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들'에 해당되는 글 61건

  1. 2019.07.28 삼랑진 여행 3
  2. 2019.07.27 삼랑진 여행 1
  3. 2019.07.24 삼랑진 여행 2 (2)
  4. 2018.08.29 식당을 한다면 (4)
  5. 2018.08.14 제주에서 그림 2 (2)
  6. 2018.08.13 제주에서 그림 1 (2)
  7. 2018.08.07 제주 여행
  8. 2018.07.28 여행
  9. 2018.02.02 할머니 안녕 (2)
  10. 2017.10.12 지난 여름
여행하는 나무들2019.07.28 12:36



5월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두 달이나 묵혀서야 썼다.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도 조금 했고, 생활에 쫒겨 시간을 못 내기도 했다.
짧은 글들은 간간히 썼지만 내 나름대로 좀 정리를 해가며 길게 쓰고싶은 이 여행기는 시작이 쉽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하루하루는 어렵게, 때론 수월하게 버티고 애써가며 그저그렇게 지나가는 것 같은데
그 시간들을 모아서 몇 년, 몇 십년의 단위로 묶어놓고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자신을 이루어왔는지가 보인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그림을 이루는 모자이크 처럼.
그리고 그 그림은 계속 그려진다.
바로 오늘도.

엄마 주위에 우리가 모두 모여 동화사에서 사진을 찍은 그 날에
나는 엄마의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엄마라는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한 조각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삼랑진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수였던 젊은 외할아버지와 책읽기를 좋아하셨던 외증조할머니,
장에 왔다가 무시로 들리시는 친지와 이웃 할머니들을 위해
큰 냄비에 수제비나 죽을 끓이다 한명 더 오면 물 한바가지 더 부으며
“점심 자시고 가시소~”하던 외할머니의 젊은 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잘 하시고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하시는 울 엄마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자란 것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엄마는 씩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과 함께 자신이 자란 곳에서 멀리 떠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강릉이라는 낯선 곳에서 우리들을 키우며 보여준 엄마의 여러 모습들을 생각할때
엄마가 만들어온 엄마 자신의 그림은 씩씩한 사람인 것 같다.
작은 몸에 깃든 씩씩한 마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나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이야기라는 가지를 넓게 펼쳐가며 오늘도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을 것이다.

엄마의 언니인 서울 이모께서 “아고~ 나도 삼랑진에 한번 가보고싶다!”고 하셨다는 얘기를 여행하며 많이 들었다.
다음에는 큰이모도 함께, 강릉 언니도 함께, 외삼촌들도 함께 삼랑진 골목을 또 걸어봐도 좋겠다.
우리가 나무라면
가끔은 자기가 출발했던 곳, 자기 뿌리를 한번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그리고 또 오늘의 가지를 뻗어가는 것이다.











우리 품에 깃든 고운 생명들을 보듬어가며.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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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들2019.07.27 14:14





날이 좋았던 지난 5월,
엄마아빠를 모시고 오빠네 가족과 함께 삼랑진 여행을 다녀왔다.

삼랑진은 엄마의 고향이다.
1948년 삼랑진에서 태어난 엄마는 스물일곱살이던 1974년에 아빠와 결혼해 강릉으로 시집오실때까지 삼랑진에서 살았다.

엄마가 결혼하고 얼마후에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은 모두 대구로 이사를 하셨다.
그래서 삼랑진은 엄마의 유년시절과 처녀시절의 추억이 많이 깃든 곳이지만
찾아가보기는 어려운 곳이 되었다.

강릉에서 대구 외가까지도 먼 길이거니와
외할아버지 제사같은 가족 행사나 우리들의 외가나들이로 대구에 한번 간다고 해도
꽤 멀리 떨어진 삼랑진까지 일부러 가게는 잘 안되어서
엄마는 결혼후로 삼랑진에 한번도 못 가보셨다.

