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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25 눈 쌓인 강릉, 부모님 곁으로 4


지난 주말,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강릉에 다녀왔다.


영동지방에 25년만의 폭설이 내렸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고향집에 가끔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곤 했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대체로 밝았지만 때때로 지치고 두렵고 걱정되는 기색이 느껴졌다. 

넓은 마당에 학생들 다닐 길을 치고,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계속해서 눈을 치우느라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눈이 계속 쏟아지던 2주 동안은 어린 아기들 데리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 속에 가겠다고 해도 부모님은 절대 못 오게 하셨을 것이다.

그 2주간 남편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자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토요일마다 출근을 했다. 

이래저래 부모님 곁에 가볼 수가 없었던 나는 걱정만 하면서 지냈다.








친정집은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외진 곳에 있거나해서 고립된 것도 아니고, 집이 낡거나 약해서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눈이 퍼붓는 동안 연로하신 할머니만 바깥 출입을 못 하셨을 뿐, 엄마 아빠는 마당에 길을 내고 찻길로 나가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농협마트에 가서 장도 봐오시며 다행히 아주 큰 어려움은 없이 지내셨다. 

하지만 그 시점에 강릉에 있었던 누군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끝도 없이 눈이 쌓이고, 어렵게 뚫어놓았던 작은 길마저 다시 또 눈속에 묻혀 사라져 버릴 때.


멀리 있는 자식들은 모두 전화기로만 가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까운 이웃들과도 하루나 이틀 걸러서야 한 번쯤 눈 속에서 걱정되는 안부만을 주고 받을 수 있을 때. 

 

비록 아무 힘도 안 되고, 눈치우는 것도 크게 거들 수 없고, 어린 자식들 잔뜩 데려가 되려 일거리나 더 늘려놓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얼굴을 보러, 

엄마 아빠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고, 손을 잡아보고, 안아보고 싶어서 강릉에 너무 가고 싶었다.


다행히 지난 주말에는 남편이 바쁜 일이 마무리되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연수가 감기를 심하게 앓았지만 거의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들은 모두 건강했다. 

토요일 아침, 어쩔까 망설이던 우리는 전격 결정을 하고 후다닥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엄마, 눈이 바다같아!!"

외가집 마당에 도착한 연호가 내게 소리쳤다.


^^

바다같았다. 

햇볕에 녹으라고 아빠가 헤쳐놓은 눈들이 마당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 좋아하는 연수가 그냥 있을리는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눈더미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자기 키보다 높은 눈더미 위에 올라선 연수는 살짝 무서워보였다. 

이내 발이 푹푹 빠졌고, 부츠도 눈 속에 깊이 박혀버려 연수는 금방 발을 적시고 집으로 철수했다.

대신 따뜻한 방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할아버지가 사다주신 간식을 냠냠 먹으며 제가 좋아하는 케이블 만화를 실컷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아픈 뒤에 이보다 좋은 휴식이 있으랴... 따뜻한 아랫목에 군것질거리 쌓아놓고 마음껏 TV보며 뒹굴거리기. ^^

오고가는 길이 멀어 고단했지만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보통 때보다 훨씬 즐겁고 여유로운 주말이 열린 것이다. 







대신 부모님은 엄청 바빠지셨다.ㅠㅠ


괜찮다고, 안 와도 된다고 해도 

걱정된다며 늘 못와봐서 애달파하던 막내딸이 

마침내 갑작스레 떠났다고 통보하자

두 분은 잠시 대책회의를 하시고는 신속하고 민첩하게 대식구 맞을 준비에 돌입하셨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연제의 첫돌을 축하하는 외가집 생일잔치. ^^;;


연제의 돌은 내가 어머님께 부탁드려 상주 시댁에 가서 하기로 했다.

연제의 돌잔치는 집에서 꼭 해주고 싶었다. 

집에서 돌상차려 따뜻하게 아이의 일년을 축하해주고, 아이를 잘 보살피고 지켜준 가족들과 집과 좋은 기운들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리는 시간으로 소박하고 뜻깊게 보내고 싶었다.

서울 우리집에서 하면 제일 좋겠지만 혼자 준비할 엄두가 잘 안났던지라 어머님께 부탁드렸고

어머님께서 그러자고 들어주셔서 다음 주말에 시댁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잘하는 일이라고, 어른들 곁에 가서 잘 하고 오라고 하셨던 친정부모님은

막상 연제 생일이 가까워오자 '외가에서도 뭘 좀 해줘야할텐데..' 하고 나와 통화할 때마다 걱정을 하시더니

마침 우리가 내려온다 하니 '아이구 잘 됐다, 이참에 외가집에서도 연제 생일상을 차려주자'고 의논을 하셨던 것이다.









수수팥떡과 삼색 경단을 올려놓고 

고운 과일들도 접시 가득 담은 예쁜 상 앞에

연제를 세워주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형들도 신이 나고, 연제도 싱글벙글 하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증조할머니도 함빡 웃으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증정되는 금반지! 두둥~~~! ㅎㅎㅎ








'금은 역시 깨물어봐야 제 맛이지~! 냠냠...' 맛을 아는 연제. ㅋㅋ








이런 순간은 자주 없다.

