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들2012. 10. 23. 20:23


밤새 바람이 정말 굉장했다.
월정리 전체가 날아가버릴 것처럼 굉장한 바람이 온밤토록 창밖에서 으르렁거렸다. 이게 제주바람이구나.. 자다깨서 잠깐씩 귀기울일 때마다 생각했다.
알고보니 월정리는 바람많은 제주 중에서도 특히 바람이 강한 길목..
달물을 지나가는 제주올레 20코스의 이름이 '제주의 바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란 얘길 나중에 들었다. 월정리 바닷가에는 풍력발전기도 아주 많고, 우리나라에 한군데뿐이라는 바다위에 세워진 풍력발전기도 월정리에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바람 속에 있다. 

고단한 아이들은 다행히 아침까지 잘잤다. 5시반쯤 깨서는 그제야 바람소리를 신기해하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셋이 꼭붙어 그림책을 한참 읽다가 해뜰때쯤 휴게실로 나갔다.

아침먹고는 역시나 바람때문에 오늘 일이 취소된 깨봉삼촌과 함께 가까운 용눈이오름과 비자림을 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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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등성이에는 방목하는 제주마와 소들이 여러 마리 있었다. 
'음머, 음머~' 동물 좋아하는 연호가 소를 보고 눈이 동그레져서 반가워했고, 연수는 길가의 풀을 꺽어 "엄마, 소꼬리같지?" 하면서 제 엉덩이에 대고 졸랑졸랑 흔들었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기세좋게 올라갈만했다. ^^ 위에서 내려오시던 한 남자어른이 아이들을 보고 "애들이 날아갈지도 몰라요!" 하고 겁을 주고 가셨는데 나는 장난인줄로만 알았다. 그러기에는 그 분 표정이 대단히 진지했는데... 나중에 올라가보니 진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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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 오르면서 옆을 바라보니 멀리 제주 동쪽 바다와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보였다.







돌담으로 둘러쌓인 제주의 무덤이 연수 눈에 무척 멋있어보였나보다. 

"엄마, 나 저기서 사진 찍어줘!" 하더니 자세를 잡았다.

제주를 혼자 여행하던 처녀시절에 밭 가운데, 오름 등성이에 너무도 아무렇지않게 그 공간의 일부인듯 야트막한 돌담 하나만 두르고 포근하게 들어앉은 제주 무덤들이 내게도 참 신기했었다. 삶과 죽음이 처음부터 그렇게 붙어있다는 듯이, 생활의 일부인듯이, 바다에 전쟁에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야했던 제주의 아픈 과거가 그 소박하고도 많은 무덤들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제주를 그린 아이들 그림책 <시리동동 거미동동>에도 보면 '아빠의 부재'와 그 대신 아이가 사는 마을의 배경에 자리잡은 작은 무덤 하나가 나온다.  











한동안 깨봉삼촌이 밀어주는 유모차를 타고가던 연호도 나중에는 내려서 제 발로 걸어갔다.
17개월 우리 꼬마, 씩씩하게 오름도 올라보고.. 장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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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정말로 대단했다. 
세찬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빛나는 억새와 마른풀들의 물결이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본게 얼마만이지.. 생각할만큼.
신나게 앞장서서 걸어가던 연수가 외쳤다. 
"엄마! 바람이 나를 밀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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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올라서본 용눈이오름의 깊고 부드러운 곡선은 지상에 있는 여러 풍경들중에 내가 본 제일로 뭉클한 풍경이었다. 

분화구라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잘 몰랐는데 그 크고 우묵하게 내려앉은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른 가을풀들이 가득한, 굴러도 아주 푹신할 것같은 웅덩이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고 나면 울기가 힘들어진다. 오래된, 부드러운 풀무덤으로 덮인 작은 분화구 앞에 서서 여기서는 울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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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더 내딛기 어려울만큼 세찬 바람을 뒤로하고 오름을 내려왔다. 

오름 정상을 한바퀴 돌며 멀리 바다를 보고싶었지만 그건 다음에... 아이들이 조금 더 큰 뒤에... 엄마는 아쉬움을 접고 후퇴했다.

바람에 연방 넘어지며 앙앙 울던 연호는 내려오는 길에 엄마품에 안긴채로 잠이 들었다. 

