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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16 초가을 외갓집 풍경 8
umma! 자란다2010. 9. 16. 15:44









9월초에 일주일동안 연수와 외갓집에 다녀왔다.
지난 4월 논문쓴다고 꽤 오래 머물고 온뒤 4개월여 만이다.
여름나며 부쩍 큰 연수는 지난 봄의 애기티를 많이 벗고 이제는 제법 어린이같은 모습으로 외갓집 마당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초가을 하늘은 푸르게 높아만 가고 엄마아빠는 가을겆이에 손길이 바쁘셨다. 











바쁜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느라 어린 연수도 바빴다.
할머니가 고추를 말리러가면 그 뒤를 따라가고, 할머니가 무밭에 가시면 또 그 뒤로 졸졸졸..
지난 봄과는 달리 연수는 엄마를 거의 찾지 않고 문만 들썩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 뒤를 따라 마당으로 뛰어나가기 바빴다.
할아버지와 둘이 차를 타고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오기도 하고, 바다에 놀러갔다 오기도 했다.
친할아버지할머니는 더 자주 뵈도 머무는 시간이 짧으니 아직 서먹한데 외가는 가끔 와도 오래 머무르니 연수에게는 더 친근하고 익숙한 모양이다.
친가 어른들 곁에도 좀 오래 머물러야할텐데.. 연수가 더 크면 그럴 수 있겠지. 나도 좀더 노력을 해야하리라.









일하랴, 연수 장난 말리랴... 엄마는 두 배로 바빠지셨다.
나는 한가하게 술렁술렁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두 사람 사진이나 찍고 하늘이나 올려다보고 했다.
여기는 지상에서 내가 가장 마음놓고 쉴 수 있는 곳, 나의 하나뿐인 친정이 아닌가... ^--------^










지은 지 20년도 더 된 이 양옥주택은 우리 식구의 첫 양옥집인 동시에 아마 마지막 양옥집이 될 것이다.
우리집 지을때 함께 지었던 인근의 양옥들은 모두 다 헐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시멘트집이 오래되면 외풍도 세지고 부엌이며 집안 구조들이 불편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엄마는 이 집이 불편하지도 않고, 아버지도 그런 힘든 일을 하실만한 체력이 없으실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동안 아빠는 여러차례 크고 작은 공사를 해서 집 안팍을 개조해오셨다. 엄마는 또 공사를 할 엄두가 안나실 터이다.

한옥집에서 태어나 양옥집에서 자랐던 우리 형제들은 이제는 모두 아파트 살이를 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방향에서 역순으로 다시 회귀하기를 꿈꾸는데... 오래 걸리더라도 그렇게 해야지..









삽의 적당한 사용처를 찾은 연수.
지난 봄에는 온통 동백꽃으로 어지럽던 모래언덕이 백일홍만 핀 여름에는 한결 조용했다.









뜨개질 솜씨좋은 엄마가 연수의 조끼를 한벌 떠놓고 계셨다.
엄마표 조끼를 입고있는 연수를 보니 어린 시절 우리 삼남매의 모습을 보는 것같다. 
우리는 엄마가 떠준 스웨터나 바지, 아니면 원피스를 자주 입곤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 뜨개질 옷들. 막내까지 입히고 작아지면 풀어서 다른 실과 합쳐 더 큰 옷으로 떠주시곤했던..
처녀시절 편물일을 하셨던 엄마가 아니면 이제 누가 그런 옷을 만들어줄까.
나도 연수에게 내가 만든 옷을 입혀보고 싶다.

  








청소기를 좋아하는 연수, 기어코 마당까지 가지고 나와 널어놓은 벼를 휘저어본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안있어 아빠는 올해의 추수를 하셨다.
추석전에 수확하는 이른벼를 심으셨던 아빠는 태풍이 오기전에 추수를 해야겠다고 서두르셨다. 
태풍 '콘파스'가 강릉을 지나가기 전날 아빠는 무사히 추수를 끝내셨다. 
다음날 벼를 다 벤 논에 나가보니 주변의 논들에는 벼가 좀 쓰러진 곳도 있었지만 그래도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서해안과 서울에 많은 비와 바람을 뿌린 태풍은 동해안에는 바람만을 좀 남기고 빠져나갔다했다.  










머리에 구르프(?)를 만 엄마가 연수의 고무신에 들어간 벼낟알을 털어주며 연신 뭐라고 얘기를 해주신다.
아마도 쌀 얘기겠지..
창고겸 차고인 여기서 연수와 나는 농기구를 넣어두는 나무통 밑으로 뛰어가는 작은 꼬약쥐(생쥐의 사투리)를 보기도 했다.
집없는 고양이도 자주 들락거리는 창고 한구석에 꼬약쥐들의 보금자리도 있나보다.









시골에서는 할 일이 없는 때가 별로 없다.
그 말은 연수 입장에서는 한시도 심심할 새가 없다는 말이다.
고추는 매일 조금씩 더 빠삭하게 말라가고, 할머니는 하루는 어린 무순을 솎아내 다듬고 하루는 할아버지가 논에서 주워오신 벼이삭을 터셨다.
그게 모두 연수가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참견하고, 제 맘껏 자투리들을 붙잡고 놀아도볼 일들이어서
서울같았으면 하루종일 놀아달라고 매달리는 연수와 책읽고,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나는 시골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 저렇게 마른 벼이삭을 맨발로 밟아보기도 하며, 할아버지 할머니와 웃어가며 자랐으면 좋겠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듯이..










추수가 끝나고 조금 한숨돌리게 된 아빠가 우리를 바닷가에 데려다주셨다. 
이 순간을 위해 서울에서 싸온 모래놀이 장난감들을 연수는 모래밭에 도착하자마자 풀어놓았다. 
연수야, 좀 더 바다 앞으로 가자... 모래밭은 아주 넓단다.

 

















여름이 끝날 무렵 바다는 한산했다.
그래도 낮에는 더워 바다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도 보였다.
연수는 잠시 바다물에 발을 담궈보더니 이내 다시 모래밭으로 올라왔다.

아빠는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고, 우리는 이렇게 바다앞에 와있다.
연수와 둘만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외롭긴 했지만 연수도 나도 아빠 없이 잘 놀았다.
둘이 있으니 괜찮아, 우리는 좋은 짝.












연수와 내가 모래와 바닷물을 옷에 묻혀가며 노는 동안
엄마아빠는 솔밭 안에 있는 벤취에 앉아 두 분이 커피도 사다 드시고, 연수줄 아이스크림도 사오시며 기다리셨다.
멀리서 보니 두 분이 무슨 얘기를 끝도 없이 나누고 가끔 크게 웃기도 하셨다.
저 두 분도 둘이 있으니 참 다행이다.
나도 나이가 들고 부모님도 나이가 들어가시니 두 분이 함께 계시다는 것 그래서 저렇게 웃으며 어디든 함께 다니신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고맙고, 마음이 놓였다.











내가 아주 어릴때도 우리집에 있었던 것 같은 국방색 갑빠(이건 일본말일 것 같은데... 우리말로는 천막일까?)위에
내 어린시절만큼이나 새까맣게 탄 연수가 앉아있다.
세살 가을, 엄마도 아마 이런 사진이 있을거란다.
외갓집의 풍경이 연수의 유년시절과 내면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