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들/그리운 사람'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9.11.27 가을에 그린 그림과 생각들
  2. 2019.11.18 김장과 아이들
  3. 2018.02.02 할머니 안녕 2
  4. 2017.10.12 지난 여름
  5. 2015.02.01 휴식
  6. 2015.01.17 사랑하는 아버지께 4
  7. 2014.02.25 눈 쌓인 강릉, 부모님 곁으로 4
  8. 2014.02.09 설 이야기 2
  9. 2013.09.06 어른들의 정과 보살핌 속에 3
  10. 2013.01.18 시골집에 깃든 친구 - 홍성 솔이네에 다녀오다 22


올 가을은 내가 퍽 바쁘게 보냈나보다.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그림 수첩을 늘 들고다니기만 하고
펴들고 앉아 가만히 그림 그려볼 시간이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겠지..





여름 끝무렵에는 선선한 저녁에 아파트 벤취에 앉아 있을 때가 좀 있었는데
그 때 정자와 정원 풍경을 그리다 말았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아버지가 고향집 마당 벤취에 앉아 마을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는 것처럼
요맘때는 나도 아파트 정원이 꼭 내 정원인 것처럼
한적한 정자와 오솔길, 나무들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 아파트에는 공작단풍이라는 단풍나무가 조경으로 많이 식재되어 있다.
지금 이 나무는 빨갛다못해 불타버린 것 처럼 검붉은 색깔로 단풍이 들어있지만
이 그림을 그렸던 초가을에는 가지끝에 달린 단풍나무 씨앗들만 빨갛고 잎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가을동안 혼자 조용히 그림그리는 시간은 못 가졌지만
화요일마다 캘리그라피 수업에서 수채화물감으로 그림그리는 것을 선생님께 조금씩 배웠다.
작은 그림을, 색이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그리는 것이 참 어렵다ㅜㅜ

+

추석에 큰 이모부님이 돌아가셨다.
명절 쇠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하며 그 소식을 듣는데 눈물이 흘렀다.
오랫동안 못 뵈었던 큰 이모부.
젊은 시절 참 호탕하셨고 유쾌한 어른이셨다.
나를 보면 늘 반가워해주시고 예뻐해주셨어서 자주 뵙지 못해도 늘 마음에 감사함과 따뜻한 정이 있었다.

이모부님은 우리 아버지에게 아주 친한 한동네 형님이었다.
10월에 친정에 갔을 때 아버지께 여쭤보니
“그 이가 경포학교 18기, 내가 22기지” 하고 국민학교 졸업 기수를 얘기해주셨다.
나는 그 학교의 56기 졸업생이다.

큰이모부는 청년이 되자 고향을 떠나셨다.
멀리 대구, 아니 삼랑진까지 가서 일하실 때 큰이모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그리고 큰 처제에게 듬직한 고향 후배를 소개해주셨는데
그 분이 우리 아빠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과 참 큰 인연이 있으신 분이다.

나고자란 고향에서 평생을 살고계신 아빠와 달리
큰이모부는 20대 이후로는 계속 타향에 사셨다.
대구에 오래 사셨고, 자녀들이 장성한 뒤로는 서울로 터전을 옮겨 언니오빠들의 대학과 결혼후 생활을 모두 함께 하셨다.

연수원 사업을 오래 하셨고, 호탕한 성품이셨고, 말씀을 재미있게 잘 하셨고, 사촌 언니들과 오빠와 그 손주들에게, 그리고 우리 조카들에게도 참 다정하셨던 분으로 나는 이모부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만나면 나를 늘 아껴주셨고, 크게 되리라 잘 되리라 응원하는 말씀을 해주셨었다.

이모부님의 응원대로 큰 인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 소박하게나마 내 가정을 꾸리고 잘 지내고 있는 데에는 이모부님이 보내주신 사랑과 축복도 늘 함께 했을 것이다.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
결혼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한 것이, 늘 감사했다는 말씀도 못 드린 것이..

이 겨울은 큰이모부님의 빈 자리가 가족들 모두의 마음에 시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모부님을 기억할 것이다.
이모부님을 생각하면 젊으신 날의 웃는 얼굴, 그 억양과 목소리, 따뜻한 말씀들이 늘 마음속에 떠오를 것이다.
함께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어요.
편히 쉬세요, 이모부.





Posted by 연신내새댁




주말에 친정에 가서 김장을 함께 하고 왔다.
전날 엄마아빠가 찬바람속에 밭에서 배추뽑아 절여 놓느라 고생하셨고
아침에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오빠와 새언니가 배추들을 헹궈놓느라 또 고생하셔서
나는 그저 김치통 들고 가서
양념한 속만 잘 발라 김장김치를 여러통 든든하게 담가 왔다.





이제는 어엿한 김장김치 마스터가 되신 전&이 프로 부부시다 ^^
친정 가까이 사는 언니도 함께 와서 우리들 김장을 도와주고, 저녁에는 퇴근하고오신 형부까지 온가족이 모여서 생굴넣은 겉절이 김치에 돼지고기 수육 삶아서 맛있고 든든한 저녁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컸는지 모른다.
어른들이 김장하고 이런저런 일로 바쁜 동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친정집의 뒷산과 모래밭으로 뛰어다니며 놀고
자전거타고, 보드게임하고, 연극 준비해서 저녁엔 공연도 한편 무대에 올렸다. ^^
강릉 할아버지댁에 모이면 으레 그렇게 노는 아이들이다.
이제는 중학생이 된 제일 큰 조카는 모래성도 엄청 멋지게 잘 만들고, 동생들을 데리고 연극 공연도 잘 만들어내는 멋진 친구다.
아이들 자라는 것은 볼 때 마다 신기하다.




김장이 한창이던 토욜 오후엔 할아버지와 연수아빠가 아이들데리고 경포호수에 가서 6인용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모두 낑낑 엄청 힘들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지나고나면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
일요일 아침에 이렇게 할아버지와 감을 따본 추억과 함께 말이다.
작고 푸른 주머니가 달린 감 장대 안으로 감을 쏙 집어넣은후에 탁 당겨서 따는 감장대의 손맛은 그야말로 여러번 해봐야 손에 익는 감각인데
나도 어릴때 그렇게 감을 땄던 기억이 참 생생하고 좋다.
손에 익은 느낌은 더 오래 기억된다. 내 손으로 해보는 것이 그래서 참 중요하다. 손으로 해보고 발로 뛰어다니며 직접 밟아본 기억.
논두렁 밭두렁 뒷산 오솔길을 밟을 때의 감촉 같은 기억들 말이다.
그런 것은 오래오래 남아서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예쁘게 깍은 곶감이 올망졸망 달려있는 아버지의 차고에는
아버지가 평생 써오신 손에 익은 도구들이 늘 제 자리에 잘 정돈되어 걸려있다.
봄이면 고운 흙이 깔린 모판에 예쁜 볍씨를 자라락 뿌려주던 기계와
논에 모를 심어주던 이앙기, 호미들, 줄자들, 밀집모자,
내년에 씨앗하려고 말려둔 옥수수까지
고향집의 창고를 보면 언제나 신이 나고 호기심이 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보물창고 같은 곳.






고향집에 가면 언제나 힘이 난다.
밥도 많이 먹게 되고 목소리도 더 활기차진다.
엄마아빠 옆에 가니까 나도 아이로 돌아가서 그런가. ^^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도 그럴까?
자기들 집에서도 까불고 놀겠지만 강릉 할아버지댁에 오면 더 신이 나고 목소리도 높아지고 펄쩍펄쩍 방방 뛰게 될까?
함께 모이니 더 그렇겠지.
반가운 언니오빠 동생들과 북적북적 어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넉넉한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뛰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넓은 마당과 언덕을 쏘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부모님 곁을 떠나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면 또 어려운 일들이, 어른과 부모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하는 삶의 무게들이 저마다 만만치 않게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숙제와 학원과 학교와 또 제나름 힘든 과제들이 다가오겠지만
강릉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모두에게 어깨 좀 펴고 한번 더 씩 웃으며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김장김치 속에, 배추와 무와 홍시 안에 듬뿍 담아 보내신 것은
고향의 가을이고, 사랑이다.

가족들 곁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즐겁게 일하고 웃고 이야기하고 돌아오니
추운 겨울이 와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이 든든히 채워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충전하고 올수 있도록 준비하고 애쓴 엄마는 몸살이나 나지않으셨는지,
대식구 식사와 김장 뒷설거지 도맡아하며 고생한 새언니도 많이 힘드시지 않은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내 안온함이 기대고 있지는 않은지 죄송하게 돌아보는 아침이다.

모두들 맛있는 김치 많이 먹고 아프지말고 겨울 잘 났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2017년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겨울답지않게 햇살이 참 따뜻하고 포근한 날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길에 본 산자락에는 하얀 눈들이 덮여있었고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며칠 전까지의 매서운 추위가 잠시 한숨 고르는 듯 포근하고 아름다운 날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아프셨던 가을 동안 나는 가끔 할머니 생각을 하며 목이 메이곤 했다. 

가을이 깊어가며 날이 추워질때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보내고 떨면서 들어올 때는 

'병원에 계신 할머니는 이 추위를 모르시겠구나.. 날이 추워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도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할머니가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평생을 몸으로 느껴온 계절이 오고 가는 것, 시절의 변화에 따라 해야하는 크고작은 생활의 단도리들.. 이런 것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슬펐다. 


정 호자 원자, 정호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우리 할머니는 아흔두해를 사셨다. 

1925년, 강릉에서 가까운 주문진 행호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여덟살에 결혼해 모두 여섯명의 자녀를 두셨다.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은 갓난아기일때 잃은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 자라서 할머니 곁을 오래오래 지켰다. 많은 손주손녀들의 결혼과 증손주들까지 기쁘게 맞아주시고 생애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셔주셨다. 


바닷가가 멀지않은 농촌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일본어로 수업하던 소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할머니의 남자형제들이 모두 청소년기가 되자 서울로 가서 혜화동에 집을 마련하고 공부할 때, 할머니의 부모님은 할머니도 그 집에 가서 같이 지내기를 바라셨는데 할머니는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때 서울에 가지않은 것을 두고 할머니는 그 때 나이많은 친척 조카가 '고모는 천치야, 나같으면 당장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며 조금 후회스럽게 말씀하셨었다. 

