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4.02.28 연호 돌잔치하던 날 2
  2. 2014.02.25 눈 쌓인 강릉, 부모님 곁으로 4
  3. 2014.02.22 연수 아픈 날 4
  4. 2014.02.16 연호야 연호야
  5. 2014.02.09 설 이야기 2
umma! 자란다2014. 2. 28. 23:44

ㅠㅠ

세상에... 연호 돌잔치 포스팅을 무려 1년 반도 더 지나, 정확히는 딱 20개월만에 올린다.

20개월은 연호와 연제의 터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연제 돌을 며칠 앞두고 '연호 때는 돌상을 어떻게 차렸더라...?' 궁금해진 엄마가 블로그를 뒤적여보니 글쎄.. 

연호 돌 잔치는 사진만 올려놓고 글을 채 마무리짓지 못해 여직까지도 '비공개'로 되어있더란 사실...ㅜㅜㅜㅜ

아구.. 연호야, 미안하다.

네 돌잔치하고 바로 뒤이어 꼬마 동생이 엄마 뱃속에 자리잡는 바람에 

엄마가 그만 정신이 없었구나..;;;


뒤늦게라도 연호 돌잔치 포스팅을 올린다.

2년 전, 그때의 우리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자. 

사랑한다, 아기 연호. 




 

 


 

6월 17일 일요일에 연호 돌잔치를 했다.

미사리에 있는 한식당에서 가까운 친지분들만 모시고 점심 함께 먹으면서 연호의 첫 돌을 축하해주고, 돌봐주신 어른들께 감사 인사도 드렸다.


연수 때처럼 연호 돌상도 직접 차려주고 싶어서

돌잔치 며칠 전부터 떡과 꽃을 맞추고, 과일을 사고 돌상에 놓을 이런저런 것들을 틈틈이 챙겨두었다.

연수 때는 처음이라 나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상을 어떻게 차렸는지 기억도 안나고 그저 연수랑 사진찍고 밥만 먹고 부랴부랴 돌아온 것 같다. 

이번에는 두번째이기도 하고, 또 내가 차리는 마지막 내 아이 돌상일거란 생각에 좀더 차분하게, 정성껏 차리고 싶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친정 엄마가 하루 전날 올라오셔서 나와 함께 장도 봐주시고, 돌상에 필요한 것들도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셔서 준비하는데 훨씬 안심이 되었다.

사실 돌잔치 며칠 전부터 연호가 모세기관지염을 앓기 시작해서 내가 많이 긴장하고 있기도 했고, 연호 감기가 다 나아갈 무렵에는 나도 같은 증상이 살짝 나타나길래 엄마에게 엄살을 좀 떨었더니 엄마가 하루 먼저 우리집으로 와주셨다.

나이가 서른 다섯,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엄마가 되었어도 

조금이라도 큰일을 하려고하면 겁이 먼저 나고, 엄마가 내 곁에 와주신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이와 함께 며칠 앓느라고 먹을 만한 반찬도 하나도 없었지만 엄마가 오신다는 소식에 기운이 번쩍 나서

밑반찬도 몇가지 뚝딱 만들고, 엄마랑 나중에 시댁 어르신들 오시면 대접하려고 고기도 재우고, 잡채도 만들고 하며 신나게 잔치 준비를 했다.

나중에 어른들이 우리집에 들리지 않고 모두들 식당에서 바로 가시는 바람에 음식이 엄청 남기도 했고,

또 돌상을 직접 차리고보니 돌잔치도 내 집에서



(여기까지가 2012년 6월 27일에 써놓은 글이다. ㅎㅎ

 그 때는... 연호가 내 인생의 마지막 아이일 줄 알았지모야. 설마 셋째가 또 있을줄을 몰랐지모야...^^;;;

인생이란 참 신기하고 고맙지뭐야.. 내게 연제를, 세 아이를 주셨으니.

아마도 '돌잔치도 내 집에서 하면 좋았겠다'고 쓰려고 했으려나? 

연제 때는 시댁이긴 하지만 집에서 하게 되었으니 내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연제와 어머니께 감사드려야겠다. ^^


이제 여기서부터는 2년전의 우리들을 보며 지금 쓴다:)



 

 



아... 다섯살 김연수는 이리도 귀여웠네..!!

지금은 왜 그리 못생겨진거니..ㅠㅠ

볼이 아직도 보동하고 통통한 연수가 아기같아서 안아주고 싶은 맘이 절로 생긴다.

미안.. 연수야. 요즘은 엄마가 너무 널 안 안아주는구나..ㅜㅜㅜㅜ

 

 

 

 

 


만나면 늘 신이나서 둘이 딱 붙어노는 친정 큰조카와 연수. 

일곱살 조카도 아기같네~^^


 

 

 




연수 돌에도 한복을 입었던 나는 연호 돌에도 오랫만에 한복을 꺼내 입었다.

아이의 인생에서 손에 꼽는 소중한 잔치인만큼 엄마가 예쁘게, 정성껏 예복을 갖춰입고 함께 해 주고 싶었다.

셋째는 왠지 마음이 약해져서(?) 연제만 한복입혀주고 나는 그냥 평상복입고 치를까.. 했었는데 흑. 사진을 보고나니 안 되겠다.

아무리 집에서 하는 돌잔치지만 엄마도 한복입고 연제랑 사진 한장 남겨야지. ^^


 

 

 

 

 


어머님은 이 때나 지금이나 별로 안 달라지신 것 같은데, 사진속의 나는 어째 지금보다 훨씬 젊은 것 같다. ^^;;

셋째를 키우며 확~ 나이들어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2년전 사진을 보기가 괴로워진다. 흑...






 


 

할아버지랑 연호랑 옆모습이 닮았다. ^^









외할아버지와 연호.


멋쟁이 우리 아빠. 아빠는 늘 멋지신데 나는 어째 늘 촌티가 난다. 

아빠의 옷맵시는 언니가 닮았다(그리고 또 형부가 닮았다 ㅎㅎ). 

그래도.. 막내딸은 영원한 아빠의 팬. ^^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손주들.


햇살이 빛나는 6월이었고, 미사리의 한식당은 나무가 크고 정원이 예뻤다.

연호도 나뭇잎이 푸르고, 장미가 환하게 피는 좋은 계절에 태어났구나.

첫 생일날, 이렇게 밖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고. 

갑자기 연호 돌잔치를 예쁜 식당에서 한 것이 잘 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축하해주러 오신 분들, 우리가 모신 어른들께 좋은 풍경속에 앉아서, 고운 햇살과 예쁜 나무들 아래에서 아이들 뛰어다니는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지켜보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린 것이 잘한 일인 것만 같다.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연제 돌잔치도 식당에서 할 껄 그랬나..ㅜ 

어머님 너무 고생하시게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밀려든다....ㅠㅠ 

꼭 돌잔치가 아니더라도.. 어른들 모시고 좋은 곳도 많이 가고, 아이들과 함께 예쁜 사진도 많이 찍어드려야겠다.

 

 







돌쟁이 연호.

이 사진을 보니 연호 아기 시절 얼굴이 보인다.

그 전 사진들에서는 왠지 지금 얼굴이랑 똑같은 것 같아서 '연호 얼굴은 거의 안 변했구나..'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찍은 것을 보니 이리 앳된 얼굴이었네.







연수가 신나게 동생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엄마가 촛불을 끈다. 


딱 한 개뿐인 초. 

딱 한 번뿐인 첫 생일. 

딱 한 번뿐인 인생의 모든 날들.








네 식구. ^^

아빠도 젊고(ㅎㅎ) 엄마는 달덩이구나.. 

연호 가졌을 때는 정말 어찌도 그리 살이 많이 쪘던지... 연호 낳은 후에도 참 오래도록 살이 안 빠져 몸이 무거웠다. ㅠㅠ 

그래도 연수 때에 비해 젖량이 많아져서 연호가 젖을 잘 먹고 통통하게 잘 자라주는 것이 좋아서 

나 뚱뚱한 것은 크게 괴로워않고 열심히 먹고, 열심히 젖주며 지냈던 것 같다.

 





 


 

사진에서는 국수가락을 들어보고 있지만.. 연호는 돌잡이에서 붓을 잡았다.

'돈, 실, 붓, 책' 딱 기본만 놓고 다른 것을 놓지않은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겠지...^^;;;


무엇을 집든 네가 잘 자랄 것을 엄마는 믿는다. 

네 힘껏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하며, 네게 운명지어진 삶의 길을 열심히 걸어갈 것을 믿는다. 

네 몫의 인생을 행복하고 충만하게 소중히 살아낼 것을 엄마는 한치도 의심없이 믿는단다, 아가야. 

빛나는 여행자야. 나의 동료야.




 


 

 


이 날, 와주신 가족 친지들께 아빠엄마가 감사 인사를 드릴 때, 

나는 울었다. 

글처럼 말에도 늘 감정이 많이 실리는 나는 '엄마가 되고보니 어머니들이 저희를 키우며 얼마나 힘드셨을지 이제야 알겠다'는 얘기를 하다가 그만 눈물이 푹 쏟아졌던 것이다. 

