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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09 설 이야기 2



설을 잘 쇠고 왔다.


어른들과 떨어져 살고 자연의 흐름에도 많이 무딘 도시의 엄마다 보니 

명절이나 절기같은 우리네 세시풍속에 대해서도 많이 둔감해진다.

설은 차례지내고 세배하고 떡국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 날이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며 옷가방안에 고운 한복을 챙겨넣었다. 

하지만 그 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 큰 명절을 맞는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한 며칠 아이들 데리고 시댁에 가서 지내다오는 시간. 

제사음식 준비며 대식구가 한데 모여 여러날 먹고 지내는 일로 고달프기도 하겠지만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랫만에 한자리에 모이니 반갑고 좋은 연휴.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종종거리며 큰 가방 여럿에 짐을 싸고 세 아이 씻기고 옷입혀 차에 태우고 숨차게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명절이 시작되고보니 마음에 다가오는 일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참 많이 컸고, 고왔다.

오랫만에 만난 사촌들끼리 다정하게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시아버님어머님께는 다섯명의 손주가 있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결혼한 아가씨네 아이들 둘, 그리고 우리 아이들 셋. 

아직 결혼 전인 도련님이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더 많은 아이들이 명절에 할아버지할머니를 찾아올 것이다. ^^


시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신다.

남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어린 삼남매가 환하게,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이 많다.

행복하게 자랐구나.. 부모님이 참 예뻐하며 키우셨구나.. 싶었다.

살림은 어렵고 일은 고단하셨겠지만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시부모님이 삼남매를 바라보며 이렇게 환하게 많이 웃으셨구나.. 짐작하곤 했다.








결혼전에 돌잔치에 가서 처음 보았던 시댁의 큰조카가 어느새 아홉살이 되었다. 

귀엽고 잘생긴 큰조카는 여전히 개구쟁이지만 그래도 이젠 살짝 의젓한 느낌도 든다. 

내 큰아이 연수가 일곱살인 것도 신기하다.

내 삶에 흐르는 시간을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며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20평 남짓한 작은 주공아파트인 시댁에 부모님, 우리 가족, 아가씨네 가족, 도련님이 모두 모이면 12명.

큰 방, 작은 방, 거실과 주방마다 아이들과 어른들로 넘쳐난다. ^^

남편이 학생이던 무렵에 임대로 들어와 2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은 낡고 좁다.

하지만 어머님이 워낙 깔끔하게 닦고 정리하며 살아오셔서 따뜻하고 깨끗하다.


처음 결혼해서 시댁에 왔을 때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우선 집이 너무 작아서 놀랐고, 집안 곳곳에 버리지 못한 오래된 세간들이 층층이 쌓여있어서 놀랐고, 그럼에도 또 그 낡은 집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고 늘 정리해온 부지런한 손길이 느껴져서 놀랐다.

가장 놀라운 것은 분명히 좁고 답답해보이는 집인데 좀 앉아있다보니 의외로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시댁에 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시댁에서 자고 나면 왠지 '아.. 내가 지금 부모님 품에 와서 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천천히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사랑하셨다. 

하나하나 사랑하셨고, 다정하셨다. 

삼남매는 다정하게 자랐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하시는 오토바이 가게에 붙은 단칸방에서 서로 살을 부대끼고 뒹굴고 안고 아끼며 자랐다.

커서도 여전히 집은 작고 형편은 어려웠으므로 서로 많이 챙겨주고 배려하고 염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명절에 만나면 어머님은 늘 어린 아기들을 키우고있는 나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셔서 제사음식 장만부터 설겆이까지 거의 내게 안 맡기고 본인이 다 하려 하신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명절날 오후에 친정으로 오는 아가씨는 역시 새언니인 내가 힘들까봐 설겆이며 우리 큰아이들 밥먹이는 것까지 다 살펴준다. 

명절지나고 좀 한가한 다음날 오전, 어머니가 아까워서 못 버리고 쌓아둔 낡은 세간살이들을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명절 지내느라 어질러진 부엌도 정돈하고, 좁은 수납공간들을 두루두루 훑어 숨통을 좀 틔워놓는 것도 아가씨다. 

