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1.04 강릉일기
  2. 2012.06.08 엄마의 엄마의 엄마 10
하루2013. 1. 4. 20:28

 

 

강릉에도 눈이 살짝 왔다.

서울이나 다른 지방처럼 많이 온 것은 아니고, 기온도 다른 지역보다는 조금 높다.

영동지방 날씨는 특이한 구석이 많아서 다른 곳이 추울 때 따뜻하고, 다른 곳이 더울 때 서늘하고, 눈도 남들 안올 때 폭설 오곤한다.

 

그래도 여기도 춥다.

'대한이가 소한이 집에 놀러왔다가 얼어죽었다'는 옛말도 있는(^^) 그 소한 추위가 대단하다.

그래도 애들은 밖에서 노는걸 좋아한다.

눈온 날 아침, 연수는 할아버지 따라 눈치운다고 마당에 나서서 작은 삽으로 제 맘껏 길을 낸다.

 


 

 

 

 

잠옷 밑에 패딩 바지 입고, 잠옷 위에 패딩 점퍼 입은 연호도 하삐 옆에서 빗자루질 영차영차~! ^^

 

 

손학규씨가 쓴 '저녁이 있는 삶'이란 책 제목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잠시 패러디하자면 나는 '마당이 있는 삶'이 좋다.

내 생각에 '마당이 있는 삶'은 '할아버지가 있는 삶'이다. '아버지가 있는 삶'이기도 하다.

할머니와 엄마도 마당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시지만 그래도 마당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존재감이 빛나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배운다.

눈이 오면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고, 집 안팎을 돌아보고, 자동차 세차도 하고, 집에 딸린 텃밭이나 논에서 거둔 곡식들을 손보아 잘 갈무리해두기도 하는 곳.

낙엽이 떨어지면 비질을 하고, 덥수룩하게 자란 집 둘레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하는 곳.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칠 수도 있고, 손주들의 발놀림이 그새 얼마나 야무져졌나 가늠하는 재미로 할아버지가 축구공을 던져주시는 곳.

겨울 초입에 아이들과 상주 시댁에 갔을 때는 시골집인 시외가 마당에서 할아버지들이 장작을 패기도 하셨다.

아직 아궁이가 두 군데나 있는 시외가의 겨울 준비를 하기위해 도시에서 온 자식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함께 장작을 마련하고, 아궁이에서는 손주들을 위한 고구마가 구워지는 그 풍경이 나는 참 좋았다.

 

아버지들의 노동이 주로 집에서 멀리 떨어진 회사나 공장에서 이루어지고,

집의 형태도 자기 마당이 따로 없는 공동주택이 대다수인 도시의 집에서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들은 사실 집에서는 큰 존재감을 갖기가 어렵다.

아이들의 놀이감을 가지고 함께 놀아주는 것도 한두시간이지, 그 이상 노는 것은 힘들기도 하고 또 피곤한 아버지들도 쉬어야하니

집은 그냥 잠을 자고 다시 일을 하러 나가는 공간 이외의 역할을 하기 힘들다.

주말이라도 공원이나 어디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집안에서는 잠시 아이들과 장난감을 가지고 함께 놀다가 지치면

아버지가 TV(스마트폰)를 보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TV(스마트폰)앞에 앉혀놓고 어른들이 잠시 한숨돌리거나 하는 이상의 활동이 어렵다.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철학자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아파트를 두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장소도 없고 어른들이 아이들의 소란을 피할 곳도 없다'고 했다는데

참 적절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안과 밖이 모두 존재하는 집이 아니라 '안'만 있는 아파트나 공동주택에서는 아이들은 마음껏 놀 수가 없고(층간소음 때문에도 그렇고 집안에 함께 있는 어른들로부터 '조용히 좀 하라'는 말도 거듭 들어야하므로), 어른들은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가 없다.

 

마당에서는 어른들은 일을 하고, 아이들은 놀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결에 아이들은 어른들의 일을 어깨 너머로 배울 것이다.