우는 바람에 그 뒤에는 별 얘기를 못하고 그저 '부모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는 얼른 자리에 앉고 말았다.

친정엄마는 살짝 눈가를 닦고, 어머님은 '에고, 그래도 우리 떄는 너희만큼 힘들지 않게 키운것 같다'며 나를 안쓰럽고 다정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난다. 


두 아이 키우며 힘들기는 했지만 그 것 때문에만 눈물이 난 것은 아니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내가 부모가 되고보니 그제야 부모님의 정이 어떤 것인줄 조금은 알겠어서,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내게 기울여주셨을 사랑과 보살핌이 어떤 것인지 이제 내가 내 아이를 키워보니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으로 알겠어서

그게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을까,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식구들을 보살피고 농사일과 큰 시골집 살림을 하며 나를 키우시느라..

시어머니는 또 얼마나 어렵고 힘드셨을까. 어려운 살림에 몸 아끼지않고 일하며 세 아이 살뜰히 거두시느라..

어머니아버지들의 힘든 수고를 그제야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2년의 시간이 흐르고 

세 아이의 엄마로 정신없이 사는 중에 시나브로 알게된 또 한가지는

엄마아빠도 참 행복하셨겠다는 사실.


꽃처럼 예쁘다고들 하지 않는가.

아이들 자라는 모습이.

아가들 웃는 모습이. 

내 속으로 낳고, 내 품에 안고 젖물리며 한 발씩 한 발씩 키워낸 자식들이

따뜻한 햇살 아래 옹기종기 둘러앉아 고물고물 놀고 맛난 것을 오물오물 먹고 나를 향해 웃고 손 흔드는 모습을 볼 때

엄마아빠가 얼마나 행복하셨을지..

그 것을 이제 알겠다.


아이들은 내가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 내게 왔구나.. 

세 아이 노는 모습 바라보던 어느날 문득 생각했었는데  

내가 부모님께 드린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도 왔나보다.

생활의 고단함도, 어려움도 잠시 잊고 그 순간 만큼은 빛나는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줄 수 있을만큼.









 

하지만 이 고운 녀석들에게 나는 또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한다.

아이들 때문에 속 상하고 힘들다고

내 분노와 어리석음을 아이들에게 퍼붓고, 심어놓는다.


아이는 아직 어린 아이라서 그런 것인데, 

저희들도 이 부자유스런 환경속에서 견디고 자라느라 한껏 애를 쓴다고 쓰는 중인데

엄마는 북돋워주고 기다려주고 참아주는게 아니라

엄마 속에 배어있는 나쁜 것들을 폭발시키고 보여주며 고스란히 가르치고 있다. 


아직도 참 멀고 멀었다.


연호 돌잔치 포스팅이 좀 뜬금없는 엄마의 반성으로 끝나게 됐지만... 시작과 일맥상통한 면도 있다.


연호야, 미안하다..

엄마가 참 많이 부족하구나.

다가오는 봄.. 너는 세 돌을 향해 가고 있지.

엄마는 너에게 많이 배워야겠다. 

고운 마음, 다정한 마음, 깔깔 웃기, 도전하기..   

엄마에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 

우리 같이 잘 자라자. 

사랑한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주말,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강릉에 다녀왔다.


영동지방에 25년만의 폭설이 내렸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고향집에 가끔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곤 했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대체로 밝았지만 때때로 지치고 두렵고 걱정되는 기색이 느껴졌다. 

넓은 마당에 학생들 다닐 길을 치고,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계속해서 눈을 치우느라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눈이 계속 쏟아지던 2주 동안은 어린 아기들 데리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 속에 가겠다고 해도 부모님은 절대 못 오게 하셨을 것이다.

그 2주간 남편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자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토요일마다 출근을 했다. 

이래저래 부모님 곁에 가볼 수가 없었던 나는 걱정만 하면서 지냈다.








친정집은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외진 곳에 있거나해서 고립된 것도 아니고, 집이 낡거나 약해서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눈이 퍼붓는 동안 연로하신 할머니만 바깥 출입을 못 하셨을 뿐, 엄마 아빠는 마당에 길을 내고 찻길로 나가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농협마트에 가서 장도 봐오시며 다행히 아주 큰 어려움은 없이 지내셨다. 

하지만 그 시점에 강릉에 있었던 누군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끝도 없이 눈이 쌓이고, 어렵게 뚫어놓았던 작은 길마저 다시 또 눈속에 묻혀 사라져 버릴 때.


멀리 있는 자식들은 모두 전화기로만 가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까운 이웃들과도 하루나 이틀 걸러서야 한 번쯤 눈 속에서 걱정되는 안부만을 주고 받을 수 있을 때. 

 

비록 아무 힘도 안 되고, 눈치우는 것도 크게 거들 수 없고, 어린 자식들 잔뜩 데려가 되려 일거리나 더 늘려놓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얼굴을 보러, 

엄마 아빠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고, 손을 잡아보고, 안아보고 싶어서 강릉에 너무 가고 싶었다.


다행히 지난 주말에는 남편이 바쁜 일이 마무리되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연수가 감기를 심하게 앓았지만 거의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들은 모두 건강했다. 

토요일 아침, 어쩔까 망설이던 우리는 전격 결정을 하고 후다닥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엄마, 눈이 바다같아!!"

외가집 마당에 도착한 연호가 내게 소리쳤다.


^^

바다같았다. 

햇볕에 녹으라고 아빠가 헤쳐놓은 눈들이 마당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 좋아하는 연수가 그냥 있을리는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눈더미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자기 키보다 높은 눈더미 위에 올라선 연수는 살짝 무서워보였다. 

이내 발이 푹푹 빠졌고, 부츠도 눈 속에 깊이 박혀버려 연수는 금방 발을 적시고 집으로 철수했다.

대신 따뜻한 방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할아버지가 사다주신 간식을 냠냠 먹으며 제가 좋아하는 케이블 만화를 실컷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아픈 뒤에 이보다 좋은 휴식이 있으랴... 따뜻한 아랫목에 군것질거리 쌓아놓고 마음껏 TV보며 뒹굴거리기. ^^

오고가는 길이 멀어 고단했지만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보통 때보다 훨씬 즐겁고 여유로운 주말이 열린 것이다. 







대신 부모님은 엄청 바빠지셨다.ㅠㅠ


괜찮다고, 안 와도 된다고 해도 

걱정된다며 늘 못와봐서 애달파하던 막내딸이 

마침내 갑작스레 떠났다고 통보하자

두 분은 잠시 대책회의를 하시고는 신속하고 민첩하게 대식구 맞을 준비에 돌입하셨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연제의 첫돌을 축하하는 외가집 생일잔치. ^^;;


연제의 돌은 내가 어머님께 부탁드려 상주 시댁에 가서 하기로 했다.

연제의 돌잔치는 집에서 꼭 해주고 싶었다. 

집에서 돌상차려 따뜻하게 아이의 일년을 축하해주고, 아이를 잘 보살피고 지켜준 가족들과 집과 좋은 기운들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리는 시간으로 소박하고 뜻깊게 보내고 싶었다.

서울 우리집에서 하면 제일 좋겠지만 혼자 준비할 엄두가 잘 안났던지라 어머님께 부탁드렸고

어머님께서 그러자고 들어주셔서 다음 주말에 시댁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잘하는 일이라고, 어른들 곁에 가서 잘 하고 오라고 하셨던 친정부모님은

막상 연제 생일이 가까워오자 '외가에서도 뭘 좀 해줘야할텐데..' 하고 나와 통화할 때마다 걱정을 하시더니

마침 우리가 내려온다 하니 '아이구 잘 됐다, 이참에 외가집에서도 연제 생일상을 차려주자'고 의논을 하셨던 것이다.









수수팥떡과 삼색 경단을 올려놓고 

고운 과일들도 접시 가득 담은 예쁜 상 앞에

연제를 세워주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형들도 신이 나고, 연제도 싱글벙글 하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증조할머니도 함빡 웃으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증정되는 금반지! 두둥~~~! ㅎㅎㅎ








'금은 역시 깨물어봐야 제 맛이지~! 냠냠...' 맛을 아는 연제. ㅋㅋ








이런 순간은 자주 없다.

살면서 아주 드문 행복하고 고마운 순간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는 것이다. 

비록 사진에는 없지만 이 순간, 카메라를 들고 '하나 둘 셋~!'하며 웃고 있는 수호제 아부지까지 모두 함께 말이다.









외가에서 차려준 제 생일상을 잘 받고난 연제는 흐뭇하게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은 모두 제설작업에 동원!


두둥.... 이걸 모두 치우라고?!!!

ㅎㅎ


아이들이 외가에 올 때마다 신나게 놀던 모래언덕 자리가 주위의 눈속에 움푹 들어가보일만큼 눈이 많이 왔다.









두 삽뜨고 사진부터 챙겨서 찍는 나는야 전시행정가.. 아니 블로거. ^^;;;


웃고있는 아빠 모습이 좋다. 

