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 글쓰기2020. 9. 10. 18:12

 

 




여름 들어서면서 고장났던 냉동실을 고치고 중구난방 쌓여있던 냉동실 식료품들을 정리하고 나니 기분이 참 좋았다. 

뭐가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알겠고, 필요할 떄 바로 찾아 쓰고, 부족한 것도 일찍 알아서 미리 준비해놓을 수 있고.. 

그래서 옆집도 정리를 하기로 했다. 

냉장실 말이다. 

 

여기는 사실 더 어렵다. 

위쪽에 자잘한 양념병들이 두 칸이나 가득 들어차 있었고, 아래쪽 반찬 칸들도 깊어서 저 끝에는 도대체 내 손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ㅠ

아래쪽 통으로 된 곳들에는 야채들이나 말린 곡식들이 들어갔는데 오랫동안 잘 꺼내지 않고 있다보면 짓무르고 누렇게 변해서 버리게 되는 야채가 많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지냈을까.. 싶지만 바쁘고 무심하고 게으르면... 그렇게도 살아진다ㅜㅜ 

 

오래돼서 못먹는 양념통들을 비워서 버리고, 지금 먹을 수 있는 것들만 남기니 한 칸으로 충분했다. 제일 위에 한 칸은 두부나 치즈, 햄처럼 빨리 먹어야하는 식재료들만 손 닿는 곳에 넣어두고 얼른얼른 비워먹는 것이 목표. 키가 작은 나는 냉장고 맨 위칸의 끝 쪽에는 손도 잘 안 닿는다. ^^;; 

오래된 짱아찌류의 반찬들은 주로 시가에서 받아온 것들인데 조금씩 꺼내 덜어먹으려고 했지만 냉장고 깊이 있으니 손도 잘 안가고, 그때그때 만든 반찬 위주로 먹게되어 몇년째 묵혀두기만 한 것들이라 많이 정리했다. 

 

음식이 오래 돼서 못 먹게 된 것을 버리려고 하면 마음이 죄스럽다. 

채소를 열심히 길러준 땅과 농부님께도 죄송하고, 씻어서 양념해서 힘들게 만들어준 어른들께도 죄송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처리하는데 에너지도 많이 쓰이고, 지구 환경에도 해가 되니 죄스럽다.. 

먹을 만큼만 만들고 남기지 않고 먹어야하는데 쉽지 않다.

자원도, 에너지도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껴쓰고 적게 써야 내 몸과 지구, 후대 사람들 모두에게 부담이 덜 가는데 그동안 나도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살림을 계속 불리기만 해서 식재료도 먹는 양보다 넘치게 사고, 그래서 알뜰히 못 먹고 버리는 것을 많이 만들고 했다.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조금씩만 사고, 깨끗이 다 먹어서 쓰레기를 줄이는 생활을 하자고 굳게 마음 먹었는데, 요즘도 가끔은 나랑 한 약속을 못 지킨다. 천천히 꼭 줄여나가야지! 

 

그래도 냉장실이 정리되니까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고 좋은지 모르겠다. 

뭐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아니까 부족하고 필요한 것만 딱 살 수 있다. 남아있는 반찬이 뭔지 아니까 알뜰히 꺼내 먹게 된다. 이렇게 하다보면 음식물쓰레기가 점점 줄어들 것 같다. ^^ 

이제야 '나의 냉장고'가 된 기분이다. 그 전에는 '남의 냉장고'로 살림을 한 건가? ㅎㅎㅎ 

처음 결혼했을 때는 내가 자취할 때 쓰던 작은 냉장고가 쓸만해서 그대로 썼다. 김치냉장고를 친정 오빠가 결혼선물로 큼지막한 것을 사주셔서 그 두 개로 충분했다. 그러다가 이 큰 냉장고를 쓰게 된게 6-7년쯤 된 것 같으니까... 그 기간 동안은 냉장고를 내가 감당을 못하고 산 셈이다.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생기면 무조건 넣어두고 쌓아두고 살았으니... 

이제는 속을 잘 아는 '내 냉장고'가 되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 가볍게, 잘 정리하고 살자.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어른들께 공수받는 참기름, 들기름 들도 자연히 정리가 됐는데 참기름 재고에 비상등이 켜졌다. 

여러 반찬 요리에 필수 양념인 참기름, 들기름을 나는 시가와 친정에서 받아먹는다. 어른들은 시골에서 동네 분들이 농사지은 믿을 수 있는 참깨, 들깨를 사서 직접 방앗간에 가져가서 기름을 짜오신다. 친정에서는 들깨 농사를 직접 지으신다. 