어릴때 들은 그 얘기를 나는 자라서 가끔 혼자 생각해보곤 했었다. 할머니가 그때 서울에 가셨더라면 이화학당이나 연희전문 같은 곳을 다니셨을까.. 그럼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신여성이나 지식인이 되었을 수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때니 어려움을 겪을셨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할머니의 인생은 무척이나 달라지셨겠지..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버지를 낳고 우리들의 할머니가 되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니 가보지못한 할머니의 '신여성'으로서의 멋진 삶이 왠지 아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안도하게 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일찍 결혼을 하셨다. 우리 할아버지의 살림은 그당시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본래 땅과 재산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일제 초기에 토지 개간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땅을 모두 잃었다고 작은할아버지께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던 증조할아버지를 손목에 매를 앉혀서 다니시던 늠름하고 멋스러운 분으로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재력가였던 증조할아버지는 강릉의 이름난 부잣집이었던 강릉 최씨 '가매집'의 따님과 결혼했다. 평생 단정하고 고운 하얀 한복에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지내셨던 우리 증조할머니는 이 가매집의 이름난 수재였던 최장집 교수님의 고모이시기도 하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땅도 많이 잃어 살림이 어려울 때였는데 '가매집 외손'이라는 타이틀로 중신(중매)을 넣었었다고 할머니는 회고하셨다. 나는 대학원을 다닐때 최 교수님의 민주주의 관련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분은 나를 모르시지만 나는 생전에 나와 늘 가깝게 지내셨던 증조할머니의 조카분이라는 사실때문에 괜시리 큰 친근감을 느끼곤 했다. 


결혼 초기 살림은 어렵고, 시동생들도 많고, 할아버지는 지역신문 기자일과 청년단체 활동으로 바쁘셨던 때에 할머니는 첫아이로 우리 아빠를 해방이 되던 1945년에 낳으셨다.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할머니는 어린 아기를 업고 아빠의 손목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셨는데 그 길에서 어린 둘째를 잃으셨다. 피난 떠나기 얼마전, 할머니의 친정 아버지께서 잠시 딸을 찾아오셔서 만나보고 가셨다는데, 그때 제일 큰 시동생인 우리 작은할아버지께 '자네가 이 집에서 제일 중요하네. 부디 잘 도와주게' 당부하셨던 것을 작은할아버지는 오래 기억하셨고 내게 이야기해주셨었다. 나는 만나본 적이 없는 아빠의 외할아버지. 어떤 분이셨을까. 할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오래동안 못 만났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셨을까. 시어머니와 남편도 만나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자유롭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무척 가부장적인 분이셨고 화도 잘 내셔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지내셨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시게 된다면 할머니가 더 당당하게 씩씩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부모님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노년에 가깝게 지내셨던 인쇄소집 할머니와도 다시 만나 좋아하시는 화투도 재미있게 치시면서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목소리가 참 예쁜 분이셨다. 살짝 장난기가 어린 것 같은 반짝이는 눈을 갖고 계셨고 얌전하고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할머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정말 재미있게 옛날 얘기를 잘 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매일 밤 할머니 곁에 누워 깔깔깔 웃다가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만 더 해줘~ 하나만~~" 하고 졸랐었다.

지금도 살짝 기억나는 이야기는 어떤 바보신랑이 장가들던 날 이야기. 신부집에서 처음 먹어본 가자미 식혜가 너무 맛있어서 밤에 몰래 일어나 정지(부엌)으로 가서 살금살금 식혜단지를 찾아 손을 쑥 넣었는데 그게 개똥그릇(?)이었던데다가 그만 들켜서 도망가는데 개는 쫒아오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손에 묻은 똥이 식혜인줄 알고 싹싹 핥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다는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너무 우습고 재미있었다. 

텔레비젼이 있다해도 아이들이 볼 것이 별로 없고, 밤이면 일찍 누워 모두 잠들던 시골 한옥집 사랑방에서 우리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속의 여러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긴 겨울밤을 즐겁게 보냈었다. 

사랑방 큰 창문밖으로는 밝은 보름달이 뜨고 별도 예쁘게 빛났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밤들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생고구마를 숟가락을 삭삭 긁어주시면 한 숟갈씩 돌아가며 맛있게 받아먹던 기억. 친감, 곶감, 큰 가마솥에 끓여주시던 엿, 그런 것이 어린 시절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들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잃었다. 

내가 유머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조금쯤은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건 우리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일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뒤 나는 길을 걷다가 이따금 눈물이 툭 쏟아졌다.  

며칠동안 털이 수북히 달린 패딩잠바의 모자를 덮어쓰고 저녁에 운동을 하러가면서 울었다.

할머니가 보고싶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립다. 

친정집에 가면 '욱이 왔나~'하고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실 것 같고, 한동안은 햇살이 환한 날이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원해계시던 요양병원, 그 병원에 가면 여전히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할머니를 본 날, 할머니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나에게 "욱아, 행복하게 잘 살아."하고 아파서 가늘어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할머니 말씀대로 하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늘 집과 마을회관을 오가며 정정하게 잘 지내주셔서 나는 더 오래 할머니가 우리 곁에 계실거라고만 생각했다. 조금 더 자주 뵈러가고, 할머니랑 좀더 놀껄.. 얘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랬듯이 할머니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낼껄... 그러면 할머니가 좋아하셨을거란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할머니를 참 좋아하니까.. 이제 더는 할머니와 놀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는 연수, 연호, 연제를 모두 갓난아기 시절에 많이 안아주셨다. 

팔십이 넘으셨어도 아이들을 폭 안아서 잘 재워주시곤 하셨고, 내가 어린시절에 할머니 품에서 들었을 자장가와 여러 노래들을 부르며 얼러주셨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친정에서 돌아올때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연수야, 외가에 또 와~"하고 다정하게 여러번 당부하시고, 용돈도 아이들 손에 쥐어주셨었다. 

친정집에서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때 할머니는 많이 아프셨던 때라 아이들이 인사를 하는데 꺼내줄 용돈이 옆에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게 미안하셔서 "연수야, 다음에 오면 꼭 용돈줄께. 외가에 꼭 또 와.."하셨다. 

다음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를 뵈러갔을 때 할머니는 나에게 "왜 아이들은 안 데리고왔냐.. 연수, 연호, 연제. 너희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내가 천원짜리를 따로 놔뒀는데.."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큰돈은 필요없다고 작은 동전지갑에 천원짜리 몇장만 넣어서 옆에 두고는 아이들이 오면 한 장씩 주려고하셨던 것이다. 지난 번에 용돈을 못 줬던게 마음에 걸리셔서 병원에 누우셔서도 잊지않고 챙겨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참고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올께, 할머니. 얼른 나아.."하고 대답했었다. 그때는 또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일찍 다시 갔었야했는데... 

그날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의 1층 로비까지 갔다가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들은 면역이 약해 면회가 안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지 못하고 로비에 기다리다 돌아왔다. 연호가 "난 증조할머니가 안 아픈게 좋아.. 그러면 증조할머니한테도 용돈을 받을 수 있잖아" 했다. 아이들이 외가집에 가서 증조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만원이든, 천원이든 그 돈은 증조할머니의 마음이고, 정이다. 아이들도 자라면 그 마음을 알 것이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와서 아이들 겨울 옷을 정리하다가 연제가 더 어릴때 입었던 겨울 파카를 꺼냈는데 거기에 빳빳한 새 돈 5천원짜리 두 장이 접혀서 들어있었다. 

그 돈을 보고 나는 많이 울었다. 연제가 외갓집 다녀올때 증조할머니가 주셨던 돈인 것 같아서였다. 설날 지나고 외가집에 갔을때 증조할머니가 연제에게 세배돈으로 주신 새 돈. 나는 그 돈을 잘 넣어놓고 쓰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가 찾아서 전해주신 돈같아서.


이 겨울동안 우리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은 아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엄마아빠는 언제 죽는지, 자기들은 또 언제 죽는지.. 100살까지 살거라고, 죽고나면 자기들은 다시 아이로 태어날 거라고.. 하루는 이 생각을 하고, 다음날에는 또 다른 생각이 났다며 조잘조잘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날 연호는 엄마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서 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기는 엄마의 아이로 다시 태어날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럼 되겠지, 엄마?"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얘기하며 연호의 어린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래, 그러자"하고 나도 대답하며 웃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중에 내 손녀로 다시 태어나.. 그럼 내가 재미있는 옛날 얘기 많이 해줄께. 

할머니가 늘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많이 예뻐해주고, 칭찬해주고, 대견해해줄께..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같이 놀아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할머니 안녕..!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여름 친정에 갔을때
조카와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할머니방에 누워서 드라마보시는 엄마 모습을 그렸었다.
할머니는 오후에는 늘 그러셨듯이 마을회관에 놀러가시고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가 거실에서 북적거리면서 노는걸 봐주시다가
잠깐 할머니 방에서 쉬시는 참이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오후에 회관에 못가시고
할머니 방에도 매트리스와 작은 소파가 들어와
방 풍경이 바뀌었다.

그림을 그릴때만해도 바로 얼마후에 이렇게 달라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림으로만,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어떤 시절.

할머니가 조금씩이라도 부디 나으셨으면 좋겠다.
바깥 출입을 못하시는 할머니 곁을 지키며 보살펴드리고 있는 엄마도 힘내시길..!

Posted by 연신내새댁

일주일동안 강릉집에서 잘 쉬었다.
내 손으로 짓고 차리지않아도 삼시세끼 따순 밥이
나와 내 아이들의 입으로 (일주일이나!!) 들어오는 지구상에 몇 안되는 곳..^*^




근데 엄마를 너무 고생시켰다.
아침밥상 차려질때까지 이불속에 누워있기, 밤에 아이들 재워놓고 혼자 옆방에 이불펴놓고 쏙 들어가 책 읽고있자니
이 집에서 보냈던 소녀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
서른여덟살 아줌마는 혼자 슬며시 웃기도했다(헤헤~^^;)

엄마가 아니면 내가 어디서 이런 호사를 누릴까..
하지만 엄마도 어느새 예순여덟이란 낯선 나이의 예쁜 할머니.
엄마를 너무 고생시키면 안되는데ㅠㅠ
아직도 철부지인 딸은 펄펄한 외손주 셋을 할머니한테 다 맡겨놓고
주는 밥 받아먹고 뒹굴뒹굴 쉬었다.
언제 엄마한테 삼시세끼 맛있게 차려드리지..