우리는 삼랑진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엄마의 옛날 이야기를 좋아했던 우리들은
삼랑진 역 근처 읍내에서 종묘상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이야기,
엄마의 동네 친구들 집에 가서 만화책 보며 놀던 이야기,
아직 어렸던 막내 외삼촌이 업어달라고 조르면
“요기까지 오면 업어주지~”하고 골목길에서 놀려주던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삼랑진 극장에 걸리곤 했던 옛날 영화들을 같이 구경하고,
처녀시절 엄마가 편물 일을 하던 방으로
모여들던 동네 친구들 이야기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야했던 동상이 고모 집에 사는 호야라는 사촌 오빠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속에 삼랑진은 한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무척 친근하고 가보고싶은 곳이 되었던 것이다.







바빴던 날들이 지나고 지나
엄마는 46년만에 다시 삼랑진에 도착하셨다.
김해에 사시는 막내 이모와 이모부가 오셔서 엄마의 삼랑진 여행에 동행해주셨다.

먼길을 차로 달려와 지친 아이들과 아빠는 삼랑진 트윈터널을 구경하며 좀 쉬고 계시기로 하고
엄마와 오빠, 나만 삼랑진 읍내로 가서
이모와 이모부를 만났다.

엄마가 처음 살았던 집, 그리고 나중에 좀더 커서 처녀때까지 살았던 집터들을
이제는 많이 달라진 거리에서도 다행히 방향을 찾아 가볼 수 있었다.
옛 집들은 헐리고 그 자리에 이제는 큰 건물과 창고 등이 서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는 그 공간들에 깃들어있는 어린날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시지 않았을까.

엄마와 이모, 삼촌들이 모두 다녔던 삼랑진 초등학교도 찾아가보았다.
학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고,
운동장 조회대 옆의 나무는 큰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있었다.
60년 넘는 시간을 지킨 나무.







아침에 원주터미널에서 만나 우리차를 함께 타고 삼랑진까지 오는 동안
엄마는 삼랑진에 살던 시절의 추억들을 여럿 더 이야기해 주셨는데
그중에는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았다.
젊었을때 외할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며
책읽기를 좋아하셨던 자그마하고 예쁜 엄마의 할머니 이야기도 그랬다.
엄마의 할머니시니 내게는 외증조할머니가 되시는 할머니는
본래 유복한 집에서 자라셔서 글을 배웠고 책을 좋아하셨다고 했다.
가끔 친척이나 이웃 할머니들이 모이시면 할머니가 읽어주는 옛소설(흥부전이나 심청전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들을 재미나게 듣곤 하셨단다.
할머니가 가끔 시골에 있는 큰 기와집인 친정에 가실때면 엄마를 꼭 데리고 가셨는데
며칠 동안 할머니의 동생이 살고있는 시골 집에서 재미나게 지내고 오곤 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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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들2019.07.24 10:46



​​





엄마에게 삼랑진은 그 분들과 함께 한 공간이었다.
어디를 간다는 것은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 그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추억을,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이 된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웃들, 친구들은 지금은 거의 모두 삼랑진을 떠났다.
외할머니와 삼촌들은 대구와 울산에 계시고 이모는 김해에, 친구들은 전국 각지에..
엄마가 찾아볼만한 이웃 아주머니 한분 댁을 이모와 여러번 골목을 오고간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50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 엄마는 할머니를 알아보았고, 할머니도 엄마와 이모를 알아보셨다.
모두 잘 지내고 있으니 고맙다고, 이렇게 보니 참 좋다고, 앞으로도 건강히 잘 지내라고 서로서로 손을 잡아주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엄마는 다음날 대구 외할머니를 만나 이 아주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하고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삼랑진에 함께 살았던 친지들과 이웃들의 근황을 아는대로 엄마에게 이야기해주셨다.
두 분이 한참 이야기나누는 것을 들으며
우리들의 삶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누렸던 사람들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와 헤어져 우리는 오일장이 서 있는 삼랑진 읍내를 걸었다.
오십년 전에 큰이모가 결혼식을 올렸던 삼랑진 극장이 지금은 사우나 있는 쇼핑상가로 변해있었다.
이모는 삼랑진 장에서 딸기를 두바구니 사서 각자의 손주들에게 먹이자며 한바구니씩 나누셨다.
자매는 각자의 손주들에게 주는 어린이날 용돈 봉투도 사이좋게 주고받았다.






