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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0. 6. 27. 23:00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되는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질문과도 같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시>의 팜플렛에 저런 내용의 이창동 감독의 말이 적혀있었다.  

<시>를 보며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게되던 질문은 '인간의 마음이 짓밟히는 시대에 인간의 마음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감독의 전작인 영화 <밀양>에는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전에 너무 쉽게 스스로를 용서해버리는 가해자, 그래서 '용서'를 통해 억지로라도 가해자가 준 고통을 넘어서 보려했던, 극복해보려고 몸부림쳤던 피해자를 마지막까지 조롱하고 처절하게 파괴해버리는 가해자가 등장했었다.
(영화의 원작인 이청준씨의 소설은 1980년 5.18 광주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청문회에서 모티브를 얻어 씌여졌다고 한다.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용서해버리는 가해자, 피해자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도 잘 살고 있는 가해자들이 누구를 빗댄 것인지 알 수 있다.) 

<시>는 고통스러워하는 가해자, 죄의 무게와 그에 대한 대가(벌)를 회피하지 않기위해 애쓰는 가해자의 이야기였다. 
그런 면에서 다행스럽고, <밀양>보다는 덜 분노스럽지만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더 멈칫하게 되는 영화였다. 
그 가해자가 권력자도 아니고 폭력적이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하고 또 약한, 젊은 세대로부터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김당하는 노인, 그것도 병든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 아프고 절박하다.

누구나 자기 삶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하지만
자기 삶을 지키기위해 타인의 존엄, 인간의 마음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버려지는 현실속에서
'시'와 '인간의 마음'같은 것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시>는 그것들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마련하는, 자기 삶을 걸고 온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직접 가해자의 보호자란 위치때문에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버린 이 여인은
마침 인생의 풍파는 모두 겪고 지나간 것같은, 그래서 이제는 고단하지만 잔잔한 노년의 삶만 남은 것 같던 그 때  
생애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한번 써보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젊고 쌩쌩한 것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버리는 '양심, 죄의 대가'같은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믿는 나에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반가운 것이었다.
치매와 중풍으로 고통받는 노년, 장애여성, 자식을 잃은 엄마, 조손가정, 청소년 범죄,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 돈이 인간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시대.. 이창동 감독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담담하게, 그러나 회피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드러낸다. 

사회 전체가 관심갖지 않는 '속죄, 반성' 같은 것을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고민하는 개인.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않으려고, 타인의 죽음의 무게를 무겁게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극중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란 주제로 시 강좌 수강생들이 한 명씩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순간 '나는?'하고 고민했는데..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 없어서 충격을 받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려운 질문이었다. 천천히 오래 두고 답을 생각해야할 것 같은...
 
엄마가 된 뒤로는 모든 영화를 엄마의 자리에서 본다.
이 세상속에서 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나는, 아이는 인간의 마음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


영화가 끝난후 이런저런 생각들로 조금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상영관을 나서는데 
상영관 문앞에서 아빠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수가 엄마 부르는 소리 안들렸어?"
상영관 바로 앞까지 와서 엄마 엄마 부르는 통에 아빠가 혼이 났던 모양이다. 방음이 잘 되어 다행히 안에는 안들렸다. ^^;;

한달에 한번 엄마는 영화를 보고, 아빠와 아이 둘이 놀기로 했다. 
어제가 첫 날이었는데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연수는 차에서 한시간쯤 자고, 나머지 시간은 아빠와 둘이 극장안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한다.
다행히 분수도 있고, 에스컬레이터도 있어서 재미있게 구경하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잘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좀 엄마를 찾은 모양이다.
모처럼 아빠랑 둘이 시간을 보낸 것이 아빠와 연수 모두에게 좋았던 것 같다.
둘이 부쩍 친해져서 나를 뒤따라오게 하고 둘이서 손을 잡고 앞장서서 다정히 걸었다.(이런 일은 우리집에서 극히 드물다..^^;)

오랫만에 찾아가본 광화문 씨네큐브도 반가웠다. 
내가 본 일요일 한낮시간에는 주연배우인 '윤정희'씨와 비슷한 연배일법한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분이 색다르기도 했고 이제는 아기 엄마가 되어 정말 오랫만에 극장나들이를 한 나도 그분들과 크게 다를바 없는, 
보통의 극장가에서는 보기 드문 관객이다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때까지 이 '보기 드문 관객'들은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자막이 다 올라간 뒤에야 불이 켜지는 극장 덕분이기도 하지만 어르신들은 불이 켜진 뒤에도 한참 그대로 극장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주 천천히 일어나셨다.  
씨네큐브에서는 30일까지 이창동, 임상수 감독 특별전을 한다 하니 혹시 <시>를 볼 수있는 곳을 찾고계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