아이들 청은 다 들어주시는 외할아버지는
경포호수와 바닷가를 한바퀴도는 마차를 태워주셨다.
모래사장에서는 언제 해도 아슬아슬 재미있는 파도 기다렸다 도망치기 놀이를 하고...

깔깔거리며 뛰는 연수연호 옆에는
막 대학생이 되었거나 아직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세명이 딱 붙어서서
우리 꼬마들과 똑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예뻤다.
얼마나 좋은가.. 친구들과 함께 동해바다를 보러왔던 젊은날의 추억은.

강릉에서 나고자란 나는 늘 바다보기를 좋아하지만 바다를 볼때의 마음은 그때마다 다르다.
세월호 생각이 나서 바다를 보는 마음이 슬펐다.
젊은 청년들을 보니 더 아팠다.





강릉에서 지내는동안 눈이 하루 왔다.
춥지않은 날씨에 금방 녹았지만 아이들과 많이 구경하고 마음에 시원하게 담아왔다.
올겨울은 가뭄이 심해서 봄에 물이 부족하진않을까.. 걱정된다.
땅과 멀리 떨어져사니 농사 물 걱정까지야 못하지만 아버지보시는 농민신문을 보니
벌써 강원도 산간지역은 지하수가 부족해 식수난을 겪고있다는 소식이 실려있어 걱정스러웠다.
작은 냇물, 강들이 마르면 큰강도 물이 줄어들겠지.. 도시의 뿌리없는 삶은 더 불안하다.



2월에는 포근한 눈이 한번에 너무 많이는 말고, 적당히 적절히 와줘서 마른 땅을 해갈해줬으면 좋겠다.

돌아온 서울집은 포근하다.
내 집, 다시 내 손으로 삼시세끼! 어설픈 실력이지만 내 아이들과 남편과 지지고볶고 밥상차리고 치우며 아옹다옹 지내는 소중한 일상, 다시 시작했다.

고향집의 엄마아빠 보고싶다. 오늘은 집이 오랫만에 다시 고요해졌겠네..
연제의 '하부느은~? 함미느은~?' 찾는 목소리가 귀에 선하실텐데.
사랑하는 엄마아빠, 편히 주무셔요.
건강하게 잘 자란 수호제 데리고 여름에 또 외가집 마당으로 뛰어갈께요.

Posted by 연신내새댁

사랑하는 아버지께


아버지. 오늘도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걸어나가 아버지 삶의 자리들을 찬찬히 짚어보고 돌아오셨는지요. 

"새벽에 길을 나서보면 불이 환하게 켜진 집들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른다." 

밖이 아직 어두운 겨울 아침, 부엌에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할 때면 아버지 이 말씀이 언제나 생각납니다. 

가족을 위해 밝히는 저의 작은 불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게됩니다. 


"아이들은 좋은 말을 자꾸 해주면서 키워야한다.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더 잘 하게된다."

나무라는 말, 질책하는 말보다 다독여주는 말, 바로 일러주고 깨우쳐주는 좋은 말로 아이들을 이끌고 키워줘야한다는 아버지 말씀이

어린 아이들 키우는 저희에게 더없이 귀중한 가르침이 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70회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지나온 시간동안 아버지의 아들, 딸이어서 정말 자랑스럽고 행복했어요. 

아버지와 함께 얘기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아버지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며 따라걸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 바른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의 비바람속에서 삶의 자리를 단단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가장.. 삶의 여러 자리를 흔들림없이 지켜오신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벼는 농사꾼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

새벽마다 부지런히 논두렁을 돌고 오시던 아버지처럼 저희들도 오늘 저희들이 일구는 소중한 삶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걷고, 생각하고, 보살피며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언제나 저희들을 다정하게 품어주셨던 깊고 넓은 품으로 이제는 손주들을 보듬어주고 계신 아버지와 함께

맛있는 커피, 따뜻한 이야기, 행복한 시간들을 더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2014년 1월 17일.

사랑하는 자식 일동 올림.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주말,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강릉에 다녀왔다.


영동지방에 25년만의 폭설이 내렸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고향집에 가끔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곤 했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대체로 밝았지만 때때로 지치고 두렵고 걱정되는 기색이 느껴졌다. 

넓은 마당에 학생들 다닐 길을 치고,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계속해서 눈을 치우느라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눈이 계속 쏟아지던 2주 동안은 어린 아기들 데리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 속에 가겠다고 해도 부모님은 절대 못 오게 하셨을 것이다.

그 2주간 남편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자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토요일마다 출근을 했다. 

이래저래 부모님 곁에 가볼 수가 없었던 나는 걱정만 하면서 지냈다.








친정집은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외진 곳에 있거나해서 고립된 것도 아니고, 집이 낡거나 약해서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눈이 퍼붓는 동안 연로하신 할머니만 바깥 출입을 못 하셨을 뿐, 엄마 아빠는 마당에 길을 내고 찻길로 나가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농협마트에 가서 장도 봐오시며 다행히 아주 큰 어려움은 없이 지내셨다. 

하지만 그 시점에 강릉에 있었던 누군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끝도 없이 눈이 쌓이고, 어렵게 뚫어놓았던 작은 길마저 다시 또 눈속에 묻혀 사라져 버릴 때.


멀리 있는 자식들은 모두 전화기로만 가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까운 이웃들과도 하루나 이틀 걸러서야 한 번쯤 눈 속에서 걱정되는 안부만을 주고 받을 수 있을 때. 

 

비록 아무 힘도 안 되고, 눈치우는 것도 크게 거들 수 없고, 어린 자식들 잔뜩 데려가 되려 일거리나 더 늘려놓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얼굴을 보러, 

엄마 아빠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고, 손을 잡아보고, 안아보고 싶어서 강릉에 너무 가고 싶었다.


다행히 지난 주말에는 남편이 바쁜 일이 마무리되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연수가 감기를 심하게 앓았지만 거의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들은 모두 건강했다. 

토요일 아침, 어쩔까 망설이던 우리는 전격 결정을 하고 후다닥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엄마, 눈이 바다같아!!"

외가집 마당에 도착한 연호가 내게 소리쳤다.


^^

바다같았다. 

햇볕에 녹으라고 아빠가 헤쳐놓은 눈들이 마당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 좋아하는 연수가 그냥 있을리는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눈더미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자기 키보다 높은 눈더미 위에 올라선 연수는 살짝 무서워보였다. 

이내 발이 푹푹 빠졌고, 부츠도 눈 속에 깊이 박혀버려 연수는 금방 발을 적시고 집으로 철수했다.

대신 따뜻한 방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할아버지가 사다주신 간식을 냠냠 먹으며 제가 좋아하는 케이블 만화를 실컷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아픈 뒤에 이보다 좋은 휴식이 있으랴... 따뜻한 아랫목에 군것질거리 쌓아놓고 마음껏 TV보며 뒹굴거리기. ^^

오고가는 길이 멀어 고단했지만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보통 때보다 훨씬 즐겁고 여유로운 주말이 열린 것이다. 







대신 부모님은 엄청 바빠지셨다.ㅠㅠ


괜찮다고, 안 와도 된다고 해도 

걱정된다며 늘 못와봐서 애달파하던 막내딸이 

마침내 갑작스레 떠났다고 통보하자

두 분은 잠시 대책회의를 하시고는 신속하고 민첩하게 대식구 맞을 준비에 돌입하셨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연제의 첫돌을 축하하는 외가집 생일잔치. ^^;;


연제의 돌은 내가 어머님께 부탁드려 상주 시댁에 가서 하기로 했다.

연제의 돌잔치는 집에서 꼭 해주고 싶었다. 

집에서 돌상차려 따뜻하게 아이의 일년을 축하해주고, 아이를 잘 보살피고 지켜준 가족들과 집과 좋은 기운들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리는 시간으로 소박하고 뜻깊게 보내고 싶었다.

서울 우리집에서 하면 제일 좋겠지만 혼자 준비할 엄두가 잘 안났던지라 어머님께 부탁드렸고

어머님께서 그러자고 들어주셔서 다음 주말에 시댁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잘하는 일이라고, 어른들 곁에 가서 잘 하고 오라고 하셨던 친정부모님은

막상 연제 생일이 가까워오자 '외가에서도 뭘 좀 해줘야할텐데..' 하고 나와 통화할 때마다 걱정을 하시더니

마침 우리가 내려온다 하니 '아이구 잘 됐다, 이참에 외가집에서도 연제 생일상을 차려주자'고 의논을 하셨던 것이다.









수수팥떡과 삼색 경단을 올려놓고 

고운 과일들도 접시 가득 담은 예쁜 상 앞에

연제를 세워주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형들도 신이 나고, 연제도 싱글벙글 하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증조할머니도 함빡 웃으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증정되는 금반지! 두둥~~~! ㅎㅎㅎ








'금은 역시 깨물어봐야 제 맛이지~! 냠냠...' 맛을 아는 연제. ㅋㅋ








이런 순간은 자주 없다.

살면서 아주 드문 행복하고 고마운 순간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는 것이다. 

비록 사진에는 없지만 이 순간, 카메라를 들고 '하나 둘 셋~!'하며 웃고 있는 수호제 아부지까지 모두 함께 말이다.









외가에서 차려준 제 생일상을 잘 받고난 연제는 흐뭇하게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은 모두 제설작업에 동원!


두둥.... 이걸 모두 치우라고?!!!

ㅎㅎ


아이들이 외가에 올 때마다 신나게 놀던 모래언덕 자리가 주위의 눈속에 움푹 들어가보일만큼 눈이 많이 왔다.









두 삽뜨고 사진부터 챙겨서 찍는 나는야 전시행정가.. 아니 블로거. ^^;;;


웃고있는 아빠 모습이 좋다. 

어릴때, 그러니까 1m가 넘는 폭설이 왔던 25년전 그 때를 나도 기억한다.

12, 3살 무렵이니까 꽤 컸을 때인데 그때도 나는 이 집, 이 마당에 서있었다. 

연수가 올라섰던 차고옆 눈산에 그 때 나는 눈터널을 팠었다. ^^

그리고 우리집에서 지금은 마을회관이 있는 방앗간터까지 아빠가 길게 눈썰매 길을 다져주셔서

비료푸대를 깔고 신나게 눈썰매를 탔었지..

신나고 즐거웠던 그 겨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밝고 좋았다.

눈썰매를 타며 깔깔 웃던 볼이 빨간 소녀가 어느새 서른일곱 세 아이의 엄마라니.. 시간은 정말 장난꾸러기다.

  








어쨌든 나는 눈 좀 쳐본 뇨자!