 

잠든 연호를 다시 유모차에 눕히고 연수 손을 잡고 걸어내려오면서 연수에게 "연수야, 아까 정말 날아갈 뻔했지. 잘하면 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옷자락을 잡고 팔을 펼치면 정말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고 말했더니 

연수는 "난 날아가기 싫어. 난 엄마랑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거야." 하며 내 몸을 꼭 붙들어 안았다.

정말로 날아갈 것처럼 센 바람이 무섭기도 했을테고, 늘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다섯살 연수의 마음에 엄마와 떨어져 자기만 멀리 날아가는 것은 별로 하고싶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래, 엄마랑 언제나 같이 있자. 그럼.. 나중에 우리 같이 하늘을 날아보는건 어때?"

"어떻게? 엄마랑 같이?"

"응! 행글라이더같은 날개달린 작은 비행기도 있고, 낙하산같은걸 타고 날수도 있고.. 엄마랑 같이 타고 날면 재밌지 않을까?"

"음.... 좋아. 그럼 연을 탈 수도 있겠다! 엄마랑 연호랑 다같이 큰 연을 타고 날아가자~"

"그래. 좋아! 우리 나중에 꼭 그렇게 해보자!" 

^^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언젠가 내 품을 떠나 저 혼자 훨훨 세상을 날아다니게 되기 전까지는

함께 손을 꼭 잡고 푸른 하늘을 날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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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향 같기도 한 비자열매 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비자림은 산책하기에 참 좋았다.

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살아온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의 숲.

연수도, 연호도 산책로에 떨어진 돌멩이와 나무가지들을 줍고, 비자열매의 향기도 맡아보며 즐겁게 잘 걸었다.

닭뼈를 닮은 비자나무 잔가지를 연수가 주워서 보여주었다. 











비자림까지 오는 동안 차안에서도 곤히 잘 잤던 연호는 빵과 우유를 먹고는 기분좋게 비자림을 걸어다녔다.

제주에서 나는 화산석인 '송이'를 깔아놓은 길 위에서 제 마음껏 돌멩이를 줍고, 나뭇잎을 뜯어 내게 건네주는 어린 아이를 보고 있자니 

우리가 늘 놀던 아파트 놀이터의 폴리우레탄 바닥에서 잠시 떠나왔다는 사실이, 이런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고마웠다.












연리지. 두 그루가 붙어자라는 나무.







'사랑해요' 

그전에도 연수와 연호가 가끔 내게 이 말을 해주곤 했다. 머리에 손을 대고 혹은 두 손의 엄지와 검지로 하트모양을 만들면서.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연수는 저 말을 참 자주 했다. 

바다에서 놀다가, 돌담 옆을 걷다가 "엄마, 사랑해~"하면서 내 다리나 목을 꼭 끌어안곤 했다. 

그럴때면 연수의 마음이 참 행복하구나.. 연수도 지금 나처럼 이 시간이 기쁘고 좋구나.. 느낄 수 있었다. 

엄마로 살아서, 아이와 함께 여행할 수 있어서 받는 가슴 뻐근한 선물이었다.








하루에 한번은 꼭 들리게 되는 월정리 바다.

제주에 있는 동안 외식을 거의 안했는데, 이 날 점심에는 내가 먹고싶었던 전복죽을 비자림 다녀오는 길에 느지막히 먹었다.

전복돌솥밥이랑 해서 아이들도 나도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연수는 바다로 풍덩. ^^







바다야, 잘 있니.

연수가 매일 같이 뛰어놀던 바다. 제주를 떠나올 때는 '바다야, 잘 있어, 다음에 또 올께!' 인사하고 왔던 월정리 바다.


여행중에 매일 쓰려던 포스팅을 전화기가 버벅거려서, 졸리고 고단해서, 친구들과 수다떠느라... 못쓰고

인제사 다시 쓴다. 하루씩.. 쓰려고.

제주에서 보냈던 일주일의 시간이 쉽게 갈무리 되지는 않겠지만

마음안에 저 고운 모래의 감촉과 한밤중에도 들리던 파도 소리들을 잊혀지지 않게 담아두고 싶은 바램으로

조금씩 조금씩 정리해본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