어릴때, 그러니까 1m가 넘는 폭설이 왔던 25년전 그 때를 나도 기억한다.

12, 3살 무렵이니까 꽤 컸을 때인데 그때도 나는 이 집, 이 마당에 서있었다. 

연수가 올라섰던 차고옆 눈산에 그 때 나는 눈터널을 팠었다. ^^

그리고 우리집에서 지금은 마을회관이 있는 방앗간터까지 아빠가 길게 눈썰매 길을 다져주셔서

비료푸대를 깔고 신나게 눈썰매를 탔었지..

신나고 즐거웠던 그 겨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밝고 좋았다.

눈썰매를 타며 깔깔 웃던 볼이 빨간 소녀가 어느새 서른일곱 세 아이의 엄마라니.. 시간은 정말 장난꾸러기다.

  








어쨌든 나는 눈 좀 쳐본 뇨자!

연제 자는 한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마당 한 구석과 텃밭의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구덩이의 눈을 좀 판 것으로 

그래도 나도 눈 치는 것 거들었다고 있는대로 생색을 내고 

눈을 보며 엄마가 타오신 뜨거운 믹스커스 한잔도 분위기 제대로 내며 마시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강릉에 사는 친정언니 부부가 점심을 사주었다.

해물찜과 칼국수를 먹었는데, 국수까지 먹었으니 연제 생일은 제대로 한 셈이라고 엄마가 말해 모두 웃었다.

커피를 마시러갔던 카페 근처에 '순개 습지'라는 작은 습지가 있었다. 

강릉은 습지 복원사업이 한창인 것 같았다. 

저탄소녹색성장 시범도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빙상 경기들을 비롯한 여러 경기가 열리게되는 강릉.

대규모 토목사업은 필연코 환경을 해치기 마련이지만 '녹색'이라는 도시의 지향이 부끄럽지 않도록 새롭고 대안적인 발상과 크고 작은 노력들이 조금씩이라도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연수야, 잘 나아라.

주말동안 눈 속에서 많이 놀고 돌아와 고단해했던 연수는 오늘에는 거의 다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든 감기 잘 견뎌내고, 엄마 고향에도 함께 잘 다녀와준 연수. 고맙다. 까불고 밥 안먹는다고 화내서 미안..ㅠㅠ 









서울로 떠나기 전, 잠시 경포바다에 들렀다.

연호는 파도가 가까이 올까봐 무서워 자꾸 돌아보느라 사진기를 쳐다보질 못했다.


언젠가 남편이 어떤 블로그에서 읽었다며 해준 이야기를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한달에 한번, 주말 이틀 부모님 집에 내려간다고 해도 24일, 명절에 며칠 더해도 30일이 안된다는 얘기.

그러니까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님과 일년에 한달, 365일중에 30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렇듯이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있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엄마가 언제 오시나'하고 시장간 엄마를, 들일하는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고

주말에 잠시 예쁘게 차려입고 명승지나 유원지에 가서 엄마 옆에 형제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앞뒤로 올망졸망 올라 타고 즐겁게 시골길을 달렸고

엄마의 포근한 품에 안기는 것이, 아빠의 든든한 손을 잡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기쁘고 좋았었다.


그런 시절을 거쳐, 

그 시절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자랐다.

숱한 위험과 어려움이 따르는 거친 세상에서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준 그 분들이 있어서 우리는 유년기를 마치고 어른이 되었다.


한 때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보금자리이자 은신처이자 넘고 싶은 벽이기도 했던 

그 모든 것이었던 부모님의 품을 

가끔, 아니 자주 보고싶다.

이제는 날로 약해져가시는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든든하고 포근한 그 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고,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이제는 내가 낳은 아기들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토요일 아침, '엄마아빠가 그리 보고싶나?' 하면서 처가로 달려가준 남편, 고마워..^^









눈 덮힌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집 마당에 서서 오래오래 손흔들어주시던 엄마 아빠 할머니 모습을 마음에 담고.



눈이 소리없이 잘 녹기를 빈다. 

눈 속에 일어났던 많은 아픈 일들의 상처는 봄이 온다고 쉽게 아물지 않겠지만..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과 젊은이들

사랑으로 사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봄햇살이 고루 찾아와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umma! 자란다2014. 2. 22. 01:04




연수가 많이 아팠다.


화요일 오후에 어린이집 마치고 와서 동네에 있는 작은 실내놀이터에 가서 한참 신나게 방방(트럼팰린)을 뛰고 왔다.

그 날 밤에 자는데 몸이 많이 힘든지 끙끙 앓고 자꾸 깨더니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머리가 뜨끈했다.

안하던 기침도 콜록콜록 터져나왔다.


어린이집에 한동안 신종플루를 앓는 아이들이 많았다.

선생님들께서 전염을 주의해달라고 여러번 당부하셨고 어린 동생들도 걱정되고 해서  주에는 연수를 며칠 어린이집을 쉬게 했었다. 

가을 초입에 기침감기를 앓고 나은 뒤에는 겨우내 연제가 자주 훌쩍거리고, 연호가 감기를 오래 앓을 때에도 옮지않고 거뜬하게 잘 지내던 연수였다. 이제 많이 커서 면역이 좀 강해졌나부다... 생각했는데.


겁이 덜컥 났다. 

어린이집도 그렇고, 실내놀이터에는 초등학생 형아들도 많은데 혹시 신종플루가 옮았나..? 

오랫만에 너무 많이 뛰고 놀아서 몸이 힘들어서 그런가? 

놀이터에서 땀난 채로 찬바람쐬고 집에 와서 감기에 걸린걸까....?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휘리릭 머리속을 지나갔다.

오늘은 어린이집을 쉬라 이르고, 좀 있다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안그래도 연제가 요즘 매일 동네 소아과에 가서 귀치료를 받고 있었다.

한동안 감기도 안 걸리고 잘 지내던 연제는 지난주 토요일부터 갑자기 오른쪽 귀에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병원에 가니 '외이도염'이라고 진단하셨다.

고막 바깥쪽, 그러니까 귀의 입구 정도 되는 곳에 물이 들어가서 잘 마르지않고 고여있다보면 생기는 농으로,

아기도 아프거나 하지는 않고 귀가 좀 답답하고 축축해서 기분이 안좋으니 평소보다 보챌 수 있고, 

따로 약도 없고 병원에서 잘 닦아내고 집에서는 드라이기 찬바람을 쐬어 잘 말려주면 나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서 월요일, 화요일 계속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이 면봉으로 외이도에 고여있는 농을 닦아내주시고

적외선을 잠깐 귀 속에 쬐어주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연제는 밥도 잘 먹고 잠도 평소처럼 잤지만 때때로 귀를 답답해했고, 자다 깨면 불편하고 아픈 기색으로 울어서 엄마인 나도 좀 예민해져 있던 차였다.


이런저런 생각은 많지만 어린 아이들 다 데리고 한번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지라 

우선은 졸려하는 연제를 재워놓고 연수 상태를 지켜보며 이것저것 꼭 필요한 집안일을 부지런히 했다. 

점심먹고 오후에는 연제가 또 한번 낮잠잘 때 연수랑 연호까지 낮잠이 들어 온 식구가 한잠 달게 잤다.

잠을 자고 나니 연수는 열이 많이 내렸고, 컨디션도 한결 나아보였다. 

그렇지만 평소보다는 훨씬 힘들어보였고, 물어보니 제법 거리가 되는 병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는 없다고 했다.


아이들 셋을 옷입혀 차에 태웠다.

평소에는 나 혼자 아이들 태우고 운전하는 일은 거의 안한다.

아이들 모두, 어린 연제까지도 카시트에 잘 앉아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가끔 내려달라 보채고 울 때도 있어서

아직 초보운전인 내가 세 아이태우고 혼자 다니는 일은 되도록 안 했다.

보통때 같으면 연수는 자전거타고, 연호는 유모차태우고, 연제는 내가 아기띠해서 안고 걸어서 15분쯤 거리에 있는 동네 소아과병원에 가겠지만 

연수가 아프니 어쩔 수가 없었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병원 근처까지 가서 차를 잘 세우고, 큰 아이들 내려주고, 연제 아기띠에 안고 병원으로 갔다.

연수는 이제 열이 내려있었다. 

가슴과 등을 청진하고 귀, 코, 목을 두루 살핀 선생님은 신종플루를 의심할 상황은 아닌 듯하니 기침콧물약만 우선 처방하고 경과를 보자 하셨다.

연제는 귀가 거의 다 나아 앞으로는 집에서 잘 말려주시기만 하면 되겠다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연수 약을 짓고, 아이들과 약속했던 작은 로봇장난감이 붙은 비타민 하나, 로봇 그림이 그려진 밴드 한통을 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 나은듯 좋아하며 펄쩍펄쩍 뛰는 연수와 형이 아픈 덕분에 좋아하는 로봇밴드를 얻어 기쁜 연호, 엄마 품에 안겨 바깥구경에 신난 연제를 보니 

힘들어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희들 데리고 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모두 기쁘니 엄마도 좋다. 크게 아프지 않으니 정말 고맙다..    