연제 자는 한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마당 한 구석과 텃밭의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구덩이의 눈을 좀 판 것으로 

그래도 나도 눈 치는 것 거들었다고 있는대로 생색을 내고 

눈을 보며 엄마가 타오신 뜨거운 믹스커스 한잔도 분위기 제대로 내며 마시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강릉에 사는 친정언니 부부가 점심을 사주었다.

해물찜과 칼국수를 먹었는데, 국수까지 먹었으니 연제 생일은 제대로 한 셈이라고 엄마가 말해 모두 웃었다.

커피를 마시러갔던 카페 근처에 '순개 습지'라는 작은 습지가 있었다. 

강릉은 습지 복원사업이 한창인 것 같았다. 

저탄소녹색성장 시범도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빙상 경기들을 비롯한 여러 경기가 열리게되는 강릉.

대규모 토목사업은 필연코 환경을 해치기 마련이지만 '녹색'이라는 도시의 지향이 부끄럽지 않도록 새롭고 대안적인 발상과 크고 작은 노력들이 조금씩이라도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연수야, 잘 나아라.

주말동안 눈 속에서 많이 놀고 돌아와 고단해했던 연수는 오늘에는 거의 다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든 감기 잘 견뎌내고, 엄마 고향에도 함께 잘 다녀와준 연수. 고맙다. 까불고 밥 안먹는다고 화내서 미안..ㅠㅠ 









서울로 떠나기 전, 잠시 경포바다에 들렀다.

연호는 파도가 가까이 올까봐 무서워 자꾸 돌아보느라 사진기를 쳐다보질 못했다.


언젠가 남편이 어떤 블로그에서 읽었다며 해준 이야기를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한달에 한번, 주말 이틀 부모님 집에 내려간다고 해도 24일, 명절에 며칠 더해도 30일이 안된다는 얘기.

그러니까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님과 일년에 한달, 365일중에 30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렇듯이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있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엄마가 언제 오시나'하고 시장간 엄마를, 들일하는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고

주말에 잠시 예쁘게 차려입고 명승지나 유원지에 가서 엄마 옆에 형제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앞뒤로 올망졸망 올라 타고 즐겁게 시골길을 달렸고

엄마의 포근한 품에 안기는 것이, 아빠의 든든한 손을 잡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기쁘고 좋았었다.


그런 시절을 거쳐, 

그 시절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자랐다.

숱한 위험과 어려움이 따르는 거친 세상에서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준 그 분들이 있어서 우리는 유년기를 마치고 어른이 되었다.


한 때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보금자리이자 은신처이자 넘고 싶은 벽이기도 했던 

그 모든 것이었던 부모님의 품을 

가끔, 아니 자주 보고싶다.

이제는 날로 약해져가시는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든든하고 포근한 그 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고,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이제는 내가 낳은 아기들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토요일 아침, '엄마아빠가 그리 보고싶나?' 하면서 처가로 달려가준 남편, 고마워..^^









눈 덮힌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집 마당에 서서 오래오래 손흔들어주시던 엄마 아빠 할머니 모습을 마음에 담고.



눈이 소리없이 잘 녹기를 빈다. 

눈 속에 일어났던 많은 아픈 일들의 상처는 봄이 온다고 쉽게 아물지 않겠지만..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과 젊은이들

사랑으로 사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봄햇살이 고루 찾아와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설을 잘 쇠고 왔다.


어른들과 떨어져 살고 자연의 흐름에도 많이 무딘 도시의 엄마다 보니 

명절이나 절기같은 우리네 세시풍속에 대해서도 많이 둔감해진다.

설은 차례지내고 세배하고 떡국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 날이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며 옷가방안에 고운 한복을 챙겨넣었다. 

하지만 그 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 큰 명절을 맞는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한 며칠 아이들 데리고 시댁에 가서 지내다오는 시간. 

제사음식 준비며 대식구가 한데 모여 여러날 먹고 지내는 일로 고달프기도 하겠지만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랫만에 한자리에 모이니 반갑고 좋은 연휴.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종종거리며 큰 가방 여럿에 짐을 싸고 세 아이 씻기고 옷입혀 차에 태우고 숨차게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명절이 시작되고보니 마음에 다가오는 일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참 많이 컸고, 고왔다.

오랫만에 만난 사촌들끼리 다정하게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시아버님어머님께는 다섯명의 손주가 있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결혼한 아가씨네 아이들 둘, 그리고 우리 아이들 셋. 

아직 결혼 전인 도련님이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더 많은 아이들이 명절에 할아버지할머니를 찾아올 것이다. ^^


시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신다.

남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어린 삼남매가 환하게,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이 많다.

행복하게 자랐구나.. 부모님이 참 예뻐하며 키우셨구나.. 싶었다.

살림은 어렵고 일은 고단하셨겠지만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시부모님이 삼남매를 바라보며 이렇게 환하게 많이 웃으셨구나.. 짐작하곤 했다.








결혼전에 돌잔치에 가서 처음 보았던 시댁의 큰조카가 어느새 아홉살이 되었다. 

귀엽고 잘생긴 큰조카는 여전히 개구쟁이지만 그래도 이젠 살짝 의젓한 느낌도 든다. 

내 큰아이 연수가 일곱살인 것도 신기하다.

내 삶에 흐르는 시간을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며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20평 남짓한 작은 주공아파트인 시댁에 부모님, 우리 가족, 아가씨네 가족, 도련님이 모두 모이면 12명.

큰 방, 작은 방, 거실과 주방마다 아이들과 어른들로 넘쳐난다. ^^

남편이 학생이던 무렵에 임대로 들어와 2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은 낡고 좁다.

하지만 어머님이 워낙 깔끔하게 닦고 정리하며 살아오셔서 따뜻하고 깨끗하다.


처음 결혼해서 시댁에 왔을 때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우선 집이 너무 작아서 놀랐고, 집안 곳곳에 버리지 못한 오래된 세간들이 층층이 쌓여있어서 놀랐고, 그럼에도 또 그 낡은 집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고 늘 정리해온 부지런한 손길이 느껴져서 놀랐다.

가장 놀라운 것은 분명히 좁고 답답해보이는 집인데 좀 앉아있다보니 의외로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시댁에 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시댁에서 자고 나면 왠지 '아.. 내가 지금 부모님 품에 와서 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천천히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사랑하셨다. 

하나하나 사랑하셨고, 다정하셨다. 

삼남매는 다정하게 자랐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하시는 오토바이 가게에 붙은 단칸방에서 서로 살을 부대끼고 뒹굴고 안고 아끼며 자랐다.

커서도 여전히 집은 작고 형편은 어려웠으므로 서로 많이 챙겨주고 배려하고 염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명절에 만나면 어머님은 늘 어린 아기들을 키우고있는 나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셔서 제사음식 장만부터 설겆이까지 거의 내게 안 맡기고 본인이 다 하려 하신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명절날 오후에 친정으로 오는 아가씨는 역시 새언니인 내가 힘들까봐 설겆이며 우리 큰아이들 밥먹이는 것까지 다 살펴준다. 

명절지나고 좀 한가한 다음날 오전, 어머니가 아까워서 못 버리고 쌓아둔 낡은 세간살이들을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명절 지내느라 어질러진 부엌도 정돈하고, 좁은 수납공간들을 두루두루 훑어 숨통을 좀 틔워놓는 것도 아가씨다. 

명절이면 우리는 모두 아가씨네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함께 놀 사촌형누나를 기다리고, 남편은 좋은 술친구인 매제를 기다리고, 나는 속깊고 고마운 시누를 기다린다.  

얼굴도, 마음도 곱고 예쁜 딸인 아가씨가 오면 낡은 집은 더 환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다. 

집은 더 복닥거리고, 잠자리도 다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함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명절마다 두 밤, 세 밤씩 한데 모여 자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물론이요, 고모네와 삼촌이 한해 한해 더 살갑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형제가 다정한 것이 참 큰 복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시댁 형편이 넉넉치 않고,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늘 힘들게 몸써서 일하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걱정되지만 

가족들이 서로에게 다정하고 화목하게 지내왔다는 것은 정말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 참 큰 내 복임을 명절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모의 둘째인 예쁜 현서는 새해 다섯살, 우리 연호는 네살이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째들이 요리 조리 몰려다니며 깔깔거리고 장난치고 뒹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명절이면 아침 일찍 찾아가 함께 차례를 지내고 오는 큰댁에는 새해 세 살이 된 아기가 한 명있다. 

촌수로는 우리에게 조카뻘이지만 나이는 우리와 동갑인 큰댁 조카부부는 우리보다 두어해 일찍 결혼했지만 오래도록 아이가 없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명절마다 우리집에는 손주들이 하나둘 늘어 네 명이 되도록 큰댁에는 아이가 없는 것이 마음이 쓰이곤 했는데 

참 기쁘게도 연제 태어나기 얼마 전에 큰댁에도 첫 손주가 태어났다. 

돌지난지 석달쯤 된 그 아기가 올 설에는 한복을 곱게 입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세배 흉내도 내서 두 집 가족이 모두 크게 웃으며 세배돈을 고사리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

어른은 아이를 보살피고, 아이들은 제 힘껏 뛰놀고 웃으며 자라고, 어른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게 되는 것.

그게 참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가족이 모두 모인 명절에는 새삼 깊이 느끼게 된다. 

 

아이 키우고 돈 벌며 사는 일이 힘들고 정신없어 부모들은 별다른 새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새해의 감흥을 따로 찾을 여유도 없지만 

문득 이렇게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의 훌쩍 자란 모습을 볼 때

'아 나의 지난 시간이 저 속에 녹아있구나.' 생각하게 되고 

'올해도 저 아이들을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키워야지..' 언뜻 다짐하는 것으로 새해의 각오도 세워보게 된다. 









순둥이 막내와 할아버지. ^^

낯가림이 별로 없는 연제는 이번 명절에 할아버지와 짝꿍이 되어 잘 놀았다. 


말수가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한 경상도 분인 아버님은 조금 큰 아이들은 잘 데리고 놀지 못하신다. 

마음은 참 다정하신데 표현을 잘 못하시니 아이들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하시는 것이다. 

시댁 식구들이 모일 때면 아버님은 한번씩 큰 손주들 네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다녀오시며 슈퍼에서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과자를 사주시곤 했다. 

아이들도 그걸 알아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으레 장난감을 한번은 사주시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조르고 한다.  

