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내가 퍽 바쁘게 보냈나보다.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그림 수첩을 늘 들고다니기만 하고
펴들고 앉아 가만히 그림 그려볼 시간이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겠지..





여름 끝무렵에는 선선한 저녁에 아파트 벤취에 앉아 있을 때가 좀 있었는데
그 때 정자와 정원 풍경을 그리다 말았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아버지가 고향집 마당 벤취에 앉아 마을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는 것처럼
요맘때는 나도 아파트 정원이 꼭 내 정원인 것처럼
한적한 정자와 오솔길, 나무들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 아파트에는 공작단풍이라는 단풍나무가 조경으로 많이 식재되어 있다.
지금 이 나무는 빨갛다못해 불타버린 것 처럼 검붉은 색깔로 단풍이 들어있지만
이 그림을 그렸던 초가을에는 가지끝에 달린 단풍나무 씨앗들만 빨갛고 잎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가을동안 혼자 조용히 그림그리는 시간은 못 가졌지만
화요일마다 캘리그라피 수업에서 수채화물감으로 그림그리는 것을 선생님께 조금씩 배웠다.
작은 그림을, 색이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그리는 것이 참 어렵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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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큰 이모부님이 돌아가셨다.
명절 쇠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하며 그 소식을 듣는데 눈물이 흘렀다.
오랫동안 못 뵈었던 큰 이모부.
젊은 시절 참 호탕하셨고 유쾌한 어른이셨다.
나를 보면 늘 반가워해주시고 예뻐해주셨어서 자주 뵙지 못해도 늘 마음에 감사함과 따뜻한 정이 있었다.

이모부님은 우리 아버지에게 아주 친한 한동네 형님이었다.
10월에 친정에 갔을 때 아버지께 여쭤보니
“그 이가 경포학교 18기, 내가 22기지” 하고 국민학교 졸업 기수를 얘기해주셨다.
나는 그 학교의 56기 졸업생이다.

큰이모부는 청년이 되자 고향을 떠나셨다.
멀리 대구, 아니 삼랑진까지 가서 일하실 때 큰이모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그리고 큰 처제에게 듬직한 고향 후배를 소개해주셨는데
그 분이 우리 아빠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과 참 큰 인연이 있으신 분이다.

나고자란 고향에서 평생을 살고계신 아빠와 달리
큰이모부는 20대 이후로는 계속 타향에 사셨다.
대구에 오래 사셨고, 자녀들이 장성한 뒤로는 서울로 터전을 옮겨 언니오빠들의 대학과 결혼후 생활을 모두 함께 하셨다.

연수원 사업을 오래 하셨고, 호탕한 성품이셨고, 말씀을 재미있게 잘 하셨고, 사촌 언니들과 오빠와 그 손주들에게, 그리고 우리 조카들에게도 참 다정하셨던 분으로 나는 이모부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만나면 나를 늘 아껴주셨고, 크게 되리라 잘 되리라 응원하는 말씀을 해주셨었다.

이모부님의 응원대로 큰 인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 소박하게나마 내 가정을 꾸리고 잘 지내고 있는 데에는 이모부님이 보내주신 사랑과 축복도 늘 함께 했을 것이다.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
결혼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한 것이, 늘 감사했다는 말씀도 못 드린 것이..

이 겨울은 큰이모부님의 빈 자리가 가족들 모두의 마음에 시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모부님을 기억할 것이다.
이모부님을 생각하면 젊으신 날의 웃는 얼굴, 그 억양과 목소리, 따뜻한 말씀들이 늘 마음속에 떠오를 것이다.
함께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어요.
편히 쉬세요, 이모부.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