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들'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19.11.27 가을에 그린 그림과 생각들
  2. 2019.11.18 김장과 아이들
  3. 2019.07.28 삼랑진 여행 3
  4. 2019.07.27 삼랑진 여행 1
  5. 2019.07.24 삼랑진 여행 2 2
  6. 2018.08.29 식당을 한다면 4
  7. 2018.08.14 제주에서 그림 2 2
  8. 2018.08.13 제주에서 그림 1 2
  9. 2018.08.07 제주 여행
  10. 2018.07.28 여행


올 가을은 내가 퍽 바쁘게 보냈나보다.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그림 수첩을 늘 들고다니기만 하고
펴들고 앉아 가만히 그림 그려볼 시간이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겠지..





여름 끝무렵에는 선선한 저녁에 아파트 벤취에 앉아 있을 때가 좀 있었는데
그 때 정자와 정원 풍경을 그리다 말았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아버지가 고향집 마당 벤취에 앉아 마을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는 것처럼
요맘때는 나도 아파트 정원이 꼭 내 정원인 것처럼
한적한 정자와 오솔길, 나무들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 아파트에는 공작단풍이라는 단풍나무가 조경으로 많이 식재되어 있다.
지금 이 나무는 빨갛다못해 불타버린 것 처럼 검붉은 색깔로 단풍이 들어있지만
이 그림을 그렸던 초가을에는 가지끝에 달린 단풍나무 씨앗들만 빨갛고 잎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가을동안 혼자 조용히 그림그리는 시간은 못 가졌지만
화요일마다 캘리그라피 수업에서 수채화물감으로 그림그리는 것을 선생님께 조금씩 배웠다.
작은 그림을, 색이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그리는 것이 참 어렵다ㅜㅜ

+

추석에 큰 이모부님이 돌아가셨다.
명절 쇠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하며 그 소식을 듣는데 눈물이 흘렀다.
오랫동안 못 뵈었던 큰 이모부.
젊은 시절 참 호탕하셨고 유쾌한 어른이셨다.
나를 보면 늘 반가워해주시고 예뻐해주셨어서 자주 뵙지 못해도 늘 마음에 감사함과 따뜻한 정이 있었다.

이모부님은 우리 아버지에게 아주 친한 한동네 형님이었다.
10월에 친정에 갔을 때 아버지께 여쭤보니
“그 이가 경포학교 18기, 내가 22기지” 하고 국민학교 졸업 기수를 얘기해주셨다.
나는 그 학교의 56기 졸업생이다.

큰이모부는 청년이 되자 고향을 떠나셨다.
멀리 대구, 아니 삼랑진까지 가서 일하실 때 큰이모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그리고 큰 처제에게 듬직한 고향 후배를 소개해주셨는데
그 분이 우리 아빠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과 참 큰 인연이 있으신 분이다.

나고자란 고향에서 평생을 살고계신 아빠와 달리
큰이모부는 20대 이후로는 계속 타향에 사셨다.
대구에 오래 사셨고, 자녀들이 장성한 뒤로는 서울로 터전을 옮겨 언니오빠들의 대학과 결혼후 생활을 모두 함께 하셨다.

연수원 사업을 오래 하셨고, 호탕한 성품이셨고, 말씀을 재미있게 잘 하셨고, 사촌 언니들과 오빠와 그 손주들에게, 그리고 우리 조카들에게도 참 다정하셨던 분으로 나는 이모부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만나면 나를 늘 아껴주셨고, 크게 되리라 잘 되리라 응원하는 말씀을 해주셨었다.

이모부님의 응원대로 큰 인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 소박하게나마 내 가정을 꾸리고 잘 지내고 있는 데에는 이모부님이 보내주신 사랑과 축복도 늘 함께 했을 것이다.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
결혼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한 것이, 늘 감사했다는 말씀도 못 드린 것이..

이 겨울은 큰이모부님의 빈 자리가 가족들 모두의 마음에 시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모부님을 기억할 것이다.
이모부님을 생각하면 젊으신 날의 웃는 얼굴, 그 억양과 목소리, 따뜻한 말씀들이 늘 마음속에 떠오를 것이다.
함께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어요.
편히 쉬세요, 이모부.