그것이 거의 유일한 아버님의 애정표현이고, 큰손주들과 어울리시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돌도 안된 연제같은 아기 손주에게는 아버님도 그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실 수가 있다.

안아주고, 얼러주고, 좋아하시는 유행가 노래에 맞춰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흔들며 어깨춤도 추시고, 입에 맛난 것을 넣어주시면서 행복해하시고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참 좋았다.

연수는 어려서도 낯가림이 심해 할아버지께 거의 가지 않았다. 

연호는 지금의 연제처럼 아기시절에는 할아버지께 잘 갔지만 네살이 된 올해는 할아버지가 안아보려고 해도 몸을 빼고 도망을 다녔다. 어느새 많이 자라서 고집도 궁리도 커진 연호인지라 오랫만에 뵌 조금 엄한 인상의 할아버지께 금방 살갑게 대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자주 뵙고, 많이 같이 놀고 하며 다정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아이들이 할머니할아버지를 푸근하게 가깝게 느낄텐데.. 

내가 그걸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죄송했다. 이제 연제도 좀 컸으니 좀더 자주 시댁에 내려오고 해야지..   

연제가 자라서도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 할아버지 품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연수랑 연호도 할아버지와 차츰 더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면서 할아버지를 다정하게 대했으면 좋겠고.












아버님은 속정이 깊으시다.
내게도 그러시고, 아들들과 딸, 손주들을 대하시는 것을 보면 그 다정함을 알겠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께 속상해하실 때가 많다. 
명절이, 삶이, 아버님이.. 어머님을 고달프고 힘들고 속상하게 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어머님이 화를 내실 때 아버님은 별 대꾸는 않으시지만 좀 슬퍼보인다.
그 풍경이 결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님을 뵐 때 내가 가장 당황스럽고 마음 아픈 풍경이었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으니 젊으셨을 때는 아버님이 참 화를 많이 내셨었단다.
그러더니 몇해전부터는 화를 더이상 안 낸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화를 잘 내시던 시절을 마음 졸이며 견뎌내셨던 어머님은 
이제는 그 화를 아버님께 돌려주시려는 것처럼 한두마디 말끝에도 아버님께 울컥 화를 내시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익숙치 않아서 긴장하는 것일뿐
어머님아버님 사이에는 크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저 일상적인 대화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자주 조마조마했다.

자식들은 모두 아버님을 좋아한다. 
야무진 딸인 아가씨가 아버님께 술 좀 적게 드시라, 엄마 말 좀 들으라며 아버지께 이런저런 얘기를 시원하게 잘 하지만 
큰아들인 남편은 그런 말을 않는다.
대신 아버지와 함께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형편에서, 어딘가 비빌 언덕도, 특별한 기회도 없었던 
오토바이와 집짓는 기술 밖에 없었던 한 남자가 
어여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세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때로 큰 실수와 실패도 겪었고,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들을 참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자란 자식들은 
지금도 그들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나이든 아버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어머님은 아마도 아버님과 함께 살아온 긴 세월동안 우리가 미처 짐작하기도 어려운 많은 일들을 겪으시면서 애정 그 이상의 수많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니
지금 이렇게 아버님을 대하고 계실 것이다.
시간은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고, 삶은 계속 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께 힘이 좀 되어드리고, 그래서 부모님이 몸도 마음도 조금더 편안하고 푸근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보살펴드려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더 그렇게 할 것이다. 
손주들이 할아버지할머니께 드리는 행복만큼이나 다 큰 자식들도 부모님께 행복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작년에 고모네가 시댁의 TV를 3D 입체영상도 볼 수 있는 큰 것으로 바꿔드렸다. ^^

손주들에게 3D 안경을 씌어주시는 아버님의 즐거움이 내게도 전해졌다. 

이런 풍경이 있어서 명절이 좋다.








설날 큰댁 차례, 우리집 차례가 끝나고 나면 오후 느지막히는 어머니의 친정인 청상에 간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엄마인 청상 증조할머니께 세배를 했다.

우리도 외할머니께 세배를 하고 아이들과 똑같이 빳빳한 천원 새 지폐 한장씩 세배돈을 받았다.

청상할머니께 받는 천원은 늘 내게 복돈으로 여겨져서 나는 그 돈은 쓰지 않고 내 책상서랍속 지갑에 간직해왔다.

올해도 복돈을 받았다. 기뻤다. ^^ 아이처럼, 할머니께 받는 세배돈이 좋다. 










청상 진외가에 가면 아이들은 신이 난다. 
장작이 산더미같이 쌓인 어두운 광에 앉아 증조할머니와 같이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불을 떼보기도 하고..








고모부와 사촌, 육촌들과 어울려 시골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한다. 









다리 위에서 냇물에 물고기가 있나.. 살펴보는 중이다.


길에서 올려다보이는 앞산 산등성이에는 외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거기서 '조기 내 증손주 녀석들이 뛰어가는구나' 하시며 굽어보실 것 같다.

논밭과 내를 건너 바라보이는 앞산에 봉긋하게 솟은 외할아버님의 무덤은 청상 외가집 마당에서도 잘 보인다.

예전에는 누구나 시외할아버님처럼 

자기가 태어나 태를 묻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살던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자리를 마련하고 누워 잠들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여러번 집을 옮기며 자라고, 고향이라 부를만한 동네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또 어느 낯선 자리에 누워 잠드는 대다수 요즘 사람들의 삶이

문득 참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공간의 안정감. 

어린 시절을 한 동네에서 오롯하게 보낸 나에게는 이것이 참 크게 다가온다.

지금도 강릉 고향집에 가면 내가 태어난 집 자리가 지금 집과 밭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고 

옛집의 눈에 익은 뒷산의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수런수런 반갑게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마음 깊이 찡한 감동과 평화를 느끼곤 한다. 

청상은 비록 시댁이지만 내게는 그런 친정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곳이다.

명절마다 찾아와 외할머니를 뵙고 시골집의 돌답과 감나무와 대나무숲과 앞산을 바라보면 왠지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워지곤 한다.


외할아버님은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만난지 얼마 되지않아 그저 호감만 조금 가지고 있을 때 전화통화를 하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며칠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어른들을 좋아하는 나는 잘 모르는 어르신이지만 그 날 일기장에 짧게 명복을 빌어드렸었다.

그 후 남편과 결혼을 하고

외가에 와서 할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새롭다.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알던 어르신처럼 '안녕하세요, 할아버지'하고 인사드리게 된다.









아이들은 굽이굽이 시골 마을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어릴때 시골에서 자란 우리 고모부가 

솜씨좋게 물고기를 여러 마리 잡아오셨다.

따라갔던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른다.

패트병 입구를 잘라 거꾸로 끼우고 그 안에 된장 한숟갈을 넣은 어항(?)을 작은 냇물에 쳐두었더니 

아이들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아홉마리나 잡힌 것이다. ^^


손을 넣어 만져보고, 세숫대야를 흔들어 공기를 섞어주던 연수와 연호는 

'엄마, 물고기 우리집에 데려가서 키우면 안 돼?' 했지만

물 좋고 공기 좋은 청상을 떠나는 것은 이 물고기들에게 못할 일.

국 끓여먹을 것도 아니어서 

한참 외갓집 마당의 세숫대야 안을 헤엄치던 물고기들은

고모부와 일군의 조무라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저희 살던 냇물로 돌아갔다. 










시골집에 오면 나만큼 신나는,

나보다 할 줄 아는 것은 훨씬 많으신 

시골출신 잘생긴 우리 고모부. ^^

아궁이에 군밤도 구워주고, 고구마도 척척 굽는다.

남쪽 섬 출신인 사촌고모부는 아이들 데리고 강아지풀 꽃다발 만들어가며 동네 한바퀴 산책도 다녀오시고..

시골집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다. 

TV만화 틀어주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 지켜보는 것말고 

추억과 이야기거리가 될만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바쁘시다.

가마솥에서는 대식구가 먹을 육계장이 끓고..








서울이모님은 명절 지내며 어수선해진 외가의 부엌과 마당을 통털어 살림살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신다.

외할머니께는 따님이 세 분 있는데, 이 분들이 모이면 정말 대단하시다.

어마어마한 청소와 정리를 척척 해내고, 어머어마한 양의 먹거리들을 끝도 없이 내놓고, 그리고 또 어마어마한 양의 짐보따리를 꾸려놓으신다.

도시의 자식들 가져가라고 외할머니가 마련해놓으신 먹거리들을 필요한 집집으로 분배해서 싸고 

혼자 지내시는 외할머니가 찾기 편하게, 드시기 편하게 부엌을 정리하고 음식을 마련해놓는 손길이 다라라락 움직인다.  

두 분의 며느님도 명절을 치르며 참 많은 일들을 하시지만

모두 모여 있을 때보면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도 명절이면 모두 엄마 곁에 모이는 

이 댁의 세 분 따님들이 척척 가장 익숙한 손놀림으로 집 안팍을 돌보는 것이 느껴진다. 









외할머니는 어마무시하게 많은 자손들을 위해

이 집에서 가마솥으로 도토리묵을 한 다라, 두부를 한 다라 손수 만들어두셨고

떡국떡을 또 엄청 많이, 배추와 무를 또 이만큼 땅속에 묻어두고(이건 가을에), 고구마에 밤에, 간장 된장 고추장에,

엿과 땅콩을 넣어 강정을 또 이따만큼 손수 만들어놓으셨다. 

그리고 따로 튀밥은 어린 연제 먹으라고 우리집으로 또 한봉지 싸놓으셨다.    

두부만들며 나온 비지도 또 봉지봉지...


아이들 옷 챙기고, 어른들드릴 선물 조금, 용돈 조금 챙겨 내려오는 것이 명절 준비의 전부인 내가 

외할머니가 이 시간을 위해 들이시는 공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자손들의 새해를 열어주기 위해 몇날 밤, 몇날 날을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얼마나 애를 쓰며 보내셨을까.


 








설 연휴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청상 외가에 갔다. 

상주시내에 있는 시댁에서 청상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가니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매일 새로운 친지들이 오고가며 함께 뭐 맛난 것을 먹자 부르고, 외할머니께 무엇을 받아오고, 가져다드리고, 또 아이들이 놀러를 가고 하느라 빠질 날이 없었다.  

마침 날도 따뜻해 마당에서 놀고 먹고 치우기에 참 좋았다.


