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8 07:54

우리 아이들이 '달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동네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딸을 나는 '작은 달님'이라고 부르는데 올해 아홉살이 되었다. 

엄마랑 딸이 모두 책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고, 뛰어놀기도 좋아하는 예쁜 모녀다. 


작년에 '작은 달님' 은교가 여덟살이었을 때 동시를 한편 지었다고 달님이 내게 보여주었었다. 

'나무의 노래'라는 고운 제목의 동시였는데 참 좋았다. 

그 전날 엄마랑 같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책을 읽었다는데 그 여운이 많이 남았는지 

이 귀엽고 진지한 꼬마 시인이 시를 한편 쓴 것이었다. 


나는 은교의 동시를 읽고 그림을 한편 그렸다. 

내 연습장에 네임펜과 색연필로 슥슥..^^

대단한 그림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시가 준 느낌을 살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충만한 마음이 되어 참 좋았었다.

작년 여름 정도에 그린 것 같다. 









나무의 노래 


                                                                       이은교(서울 강명초등학교 1학년) 지음




1. 얘~야 이리로 놀러오렴 

   시원한 바람과 달콤한 열매를 너한테 다 줄께

   내가 있는 곳은 높은 산이란다

  높은~ 산에는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과 친척 있지


2. 얘~야 나한테 안겨보렴

  내 품은 너의 온도와 맞을꺼다

  나와 껴안아보자 안아보자 내 품은 따뜻하다

  너와 안아보면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있겠지


3. 얘~야 이리로 와보렴 너의 마지막 인사다

  나는 풀이 없어지고 너에게 시원한 바람을 이젠 못 주겠구나

  이젠 진짜로 안녕

  나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도는구나 안~녕








은교의 시를 읽고 나는 높은 산위에 있는 아주 크고 아름다운 나무 생각을 했다. 

바람에 풍성한 가지와 나뭇잎을 흔들며 자유롭게 노래하는 큰 나무.

평화롭고 굳센 나무.

그림을 그리고 나니 나도 그런 나무처럼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작은달님 동시와 그림을 언제 한번 블로그에 올려야지.. 생각만 하다가 늦게사 이제야 올려놓는다. 

할머니가 떠나시고 나는 가끔 이 그림을 보며 할머니 생각을 했다. 

할머니의 삶도 큰 나무처럼 우리들을 모두 품어주고, 달콤한 열매를 먹여주시고, 그안에서 쉬고 놀게 해준 삶이었다. 

나이가 많이 드신 뒤에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셔서 바퀴달린 작은 보조기구에 의지해서 천천히 걸어 마을 회관에 다녀오시며 지내셨다. 그래도 예쁜 웃음을 잃지않으셨던 할머니. 

할머니는 높은 산의 고운 나무같은 아름다운 인상으로 내게 늘 남아있을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그렇듯이...


작은 달님. 고마워요. 

작은 달님의 시가 이모에게 많은 기쁨과 위로를 주었어요.  

새 봄에는 따뜻한 햇볕 받으며 우리 또 함께 노래해요. 



Posted by 연신내새댁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2017년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겨울답지않게 햇살이 참 따뜻하고 포근한 날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길에 본 산자락에는 하얀 눈들이 덮여있었고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며칠 전까지의 매서운 추위가 잠시 한숨 고르는 듯 포근하고 아름다운 날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아프셨던 가을 동안 나는 가끔 할머니 생각을 하며 목이 메이곤 했다. 

가을이 깊어가며 날이 추워질때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보내고 떨면서 들어올 때는 

'병원에 계신 할머니는 이 추위를 모르시겠구나.. 날이 추워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도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할머니가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평생을 몸으로 느껴온 계절이 오고 가는 것, 시절의 변화에 따라 해야하는 크고작은 생활의 단도리들.. 이런 것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슬펐다. 


정 호자 원자, 정호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우리 할머니는 아흔두해를 사셨다. 

1925년, 강릉에서 가까운 주문진 행호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여덟살에 결혼해 모두 여섯명의 자녀를 두셨다.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은 갓난아기일때 잃은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 자라서 할머니 곁을 오래오래 지켰다. 많은 손주손녀들의 결혼과 증손주들까지 기쁘게 맞아주시고 생애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셔주셨다. 