함께 조금씩 해볼 수 있을테고, 몸이 커지고 손도 야물어 질 때쯤 되면 생각도 깊어질 것이다.

마당에서의 소란은 하늘과 땅이 그 소음을 흡수해주고 햇살과 바람이 그 빛나는 존재들을 더 빛나게 해주어서인지

아이들이 밖에서 내뿜는 에너지는 집안에서와 달리 어른들을 지치게 하기보다는 어른들에게 빙그레 웃음을 짓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마당있는 삶을 꿈꾼다.

아마도 우리 가족에게 마당이 생긴다면 그 마당에서 벌이는 일의 대부분은 주로 내가 하는 일일 것이다.

남편은 아마도 전기 배선이나 수도, 크게 힘써야하는 뭔가를 옮겨놓는 일 정도를 제외하면 아마 거의 마당에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회사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 남편이 집에서 또다른 일을 더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본인의 성격이나 취향상 잘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마 우리집에서 '마당이 있는 삶'은 '아버지가 있는 삶'이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엄마가 아주 행복한 삶'이기는 할 것이다.

 

나는 마당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고 싶고, 작은 텃밭에다 푸성귀를 심어서 키우고 싶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개나 고양이를 키울 수도 있겠고

작은 수도가를 두고 여름에는 물놀이도 하고

평등한 가사노동에 대한 훌륭한 메세지를 담고있는 그림책 <돼지책>에 나오는 엄마처럼 자동차를 즐겁게 정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울에 눈이 오면 아들 셋과 함께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고 여력이 되면(아들 셋이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ㅎㅎ) 동네골목에 쌓인 눈까지 같이 치우는 상상을 하며

나는 한참동안 참으로 흐뭇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마당있는 삶이 빠른 시일내에 우리들의 삶속으로 꼭 들어와주었으면 좋겠다. ^^

 

 

 
 

 

 

 

연수는 작년에 외갓집에 왔을 때

그야말로 '폭설'이 내렸던 외갓집 마당에서 눈천사를 만들며 놀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살짝 내려 아쉬운 눈위에서도 눈천사를 만든다.

이제는 여섯살이 된 나의 큰 아기.

 


 

 

 

 

엊그제는 외할머니가 맛있는 메밀전을 부쳐주셨다.

친정에서 차로 10분거리에 사는 언니가 조카를 데리고 놀러왔다.

고향집에 오면 부모님과 함께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이다.

어느새 마흔이 된 언니. 어린시절의 언니를 꼭 닮은 조카딸.  

나이들어가시는 부모님 가까이에 우리 남매들중 한 사람이라도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고마운 언니, 나이 들수록 애틋해지는 우리 언니.

 


 

 

 

"안녕하세요, 저.. 연호예요."

짜잔~~ 이 분이 누구신가~!

2:8 가르마를 예쁘게 타시고 머릿기름 자르르 발라 앞머리를 곱게 넘기신 이 분.

귀염둥이 우리 둘째 아들되시겠다. ㅎㅎ

 

 

 

 

 

 

이 날의 헤어스타일리스트는 바로 '하삐'!

아버지가 늘 바르시는 머리 화장품으로 외손주들 머리도 곱게, 곱게 빗겨주셨다. ^^;;;

 


 

 

 

 

연호의 변신이 넘 재미있었던지 연수도 자청해서 할아버지께 머리를 맡겼다. ㅋㅋ

머리도 늘 신경써서 손질하시고 옷도 깔끔하고 멋지게 입으시는걸 좋아하는 멋쟁이 우리 아빠.

손주들의 머리도 참 정성껏 손질해 주셨다. ^^ 


 

 

 

 

 

'오빤 하삐 스타일~!!'

 

머리숱이 많은 연수는 연호만큼 극적인 변신을 선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동안은 앞머리가 아주 단정했다. ㅎㅎ

외가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들은 아침마다 세수를 곱게 하고,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로션을 바르고 할아버지가 헤어로션 발라 싹싹 빗어넘겨주시는 손길에 머리 단장을 한다.

