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맛집'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2.12.25 인생을 발견해가는 우리들의 식당 '칼질의 재발견' 6





한동안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 많은 것들이 만족스럽지 않고 후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변화시킬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냥 수렁에 빠진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고 가라앉고 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전날밤 예매해둔 영화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종로의 오래된 극장을 리모델링했다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향해 혼자 점퍼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걸어가는 길은 어색했다. 

지하철을 혼자 타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3년? 


한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가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지하철을 타고 흔들리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의 고단함이 짙게 느껴졌다. 

내게는 이토록 오랫만이고, 모처럼의 일탈이라면 일탈인 이 공간이 매일의 일상인 사람들에게는 또 얼마나 피곤하고 지루한 공간일까. 

문득 매일 꼬박 2시간을 좁고 답답한 땅속 열차안에서 보내고 있는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집밖에 있는 시간, 특히 출퇴근 시간은 그저 자유롭고 홀가분한 '나만의 시간'일거라고 생각하며 부러워도 하고, 24시간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내 생활의 고단함도 모르고 집에 와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려한다고 못마땅해했는데 

지하철을 타는 시간이 근무시간처럼 긴장되진 않더라도, 그다지 편안한 시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몸과 마음을 지하철 좌석 깊이 파묻고 조용히 달렸다.     


영화가 참 좋았다. 

주간지에 실린 영화평을 보고 '이 영화, 봐야겠다..' 싶었던 '원데이'라는 영화.

커피 한잔을 마시며 보는 중간중간 웃다가 울다가 했는데 영화가 다 끝나자 그만 눈물이 펑펑 쏟아져버렸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원래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앉아서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노래도 듣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우느라고 불켜질때까지 앉아있어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눈물닦던 손수건에 코를 풀고 잘 그쳐지지 않는 울음을 어렵게어렵게 수습하고 일어나보니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두 분과 표받던 여직원이 모두 기다리고 계셨다. 

부은 눈을 한 배부른 임산부는 천천히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는 극장안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와 문밖으로 나왔다.

 








겨울이라 그런가.. 휴일 한낮의 극장앞은 한산했다.

여기, 이천년대 초반이었나.. 바닥에 안성기, 박중훈, 전도연 같은 배우들의 손바닥이 찍힌 금동판이 깔려 있던 곳.

너무 많이 변해서 여기가 정말 거긴가.. 영화들에도 자주 나왔던, 누군가를 기다리고 만나고 2층 까페에 앉아 하염없이 내려다보기 좋았던 그 영화관 마당이 맞나... 싶었다.









표지판의 '종로'라는 이름이 익숙하고도 반가웠다. 

20대에는 이 거리를 숨차게 뛰어다니던 날들이 참 많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바쁘게 걸어간 적도 많았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영화를 보았고, 많이 앉아있었고, 많이 걸었다. 


문득 종로 이 거리로부터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떨어져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시대로부터, 미우나 고우나 내 삶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이 이루어져 나가고있는 이 사회의 아프고 번잡한 속살로부터 너무 오래 비켜서 있었던것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다.

공간에서 시작됐지만 실은 태도의 문제, 한발 물러나있고 싶어했던 내 자세에 대한 생각이었다.








영화 끝나는 시간에 맞춰 차를 타고 종로로 나온 아이들, 남편과 다시 만났다. 

단 몇 시간 떨어져있었던 것인데도 연호는 엄마를 많이 찾고 울었다하고, 남편은 두 아이 데리고 종종거리느라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영화도 영화지만 종로까지나 나와볼 생각을 하게된 건 이 집, '칼질의 재발견'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학시절 후배가 지난 가을에 새로 연 식당이다.







경복궁 옆 서촌의 작은 한옥집. 

마당 오른편에는 작은 화장실이 있고 그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있다. 

날이 따뜻하면 저 옥상에 놓인 탁자와 의자에 앉아 한옥집 기와지붕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년엔 내가 여기 오기 힘들 것이고, 식당이 번창해서 내후년쯤엔 나도 저 옥상에 올라가볼 수 있기를 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집처럼 소박하고 예뻤다. 

한낮에는 마당과 통창을 통해 주방 앞까지 햇볕이 참 잘 들었다. 

식당이 환하고 볕이 좋아서 그 볕을 바라볼 때는 매일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따순 밥을 차려주는 고단한 후배 맘이 때때로 밝고 편안해지기도 하겠구나.. 싶어 좋았다. 








'칼질의 재발견'은 후배가 요리사가 되고나서 처음으로 연 식당이다. 

칼질도 그렇겠지만.. 나는 그녀가 인생을 재발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무렵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모두 비슷하게 살았던 것 같다. 

책상앞에 잘 앉아있는 모범생들이었고, 펜을 잡는 일 외에는 손을 쓰는 일, 몸을 쓰는 일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서른을 조금 넘겼을 때 운명은 다양한 시련과 기회를 주었다. 

흔치는 않지만 또 우리 모두 언젠가 겪을 수 있는 큰 아픔을 겪고 후배는 잠시 떠났다. 

언론사라는 직장도, 한국이라는 나라도.

그리고 3년만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가 요리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뭉클했다. 

잘했네.. 참 잘했네.. 

그녀의 지난 3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돌아온 그녀가 따뜻한 밥을 짓는다는 사실이,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고마웠다.   