그런데 작은 집과 마당 가득히 북적하던 자손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다시 할머니 혼자 남으시면 갑자기 너무 고요해진 집에서 쓸쓸하시겠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돌아오며 얘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할머니께 전화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돌아온지 일주일이 되도록 못 드렸다.ㅠㅠ









오랫동안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썼던 2014년의 설 이야기를 이제 끝내야겠다.

처음 컴퓨터의 사진 폴더에서 이 사진을 작게 봤을 때 나는 어머니와 큰댁 아주머니가 우리집에서 제사 지낸 뒤에 함께 설겆이하시는 사진인줄 알았다. 

그리고는 이걸 내가 찍은줄 알고 '에구.. 정말 일도 참 안 하더니만 어른들 일하는 사진찍을 여유까지 있었구나, 욱' 하고 살짝 민망해했다.

그런데 클릭해서 크게 보니

이게 왠 걸... 어머님 옆에 있는 사람이 나였다. 

나는 내가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인줄 몰랐던 것이다. ㅠㅠㅠㅠ

게다가 저 파마머리 하며.....

나는 정말로 과수원농사와 젖소 농장까지 크게 하시는, 우리 어머니보다 나이도 많으신 양촌 아주머니인줄만 알았다. 엉엉.


연제 키우며 젖을 많이 먹여서인가, 보는 사람마다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해서 나는 내가 정말로 살이 많이 빠진줄 알았는데 

역시 얼굴살만 빠진 것이지 몸의 골격은 삼형제 안고 업고 하며 키우는 엄마 아니랄까봐 어깨며 허리며 무슨 역도선수만큼 우람하네....

한참을 충격먹고, 착각한게 웃겨서 혼자 웃고 하다가

우리 어머님이 워낙 갸냘프셔서 내가 더 우람해보이는 것이란 생각도 해보았다.

그도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내가 뚱뚱하긴 뚱뚱한 것이다.

새해를 열며 스스로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서른일곱의 나는 이렇게 생겼구나.

 

어머님은 올해 설을 지내며 안방의 큰 침대를 버리셨다.

결혼하고부터 시댁에 내려갈 때면 어머님은 늘 시댁에서 제일 아늑한 공간인 안방을 우리에게 내주셨다. 

아버님은 평소에도 거실의 매트에서 주무시고, 어머님만 안방에서 주무시는데 

우리가 가면 어머님은 안방을 우리에게 주시고 어머님은 작은 방이나 거실에서 주무시곤 하셨다.

안방 침대는 낡았지만 튼튼했고 포근해서 식구들 모두 다 거기서 잠자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방방 뛰며 놀았고, 남자 어른들이 한가한 시간에 살짝 낮잠자는 곳도 그 침대였다. 

하지만 나는 연수가 아주 어렸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침대 밑에서 잤다.

침대와 장롱 사이에 어른 한사람 누울 만한 공간에서 어린 연호 젖을 먹이며 함께 잤고, 

연제가 태어난 후에는 연제 젖 먹여 재우고, 엄마 찾아 침대 밑으로 내려온 연호까지 어찌어찌 겨우 끌어안고 재우느라 좁은 공간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다.

거실에서 자면 조금더 넓긴 하겠지만 아기가 어려 밤에 자주 깨니 다른 식구들 자는데 방해도 되겠고, 좀 춥기도 해서 

거실은 늘 아가씨 가족과 부모님이 주무시고 우리는 안방, 도련님은 작은방을 썼다.

명절에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어머님은 집이 좁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이런저런 의논을 구하셨다.

좀더 외곽의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터에 새로 집을 짓자, 아니다, 이 집을 리모델링 수준으로 깔끔하게 고치면 공간이 좀더 넓어질거다...

주로 이 세가지 안이 내가 결혼하고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명절마다 도마에 올라서 설왕설래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실행은 잘 되지 않았다.

선뜻 움직이기 힘든 형편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명절 때가 아니면 부모님 두 분이 지내시기에는 전혀 좁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익숙하고 좋은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어떻게 이 논의의 결론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님은 우선 더는 안되겠다 하시며 내가 아이들과 청상 외가에 가있던 시간에 안방의 침대를 내다 버리셨다.

작은 방의 잘 쓰지않는 작은 책상과 역시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정수기도 이번에 같이 정리하셨다.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이 삶의 절대적인 자세가 되어있는 어머니께서 멀쩡한 물건들을, 게다가 어머니께는 요긴하고 좋은 물건을 버리시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많은 며느리가 불과 몇 밤이지만 불편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좀 편하게 자게 해주시려는 어머님 마음이 정말 감사했다.



가족이 특별한 것은 삶을 함께 살기 때문인 것 같다.

때로는 밉고 서운하고 싫은 순간도 있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있다.

슬픈 일도 함께 견디고, 기쁜 순간도 같이 맞으면서 점점 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많이 느낀다. 

형제가 있어서 처음부터 좋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싫고 밉고 싸우다가도 또 같이 웃고 뒹굴고 놀면서 점점 닮아가고 진하게 정이 드는 것. 

그게 형제이고, 가족인게 아닐까.  

결혼과 함께 새롭게 생긴 가족들인 시댁 식구들은 이름은 '가족'이지만 실제 함께 지낸 세월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느끼기가 힘들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은 쌓인다. 새롭게 사귄 친구와도 7년이면 긴 시간이고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될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어머님아버님은 정말 많이 노력해주셨다. 나를 좋아해주셨고, 아이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로 사랑하고 계시다.

이제는 나도 많이 다가가야할 때인 것 같다.

내 블로그를 보시는 어머님이 이 글을 보시면 '뭐 그리 부끄런 일까지 다 적었냐' 하실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 것이 내가 시댁 식구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오래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 관심가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게 된다.

솔직하게 쓰려고 노럭한다.  

내가 쓴 것을 나는 또 마음에 담는다. 

그래서 쓰는 것이 내게는 노력하는 것이 된다.



설이 잘 지나갔다.

부모님, 가족, 고향, 형제들, 아이들, 자연, 삶... 많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좋은 한 해를 살아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사랑받았던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가끔 우리 친정부모님을 떠올리며 '내가 참 복이 많구나.. 우리 엄마아빠같은 부모님을 만났으니..'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무슨 일이 잘 안되면, 내 우유부단한 성격이나 짧은 생각으로 덜컥 큰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이런저런 고질적이고 헤묵은 원인들을 다 끄집어내서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이게 다 울 엄마아빠 때문이야..ㅠㅠ'하며 애꿎은 엄마아빠를 탓한다. 
그런데 얼마전 문득 '우리 엄마아빠같(이 침착하고 꼼꼼한)은 분들이 어쩌다가 나같이 덜렁거리고 속썩이는 딸을 두셨을꼬...'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죄송해하다 못해 엄마아빠를 측은하게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내 나이도 삼십대 중반을 넘었다.
요전에 '민들레'를 읽다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이라는 작가가 '내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이 부모님 탓이라고 원망하는 태도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버려야합니다'라고 쓴 것을 읽고 한참 웃었다.
그래.. 나도 이제 그만 해야할 때가 되었어.. 하고. ㅎㅎ


우리 부모님이 이 글을 보시면 많이 억울하실 것이다.
사실 나처럼 말 안듣는 딸도 드물텐데.
스무살 이전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나는 단지 모범생스럽게 자랐다는 기억만 가지고 있지만 그때도 엄마아빠께 꾸중도 많이 맞고 걱정들은 일도 많을 것이다)  아마 지금 김연수를 보건데 필시 나도 조렇게 엄마아빠 말 안듣고 뺀질뺀질 까불거리던 미운 꼬맹이였을 것 같고, 
스무살 이후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엄마아빠 말씀을 안듣고 내가 하고싶은 일들만 하며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도 왜 저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내 부모님들이 내게 늘 참 큰 분들이어서 그랬다.
그 말씀대로 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말씀을 늘 아주 많이 의식하고 살았다.
싫든 좋든 많이 의식하다보니 때때로 부모님의 재촉에 쫓겨 마음이 급해지고, 조바심나서 실수하기도 했다고, 그게 내가 부모님 탓을 하는 내용들이다.
 
구체적인 삶의 여러 사안에 대한 생각이 다르더라도 
마음으로는 늘 깊이 사랑했고, 그런 내 사랑을 전해드리고 싶었고, 또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나보지 않았다.
부모님 말대로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바램이란 테두리에서 아직은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다. 
(요건 내 생각이고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실지도...^^;;)

그래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속상한 상황이 내 삶에 벌어질 떄 
실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한 일이고, 내 결정과 행동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하는 일들인 것이 분명한데도
어린 아이 투정부리듯, 6살 김연수가 뭐든 잘 안되면 '엄마 떄문이야!'하고 말도 안되게 화내는 것처럼
똑같이 나도 '엄마아빠 때문이야' 하고 억지로라도 한 끄트머리 원인은 부모님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나말고 누구라도 한 명은 탓할 사람이 있어야지.. 하는 심정인 것도 같다.
영향이 깊었든, 압력이 거셌든.. 어쨌든 결정은 늘 내가 했으며, 내 인생은 내 선택과 행동의 결과인 것인데.
 
억울하시겠다. ^^
나도 김연수가 뭐든 엄마아빠탓이라며 말도 안되는 억지쓸 떄 우스우면서도 화가 나던데 
우리 엄마아빠도 그러시겠네.. 
그래도 김연수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무려 서른여섯살이나 된 자식인 나는 이제 부모님 탓하는 일은 고만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원래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지만... 
기왕 쓴 이야기의 결론은 그래서 이제는 탓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런 말도 안되는 탓하기를 그만 하려면 이제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원하는데로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고 내게서 비롯된 일들에 대해 책임져야하고.. 

 
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냐면.... 
사랑받고 왔다는 얘기를 하려다 나온 것이다. 
아이들도, 나도. 

다른 부모님들도 다 그런지 모르겠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아주 매력있는 분들이시다, 적어도 내게는.
여기서 말하는 매력은 타인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란 면에서 권위와도 비슷하다.
닮고 싶고, 따르고 싶다.
사랑이 깊고, 부지런한 분들인 엄마아빠는 우리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손주들에게도 참 극진하시다.
마음으로 의지하고 싶고, 언제나 나를 위해 손을 내밀어주는 분들.
어린 손주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게임을 하고, 자전거를 태워주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향긋한 할아버지의 머릿기름으로 단정하고 예쁘게 손주들 머리를 빗겨주고 로션을 발라주시는 분들.