오십년 전 이 길을 걸을때 소녀이고 처녀였을 이모와 엄마의 뒷모습.
저 방향에는 누구네 집이, 저쪽 들판에는 어디로 가는 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나누는 두분을 보며
이 공간에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나도 두 분과 함께 있어보았다는 사실이 고맙고 좋았다.

엄마와 이모는 어떠셨을까.
오십년 세월이 잠깐인 것 같으셨을까.








삼랑진 여행을 마치고 삼랑진 트윈터널에서 놀며 우리를 기다렸던 아이들과 아빠를 만나 숙소로 왔다.
대구 팔공산 근처에 있는 느티나무펜션이란 독채펜션을 빌렸는데
어른들도, 아이들도 아주 편안하게 잘 쉴 수 있었다.
아침밥도 펜션에 붙어있는 느티나무식당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신 백반을 맛있게 잘 먹었다.


아침 먹고는 팔동산 동화사를 한바퀴 천천히 돌아보고
대구 외할머니 댁으로 가서
할머니와 큰 외삼촌, 막내 외삼촌 부부를 만나
점심을 함께 먹고 다시 원주로 향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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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

    안녕하세요
    혹시 팬션 예약은 어디서 하셨는지 알 수 잇을까요?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

    2019.08.20 21:37 [ ADDR : EDIT/ DEL : REPLY ]
    • 느티나무펜션은 블로그 후기 검색(팔공산 근처 독채펜션 정도 검색어로)해보시면 사장님 연락처가 나온게 있어서 저도 그거보고 연락드렸어요. 1박에 40~45만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은 사장님과 통화해보셔야할 것같아요. ^^;

      2019.08.20 21:46 신고 [ ADDR : EDIT/ DEL ]

여행하는 나무들2018.08.29 14:46


식당을 한다면 어떨까.
작은 가게, 맛있는 음식, 좋은 음악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창문.

제주를 여행하면서 어딘가 들어갔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바다가, 아주 작은 창으로라도
천연스럽게 앉아있는 바다가 보이면
순간 뭉클해지곤 했다.

우리가 대학시절에 조금 알던 분이 ‘달물’과 한 동네(월정리)에 닭곰탕 식당을 여셨는데
아주 맛있다고 광호가 말해주어서 찾아갔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살짝 화려한 식당을 예상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장식된 카페같은 느낌이거나 크고 널찍한.. 닭곰탕집?
내 기억속의 그 분이 참 도회적이고 멋진 이미지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이름과 얼굴만 알고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월정 곰닭>.
작고 깔끔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빈 테이블에 앉아 선배는 책을 읽고 있고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다른 테이블에서 코바늘로 하얀 레이스를 뜨고 계셨다.
<혼자를 기르는 법> 선배가 읽던 책 제목과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온 시간만큼 사람들은 달라지고
나는 17년의 시간을 그녀에게서 본다.
그 분은 나를 모를줄 알았는데 오며가며 얼굴이 익었던지 “얼굴보니 알겠다”고 하셔서
우리는 17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멋적고도 반갑게 웃음을 나누었다.

월정리에 일주일 머무는 동안
세 번의 저녁을 <월정 곰닭>에서 먹었다.
국물이 정말 맛있고, 부드러운 닭고기살이 넉넉히 들어있는 푸짐한 닭곰탕과 닭칼국수 대접을 앞에 놓고
종일 물놀이를 하고 허기진 아이들은 꿀맛같은 국수와 밥을 호호 불어 후룩후룩 들이켰다.

즐겁지만 고단한 여행지에서
아는 분이 정성스레 차려준 따뜻한 집밥을, 든든한 여름 보양식을
내 아이들과 내가 고맙게 받아먹는 기분이었다.