유럽, 미국, 다시 유럽을 오가며 요리학교를 다니고 우프 농장에서 유기농 채소키우는 일도 거들고, 여행을 하고 레스토랑에 취직해 일을 하기도했던 그녀가 지금 조용히 경복궁 서촌의 작은 한옥에서 만들고있는 음식은 빵, 스프, 스테이크 같은 양식요리들이다.

 







연수와 연호는 감자스프를 아주 잘 먹었다. 

빵도 참 맛있었다. 

후배는 대표세프를 맡고있고, 조리를 책임지는 요리사는 따로 계시다고 들었지만 여럿이 함께 손맞춰하는 일인만큼 '재발견' 식구들이 다함께 만들어 내놓으시는 맛들이 나는 아주 좋았다.


입맛이 예민한 남편은 스테이크 소스가 조금 느끼한 것 같다며 좀더 상큼한 맛이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러나 본인은 '양'에 대만족이라며 '고기가 이렇게 두툼하고 맛있으니 다 괜찮다'는 육식주의 특유의 요리관을 과시했다.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날이 있는가, 후배도 요리도 식당도.. 모두 말이다.

나는 그 미래가 더 기대되고 좋다.









아주 두툼한 호주산 소고기스테이크가 2만원이다. 

여느 화려한 레스토랑들의 스테이크에 비교해 손색없는 맛과 양인데 가격은 더 저렴하다.

후배는 '처음엔 너무 낮은 가격으로 시작해 아고 이렇게는 안되겠구나.. 싶어 올렸는데 이번에는 또 너무 올린 것 같다'며 곧 다시 조정해 가격을 더 낮출 생각이라고 했다. 

'칼질의 재발견' 홈페이지에 써놓은대로 지갑 얇은 학생도, 어깨 무거운 중년도 '오늘은 모처럼 칼질 한번 해볼까~!'하며 부담없이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양식당이 되고싶다는 바램이 이뤄지길 빈다.

 








나는 돼지고기를 먹어보았다. 토마토소스가 상큼했고, 저 시금치는 너무 맛있어서 집에 와서도 자꾸 다시 생각났다.

(고기가 아니라 시금치가 생각나는 나도 참... 그래도 난 풀이 좋은걸..^^;)  

두번째 갔을 때는 닭고기(11000원)를 먹어보았는데 내 입맛에는 담백한 닭고기가 더 좋았다. 

돼지고기도 정말 맛있었는데 기름기가 좀 많기 때문에 그 맛을 즐기는 분들께 권하고 싶다.









'칼질의 재발견'(http://www.restaurant-kaljil.com/)은 아주 작은 골목 안에 위치해있고 주차장이 따로 없다. 

가까운 곳에 '시립어린이도서관'과 '종로도서관'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를 해놓고 식당까지는 살살 걸어가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나들이라면 식사 후에 어린이도서관에 들러 책도 보고, 사직공원을 산책하거나 놀이터에서 놀 수도 있어 참 좋다.

경복궁에도 가보고, 그냥 한옥이 많은 사직동 필운동 골목들을 슬슬 걸어다니면서 작고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거나, 군것질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세 아들을 데리고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아줌마 욱의 모습을 그려보니 좋았다. 

걷다가 다리 아프면 다시 칼질에 와서 물 한잔 얻어마시고, 수다떨고 다시 나서고...  

그때까지 오래오래 번창하시길, 칼질..^^









전에 광호수지의 제주 게스트하우스에 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어찌 이 사람들은 이렇게 공간을 딱 자기느낌으로 잘 만들어낼까.. 신기하다. (달물은 딱 수지 느낌! ^^ 광호느낌이 안 나는건 다행이지싶다..ㅎ)

이제는 조 셒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은 이 후배의 느낌은 통통 튀고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속깊고 단단한 그런 느낌인데 

집도 참 그런 느낌이다. 

누군가는 울트라슈퍼땅콩이라 부르는 후배가 3년간의 외국생활과 요리 수련을 통해 얼마나 더 깊고 단단해졌을지.. 나는 요즘 후배가 그 기간에 썼던 블로그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다. (먹고 살기에 관하여 http://blog.daum.net/chajin_my_hand)


오랫만에 잡아본 후배의 손은 거칠고 두툼했다.

대학시절에 우리가 팔짱끼고 백양로를 함께 총총총 걸어내려갈 때 그 때의 후배 손은 곱고 부드러운 여대생의 손이었던 것 같은데.. 

거칠고 찬 손이 잠깐 안쓰러웠지만 세월이 묻어있는, 하나의 식당을 거뜬히 꾸려가고있는 작지만 큰 그 손이 참 좋았다. 









소외와 후회 없는 양식의 경험.

위축되지도 말고, 겉돌지도 말고.. 그저 따뜻하게 밥한끼 잘 먹은 푸근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수저를 놓고 다시 추운 세상으로 나설 수 있는 식당. 그런 양식당을 만들고 싶은가보다. 










눈부은 브이쟁이. 다음에 또 오자구.

이담에 크면 이모네 식당에서 알바도 좀 하시고. ^^



서른도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는 이제사 비로소 인생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는 기분이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나도, 후배도, 그리고 자기 몫의 인생을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들에게 위로와 따뜻한 포옹을 보내고싶은 밤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