁이가 한마리 있고요.
'이게 왠 떡이냐'하고 개미들이 한데 모여 영차영차 끌고 갑니다.
의기양양하게 지렁이를 받쳐든 개미떼가 개미집까지 거진 다 왔는데... 이런!
그만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지렁이를 홱~ 낚아채서 날아가버립니다.
고추잠자리는 가겟집에서 한참 떨어진 논둑길까지 날아갔는데 오는 길에 지렁이는 떨어뜨렸는지 보이지 않고
멀쩡한 두꺼비만 한마리 흙길에 나와 '어디 하늘에서 먹을 것 좀 안 떨어지나' 하는 표정으로 의젓하게 앉아있습니다.
고추잠자리는 분꽃 덤불에 사뿐이 내려앉습니다.
아이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따라온 아이는 고추잠자리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지만
아마도 고추잠자리는 날아가고 예쁜 분꽃 송이만 아이 손에 잡혔을 것입니다.
분꽃 덤불에 앉아 분꽃잎을 따고, 터트리면 하얀 분같은 가루가 나오는 까만 분꽃 열매도 가지고 노는 아이 옆으로
데이트하는 젊은 청년과 수줍은 처녀가 양산을 받치고 살짝 떨어져서 지나가고,
학교 파한 오빠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다 이 둘을 놀리며 재밌어합니다.
아이가 파묻혀앉은 분꽃 덤불 속에서 메추라기 가족이 이른 저녁을 먹습니다.
긴 여름 오후가 끝나갈 무렵 시골의 다정하고 설레는 풍경 좀 보세요..
해가 꼴딱 지고 나서야 구복상회와 작은 실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제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마침내 제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게된 자랑스러움이 빛나는 얼굴로 엄마를 향해 외칩니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흐흐흥~" 똑순이가 웃고, 저도 같이 깔깔 웃습니다.
안방에서 벌써 남동생들과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던 큰언니가 마루로 올라오는 아이를 웃으며 돌아보고,
엄마는 웃을듯 말듯 다정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봅니다.
'아무리 놀다 오라고 내보냈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혼자서 뭘 하고 놀았니, 이 녀석...'
어린 딸을 측은해하기도 하고, 귀여워하기도 하는 젊은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문득 어린 시절, 나를 보던 우리 엄마 모습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합니다.
동생젖을 먹이고 있는 엄마 옆에는 솥단지에서 퍼놓은 아이밥 한공기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집의 저녁풍경은 왠지 낯이 익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도 늘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해가 꼴딱 진 뒤에,
가족들이 모두 마루위 밥상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고 있을 때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인제야 왔냐, 일찍 좀 오지, 얼른 올라와 밥먹어라'
아직도 젊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 그림책을 읽는 동안 저는 내내 이 여자아이가 책을 선물해준 그 친구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톡 튀어나온 이마하며, 통통한 볼하며.. 딱 그 친구의 어린시절 모습 같았거든요.
그런데 신기하지요.. 그 얘길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그 애가 정말 너같다고 계속 생각했어!"
우리가 둘다 서로를 생각했며 읽었던지라
그리운 친구의 어린시절 이야기인듯 더 마음 뭉클했었나 봅니다.
저 위의 <엄마 마중>은 32개월된 아들을 둔 그 친구도, 이제 17개월을 향해가는 아들을 둔 저도 모두 자기 아들들을 생각하며 짠해했고요. ^^
모자만 씌우면 벗기 바쁜 똑순이에게
"이 아이 좀 봐. 모자를 아주 단단히 쓰고 있네... 이제 날이 추워졌으니까 연수도 밖에 나갈때는 모자를 잘 쓰자" 했더니
이 녀석, 제 모자를 가져다달라고 하더니 혼자 낑낑 거리며 열심히 모자를 써봅니다.
몇 번 도전한 끝에 혼자 모자를 쓸수 있게 되었어요.
밖에 나갈 때도 물론 잘 쓰고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 소방관 아저씨들이 모자를 쓰고 있는걸 보고는 더 열심이지요..^^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을 때가 참 좋습니다.
위에 두 책처럼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풍성하고, 그림이 곱고, 제 마음까지 따뜻하게 울려주는 그림책을 읽을 때는
정말 행복하고요.
그래서 하루종일 끝없이 밀려드는 집안일에 지치다가도
똑순이가 그림책을 들고 달려오면 잠시 저도 일손을 멈추고, 마음도 함께 내려놓고 아이와 같이 그림책을 읽습니다.
정히 바쁠때는 아이 혼자 넘기게 하고 손은 일은 계속 하면서, 눈과 입으로는 아이와 함께 읽고 얘기합니다.