내가 집에서 저녁을 차리며 듣는 라디오 방송인 ‘세상의 모든 음악’이
<월정 곰닭>의 저녁에도 흘렀다. ​
작은 책장에는 문학 관련 잡지가 몇권 꽂혀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한 손님이 “아주머니~!”하고 선배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앉아있던 내 등이 움찔했다.
뭔가 무안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불릴 나이야. 세상이 그렇게 불러.. 내가 일을 한다면, 아니 낯선 이를 만나면 나도 이렇게 불릴 일이야..’
그 손님이 다음 번에는 “사장님~”하고 불러서 울컥했던 마음이 조금은 잦아들었지만
사십대 초반, 아직은 익숙치 않은 호칭과 함께
불현듯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중년의 삶과
멀리도 떠나온 이십대 청춘의 날들이
아득하고도 묵직하게 마음을 눌렀다.

“겨울에 또 놀러올 수 있으면 와~” 하는 선배의 말에 나는 웃으며 “네”하고 대답했다.
겨울에 제주에 또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종종 저녁밥을 차리며 <월정곰닭>을 생각할 것이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리는 작은 창문밖의 바다와
20대에도 용감했고 지금도 용감해보이는 선배를 생각할 것이다.
갑자기 만나 내 몸과 마음을 뜨끈한 위로로 채워주었던 담백하고 정갈한 닭곰탕 국물과 함께.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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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쟈

    언니~~ 일년 사이에 언니의 그림이 더 진해지고 커졌네요! 오래 자세히 보고싶게 만드는, 재미까지 있는 그림이예요~ 또 일년 후가 기대돼요!!♡

    2018.09.17 22:40 [ ADDR : EDIT/ DEL : REPLY ]
    • 고마워 스쟈~^^ 그림이 달라지는구나.. 일년 단위로 한번씩 생각해봐도 좋겠다! 내년 여름까지 화이팅해볼께~^^ 가끔씩, 잠깐씩 짬을 내서 그리곤하는 그림이지만 참 재미있어.. 스쟈의 그림도 참 좋은데(나보다 훨 잘 그리고!) 종종 그려서 올려줘~

      2018.09.20 13:17 신고 [ ADDR : EDIT/ DEL ]
  2. 비밀댓글입니다

    2018.09.17 22:41 [ ADDR : EDIT/ DEL : REPLY ]

여행하는 나무들2018.08.14 11:42

​​

‘달에 물들다’ 게스트하우스의 조식을 먹는 식당이자 휴게실인 ‘작은달 식당’에 앉아있으면
긴 탁자가 있는 데크와 마당의 풀꽃들, 빨래줄에 걸린 빨래들 그리고 마을의 낮은 지붕들과 하늘이 보인다.
좋은 노래가 항상 흐른다.

그림그리는 것을 내가 왜 좋아할까..
이 그림을 그리다 알았다.
생각들이 아주 편하게 흘러갔다.
떠올랐다가 깊어졌다가 나름의 결론을 얻고 돌아갔다.
그리고 잠깐씩은 아무 생각도 들지않았고
음악이 참 좋아서 뭉클했다가
또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림은 내가 아주 편안하게 생각을 하거나
그 생각을 관찰하거나
아무 생각도 들지않게 해주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던 것이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광호와 수지가 수련하는 요가 수업에 두 번 함께 갔다.
7층 건물의 통유리와 통거울로 둘러싸인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적 요소를 강조하며 진행하는 내 요가수업과 다르게
돌담으로 둘러싸인 제주도 마을안에 자리잡은 작은 집안의 요가 수련장에서는
호흡과 명상에 중점을 둔 요가를 해볼 수 있었다.

광호가 달물에서 진행하는 ‘수지에니어그램’프로그램에도 참가했다.
나를 찾는 여행, 나를 돌아보는 시간, 지친 나를 다독여주는 친구의 이야기, 내 얘기를 깊이 공감해주는 친구들에게 솔직히 오래오래 얘기하기.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구름끝의 선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 것은 내 시선의 한계, 끝이란 걸 알았다.
지평선, 수평선처럼 내 눈에 보이는 구름의 끝.
지구는 둥글고 내 시선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다.