Posted by 연신내새댁




주말에 친정에 가서 김장을 함께 하고 왔다.
전날 엄마아빠가 찬바람속에 밭에서 배추뽑아 절여 놓느라 고생하셨고
아침에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오빠와 새언니가 배추들을 헹궈놓느라 또 고생하셔서
나는 그저 김치통 들고 가서
양념한 속만 잘 발라 김장김치를 여러통 든든하게 담가 왔다.





이제는 어엿한 김장김치 마스터가 되신 전&이 프로 부부시다 ^^
친정 가까이 사는 언니도 함께 와서 우리들 김장을 도와주고, 저녁에는 퇴근하고오신 형부까지 온가족이 모여서 생굴넣은 겉절이 김치에 돼지고기 수육 삶아서 맛있고 든든한 저녁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컸는지 모른다.
어른들이 김장하고 이런저런 일로 바쁜 동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친정집의 뒷산과 모래밭으로 뛰어다니며 놀고
자전거타고, 보드게임하고, 연극 준비해서 저녁엔 공연도 한편 무대에 올렸다. ^^
강릉 할아버지댁에 모이면 으레 그렇게 노는 아이들이다.
이제는 중학생이 된 제일 큰 조카는 모래성도 엄청 멋지게 잘 만들고, 동생들을 데리고 연극 공연도 잘 만들어내는 멋진 친구다.
아이들 자라는 것은 볼 때 마다 신기하다.




김장이 한창이던 토욜 오후엔 할아버지와 연수아빠가 아이들데리고 경포호수에 가서 6인용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모두 낑낑 엄청 힘들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지나고나면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
일요일 아침에 이렇게 할아버지와 감을 따본 추억과 함께 말이다.
작고 푸른 주머니가 달린 감 장대 안으로 감을 쏙 집어넣은후에 탁 당겨서 따는 감장대의 손맛은 그야말로 여러번 해봐야 손에 익는 감각인데
나도 어릴때 그렇게 감을 땄던 기억이 참 생생하고 좋다.
손에 익은 느낌은 더 오래 기억된다. 내 손으로 해보는 것이 그래서 참 중요하다. 손으로 해보고 발로 뛰어다니며 직접 밟아본 기억.
논두렁 밭두렁 뒷산 오솔길을 밟을 때의 감촉 같은 기억들 말이다.
그런 것은 오래오래 남아서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예쁘게 깍은 곶감이 올망졸망 달려있는 아버지의 차고에는
아버지가 평생 써오신 손에 익은 도구들이 늘 제 자리에 잘 정돈되어 걸려있다.
봄이면 고운 흙이 깔린 모판에 예쁜 볍씨를 자라락 뿌려주던 기계와
논에 모를 심어주던 이앙기, 호미들, 줄자들, 밀집모자,
내년에 씨앗하려고 말려둔 옥수수까지
고향집의 창고를 보면 언제나 신이 나고 호기심이 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보물창고 같은 곳.






고향집에 가면 언제나 힘이 난다.
밥도 많이 먹게 되고 목소리도 더 활기차진다.
엄마아빠 옆에 가니까 나도 아이로 돌아가서 그런가. ^^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도 그럴까?
자기들 집에서도 까불고 놀겠지만 강릉 할아버지댁에 오면 더 신이 나고 목소리도 높아지고 펄쩍펄쩍 방방 뛰게 될까?
함께 모이니 더 그렇겠지.
반가운 언니오빠 동생들과 북적북적 어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넉넉한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뛰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넓은 마당과 언덕을 쏘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부모님 곁을 떠나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면 또 어려운 일들이, 어른과 부모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하는 삶의 무게들이 저마다 만만치 않게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숙제와 학원과 학교와 또 제나름 힘든 과제들이 다가오겠지만
강릉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모두에게 어깨 좀 펴고 한번 더 씩 웃으며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김장김치 속에, 배추와 무와 홍시 안에 듬뿍 담아 보내신 것은
고향의 가을이고, 사랑이다.

가족들 곁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즐겁게 일하고 웃고 이야기하고 돌아오니
추운 겨울이 와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이 든든히 채워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충전하고 올수 있도록 준비하고 애쓴 엄마는 몸살이나 나지않으셨는지,
대식구 식사와 김장 뒷설거지 도맡아하며 고생한 새언니도 많이 힘드시지 않은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내 안온함이 기대고 있지는 않은지 죄송하게 돌아보는 아침이다.