명절이면 우리는 모두 아가씨네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함께 놀 사촌형누나를 기다리고, 남편은 좋은 술친구인 매제를 기다리고, 나는 속깊고 고마운 시누를 기다린다.  

얼굴도, 마음도 곱고 예쁜 딸인 아가씨가 오면 낡은 집은 더 환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다. 

집은 더 복닥거리고, 잠자리도 다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함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명절마다 두 밤, 세 밤씩 한데 모여 자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물론이요, 고모네와 삼촌이 한해 한해 더 살갑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형제가 다정한 것이 참 큰 복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시댁 형편이 넉넉치 않고,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늘 힘들게 몸써서 일하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걱정되지만 

가족들이 서로에게 다정하고 화목하게 지내왔다는 것은 정말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 참 큰 내 복임을 명절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모의 둘째인 예쁜 현서는 새해 다섯살, 우리 연호는 네살이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째들이 요리 조리 몰려다니며 깔깔거리고 장난치고 뒹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명절이면 아침 일찍 찾아가 함께 차례를 지내고 오는 큰댁에는 새해 세 살이 된 아기가 한 명있다. 

촌수로는 우리에게 조카뻘이지만 나이는 우리와 동갑인 큰댁 조카부부는 우리보다 두어해 일찍 결혼했지만 오래도록 아이가 없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명절마다 우리집에는 손주들이 하나둘 늘어 네 명이 되도록 큰댁에는 아이가 없는 것이 마음이 쓰이곤 했는데 

참 기쁘게도 연제 태어나기 얼마 전에 큰댁에도 첫 손주가 태어났다. 

돌지난지 석달쯤 된 그 아기가 올 설에는 한복을 곱게 입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세배 흉내도 내서 두 집 가족이 모두 크게 웃으며 세배돈을 고사리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

어른은 아이를 보살피고, 아이들은 제 힘껏 뛰놀고 웃으며 자라고, 어른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게 되는 것.

그게 참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가족이 모두 모인 명절에는 새삼 깊이 느끼게 된다. 

 

아이 키우고 돈 벌며 사는 일이 힘들고 정신없어 부모들은 별다른 새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새해의 감흥을 따로 찾을 여유도 없지만 

문득 이렇게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의 훌쩍 자란 모습을 볼 때

'아 나의 지난 시간이 저 속에 녹아있구나.' 생각하게 되고 

'올해도 저 아이들을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키워야지..' 언뜻 다짐하는 것으로 새해의 각오도 세워보게 된다. 









순둥이 막내와 할아버지. ^^

낯가림이 별로 없는 연제는 이번 명절에 할아버지와 짝꿍이 되어 잘 놀았다. 


말수가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한 경상도 분인 아버님은 조금 큰 아이들은 잘 데리고 놀지 못하신다. 

마음은 참 다정하신데 표현을 잘 못하시니 아이들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하시는 것이다. 

시댁 식구들이 모일 때면 아버님은 한번씩 큰 손주들 네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다녀오시며 슈퍼에서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과자를 사주시곤 했다. 

아이들도 그걸 알아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으레 장난감을 한번은 사주시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조르고 한다.  

그것이 거의 유일한 아버님의 애정표현이고, 큰손주들과 어울리시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돌도 안된 연제같은 아기 손주에게는 아버님도 그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실 수가 있다.

안아주고, 얼러주고, 좋아하시는 유행가 노래에 맞춰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흔들며 어깨춤도 추시고, 입에 맛난 것을 넣어주시면서 행복해하시고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참 좋았다.

연수는 어려서도 낯가림이 심해 할아버지께 거의 가지 않았다. 