뭔가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내 생각, 내 시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
오히려 그 뒤의 끝없는 세계, 더 많이 존재할 풍부함에 대해 믿을 수 있게 해줘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삶은 신비로울 것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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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여사

    이런 멋진 그림이라니....

    이렇게나 멋진 여행이라니.....


    멋짐이 폭팔하는구랴.


    제주가 품어준 좋은기운으로 멋진 가을 맞이해요.

    2018.08.25 13:30 [ ADDR : EDIT/ DEL : REPLY ]
    • 아고~~ 언니, 부끄러움이 폭발하네요~ㅠㅠ 사실 제대로 하는 건 참 없지만... 그래도 너무 좌절은 하지말고 살려고요. 으쌰으쌰! 부디 가을에는 좀 더 차분히, 찬찬히.. 제발 조끔 더 멋져지길요. ^^

      2018.08.27 11:37 신고 [ ADDR : EDIT/ DEL ]

여행하는 나무들2018.08.13 11:40




제주에 가기전에 나는 좀 많이 우울해하고 있었다.

나이든다는 것이 슬프고, 삶은 자꾸 어렵고 두렵게 느껴졌다.
크고 작은 일들이 힘에 부쳤다.

월정리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언제 봐도 곱지만 유난히 잔잔하고 푸르고 반찍이는 날도 있다.
아이들과 처음 바다에 간 날이 그랬다.
예뻐서 행복했다.
파도을 맞으며 물 속에 앉아있는데
파도처럼, 삶에서 닥치는 여러 일들도 그렇게 맞고 넘겨야겠다는 담담한 용기 같은 것이
마음안에 천천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월정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가 여름이면 그 바다와 제주와 그 친구들 속에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달에 물들다’ 스쟈와 널븐. 예쁜 아이들 봄이와 원이.

제주에서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나는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고 단단해져서 돌아온 것같다.




여름이, 한낮의 열기는 아직 뜨겁지만
절정은 지난 것 같다.
덜 무섭고, 더 견딜만하게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나도 조금더 깊어져보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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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살림하는사람

    아....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다니!! 욱이의 그림, 그냥 위로가 되네. 고마워!!

    2018.08.21 21:38 [ ADDR : EDIT/ DEL : REPLY ]
    • 언니 말을 들으니 차곡차곡.. 그림을 그리고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온 것 같아 왠지 안심이 돼요. 감사해요~~ 가을에 뵈요. ^^

      2018.08.23 22:10 신고 [ ADDR : EDIT/ DEL ]

여행하는 나무들2018.08.07 12:04



여름, 다시 제주에 왔다.
친구들을 만나고 쉬고 행복해지려고.
그림을 그리고.



나는 연제를 그리고 연제는 나를 그렸다.







비행기 창문으로 본 구름 풍경.
참 신기하다. 구름들 저 끝에 존재하는 경계선.
내가 살고있는 세계를 손바닥만하게 내려다볼때의 마음.

떠나서 좋다.
잠시 떨어져서 볼 수 있어서.
한 숨 돌리고, 한 템포 끊고
멈춰서 생각할 수 있어서.
바다가 보이는 동네에 와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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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들2018.07.28 20:05

어린 아기들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다보니
동네를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다.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거리 안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거나 잠깐이라도 버스를 타고 앉아있으면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낯선 차림의 사람들 속에 섞이게 되는 것이
멀리 여행이라도 떠난듯 신기하고
정겨운 감정이 들게 한다.





지하철을 타고 꽤 한참 갔던 봄 어느날,
일곱살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베낭을 메고 장화를 단단히 챙겨신고 지하철여행에 나선 듯한 어떤 엄마를 보고 그렸다.