참... 어디 꽃미남 대회에라도 내보내고 싶으나... 이 추운날 갈 데는 없다. ㅎㅎ

다행히 외갓집에는 관객이 많아서 아침마다 아이들은 외증조할머니와 외할머니, 엄마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다.

냄새가 무척 진한 할아버지의 헤어로션 향기를 온 집안에 뿌리며~~^^;;

 


 

 

 

 

연호는 매일매일 이웃집인 옥계집 개들에게 문안인사도 빼먹지 않는다.

저 위에 큰 개가 앉아있는 저 양지바른 자리는 엄마가 어릴때 늘 소꿉놀이하던 곳.

삼십년 세월동안 튼튼히 서있는 저 벽도 신기하고(가만보니 다시 쌓으신 것도 같다), 저 벽 뒤에 있는 아름드리 키 큰 소나무들은 나를 기억하는지

양지바른 저 자리에서 매일 흙과 사금파리를 조물락거리며 놀던 그 꼬마 여자아이는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될지

나는 연호 뒤에 서서 한참동안 궁금해하곤 한다.

그리고 올려다보는 강릉의 겨울 하늘이 참 파랗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2. 6. 8. 23:49






지난 4월, 친정엄마와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를 만나러 대구에 다녀온 것이다.

연수와 연호에게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를 만나는 것이다. ^^ 


강릉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원주로 오신 엄마를 원주고속터미널에서 만나 우리차로 함께 대구로 가는 길.

먼 여정이었지만 즐거웠다. 

나는 엄마를 만나 즐겁고, 아이들은 외할머니를 만나 신났다.

평범한 고속도로 휴게소의 평범한 놀잇감 말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면 더없이 빛나는 존재가 된다. 

 








차를 타고가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봄산에는 분홍색 산벚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연녹색 새잎이 막 무성해지기 시작하는 4월말. 

날이 참 화창하고 좋았다.

엄마와 나는 모처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며 가족들과 이웃들의 크고작은 소식이 주를 이루는 수다를 가는 내내 신나게 떨었다.

연호는 잘 자고, 연수는 앞자리에서 엄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다가 아빠 전화기로 만화도 보며 나름대로 즐겁게 여행을 즐겨주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엄마는 늘 밤에 자고 계시다가 새벽 1시쯤 내가 독서실에서 돌아오면 일어나서 간식을 챙겨주셨었다.

그러면 나는 씻고 나와 엄마가 차려준 간식을 먹으며 그 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엄마에게 얘기하곤 했는데 

문득 그 새벽의 부엌 밥상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이 떠올랐다. 










대구 외할머니.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의 둘쨰딸이다.

결혼하고 대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큰이모나 그래도 대구와 가까운 편인 창원의 셋째 이모와 달리 우리 엄마는 멀고먼 강원도 강릉으로 시집가서 친정에 자주 오지 못했던 딸이었다.

강릉과 대구는 지리적으로 멀기도 하고, 교통편도 기차가 편도만 7시간 가까이 걸려 오가기 쉽지 않았다.

강릉 우리집이 농사일이 많고 또 엄마의 시아버지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원체 엄하고 보수적인 분이었다는 것도 엄마의 친정 나들이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시할머니까지 모시는 층층시하에서 어린 시동생들도 돌보며 큰 규모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는 큰며느리였던 우리 엄마는 

자그만 체구에 본래 몸이 많이 약하시지만 마음만은 무척 강단진 분이라 참 씩씩하게도 그 많은 역할을 다 해내셨다. 

나는 늘 우리 엄마의 씩씩하고 당차고 쾌활한 성격을 존경하고 좋아했는데 

이제 내가 엄마가 되고 아내, 며느리, 올케 등등의 역할을 맡고 보니

엄마의 밝고 씩씩한 행보 아래 드리워져 있었을 엄마의 힘겨움과 고단함을 살수록 조금씩 더 짐작할 수 있어서  마음이 찡하고 아프다. 