깊은 사랑을 받아보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말썽꾸러기 김연수가 외할아버지가 조근조근 일러주시는 말씀때문에 조금은 철든 모습을 보일만큼.
엄마도 속상해서 떠먹이다 만 밥을 여섯살 연수에게 한숟갈 한숟갈 떠먹여주시던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연수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강릉에서 지냈던 지난 일주일 동안  
몸과 마음을 모두 포근하게 다독여주시는 어른들의 정과 보살핌 속에
아이들도, 나도 무척 행복하게 지내다 왔다.

아이들에 대한 정이 깊으시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어하시는 외가 어른들께 다녀오면 
아이들은 오래도록 어른들을 그리워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아이들을 늘 반갑게 맞아주는(엄마아빠는 대개 졸려서 새아침을 맞아 싱싱하게 깨어나는 아이들한테 좀더 자라고 윽박지르거나, 종달새같이 재잘거리며 걸어오는 말에 비몽사몽간에 시큰둥하게 대꾸하기 일쑤인데...ㅜㅜ) 외할머니와 
해님이 많이 올라 아침 찬기운이 좀 가실 때쯤이면 맑은 공기 마시라면서 형들은 물론 어린 연제까지 따뜻하게 안고 마당에 데리고 나가 나뭇잎들 만지게 해주시고, 깔깔거리며 뛰게 해주시는 외할아버지.
이불 속에서 어린 시절처럼 맘껏 달콤한 게으름을 부리다가 뒤늦게 일어난 엄마가 세수하고, 아침상 차리는데 거드는 시늉을 하는 동안 
연제는 증조할머니 품에 폭 안긴채로 두 형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앵기댕기 가매꼭지 올라가다가 따깨똥!'하는 다리세기 놀이를 재미나게 하고
증조할머니 쳐다보며 벙글벙글 웃고 뒤집다가 '따로마' 하며 세워주시는 손길에 신나서 펄쩍펄쩍 뛰던 
사람 많은, 아니 아이들과 잘 놀아주시는 어른들이 많은 외가의 아침풍경.. 
자란 후에 우리 아이들은 기억할까.
연수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6년동안 여름 겨울로 한번씩 외가에서 일주일이나 이주일쯤 지낼 때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이 풍경을 세세히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속의 따뜻한 기운들은 아마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서 어른이 된 후에도 외가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포근해 질 것이다.

외가에서 돌아온지 나흘쯤 지났다.
돌아오는 날부터 언제 외가에 또 가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이번에 심는걸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지켜보았던 배추가 크게 자라 김장할 때쯤 다시 가자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잠시 하룻밤자러 다녀오는 것이 되겠지만 
아이들도, 나도 벌써 다시 외가갈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
(우리들 때문에 엄마는 또 밥도 제때 못드시고 나 밥먹는 동안 연제 안고 업고 종종거리시고, 아빠는 연수연호 차에 태우고 경포며 아이스크림 가게로 다니느라 분주해지시고, 가까이 사는 언니도 친정으로 자주 달려와 펄펄한 세 조카 데리고 놀아주느라 고단해지겠지만...ㅜㅜ 쓰고 보니 어쩌다 나는 이리 '민폐'의 삶을 살게되었는가 싶어 더 미안하고 서글프다ㅠ)





















아침저녁으로 잠깐 아빠와 함께 있는걸 제외하면 
거의 종일 어른이라고는 엄마밖에 없는 집에서 지내는 세 아이들은 모두 어른의 정이, 다정한 눈길과 손길이 그립고 아쉽다. 
저희들끼리 껴안고 뒹굴며 부족한 엄마손, 어른품을 채워보기도 하기만 
그래도 늘 온기가 부족한 것 같다.
식구들 밥 챙기고 청소며 빨래같은 기본적인 집안일도 다 못해 종종거리는 엄마는
어느 아이 하나 오래도록 원하는 만큼 안아주고 놀아주지도 못하다가 
하루를 마감할 즈음이면 고단하기만 엄청 고단해서 아이들보다 먼저 쓰러진다. 
그런 순간이면 나도 참 어른들이 그립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
어른들이 내게 주신 사랑이 있으니까.
내가 받은 사랑이 나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욱아 네 뒤에는 언제나 엄마아빠가 있다.
그러니 어깨 쭉 피고, 가슴 펴고 당당하게 살아라..'
아빠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아직도 참 모자라고, 좌충우돌 실수하고 좌절하는 딸이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 생각하는건 
그 마음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잘 헤쳐나갈 것이다.
세상에는 더 어렵고 고되고 힘든 일도 얼마나 많은데
세 아이 키우는 일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처럼 징징거리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들을 생각해야겠다. 
내 삶에도, 아이들에게도.. 마음에 중심을 잡고 다리에 힘을 주고 가는 것이다.
하는 일은 밥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씻기고 젖주고 재우는 일이 전부이지만
내 삶의 하루하루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다.

사랑받은 기억의 힘으로 말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가을에, 그러니까 10월 초에 충남 홍성에 사는 솔이네에 다녀왔었다.

그때 바로 사진만 올려두고 뒤이어 제주 여행과 이런저런 일들이 이어져 여지껏 글을 못 쓰고 있다가 

해가 바뀌고 눈에 파묻힌 한겨울이 되어서야 뒤늦게 갈무리해 올려본다.


토요일 낮에 마침 대전에서 대학시절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만으로도 꼭 가보고 싶었던 대학시절 친한 친구와의 귀한 만남이었는데 '충청도까지 가는 김에 솔이네에도 가볼까?' 싶어 연락했더니 흔쾌히 어서 오라는 솔이엄마의 대답. 

그래서 기쁘게 대전들러 홍성으로 1박2일의 짐을 꾸려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나선 길이었다.

 


그립다, 저 뜨락. 

활짝 웃는 순영씨. 

호연이 호승이 명진씨 모두 잘 있는지.. 이 겨울, 솔이네 시골집 풍경은 어떤지.

궁금해서 훌쩍 다시 찾아가고싶다.

 








호연이네 텃밭에서 수확한 땅콩.

농사일 거들기(?)를 좋아하는 연수는 땅콩 따는 재미에 푹 빠져서 솔이엄마의 '아구~ 잘한다~~'하는 칭찬속에 호연이랑 둘이서 엄마아빠가 마당에 뽑아두고 바빠서 못 따고 있던 땅콩을 거의 모두 땄다. 역시 시골에서는 아이들 고사리 일손도 무시할 수 없다. ㅎㅎ



솔이는 호연이의 태명이고, 태어난 후에도 솔이엄마가 가족블로그였던 '솔이의 도시자연육아'에서 늘 솔이로 불러 내게도 그 이름이 더 익숙하다. 

연수와 동갑내기인 솔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토피가 많이 심해서 솔이와 엄마아빠가 모두 고생을 많이 했다.

심한 아토피로 힘들어하는 솔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여러 자연치료와 병원치료, 음식조절을 해나가던 솔이엄마아빠의 블로그 일기를 나도 눈물 삼키며 읽곤 했다.


솔이네와 우리 가족과의 인연은 연수 아빠가 총각시절에 열심히 활동하던(지금은 거의 이름만 올려놓고 있어 죄송한ㅡ.ㅜ) 청년회에서 시작되었다. 

솔이아빠도 이 청년회의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낳아 키우던 솔이엄마와 나는 두 집 다 블로그를 쓴다는 공통점에 서로의 블로그를 오고가며 육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남편들을 통해 알게된 순영씨와 나지만 우리는 곧 남편들보다 더 가까운 친구이자 육아동료가 되었다.


나는 솔이엄마를 통해 '자연주의육아'라고 부를 수 있는 육아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출산 전에도 '황금똥을 누는 아기' 같은 책을 읽어서 자연주의 출산이나 육아에 대해 살짝쿵 알고는 있었지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알아보거나 내가 그렇게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수를 낳기 전에 내가 유일하게 준비하고 출산 후에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은 모유수유 뿐이었다.  

모유수유는 그 즈음에는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도 강조하고 있었고, 유명한 소아과 의사가 쓴 '삐뽀삐뽀 우리 아기 모유먹이기' 같은 책을 보고 나도 마음 단단히 먹고 어려운 고비들 헤쳐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순영씨를 통해 조산원 출산과 천기저귀 쓰기,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 '이유식 다시 쓰기'와 같은 책들을 알게 되었다.

솔이네 블로그에 올라오는 솔이의 아토피 치료를 위한 모유수유와 엄마와 아기 모두의 음식조절, 풍욕 같은 여러가지 자연치유 노력과 자연주의 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정말로 든든한 선생님이자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연수가 8개월 되던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천기저귀도 실은 순영씨가 솔이 신생아때부터 하는 것을 보고 '음..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할 수 있을거 같아.. 아니, 해야지..'하고 엄두를 낼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순영씨를 따라 용기내서 해보게 된게 참 많다.









음... 이 사진은 내가 너무 심하게 웃어서 영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순영씨가 그렇게 좋다구. ^^;;;

자주 보지 못해도 한번 만나면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들, 묻고 싶고 나누고 싶었던 고민들을 얘기할 수 있는 순영씨가 있어 참 좋다. 

명진씨께 전해들은 말로는 순영씨도 나 만나는걸 무척 기다리고 좋아한다 하니(ㅎㅎ) 그리운 벗이 멀리 있어 안타깝긴해도 멀리서 이렇게 그리워하다 가끔 찾아가 만나는 기쁨은 참 크다.   


 


서울 신림동의 도시살이에서도 자연육아를 해나가기 위해 따뜻하고 소박한 노력을 정성스레 기울이던 순영씨 부부는 

재작년 겨울, 솔이가 네살이 될 무렵에 충남 홍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평소 시골생활을 하고파했던 솔이엄마의 바램이 이뤄진 것이기도 하고, 솔이의 아토피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이주였다. 

서울에서 진보적인 인터넷언론의 기자로 일하던 솔이아빠가 마침 지역신문 기자라는 적절한 일자리도 찾을 수 있어서 솔이네는 마당과 텃밭과 감나무가 많은 시골집으로 떠났다.


한겨울에 시골의 한옥집에 둥지를 틀고는 기와지붕에 하얗게 눈을 덮어쓴 채로 나무보일러 가득 장작을 넣고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던 순영씨네 집 사진을 블로그로 보며 

나는 그 한옥집 마루에 앉아보는 날을 늘 상상해보곤 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연호를 낳았고, 또 그 해 겨울에는 순영씨가 둘째 호승이를 낳아서 우리는 둘째들도 어슷비슷하게 키우며 살게 되었지만 홍성으로 순영씨를 한번 보러가는 일은 그만큼 쉽지가 않았다. 


