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ma! 자란다2008. 5. 2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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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로 살아온 날들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37주로 접어드는 새댁, 이제부터는 언제 아기가 태어날지 몰라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합니다.
병원에 들고갈 가방도 다 싸놓았고, 집정리도 대략 끝났습니다.
하루가 저물때쯤에는 '아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내일도 잘 보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다음날 약속이 있거나 할 일을 이것저것 생각해놓고 있는 새댁은
'내일까지는, 아니 이번 주말까지는 똑순이가 좀더 기다려줬음 좋겠다' 내심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은 구청에서 하는 '출산준비교실'에 다녀왔습니다. 마지막 철분제도 받아왔구요.
20명 남짓한 예비엄마들만 모여앉은 강의실이 흡사 여고시절의 교실같았습니다.
어떤 분은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친구랑 분위기가 정말 비슷해서 뜬금없이 그 친구가 보고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를 탔는데 '이제 노약자석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앉는 날도 곧 끝나겠구나' 싶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임산부란걸 다 알아볼 수 있게 배가 많이 나온 7개월 이후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전에는 왠지 좀 쭈뼛거리며 찾아앉던 버스와 지하철의 노약자석.
그때는 구청에서 받은 저 사진속의 배지-'예비엄마랍니다'라고 작게 써있어요-가 잘 보이도록 가방을 무릎위에 놓고 간신히 노약자석에 앉아있다가
할아버지할머니가 제게로 오시면 얼른 자리를 양보하곤 했습니다.

임산부가 되고보니 평소엔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일들이 참 얼마나 사무치던지요.
우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저 앞 횡단보도에 불이 바뀌면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성큼성큼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너지만
저는 '다음 신호에 건너야겠다' 마음먹고 걸어오던 속도 그대로 걸어 신호등 옆에 가서 섭니다.
파란불이 좀더 깜빡거려도 건널 수는 없습니다. 제가 횡단보도를 다 건너기전에 빨간불로 바뀔테니까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마음껏 여행하는 사람들, 어디 멀리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사람들도 정말 부러웠어요.
밤새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심지어 코피흘려가며 공부하는 사람들조차 부러웠습니다.
제가 못하는 것들이니까요.
출산하고 몸이 다 회복된뒤에 '자, 이제 너도 밤새 공부하고 책읽어~'하면 분명 하기싫겠지만
아주 맛있고 향좋은 커피를 다섯잔쯤 마시고 기타 간식들을 계속 먹을수 있다고하면 혹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는 하면 안되는 일, 할 수 없는 일'이란게 생기는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어요.
다른 무엇을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하는 일은 살다보면 언제고 생기기 마련이지만
임산부 경험은 여타의 경우와 달리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들에서 포기할 것들이 생기며,
특히 그 포기가 '몸'의 변화(힘겨움)에 따른 것이란 점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잠깐이나마 '장애인'나 '노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같은 경험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배려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합니다.
따뜻한 도움을 받는 기쁨과 고마움이 있는 동시에
마음같아서는 혼자서 잘 해내면 좋겠는데 그러지못하고 누군가나 무언가의 도움을 기다려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예전같으면 혼자서도 번쩍번쩍 잘만 들던 짐도 이제는 들지 못하니
조금만 무거운 뭔가를 사거나 옮길라치면 여러번 계획을 세우고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만 할 때,
말할 수 없이 천천히 닫히는 지하철 장애인/노약자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 뻘쭘한 순간이나(천천히 닫히는 것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함께 탄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뭔가 불편한 기분이지요. 왜그럴까요...?)
한참 걸어 찾아낸 버스정류장에 앉을 의자 하나 없고 어디 기대설 곳도 마땅치 않아 어정쩡하게 서있는데
허리도 다리도 아프고 배도 살짝 뭉치는 것 같이 힘들 때,
그러다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겨우 올라탔는데 아무도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을 때..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때문에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을 느낄 때.