바닷가가 멀지않은 농촌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일본어로 수업하던 소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할머니의 남자형제들이 모두 청소년기가 되자 서울로 가서 혜화동에 집을 마련하고 공부할 때, 할머니의 부모님은 할머니도 그 집에 가서 같이 지내기를 바라셨는데 할머니는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때 서울에 가지않은 것을 두고 할머니는 그 때 나이많은 친척 조카가 '고모는 천치야, 나같으면 당장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며 조금 후회스럽게 말씀하셨었다. 

어릴때 들은 그 얘기를 나는 자라서 가끔 혼자 생각해보곤 했었다. 할머니가 그때 서울에 가셨더라면 이화학당이나 연희전문 같은 곳을 다니셨을까.. 그럼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신여성이나 지식인이 되었을 수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때니 어려움을 겪을셨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할머니의 인생은 무척이나 달라지셨겠지..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버지를 낳고 우리들의 할머니가 되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니 가보지못한 할머니의 '신여성'으로서의 멋진 삶이 왠지 아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안도하게 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일찍 결혼을 하셨다. 우리 할아버지의 살림은 그당시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본래 땅과 재산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일제 초기에 토지 개간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땅을 모두 잃었다고 작은할아버지께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던 증조할아버지를 손목에 매를 앉혀서 다니시던 늠름하고 멋스러운 분으로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재력가였던 증조할아버지는 강릉의 이름난 부잣집이었던 강릉 최씨 '가매집'의 따님과 결혼했다. 평생 단정하고 고운 하얀 한복에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지내셨던 우리 증조할머니는 이 가매집의 이름난 수재였던 최장집 교수님의 고모이시기도 하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땅도 많이 잃어 살림이 어려울 때였는데 '가매집 외손'이라는 타이틀로 중신(중매)을 넣었었다고 할머니는 회고하셨다. 나는 대학원을 다닐때 최 교수님의 민주주의 관련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분은 나를 모르시지만 나는 생전에 나와 늘 가깝게 지내셨던 증조할머니의 조카분이라는 사실때문에 괜시리 큰 친근감을 느끼곤 했다. 


결혼 초기 살림은 어렵고, 시동생들도 많고, 할아버지는 지역신문 기자일과 청년단체 활동으로 바쁘셨던 때에 할머니는 첫아이로 우리 아빠를 해방이 되던 1945년에 낳으셨다.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할머니는 어린 아기를 업고 아빠의 손목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셨는데 그 길에서 어린 둘째를 잃으셨다. 피난 떠나기 얼마전, 할머니의 친정 아버지께서 잠시 딸을 찾아오셔서 만나보고 가셨다는데, 그때 제일 큰 시동생인 우리 작은할아버지께 '자네가 이 집에서 제일 중요하네. 부디 잘 도와주게' 당부하셨던 것을 작은할아버지는 오래 기억하셨고 내게 이야기해주셨었다. 나는 만나본 적이 없는 아빠의 외할아버지. 어떤 분이셨을까. 할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오래동안 못 만났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셨을까. 시어머니와 남편도 만나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자유롭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무척 가부장적인 분이셨고 화도 잘 내셔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지내셨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시게 된다면 할머니가 더 당당하게 씩씩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부모님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노년에 가깝게 지내셨던 인쇄소집 할머니와도 다시 만나 좋아하시는 화투도 재미있게 치시면서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목소리가 참 예쁜 분이셨다. 살짝 장난기가 어린 것 같은 반짝이는 눈을 갖고 계셨고 얌전하고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할머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정말 재미있게 옛날 얘기를 잘 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매일 밤 할머니 곁에 누워 깔깔깔 웃다가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만 더 해줘~ 하나만~~" 하고 졸랐었다.

지금도 살짝 기억나는 이야기는 어떤 바보신랑이 장가들던 날 이야기. 신부집에서 처음 먹어본 가자미 식혜가 너무 맛있어서 밤에 몰래 일어나 정지(부엌)으로 가서 살금살금 식혜단지를 찾아 손을 쑥 넣었는데 그게 개똥그릇(?)이었던데다가 그만 들켜서 도망가는데 개는 쫒아오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손에 묻은 똥이 식혜인줄 알고 싹싹 핥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다는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너무 우습고 재미있었다. 

텔레비젼이 있다해도 아이들이 볼 것이 별로 없고, 밤이면 일찍 누워 모두 잠들던 시골 한옥집 사랑방에서 우리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속의 여러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긴 겨울밤을 즐겁게 보냈었다. 

사랑방 큰 창문밖으로는 밝은 보름달이 뜨고 별도 예쁘게 빛났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밤들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생고구마를 숟가락을 삭삭 긁어주시면 한 숟갈씩 돌아가며 맛있게 받아먹던 기억. 친감, 곶감, 큰 가마솥에 끓여주시던 엿, 그런 것이 어린 시절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들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잃었다. 

