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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14 외할머니의 수건
하루2017. 9. 14. 23:11



화장실 수건걸이에 고운 분홍색 수건이 걸려있는데 

'용계2동 노인회 봄놀이 기념'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예전에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 받아온 새 수건들 중에 하나인 모양이다. 


용계동은 우리 엄마가 결혼한 직후(?) 정도에 외할머니가 삼랑진에서 대구로 이사하시면서부터 살아온 동네다. 

그래서 어린 시절 우리에게 외할머니는 '용계동 외할머니'였고, 외갓집은 항상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찾아가는 용계동에 있었다.

용계동 외갓집에는 젊은 막내외삼촌의 책들이 많이 쌓여있는 벽장이 있는 작은 방이 있었고,

꽃이 예쁘게 핀 작은 화단과 수돗가가 있는 마당이 있었고

누군가 한 가족, 혹은 한분이 세들어 살던 작은 툇마루가 딸린 건넌방이 있었다. 


연호가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던 적이 있다. 

내 결혼식때도 외할머니는 연로하셔서 멀리 서울까지 못 오셨었고 

나도 결혼 뒤로 어린 아기들 낳고 키우느라 외갓집까지는 잘 안 가보았어서 

외할머니를 한번 뵙고 싶어서 강릉 엄마와 우리 네 식구가 함께 모처럼 대구 외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많이 편찮으셨다가 다행히 좀 나아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어릴때 외갓집 갈 때처럼 엄마랑 여행하는 기분으로 찾아간 곳은 

용계동이 아니고 조금 떨어진 옆동네였다. 

외할머니는 이사를 하셨던 것이다. 


오래된 집을 할머니 혼자 돌보며 지내시기에는 힘들겠다고 생각한 외삼촌들이 의논하셔서 

외할머니께 가까운 동네의 아파트 1층집을 구해드린 것이다. 

외할머니도 자식들의 의견을 따르셔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하셨는데 

그 얼마 후에 아프셔서 한동안 고생하시다가 다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 즈음에 우리가 찾아간 것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 외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불고기볶고 시금치나물 무쳐서 차려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엄마와 외할머니 모시고 시장에 갔었다. 

엄마가 옷을 사드리는 동안 외할머니는 시장 옷집 아주머니에게 "둘째딸이 왔다"고 하셨고, 아주머니는 "딸이 오니 얼굴이 환해졌다"며 같이 반가워해주셨다.

옷도 사고, 할머니 좋아하시는 멍게살도 사고는 할머니 가고싶은 곳- 용계동 집을 보러 갔다. 


한동안 비어있었어도 용계동 외갓집은 깨끗했다. 할머니 사실 때처럼 깔끔했고, 마당의 화초도 싱싱했다. 

용계2동 마을회관에 두유 한박스를 사들고 놀러가니 외할머니의 친구들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둘째 딸이고, 둘째 손녀고, 손주사위고, 증손주들이고.. 소개를 쭉 하고 할머니들이 꺼내다주신 음료수를 한병씩 먹는 동안

외할머니와 친구분들은 요즘 노인정에 누가 오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얘기들을 나누셨다. 

외할머니는 평소의 밝고 높은 목소리 톤으로 돌아가 계셨다. 


분홍 수건을 보며 그 날의 풍경이 후루룩 떠올랐다. 

할머니는 슬프셨을 것이다. 

삼십여년을 산 정든 집을 떠나는 것이, 정든 마을과 이웃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지하철 두 정거장을 지나 찾아와야하는 거리. 

예전처럼 아침 저녁으로, 아니 거의 하루 종일 드나들며 얼굴보고 이야기나눌 수 있었던 익숙하고 좋은 사람들과 

그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것이 슬프고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서 아프셨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작년에 리엔파크를 떠나 미사로 이사오며 슬펐던 것처럼

그리고 이내 몸 어딘가가 아파져 한동안 고전했던 것처럼

할머니도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고 나는 이제야 분홍수건을 보며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5년전에 외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줄 몰랐다. 

내 생각처럼 그래서가 아니라 그저 연로하셔서, 혹은 몸 어디가 특별히 약해지셔서 아프셨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사가 할머니께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셨을지 그때의 나는 가늠해볼 줄 몰랐던 것이다.


그때 외할머니는 새로 이사간 아파트의 경로당에는 아직 잘 안 나간다고 하셨었다. 

낯설고 서먹하셨겠지..

그 뒤로 사촌동생이나 엄마를 통해 드문드문 들은 소식은 외할머니가 건강히 잘 지내신다는 것과 

외할머니의 1층집이 동네 할머니들이 많이 놀러오셔서 같이 밥도 드시고 화투도 치시며 즐겁게 지내시는 사랑방처럼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올여름에 외할머니를 만나고온 엄마는 외할머니도 허리를 많이 아파하신다고 알려주셨다.


다시 외할머니를 뵈러 가고 싶다. 

내년 봄쯤에는 엄마를 모시고 찾아뵈러 가야지.  


자매애.. 라는 것이 여성이 살아가는데 정말로 중요하구나.. 하고 요즘 많이 느낀다.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 친구, 아이들 친구 엄마들, 다양한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여성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서로 도와주고 마음을 나누면서 쌓아가는 자매애.

자기애 만큼이나 어떤 여성들에게는 절실하고 중요한 관계이고 감정인 것 같다.  


내 삶을 오늘도 함께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자매들이 고맙고

1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조금은 아픈 마음 자리를 들여다보며 조용히 손을 얻어 따뜻하게  만져주고픈 밤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