오늘은 아이들과 기차를 타고
내가 나고자란 고향도시로 간다.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설레어왔다.
맞아.. 삶은 설레어야 하는 것이지..!
오랫만에 두려움을 이겨내는 설레임이 느껴졌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꽉 붙잡고 있는 단단한 두려움을 뚫고나올
작은 새싹같은 설레임을 찾기 위해서.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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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2017년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겨울답지않게 햇살이 참 따뜻하고 포근한 날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길에 본 산자락에는 하얀 눈들이 덮여있었고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며칠 전까지의 매서운 추위가 잠시 한숨 고르는 듯 포근하고 아름다운 날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아프셨던 가을 동안 나는 가끔 할머니 생각을 하며 목이 메이곤 했다. 

가을이 깊어가며 날이 추워질때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보내고 떨면서 들어올 때는 

'병원에 계신 할머니는 이 추위를 모르시겠구나.. 날이 추워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도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할머니가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평생을 몸으로 느껴온 계절이 오고 가는 것, 시절의 변화에 따라 해야하는 크고작은 생활의 단도리들.. 이런 것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슬펐다. 


정 호자 원자, 정호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우리 할머니는 아흔두해를 사셨다. 

1925년, 강릉에서 가까운 주문진 행호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여덟살에 결혼해 모두 여섯명의 자녀를 두셨다.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은 갓난아기일때 잃은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 자라서 할머니 곁을 오래오래 지켰다. 많은 손주손녀들의 결혼과 증손주들까지 기쁘게 맞아주시고 생애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셔주셨다. 


바닷가가 멀지않은 농촌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일본어로 수업하던 소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할머니의 남자형제들이 모두 청소년기가 되자 서울로 가서 혜화동에 집을 마련하고 공부할 때, 할머니의 부모님은 할머니도 그 집에 가서 같이 지내기를 바라셨는데 할머니는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때 서울에 가지않은 것을 두고 할머니는 그 때 나이많은 친척 조카가 '고모는 천치야, 나같으면 당장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며 조금 후회스럽게 말씀하셨었다. 

어릴때 들은 그 얘기를 나는 자라서 가끔 혼자 생각해보곤 했었다. 할머니가 그때 서울에 가셨더라면 이화학당이나 연희전문 같은 곳을 다니셨을까.. 그럼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신여성이나 지식인이 되었을 수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때니 어려움을 겪을셨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할머니의 인생은 무척이나 달라지셨겠지..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버지를 낳고 우리들의 할머니가 되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니 가보지못한 할머니의 '신여성'으로서의 멋진 삶이 왠지 아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안도하게 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일찍 결혼을 하셨다. 우리 할아버지의 살림은 그당시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본래 땅과 재산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일제 초기에 토지 개간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땅을 모두 잃었다고 작은할아버지께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던 증조할아버지를 손목에 매를 앉혀서 다니시던 늠름하고 멋스러운 분으로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재력가였던 증조할아버지는 강릉의 이름난 부잣집이었던 강릉 최씨 '가매집'의 따님과 결혼했다. 평생 단정하고 고운 하얀 한복에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지내셨던 우리 증조할머니는 이 가매집의 이름난 수재였던 최장집 교수님의 고모이시기도 하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땅도 많이 잃어 살림이 어려울 때였는데 '가매집 외손'이라는 타이틀로 중신(중매)을 넣었었다고 할머니는 회고하셨다. 나는 대학원을 다닐때 최 교수님의 민주주의 관련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분은 나를 모르시지만 나는 생전에 나와 늘 가깝게 지내셨던 증조할머니의 조카분이라는 사실때문에 괜시리 큰 친근감을 느끼곤 했다. 