하루 또 하루,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 자식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일, 집안을 쓸고닦는 일, 그리고 생계를 위해 해야하는 또 그 많은 일, 일, 일.... 

어떻게 다 해내셨을까. 어떻게 다 견디셨을까. 그 끝없는 반복과 고되고 힘든 나날들을..

긴 시간동안 엄마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엄마와 외할머니가 이제 엄마 5년차인 내게는 너무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내게 대구 외가에 오는 일은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일년에 한 번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오래, 그러니까 몇 년만에 한번 있는 큰 일인데다

강릉에서 새벽에 기차를 타고 떠나 영주역에서 한번 내려 가락국수를 후다닥 먹고 다시 기차를 타고 오랫동안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하는 그 여정은 

내 어린 시절의 유일하다시피한 먼 여행이었던 까닭이다.


나는 이 여행이 두렵기도 했고 좋기도 했다.

대구에 오면 나를 예뻐해주는 외사촌 언니들도 있었고, 조금 엄한 분위기인 강릉의 친가와는 또 다른 분위기로 떠들썩하고 다정하게 맞아주는 외삼촌들 이모들도 좋았다. 

하지만 아마도 어렵게 한번 친정에 온 엄마가 모처럼 쉬는 동안 나는 엄마와 떨어져 이모네에 가서 언니들과 함께(우리 친언니도 함께) 자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엄마가 보고싶다고 밤에 엄청 울었던 기억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새로 알게된 일도 있다. 

엄마가 셋째인 나를 낳고 몸이 너무 안 좋아서 5~6개월쯤 된 갓난아기인 나만 데리고 외가에 몸조리를 하러 오셨던 적이 있었단다.

그때 큰이모가 나를 위해(실은 몸 아픈 엄마를 위해) 새 보행기까지 사다주며 엄마랑 좀 떨어지게 해보려 했으나

어찌나 앙앙 울며 외할머니한테도 안가고, 큰이모한테도 절대 안 안기며 잠시도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연수와 연호를 탓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ㅠㅠ

우리 애들이 엄마와 안 떨어지려하는 것은 아주 오랜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런 나를 끌어안고 젋고 아픈 날들을 견뎌주신 우리 엄마께 다시금 깊은 감사와 죄송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아이구, 엄마 미안해...ㅠ










남편은 외할머니를 처음 뵈었다.

할머니는 올해 연세가 여든일곱이신데 몸이 많이 약해지셔서 우리들의 결혼식때 서울에 오지 못하셨다.

우리가 일찍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결혼후 곧이어 연수 낳고, 키우고.. 또 연호낳고 한다고 죄송스럽게도 빨리 찾아뵙지 못했다.

그 사이에 외할머니는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 한번 입원하기도 하셨고

엄마가 며칠동안 대구에 와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시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다행히 할머니는 퇴원하셨고 아직은 큰 어려움없이 생활하고 계시지만 건강이 예전만 못하시다는 엄마 얘기를 듣고

가끔 강릉에 갔을때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께 전화만 드리면서 마음속으로 '어서 가야지, 아이들데리고 가서 뵈야지..' 생각하다가

드디어 이번에 날을 잡은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처음 보는 외손주사위와 증손주들을 다정하게 맞아주셨다.

불고기를 볶고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쳐 손수 차리신 정성스런 밥상에서 멀리서 오는 자손들을 맞느라고 분주히 움직이셨을 외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떡과 과일도 사다놓고, 아이들이 먹을 과자까지 까만 봉지에 담아 장봐 놓으신 것을 보니 할머니의 반가움, 뭘 먹일까 하는 고민 같은 것들이 그대로 전해져 뭉클했다.

외할머니는 내 손등을 연신 두드리시며 늘 어린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던 외손녀가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을 신기하고 대견해하셨다.


남편은 우리를 마중나와 있던 외할머니를 멀리서 보고 '아 저분이구나' 했다. 