살면서 아주 드문 행복하고 고마운 순간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는 것이다. 

비록 사진에는 없지만 이 순간, 카메라를 들고 '하나 둘 셋~!'하며 웃고 있는 수호제 아부지까지 모두 함께 말이다.









외가에서 차려준 제 생일상을 잘 받고난 연제는 흐뭇하게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은 모두 제설작업에 동원!


두둥.... 이걸 모두 치우라고?!!!

ㅎㅎ


아이들이 외가에 올 때마다 신나게 놀던 모래언덕 자리가 주위의 눈속에 움푹 들어가보일만큼 눈이 많이 왔다.









두 삽뜨고 사진부터 챙겨서 찍는 나는야 전시행정가.. 아니 블로거. ^^;;;


웃고있는 아빠 모습이 좋다. 

어릴때, 그러니까 1m가 넘는 폭설이 왔던 25년전 그 때를 나도 기억한다.

12, 3살 무렵이니까 꽤 컸을 때인데 그때도 나는 이 집, 이 마당에 서있었다. 

연수가 올라섰던 차고옆 눈산에 그 때 나는 눈터널을 팠었다. ^^

그리고 우리집에서 지금은 마을회관이 있는 방앗간터까지 아빠가 길게 눈썰매 길을 다져주셔서

비료푸대를 깔고 신나게 눈썰매를 탔었지..

신나고 즐거웠던 그 겨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밝고 좋았다.

눈썰매를 타며 깔깔 웃던 볼이 빨간 소녀가 어느새 서른일곱 세 아이의 엄마라니.. 시간은 정말 장난꾸러기다.

  








어쨌든 나는 눈 좀 쳐본 뇨자!

연제 자는 한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마당 한 구석과 텃밭의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구덩이의 눈을 좀 판 것으로 

그래도 나도 눈 치는 것 거들었다고 있는대로 생색을 내고 

눈을 보며 엄마가 타오신 뜨거운 믹스커스 한잔도 분위기 제대로 내며 마시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강릉에 사는 친정언니 부부가 점심을 사주었다.

해물찜과 칼국수를 먹었는데, 국수까지 먹었으니 연제 생일은 제대로 한 셈이라고 엄마가 말해 모두 웃었다.

커피를 마시러갔던 카페 근처에 '순개 습지'라는 작은 습지가 있었다. 

강릉은 습지 복원사업이 한창인 것 같았다. 

저탄소녹색성장 시범도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빙상 경기들을 비롯한 여러 경기가 열리게되는 강릉.

대규모 토목사업은 필연코 환경을 해치기 마련이지만 '녹색'이라는 도시의 지향이 부끄럽지 않도록 새롭고 대안적인 발상과 크고 작은 노력들이 조금씩이라도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연수야, 잘 나아라.

주말동안 눈 속에서 많이 놀고 돌아와 고단해했던 연수는 오늘에는 거의 다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든 감기 잘 견뎌내고, 엄마 고향에도 함께 잘 다녀와준 연수. 고맙다. 까불고 밥 안먹는다고 화내서 미안..ㅠㅠ 









서울로 떠나기 전, 잠시 경포바다에 들렀다.

연호는 파도가 가까이 올까봐 무서워 자꾸 돌아보느라 사진기를 쳐다보질 못했다.


언젠가 남편이 어떤 블로그에서 읽었다며 해준 이야기를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한달에 한번, 주말 이틀 부모님 집에 내려간다고 해도 24일, 명절에 며칠 더해도 30일이 안된다는 얘기.

그러니까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님과 일년에 한달, 365일중에 30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렇듯이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있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엄마가 언제 오시나'하고 시장간 엄마를, 들일하는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고

주말에 잠시 예쁘게 차려입고 명승지나 유원지에 가서 엄마 옆에 형제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앞뒤로 올망졸망 올라 타고 즐겁게 시골길을 달렸고

엄마의 포근한 품에 안기는 것이, 아빠의 든든한 손을 잡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기쁘고 좋았었다.


그런 시절을 거쳐, 

그 시절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자랐다.

숱한 위험과 어려움이 따르는 거친 세상에서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준 그 분들이 있어서 우리는 유년기를 마치고 어른이 되었다.


한 때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보금자리이자 은신처이자 넘고 싶은 벽이기도 했던 

그 모든 것이었던 부모님의 품을 

가끔, 아니 자주 보고싶다.

이제는 날로 약해져가시는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든든하고 포근한 그 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고,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이제는 내가 낳은 아기들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토요일 아침, '엄마아빠가 그리 보고싶나?' 하면서 처가로 달려가준 남편, 고마워..^^









눈 덮힌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집 마당에 서서 오래오래 손흔들어주시던 엄마 아빠 할머니 모습을 마음에 담고.



눈이 소리없이 잘 녹기를 빈다. 

눈 속에 일어났던 많은 아픈 일들의 상처는 봄이 온다고 쉽게 아물지 않겠지만..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과 젊은이들

사랑으로 사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봄햇살이 고루 찾아와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