모두들 맛있는 김치 많이 먹고 아프지말고 겨울 잘 났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9. 7. 28. 12:36



5월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두 달이나 묵혀서야 썼다.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도 조금 했고, 생활에 쫒겨 시간을 못 내기도 했다.
짧은 글들은 간간히 썼지만 내 나름대로 좀 정리를 해가며 길게 쓰고싶은 이 여행기는 시작이 쉽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하루하루는 어렵게, 때론 수월하게 버티고 애써가며 그저그렇게 지나가는 것 같은데
그 시간들을 모아서 몇 년, 몇 십년의 단위로 묶어놓고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자신을 이루어왔는지가 보인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그림을 이루는 모자이크 처럼.
그리고 그 그림은 계속 그려진다.
바로 오늘도.

엄마 주위에 우리가 모두 모여 동화사에서 사진을 찍은 그 날에
나는 엄마의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엄마라는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한 조각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삼랑진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수였던 젊은 외할아버지와 책읽기를 좋아하셨던 외증조할머니,
장에 왔다가 무시로 들리시는 친지와 이웃 할머니들을 위해
큰 냄비에 수제비나 죽을 끓이다 한명 더 오면 물 한바가지 더 부으며
“점심 자시고 가시소~”하던 외할머니의 젊은 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잘 하시고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하시는 울 엄마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자란 것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엄마는 씩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과 함께 자신이 자란 곳에서 멀리 떠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강릉이라는 낯선 곳에서 우리들을 키우며 보여준 엄마의 여러 모습들을 생각할때
엄마가 만들어온 엄마 자신의 그림은 씩씩한 사람인 것 같다.
작은 몸에 깃든 씩씩한 마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나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이야기라는 가지를 넓게 펼쳐가며 오늘도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을 것이다.

엄마의 언니인 서울 이모께서 “아고~ 나도 삼랑진에 한번 가보고싶다!”고 하셨다는 얘기를 여행하며 많이 들었다.
다음에는 큰이모도 함께, 강릉 언니도 함께, 외삼촌들도 함께 삼랑진 골목을 또 걸어봐도 좋겠다.
우리가 나무라면
가끔은 자기가 출발했던 곳, 자기 뿌리를 한번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그리고 또 오늘의 가지를 뻗어가는 것이다.











우리 품에 깃든 고운 생명들을 보듬어가며.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9. 7. 27. 14:14





날이 좋았던 지난 5월,
엄마아빠를 모시고 오빠네 가족과 함께 삼랑진 여행을 다녀왔다.

삼랑진은 엄마의 고향이다.
1948년 삼랑진에서 태어난 엄마는 스물일곱살이던 1974년에 아빠와 결혼해 강릉으로 시집오실때까지 삼랑진에서 살았다.

엄마가 결혼하고 얼마후에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은 모두 대구로 이사를 하셨다.
그래서 삼랑진은 엄마의 유년시절과 처녀시절의 추억이 많이 깃든 곳이지만
찾아가보기는 어려운 곳이 되었다.

강릉에서 대구 외가까지도 먼 길이거니와
외할아버지 제사같은 가족 행사나 우리들의 외가나들이로 대구에 한번 간다고 해도
꽤 멀리 떨어진 삼랑진까지 일부러 가게는 잘 안되어서
엄마는 결혼후로 삼랑진에 한번도 못 가보셨다.

우리는 삼랑진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엄마의 옛날 이야기를 좋아했던 우리들은
삼랑진 역 근처 읍내에서 종묘상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이야기,
엄마의 동네 친구들 집에 가서 만화책 보며 놀던 이야기,
아직 어렸던 막내 외삼촌이 업어달라고 조르면
“요기까지 오면 업어주지~”하고 골목길에서 놀려주던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삼랑진 극장에 걸리곤 했던 옛날 영화들을 같이 구경하고,
처녀시절 엄마가 편물 일을 하던 방으로
모여들던 동네 친구들 이야기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야했던 동상이 고모 집에 사는 호야라는 사촌 오빠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속에 삼랑진은 한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무척 친근하고 가보고싶은 곳이 되었던 것이다.







