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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17
생명/한살림.농업2014. 6. 17. 01:11







냇가 옆 언덕으로 망초꽃이 지천이다.

하얀 꽃무리가 뭉실뭉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언덕 위를 걷노라면 지상에 서있는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세월호 사고 이후 두 달이 지났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강제수용소. 
다음 날이면 가스실로 끌려가 처형될 상황이라 그 저녁,  
남자 수용소에는 깊은 절망과 공포 속에 불안한 정적만이 감돌았단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던 여자 수용소에서는 다시 입을 일이 없을 옷이지만 엄마들이 부지런히 아이들의 더러워진 옷을 빨아 널고,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보통 때와 다름없는 저녁 일상이 꾸려졌다는.

 
그게 엄마구나.. 싶었다.
내일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오늘 눈 앞의 아이를 보며 웃는 사람. 
배고픈 아이 입에 밥을 넣어주고, 코묻은 옷을 벗겨 빨아주고, 따뜻한 품에 안고 토닥여주는 사람.


아이가 있으면 엄마는 그럴 수 있다.
변함없는 일상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으로 아이의 마지막 시간을 따뜻하게, 행복하게 지켜줄 수 있다. 
내 아이가 곁에 있으면.

그러나 그 아이를 잃은 엄마는 어떻게 해야할까.













매실 철이다.

고향집에 갔다가 아이들에게 매실 따는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으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온가족이 달라붙어 외갓집 밭 옆에 서 있는 큰 매화나무를 털었다.

엄마는 서울 우리집에 가서 매실액을 담궈보라며 매실 3kg와 설탕 3kg를 싸주셨다. 


부엌 베란다에 있던 현미 항아리를 비우고 씻어 매실을 담갔다. 

세 녀석이 모두 달라붙어 설탕을 찍어먹고, 익지도 않은 매실을 깨물어 먹으며 난리 북새통이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생전 처음으로 매실을 담아 보았다. 

석 달 동안 기다리며 자주 잘 저어주어야 한다.













5월부터 한살림서울에서 진행하는 제철농산물꾸러미인 '설레임 보따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배송되었다.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팔당 지역의 농부님들이 키우신 오이, 상추, 느타리, 유정란, 딸기, 양상추, 아욱, 애호박, 청국장 같은 먹거리들이 하얀 종이에 곱게 싸인채로 

집으로 쑥 들어올 때의 느낌이 참 묘하다.


반갑고, 궁금하고, 걱정된다.


요리를 많이 하게 되었다. 

설레임보따리가 오는 화요일 오전은 마침 명선아주머니가 청소를 도와주러 와계신 날이라 내가 부엌일을 낮에 맘놓고 하는 날이기도 하다.

야채를 되도록 빨리 요리해 먹고 싶어서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데로 끓이고, 데치고, 볶고, 씻어서 국, 나물, 볶음, 샐러드.. 되는데로 만든다. 


그래도 특히 많이 오는 것들은 밤일거리가 된다.

생전처음 오이지도 담그고, 오이소박이도 만들어보고, 열무김치도 담가보았다.


주부 7년차이지만 여전히 초보 살림꾼인 나로서는 

'설레임 보따리' 신청 자체가 큰 도전이고, 숙제다.

붙들고 끙끙거리며 봄, 여름, 가을 보내다보면 나의 채소요리 실력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설레임 보따리에는 팔당지역 농부님들이 돌아가면서 쓰시는 편지가 한 장씩 들어있다.

세월호 사고 후 모두의 마음이 허방을 짚고 있을 때 온 편지에는 

'농사짓는 우리들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제정신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 날씨도 제정신이 아닙니다...'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아픔이구나.. 싶어 마음이 찡했다.


제정신이 아닌 세상을 살지만 나부터 정신 차리고 잘못 해오던 일들 바로잡을 수 있도록 공부하고 실천해야겠다.. 생각하며 세 끼 밥 꼭꼭 씹어먹고, 아이들도 먹이고, 이웃과도 나눠먹는다.














지난 주에는 앵두가 왔다.

어린 시절 장독대가 많이 있던 뒷마당에 앵두나무가 있었다. 
지금 부모님 사시는 양옥집으로 이사온 뒤에도 차고 뒤쪽 산등성이에 앵두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봄이면 앵두를 먹었다. 

요즘은 달달한 간식이 하도 많으니 아이들에겐 앵두 맛이 새큼하고 밍밍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세 녀석 다 예쁘다고 좋아하더니 조금밖에 안 먹고 가지고 놀기만 해서 내가 다 주워먹었다. 
그래도 나는 어린 시절에 먹던 싱그런 앵두 맛이 떠올라 맛있게 먹었다.


앵두 철이 지나고 나면 오디가 익는다.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오후면 가방을 멘 채로 집 앞 뽕나무 밑으로 달려가 달착지근한 맛에 빠져들던 어린 내 입과 손바닥을 시커멓게 물들이던 오디.
오디 끝나면 살구가 익는다.
살구 끝나면 햇옥수수가 나오고, 마루에 앉아 뜨끈하고 말랑한 찐옥수수를 먹고, 또 밭에서 금방 캔 햇감자를 쪄먹으며 여름이 갔다.


그런 '철'을 우리는 어느새 많이도 잊어버렸다. 
연수가 꽃피는 유치원을 잠시 다녔던 봄에 학교 마당에 앵두나무와 살구나무, 뽕나무가 있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던지..


'철'을 잃어버려서, 자연과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철들과 흐름과 고비와 순환들을 잊고 살아서, 그런 것을 모르고 무심해서 우리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철이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방선거 후,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선거 며칠전, 블로그 포스팅도 한 것처럼 '박원순 서울'과 '조희연 교육감'을 절실히 바라고 소망했는데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많이 기쁘지가 않았다.

우리는 살아서 좋은 정치인도 뽑고, 변화도 기대하고, 희망을 만들어가자 얘기하고 있지만
잃은 아이들,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두번의 선거가 아닌, 우리 사회, 우리 삶 전반의 근본적인 변화가..

내 삶에서부터, 작지만 내게는 힘들었던, 내가 외면하고 방치해왔던 변화, 성장, 실천들을 해나가야겠다는 결심도 다시 했다.




제철 채소들로 부지런히 밥상을 차리는 것부터

부엌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쓴다는 전기밥솥을 치우고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는 일,

녹색평론을 꼼꼼히 읽는 일,

이웃 엄마들과 책모임을 하는 일,

아이들과 도서관 책을 빌려읽고 장난감을 나누는 일,

소비를 줄이는 일,

자연에 좀 더 가까이, 깊이 안기는 일,

가족과 이웃과 세상과 더 정성껏 소통하고 지극히 섬기는 일,  

겸손해지는 일까지. 




 
세월호 사고로 우리 모두는 깊은 트라우마를 입었다.

소소한 일상을 기록해두는 블로그 글도 쓰기가 어렵다. 

아이를 잃고 철도, 계절도, 평범하던 일상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면 평온한 내 일상, 내 아이들과 누리는 계절과 생활 이야기를 적는 것조차 죄스럽고 미안해진다.

하지만 이 작은 글은 또 내게는 중요한 삶의 일부.

같이 계속 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저 내 생활 이야기 기껏 하다가 '세월호 가족들은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불쑥 들면 '너무 마음 아프다'고 병렬해서 적는 수준이지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쓸 수는 없고, 써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드니 이렇게라도 적을 수 밖에 없다. 

슬픔을 녹여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반성하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내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은 아픔을 마음에 품고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워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