그마저도 못할때 똑순이는 엄마가 설겆이하는 개수대에 책을 쏙 집어넣기도 하고, 엄마 다리를 끌어당기며 어서 읽자 조릅니다.
이책저책 들고와 채근하는 아이가 귀찮을 때도 있고, 똑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것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릎위에 궁둥이를 쑥 들이미는 아이를 꼭 끌어앉고,
혹은 몸을 꼭 붙이고 나란히 앉아서 함께 책장을 넘기며 재미나게 그림책 읽는 행복한 순간을
하루중에 되도록이면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 시간은 제게도 고마운 휴식과 위안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그림책이 참 중요합니다. 함께 읽는 어른의 마음까지도 따뜻해지고 행복해지게 하는 책들.
슬그머니, 혹은 깔깔깔 웃게 하는 책들.
잘 만든, 좋은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배우는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크고요.
내용의 흐름에 호흡을 함께 하면서 긴장도 하고, 그 긴장이 풀리면서 웃기도 하는 그런 스토리의 힘, 그리고 글로 써있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들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의 힘이 있는 책이 좋은 그림책인 것 같아요.
그렇지않은 책들은 전달하려는 지식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비싼 책들이라도 재미가 없기 때문에 아이도 좋아하기 힘들고, 함께 읽는 어른도 흥이 안나는것 같습니다.
이 두 책을 읽고 새삼 똑순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좋은 그림책에 대한 욕구가 커졌습니다.
요사이 친척들께 물려받은 전집 형태의 그림책이 많아 단행본 그림책을 거의 사지 않고 지냈어요.
그 전집들도 모두 그림과 내용이 좋은 만족스러운 책들이지만 어쩐 일인지 모두 외국 그림책들이예요.
창비사의 <우리 시 그림책> 시리즈와 같은 최근(?)에 나온, 우리네 옛생활이나 풍경,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잘 담긴 그런 책들을 더 구해 읽고 싶습니다.
그런 책들이 엄마의 취향과 정서에 잘 부합하는 책들이지요.ㅎㅎ
아마도 똑순이는 다른 일상의 면면에서도 그렇겠지만 그림책을 통해서도 엄마의 시골스럽고 감정이 수시로 북받치는 그런 정서를 어느 정도는 닮게 될것 같습니다. 그건 좋은 걸까요.. 촌스러운 걸까요, 아니면 귀찮은 걸까요..^^;;
참, 이 두 책은 모두 1930~40년대에 씌어진 원작들을 가지고 오늘의 그림책작가들이 그려낸 것입니다.
윤석중의 <넉 점 반>은 1940년에 쓰여진 동시이고, 이태준의 <엄마 마중>은 1938년에 발행된 '조선아동문학집'에 실려있던 동화입니다.
그 시대의 풍경을 너무도 잘 복원하면서, 아이들의 정서 또한 참으로 잘 담아낸 그림책 작가들의 능력과 수고가 참 고마워지는 책들입니다.
원작의 맛을 살릴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자신만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녹여내는 것까지가 그림책 작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특히 '시'를 원작으로한 그림책들에서 많이 느낍니다. 어린이시로 유명한 외국시인인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의 시를 내용으로 그려진 그림책들을 보면 같은 시를 두고 다른 그림책작가가 그렸을때 얼마나 다른 얘기와 그림이 나오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다 문득 생각나 컴퓨터를 뒤져보니 결혼 전에 신랑과 신랑의 청년회 동료분들과 함께 갔던 '철원 평화기행'에서 이태준 시비를 찍어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철원군 대마리 두루미평화관 입구에 세워져있는 '상허 이태준 문학비' 전경이예요.
우리 땅 어느 곳이 안 그럴까마는.. 철원도 풍광이 참 아름다운 고장이었습니다.
분단의 상처로 여전히 아픈 땅이지만, 평화를 향한 꿈도 그래서 더 간절한 땅.
월북작가로 저도 제대로 그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 사진을 찍으면서도 낯설던 이태준의 글을
어린 아들의 그림책에서 만나고, 코끝 찡해하며 뭉클해할 수 있었던 것이 고마워집니다.
언제 또 철원을 찾을 일이 있게되면 그때는 똑순이랑 함께 가서
이 시비를 보며 "네가 참 좋아하는 '엄마 마중'을 쓴 그 작가분이란다.." 하고 얘기해줘야겠어요.
두루미평화회관에서 바라보이던 너른 들판과 먼 백마고지 같은 아름답고 마음아픈 풍경을 다시 보면서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고 많이 이야기하는 날들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