그래도 임산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굉장히 호의적이며, 쉽게 대화로 이어집니다.  
눈에 띄게 배가 부른 후에 경험한 큰 변화중 하나가 사람들이 제게 말을 쉽게, 많이 건네온다는 것이었어요.
남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 한국 사회, 특히 서울이란 도시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과장을 살짝 섞자면 가장 쉽게 말을 건넬 수 있는 대상이 임산부인 것 같을 정도로
많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새댁에게 말을 건네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좋은 얘기들(어머~ 몇개월이예요? 곧 낳겠네.. 힘들지요? 우리 딸도 애기낳고 키우느라 아주 고생이예요.. 등등)을 건네오시고 새댁도 기쁘게 응답합니다.
아이낳고 키우는 것이 워낙 사람의 인생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고
또 인간사에 몇 안되는 공통분모인지라 할 얘기도 많고, 생각나는 기억도 많지요.
낯선 이에게도 따뜻한 시선으로 얘기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새댁도 기쁜 마음으로 얘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장애인과 노인의 경우에는 좀 상황이 달라집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은 같지만 누구도 쉽게 그들에게 말을 걸진 않지요.
말없는 시선들이 사실 더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측은해하는 눈빛, 혹은 두려워하는 기색들.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되고 보니 그 시선에 담기는 감정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겠더라구요.
기왕이면 따뜻하고 밝은 시선을 보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시대, 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동료에게 보내는 편안한 시선을요.
상처주기 싫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주변은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럴땐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같았어요. 뭔가 그분도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이만큼 나온 제가 바로 곁에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데도 한번도 옆을 쳐다보지 않던 사람들.
기분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해코지당하기도 하는 무서운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내 주위를, 혹시 도움이나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는 관심이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하게 만들 것입니다.
 
귀찮지만 감수해야할 일도 많아집니다.
소화가 잘 안되니 체할까봐 음식도 천천히 먹어야하구요, 변비나 치질이 쉽게 생기니 하루에 한두번씩은 꼭 따뜻한 물로 좌욕도 해주어야합니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마음으로 힘을 내어 작지만 중요한 일상의 규칙들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 밖에도 가지고 있던 옷중에는 맞는 옷이 거의 없다는 것(이것도 참 신기했어요, 꽤 품이 넉넉해보이는 옷들도 임산부에게는 안맞는다는거~^^),
길을 걷다보면 뭔가 배(? 아가^^)를 위협할만한 위험한 것들이 의외로 길 곳곳에, 그리고 사람들의 움직임중에 참 많다는 것 등등
예비엄마가 되고 나서 새로 알고 느끼게 된 것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좁은 길이라도 버스정류장마다 벤치는 꼭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도 중간중간에도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았으면 좋겠구요.
길을 걸으며 흡연은 되도록 안해주심 좋겠고요...걸으며 손가락으로 탁 튀겨 담배불을 끄는 행위는 정말 공포스러웠어요-^^;;  
저상버스의 좌석이 참 안전하고 잡기 편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실감했습니다. 타고 내릴때 불안하지 않은 이 저상버스가 좀더 많이, 자주 다녔으면 좋겠어요.
노약자좌석이 아닌 곳에서도 새댁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셨던 많은 분들, 참 감사했습니다. 꾸벅~^^
나중에 새댁도 꼭 잘 양보해드릴께요.

특별했던 임산부 체험이 끝나고... 이제 곧 새댁도 다음 단계, 그러니까 젖먹이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을때의 초특급 버라이어티 리얼체험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겠지요.
참.. 또 어떤 경험들이 기다릴지.. 기대반 걱정반입니다.
아마 그때는 십중팔구 '그래도 배속에 넣고 다닐때가 편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내 몸 하나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

보너스같은 하루하루들을 무사히 잘 보내고, 똑순이와 만나야겠습니다.
똑순아, 네 덕분에 엄마가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구나. 고맙다! ^^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