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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7 오월의 외출 10
이웃.동네.세상2011. 5. 7. 02:10










5월이 왔다. 
잠잠하던 느티나무들이 어느날 갑자기 푸른잎을 확 피워올렸다.

사흘이나 계속 되었던 올봄 최악의 황사가 지나가고 맞은 아침.
다음날로 다가온 어린이날 소풍 준비를 하러 연수와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황사가 계속되는 동안 내 마음에도 온통 뿌연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아침마다 거실 창문앞에 서서 '오늘은 냇가 너머 먼산이 어느만큼 보이는지' 연수와 얘기하고, 그래서 오늘도 밖에 나갈 수가 없겠다고 한숨쉬고 돌아서는 일의 반복..
집안에 갇혀있던 그 3일동안 자연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왜소한 처지를 거듭 확인하면서도 
자연재해 수준의 이 황사가 실은 인간이 초래한 사막화와 산업화 같은 것들에 의해 날로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문명이,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세상과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져서 어깨에 힘이 빠지기 일쑤였다.












동네 꼬마들의 발길이 닿기에는 아직 이른 오전.
놀이터 나무밑을 누군가 깨끗하게 빗질 해놓으셨다.

황사 기간동안 뒤늦게 읽은 방사능 오염에 대한 글들때문에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
정부의 '안심하라'는 발표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찜찜하긴해도 아주 큰일이야 있겠나.. 싶어 큰 동요없이 지내왔었다. 
다만 연수와 비오는 날 외출만 삼가해왔다.
예전에는 비오는날 장화신고 우산쓰고 엄마와 우중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리던 연수는 왜 이제는 비를 맞으러 나갈 수 없는지 물었다. 
"비 속에 아야아야 하는 물질이 섞여있어서 맞으면 아플 수도 있대.." 하고 대답하고, 비온 다음날은 돌멩이나 나뭇가지도 한동안은 줍지 못하게 하다가 얼마전 다시 줍게 했더니 
"이제는 아야아야하는 물질이 없어? 만져도 괜찮아?" 하고 물어서 "응..."하고 자신없이 대답하는 내 마음이 찡하게 아팠다.   

비에 섞여 내리는 방사능 낙진이 제일 위험하고, 외출할때 되도록이면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집안에 숯같은 공기정화기능이 있는 것도 들여놓고... 필수지방산이 많이 들어있는 음식들을 먹으면 체내에 들어온 방사능을 배출하는데 좋고...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읽으며 좀 멍해졌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할거라는 일본의 원전사고 발생지점으로부터 사실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우리는 강한 영향권안에 들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연수는.. 평화는.
일본의 사고원전에서 복구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우리는 모두 10년 뒤에 암에 걸릴꺼야'라고 서로 얘기한다는데
일본과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얼마나 무서운 후유증들이 우리와 다음세대를 덮칠까.

세계가 한순간에 멸망한다는 것은 두려운 상상이긴해도 비현실적이라 그만큼 거리감도 들고, 또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섬광처럼 모든 것이 끝날테니 그때는 아픔도, 고통도 길게 남지 않을 것같아 외려 덤덤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천천히 나빠지는 것들 앞에서는.. 삶이 오래오래 그 고통과 절망을 견뎌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 난치병 발병률이 높아지고, 어린 몸과 정신들이 이름모를 고통과 싸우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부모들의 아픔.. 같은 것들을 생각하니 미래가 무서워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욱한 황사에 갇혀 그렇게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은 황사가 걷히고서야 천천히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 살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내곁에 찾아와주는 아름다운 것들에 감사하면서, 숨쉴 수 있는 것에 고마워하면서..  
날이 개고 황사가 그치면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초록색 무성한 잎사귀들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같이 견디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

연수와 함께 성당밖 놀이터에서 조금 놀다가 성당안 놀이터에도 잠시 들렀다.
5월의 성모상 앞에는 색색의 꽃들이 가득했다.











머리에 화관을 쓴 성모. 그 품에서 노는 아기 예수.
성모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지극히 적지만... 그 분이 엄마라는 것, 생명을 낳고 키운 분이라는 것때문에
아기엄마가 된 뒤로는 성모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좀 남달라졌다.
당신에게 꽃을. 세상의 모든 엄마들께 꽃을..
이 고난의 시대에 부모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아파트 돌담 틈새에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엄마, 제비가 죽어서 제비꽃이 핀거야?"