연호는 지금의 연제처럼 아기시절에는 할아버지께 잘 갔지만 네살이 된 올해는 할아버지가 안아보려고 해도 몸을 빼고 도망을 다녔다. 어느새 많이 자라서 고집도 궁리도 커진 연호인지라 오랫만에 뵌 조금 엄한 인상의 할아버지께 금방 살갑게 대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자주 뵙고, 많이 같이 놀고 하며 다정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아이들이 할머니할아버지를 푸근하게 가깝게 느낄텐데.. 

내가 그걸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죄송했다. 이제 연제도 좀 컸으니 좀더 자주 시댁에 내려오고 해야지..   

연제가 자라서도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 할아버지 품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연수랑 연호도 할아버지와 차츰 더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면서 할아버지를 다정하게 대했으면 좋겠고.












아버님은 속정이 깊으시다.
내게도 그러시고, 아들들과 딸, 손주들을 대하시는 것을 보면 그 다정함을 알겠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께 속상해하실 때가 많다. 
명절이, 삶이, 아버님이.. 어머님을 고달프고 힘들고 속상하게 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어머님이 화를 내실 때 아버님은 별 대꾸는 않으시지만 좀 슬퍼보인다.
그 풍경이 결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님을 뵐 때 내가 가장 당황스럽고 마음 아픈 풍경이었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으니 젊으셨을 때는 아버님이 참 화를 많이 내셨었단다.
그러더니 몇해전부터는 화를 더이상 안 낸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화를 잘 내시던 시절을 마음 졸이며 견뎌내셨던 어머님은 
이제는 그 화를 아버님께 돌려주시려는 것처럼 한두마디 말끝에도 아버님께 울컥 화를 내시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익숙치 않아서 긴장하는 것일뿐
어머님아버님 사이에는 크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저 일상적인 대화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자주 조마조마했다.

자식들은 모두 아버님을 좋아한다. 
야무진 딸인 아가씨가 아버님께 술 좀 적게 드시라, 엄마 말 좀 들으라며 아버지께 이런저런 얘기를 시원하게 잘 하지만 
큰아들인 남편은 그런 말을 않는다.
대신 아버지와 함께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형편에서, 어딘가 비빌 언덕도, 특별한 기회도 없었던 
오토바이와 집짓는 기술 밖에 없었던 한 남자가 
어여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세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때로 큰 실수와 실패도 겪었고,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들을 참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자란 자식들은 
지금도 그들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나이든 아버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어머님은 아마도 아버님과 함께 살아온 긴 세월동안 우리가 미처 짐작하기도 어려운 많은 일들을 겪으시면서 애정 그 이상의 수많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니
지금 이렇게 아버님을 대하고 계실 것이다.
시간은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고, 삶은 계속 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께 힘이 좀 되어드리고, 그래서 부모님이 몸도 마음도 조금더 편안하고 푸근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보살펴드려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더 그렇게 할 것이다. 
손주들이 할아버지할머니께 드리는 행복만큼이나 다 큰 자식들도 부모님께 행복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작년에 고모네가 시댁의 TV를 3D 입체영상도 볼 수 있는 큰 것으로 바꿔드렸다. ^^

손주들에게 3D 안경을 씌어주시는 아버님의 즐거움이 내게도 전해졌다. 

이런 풍경이 있어서 명절이 좋다.








설날 큰댁 차례, 우리집 차례가 끝나고 나면 오후 느지막히는 어머니의 친정인 청상에 간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엄마인 청상 증조할머니께 세배를 했다.

우리도 외할머니께 세배를 하고 아이들과 똑같이 빳빳한 천원 새 지폐 한장씩 세배돈을 받았다.

청상할머니께 받는 천원은 늘 내게 복돈으로 여겨져서 나는 그 돈은 쓰지 않고 내 책상서랍속 지갑에 간직해왔다.

올해도 복돈을 받았다. 기뻤다. ^^ 아이처럼, 할머니께 받는 세배돈이 좋다. 










청상 진외가에 가면 아이들은 신이 난다. 
장작이 산더미같이 쌓인 어두운 광에 앉아 증조할머니와 같이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불을 떼보기도 하고..








고모부와 사촌, 육촌들과 어울려 시골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한다. 









