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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2 추석, 당신 곁에서 12
여행하는 나무들2009. 10. 12. 22:01



긴 추석 여행이었습니다.
열흘간의 지방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똑순이는 오래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엄마와 단 둘이 있는 고요한 한낮은 정말 오랫만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댁에서 일주일정도 지내며 추석 명절을 쇠는 동안
똑순이는 두살터울의 사촌형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지냈습니다.
신랑은 회사일이 바빠 우리를 데려다놓은후 추석도 못쇠고 서울로 돌아갔고, 
일주일후에 다시 우리를 데리러와서 친정길에 동행했습니다.
아빠의 부재는 쓸쓸한 것이었지만 다정한 친지들과 신기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 하루하루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똑순이는 젖소를 키우는 큰댁에 가서 생전 처음 젖소들도 보고,
청리 진외가(아빠의 외가)에 가서는 형과 함께 돌멩이를 주워 냇물에 던지고 길가의 꽃을 따고..
강아지들을 따라 시골길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습니다.
토란잎에 앉은 청개구리에게 '안녕!'하고 손을 흔들어주고, 이웃 아저씨의 경운기를 얻어타보기도 하며
새댁도 두 아이들과 함께 모처럼 시골의 푸근하고 너른 품에 안겨보았습니다.









밤늦게 식당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무척 고단하실텐데도
오랫만에 만난 손자를 한번이라도 더 안아보고, 같이 놀아주려고 애쓰시던 어머님.
시댁에 있는 일주일동안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맛있는 국과 반찬을 받아 먹기만한 철없는 며느리에게
어린 아기 키우는게 제일 힘든 일이라며 어떻게든 많이 먹이고,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주려고 늘 마음쓰시던 당신.

어머님은 추석 지나고 조용한 어느날, 시내에 나가 똑순이에게 새 운동화를 사주셨습니다.
비싼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새신을 골라주시며
'전에 애들 키울때는 이런 메이커 신발을 한번도 못 사줬는데.. 손주한테라도 신겨줄 수 있어 참 좋다'며 환히 웃으셨어요. 
어머님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시는지 알고있는 저는 맘이 먹먹한데, 똑순이는 새신이 마냥 좋은지
팔짝팔짝 뛰며 어머님과 저를 지나 저만치 앞장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시댁 대문앞에 놓고 키우시는 어머님의 꽃화분.
가만히 보고있으면 어머님같은, 어머님 닮은 꽃.

이번에 8일 정도 있었던 것이 결혼후 시댁에 제일 오래 있어본 것입니다. 
다음에 저 복도를 지나 시댁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때는 조금더 편안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 것같습니다.    

참, 이번에는 모처럼 상주에 오래 있는 김에 결혼해서 상주에서 살고있는 대학선배 언니에게도 놀러갔다 왔습니다.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언니가 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둘째 아이를 카시트에 앉힌채로
시댁앞으로 와서 우리를 태우고 자기 집까지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다 주었습니다.

대학시절 우리의 마지막 농활지였던 상주에서
농민운동에 뜻을 갖고있던 언니는 농민회 간사로 일하다 이 곳에서 농사짓는 형님과 결혼했고,
저는 우연히 상주가 고향인 신랑을 만나 결혼해서
이렇게 명절마다 얼굴을 볼수 있는 한명뿐인 대학선후배가 되었습니다. 

여성농민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언니는 여전히 씩씩했고, 전보다 더 차분하고 여유로와 보였습니다.
밥먹고 차마시며 마음편히 한나절을 놀고 돌아오며 '시댁 동네에 언니가 있으니 꼭 친정온듯 좋다' 얘기했지요.
정말 친정다녀가는 동생처럼 언니는 밭에서 무와 가지들을 한봉지 가득 뽑아와 시댁으로 들고 가게 했습니다. 
언니를 꼭 닮은 두 딸과 똑순이가 함께 재미나게 놀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오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음 명절을 기약해야겠어요.  
 








시댁을 떠나 친정으로 가는 길,
시댁 동네에서 가까운 문경에 계신 '맑은물한동이님'을 찾아갔습니다.
전에 뵜을때 시댁이 상주라는 얘길 했더니 '명절에 시댁오면 꼭 들리라'고 당부하셨던게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고구마를 캐신다 하길래 '바쁘신데 괜히 가서 폐끼치는게 아닐까요' 했더니 '그리 말하면 섭섭하다'며 얼른 오라 하셨습니다.









방금 밭에서 캐낸 오렌지 고구마 입니다.
슥슥 깍고 툭 잘라 내미시는 손길이 얼마나 시원하던지요. 
얼른 받아 먹어보니 아삭아삭하고 달착지근합니다. 당근에 많은 카로틴이 풍부하다는데, 맛도 딱 달달한 당근입니다.
아이들 이유식 먹이면 좋을거라 하시며 귀하다는 오렌지 고구마를 똑순이 먹이라며 싸주셨습니다.
 








