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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09 오늘도 걷는다 15
umma! 자란다2011. 6. 9. 00:03



'오늘도 걷는다-마아-는 정처어-없는 이 바-아알--길...'

요며칠 내가 해온 가장 중요한 일과는 걷는 것이다.
아침먹고 집을 좀 치우고나면 모자와 가방을 준비해서 연수와 길을 나선다.

"엄마 오늘은 우리 어디가?"
"글쎄... 한살림 가게에 갈까? 아님 성당 뒷산에 갈까?"

성당 뒷산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연수는 뱀딸기를 따는 일에 열중했다.
빨갛게 잘 익은 뱀딸기를 먹어보기도 하고, 왜 뱀딸기인지 궁금해하기도 하다가
벌레들 먹으라고 뱀딸기를 따서 여기저기 숲길에 던져주는 놀이를 내내 즐거워했다.
그러다 처음 가보는 길로 내려서니 오래된 배드민턴장이 나와서 거기서 누가 버리고간 깃털빠진 배드민턴공을 던지며 또 한참을 둘이 신나게 놀았다. 

오전산책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면 또 오후산책을 나갔다. 
날씨가 다행히 매일 좋았고, 내 어린 동행은 고맙게도 햇볕속을 걷고 뛰고 흙과 물과 풀숲에서 노는 일을 참으로 좋아했다.  
우리집 근처에는 아이와 차걱정않고 천천히 걸을만한 산책로, 숲길이 많은 것도 다행이었다.
 
딱히 갈 곳이 정해져있지 않은 우리는 발길이 닿는데로 동네를 무작정 쏘다니기도 했다.
동사무소에 갔다가 강일도서관 어린이열람실에서 한참 그림책을 읽다 나오기도 하고,
더운 날에는 커피 가게에 들어가 엄마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잔 마시고, 연수는 쥬스와 빵을 먹고 나오기도 했다.











이곳저곳 놀이터에서 오래오래 놀았고,
뭔가 평화 출산전에 준비해둘 것이 생각나면 연수를 유모차에 태우고 고덕역까지 걸어가서 한살림 매장이나 여러 다른 매장에서 물건을 사오기도 했다.

만삭의 애기엄마가 큰 아이를 앞세우고, 혹은 유모차에 태우고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젊은 아주머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본인이 숨이 차다는듯 안타까워하시기도 하고,
노점에서 떡이나 물건이라도 하나 살라치면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아들이지? 얘 동생이~"하고 평화의 성별을 딱딱 맞추셔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우리와 잠시 얘기를 나누게 돼는 가게 아주머니들이 한결같이 "인제 동생 곧 태어나겠네~ 너는 좋겠다! ^^"하고 연수에게 다정히 얘기해주셔서 나도, 연수도 더 설레고 기뻐지기도 했다. 

'아니, 이 산이 지난 봄에 흰 벚꽃잎이 비처럼 날리던 그 산이 맞나'싶게 나뭇잎과 풀이 무성하다못해 검푸러진 산을 보며 깜작 놀라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만난 초등학생쯤 돼보이는 누나에게서 뜬금없이 "우리 엄마아빠는 다 (밤)열한시에 오시는데.."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파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근데 아줌마.. 임신하셨어요?" ^^; 
이 질문은 놀이터에서 연수와 놀고있는 내게 참으로 많은 형아누나들이 했던 질문이다.  

















보통은 연수와 나, 둘이 걸었지만 지난 연휴에는 아빠도 함께 걸었다.
햇볕이 제일 뜨거웠던 일요일, 늘 차를 타고가던 우리 텃밭에 그 날은 세 식구가 걸어서 가보았다.
거리는 5킬로 남짓해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아침을 느지막히 먹고 세 식구가 걷다 꽃구경하다 하며 천천히 걸어가다보니 한낮의 제일 뜨거운 땡볕 아래를 걷게 되었다.

신영복선생님 서화중에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꽃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가래여울 텃밭에 걸어가며 내가 느낀 것이 딱 그랬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10여분 남짓한 시간동안 그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아파트단지와 하우스 풍경일 뿐이었는데
천천히 그 길을 걸어보니 하우스 안에는 호박과 오이가 주렁주렁 달려있고, 토마토가 가득 실려있는 수레.. 산호수라는 예쁜 화분만 전문적으로 키우는 농장 등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이 모두 그렇게 신기하고 예쁠 수가 없었다.