다리 위에서 냇물에 물고기가 있나.. 살펴보는 중이다.


길에서 올려다보이는 앞산 산등성이에는 외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거기서 '조기 내 증손주 녀석들이 뛰어가는구나' 하시며 굽어보실 것 같다.

논밭과 내를 건너 바라보이는 앞산에 봉긋하게 솟은 외할아버님의 무덤은 청상 외가집 마당에서도 잘 보인다.

예전에는 누구나 시외할아버님처럼 

자기가 태어나 태를 묻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살던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자리를 마련하고 누워 잠들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여러번 집을 옮기며 자라고, 고향이라 부를만한 동네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또 어느 낯선 자리에 누워 잠드는 대다수 요즘 사람들의 삶이

문득 참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공간의 안정감. 

어린 시절을 한 동네에서 오롯하게 보낸 나에게는 이것이 참 크게 다가온다.

지금도 강릉 고향집에 가면 내가 태어난 집 자리가 지금 집과 밭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고 

옛집의 눈에 익은 뒷산의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수런수런 반갑게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마음 깊이 찡한 감동과 평화를 느끼곤 한다. 

청상은 비록 시댁이지만 내게는 그런 친정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곳이다.

명절마다 찾아와 외할머니를 뵙고 시골집의 돌답과 감나무와 대나무숲과 앞산을 바라보면 왠지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워지곤 한다.


외할아버님은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만난지 얼마 되지않아 그저 호감만 조금 가지고 있을 때 전화통화를 하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며칠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어른들을 좋아하는 나는 잘 모르는 어르신이지만 그 날 일기장에 짧게 명복을 빌어드렸었다.

그 후 남편과 결혼을 하고

외가에 와서 할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새롭다.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알던 어르신처럼 '안녕하세요, 할아버지'하고 인사드리게 된다.









아이들은 굽이굽이 시골 마을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어릴때 시골에서 자란 우리 고모부가 

솜씨좋게 물고기를 여러 마리 잡아오셨다.

따라갔던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른다.

패트병 입구를 잘라 거꾸로 끼우고 그 안에 된장 한숟갈을 넣은 어항(?)을 작은 냇물에 쳐두었더니 

아이들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아홉마리나 잡힌 것이다. ^^


손을 넣어 만져보고, 세숫대야를 흔들어 공기를 섞어주던 연수와 연호는 

'엄마, 물고기 우리집에 데려가서 키우면 안 돼?' 했지만

물 좋고 공기 좋은 청상을 떠나는 것은 이 물고기들에게 못할 일.

국 끓여먹을 것도 아니어서 

한참 외갓집 마당의 세숫대야 안을 헤엄치던 물고기들은

고모부와 일군의 조무라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저희 살던 냇물로 돌아갔다. 










시골집에 오면 나만큼 신나는,

나보다 할 줄 아는 것은 훨씬 많으신 

시골출신 잘생긴 우리 고모부. ^^

아궁이에 군밤도 구워주고, 고구마도 척척 굽는다.

남쪽 섬 출신인 사촌고모부는 아이들 데리고 강아지풀 꽃다발 만들어가며 동네 한바퀴 산책도 다녀오시고..

시골집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다. 

TV만화 틀어주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 지켜보는 것말고 

추억과 이야기거리가 될만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바쁘시다.

가마솥에서는 대식구가 먹을 육계장이 끓고..








서울이모님은 명절 지내며 어수선해진 외가의 부엌과 마당을 통털어 살림살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신다.

외할머니께는 따님이 세 분 있는데, 이 분들이 모이면 정말 대단하시다.

어마어마한 청소와 정리를 척척 해내고, 어머어마한 양의 먹거리들을 끝도 없이 내놓고, 그리고 또 어마어마한 양의 짐보따리를 꾸려놓으신다.

도시의 자식들 가져가라고 외할머니가 마련해놓으신 먹거리들을 필요한 집집으로 분배해서 싸고 

혼자 지내시는 외할머니가 찾기 편하게, 드시기 편하게 부엌을 정리하고 음식을 마련해놓는 손길이 다라라락 움직인다.  