그래서 친정에서 주시는 들기름은 강원도 소주인 '처음처럼' 병에 담겨온다. (예전 이름이 '경월'이었던 두산 주류 공장은 강릉에 있다) 

시가에서 주시는 참기름은 경북 소주인 '참이슬' 병에 담겨온다. 

같은 초록병이지만 병에 붙은 라벨을 보면 어떤 기름인지 알 수 있다. ^^

 

지난 설에 다녀온 후로는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면서 봄, 여름에는 경북에 있는 시가에 다녀오지 못했다. 

설 때도 참기름을 받았고, 어머님이 한번 택배로 식재료들을 보내주실때도 '참이슬' 참기름을 한병 받았었는데 벌써 거의 다 먹었다. 친정에는 5월에 한번 다녀오면서 들기름을 두병 받아와서 아직 들기름은 넉넉하다. 

그래서 요즘은 참기름 넣을 요리에도 그냥 들기름을 넣어 먹는다. 

참기름도 한살림에 한병 주문해야 할까.. 

그동안 나는 고추장은 한살림에서 조금씩 사먹었지만 많이 먹는 된장과 국간장은 시집에서, 막장은 친정에서 얻어 먹었다. 시가의 장들은 시골에 계신 시외할머니가 직접 메주빚고 담그셔서 만들어주시는 장들이고, 친정의 장들은 친정 엄마가 뒷마당에 있는 장독대에 해마다 직접 담그신다. 

 

나도 장을 담글 줄 알았으면 좋겠다. 

한살림의 농부님들이 정성껏 담가주시는 것도 참 맛있고 좋지만 내 손으로 기본적인 식재료인 장을 담글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장은 한국의 가정에서 정말 많이 먹는 식품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 막장.

도시에서도 장 담그기를 배우는 분들도 있고, 직접 담가보는 분들 얘기도 한살림 소식지에서 본 적이 있다. 안되는 건 아니지만 도시의 베란다에서는 장항아리를 제대로 숙성시키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햇볕과 바람이 충분해야 하고, 온도 습도도 잘 맞아야 하는데 창문이 수시로 닫히는 베란다에서는 쉽지 않겠지.

 

언젠가는 시골에 가서 내가 직접 콩농사를 지어서 메주도 만들어보고, 장도 담그며 살고 싶다.

지금은 별나라 이야기 같지만 멀지 않은 날에 그렇게 살아야지. ^^

기후위기와 식량 위기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조금씩이라도 농사를 지어서 자기 먹거리를 스스로 생산하고, 농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땅과 함께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내 체력으로 농사짓는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뭐 우리 엄마는 처음부터 체력이 대단해서 지금도 배추밭에서 가을에 김장할 배추를 키우고 계신건 아니다. 봄에는 감자랑 깨심고, 가을에는 배추 무 심고.  

엄마아빠가 평생 해오신 일이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집 근처에서 조그만 텃밭이라도 한 뙈기 지어보고, 엄마가 장 담글 때 친정에 가서 옆에서 구경이라도 하면서 배워봐야겠다. 

냉장고를 정리하니.. 농사를 지어야겠다, 로 끝나네. 

^^ 

가을이 왔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밥상2020. 8. 29. 11:13

 

동네에 야채가게가 새로 생겼다. 
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운 상가쪽 모퉁이 자리다. 
아직 비어있는 가게들이 많은 신도시의 신축건물들 사이에 드물게 새로 문을 여는 가게들.

코로나 시대에 문을 닫는 가게도 정말 많은데 새로 가게를 차리시기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그 마음이 짐작이 되어서 내가 들를만한 가게면 꼭 한두번은 가본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코로나 시대가 되고서는 더욱 큰 마트를 잘 안가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용하고 있는 한살림 생협에서 식재료 대부분과 어지간한 생필품은 모두 구입할 수 있고, 온라인주문을 하면 집으로 배송을 해주시기 때문에 밖에서 장볼 일이 거의 없다. 한살림에 없는 군것질거리들이나 생선, 육류 종류들이 좀 필요할 때 가끔씩 마트를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 긴 장마와 집중호우 피해들을 겪으면서 한살림 채소 수급에도 어려움이 커졌다. 