바빴던 날들이 지나고 지나
엄마는 46년만에 다시 삼랑진에 도착하셨다.
김해에 사시는 막내 이모와 이모부가 오셔서 엄마의 삼랑진 여행에 동행해주셨다.

먼길을 차로 달려와 지친 아이들과 아빠는 삼랑진 트윈터널을 구경하며 좀 쉬고 계시기로 하고
엄마와 오빠, 나만 삼랑진 읍내로 가서
이모와 이모부를 만났다.

엄마가 처음 살았던 집, 그리고 나중에 좀더 커서 처녀때까지 살았던 집터들을
이제는 많이 달라진 거리에서도 다행히 방향을 찾아 가볼 수 있었다.
옛 집들은 헐리고 그 자리에 이제는 큰 건물과 창고 등이 서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는 그 공간들에 깃들어있는 어린날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시지 않았을까.

엄마와 이모, 삼촌들이 모두 다녔던 삼랑진 초등학교도 찾아가보았다.
학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고,
운동장 조회대 옆의 나무는 큰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있었다.
60년 넘는 시간을 지킨 나무.







아침에 원주터미널에서 만나 우리차를 함께 타고 삼랑진까지 오는 동안
엄마는 삼랑진에 살던 시절의 추억들을 여럿 더 이야기해 주셨는데
그중에는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았다.
젊었을때 외할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며
책읽기를 좋아하셨던 자그마하고 예쁜 엄마의 할머니 이야기도 그랬다.
엄마의 할머니시니 내게는 외증조할머니가 되시는 할머니는
본래 유복한 집에서 자라셔서 글을 배웠고 책을 좋아하셨다고 했다.
가끔 친척이나 이웃 할머니들이 모이시면 할머니가 읽어주는 옛소설(흥부전이나 심청전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들을 재미나게 듣곤 하셨단다.
할머니가 가끔 시골에 있는 큰 기와집인 친정에 가실때면 엄마를 꼭 데리고 가셨는데
며칠 동안 할머니의 동생이 살고있는 시골 집에서 재미나게 지내고 오곤 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9. 7. 24. 10:46



​​





엄마에게 삼랑진은 그 분들과 함께 한 공간이었다.
어디를 간다는 것은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 그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추억을,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이 된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웃들, 친구들은 지금은 거의 모두 삼랑진을 떠났다.
외할머니와 삼촌들은 대구와 울산에 계시고 이모는 김해에, 친구들은 전국 각지에..
엄마가 찾아볼만한 이웃 아주머니 한분 댁을 이모와 여러번 골목을 오고간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50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 엄마는 할머니를 알아보았고, 할머니도 엄마와 이모를 알아보셨다.
모두 잘 지내고 있으니 고맙다고, 이렇게 보니 참 좋다고, 앞으로도 건강히 잘 지내라고 서로서로 손을 잡아주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엄마는 다음날 대구 외할머니를 만나 이 아주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하고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삼랑진에 함께 살았던 친지들과 이웃들의 근황을 아는대로 엄마에게 이야기해주셨다.
두 분이 한참 이야기나누는 것을 들으며
우리들의 삶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누렸던 사람들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와 헤어져 우리는 오일장이 서 있는 삼랑진 읍내를 걸었다.
오십년 전에 큰이모가 결혼식을 올렸던 삼랑진 극장이 지금은 사우나 있는 쇼핑상가로 변해있었다.
이모는 삼랑진 장에서 딸기를 두바구니 사서 각자의 손주들에게 먹이자며 한바구니씩 나누셨다.
자매는 각자의 손주들에게 주는 어린이날 용돈 봉투도 사이좋게 주고받았다.






오십년 전 이 길을 걸을때 소녀이고 처녀였을 이모와 엄마의 뒷모습.
저 방향에는 누구네 집이, 저쪽 들판에는 어디로 가는 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나누는 두분을 보며
이 공간에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나도 두 분과 함께 있어보았다는 사실이 고맙고 좋았다.

엄마와 이모는 어떠셨을까.
오십년 세월이 잠깐인 것 같으셨을까.