할머니 무덤가에 할미꽃이 피고, 백일동안 님을 그리워하던 아가씨가 죽은 뒤 백일홍꽃이 피었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은 뒤
어느날 제비꽃을 본 연수가 이렇게 물었었다.
이 날도 물었다. 제비가 죽으면 제비꽃이 되느냐고...
글쎄다... 아이야.
먼 길을 여행하던 푸른 제비가 고운 날개를 접고 쉬게되면, 오래오래 잠이 들어서 깨어나지 않게되면.. 그 자리에 정말 이 보랏빛 여린 꽃이 필지도 모르지. 정말 그럴 것 같구나.. 네 얘기를 그대로 따라가면 마음속으로 고운 그림 한편 그려볼 수도 있구나.












우리집에서 가까운 상일동역을 지나 한살림 매장이 있는 고덕역까지 가는 길에는 한쪽으로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다른 한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계속 같이 달린다.
연수와 나는 산자락쪽 길을 택해서 주로 가는데 가다가 마음내키면 유모차를 세워두고 잠시 산에 오른다.
 











연수는 산을 좋아한다. 뛰고, 걷고... 가끔 나무 등걸에 앉아 쉰다.

우리 동네 산들에는 큰 나무들이 많이 쓰러져있다.
작년 여름 태풍 콘파스가 서울을 휩쓸고 지나갈때 그 강풍에 부러지고, 밑둥까지 뿌리째 뽑힌 것들도 많다. 

연수와 쓰러진 큰 나무 등걸에 나란히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엄마, 나무가 왜 쓰러졌지?"

"작년 여름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쓰러졌대.." 

"나무가 죽었어?"

"응... 죽었어."

".... 아니야, 잠자는거 같은데?"

".... 잠자는 것 같아?"

"응! 누워서 잠자는거야."

"그렇구나.. 정말 잠자는 것 같네.." 


봄이 오는 숲, 까맣게 누운채 잠들어있는 나무.
조용히 웃었다. ^^ 
마음이 무거울 때, 때때로 천진한 아이의 말에서 참 큰 위로를 받는다. 고마운 녀석..












여기저기 구경 한참씩 하고 놀면서 걸어오다보니 버스로는 5분 거리인 고덕역까지 오는데 2시간이 걸렸다. ^^;;;
점심때가 다되어 고덕역에 도착했다. 마침 바닥분수에서 물이 나오고 있었다.
이사온지 두 달.. 여기 분수에 물나오는 것은 처음 본다. 이제야 날이 좀 더워졌는가보다.
뜻하지 않게 분수를 만난 연수는 어디 큰 공원이라도 온듯 신이 났다. ^^











처음에는 구경만 하더니... 이내 가까이 가서 물을 만져본다.
집앞 징검다리에서 논다고 신고 나온 장화가 그야말로 '물 만났다'. ㅎㅎ











"앗 차가워~~!!" 
생각보다 물이 찬지 깜짝 놀라서 돌아온다.
그래도 분수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들고 싶어하는 것을 '다음에 갈아입을 옷 가지고 왔을때 더 놀자'고 열심히 달랬다.











"엄마, 너무 신나~!"
좋아하는 꽃까지 따들고 물 옆을 뛰어다니는 연수. 어린 얼굴이 즐거움으로 빛난다.
세상이 밝고, 아이도 환한 날.. 이런 날이 엄마도 제일 좋다.












어렵사리 한살림 명일매장에 도착해 어린이날 장을 봤다.
지난 주 인터넷주문할 때까지는 미처 생각못했던 소풍이라 산책도 할겸 직접 장도 볼겸 겸사겸사 나선 길...  
유부초밥거리도 사고 과일도 사고, 빵이랑 쥬스까지 사고나니 장바구니가 묵직하다. 소풍 전날 기분이 난다. ^^
시어머니께서 어린이날에 연수 맛있는거 사주라고 하시며 부쳐주신 5만원을 뜻에 맞게(?) 쓴다는 훌륭한 명분까지 있어서 
연수가 사달라는데로 한살림 과자들도 넉넉하게 사주었다. ㅎㅎ 












마침 점심때라 배가 딱 고픈데 어디서 뭘 먹을까... 하다가 한살림 매장 바로 옆에 있는 '맛깔손'이라는 유기농 반찬가게에 들어갔다. 금방 싼 큼직한 김밥 한줄을 사서 가게 안에 있는 작은 식탁에 앉아 먹었다.
맛있다. 역시 소풍에는 김밥이 제격인데.. 재주없는 엄마가 간단한 유부초밥으로 대신하려 하니.. 김밥은 이렇게라도 미리 맛봐야겠다.
한살림이 공급하는 식재료들을 가지고 김밥과 반찬 등을 만들어 파는 이 가게는 한살림 서울생협에서 지역조합원들과 함께 일구어낸 멋진 '일터'이기도 하다. 보람도 있고, 수익도 창출해서 나누는 좋은 일자리까지 함께 만들어가는 생협 사람들...
덕분에 나같이 어린 아이 데리고 나와서 맘편히 좋은 밥한끼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은 참 고맙고 좋다.  