우르르 병원건물 지하에 있는 마트로 가서 아이들 좋아하는 바나나와 딸기를 샀다. 

집에서 과일 먹고, 물 많이 마시면서 푹 쉬면 잘 나을꺼야.. 얘기하며 차에 태워주고 집까지 조심조심 운전해서 잘 돌아왔다.

오전에 미리 만들어둔 카레로 저녁도 모두 잘 먹고 다 괜찮을 것 같은 안도감에 푸근히 잠들었다.

 

그런데 그 날밤에도 좀 끙끙 앓으며 잤던 연수가 목요일 아침에는 식구들 중에 제일 늦게까지 늦잠을 자더니 

아침밥도 먹지 않고 계속 졸려했다.

식탁에 앉아서 힘들고 졸린 표정을 짓고 있는 연수에게 '좀 더 자고 먹을래?' 했더니 그러겠다며 안방에 들어가 다시 누웠다.

연호, 연제 밥 먹이고 치우고 있다가 건너다보니 연수는 벌써 잠들어있었다.

가서 이마를 짚어보니 다시 열이 뜨끈했다.


연수는 한참 자다가 동생들 노는 소리에 잠이 깨서 거실로 나왔다. 

물을 한컵 다 마시고, 아빠가 연수 아프다는 얘기에 어제 퇴근하며 사놓은 '포카리스웨트'도 한 잔 마시고

소파에 앉아 동생들 노는 것 좀 보는가 싶더니 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기는 했다.

여섯살 봄에 기침감기가 오래 가다가 병원에서 '축농증' 진단을 받고 항생제를 많이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연수는 약만 먹고 나면 자서, 거의 하루 종일 잤다.

이번에는 약도 먹지 않았다. 

전날 병원에서 콧물기침약을 지어오긴 했지만 병원가기 전부터도 기침콧물은 거의 안나고 있었어서 먹이지 않았었다. 


연수는 이번에도 종일 잤다.

몸이 뜨끈뜨끈해지긴 했지만 체온계로 재서 높은 열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래 못 잤던 사람처럼, 평소에 조금씩 부족했던 잠을 오늘 다 자려는 사람처럼 

잠깐 일어나 물 마실 때를 제외하면 자고, 또 잤다.


한시도 쉬지않고 뛰고 까불고 법석 떠는게 하루의 전부이다시피한 일곱살 사내아이가 

마치 바쁜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을 맞은 고단한 아버지처럼

어딘가 머리만 닿으면 혼곤한 잠에 빠지는 모습은 낯설고 애처로웠다.

하지만 열이 올라 조금 끙끙 댈때는 제외하면 조용히 잠든 작은 아이의 몸은 평온해보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좀 쉬어야해요, 엄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점심에는 밥을 푹 끓여만든 죽을 연수에게 떠먹여 주었다.

연수는 소파에 앉아 얌전히 잘 받아먹었다.

한그릇을 다 먹고 나자 연수는 잠시 동생들을 보며 웃고 놀더니 또 잤다.







낮에도 계속 자는 형이 신기해서 연호는 계속 형 주변을 맴돌았다.

'엄마, 낮인데 형아 왜 계속 자? 

'응.. 형이 아파서 그래.'

'형이랑 놀고싶은데.... 내가 깨울까?'

'아니... 형아 좀 더 자게 놔두자. 형아 몸이 괜찮아지면 형아가 일어날꺼야.' 

'왜 자꾸자꾸 자?' 

'형아 몸이 아픈거 낫게 하느라고 열심히 일하느라 그래. 그 일이 지금은 제일 중요해서 다른 건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몸이 형아한테 코 자라 하는거야.


그러다 형이 잠시 깨면 기운없는 형아는 정작 암말 안 하는데 제가 나서서 

'엄마, 형아 좀 안아줘라' 했다.

'연수야, 엄마가 안아줄까?' 물으니 얼른 '응!' 한다.

소파에 앉아 안아보니 아파서 그런가.. 연수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잠시 엄마 품에 폭 안겨있던 연수는 다시 스르르 소파에 기대 누웠다.








어린 연제도 계속 자던 큰 형아가 깨면 반가워서 형 앞에 와서 웃으며 놀았다.


연수가 자니 낮에는 온 집이 바람잔 솔처럼 조용했다.

연제도 잘 때는 나도 졸렸지만 연호가 안 자니 나까지 잘수는 없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졸음을 깨우고 잠든 연수 이마도 짚어보고, 콩나물무국도 끓이고하며 낮시간이 조용조용 흘러갔다.


엄마의 긴장이 전해져서 저도 나름 긴장했었던지 종일 조용히 잘 놀았던 연호가 저녁이 되니 유난히 엄마한테 매달렸다.

형이랑 못 놀아서 많이 심심하기도 했을테고, 또 낮잠을 안자 졸리기도 했던 연호는 엄마밖에 어울일 사람이 없으니 자꾸 매달리고 연제에게도 자꾸 시비(?)를 걸어 울리고, 그러다 결국 저도 울기를 반복했다.  

연수가 해주던 몫이 참 크구나.. 새삼 알았다.

연호랑 같이 잘 붙어서 놀고, 연제도 '잼잼 곤지곤지 까꿍'해주며 놀아주고 

그도 아니면 그저 혼자라도 연수가 왔다갔다 신나게 뛰어다니고 노는 것만으로도 동생들은 같이 따라다니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래저래 하루해를 잘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는 조용해서 평화롭기도 했던 것 같던 집이 

저녁쯤되니 어린 동생들은 이래저래 울고, 연수는 아직도 자고, 나는 종일 집 밖에 한발짝도 못 나가보고 아이들 외에는 아무도 못 만난 것이 문득 답답하고, 불안하고, 너무 힘이 들었다.

겨우겨우 저녁먹고 잠자리를 차리는데 그때쯤에야 연수가 조금 기운을 차리는게 보였다.

연호의 로보트 얘기에 '흐흐흐흣'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보니 '아 괜찮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탁 들었다.

연수는 웃음이 많은 아이다. 재미있는 장난을 좋아하고, 늘 웃는다. 깔깔깔, 낄낄낄, 흐흐흑, 여섯살쯤 되니 하도 개구진 장난이 심해져서 나는 깨소금 냄새 풍기는 요녀석의 장난기어린 얼굴과 웃음도 못마땅해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웃음이 많은 아이여서, 깊은 아픔을 견뎌낸 뒤 몸과 마음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웃어준 것이어서

정말 고마웠다.  

연수는 연호에게 저희들이 좋아하는 로봇 장난감 얘기를 하고, 이불 장난을 조금 했다.

그리고 나서 연호는 잠들었고, 연수도 또 잠들었고, 연제도 조용해진 방에서 젖을 먹고 잠들었다.

  

집은 다시 고요해졌고, 나는 연수 아픈 것에 대해 책을 찾아 읽은 다음 마음을 가라앉혔다. 

평소와 참 다른 하루였다.

펄펄한 녀석들의 북새통에 집은 난장판이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그러다 형이 동생을 울기라도 하면 달래고 야단치느라 집은 더 시끌벅적하고 내 마음도 울그락불그락 널을 뛰지만 

누군가 아프니까 그런 '보통의' 날이 그리웠다.



  






금요일인 오늘 아침. 

연수는 컨디션을 80%쯤 회복한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놀아야지. 이렇게 노니까 이제 너같다.. ^^;;


오늘은 왠지 연수가 좀더 의젓해진 것 같았다.

아프고나서 그런가...

그전같으면 벌컥 성을 냈을만한 연호의 장난이나 실수에 가만히 참고, 조용히 대응하는 모습을 여러번 내게 보여주었다.

까부는 것도 살짝 덜했고.... 역시 아직은 좀 아픈 모양이다. ^^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제 힘으로 몹시 아픈 것을 견디고 일어난 연수가 대견하고 고맙다.

요즘 몸살감기가 얼마나 독한지 엄마도 앓아봐서 잘 안다.

내 큰 아이는 이제 더는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엄마에게 업어달라 안아달라 매달리는 어린 아기가 아닌 것만 같다. 

스르르 잠들어버려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혼자 누워 아픔을 견딜 줄도 알고, 

깨어있을 때에도 그저 말없이 엄마에게 기대 눈물을 닦고, 물과 음식을 고맙게 먹고, 투정도 짜증도 내지 않았다.

정말 많이 컸네.... 









세 아이 중에 누군가 아팠다가 나으면 잘 나아준 아이도 너무 고맙고, 

다른 형제들 아픈 와중에 함께 아프지 않고 건강히 잘 지내준 아이도 참 고맙다.

두루두루 모두모두 고맙고 또 고맙다.


연수가 아플때 집에서 걱정없이 쉬게 해줄 수 있는 것도 고맙다.