삼랑진 여행을 마치고 삼랑진 트윈터널에서 놀며 우리를 기다렸던 아이들과 아빠를 만나 숙소로 왔다.
대구 팔공산 근처에 있는 느티나무펜션이란 독채펜션을 빌렸는데
어른들도, 아이들도 아주 편안하게 잘 쉴 수 있었다.
아침밥도 펜션에 붙어있는 느티나무식당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신 백반을 맛있게 잘 먹었다.


아침 먹고는 팔동산 동화사를 한바퀴 천천히 돌아보고
대구 외할머니 댁으로 가서
할머니와 큰 외삼촌, 막내 외삼촌 부부를 만나
점심을 함께 먹고 다시 원주로 향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8. 8. 29. 14:46


식당을 한다면 어떨까.
작은 가게, 맛있는 음식, 좋은 음악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창문.

제주를 여행하면서 어딘가 들어갔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바다가, 아주 작은 창으로라도
천연스럽게 앉아있는 바다가 보이면
순간 뭉클해지곤 했다.

우리가 대학시절에 조금 알던 분이 ‘달물’과 한 동네(월정리)에 닭곰탕 식당을 여셨는데
아주 맛있다고 광호가 말해주어서 찾아갔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살짝 화려한 식당을 예상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장식된 카페같은 느낌이거나 크고 널찍한.. 닭곰탕집?
내 기억속의 그 분이 참 도회적이고 멋진 이미지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이름과 얼굴만 알고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월정 곰닭>.
작고 깔끔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빈 테이블에 앉아 선배는 책을 읽고 있고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다른 테이블에서 코바늘로 하얀 레이스를 뜨고 계셨다.
<혼자를 기르는 법> 선배가 읽던 책 제목과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온 시간만큼 사람들은 달라지고
나는 17년의 시간을 그녀에게서 본다.
그 분은 나를 모를줄 알았는데 오며가며 얼굴이 익었던지 “얼굴보니 알겠다”고 하셔서
우리는 17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멋적고도 반갑게 웃음을 나누었다.

월정리에 일주일 머무는 동안
세 번의 저녁을 <월정 곰닭>에서 먹었다.
국물이 정말 맛있고, 부드러운 닭고기살이 넉넉히 들어있는 푸짐한 닭곰탕과 닭칼국수 대접을 앞에 놓고
종일 물놀이를 하고 허기진 아이들은 꿀맛같은 국수와 밥을 호호 불어 후룩후룩 들이켰다.

즐겁지만 고단한 여행지에서
아는 분이 정성스레 차려준 따뜻한 집밥을, 든든한 여름 보양식을
내 아이들과 내가 고맙게 받아먹는 기분이었다.







내가 집에서 저녁을 차리며 듣는 라디오 방송인 ‘세상의 모든 음악’이
<월정 곰닭>의 저녁에도 흘렀다. ​
작은 책장에는 문학 관련 잡지가 몇권 꽂혀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한 손님이 “아주머니~!”하고 선배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앉아있던 내 등이 움찔했다.
뭔가 무안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불릴 나이야. 세상이 그렇게 불러.. 내가 일을 한다면, 아니 낯선 이를 만나면 나도 이렇게 불릴 일이야..’
그 손님이 다음 번에는 “사장님~”하고 불러서 울컥했던 마음이 조금은 잦아들었지만
사십대 초반, 아직은 익숙치 않은 호칭과 함께
불현듯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중년의 삶과
멀리도 떠나온 이십대 청춘의 날들이
아득하고도 묵직하게 마음을 눌렀다.

“겨울에 또 놀러올 수 있으면 와~” 하는 선배의 말에 나는 웃으며 “네”하고 대답했다.
겨울에 제주에 또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종종 저녁밥을 차리며 <월정곰닭>을 생각할 것이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리는 작은 창문밖의 바다와
20대에도 용감했고 지금도 용감해보이는 선배를 생각할 것이다.
갑자기 만나 내 몸과 마음을 뜨끈한 위로로 채워주었던 담백하고 정갈한 닭곰탕 국물과 함께.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8. 8. 14. 11:42

​​

‘달에 물들다’ 게스트하우스의 조식을 먹는 식당이자 휴게실인 ‘작은달 식당’에 앉아있으면
긴 탁자가 있는 데크와 마당의 풀꽃들, 빨래줄에 걸린 빨래들 그리고 마을의 낮은 지붕들과 하늘이 보인다.
좋은 노래가 항상 흐른다.

