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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3 스무살, 가을, 진주난봉가, 청경관 8
umma! 자란다2008. 9. 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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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똑순이가 태어난지 세 달이 되었습니다.
어리기만한 똑순이지만 이 아이의 인생에 쌓여진 시간의 무게가 어느새 묵직합니다.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시간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순간도
때가 되면 다 지나가고 끝나있다는 사실을
아이를 키우며 절감하게 됩니다.

오늘은 문득 엄마의 스무살 가을이 생각났습니다.
라디오 국악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온 '진주난봉가' 때문입니다.
풍물패는 아니었지만 풍물패 사람들과 친하기도 했고,
낡은 가건물 1층에 자리잡은 허름한 풍물패방을 곧잘 드나들었던 새댁은
그 방 벽, 포스터 뒷장에 검은색 매직으로 빽빽이 써붙여놓았던 민요들을
재미나게 배우곤 했습니다.
너영나영, 사랑가, 진주난봉가.. 그리고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이런저런 민요들.
그중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는 어느 며느리의 사연을 담은 진주난봉가는
가사가 재미있으면서도 참으로 슬픈 것이었는데
오늘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자 새댁, 어슴프레한 기억을 더듬으며 따라불러 보았답니다.
똑순이는 그런 엄마를 신기하게 바라보았구요.

스무살 가을, 중간고사 시험기간-
풍물패 선배와 동기 하나랑 셋이 밤샘공부를 하기로 작심한 날이 있었습니다.
아마 초특급벼락치기가 필요했던 모양이지요, 셋 다 참 강의실에서 찾기 어려운 학생들이었는데
밤샘을 하겠다고 나섰던 걸 보면..
그런데 왜 그 공부를 풍물패방에서 하게 됐을까요?
그 날은 문과대도서관에 자리가 없었던 걸까요?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셋이 한울방(풍물패 이름이 '한울'이거든요)에 모여앉아 북을 책상삼아 노트를 펴들고 읽는데
차례로 쓰러지고 깨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잠깰 요량으로 야참을 사다먹었던 것 같습니다.
컵라면을 먹다 보니 한울방 구석에 있는 소주박스가 눈에 띄고
아무튼 여차저차 병을 비우고... 새벽은 밝아오고... 북위에 노트위에 코박고 자다 깨서
허겁지겁 시험강의실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문과대앞에는 청경관이라는 작은 매점겸 식당이 있었는데
답안지에 이름쓰고 나서는 더 쓸 말이 없어 꾸벅꾸벅 졸다 나온 셋이
청경관 앞 나무탁자에 모여앉아 말없이 해장라면을 한그릇씩 사먹는 것으로
그 날의 밤샘공부는 끝이 났습니다.
그 때 올려다본 청경관앞 키 큰 나무들은 참으로 예뻤는데요,
가을이 깊어 단풍이 곱게 든 도토리나무였나, 잎이 큼직큼직한 나무가 참으로 멋졌습니다.  
 
이제 그 허름하고 다정하던 동아리방 가건물은 없어졌고,
낡은 청경관도 헐리고 새로 지은 큰 건물 지하에 이름만 같은 푸드&카페테리아가 생겼습니다.
천원 한장이면 살짝 덜익어 맛있는 라면이나 맛은 없어도 양은 푸짐하던 볶음밥을  
참으로 멋진 큰 나무들 아래 벤취에서 먹을 수 있던 그 청경관.
오늘 문득 그 청경관이 무척 그리웠습니다.
스무살 그 시절두요.

문득 그때 친구들에게 연락이 하고싶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스무살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라고.
지금은 모두들 회사일에 치이는 샐러리맨으로, 아이 엄마로, 현장운동가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삼십대의 바쁜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
하지만 이 기억들은 우리를 다시 아름답게 물든 청경관앞 키큰 나무들 아래로 데려갈 것입니다...

평소같았으면 생각난 김에 바로 '나야!'하며 전화를 걸었을텐데
오늘은 똑순이가 너무 많이 보채서 전화할 짬이 없었습니다. 휴....

오늘, 이렇게 작고 칭얼대던 똑순이도 스무살 멋진 청년으로 자랄 것입니다.
똑순이는 어떤 스무살을 맞게 될까요.
이 아이도 정말로 아름다운 스무살을 갖게 되길..
백일을 앞둔 똑순이를 안고 엄마, 마음으로 빌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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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