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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0 겨울 제주도, 용머리해안
여행하는 나무들2008. 4. 10. 19:55
여행 게시판을 하나 열었다.

지나온 길은 언제나 아름다운데, 그 곳에 어떤 '순간'이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를 어딘가에 세워두고 총총히 또 떠나가며 우리는 살아간다.
지나온 길들위에는 그날의 바람과 햇살, 귓전에 속삭이던 많은 생각들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마음의 술렁거림, 낯선 길위에 서있을 때의 고요함.. 여행이 좋은 이유다.

*

엊그제 신문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제주도 용머리해안의 산책로가 하루8시간씩 물에 잠기고 있어 이제 서귀포시는 용머리해안 산책코스를 폐쇄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처음 그 기사를 봤을 때는 수학여행지로 유명한 '용두암'으로 착각하고.. '음- 유명관광지가 없어지겠네..'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찬찬히 기사를 보니 용두암이 아니라 '용머리해안'이었다.
아. 예전에 혼자 제주도를 여행할 때 산방산 아래 용머리해안의 그 산책로를 걸었던 것이 기억났다.

여행다닐때면 늘 가지고 다니는 여행수첩을 뒤적여 찾아보니 이 날 쓴 여행기가 있었다.



2005. 12. 12. AM 8:20

자다깨다를 반복하다가 새벽5시쯤 일어나려고 생각하니 가장 단잠이 쏟아져서 한시간을 마저 자고 일어났다.
씻고 미역국 정식까지 챙겨먹고 옷을 챙겨입는데 예쁘장한 경상도 아가씨가 말을 건네왔다.
"한라산 다녀오셨어요?"
반갑게 묻는다.
"아니요. 오늘 가려구요"
"아, 저는 어제 다녀왔어요. 진달래꽃밭에서 쳐다본 정상이 어찌나 예쁜지 이렇게 예쁜 산은 평생 첨 봤어요."
스스럼없이, 그이는 알몸으로, 나는 등산복을 모두 껴입은채로 대화를 한다.
제주도 용두암해수찜질방 겸 사우나니 이런 어이없고 재미있는 상황도 가능해진다.
그리곤 걱정한다. 어제도 내려올때 눈보라가 많이 쳐서 혼났다고, 낮엔 날씨가 너무 좋았는데, 오늘도 확인해보고 가라고 걱정한다.
자기 옷장문을 열고 전화번호-성판악휴게소-까지 일러준다.
전화결과는 한라산 대설주의보로 입산금지.
어느 코스나 그렇단다.
7시 40분. 해가 떠서 바다가 보인지 얼마안된 새아침에 갈데가 없어진 나는 하늘만보고 웃다가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진 않기로 했다. 슬슬 제주도를 천천히 걸어야지.
산방산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시외버스터미널로 오는 택시에서 택시기사님은 오빠라고 불러달라며 농을 쳤다.
5월, 제주도는 5월이 제일 좋다고, 그떄오면 꼭 연락하라신다.
지난 봄 우도로 가기위해 이 터미널에 앉아있었던 것이 딱 이시간인 것 같은데. 8시 30분.
변화무쌍한 제주도 날씨는 정말 놀랍다.
아무렇지도 않게 슬금슬금 철썩이며 밀려드는 파도.
바다가 바로 곁에서 새삼스럽지 않게 앉아있는 곳, 제주.
새벽에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여기는 내가 살아온 곳과 전혀 다른 삶이 있겠다 싶었다.
흐렸는가 하면 해가 나고, 해난채로 비오고 눈발날리는 곳.
오늘은 제주 5일장이 서는 날이라던데. 재래시장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비행기를 탈까보다.
이제 버스가 왔다.

