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2012. 12. 6. 22:13


큰 눈 내려 세상이 하얗던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오늘부로 서른다섯해 삶을 꼭 채웠구나... 생각하니 새삼 내가 살아온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이 잊은 일도 많기도 많아서 작년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벌써 생각나지 않는다.


올해 생일은 조용히, 간소하게 잘 보냈다.

요즘은 늦잠자는 일이 많아진 아이들과 함께 나도 늦잠을 자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겨우 인사만 하고 그때 깬 연호와 둘이 책을 보며 놀았다. 

연수까지 일어난 뒤에 생일케잌을 꺼내놓고 두 아이, 아니 세 아이와 함께 내 생일케잌에 촛불을 밝혔다.

아이들 노래소리가 불빛처럼 환했다.

따뜻하고 좋은 생일아침이구나... 

케잌 잘라 신나하는 아이들 나눠주고 나는 커피 한잔 타서 케잌이랑 같이 먹는데 창밖에는 밤새 언 눈이 하얗게 빛났다.

 

점심에는 어제밤에 불려놓았던 미역 씻어서 굴넣고 굴미역국을 끓였다.  

결혼하고부터는 내 생일에 꼭 미역국을 끓인다. 엄마 생각 해서다. 

힘든 진통끝에 나를 낳고, 오늘 아침 미역국을 드셨을 우리 엄마. 그 고마운 분을 생각하며 끓이고, 먹는다. 

내가 끓였지만 참 맛있다. 밥을 말아 숟가락에 김장김치 얹어서 한그릇 잘 비웠다. 

연수는 맛있다고 '엄마, 최고~!'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어린 연호도 작은 손으로 국그릇을 야무지게도 잡고 국물을 훌훌 마셔가며 숟가락질도 열심히 했다. 

엄마 생일날, 아이들에게 미역국 한그릇 맛있게 끓여 먹일 수 있으니 좋구나.. 

케잌도 먹었고, 놀이터 나간 김에 과일가게 들러 아이들 좋아하는 포도도 사와서 먹었으니 이만하면 참 좋은 생일이었다.


어제밤에 뒤늦게 대선후보 TV토론회 동영상을 본다고 밤에 너무 늦게 자서 

오후에는 연호 잘 때 나도 낮잠을 곤하게, 오래 잤다.

요즘 연수가 엄마랑 동생 잘 때 혼자 그림책보면서 참 잘 놀아주어서 

임신8개월의 고단한 엄마는 염치없게도 혼자 노는 아이에게 고맙다, 고맙다.. 하면서 낮에 한잠씩 푹 잘 잔다.

자고 일어나면 벌써 늦은 오후, 해가 금방 지는 요즘이라 그때부터는 시간이 짧다.

아이들 그림책 좀 읽어주고, 레고도 하다가 야구도 하다가 이래저래 놀다보면 금새 껌껌해지고 

저녁먹고 양치하고 잘 시간이 된다. 

겨울의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오늘도 몸은 퍽 고단했으나 근래들어 마음은 가장 밝은 하루였다.

아이들보고도 그저 환하게 많이 웃어줄 수 있었으니 아이들도 오늘은 울 엄마가 맘이 참 좋은가보다.. 했을 것이다.

오전에 햇빛 따뜻할 때 아이들과 눈놀이하러 밖에 나갔더니 

눈치우는 아파트 관리실 직원들은 겉옷을 벗어놓고 더운 김을 후후 불어가며 가래질을 하고 계셨다.

연수는 눈산도 만들고, 눈사람도 만든다고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니고 연호와 둘이 손을 꼭 잡고 눈밭으로 변한 놀이터를 걷는데 뽀드득 뽀드득 눈밟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작년 이맘때는 6개월 남짓된 어린 아기였던지라 밖에 나올때면 늘 엄마품에 안겨있었던 연호가 

어느새 커서 제 발로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고 걸어간다. 

손잡고 걷는 나와 연호 그림자가 눈위에 길게 놓여지던 모습은 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연호에게는 처음 밟아보는, 처음 제 손으로 떠서 먹어보고 그 위에 뒹굴어보기도 하는 눈이 왔다.


어린 시절 내 생일에도 눈이 많이 온 적이 있었다.

강원도에서 많이 왔다고 하려면 한 30cm정도는 와야 하는데 내 기억에 그보다 더 많이 쏟아졌던 어느 해, 

엄마가 생일잔치 해주신다고 했는데 친구들이 눈때문에 못오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던 나는 

친구들 마중간다고 눈밭을 헤치고 걸어가다가 끝도 없는 하얀 눈속에서 잠시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럼을 타서 눈위에 쓰러졌었다.

여전히 머리가 어찔어찔한채로 푹신한 눈밭에 누워서 하얗고 큰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는 막막한 하늘을 올려다봤었지.

며칠전 '엄마, 엄마 생일에는 엄마 친구들 전부 초대할꺼지?'하고 연수가 묻는데 웃으며 '아니~'하고 대답하다가 어린날의 그 생일 생각이 났었다.

이제는 내 생일이 아니라 아이들 생일에 그렇게 아이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상 차려줄 그런 나이가 되었네.. 어느새. 


자라는 동안 엄마는 가끔 나를 '헛똑똑이'라고 야단치셨었다. 

똑똑한 것 같지만 실은 속이 빈 것처럼 야무지지 못하다고 혀도 끌끌 차시고, 나무라기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났었다.

그런데 요즘 그 말이 자주 생각나면서 '아... 내가 정말 그렇구나..' 생각한다.

서른다섯살이 되서 그런가.. 내가 어떤 사람이구나... 새삼스레 조금씩 더 알게되는 것 같다.


열정은 많지만 차분하고 야무지지 못한 내가 덜렁덜렁 좋아하는 일들에 여기저기 발을 담궈보는 동안

심사숙고해야할 일들, 더 긴 호흡으로 더 오래 밀고나갔어야했던 일들, 천천히 준비해서 시도해야했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엄벙텀벙 뛰어들고 대충대충 얼렁뚱땅 해치우며 살아왔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대가들을 살면서 늘 치루게 된다는 것도.


어린 시절에 내가 잃어버렸던 수많은 물건들처럼, 재미난 무언가에 골몰하느라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가방, 모자, 돈.. 어디 걸린줄도 모르고 신나게 뛰다가 찢어졌던 옷들, 깨진 안경.. 그것들처럼 내 삶의 시간도, 나라는 사람의 영혼도 어느 순간 살짝살짝씩 흘리고 잃어버리고 뭉그러진 것 같다.


용감하고 싶었으나 끝까지 용감하지 못했고 열정이 있었으나 그 열정을 단련하고 연마해서 무언가 빛나는 결정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던  나.

무언가 마음안에서 쫓긴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허둥대고 서두르고 되도 않는 갖은 고려들과 걱정들만 끝도 없이 키워가다가 덜컥 실수하기 일쑤인...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실은 세속의 잣대들을 내 안에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는 속물스럽고 겁많은 내가 

이제 서른다섯이다.

내년이면 세 아이의 엄마인데.. 올망졸망 이 녀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하지.

눈에 덮힌 것처럼 막막한 날들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