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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들2010. 7. 20. 22:54









저녁, 채석강.
부안에서의 마지막 밤. 해수욕으로 고단해진 연수는 일찍 잠들었다.
아빠는 잠든 연수 곁을 지키고 나는 혼자 카메라를 들고 채석강을 찾아갔다.














겹겹이 쌓이고 쪼개진 지층들 사이를 걸으며 세월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날들이 흘러갔으리라.. 이 돌들 사이로.
바다가 돌 위에 제 물길을 내고 바위들이 둥근 자갈이 되었다가 끝내 모래가 되기까지의 시간.

연인들은 수천만년전부터 쌓이고 굳어진 땅 위에서 약속처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다.
초등학생 아들이 끄는 힘에 끌려가듯 일렬로 뒤를 따라가는 가족도 있었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놓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세월은 이 모든 사람들 사이를 공평하게 흘러갈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나이들고 있는걸까.  
내 얼굴에는 어떤 길들이 그려지고 있을까... 

자신없는 생각들이 머리속을 오가고 있는데 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연인들 중 남자분이 나를 돌아보더니
"선생님, 사진 한장 찍어주시겠습니까?" 하고 부탁해왔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특이한데, 이 분의 억양도 독특하다. 중국동포 또는 새터민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진을 두 장 찍었다. 두 사람 다 참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두 분이 행복해보여서 나도 기뻤다.










여행 5일째 아침. 부안 해넘이팬션을 떠나며.
삼각대를 세우고 가족사진을 찍는 것은 어째 늘 이 순간이다. 이틀밤 또 잘 재워준 숙소, 잘 살아준 세사람, 모두 고맙다.









멀리 이동하는 시간, 주인도 쉬고 신발도 쉰다.


부안을 떠나서는 고창 선운사에 가기로 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가보고싶어했던 절이다.
애틋한 사랑의 시와 소설에 등장하는 선운사 동백이야기 때문에 나는 동백꽃을 볼 때마다 그 절이 생각나곤 했다. 

그러나 선운사로 오는 길은 즐겁기보다는 고단했다. 
여행을 언제 마무리할지에 대해 의견을 맞출 때까지는 여행은 계속 불안하고 삐걱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화가 자주 끊겼고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을 담은 침묵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 곳인가. 이런 맘으로 그 곳에 갈 순 없다.
마음이 다시 미래의 일정이 아니라 현재의 여행으로 돌아오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여행의 자잘한 풍경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꺼내 신발을 찍고, 빨래가 어지럽게 널린 차안을 찍고, 잠든 아이의 고단한 얼굴을 찍는다. 
차 밖으로 나와 우리 차 위로 드리워진 푸른 나무가지를 찍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열렸다. 
그래.. 얼마나 어렵게 떠난 길인가. 지난 2년동안 나는 이렇게 떠날 수 있는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떠나서 만나는 것들은 모두 참으로 새롭게 내 마음을 두드린다.
일정에 대한 생각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이 순간에 만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깊이 느끼자..










도착한 뒤에도 연수가 계속 자서 한동안 주차장에서 차문을 열고 쉬었다.

매일 물놀이를 하고, 여행이 길어지다보니 빨래가 많다.
저녁에 빨아서 널어놓았다가 아침에는 덜마른 빨래를 차안 여기저기에 널고 출발한다.
남보기에는 좀 민망하지만 에어컨 때문에 건조한 차안 공기도 촉촉해지고, 빨래도 잘 마르니 일석이조다. ^^

가끔 한 군데 뿌리박고 사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떠돌아다니는 유목의 삶도 물론 쉽지 않겠지만...
'온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세 식구가 딱 붙어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먹고 자고 하다보니 마치 우리가 유목민이 된 것 같았다.
이틀밤씩 묵는 숙소가 내 집 같기도 하고, 세 식구를 태우고 달리는 자동차는 가재도구가 모두 들어있는 유목민의 마차같다.
연수는 숙소를 '우리집'이라 불렀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놀다가 숙소로 돌아갈 때는 '우리집에 간다'며 좋아했다.