'장모님과 워낙 닮으셔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단다.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았고, 나는 엄마를 닮았다.

외할머니는 몇십년 후의 우리 엄마 모습이고 엄마는 또 몇십년후의 내 모습. 

그리 생각하니 미래의 나를 곁에서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해 엄마도, 외할머니도 무심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외가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이제는 '용계동 옛집'이 된 이 집에.

작년부터 외할머니는 반야월에 있는 자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계신다.

40년 가까이 사셨던 이 집이 이제는 너무 낡아서 겨울에는 춥고, 따신 물도 안 나오고 해서 할머니 혼자 지내시기에 너무 불편하다고 대구에 함께 사는 외삼촌께서 할머니가 사실 아파트를 하나 얻으셨다. 

그래도 할머니는 2~3일에 한번은 용계동 이 집에 오신단다.

오셔서 화단에 물을 주고, 마루와 거실 바닥에 걸레질을 하시고 잠시 앉아 집안팎을 둘러보신 다음에

오랜 친구들이 있는 용계동 마을회관에 가신다.

다행히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라 아직은 힘들지않게 오고 가신다했다.


우리 엄마는 본래 밀양 가까이 있는 삼랑진에서 나고 자랐다.

삼랑진극장이 있었던 삼랑진 읍내에서 씨앗 종묘상을 하셨던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던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삼랑진에 엄마와 함께 가보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다. 다음에는 꼭 삼랑진에도 가봐야지..

어린 소녀인 엄마가 영화를 보고, 처녀가 된 이모가 결혼식도 했다는 삼랑진극장 앞을 꼭 걸어보고 싶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결혼해 강원도로 떠난 뒤 

외할머니는 외삼촌들을 데리고 대구 이 용계동 집으로 이사를 하셨다. 

대구에서 연수원 사업을 시작한 이모부를 도와 외삼촌도 연수원에서 일을 하기로 하면서 삶의 터전을 대구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내 외가의 추억은 모두 대구 용계동 이 집에 깃들어있다.

아빠가 기억하시는 '처가'도 바로 이 집이겠지..

용계동 외가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고, 마당에 작은 뜨락이 있고, 또 화장실과 창고 위쪽으로 장독대가 놓여있는 길다란 옥상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높다고 생각했던 옥상이 지금 올라가보니 아주 낮았다.

연수는 다락방을 보고는 '엄마, 외할머니 집에도 다락방이 있네? 희범이네 집에도 다락방이 있는데! 우리도 나중에 다락방있는 집으로 이사가자!' 했다.
마당도 있고, 다락도 있는 집. 그래그래.. 엄마의 오랜 바램이지..^^
마당에 자주빛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외가가 깨끗하게 비어있는 것을 보니 그냥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싶었다.










내 어린 날, 외할머니는 모처럼 외가에 온 어린 외손녀를 데리고 대구의 큰 시장인 '칠성시장'에 가서 고운 팬티를 여러장 사주셨었다. 아직도 그 팬티의 자잘한 꽃무늬를 기억한다.

이번에도 외할머니는 용계동에서 가까운 '방촌시장'에서 연수에게 팬티를 사주셨다.

'메이플 스토리'라는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그 팬티를 연수는 아주 좋아해서 대구에서 돌아온 후 어서 외(증조)할머니가 사준 팬티를 입혀달라고 졸랐다.

옛날과 달라진게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외할머니께 꽃무늬 셔츠와 조끼를 사드렸다는 것이다.

외할머니께 처음으로 사드려본 옷이다. 고운 분홍색 옷을 입고 웃으시던 할머니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대학 새내기 여름방학에 나 혼자 대구에 온 적도 있었다.

일주일 동안 외가에서 지내면서 아침이면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길을 떠나 

혼자 청도 운문사로, 동화사로, 갓바위로 돌아다녔다.

어떤 프랑스인 청년을 만나 하루동안 어설픈 영어로 가이드 역할을 하며 대구박물관도 구경했다. 

