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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5 광주 여행 4
여행하는 나무들2010. 2. 25. 01:25








지난 주말에는 멀리 전남 광주에 다녀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애석하게도 블로그이웃 명이님과 미페이님의 결혼식에 가지 못했던 토마토새댁님과 내가
결혼 축하를 핑계(?)삼아 날짜맞춰 광주로 먼 마실을 떠난 것이다.
 
날은 무척 포근했다. 
설 명절 다음 주라 그런가 도로도 한산한 편이었다.
대천휴게소까지 가는 동안 연수는 오래도록 잘 잤다.
나는 예전에 사놓고 미처 읽지 못했던 '세상을 바꾼 대안기업가 80인'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한 편 읽을 때마다 운전하는 신랑에게 "방금 읽은 이 사람도 정말 멋있어.. 아이디어가 넘 재밌지않아?" 라고 수다를 떨어가며.

휴게소는 사람이 정말 없었는데 음식맛은 사람수에 비례하는 것 같았으나
모처럼 여유로운 휴게소에서 연수도, 엄마아빠도 따뜻한 기운을 담뿍 받으며 쉴 수 있어 참 좋았다.
오전 11시에 집을 떠나 오후 4시쯤 광주에 도착했으니 하루의 대부분을 길에서 보낸 셈이었다.
   
명이님 집에서 쉬도 하고, 똥도 싸고 대걸레를 들고 신나게 놀기도 한 연수는
중요한 사진도 여러장 미페이님께 찍혔으나.. 그것의 공개여부는 연수와 미페이님 사이의 일이므로 나는 관여하지 않을 참이다.

무등산 깊은 곳에 있는 닭백숙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광주에 여러번 왔었지만 망월동과 금남로와 대학들을 제외하면 가본 곳이 없는 나는 무등산이 늘 한번 가보고 싶었다.
밤이었고, 차로 구불구불한 그 길을 달렸을 뿐이지만
어둠속에서도 보이던 완만한 산의 형상은 '광주의 어머니' 품에 들어온듯 편안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한잔 마시러 다시 광주시내로 오는 동안 연수는 잠이 들었다.
잠든 연수를 지키느라 신랑은 잠시 차에 남고 나는 먼저 일행과 함께 영풍문고로 들어섰다.
대형서점도 오랫만이다. 연수 낳고는 거의 처음 온듯.. 
토댁님의 두 초등학생 아들들을 앞세운 미페이님이 막내삼촌 혹은 큰 형처럼 신나게 만화책과 판타지소설 코너들로 향하고
애플님과 명이님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정은이를 데리고 문구팬시쪽에서 심각한 얼굴로 볼펜을 고르는 동안
나와 토댁님은 이런저런 책들 사이를 느긋하게 오고가며 책구경을 했다.

광주 영풍문고에서는 작년에 서거한 두 전직 대통령의 저작과 추모서들을 작은 부스 하나에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노무현 대통령의 회고록 한 권을 골랐다.
광주에 온만큼 'DJ 선생님' 책을 한권 사고싶기도 했으나 너무 짧았고, 너무 가까운 과거의 일이라 
어느새 더 기억에서 빨리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던 직전 대통령에 관한 기록을 집에 한권은 두고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한 적이 있어서 노대통령의 책으로 골랐다.

아빠가 잠에서 깬 연수를 안고 영풍문고로 왔다.
생애 처음 와본 대형서점에서 연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엄마만 찾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붙어있는 커피숍에서 고구마케잌을 먹고, 애스컬레이터를 타고 그 근처를 여러번 오르내린 뒤에야
연수는 조금 마음이 풀렸다.
명이님 집에 돌아온 시간이 10시 조금 넘어서였으니 그리 늦은 밤은 아닌데도 
20개월남짓 밤외출을 거의 안해온 나에게는 정말 한밤중같이 느껴졌다.