두 가게를 이어주는 복도. 오월의 좋은 볕 아래서 배추잎이 마르고 작은 다육식물 화분들이 잘 자란다. 
이 매장에 두어번 와본 연수는 어느새 매장앞 소파에 편히 앉아 볕도 쬐고, 긴 나무복도를 오고가며 혼자 놀기도 잘 한다.
엄마 따라온 누나나 친구들이 보이면 반가운 마음에 어느새 그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있다.











분수대가 있던 고덕역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한살림 매장이, 오르편으로 가면 '아름다운 가게'와 역시 재활용품 가게인 '리싸이클 시티'가 있다.
어린이날을 맞아서...는 아니고, 실은 내가 편히 입을 옷을 좀 사고싶어 들린 아름다운 가게.












엄마가 옷을 고르는 동안 연수는 제 흥미를 끄는 물건들이 쌓인 곳으로 가서 기웃기웃 하더니....











이내 한가지를 골라들고 내려놓지 않는다.
'그게 뭐야?'하고 물어더니 '로켓'이란다.
흠... 독해가 힘든 엄마가 겨우 읽어낸 것은 '과학 로켓'이라는 큰 글씨.
여러가지 부품이 들어있고, 만 6세 이상 권장, 만3세 이하는 불가.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래, 그럼 어린이날 선물로 이걸 사줄까?" 물었더니 연수는 너무 좋단다. 
5500원. 아름다운 가게에서 나름 고가품인 이 로켓으로 연수의 네살 어린이날 선물을 장만했다. 뿌듯하다~^^;; 












아름다운 가게에는 옷이 많은데, 고르다보니 '응? 이거 내가 기증한 그 옷인가?' 싶은 옷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니었지만 비슷하기도 하고, 내가 관심가는 옷이 또 비슷비슷해서 이러다 예전 내 옷을 다시 사올수도 있겠다 싶었다. ^^;;
아름다운 가게에는 새옷을 기증하는 의류업체도 많아서 예전에도 모자달린 새 가디건을 3500원주고 산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쁜 새 반팔티셔츠를 3500원에, 임부복 원피스 위에 따뜻하게 입을까 싶어서 검은색 가디건을 또 3500원주고 샀다.
연수 옷은 주위의 형아들에게 물려받는게 워낙 많아 아름다운가게를 이용할 일이 별로 없는데 혹시라도 생기면 새 옷사는 습관을 좀 떨쳐내고, 소비가 기부가 되는, 멀쩡한 물건을 쉬이 버리지않고 오래 쓸 수있게 도와주는 재활용 가게를 더 이용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평소 연수가 늘 갖고싶어 하던 얼레를 뒤늦게 발견해서 그것까지 '어린이날 선물'에 끼워 하나 더 샀다.
가격은 1000원. ^^ 동네 문구점에서 멋진 독수리연도 하나 샀는데 그것도 1000원.
도합 7500원으로 연수의 행복한 어린이날 준비가 끝났다.

유모차에 장바구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연수는 따뜻한 오후 공기 속에 잠이 들었다. 
녹음이, 이렇게 말하기에는 아직 색이 좀 연한 것도 같지만... 
연초록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는 나무 터널 아래를 걸어 돌아오는 길이 참 좋았다. 











우리 곁으로 전동 휠체어를 탄 여성 장애인 한분이 지나갔다.
연한 연두색 외출복이 아름다웠다.
얼마만의 외출일까.. 한번 외출할 마음을 먹고 준비해서 나서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오월의 세상은 얼마나 눈부신지 그 순간 우리가 모두 밖에 나와있다는 사실에 벅찬 기분이 들었다. 
바퀴달린 것들이 마음껏 굴러갈 수있는 길이 있다는 것도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나중에 지나와보니 자전거들이 많이 세워져있는 지하철 계단 옆은 그 틈이 좁아 유모차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애인 휠체어가 지나가기엔 비좁았을 것 같다. 

 
오월, 푸른 오월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긴 추위를 지나 갑자기 훌쩍 만개한 초록잎들처럼... 생명은 참 경이롭고 씩씩하다.
때로 두렵고 힘이 들어도... 나도 그런 생명답게 살자고 마음먹는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