물한동이님네 고구마밭에서 보이는 문경 풍광입니다.
산이 바로 지척이라 산새소리도 참 많이 들렸습니다.
이 풍경보고, 이 햇살받고, 이 바람맞고, 이 소리듣고 자란 고구마속에는 이 곳의 자연이 그대로 담길 것만 같습니다.
아마 이 밭에서 일하시는 분들 마음속에도 그대로 담겨있겠지요.








고구마나 야콘을 캐는 차입니다.
뒤에 달린 삽이 땅속 깊이 들어가서는 흙전체를 부드럽게 탈탈탈 털어놓기 때문에
차가 지나간 뒤로 말짱한 고구마들이 흙도 털어진채 줄기째 올라오더라구요. 무척 신기했습니다.
밭에 엎드려 일일이 손으로 캐는 수고를 크게 덜어주는 고마운 기계지만,
그 뒤를 따라가며 고구마를 정리하고 혹시 안캐진 고구마가 있는지 호미로 땅밑을 훑어보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그 일을 위해 저와 신랑 몫으로 특별히 장만하신 '새 호미' 두 개가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요 불성실한 일꾼들은 와서 새참만 축내고, 싸주신 고구마만 한박스 덜렁 챙겨들고 금세 떠나야 했습니다.
'호미가 나빠 일못한다 할까봐 새 호미까지 사뒀구만~'하며 웃으시는 형님언니께
'이름표를 붙여주세요, 다음에는 꼭 아침일찍 와서 일하고 갈께요!' 다짐하고 돌아섰습니다. ^^;









문경오는 길에 잠이 들어 밭 가에 세운 차안에서도 한참을 잤던 똑순이는
출발하려고 하자 부시시 눈을 떠서는 맑은물한동이님께 겨우 눈한번 맞추고
밭가에 핀 달맞이꽃을 하나 꺽어 손에 쥐고는 그 향기를 맡으며 다시 차에 탔습니다.

친정에 도착해 저 고구마를 보여드리니 엄마아빠 모두 '참 예쁘게 잘 키웠다'며 칭찬하셨습니다.
건강에 좋다는 자색고구마를 친정부모님께 나눠드릴 수 있어 물한동이님께 더 감사했습니다.
일손도 못거들고 고구마만 이리 많이 얻어 어떡하냐고 민망해하는 저희에게
'자주만 오라'시던 형님 말씀이 귓가에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텃밭에 나가 배추와 무를 뽑으셨습니다.
김장하기 전까지 먹을 김치가 마땅치 않을거라 짐작하시고는
아직도 김치담글줄 모르는 철부지 막내딸에게 싸줄 김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외할머니를 따라 밭에온 똑순이가 꺽어놓은 깻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화단에서는 한번도 본적없는 풀, 이 높고 울창한 풀더미가 신기할 것입니다.

대학시절, 오랫만에 고향집에 내려오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똑순이도 저 밭을 맨발로 밟고 다니며 그리웠던 풀냄새와 흙의 감촉을 느끼는 날이 올까요.








날이 많이 쌀쌀해졌는데도 아직 밭에는 모기가 있습니다.
볼따구니를 한방 물렸네요.. 
가을 모기라 힘이 없는지 부었던 자리가 좀 있다보니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이 날 똑순이는 배추벌레도 손으로 처음 만져봤습니다. 
똑순이 손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아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있는 파란 배추벌레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배추잎이 모여있는 곳에 툭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엄마가 사진만 찍고 놀고있으니 나라도 도와야지..' ^^;;
 








푸른 배추를 성큼성큼 다듬으시는 엄마.
멀리 사는 자식들에게 싸보낼 먹을거리들을 종류별로 챙겨 꽁꽁 싸매고 하얀 아이스박스에 착착 집어넣는
엄마의 빠르고 촘촘한 손놀림을 보고있으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전국의 모든 엄마들이 아마 그러시겠지만.. 그런 짐싸기 대회가 열린다면 엄마는 분명 상위권에 입상하실 거예요.

얼린 사골국물, 거기에 넣어먹을 얼린 무청, 얼린 떡, 고추가루, 갓 담근 김치, 명절에 만들어서 얼려둔 산적, 각종 밑반찬...
서울에 돌아와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고 하나씩 정리해 넣다보면
언제 이 많은걸 다 챙겨 넣으셨나.. 
엄마의 정성과 수고와 걱정과 사랑을 말없이 말해주는 그 봉지들앞에서 꼭 다시 눈물을 쏟게 하고야마는 당신의 손길.





이번 명절도 여러 '당신'들 덕분에 참 따뜻하고 행복했습니다.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반갑고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다시 조용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께 받아온 사랑과 추억으로 우리는 더 깊어졌고, 매일의 일상을 더 열심히 살아내게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