한라산은 여간해선 겨울에 제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보다.
섬에서 산다는 것. 특히 눈을 뜨면 울렁대는 바다를 본다는 것.
멀리 한라산과 그 아래 구릉구릉한 오름들을 보며 그아래 옹기종기 모여 가족과 일가와 이웃해 산다는것.
제주도는 그새를 못참고 또 눈발을 날려보낸다.
관광도시에서의 삶은 피곤하리라.
밀려드는 사람들, 개발바람, 쏟아지는-국제자유도시니, 자치특별도니, 세계 평화의 섬이니 하는- 미사여구들을 뒤집어쓰고, 감내하고 사는 삶은 피곤하지 않을까.
뭍사람들보다 피로도가 높을 것만 같다. 그래도 이섬엔 귤이 나고, 말이 크고, 구멍 숭숭난 현무암돌멩이들과, 유채꽃이 핀다.
위로하려는 듯이. 이 섬의 사람들을.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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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산방산 입구에서 찍은 해안마을, 남제주 대정마을이다.
네델란드인 하멜이 상륙한 곳도 이 산방산가 용머리해안이었다. 용머리 해안으로 내려가면 한켠에 하멜이 타고온 배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설명은 오늘 붙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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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산방산가는 버스를 타고 1시간쯤 오면 여기에 내려준다. 
산책로처럼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계단을 따라 산방산을 올라가니 '석간수'라는 물이 흘러나오는 '산방굴사'란 작은 동굴이 있었다.
석간수는 여신 산방덕이 인간세상의 박해를 받고 바위가 되어 흘리는 눈물이란 설명이 돌에 써있었다.
지금은 불상이 굴안에 자리잡고 앉아 제주해안과 석간수로 목을 축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방산을 내려와 용머리해안으로 향하는 길,
12월, 육지는 한겨울이겠지만 제주도의 바람은 부드러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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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용머리해안의 주상절리는 아름다웠다.
세월이란 그렇게 부드럽게만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는 것은 아닐텐데
돌에는 어떻게 저렇게 부드러운 물결을 새겨놓았을까.
오랫동안 바다속에서 켜켜이 쌓이는 시간을 견뎠을 절벽이 바다위로 솟아나와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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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하늘이 용머리해안의 산책로의 웅덩이에 고여있었다.
이 길이 지금은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멀리 바다에 보이는 배들중 군함이 눈에 띄었다.
이 용머리해안에서는 제주 화순항이 바로 건너다 보였다.
미국은 오키나와와 제주도와 평택을 잇는 대중국포위용 전략기지를 건설하려는 구상으로
화순항 해군기지를 요구해왔고, 한국정부는 제주도민들과 많은 시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험천만한 MD구상에 동참하려 하고 있었다. 
2005년 겨울, 건너편 화순항에서는 방파제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장차 만들어질 해군기지를 위해 바다로 뻗어가는 삭막한 콘크리트 방파제가 시야를 답답하게 죄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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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해안을 돌다가 낚시하는 분들과, 고무다라를 잔뜩 펼쳐놓고 회를 파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또다른 한쪽에선 아주머니들이 주상절리에 붙어 굴인가 조개인가를 따고 있었다.
주상절리에 조개들처럼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행객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는 절벽이 물에 잠기고 있으니 이분들도 먹고 살기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셔야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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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혼자 제주도를 여행할때마다 가난한 여행객인 나는 하루밤에 9500원하는 '용두암해수사우나.찜질방'를 숙소로 이용했고, 시외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제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날 점심, 나는 거금 1만원을 주고 제주도가 길러준 해삼과 멍게, 게불, 오징어.. 또 이름을 모르는 이런저런 해산물이 섞인 회한접시를 사먹었다.
'그 쪽이 마라도쪽'이라고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용머리해안에 주저앉아 아주머니가 바로 썰어준 회를 먹고 있으니 문득 '세상 뭐 별거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회접시에서 올라오던 시큰한 바다냄새, 알싸한 초장맛, 저기 어디쯤 마라도가 있겠구나 싶던 반짝이는 푸른바다.
겨울이란걸 잠시 잊을만큼 따뜻했던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점심이 여행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이로운 주상절리의 기암이 일상인 사람들을 만났다.
해녀아주머니의 고무다라가 펼쳐진 좌판에서 점심삼아 해삼, 멍게, 소라, 문어, 오징어 회를 섞어 한접시 먹었다.
파도가 치는 바위위에서 반짝이는 먼 바다, 더 먼 마라도 그리고 남제주 대정마을을 바라보며
그 파도, 그 바람, 눈 다 맞으며 먹는 점심은 말할 수 없이 뭉클했다."


... 이 해안에 앉아 또다시 가슴 뭉클해하며 회한접시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사람들이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면, 그리고 작은 실천들이 모인다면
온난화를 멈추게 할 수는 있겠지만
한번 높아졌던 해수면이 다시 낮아지는걸 내 생전에는 보기 어렵지않을까..
언젠가 다시 제주도의 12월 눈을 맞으며 이 자리에 다시 앉아보고 싶다. 회도 한접시 사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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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_ 용머리해안을 떠날 때 본 구멍난 현무암들.
아마도 그 안에 나무가 들어있다가 긴세월 흐르는 동안 나무는 없어지고 소리치는 듯한 구멍만 남은 것이란 설명을 봤던 것 같다.
그때도 돌들이 뭔가 소리치고 싶어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구를 살려줘! 용머리해안을 돌려줘!"
지금 나도 소리치고 싶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