순영씨는 음식솜씨가 참 좋다. 

나같은 어영부영 초짜 주부와는 달리 순영씨는 요리를 정말 좋아하기도 하고, 맛과 건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 어렵지않게 슥삭슥삭 깊은 맛을 낼 줄 아는 내공있는 진짜 요리사다. 

각종 반찬, 나물, 생선조림, 찌개, 죽.. 몇번 못 만났지만 순영씨는 늘 그녀가 차려준 밥상의 따뜻하고 흐뭇했던 맛으로 함께 기억되는 사람이다.

명진씨는 우리 신랑과 똑같이 4대 위해식품(육식+인스턴트 음식+술+담배)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데(^^;;) 순영씨는 그런 남편에게도 맛있는 요리를 해주면서 아토피안인 아이와 모유수유중인 자신을 위해 다양한 채식요리를 건강하고 맛깔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다.

10월에 벼르고 벼르던 순영씨네를 찾아가면서 나는 순영씨가 만든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고인 침을 흐뭇하게 닦고 있았다. ^--------------------^


역시 내 예상대로 순영씨는 직접 담근 효소로 음료수를 만들어주었고, 녹두죽을 쑤어주고, 삼천포에 사시는 시아버님이 손수 잡아 보내주시는 물고기들을 맛있게 구워주었다. 

남편들은 모처럼 마당에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먹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었지만, 나는 순영씨가 내놓는 밑반찬들이 더 반갑고 맛있었다. 

시골집 뒷마당에 예전 주인이 쓰다 두고간 항아리들을 잘 살려서 올해는 장도 직접 담가보려고 하는 순영씨. 

그녀라면 능히 잘 해낼 일이고, 나는 그 곁에 한번이라도 더 가서 구경도 하고 장맛에 감탄도 하고 장독대 위로 떨어지는 단풍든 감나무 잎사귀나 쳐다보고 있어야하는데 

바다 낳고 그런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    










석유보일러와 나무보일러를 함께 쓰는 순영씨네가 가을이지만 밤으론 춥다며 임산부와 아이들을 위해 뜨끈뜨끈하게 난방을 해준 방에 누워 

나는 순영씨와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연수와 호연이는 어른들이 고기굽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오래도록 밤하늘의 별을 보고 저희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늦게사 잠에 곯아떨어졌고, 덩달아 신나서 젖을 물고도 자주 잠이 들었다 깼다 하던 둘째들도 겨우 잠든 뒤에 

그래서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순영씨와 나는 순영씨네가 시골와서 지냈던 지난 일년 이야기, 아이들 유치원 이야기-내가 초봄에 연수를 잠깐 유치원에 보냈다가 결국 다시 데리고 있기로 한 이야기와 호연이의 시골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이야기, 둘째들의 육아에 대해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영씨는 나와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더 열려있고, 더 경험이 많다.

유아교육과를 나와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순영씨인지라 내가 아직 내 아이 하나만 키우며 겪고 생각하고있는 여러가지들을 교사와 부모 모두의 입장에서 더 깊게 바라보고 얘기해주었다. 

우리는 대안교육의 장점들, 그러나 그런 대안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나 학부모가 빠지기 쉬운 협소함, 공교육 안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 고마운 선생님들께 배우게 되는 열린 자세,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 같은 것들을 얘기했는데 나는 이해받고 있다는 기분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잘 할 수 있을거라는 다독거림도 함께 많이 받았다. 


순영씨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진심이 담긴 그녀의 한 두 마디 말에 나는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확~ 풀리는걸 느끼곤한다.

이런 식이다. 

내가 셋째를 임신하고 나서 만나는 아기엄마들이나 할머님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고 여러 말씀들을 많이 하셨지만 주로는 '아고~ 힘들어서 어떻게 키우냐'하는 걱정을 담고 있어 듣는 나도 그 기운이 전염되어 의기소침해지거나 걱정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순영씨는 전화로 내 셋째 소식을 듣고는 바로 환하고 밝은 목소리로 축하해주면서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둘째들을 낳고보니 첫째와 둘째가 잘 놀 때는 엄마 마음도 흐뭇하고 엄마 손도 더 짬이 나서 아이 하나 키울때보다 좋다는 얘기끝에 나온 얘기였는데 순영씨가 "하나보다는 둘이 좋고, 둘보다는 셋이 좋지요"하고 말하며 다시 한번 내 셋째 임신을 축하해주어서 나도 기운이 나고 마음이 무척 밝아졌었다. 

힘이 있는 말, 힘들지만 굳은 의지를 가지고 헤쳐나가는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참된 행복과 보람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어서 들으면 힘이 나는 말. 그런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홍성의 도서관을 구경갔다. 

일전에 대안교육 잡지인 '민들레'에서 공간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된 홍성의 '홍동밝맑도서관'의 회랑 이야기를 읽으며 '아, 여기 솔이네 동네네!'하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날좋은 일요일 오전에 뭘할까.. 하다가 아이들데리고 도서관나들이 가지 않겠냐고 순영씨가 물어서 내가 '밝맑도서관이 여기 있지 않냐'고 했더니 '바로 거기 가자는 얘기였다'며 순영씨는 웃었다. 

'거기 바로 옆에 생협도 있는데 빵이랑 과자랑 참 맛있어요. 그리 가서 아이들도 맛있는것 먹이고 우리도 놀다와요' 하길래

시골집 나무문에 붙었던 한지 뜯는 일만 부랴부랴 끝내고 나들이에 나섰다. 


새벽부터 일어난 아이들데리고 나는 동네 산책도 한바퀴 했고 아침먹고 나서는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고 과일 깍아먹으며 겨울준비 얘기하다가 문풍지를 새로 바르고 비닐도 붙여야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 더 있을때 함께 하자고 내가 졸라서 겨울준비 중 큰 일의 하나인 문 손질에 나섰던 참이었다. 

고운 나무 문틀에 쌓인 먼지 닦는 일이 혼자 꾸역꾸역 하려면 힘들고 고단한 일이겠으나 모처럼 만난 친구랑 같이 닦고 긁어내고 하니 재미있기도 하였다. 

나는 왠지 내가 좋아하는 순영씨네와 그 시골집에 작은 일거리나마 거들 수 있는 것이 기분 좋고 오랫만에 나무 결을 만져보는 일도 즐거웠다.













밝맑도서관의 어린이열람실.

아이들 사이즈에 딱 맞는 작은 등나무 의자들(어른이고 살이찐 나는 살짝 엉덩이가 끼는)을 보며 '아 아이들이 여기 참 좋아하겠구나' 싶었다. 

아이에게 맞춰준 작은 세상, 그게 아이들에게 참 필요한 것 같다.



밝맑도서관은 오랜 역사를 지닌 홍성 지역운동의 기반 위에 서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풀무학교'와 그로부터 뻗어나온 지역 생협과 다양한 농업, 교육운동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에 뿌리내리고 생활을 함께 하는 생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홍동마을, 그 속에 있는 도서관이고 지역민의 사랑방이고 교육터다.


홍성 지역운동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도서관 브로셔와 풀무학교 홈페이지를 슬쩍 본 걸로만 많은 얘기를 하긴 어렵다. 

이 날 처음 듣다시피한 '풀무학교' 이야기도 워낙 깊은 배경과 의의를 지니고 있어서 나도 천천히 알아보고 공부를 좀 해보고 싶어졌다. 

아무튼 하나의 마을을, 유기농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협동조합, 생산체, 어린이집부터 고등대안학교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농업에 관한 대학교육기관인 풀무학교 전공부까지 교육기관을 아울러가며 꾸려낸 홍성의 역사와 사람들이 대단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어렵다고, 힘들다고 얘기하고 좌절하기 바쁜 도시의 소시민인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꿈꾸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만들어내고 있는걸..

그 안에는 다양한 고통과 좌절과 정체와 퇴보도 있겠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숲은 이렇게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돌 지나고 한층 의젓해진 연호의 16개월 무렵. 지금에 비해보면 또 한참 야기같다. ^^

여름 지낸후라 까맣고 머리는 짧고 눈은 땡글땡글하구나, 우리 아들. 

밝맑도서관에서 진짜 거하게 기저귀에 똥 한버럭 싸주셨는데... 아기 똥에는 복이 있다하니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던 밝맑도서관에 작은 힘이나마 됐으면 좋겠다..(실질적 도움은 못드리공.. 죄송죄송) ^^;;;









도서관에서 내려오면 바로 생협으로 이어진다. 

느티나무 참 좋다..










생협이나 지역운동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빵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홍성에 왔을 때는 풀무생협에 와볼 일이다.

홍성에서 맛있는 빵을 먹으려면 갓골에 오시라.

갓 구운 우리밀 빵과 과자, 그리고 풀무학교 학생들이 직접 키운 채소와 여러가지 식재료도 함께 구입할 수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하나로서, 

'맛있네..'를 연발하며 쿠키를 와삭와삭 먹으며 밝맑도서관에서 들고온 브로셔를 읽고 

작은 플랭카드로 만들어진 홍동마을 지도 속의 생협, 떡집, 쌀가루공장, 오리농법으로 짓는 풀무학교전공부 논, 수공업 가게, 갓골어린이집.. 등을 구경하다보니

따뜻한 가을햇살을 거저 쬐고 있는 것 같은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다. 










솔이네는 언제까지 홍성에 살까.

아직 잘 모르겠다. 곧 다시 올라올수도 있고 오래 살 수 도 있겠지..

순영씨는 명진씨가 너무 일이 많아 바쁘고 힘들어한다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면 서울로 돌아가는 것도 자기는 괜찮다고 했다.

근데 이제는 명진씨가 밭이 같이 있지 않는 집에서는 못 살겠다고 했단다.

일하면서 틈틈히 집앞의 텃밭 농사 짓는 일에는 순영씨보다 명진씨가 훨씬더 정이 들고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어디가 됐든 명진씨는 텃밭농사를 지을 수 있고, 순영씨는 아이들과 아빠와 함께 시간을 좀더 많이 보낼 수 있는 곳에서 자연육아와 자연스러운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겠지, 이 맑은 사람들은. 

나는 또 놀러갈 수 있을테고.

참 고맙고 좋다. 

순영씨, 겨울 잘 보내요. 이렇게 써놓고.. 조만간 전화할께요. ^^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