남자들 혹은 소년들이 스타를 하러 PC방에 간 사이, 아기들은 잠이 들고 
엄마들 혹은 여자들 셋은 두런두런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새벽녘에 출출한 모두를 위해 미페이님이 잔치국수를 끓였다.
멸치육수에 버섯을 넣고 끓인 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나는 곧 이 댁에 태어날 예쁜 딸과 그 딸과 아내를 위해 언제고 다정스레 국수를 끓여 야참을 마련할 젊은 아빠를 생각하며 
흐뭇하게 국수 한 그릇을 훌훌 마셨다.

다음날 아침, 예비엄마는 제외하고 현직(?) 엄마인 토댁님과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아침밥을 차려 먹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애들 입에 밥 넣어주는 일만큼 중하고 시간맞춰야하는 일이 없는 관계로 
우리는 뚝딱뚝딱 남에 집 부엌에서 내 집 부엌처럼 맘 편히 밥하고 천연스레 냉장고를 열어 나물반찬을 다 꺼내 맛있는 비빕밥을 해 먹었다.

삼남매와 연수를 따라 나선 풍암저수지 산책은 단조롭고, 오래 걸리고, 다리 아팠으나 
느린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반짝이고 평화롭고 소중했다.

토댁언니가 처음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서 언니가 활동했던 육아카페인 '씨앗이랑 열매랑'의 글모음집을 보내주었을때부터
언니는 육아에 있어 내 선생님이었다.
언니와 함께 한 몇 안되는 여행들은 모두 내게 선생님이 아이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채근하지 않고, 존중하고, 의견을 묻고, 속터지더라도 기다려주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엄마와 똑같은 자세로 어린 연수를 대해주었다.
작은 돌멩이와 나뭇가지들과 질척거리는 흙땅이 좋을뿐 큰 호수를 한바퀴 도는 일에는 의미와 목표가 없는
세 살 아가를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저만치 앞에 가서 어린 동생이 올때까지 마음쓰고 지켜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내가 배워야할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1박 2일이라 해도 오고가는데 걸린 시간을 빼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오고가는데 걸린 그 시간도 우리가 함께 있기 위해 쓴 시간인만큼 함께 보낸 시간이나 진배없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다.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물질을 쓴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쓰려고 우리는 인생을 사는게 아닐까..
광주를 떠나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햇살은 너무 따뜻해서 꼭 봄 같았다.
봄의 광주, 광주의 봄..
5.18기념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잔디밭에는 부지런히 걸으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망월동 잔디밭에 가서 앉아보고 싶었다. 한나절 아무 일없이, 풀꽃을 따라다니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냥 앉아있다 오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사람, 만나야할 사람이 있었다.
오랫만에 온 광주에서 꼭 봐야할 반가운 얼굴이..
그 댁에 가서 근영언니가 해주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야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에 다시 광주에 가면 그때는 아마 명이님과 미페이님의 예쁜 아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근영언니의 숲해설을 들으며 무등산을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망월동 나무그늘에도 앉아볼 수 있기를... 

집에 돌아오니 토댁언니가 싸주신 메주콩이 한 봉지, 근영언니가 싸준 둥굴레차가 한 봉지, 엿이 한봉지, 명이님이 싸준 찹쌀떡이 또 한봉지.. 
봉지들이 마치 그 사람들처럼 반가운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메주콩은 토댁언니가 심어 키운 것이고, 둥굴레는 근영언니의 시할머니가 키워 말리신 것이라하고, 찹쌀떡은 광주새댁의 시어머님께서 직접 떡메로 쳐서 집에서 만드신 것이란다.
키우고 만든 분들의 정성까지 얹어져 있는 그 소중한 것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무언가를 '싸보내는' 마음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살림하는 사람에게서 살림하는 사람에게로 싸보내지는 작은 봉지봉지들.. 그 속에 깃든 깊은 마음들과 정성에 대해.
다시 일상으로, 다시 제 고단하고도 복된 살림터로 돌아가는 여인에게 보내는 작은 응원이 그 안에 있었다.
따뜻한 동료애와 연대의 인사를 들으며 봉지를 여는 마음이 참으로 뭉클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