그때 나 좋다고 두고두고 연락해 곤혹스러웠던 그 프랑스청년은 잘 살고 있는지.. 아마 예쁜 프랑스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겠지.. ㅎㅎ

연애와 인생에 대한 스무살의 고민들이 참 버겁다고 느끼던 어리디 어린 내가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아침 일찍 대구 외가를 걸어나갔다가 해질 무렵 터덜터덜 돌아오던 날을 용계동 외가 앞길에서 추억했다.

이제는 내 곁에 뛰어다니는 다섯살 내 아이의 그림자가 길게 서있었다.

할머니가 다시 한번 마루에 걸레질을 마치신 후에 우리는 옛집의 대문을 닫고 나왔다. 

마을회관에 들러 할머니의 친구들께도 인사를 드리고 인사차 사간 두유를 나누어먹으며 잠시 놀다 반야월 아파트로 돌아왔다.


오랫만에 온 우리의 외가 나들이 소식을 듣고 외삼촌 두 분과 창원 이모 내외도 외할머니댁으로 오셔서 반갑게 만나뵈었다.

그 분들도 아주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나는 젋은 그 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서로의 나이든 모습에 깊이 놀라고 말았다. 

그 사이 잠깐잠깐 결혼식장 같은 곳에서 뵌 적도 있지만 방에 무릎을 마주 하고 앉아 천천히 얘기 나눈 것은 정말 오랫만이었다. 

나는 아주 젋은 막내 외삼촌이 법대를 다니며 고시공부를 하시던 시절에 그 외삼촌의 책장에 있던 야한(지금 기준에서 보면 그저 위트있다고 할 정도인 만평인데, 음.. 아직도 기억나는걸 보니 시골소녀에게 정말 문화적 충격이었긴 한가보다~^^;;) 어른들 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새 그 외삼촌의 아들이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니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그 사이에 있는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반가운 만남과 진한 여운이 많아서 1박2일의 짧은 여행이 아주 묵직하게 느껴졌다.

외할머니가 용계동 옛집 마당을 걸어나오시는 모습을 찍었다.

이 모습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날이 오리라...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다시 또 할머니를 만나러 가야지.



엄마가 있는 사람은 쓸쓸하지 않다.

옛날 분들이 부모님을 잃고 장례를 치를 때 자신을 '고애자'라 칭했다한다.

외로울 고 자에 슬플 애 자를 쓰는데 아버지를 잃으면 고 자만 붙이고, 어머니를 잃으면 애 자를 붙여 불렀다.

그래서 아버지를 잃은 사람은 남은 일생이 외롭고, 어머니를 잃은 사람은 남은 일생이 슬프다고들 말한다.   

우리 친정 부모님과 시어머님은 아버님들은 돌아가셨지만 아직 어머니들이 살아계신다. 그래서 연수와 연호에게는 외증조할머니가 세 분이다. 

우리 부모님들꼐도,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참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 시아버님만 어머니를 내가 결혼하기 몇 해전에 잃으셨는데, 그래서 그런가.. 시아버님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아리다.


엄마가 계시다는 것, 엄마가 내 곁에, 비록 멀리 계시더라도 이 세상에 함께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맙고 좋은 일인지...

예전에 우리 시어머님의 엄마인 청상 시외할머니께서 나와 아이들을 먹이고 돌봐주시느라 종종걸음으로 바쁜 어머니를 보시며 '에고, 할머니 노릇하느라고 고생이 많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뭉클했었는데

이번에 외할머니도 엄마를 보며 똑같은 얘기를 하셨다.

엄마는 그런 존재다.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애쓰고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밟혀 늘 걱정해주는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내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 

내 힘든 것과 내 애쓰는 일을 모두 알고 응원해주는 사람. 

그 한 사람, 우리 엄마다.










엄마의 엄마가 계셔서 참 좋다. 

우리 곁에, 내 엄마 곁에 이렇게 함께 계셔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외할머니..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셔요.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