그림그리는 것을 내가 왜 좋아할까..
이 그림을 그리다 알았다.
생각들이 아주 편하게 흘러갔다.
떠올랐다가 깊어졌다가 나름의 결론을 얻고 돌아갔다.
그리고 잠깐씩은 아무 생각도 들지않았고
음악이 참 좋아서 뭉클했다가
또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림은 내가 아주 편안하게 생각을 하거나
그 생각을 관찰하거나
아무 생각도 들지않게 해주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던 것이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광호와 수지가 수련하는 요가 수업에 두 번 함께 갔다.
7층 건물의 통유리와 통거울로 둘러싸인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적 요소를 강조하며 진행하는 내 요가수업과 다르게
돌담으로 둘러싸인 제주도 마을안에 자리잡은 작은 집안의 요가 수련장에서는
호흡과 명상에 중점을 둔 요가를 해볼 수 있었다.

광호가 달물에서 진행하는 ‘수지에니어그램’프로그램에도 참가했다.
나를 찾는 여행, 나를 돌아보는 시간, 지친 나를 다독여주는 친구의 이야기, 내 얘기를 깊이 공감해주는 친구들에게 솔직히 오래오래 얘기하기.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구름끝의 선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 것은 내 시선의 한계, 끝이란 걸 알았다.
지평선, 수평선처럼 내 눈에 보이는 구름의 끝.
지구는 둥글고 내 시선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다.

뭔가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내 생각, 내 시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
오히려 그 뒤의 끝없는 세계, 더 많이 존재할 풍부함에 대해 믿을 수 있게 해줘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삶은 신비로울 것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8. 8. 13. 11:40




제주에 가기전에 나는 좀 많이 우울해하고 있었다.

나이든다는 것이 슬프고, 삶은 자꾸 어렵고 두렵게 느껴졌다.
크고 작은 일들이 힘에 부쳤다.

월정리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언제 봐도 곱지만 유난히 잔잔하고 푸르고 반찍이는 날도 있다.
아이들과 처음 바다에 간 날이 그랬다.
예뻐서 행복했다.
파도을 맞으며 물 속에 앉아있는데
파도처럼, 삶에서 닥치는 여러 일들도 그렇게 맞고 넘겨야겠다는 담담한 용기 같은 것이
마음안에 천천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월정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가 여름이면 그 바다와 제주와 그 친구들 속에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달에 물들다’ 스쟈와 널븐. 예쁜 아이들 봄이와 원이.

제주에서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나는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고 단단해져서 돌아온 것같다.




여름이, 한낮의 열기는 아직 뜨겁지만
절정은 지난 것 같다.
덜 무섭고, 더 견딜만하게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나도 조금더 깊어져보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8. 8. 7. 12:04



여름, 다시 제주에 왔다.
친구들을 만나고 쉬고 행복해지려고.
그림을 그리고.



나는 연제를 그리고 연제는 나를 그렸다.







비행기 창문으로 본 구름 풍경.
참 신기하다. 구름들 저 끝에 존재하는 경계선.
내가 살고있는 세계를 손바닥만하게 내려다볼때의 마음.

떠나서 좋다.
잠시 떨어져서 볼 수 있어서.
한 숨 돌리고, 한 템포 끊고
멈춰서 생각할 수 있어서.
바다가 보이는 동네에 와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8. 7. 28. 20:05

어린 아기들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다보니
동네를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다.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거리 안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거나 잠깐이라도 버스를 타고 앉아있으면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낯선 차림의 사람들 속에 섞이게 되는 것이
멀리 여행이라도 떠난듯 신기하고
정겨운 감정이 들게 한다.





지하철을 타고 꽤 한참 갔던 봄 어느날,
일곱살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베낭을 메고 장화를 단단히 챙겨신고 지하철여행에 나선 듯한 어떤 엄마를 보고 그렸다.

오늘은 아이들과 기차를 타고
내가 나고자란 고향도시로 간다.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설레어왔다.
맞아.. 삶은 설레어야 하는 것이지..!
오랫만에 두려움을 이겨내는 설레임이 느껴졌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꽉 붙잡고 있는 단단한 두려움을 뚫고나올
작은 새싹같은 설레임을 찾기 위해서.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