전염성 강한 질환이 돌 때면 어린이집을 쉬게 할 수도 있는 처지인 것이 고맙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은 아이들이 아프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프겠는가.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도 마음 아프고, 전염성 질환이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지 말아달라고하면

갑자기 또 집에서 아이를 봐줄 수 있는 분을 찾거나, 엄마가 어렵게 휴가를 내거나 해야할텐데 얼마나 어렵고 힘들까.

신종플루처럼 일주일 정도는 어린이집 등원이 불가해지는 질환은 더 무서울 것이다. 

아픈 아이도 걱정이고, 그 아이를 맘편히 푹 쉬게 해주기 어려운 환경도 걱정이고....

그에 비하면 내 집에서 언제든지 아이를 쉬게 해주고, 내 손으로 돌봐줄 수있는 내 상황은 훨씬 수월하고 감사한 일이다. 



이번 아픈 것이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고 했다. 

잘 견뎌내고 연수의 마음에도, 몸에도 단단하고 고운 나이테가 한 겹 더 자라기를 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umma! 자란다2014. 2. 16. 00:16





 


키우다보면 참 애잔해지는 아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둘째, 연호 말이다.


연호는 다정하고 살가운 성품을 타고 났다.

어릴 때부터 순했고, 길게 우는 법이 없었고, 잘 웃었다. 

얼굴 모습도, 하는 행동도 하도 예쁘고 앙증맞아서 늘 딸같은 아들이었다.


세 살 터울의 호랑이같은 형아가 으르렁 소리지르고 펄쩍펄쩍 뛰어 쫓아오면

무서워 얼른 엄마품에 달려와 숨고, 울지만 

그런 형아에게 어느새 또박또박 바른 말로 타이르기도 잘 하고, 먼저 장난치며 함께 깔깔 웃고 뛰어놀 때는 

꼭 친구같기도 한 의젓한 동생이다.


한 살배기 동생이 제가 노는 쪽으로 기어와 제 장난감을 잡으려하면

제 형이 제게 했듯이 동생을 때리거나 겁주기는 커녕

"엄마, 아기가 자꾸 와~" 하면서 울듯한 표정으로 도망오는 마음 여린 형이다.


  







귤을 까면 반을 뚝 잘라서 "아가, 먹어라~"하고 제 동생에게 나눠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 자리에 없는 식구를 찾아서 꼭 입에 넣어준다.
딸기를 씻어서 거실에 있는 식구들 같이 먹으라고 가져다주니
조금 먹다 말고 부엌에 있는 나를 황급히 부르며
"엄마, 빨리 와서 먹어~, 안그러면 형아가 다 먹어~!" 한다.


며칠전에는 잠자리에서 제가 읽어달라는 그림책을 다 읽어주고
이제 형아가 가져온 그림책 읽어주자 하고 읽는 동안
누운 내 머리맡에 앉아서 가만히 듣다 말고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우리 엄마 참 예쁘다... 엄마, 난 엄마를 키울꺼야."

"뭐라고? 엄마가 예뻐서 엄마를 키워줄 거라고~? ^^"

"응. 난 엄마를 키울꺼야!" 

"ㅎㅎㅎ 에고.. 고맙다, 연호야.."


강아지가 예뻐서 강아지를 키우듯이, 
꽃이 예뻐서 꽃을 키우듯이
엄마가 예뻐서 엄마를 키우겠다는 세살배기 아들의 말은
얼마나 달콤한 위로와 찬사로 들리던지..

하루의 피곤이 온통 밀려오는 저녁 잠자리에서, 
몸에 남은 힘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모조리 쥐어짜는 심정으로
너희들의 하루를 평화롭게 마무리해주려고 정말로 엄마가 얼마나 애쓰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순간 네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으로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을 전해주어서 
연호야.. 정말 고맙다.










작년 가을과 겨울 초입에 연호가 많이 아팠었다.

가벼운 감기가 괜찮아졌다 심해졌다를 반복하면서 오래 갔다.

그러다 수족구가 지나갔고, 알레르기성 비염처럼 콧물이 쉬지않고 흐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중이염이 와서 하룻밤 귀가 많이 아프다며 엉엉 울어서 우선 해열진통제를 사먹고 자고 

다음날 병원에 다녀온 후에는 귀에서 이틀쯤 고름이 나오기까지 했다.

나는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놀랐다. 

다행히 모두 크게 위험한 병들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쉬고 놀고 하면서 나아갔고, 중이염은 항생제를 이틀 정도 처방받아 먹고나니 다행히 잘 나았다.


연호가 오래 앓는 동안 나는 함께 오래도록 마음을 앓았다.

연호가 아픈 것이 모두 내 탓 같았다.


두 돌을 채우고 맞은 가을, 

제 또래들이 아직도 아기 대접을 받으며 엄마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을 때에 

벌써 형님이 된지 반년도 넘은 연호는 훌쩍 큰 아이 태가 나고 있었다. 

유모차를 타거나 아직 엄마에게 업혀다닐 나이에 연호는 유모차를 동생에게 내어주고 그 옆에서 제 힘으로 걸었다.

앞장서 뛰어가다 넘어질 때도 많았다.


동생이 태어난 봄부터 쉬를 가리기 시작해 두 돌 전에 기저귀를 떼었던 연호는 

어느새 화장실도 엄마 없이 혼자 다녀올 수 있었다. 

아기 변기말고 저도 어른변기에 쉬를 하겠다며 까치발을 하고 서서 야물딱지게 쉬를 했다.

연수에 비하면 밥도 훨씬 잘 먹는 편이었고, 멸치나 나물반찬도 잘 먹어서 엄마를 감탄하게 하곤 했다.  










하지만 아직은 엄마 손길이 더 많이 가야하고, 차근차근 가르쳐줘야 하는 것도 많은데

어린 동생 돌보느라 바쁜 엄마가 연호에게 미처 못 해주는 것들이 많았다.


밥상을 차리면 밥을 좋아하는 연호는 우선 제 식탁의자에 와서 앉는다.

아직 숟가락질이 서툴어 엄마가 도와줘야하는데 

엄마가 동생 이유식부터 먹이느라 분주해서 연호 밥 먹는 것을 잘 도와주지 못하면 

연호는 저 혼자 포크로 반찬 좀 집어먹고 하다가 그만 밥 안먹고 놀고있는 형아 곁으로 가버렸다. 

많이 큰 연수는 밥은 꼭 먹어야한다는 걸 알아서 나중에라도 식탁에 와서 차려놓은 제 밥을 다 먹지만 

아직 어린 연호는 한번 식탁을 떠나면 그 뒤로는 잘 돌아오지도 않고, 따라가서 먹여도 밥을 잘 안 먹는다.

밥을 딱 먹으려고 왔을 때 얼른 도와주며 먹여야하는데 

식구들이 식탁에 앉으면 따라와서 바둥거리고 저도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는 연제를 챙기다보면 자꾸 그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다. 

한꺼번에 세 녀석 밥을 먹이고 내 밥도 먹어야하는 정신없는 식사시간이 끝나고보면 

언제나 제일 적게 먹고, 잘 챙겨주지 못한 것은 연호였다. 


그러다 감기에 걸려 코도 막히고 목도 붓고 하니 밥은 더 안 먹으려 해서 

따뜻한 꿀차같은 것을 타주면 그것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과일이나 빵같은 간식을 좀 먹고, 우유나 미숫가루 같은 편한 음식만 찾았다. 

감기를 오래 앓았던 그 시점에 연호는 정말 잘 안먹었고,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겠지만 

여러모로 엄마 손길이 제일 부족해서 연호가 아픈 것 같아 너무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수족구 때문에 손바닥에 허물이 다 벗겨졌을 때 나는 오랫만에 연호에게 젖을 먹여주었다. 

동생이 태어나던 20개월까지 잠이 올 때 엄마 젖을 먹었던 연호는 

동생에게 엄마 젖을 양보한 후에는 잠이 올 때 엄마 젖을 만지기만 했다.

울고싶을 떄도, 기분이 안 좋을 때도, 그냥 엄마에게 안기고 싶을 때도 연호는 늘 엄마 품 속에 손을 넣어 엄마 찌찌를 만졌다.

그렇게 엄마 냄새와 엄마 촉감에 폭 안겨있다 가는 것이 어린 연호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일까...

가끔 연호는 '엄마 찌찌에 뽀뽀할꺼야' 하면서 젖을 쪽 빨기도 하고, '나도 엄마 찌찌 먹을래'하고 젖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반장난으로 조르는 것이라 '아기 먹어야지..'하고 달래면 웃으면서 입을 빼곤 했다. 

     

그런데 수족구에 걸렸을 때 

코가 막혀 밥을 잘 삼키지도 못하고, 기운없이 너무 아파하는 연호를 보니 너무 가엾고 걱정스러웠다.

엄마 찌찌 달라고 조르는 연호에게 '그래, 연호 너무 아프니까 엄마 찌찌 먹고 얼른 나아라..'하며 찌찌를 주었더니 

아픈 와중에도 좋아하며 마음껏 빨아먹었다.   