한살림 생산지 농가들도 호우 피해를 많이 입으셨고, 또 코로나시대로 온라인 주문량이 많다보니 온라인 장보기에서는 내가 고른 야채들이 품절일 때가 많았다.

또 시중의 야채 수급에 어려움이 생겨서 야채값이 폭등하거나 할때 한살림은 연초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결정한 가격으로 가격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중보다 상대적으로 야채값이 싸다. 그래서 한살림 야채 소비가 평소보다 많아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상이 위험한 때문이니 공급되는 것들만이라도 받아서 감사하게 먹어야지.. 

가지, 감자, 고구마, 오이, 당근, 양파, 마늘 같이 우리 집에서 많이 먹는 야채는 다행히 한살림에서 잘 받았다. 

 그런데 호박과 대파, 쌈채소들은 품절이라 못받았다.  과일들도 아이들과 좀 더 먹고싶고 해서 동네에 새로 생긴 야채가게에 갔다. 

 

키가 크고 털털한 인상에 목소리도 걸걸하신 주인 아주머니는 대파 한 단 달라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개업하신 직후쯤에도 아이들과 운동다녀오다가 한번 들러서 야채랑 과일 몇가지를 샀었는데 그 때 아주머니는 나와 아이들을 보며 "아고~ 아들이 셋이여? 너네 엄마 고생많겠다. 엄마 말씀 잘 들어야된다~! 나도 아들 둘 키우느라 진짜 힘들었는데.. 애기엄마 대단하네" 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한바탕 이야기를 하셨었다. 찌개에 넣어먹으라며 풋고추를 한 주먹 비닐봉지에 더 넣어주시며 "또 와요~!"하셨었다. 

마스크를 꽁꽁 쓰고 다니고 벌써 한두주 전의 일이니 아주머니가 나를 기억하실 리는 없지만 나는 '또 오기'로 한 약속을 나름 지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냉장고에 든 야채를 보니 길쭉이 애호박 하나에 3500원이란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아이고.. 

그 옆에 동그란 애호박이 있어 "이건 얼마예요?" 하고 물으니 아주머니 대답.

"2000원이야"

"이건 좀 낫네요"

"응. 그래야지. 뭐 하나라도 싼게 있어야지~" 

우리는 같이 웃었다. 그래.. 뭐 하나라도 싼게 있어야지. 그래야 선뜻 손이 가고, 집에 식탁에 반찬 한가지라도 좀 넉넉하게 올리지..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걸걸하게 쉰 목소리에는 눈물같은 땀기운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손님이 도대체 얼마나 왔을까. 

이 가게 문을 열고난 후에.. 코로나로 안그래도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고, 야채값은 비싸고, 날은 뜨겁고, 과일은 자꾸 시들어가고... 

아주머니는 포도를 사고싶어하는 나에게 "밖에 놔두니까 포도가 너무 빨리 말라. 이게 상한건 아니고 마른건데 그래도 씻으면 먹을만하고, 잼같은거 만들어 먹어도 좋을 것 같아 버리지 않고 놔뒀어. 5000원에 다 줄테니까 가져 갈라우?" 

하고 물으셨다. 빨간 광주리 두 개에 가득 담긴 포도가 6송이는 넘어 보였다. 좀 오래돼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집 애들은 포도를 좋아하니까 씻어주면 하루이틀 안에 다 먹을 것 같았다. 

버릴 수 없는 마음.. 알 수 있다. 살림하는 나도 그렇다. 잘 못 버린다. 먹을 수 있는건데... 그래서 5천원에 포도 두 바구니를 샀다. 아주머니는 박스에 있는 괜찮은 포도 한송이도 얼른 더 넣어주셨다. 

바나나와 오이도 사고 둥근 애호박도 넉넉하게 두 개 사서 검은 봉지를 자전거 양쪽에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왔다. 

 

 



애호박은 볶아서 반찬도 하기 좋고, 된장찌개나 국에 넣어 먹어도 좋고, 볶음밥이나 카레에도 넣어 먹어서 쓰임새가 많다. 

한살림 애호박은 이번 주에도 품절이다. 

다음 주에는 아주머니네 야채가게에 다시 호박을 사러 가야겠구나... 

아들 둘을 키우느라 고생하셨던 아주머니가 신도시에 새롭게 차린 번듯한 자기 가게가 오래오래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라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뭐 하나라도 싼게 있어야지~' 같은 웃픈 이야기에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가 또 온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쉽지 않겠지만 부디 곱게 잘 지나가다오..ㅜㅜ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