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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6 풍경소리 차소리를 들으며 봉은사를 걷다 2
여행하는 나무들2011. 3. 6. 00:07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삼성동에 있는 '웨딩의 전당'에 다녀왔다.
산부인과 병원의 예약시간에 맞춰 오전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결혼식 시간보다 1시간 반이나 일찍 식장에 도착했다. 
연수는 마침 낮잠시간이라 차안에서 곤히 잠이 들었고, 남편은 아이폰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연수가 자는 동안 나는 무얼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결혼식장 바로 옆에 있는 '봉은사'에 가보기로 했다. 

카메라도 없이 나선 길이라 그저 책 한권만 옆구리에 끼고, 
배가 제법 나온 7개월의 임산부는 낮은 정장구두를 신은채로 높은 비탈길를 천천히 걸어내려가 봉은사로 향했다.  

오래전에 무슨 일로 차를 타고 봉은사 앞 대로를 지나가다가 "일제시기 강제징용 희생자를 위한 100일 기도"라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무슨 절인데 이런 기도를 하지?'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한참 잊고 지내다가 작년에 봉은사 주지스님인 명진스님이 여당 대표의 '좌파 주지' 발언에 강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내용을 신문에서 보고서야 나는 봉은사가 우리 사회의 아픈 현안에 대해 공감하고, 종교적인 실천을 함께 하려고 애써온 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언제 한번 봉은사에 가보고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단정한 절이었다.
도심 한 복판에 있는 규모가 큰 절이지만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것이 좋았다.
지방의 큰 절 중에는 새로 으리으리한 건물을 너무 크게 지어 전체적인 조화와 정갈한 불전의 느낌을 해치는 곳도 있었는데
봉은사는 적당한 규모의 경내를 복작거리지 않게 잘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웅전 뒷편으로는 서울특별시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작은 전각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 전각들에 가보려고 계단을 몇 차례를 오르고 나니 제법 높은 산등성이로 난 산책로가 보였다. 
수도산이라는 봉은사 뒷산에서는 여러가지 소리가 함께 들렸다. 
바람이 흔들고가는 풍경소리, 봄을 맞은 새소리, 그리고 봉은사 앞 큰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 지하철 9호선 공사장에서 들리는 기중기 소리.

코엑스와 봉은사가 공존하는 삼성동.
참 낯선 듯하지만 오랫동안 서로 어울려온 공간과 소리들.

흙길로 된 수도산 산책로는 큰 석불상의 등뒤를 빙 돌면서 내려오게 되어있었는데 
돌로 된 그 큰 부처님 머리에는 아주 무거워보이는 네모난 돌판이 올려져 있었다. 
돌판의 네 귀에 달린 풍경에서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가볍고 아름다운 소리가 바람이 불때마다 들려왔지만 
나는 부처님이 너무 무거운 갓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번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머리위에 늘 이고 사는 대중들처럼, 부처님도 그렇게 힘들고 무거울 것만 같았다. 
다 내려놓고 좀 가볍게 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가끔 들리는 풍경소리만 위안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산책로를 다 내려왔을 때 사진에 있는 저 글씨, '판전'을 만났다. 
(카메라를 안 가져가서 절 사진은 하나도 못찍었다. 다행히 봉은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비치해둔 것을 한권 가져왔는데 그 책 이름으로 '판전' 글씨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무심코 판전의 현판을 올려다봤을때 '이 절은 글씨가 참 편안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절의 여러 전각에 붙은 현판 글씨들이 지나치게 뾰족하지도 않고, 부담스럽지 않다 싶었다. 
단정하다는 인상, 편안하다는 인상의 큰 부분도 아마 현판 글씨들에서 나왔으리라. 

가까이 다가가 표지판의 설명을 읽어보니 이 '판전'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숨을 거두기 며칠전에 쓴, 
추사 생애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새삼 노서예가의 소박하면서도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거친듯하지만 자연스럽고, 투박한 것 같지만 왠지 멋이 있다.

생을 마무리할 즈음에, '과천에 사는 병중의 촌노인'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며 붓을 들어서 쓴 글씨. 
그 글씨를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입에서 '흐흐흐흐흐'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재미있었다. 장난스러운 것은 분명 아닌데 사람이 나이를 많이 먹으면 도리어 어리고 귀여워지기도 하는 것처럼 글씨도 그렇게 귀여워보였다.   
그 어림속에 진정한 원숙미가 있고, 길고 고단한 생애를 살아오면서 잃지않고 닦아온 삶의 의지가 있다.

성공회대 대학원을 다닐 때 나는 신영복 선생님께 일주일에 한번 붓글씨를 배우는 귀한 기회를 얻은 적이 있었다. 
2년 남짓되는 대학원 재학시절동안 연마한 내 붓글씨 실력이란 것은 정성껏 가르쳐주신 스승님께 죄송할만큼 참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훌륭한 스승님의 글씨를 가까이서 자주 보고, 글씨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그윽한 먹향기에 잠시라도 젖어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붓글씨에 대해 무엇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글씨를 보며 내 나름의 느낌을 느끼고, 무엇보다 글씨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글씨공부를 오래 삶에서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좋아하게' 되었으니 괜찮다 싶기도 하다. 
좋아하게 되었으니 언젠가 또 다시 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여 다시는 못쓴다해도 괜찮다. 
이렇게 가끔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슴을 뛰게하는 글씨들을 만나 행복한 것만해도 충분히 고맙다. 
 
설명을 보니 보은사의 대웅전 현판도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었다. 
대웅전 앞으로 내려오며 다시 한번 현판을 올려다보니, 참 잘 어울리는 집이고 참 잘 쓴 글씨구나.. 싶었다. 

뜻하지 않게 멋진 글씨들까지 보고나니 
풍경소리와 새소리, 흙길 만으로도 내게 참 고마운 산책으로 남았을 봉은사 산책이 보물이라도 찾은듯 행복한 길이 되었다. 
 
사실 나는 부처님 머리위에 올려진 무거운 판을 보고 안쓰러워하면서도 
그 앞에 서서는 '두 아이의 엄마 노릇 잘 하게 해주십시요.. 두 부모님의 자식노릇, 형제들의 형누나동생 노릇 잘 하게해주십시요..'하고 빌었다. 
나중에 절을 다 빠져나올때쯤 되어서야 '나'에 관해 무엇을 빈 것이 없었구나.. 싶었다. 
나도 내 관계들, 때로는 버겁고 때로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좀체 내려놓지 못하고있구나... 

그래서 뒤늦게 관음보살상 앞에서 빌었다.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요. 배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요..'하고. 

좋은 사람, 배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봉은사 담장을 따라 결혼식장으로 돌아오며 봄볕속에 가만가만 되뇌어 보았다. 고마운 시간이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