그 뒤로 연호는 "엄마, 연호 손바닥 또 아프면 엄마 찌찌 먹어?"하고 종종 물어본다. 

웃으면서 '그래' 대답해주면 너무 좋아한다.








- 연호가 그린 '사과' 그림을 형 그림 옆에 붙어놓고- ^^




연수를 키우면서 보니 아이들은 정말 금방(?) 큰다는 것을 알겠다.

언제 제 손으로 밥을 떠먹나.. 걱정되던 연수도 여섯살이 되니 저 혼자 밥 한그릇 어찌어찌 다 잘 먹고, 

더이상 엄마 찌찌는 찾지도 않는다. ^^

가끔 안아달라, 업어달라 조르기도 하고

밤에는 '엄마, 내 옆에서 자면 안 돼?' 하는 아직 어린 일곱살이지만  

엄마 품을 파고드는 어린 시절은 벌써 지나갔다.  

이 놀이 하자, 저거 만들어달라 요구는 많지만 혼자 쓱쓱 만들고 그리며 놀기도 잘 놀고, 제 손으로 옷입고 치우며 할 줄 아는 것도 많다.  

어쩌면 동생이 둘이나 있는 큰 형아여서 저도 빨리 엄마 무릎에서 밀려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호도 금방 클 것이다.
아직은 엄마에게 툭하면 뛰어와 안아달라 조르고, 걸핏하면 엄마 찌찌를 찾지만 
이 시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큰 형아와 늘 어울려놀아 놀이도, 말도, 행동도 형아를 똑같이 따라하는 연호는 더 금방 의젓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쉬지않고 엄마를 찾는 네살 연호의 청을 부지런히 들어줘야한다.
저 혼자 할 줄 아는 놀이는 많지 않고, 변덕은 또 죽 끓듯이 심한 우리 네 살 형님꼐서 
'엄마, 내 수레 어디 있어?' 찾으면 얼른 대령하고
'엄마, 트라이탄 합체 해줘~, 해 달란 말이야~~'하면 또 낑낑거리며 그 뻑뻑한 3단합체 로봇을 들고 끙끙 거릴 일이다.

다정한 연호는 그러면 내게 꼭 칭찬을 해준다.
엄마가 화도 안내고, 저희들 청을 들어주며 포근한 밤을 맞고 있노라면 '엄마가 있으니까 참 좋다, 그지?' 하고 제 형과 엄마 머리맡에 앉아 얘기하기도 하고, 
제가 해달라는 것을 열심히 하고 있는 엄마 옆에서 '엄마, 참 잘한다!' 감탄하며 좋아서 박수도 짝짝짝! 친다.






-형님 일년. 그 사이 아기에서 아이로 훌쩍 자란 우리 둘째.언제나 애틋하다-




겨울 동안 형아가 어린이집 가고, 동생은 낮잠자는 한시간 남짓한 시간이 연호가 엄마와 단 둘이 보내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엄마는 커피를 마시고, 연호는 간식을 먹고

둘이 함께 블럭이나 공룡이나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소파에 꼭 붙어앉아 책을 읽노라면 

연호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행복해요! 행복해요!'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직은 너도 어리고 동생도 어려 

엄마도 너희들도 모두 많이 힘든 시절이지만

지나고나면 또 이 시절이 얼마나 그립고 예쁜 시절일까.

그리고 지금 너는 정말로 너무 너무 예쁘단다.

엄마는 너를 볼 때마다 감탄하고 웃게 돼.


힘내서 우리 같이 잘 자라자.

언제나, 언제까지나 사랑한다. 연호야.













Posted by 연신내새댁



설을 잘 쇠고 왔다.


어른들과 떨어져 살고 자연의 흐름에도 많이 무딘 도시의 엄마다 보니 

명절이나 절기같은 우리네 세시풍속에 대해서도 많이 둔감해진다.

설은 차례지내고 세배하고 떡국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 날이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며 옷가방안에 고운 한복을 챙겨넣었다. 

하지만 그 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 큰 명절을 맞는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한 며칠 아이들 데리고 시댁에 가서 지내다오는 시간. 

제사음식 준비며 대식구가 한데 모여 여러날 먹고 지내는 일로 고달프기도 하겠지만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랫만에 한자리에 모이니 반갑고 좋은 연휴.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종종거리며 큰 가방 여럿에 짐을 싸고 세 아이 씻기고 옷입혀 차에 태우고 숨차게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명절이 시작되고보니 마음에 다가오는 일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참 많이 컸고, 고왔다.

오랫만에 만난 사촌들끼리 다정하게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시아버님어머님께는 다섯명의 손주가 있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결혼한 아가씨네 아이들 둘, 그리고 우리 아이들 셋. 

아직 결혼 전인 도련님이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더 많은 아이들이 명절에 할아버지할머니를 찾아올 것이다. ^^


시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신다.

남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어린 삼남매가 환하게,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이 많다.

행복하게 자랐구나.. 부모님이 참 예뻐하며 키우셨구나.. 싶었다.

살림은 어렵고 일은 고단하셨겠지만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시부모님이 삼남매를 바라보며 이렇게 환하게 많이 웃으셨구나.. 짐작하곤 했다.








결혼전에 돌잔치에 가서 처음 보았던 시댁의 큰조카가 어느새 아홉살이 되었다. 

귀엽고 잘생긴 큰조카는 여전히 개구쟁이지만 그래도 이젠 살짝 의젓한 느낌도 든다. 

내 큰아이 연수가 일곱살인 것도 신기하다.

내 삶에 흐르는 시간을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며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20평 남짓한 작은 주공아파트인 시댁에 부모님, 우리 가족, 아가씨네 가족, 도련님이 모두 모이면 12명.

큰 방, 작은 방, 거실과 주방마다 아이들과 어른들로 넘쳐난다. ^^

남편이 학생이던 무렵에 임대로 들어와 2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은 낡고 좁다.

하지만 어머님이 워낙 깔끔하게 닦고 정리하며 살아오셔서 따뜻하고 깨끗하다.


처음 결혼해서 시댁에 왔을 때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우선 집이 너무 작아서 놀랐고, 집안 곳곳에 버리지 못한 오래된 세간들이 층층이 쌓여있어서 놀랐고, 그럼에도 또 그 낡은 집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고 늘 정리해온 부지런한 손길이 느껴져서 놀랐다.

가장 놀라운 것은 분명히 좁고 답답해보이는 집인데 좀 앉아있다보니 의외로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시댁에 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시댁에서 자고 나면 왠지 '아.. 내가 지금 부모님 품에 와서 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천천히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사랑하셨다. 

하나하나 사랑하셨고, 다정하셨다. 

삼남매는 다정하게 자랐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하시는 오토바이 가게에 붙은 단칸방에서 서로 살을 부대끼고 뒹굴고 안고 아끼며 자랐다.

커서도 여전히 집은 작고 형편은 어려웠으므로 서로 많이 챙겨주고 배려하고 염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명절에 만나면 어머님은 늘 어린 아기들을 키우고있는 나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셔서 제사음식 장만부터 설겆이까지 거의 내게 안 맡기고 본인이 다 하려 하신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명절날 오후에 친정으로 오는 아가씨는 역시 새언니인 내가 힘들까봐 설겆이며 우리 큰아이들 밥먹이는 것까지 다 살펴준다. 

명절지나고 좀 한가한 다음날 오전, 어머니가 아까워서 못 버리고 쌓아둔 낡은 세간살이들을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명절 지내느라 어질러진 부엌도 정돈하고, 좁은 수납공간들을 두루두루 훑어 숨통을 좀 틔워놓는 것도 아가씨다. 

명절이면 우리는 모두 아가씨네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함께 놀 사촌형누나를 기다리고, 남편은 좋은 술친구인 매제를 기다리고, 나는 속깊고 고마운 시누를 기다린다.  

얼굴도, 마음도 곱고 예쁜 딸인 아가씨가 오면 낡은 집은 더 환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다. 

집은 더 복닥거리고, 잠자리도 다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함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명절마다 두 밤, 세 밤씩 한데 모여 자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물론이요, 고모네와 삼촌이 한해 한해 더 살갑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형제가 다정한 것이 참 큰 복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시댁 형편이 넉넉치 않고,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늘 힘들게 몸써서 일하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걱정되지만 

가족들이 서로에게 다정하고 화목하게 지내왔다는 것은 정말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 참 큰 내 복임을 명절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모의 둘째인 예쁜 현서는 새해 다섯살, 우리 연호는 네살이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째들이 요리 조리 몰려다니며 깔깔거리고 장난치고 뒹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명절이면 아침 일찍 찾아가 함께 차례를 지내고 오는 큰댁에는 새해 세 살이 된 아기가 한 명있다. 

촌수로는 우리에게 조카뻘이지만 나이는 우리와 동갑인 큰댁 조카부부는 우리보다 두어해 일찍 결혼했지만 오래도록 아이가 없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명절마다 우리집에는 손주들이 하나둘 늘어 네 명이 되도록 큰댁에는 아이가 없는 것이 마음이 쓰이곤 했는데 

참 기쁘게도 연제 태어나기 얼마 전에 큰댁에도 첫 손주가 태어났다. 