내가 유머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조금쯤은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건 우리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일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뒤 나는 길을 걷다가 이따금 눈물이 툭 쏟아졌다.  

며칠동안 털이 수북히 달린 패딩잠바의 모자를 덮어쓰고 저녁에 운동을 하러가면서 울었다.

할머니가 보고싶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립다. 

친정집에 가면 '욱이 왔나~'하고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실 것 같고, 한동안은 햇살이 환한 날이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원해계시던 요양병원, 그 병원에 가면 여전히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할머니를 본 날, 할머니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나에게 "욱아, 행복하게 잘 살아."하고 아파서 가늘어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할머니 말씀대로 하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늘 집과 마을회관을 오가며 정정하게 잘 지내주셔서 나는 더 오래 할머니가 우리 곁에 계실거라고만 생각했다. 조금 더 자주 뵈러가고, 할머니랑 좀더 놀껄.. 얘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랬듯이 할머니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낼껄... 그러면 할머니가 좋아하셨을거란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할머니를 참 좋아하니까.. 이제 더는 할머니와 놀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는 연수, 연호, 연제를 모두 갓난아기 시절에 많이 안아주셨다. 

팔십이 넘으셨어도 아이들을 폭 안아서 잘 재워주시곤 하셨고, 내가 어린시절에 할머니 품에서 들었을 자장가와 여러 노래들을 부르며 얼러주셨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친정에서 돌아올때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연수야, 외가에 또 와~"하고 다정하게 여러번 당부하시고, 용돈도 아이들 손에 쥐어주셨었다. 

친정집에서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때 할머니는 많이 아프셨던 때라 아이들이 인사를 하는데 꺼내줄 용돈이 옆에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게 미안하셔서 "연수야, 다음에 오면 꼭 용돈줄께. 외가에 꼭 또 와.."하셨다. 

다음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를 뵈러갔을 때 할머니는 나에게 "왜 아이들은 안 데리고왔냐.. 연수, 연호, 연제. 너희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내가 천원짜리를 따로 놔뒀는데.."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큰돈은 필요없다고 작은 동전지갑에 천원짜리 몇장만 넣어서 옆에 두고는 아이들이 오면 한 장씩 주려고하셨던 것이다. 지난 번에 용돈을 못 줬던게 마음에 걸리셔서 병원에 누우셔서도 잊지않고 챙겨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참고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올께, 할머니. 얼른 나아.."하고 대답했었다. 그때는 또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일찍 다시 갔었야했는데... 

그날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의 1층 로비까지 갔다가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들은 면역이 약해 면회가 안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지 못하고 로비에 기다리다 돌아왔다. 연호가 "난 증조할머니가 안 아픈게 좋아.. 그러면 증조할머니한테도 용돈을 받을 수 있잖아" 했다. 아이들이 외가집에 가서 증조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만원이든, 천원이든 그 돈은 증조할머니의 마음이고, 정이다. 아이들도 자라면 그 마음을 알 것이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와서 아이들 겨울 옷을 정리하다가 연제가 더 어릴때 입었던 겨울 파카를 꺼냈는데 거기에 빳빳한 새 돈 5천원짜리 두 장이 접혀서 들어있었다. 

그 돈을 보고 나는 많이 울었다. 연제가 외갓집 다녀올때 증조할머니가 주셨던 돈인 것 같아서였다. 설날 지나고 외가집에 갔을때 증조할머니가 연제에게 세배돈으로 주신 새 돈. 나는 그 돈을 잘 넣어놓고 쓰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가 찾아서 전해주신 돈같아서.


이 겨울동안 우리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은 아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엄마아빠는 언제 죽는지, 자기들은 또 언제 죽는지.. 100살까지 살거라고, 죽고나면 자기들은 다시 아이로 태어날 거라고.. 하루는 이 생각을 하고, 다음날에는 또 다른 생각이 났다며 조잘조잘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날 연호는 엄마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서 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기는 엄마의 아이로 다시 태어날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럼 되겠지, 엄마?"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얘기하며 연호의 어린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래, 그러자"하고 나도 대답하며 웃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중에 내 손녀로 다시 태어나.. 그럼 내가 재미있는 옛날 얘기 많이 해줄께. 

할머니가 늘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많이 예뻐해주고, 칭찬해주고, 대견해해줄께..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같이 놀아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할머니 안녕..!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