두 분의 며느님도 명절을 치르며 참 많은 일들을 하시지만

모두 모여 있을 때보면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도 명절이면 모두 엄마 곁에 모이는 

이 댁의 세 분 따님들이 척척 가장 익숙한 손놀림으로 집 안팍을 돌보는 것이 느껴진다. 









외할머니는 어마무시하게 많은 자손들을 위해

이 집에서 가마솥으로 도토리묵을 한 다라, 두부를 한 다라 손수 만들어두셨고

떡국떡을 또 엄청 많이, 배추와 무를 또 이만큼 땅속에 묻어두고(이건 가을에), 고구마에 밤에, 간장 된장 고추장에,

엿과 땅콩을 넣어 강정을 또 이따만큼 손수 만들어놓으셨다. 

그리고 따로 튀밥은 어린 연제 먹으라고 우리집으로 또 한봉지 싸놓으셨다.    

두부만들며 나온 비지도 또 봉지봉지...


아이들 옷 챙기고, 어른들드릴 선물 조금, 용돈 조금 챙겨 내려오는 것이 명절 준비의 전부인 내가 

외할머니가 이 시간을 위해 들이시는 공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자손들의 새해를 열어주기 위해 몇날 밤, 몇날 날을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얼마나 애를 쓰며 보내셨을까.


 








설 연휴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청상 외가에 갔다. 

상주시내에 있는 시댁에서 청상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가니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매일 새로운 친지들이 오고가며 함께 뭐 맛난 것을 먹자 부르고, 외할머니께 무엇을 받아오고, 가져다드리고, 또 아이들이 놀러를 가고 하느라 빠질 날이 없었다.  

마침 날도 따뜻해 마당에서 놀고 먹고 치우기에 참 좋았다.


그런데 작은 집과 마당 가득히 북적하던 자손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다시 할머니 혼자 남으시면 갑자기 너무 고요해진 집에서 쓸쓸하시겠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돌아오며 얘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할머니께 전화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돌아온지 일주일이 되도록 못 드렸다.ㅠㅠ









오랫동안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썼던 2014년의 설 이야기를 이제 끝내야겠다.

처음 컴퓨터의 사진 폴더에서 이 사진을 작게 봤을 때 나는 어머니와 큰댁 아주머니가 우리집에서 제사 지낸 뒤에 함께 설겆이하시는 사진인줄 알았다. 

그리고는 이걸 내가 찍은줄 알고 '에구.. 정말 일도 참 안 하더니만 어른들 일하는 사진찍을 여유까지 있었구나, 욱' 하고 살짝 민망해했다.

그런데 클릭해서 크게 보니

이게 왠 걸... 어머님 옆에 있는 사람이 나였다. 

나는 내가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인줄 몰랐던 것이다. ㅠㅠㅠㅠ

게다가 저 파마머리 하며.....

나는 정말로 과수원농사와 젖소 농장까지 크게 하시는, 우리 어머니보다 나이도 많으신 양촌 아주머니인줄만 알았다. 엉엉.


연제 키우며 젖을 많이 먹여서인가, 보는 사람마다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해서 나는 내가 정말로 살이 많이 빠진줄 알았는데 

역시 얼굴살만 빠진 것이지 몸의 골격은 삼형제 안고 업고 하며 키우는 엄마 아니랄까봐 어깨며 허리며 무슨 역도선수만큼 우람하네....

한참을 충격먹고, 착각한게 웃겨서 혼자 웃고 하다가

우리 어머님이 워낙 갸냘프셔서 내가 더 우람해보이는 것이란 생각도 해보았다.

그도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내가 뚱뚱하긴 뚱뚱한 것이다.

새해를 열며 스스로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서른일곱의 나는 이렇게 생겼구나.

 

어머님은 올해 설을 지내며 안방의 큰 침대를 버리셨다.