돌지난지 석달쯤 된 그 아기가 올 설에는 한복을 곱게 입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세배 흉내도 내서 두 집 가족이 모두 크게 웃으며 세배돈을 고사리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

어른은 아이를 보살피고, 아이들은 제 힘껏 뛰놀고 웃으며 자라고, 어른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게 되는 것.

그게 참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가족이 모두 모인 명절에는 새삼 깊이 느끼게 된다. 

 

아이 키우고 돈 벌며 사는 일이 힘들고 정신없어 부모들은 별다른 새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새해의 감흥을 따로 찾을 여유도 없지만 

문득 이렇게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의 훌쩍 자란 모습을 볼 때

'아 나의 지난 시간이 저 속에 녹아있구나.' 생각하게 되고 

'올해도 저 아이들을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키워야지..' 언뜻 다짐하는 것으로 새해의 각오도 세워보게 된다. 









순둥이 막내와 할아버지. ^^

낯가림이 별로 없는 연제는 이번 명절에 할아버지와 짝꿍이 되어 잘 놀았다. 


말수가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한 경상도 분인 아버님은 조금 큰 아이들은 잘 데리고 놀지 못하신다. 

마음은 참 다정하신데 표현을 잘 못하시니 아이들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하시는 것이다. 

시댁 식구들이 모일 때면 아버님은 한번씩 큰 손주들 네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다녀오시며 슈퍼에서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과자를 사주시곤 했다. 

아이들도 그걸 알아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으레 장난감을 한번은 사주시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조르고 한다.  

그것이 거의 유일한 아버님의 애정표현이고, 큰손주들과 어울리시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돌도 안된 연제같은 아기 손주에게는 아버님도 그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실 수가 있다.

안아주고, 얼러주고, 좋아하시는 유행가 노래에 맞춰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흔들며 어깨춤도 추시고, 입에 맛난 것을 넣어주시면서 행복해하시고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참 좋았다.

연수는 어려서도 낯가림이 심해 할아버지께 거의 가지 않았다. 

연호는 지금의 연제처럼 아기시절에는 할아버지께 잘 갔지만 네살이 된 올해는 할아버지가 안아보려고 해도 몸을 빼고 도망을 다녔다. 어느새 많이 자라서 고집도 궁리도 커진 연호인지라 오랫만에 뵌 조금 엄한 인상의 할아버지께 금방 살갑게 대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자주 뵙고, 많이 같이 놀고 하며 다정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아이들이 할머니할아버지를 푸근하게 가깝게 느낄텐데.. 

내가 그걸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죄송했다. 이제 연제도 좀 컸으니 좀더 자주 시댁에 내려오고 해야지..   

연제가 자라서도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 할아버지 품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연수랑 연호도 할아버지와 차츰 더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면서 할아버지를 다정하게 대했으면 좋겠고.












아버님은 속정이 깊으시다.
내게도 그러시고, 아들들과 딸, 손주들을 대하시는 것을 보면 그 다정함을 알겠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께 속상해하실 때가 많다. 
명절이, 삶이, 아버님이.. 어머님을 고달프고 힘들고 속상하게 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어머님이 화를 내실 때 아버님은 별 대꾸는 않으시지만 좀 슬퍼보인다.
그 풍경이 결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님을 뵐 때 내가 가장 당황스럽고 마음 아픈 풍경이었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으니 젊으셨을 때는 아버님이 참 화를 많이 내셨었단다.
그러더니 몇해전부터는 화를 더이상 안 낸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화를 잘 내시던 시절을 마음 졸이며 견뎌내셨던 어머님은 
이제는 그 화를 아버님께 돌려주시려는 것처럼 한두마디 말끝에도 아버님께 울컥 화를 내시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익숙치 않아서 긴장하는 것일뿐
어머님아버님 사이에는 크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저 일상적인 대화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자주 조마조마했다.

자식들은 모두 아버님을 좋아한다. 
야무진 딸인 아가씨가 아버님께 술 좀 적게 드시라, 엄마 말 좀 들으라며 아버지께 이런저런 얘기를 시원하게 잘 하지만 
큰아들인 남편은 그런 말을 않는다.
대신 아버지와 함께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형편에서, 어딘가 비빌 언덕도, 특별한 기회도 없었던 
오토바이와 집짓는 기술 밖에 없었던 한 남자가 
어여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세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때로 큰 실수와 실패도 겪었고,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들을 참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자란 자식들은 
지금도 그들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나이든 아버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어머님은 아마도 아버님과 함께 살아온 긴 세월동안 우리가 미처 짐작하기도 어려운 많은 일들을 겪으시면서 애정 그 이상의 수많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니
지금 이렇게 아버님을 대하고 계실 것이다.
시간은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고, 삶은 계속 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께 힘이 좀 되어드리고, 그래서 부모님이 몸도 마음도 조금더 편안하고 푸근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보살펴드려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더 그렇게 할 것이다. 
손주들이 할아버지할머니께 드리는 행복만큼이나 다 큰 자식들도 부모님께 행복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작년에 고모네가 시댁의 TV를 3D 입체영상도 볼 수 있는 큰 것으로 바꿔드렸다. ^^

손주들에게 3D 안경을 씌어주시는 아버님의 즐거움이 내게도 전해졌다. 

이런 풍경이 있어서 명절이 좋다.








설날 큰댁 차례, 우리집 차례가 끝나고 나면 오후 느지막히는 어머니의 친정인 청상에 간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엄마인 청상 증조할머니께 세배를 했다.

우리도 외할머니께 세배를 하고 아이들과 똑같이 빳빳한 천원 새 지폐 한장씩 세배돈을 받았다.

청상할머니께 받는 천원은 늘 내게 복돈으로 여겨져서 나는 그 돈은 쓰지 않고 내 책상서랍속 지갑에 간직해왔다.

올해도 복돈을 받았다. 기뻤다. ^^ 아이처럼, 할머니께 받는 세배돈이 좋다. 










청상 진외가에 가면 아이들은 신이 난다. 
장작이 산더미같이 쌓인 어두운 광에 앉아 증조할머니와 같이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불을 떼보기도 하고..








고모부와 사촌, 육촌들과 어울려 시골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한다. 









다리 위에서 냇물에 물고기가 있나.. 살펴보는 중이다.


길에서 올려다보이는 앞산 산등성이에는 외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거기서 '조기 내 증손주 녀석들이 뛰어가는구나' 하시며 굽어보실 것 같다.

논밭과 내를 건너 바라보이는 앞산에 봉긋하게 솟은 외할아버님의 무덤은 청상 외가집 마당에서도 잘 보인다.

예전에는 누구나 시외할아버님처럼 

자기가 태어나 태를 묻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살던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자리를 마련하고 누워 잠들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여러번 집을 옮기며 자라고, 고향이라 부를만한 동네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또 어느 낯선 자리에 누워 잠드는 대다수 요즘 사람들의 삶이

문득 참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공간의 안정감. 

어린 시절을 한 동네에서 오롯하게 보낸 나에게는 이것이 참 크게 다가온다.

지금도 강릉 고향집에 가면 내가 태어난 집 자리가 지금 집과 밭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고 

옛집의 눈에 익은 뒷산의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수런수런 반갑게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마음 깊이 찡한 감동과 평화를 느끼곤 한다. 

청상은 비록 시댁이지만 내게는 그런 친정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곳이다.

명절마다 찾아와 외할머니를 뵙고 시골집의 돌답과 감나무와 대나무숲과 앞산을 바라보면 왠지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워지곤 한다.


외할아버님은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만난지 얼마 되지않아 그저 호감만 조금 가지고 있을 때 전화통화를 하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며칠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어른들을 좋아하는 나는 잘 모르는 어르신이지만 그 날 일기장에 짧게 명복을 빌어드렸었다.

그 후 남편과 결혼을 하고

외가에 와서 할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새롭다.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알던 어르신처럼 '안녕하세요, 할아버지'하고 인사드리게 된다.









아이들은 굽이굽이 시골 마을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어릴때 시골에서 자란 우리 고모부가 

솜씨좋게 물고기를 여러 마리 잡아오셨다.

따라갔던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른다.

패트병 입구를 잘라 거꾸로 끼우고 그 안에 된장 한숟갈을 넣은 어항(?)을 작은 냇물에 쳐두었더니 

아이들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아홉마리나 잡힌 것이다. ^^


손을 넣어 만져보고, 세숫대야를 흔들어 공기를 섞어주던 연수와 연호는 

'엄마, 물고기 우리집에 데려가서 키우면 안 돼?' 했지만

물 좋고 공기 좋은 청상을 떠나는 것은 이 물고기들에게 못할 일.

국 끓여먹을 것도 아니어서 

한참 외갓집 마당의 세숫대야 안을 헤엄치던 물고기들은

고모부와 일군의 조무라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저희 살던 냇물로 돌아갔다. 