큰 절의 주차장들은 정말로, 정말로 크다.
나는 이렇게 큰 주차장들은 서울에서 본 적이 없다. 서울에는 이만한 공간도 없을 것만 같다.
처음 갔던 개심사를 제외하고 수덕사, 내소사 오늘 선운사까지 대형주차장마다 고속버스들이 엄청나게 들어와 서곤 했다.
절을 찾는 관광객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고 그 다음에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반가웠다.
고단한 일상을 잠깐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어렵사리 시간을 잡고 옷가방과 먹을 것을 바리바리 챙겨서 떠난 사람들.. 우리는 같은 편인 것이다.   

동네 골목길에서 토요일에도 아이들을 태우고 가는 어린이집 노랑 버스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었다.
쉴 수 없는 부모들, 늘 바쁜 부모와 마음껏 놀 수 없는 아이들...
토요일의 관광버스 행렬은 그렇게 어려운 일상에 잠깐이나마 놀 짬을 만들어서 떠난 사람들의 행렬. 
고속버스에서 방금전까지 춤을 추다 내린듯 어깨를 흔들며 화장실로 들어서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코끝이 시큰하다. 
노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겨워지는 사회라니.. 정말 이상한 사회 아닌가. 

















잘 자고 일어난 연수는 선운사 주차장 옆 정자에서 신나게 놀았다.
어제 해수욕으로 탄 볼이 발갛다.
해와 파도에 익어 발갛게 달아오른 소년... 연수가 자라는 동안 이런 얼굴을 자주 보고싶다.

(오늘 엄마랑 같이 이 사진들을 본 연수가 말했다. "연수 혼자 놀고 있네... 꼭꼭 숨어라도 하고.. 까꿍도 하고.." 그래. 그런 놀이를 했었지..^^ 세살 아이의 기억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어제 내소사 입구에도 문수스님을 추모하는 플랭카드가 걸려있었다. 여기 선운사 입구에도 있다.
스님 4천여분이 4대강 사업 반대 서명을 하셨다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스님들은 '조선시대 왜구를 막는 심정으로' 서명운동에 동참한다고 하셨단다.
멕시코만에 유출된 원유때문에 만들어진 허리케인이 '기름비'를 미국에 뿌릴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었다.
환경재앙은 예상할 수 없는 속도와 규모로 인간들의 세계를 덮쳐올지도 모른다.
4대강 사업으로 파괴된 자연, 그로인한 위험들을 물려받을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고 미안했다.










선운사를 품고있는 산의 이름은 '도솔산'이고, 선운사를 감싸고 흐르는 이 천의 이름은 '도솔천(川)'이다.
도솔천(天)은 불교경전에서 이르는 이상적인 세계 중 하나다. 
미륵보살이 지상으로 내려가기 전에 때를 기다리며 머무는 곳이고, 전생에 덕과 복업을 쌓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는 하늘나라를 뜻하는 그 도솔천의 세계를 선운사는 절이 자리잡은 산과 강 안에 구현하고 싶었나보다. 
오늘도 도솔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계곡물에 시원하게 발을 담그고, 선운사 입구 자연생태공원에서는 놀러온 한 무리의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도 참 좋았다. 
곧고 높은 전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내소사 길이 왠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어야할 것 같은 길이었다면
넉넉한 도솔천을 끼고 있는 선운사 길은 꼭꼭 여몄던 옷깃도 좀 시원하게 풀어놓고, 담 안에서 울려나오는 목탁 소리를 한쪽 귀로 들으며 시원하게 탁족을 하면 좋을 것 같은 그런 길이었다. 
속세를 벗어난 구도의 길이라기 보다는 속세를 바로 곁에까지 불러 앉혀놓고 그 희노애락을 모두 안아주는 길.. 
이런 인상은 내가 이미 선운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애틋한 사랑의 이미지와 겹쳐져서 선운사를 더 가깝게 느끼게 해주었다.

선운사를 그리워하게 만든 시는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였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것은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지난 봄에 나는 강릉 친정집 마당가에 있는 동백나무 한 그루에서 동백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았다.
나무 한그루에서도 붉은 꽃이 얼마나 많이 피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제 만개했던 꽃들이 송이째 뚝뚝 나무밑에 떨어져 있었다.
연수는 매일 동백꽃과 놀았다.

그때 나는 연수에게 말했었다.
"연수야, 저기 남쪽에 선운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 뒷산에는 동백나무가 삼천그루나 있대.. 
한 그루만 있어도 이렇게 꽃이 많은데 삼천그루면 얼마나 꽃이 많이 필까..
봄에 꽃이 피면 온 산이 빨갛겠다.."