결혼하고부터 시댁에 내려갈 때면 어머님은 늘 시댁에서 제일 아늑한 공간인 안방을 우리에게 내주셨다. 

아버님은 평소에도 거실의 매트에서 주무시고, 어머님만 안방에서 주무시는데 

우리가 가면 어머님은 안방을 우리에게 주시고 어머님은 작은 방이나 거실에서 주무시곤 하셨다.

안방 침대는 낡았지만 튼튼했고 포근해서 식구들 모두 다 거기서 잠자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방방 뛰며 놀았고, 남자 어른들이 한가한 시간에 살짝 낮잠자는 곳도 그 침대였다. 

하지만 나는 연수가 아주 어렸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침대 밑에서 잤다.

침대와 장롱 사이에 어른 한사람 누울 만한 공간에서 어린 연호 젖을 먹이며 함께 잤고, 

연제가 태어난 후에는 연제 젖 먹여 재우고, 엄마 찾아 침대 밑으로 내려온 연호까지 어찌어찌 겨우 끌어안고 재우느라 좁은 공간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다.

거실에서 자면 조금더 넓긴 하겠지만 아기가 어려 밤에 자주 깨니 다른 식구들 자는데 방해도 되겠고, 좀 춥기도 해서 

거실은 늘 아가씨 가족과 부모님이 주무시고 우리는 안방, 도련님은 작은방을 썼다.

명절에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어머님은 집이 좁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이런저런 의논을 구하셨다.

좀더 외곽의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터에 새로 집을 짓자, 아니다, 이 집을 리모델링 수준으로 깔끔하게 고치면 공간이 좀더 넓어질거다...

주로 이 세가지 안이 내가 결혼하고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명절마다 도마에 올라서 설왕설래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실행은 잘 되지 않았다.

선뜻 움직이기 힘든 형편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명절 때가 아니면 부모님 두 분이 지내시기에는 전혀 좁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익숙하고 좋은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어떻게 이 논의의 결론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님은 우선 더는 안되겠다 하시며 내가 아이들과 청상 외가에 가있던 시간에 안방의 침대를 내다 버리셨다.

작은 방의 잘 쓰지않는 작은 책상과 역시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정수기도 이번에 같이 정리하셨다.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이 삶의 절대적인 자세가 되어있는 어머니께서 멀쩡한 물건들을, 게다가 어머니께는 요긴하고 좋은 물건을 버리시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많은 며느리가 불과 몇 밤이지만 불편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좀 편하게 자게 해주시려는 어머님 마음이 정말 감사했다.



가족이 특별한 것은 삶을 함께 살기 때문인 것 같다.

때로는 밉고 서운하고 싫은 순간도 있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있다.

슬픈 일도 함께 견디고, 기쁜 순간도 같이 맞으면서 점점 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많이 느낀다. 

형제가 있어서 처음부터 좋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싫고 밉고 싸우다가도 또 같이 웃고 뒹굴고 놀면서 점점 닮아가고 진하게 정이 드는 것. 

그게 형제이고, 가족인게 아닐까.  

결혼과 함께 새롭게 생긴 가족들인 시댁 식구들은 이름은 '가족'이지만 실제 함께 지낸 세월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느끼기가 힘들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은 쌓인다. 새롭게 사귄 친구와도 7년이면 긴 시간이고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될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어머님아버님은 정말 많이 노력해주셨다. 나를 좋아해주셨고, 아이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로 사랑하고 계시다.

이제는 나도 많이 다가가야할 때인 것 같다.

내 블로그를 보시는 어머님이 이 글을 보시면 '뭐 그리 부끄런 일까지 다 적었냐' 하실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 것이 내가 시댁 식구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오래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 관심가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게 된다.

솔직하게 쓰려고 노럭한다.  

내가 쓴 것을 나는 또 마음에 담는다. 

그래서 쓰는 것이 내게는 노력하는 것이 된다.



설이 잘 지나갔다.

부모님, 가족, 고향, 형제들, 아이들, 자연, 삶... 많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좋은 한 해를 살아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