시골집에 오면 나만큼 신나는,

나보다 할 줄 아는 것은 훨씬 많으신 

시골출신 잘생긴 우리 고모부. ^^

아궁이에 군밤도 구워주고, 고구마도 척척 굽는다.

남쪽 섬 출신인 사촌고모부는 아이들 데리고 강아지풀 꽃다발 만들어가며 동네 한바퀴 산책도 다녀오시고..

시골집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다. 

TV만화 틀어주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 지켜보는 것말고 

추억과 이야기거리가 될만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바쁘시다.

가마솥에서는 대식구가 먹을 육계장이 끓고..








서울이모님은 명절 지내며 어수선해진 외가의 부엌과 마당을 통털어 살림살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신다.

외할머니께는 따님이 세 분 있는데, 이 분들이 모이면 정말 대단하시다.

어마어마한 청소와 정리를 척척 해내고, 어머어마한 양의 먹거리들을 끝도 없이 내놓고, 그리고 또 어마어마한 양의 짐보따리를 꾸려놓으신다.

도시의 자식들 가져가라고 외할머니가 마련해놓으신 먹거리들을 필요한 집집으로 분배해서 싸고 

혼자 지내시는 외할머니가 찾기 편하게, 드시기 편하게 부엌을 정리하고 음식을 마련해놓는 손길이 다라라락 움직인다.  

두 분의 며느님도 명절을 치르며 참 많은 일들을 하시지만

모두 모여 있을 때보면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도 명절이면 모두 엄마 곁에 모이는 

이 댁의 세 분 따님들이 척척 가장 익숙한 손놀림으로 집 안팍을 돌보는 것이 느껴진다. 









외할머니는 어마무시하게 많은 자손들을 위해

이 집에서 가마솥으로 도토리묵을 한 다라, 두부를 한 다라 손수 만들어두셨고

떡국떡을 또 엄청 많이, 배추와 무를 또 이만큼 땅속에 묻어두고(이건 가을에), 고구마에 밤에, 간장 된장 고추장에,

엿과 땅콩을 넣어 강정을 또 이따만큼 손수 만들어놓으셨다. 

그리고 따로 튀밥은 어린 연제 먹으라고 우리집으로 또 한봉지 싸놓으셨다.    

두부만들며 나온 비지도 또 봉지봉지...


아이들 옷 챙기고, 어른들드릴 선물 조금, 용돈 조금 챙겨 내려오는 것이 명절 준비의 전부인 내가 

외할머니가 이 시간을 위해 들이시는 공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자손들의 새해를 열어주기 위해 몇날 밤, 몇날 날을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얼마나 애를 쓰며 보내셨을까.


 








설 연휴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청상 외가에 갔다. 

상주시내에 있는 시댁에서 청상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가니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매일 새로운 친지들이 오고가며 함께 뭐 맛난 것을 먹자 부르고, 외할머니께 무엇을 받아오고, 가져다드리고, 또 아이들이 놀러를 가고 하느라 빠질 날이 없었다.  

마침 날도 따뜻해 마당에서 놀고 먹고 치우기에 참 좋았다.


그런데 작은 집과 마당 가득히 북적하던 자손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다시 할머니 혼자 남으시면 갑자기 너무 고요해진 집에서 쓸쓸하시겠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돌아오며 얘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할머니께 전화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돌아온지 일주일이 되도록 못 드렸다.ㅠㅠ









오랫동안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썼던 2014년의 설 이야기를 이제 끝내야겠다.

처음 컴퓨터의 사진 폴더에서 이 사진을 작게 봤을 때 나는 어머니와 큰댁 아주머니가 우리집에서 제사 지낸 뒤에 함께 설겆이하시는 사진인줄 알았다. 

그리고는 이걸 내가 찍은줄 알고 '에구.. 정말 일도 참 안 하더니만 어른들 일하는 사진찍을 여유까지 있었구나, 욱' 하고 살짝 민망해했다.

그런데 클릭해서 크게 보니

이게 왠 걸... 어머님 옆에 있는 사람이 나였다. 

나는 내가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인줄 몰랐던 것이다. ㅠㅠㅠㅠ

게다가 저 파마머리 하며.....

나는 정말로 과수원농사와 젖소 농장까지 크게 하시는, 우리 어머니보다 나이도 많으신 양촌 아주머니인줄만 알았다. 엉엉.


연제 키우며 젖을 많이 먹여서인가, 보는 사람마다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해서 나는 내가 정말로 살이 많이 빠진줄 알았는데 

역시 얼굴살만 빠진 것이지 몸의 골격은 삼형제 안고 업고 하며 키우는 엄마 아니랄까봐 어깨며 허리며 무슨 역도선수만큼 우람하네....

한참을 충격먹고, 착각한게 웃겨서 혼자 웃고 하다가

우리 어머님이 워낙 갸냘프셔서 내가 더 우람해보이는 것이란 생각도 해보았다.

그도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내가 뚱뚱하긴 뚱뚱한 것이다.

새해를 열며 스스로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서른일곱의 나는 이렇게 생겼구나.

 

어머님은 올해 설을 지내며 안방의 큰 침대를 버리셨다.

결혼하고부터 시댁에 내려갈 때면 어머님은 늘 시댁에서 제일 아늑한 공간인 안방을 우리에게 내주셨다. 

아버님은 평소에도 거실의 매트에서 주무시고, 어머님만 안방에서 주무시는데 

우리가 가면 어머님은 안방을 우리에게 주시고 어머님은 작은 방이나 거실에서 주무시곤 하셨다.

안방 침대는 낡았지만 튼튼했고 포근해서 식구들 모두 다 거기서 잠자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방방 뛰며 놀았고, 남자 어른들이 한가한 시간에 살짝 낮잠자는 곳도 그 침대였다. 

하지만 나는 연수가 아주 어렸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침대 밑에서 잤다.

침대와 장롱 사이에 어른 한사람 누울 만한 공간에서 어린 연호 젖을 먹이며 함께 잤고, 

연제가 태어난 후에는 연제 젖 먹여 재우고, 엄마 찾아 침대 밑으로 내려온 연호까지 어찌어찌 겨우 끌어안고 재우느라 좁은 공간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다.

거실에서 자면 조금더 넓긴 하겠지만 아기가 어려 밤에 자주 깨니 다른 식구들 자는데 방해도 되겠고, 좀 춥기도 해서 

거실은 늘 아가씨 가족과 부모님이 주무시고 우리는 안방, 도련님은 작은방을 썼다.

명절에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어머님은 집이 좁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이런저런 의논을 구하셨다.

좀더 외곽의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터에 새로 집을 짓자, 아니다, 이 집을 리모델링 수준으로 깔끔하게 고치면 공간이 좀더 넓어질거다...

주로 이 세가지 안이 내가 결혼하고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명절마다 도마에 올라서 설왕설래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실행은 잘 되지 않았다.

선뜻 움직이기 힘든 형편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명절 때가 아니면 부모님 두 분이 지내시기에는 전혀 좁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익숙하고 좋은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어떻게 이 논의의 결론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님은 우선 더는 안되겠다 하시며 내가 아이들과 청상 외가에 가있던 시간에 안방의 침대를 내다 버리셨다.

작은 방의 잘 쓰지않는 작은 책상과 역시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정수기도 이번에 같이 정리하셨다.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이 삶의 절대적인 자세가 되어있는 어머니께서 멀쩡한 물건들을, 게다가 어머니께는 요긴하고 좋은 물건을 버리시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많은 며느리가 불과 몇 밤이지만 불편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좀 편하게 자게 해주시려는 어머님 마음이 정말 감사했다.



가족이 특별한 것은 삶을 함께 살기 때문인 것 같다.

때로는 밉고 서운하고 싫은 순간도 있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있다.

슬픈 일도 함께 견디고, 기쁜 순간도 같이 맞으면서 점점 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많이 느낀다. 

형제가 있어서 처음부터 좋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싫고 밉고 싸우다가도 또 같이 웃고 뒹굴고 놀면서 점점 닮아가고 진하게 정이 드는 것. 

그게 형제이고, 가족인게 아닐까.  

결혼과 함께 새롭게 생긴 가족들인 시댁 식구들은 이름은 '가족'이지만 실제 함께 지낸 세월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느끼기가 힘들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은 쌓인다. 새롭게 사귄 친구와도 7년이면 긴 시간이고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될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어머님아버님은 정말 많이 노력해주셨다. 나를 좋아해주셨고, 아이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로 사랑하고 계시다.

이제는 나도 많이 다가가야할 때인 것 같다.

내 블로그를 보시는 어머님이 이 글을 보시면 '뭐 그리 부끄런 일까지 다 적었냐' 하실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 것이 내가 시댁 식구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오래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 관심가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게 된다.

솔직하게 쓰려고 노럭한다.  

내가 쓴 것을 나는 또 마음에 담는다. 

그래서 쓰는 것이 내게는 노력하는 것이 된다.



설이 잘 지나갔다.

부모님, 가족, 고향, 형제들, 아이들, 자연, 삶... 많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좋은 한 해를 살아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