결혼 초기 살림은 어렵고, 시동생들도 많고, 할아버지는 지역신문 기자일과 청년단체 활동으로 바쁘셨던 때에 할머니는 첫아이로 우리 아빠를 해방이 되던 1945년에 낳으셨다.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할머니는 어린 아기를 업고 아빠의 손목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셨는데 그 길에서 어린 둘째를 잃으셨다. 피난 떠나기 얼마전, 할머니의 친정 아버지께서 잠시 딸을 찾아오셔서 만나보고 가셨다는데, 그때 제일 큰 시동생인 우리 작은할아버지께 '자네가 이 집에서 제일 중요하네. 부디 잘 도와주게' 당부하셨던 것을 작은할아버지는 오래 기억하셨고 내게 이야기해주셨었다. 나는 만나본 적이 없는 아빠의 외할아버지. 어떤 분이셨을까. 할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오래동안 못 만났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셨을까. 시어머니와 남편도 만나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자유롭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무척 가부장적인 분이셨고 화도 잘 내셔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지내셨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시게 된다면 할머니가 더 당당하게 씩씩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부모님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노년에 가깝게 지내셨던 인쇄소집 할머니와도 다시 만나 좋아하시는 화투도 재미있게 치시면서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목소리가 참 예쁜 분이셨다. 살짝 장난기가 어린 것 같은 반짝이는 눈을 갖고 계셨고 얌전하고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할머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정말 재미있게 옛날 얘기를 잘 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매일 밤 할머니 곁에 누워 깔깔깔 웃다가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만 더 해줘~ 하나만~~" 하고 졸랐었다.

지금도 살짝 기억나는 이야기는 어떤 바보신랑이 장가들던 날 이야기. 신부집에서 처음 먹어본 가자미 식혜가 너무 맛있어서 밤에 몰래 일어나 정지(부엌)으로 가서 살금살금 식혜단지를 찾아 손을 쑥 넣었는데 그게 개똥그릇(?)이었던데다가 그만 들켜서 도망가는데 개는 쫒아오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손에 묻은 똥이 식혜인줄 알고 싹싹 핥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다는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너무 우습고 재미있었다. 

텔레비젼이 있다해도 아이들이 볼 것이 별로 없고, 밤이면 일찍 누워 모두 잠들던 시골 한옥집 사랑방에서 우리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속의 여러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긴 겨울밤을 즐겁게 보냈었다. 

사랑방 큰 창문밖으로는 밝은 보름달이 뜨고 별도 예쁘게 빛났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밤들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생고구마를 숟가락을 삭삭 긁어주시면 한 숟갈씩 돌아가며 맛있게 받아먹던 기억. 친감, 곶감, 큰 가마솥에 끓여주시던 엿, 그런 것이 어린 시절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들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잃었다. 

내가 유머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조금쯤은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건 우리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일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뒤 나는 길을 걷다가 이따금 눈물이 툭 쏟아졌다.  

며칠동안 털이 수북히 달린 패딩잠바의 모자를 덮어쓰고 저녁에 운동을 하러가면서 울었다.

할머니가 보고싶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립다. 

친정집에 가면 '욱이 왔나~'하고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실 것 같고, 한동안은 햇살이 환한 날이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원해계시던 요양병원, 그 병원에 가면 여전히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할머니를 본 날, 할머니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나에게 "욱아, 행복하게 잘 살아."하고 아파서 가늘어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할머니 말씀대로 하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늘 집과 마을회관을 오가며 정정하게 잘 지내주셔서 나는 더 오래 할머니가 우리 곁에 계실거라고만 생각했다. 조금 더 자주 뵈러가고, 할머니랑 좀더 놀껄.. 얘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랬듯이 할머니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낼껄... 그러면 할머니가 좋아하셨을거란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할머니를 참 좋아하니까.. 이제 더는 할머니와 놀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는 연수, 연호, 연제를 모두 갓난아기 시절에 많이 안아주셨다. 

팔십이 넘으셨어도 아이들을 폭 안아서 잘 재워주시곤 하셨고, 내가 어린시절에 할머니 품에서 들었을 자장가와 여러 노래들을 부르며 얼러주셨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친정에서 돌아올때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연수야, 외가에 또 와~"하고 다정하게 여러번 당부하시고, 용돈도 아이들 손에 쥐어주셨었다. 

친정집에서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때 할머니는 많이 아프셨던 때라 아이들이 인사를 하는데 꺼내줄 용돈이 옆에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게 미안하셔서 "연수야, 다음에 오면 꼭 용돈줄께. 외가에 꼭 또 와.."하셨다. 