그 많은 꽃이 피면 얼마나 장관일까. 그 꽃이 지면 또 얼마나 서글플까. 온 산이 아마 피를 흘리는 것 같겠지.. 
동백꽃이 필 때를 맞춰 선운사를 찾는 것도 쉽진 않겠지만 동백꽃이 질 때 선운사를 찾는 일은 더 어려울 것같다.
마음을 굳게 먹지 않고는 차마 못 볼 장면같다. 

김훈씨는 '자전거여행'에서 이렇게 썼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그러니 그 눈물을 어떻게 본단 말이지. 










연수.. 지난 봄의 이야기, 기억하고 있을까.










선운사 경내는 대부분 평지였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도 오르막길이 아니라 거의 평지에 가깝고, 다른 불전들도 모두 수평의 공간위에 자리잡고 있다.
수직의 고양감이 없는 대신 넓은, 아주 넓은 공간감이 절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승가대학이 있고, 가까운 마을에 승려노후수행촌을 만들기위한 불사도 진행하고 있었다. 
올해 노동절에는 '이주 노동자를 위한 템플스테이'를 하기도 했다는 이 절의 품이 넓어보였다.

선운사가 등장하는 윤대녕 씨의 단편소설 '상춘곡'도 생각하며 절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다 
절 마당 한가운데, 그러니까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만세루'라는 전각에 펼쳐진 다기들에 눈이 갔다.
연수와 함께 올라가니 나이 지긋하신 보살님께서 차를 마실거냐고 물으셨다.
그러겠다 하니 말없이 차를 한 주전자 끓여다주신다.
무슨 차냐고 물었더니 지리산 녹차를 발효시킨 것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셨는데 발효액 특유의 달콤한 맛이 있어 연수가 좋아했다.  

만세루는 선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700년이나 된 나무기둥이 아직도 이 오래된 전각을 받치고 있다.
연수는 그 기둥들을 붙잡고 빙빙 돌기도 하고,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 뒹굴거리기도 했다. 
연수를 귀엽게 본 보살님이 어린 방문객의 무례를 눈감아주셨다.




 






대웅전 앞 마당에 연등을 달고 계시던 할아버지.
만세루 마루바닥에서 발을 쿵쿵 구르는 연수를 번쩍 들어안고는 등을 다시던 철근탑위에 올려주려 하셨다.
연수는 '엄마한테 갈래~!'를 외치며 금세 돌아왔다. 아이에게 꽃등을 가까이서 보게 해주시려던 마음이 참 감사했다.


선운사를 나와 광주로 향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여행 5일차의 숙소를 제공해주기로한 명이님네가 있었다.
미페이님과 명이님을 블로그에서 만난지 딱 2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갓난쟁이 연수는 만 두 살을 꽉채운 '오빠'가 되었고, 명이님과 미페이님은 결혼을 했고 어여쁜 딸을 낳았다.
백일이 채 안된 이 아이 얼굴을 본다는 핑계로 우리는 염치불구하고 명이님께 하루밤 숙박을 부탁하였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더운 날, 에어컨나오는 시원한 안방을 우리 식구가 차지하질않나.. 명이님 어머님이 해주시는 온갖 맛있는 요리들을 우리 식구가 거진 다 먹질않나... 
더구나 그 날 밤에는 전남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대가족의 포근한 품안에서 세 식구 모두 너무도 안락하게 자고 쉬었다. 어디 작은 펜션이나 외딴 휴양림안에서 이 비오는 밤을 보냈다면 아마 우리는 몹시 외롭고 불안했으리라...

명이님네는 이번 여행에서 정말 고마운 중간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다.
따뜻한 가족들 속에서 많이 웃고, 잘 먹고 잘 쉰 몸과 마음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났다.    
연수도 모처럼 차가 아닌 집 이불위에서 아주 단 낮잠을 오래오래 잤다. 
남편과 나는 수요일에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삼일밤을 묶을 숙소를 잡았다.
남편이 대폭 양보해 어렵사리 합의를 본 일정이었다.  

여행 여섯째날 오후, 점심까지 든든하게 얻어먹고 쏟아지던 빗줄기가 좀 가늘어졌을때 우리는 명이님네를 떠났다. 
장을 보고 광주를 떠나자니 새롭게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사실은 전체 여행을 마무리하는 날들이 될 것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전남 순천이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