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작은 절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월문리에 있는 '묘적사'.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셨다는 천년고찰이다.
마음이 꽉 막혀 문득 숨쉬기가 갑갑하다 느껴질 때면
천천히 가서 조용한 절집의 댓돌 한 끝에 오래도록 앉아있다 오면 좋겠다.
낮은 지붕, 낮은 계단.
묘적사는 소박하고 정갈했다.
애써 소박하려 노력한 마음이, 손길이 느껴질 만큼.
나는 오래도록 고개를 숙이고 빌었다.
성당에 가면 성모상 앞에서, 절에 가면 부처님 석상 앞에서 나는 한참씩 눈을 감고 서서 미음속으로 하고싶은 말들을 한다.
내 마음 안의 소요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감정들을 내가 버릴 수 있기를 빌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좀 더 의연히, 잘 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를 빌고,
지금 이 순간,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묘적사 석굴암 안에는 '세월호 희생자 극락왕생'을 비는 꽃등이 부처님 제일 가까운 곳에 걸려있었다.
추석을 맞는 마음이 편치 않다.
봄에 세월호 참사가 있고나서 여름이 지나고 이제 가을이다.
계절이 두번이 바뀌도록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다.
국회의 국정조사도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고, 그저 시간만 자꾸 흘러서 유야무야 사건이 덮여지고 잊혀지기만 바라는 것일까.
'제 아이가 왜 죽었습니까' 하는 절박한 물음을 붙들고 겨우겨우 버티며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과 농성을 마다않고 애쓰는 유가족들을 '더 많은 보상을 바라고 떼쓰는' 사람들로 왜곡하는 파렴치한 여론몰이에 넘어가고,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언제 또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르는 위험하고 부도덕한 사회나 세상을 '어쩔 수 없지 뭐, 원래 그런걸'하고 체념하고 무심해져 버릴까봐
내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럴까봐 걱정이다.
기억하는 일,
이 무서운 사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꼼꼼히 따지고 살펴서 하나씩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일.
그 것이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수사권, 기소권을 가진 특별법 만이 제대로 진상을 밝힐 수 있고, 잘못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고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얼렁뚱땅 또 대충, 정치인들의 입발린 말들에 넘어가서는 미래를 장담하기 힘든 시절을 우리가 살고있다.
140여일 전, 4.16 세월호 사고 직후, 무엇이라도 다 할 것 처럼 얘기했던 정치인들이 아닌가.
특별법도, 철저한 진상규명도, 대통령의 유가족 면담도 언제든, 얼마든지 다 할 것처럼 얘기했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무엇때문에 안되고, 무엇은 어렵고 하며 차 떼고, 포 떼고 그저 또 유야무야 제 몸 다치는 일 없게 넘어가자고 한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고, 무심해지면 안된다.
유가족은 스스로 돈(보상)의 유혹,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정말로 존경스럽게 맨앞에서 이 아프고 두려운 시절을 버티고 있다.
보상으로 유혹하는 것은 정치권이고, 그 유혹을 유가족이 받아들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그 자신이 거대권력이고 기득권세력인 언론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광장과 거리를 지키고, 진실을 알리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멀리있어도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응원하며 함께 하고 있다.
그 마음이 그저 집에서 아이들 키우며 지내는 내게도 느껴진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람들, 진실과 정의와 연민과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존재가 우리 사회의 큰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세월호 이야기가 길었네..
부처님도 아마 지금 같은 마음이실거다.
눈 올 때쯤, 그때는 조금더 가벼운 마음으로 묘적사에 다시 가 볼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