다음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를 뵈러갔을 때 할머니는 나에게 "왜 아이들은 안 데리고왔냐.. 연수, 연호, 연제. 너희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내가 천원짜리를 따로 놔뒀는데.."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큰돈은 필요없다고 작은 동전지갑에 천원짜리 몇장만 넣어서 옆에 두고는 아이들이 오면 한 장씩 주려고하셨던 것이다. 지난 번에 용돈을 못 줬던게 마음에 걸리셔서 병원에 누우셔서도 잊지않고 챙겨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참고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올께, 할머니. 얼른 나아.."하고 대답했었다. 그때는 또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일찍 다시 갔었야했는데... 

그날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의 1층 로비까지 갔다가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들은 면역이 약해 면회가 안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지 못하고 로비에 기다리다 돌아왔다. 연호가 "난 증조할머니가 안 아픈게 좋아.. 그러면 증조할머니한테도 용돈을 받을 수 있잖아" 했다. 아이들이 외가집에 가서 증조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만원이든, 천원이든 그 돈은 증조할머니의 마음이고, 정이다. 아이들도 자라면 그 마음을 알 것이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와서 아이들 겨울 옷을 정리하다가 연제가 더 어릴때 입었던 겨울 파카를 꺼냈는데 거기에 빳빳한 새 돈 5천원짜리 두 장이 접혀서 들어있었다. 

그 돈을 보고 나는 많이 울었다. 연제가 외갓집 다녀올때 증조할머니가 주셨던 돈인 것 같아서였다. 설날 지나고 외가집에 갔을때 증조할머니가 연제에게 세배돈으로 주신 새 돈. 나는 그 돈을 잘 넣어놓고 쓰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가 찾아서 전해주신 돈같아서.


이 겨울동안 우리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은 아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엄마아빠는 언제 죽는지, 자기들은 또 언제 죽는지.. 100살까지 살거라고, 죽고나면 자기들은 다시 아이로 태어날 거라고.. 하루는 이 생각을 하고, 다음날에는 또 다른 생각이 났다며 조잘조잘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날 연호는 엄마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서 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기는 엄마의 아이로 다시 태어날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럼 되겠지, 엄마?"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얘기하며 연호의 어린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래, 그러자"하고 나도 대답하며 웃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중에 내 손녀로 다시 태어나.. 그럼 내가 재미있는 옛날 얘기 많이 해줄께. 

할머니가 늘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많이 예뻐해주고, 칭찬해주고, 대견해해줄께..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같이 놀아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할머니 안녕..!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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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래노래

    할머니 하늘에서 편안하실 것 같아요.
    거기서도.재미난 이야기꾼으로지내실 것도 같고.
    언니가 힘들 때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네요.
    그리움이 쌓이는 나이인가봐요. 이제 우리.

    2018.04.01 01:34 [ ADDR : EDIT/ DEL : REPLY ]
    • 고마워.. 고래의 마음과 글들이 내게 늘 얼마나 든든하게 기댈 곳이 되는지.
      고래 말대로 할머니가 재미있게 지내셨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귀엽게 웃으시면서..^^

      2018.04.06 10:25 신고 [ ADDR : EDIT/ DEL ]



지난 여름 친정에 갔을때
조카와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할머니방에 누워서 드라마보시는 엄마 모습을 그렸었다.
할머니는 오후에는 늘 그러셨듯이 마을회관에 놀러가시고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가 거실에서 북적거리면서 노는걸 봐주시다가
잠깐 할머니 방에서 쉬시는 참이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오후에 회관에 못가시고
할머니 방에도 매트리스와 작은 소파가 들어와
방 풍경이 바뀌었다.

그림을 그릴때만해도 바로 얼마후에 이렇게 달라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림으로만,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어떤 시절.

할머니가 조금씩이라도 부디 나으셨으면 좋겠다.
바깥 출입을 못하시는 할머니 곁을 지키며 보살펴드리고 있는 엄마도 힘내시길..!

Posted by 연신내새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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