6월의 장미 향기도 마음껏 맡을 수 있었다.
장미 향기는 저녁 무렵이 더 진해서 연수와 둘이 나선 오후 산책이 길어져서 저녁 어스름이 깔린 뒤에 집으로 돌아올 때면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담장에서 풍겨오는 그 진한 장미향기들에 참 행복해지곤 했다.

시원한 초여름의 밤공기속을 장미향기를 맡으며 걷고 있노라면
가본 적 없는 낯선 시공간- 오래전에 읽어 이제는 그 내용도 어렴풋한, 릴케나 하이네 같은 독일 작가들의 작품속에 나오는 그런 초여름 저녁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작은 아파트 단지 안을 빙빙 돌던 어느 날에는 놀이터 옆에서 한 고등학생 누나가 데리고나온 토끼를 만나기도 했다.
연수는 토끼옆을 오래도록 지키고 앉아서 제가 뜯은 풀을 토끼에게 먹여주고, 그 보드라운 털을 자꾸 만져보았다.
그 날 저녁, 결국 돌담 어디선가 떨어져 울음 끝에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면서 연수는 토끼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늘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하던 아이여서 '토끼를 키울까, 고양이를 키울까'하고 아빠가 물었더니 "토끼 키울꺼야." 해놓고는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네 살이니까 토끼를 키우고, 다섯살에는 고양이를 키울꺼야.. 여섯살에는 강아지도 키울꺼야."
아빠가 웃으며 "우리집이 농장이 되겠네..'했더니 "응. 토끼가 먹을 수 있게 풀도 키울꺼야" 했다. ^^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걷는 일에 쓰다 보니 요즘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할 일이 없는 사람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걷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곧 예정일이 다가오는 평화의 순산을 위해서다. 
배속에 품고있는 생명이 제 힘으로 세상을 열고 잘 나올 수 있도록, 나도 건강하게 이 아이와 만나기 위해 공을 들여 하고 있는 준비이다. 
그래서 걷는 것인데, 막상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어디로 걸어가볼까' 하고 생각할 때는 
내게 세상에서 제일 중한 일이 '걷는 일' 밖에 없는 그런 한가롭고도 할일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웃음도 나고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당장 꼭 해야할 다른 급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그저 네살배기 큰 아이의 손을 잡고, 혹은 그 애의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에 이끌리듯 의지해 무거운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걷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생각을 않고
선물처럼 주어진 이 하루하루를 눈부신 초록으로 가득찬 세상속을 걸어다니는데만 쓰고 있는 것이다. 
 서른넷, 초여름의 내 인생에는 그런 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평화를 기다리면서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브이백(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하고싶어하는 임산부로서 
촉진제를 쓰지않고 정말 온전히 아이의 뜻, 아이와 나의 힘만으로 자연스럽게 출산을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보니
아이가 조금이라도 작을 때, 예정일보다 일찍 진통이 오기를 내심 많이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아 오늘도 안 나왔네..'하며 지친 몸으로 고단한 잠에 빠져드는 며칠을 보내다 
문득 내가 중요한걸 잊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제일 하고싶었던 것은 평화가 스스로 나오겠다고, 나올 준비가 되었다고 신호를 보낼때까지 기다리는 일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걸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 연수를 낳고나서 제일 안타깝고 미안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평화는 꼭 기다려주고 싶었다.
그러니.. 나에게 중요한건 수술이냐, 자연분만이냐 보다는 진통이 올 때까지, 아이가 준비되었다고 할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느냐 없느냐 이다.
기다려주고 싶었던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자.
더 늦어져도, 언제가 되어도.. 예정일이라는 것도 하나의 수치일뿐 내 아이가 준비되는 것은 저 나름의 때가 있을 것이다.

연수와 평화는 예정일도 6월 10일로 같다.
3년전에 나는 역아로 있던 연수를 예정일보다 1주일 앞선 6월 3일에 수술로 낳았다. 
6월 3일부터 6월 10일까지의 7일은 그래서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7일이다. 
나이가 더 들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예정일을 앞둔 마지막 일주일의 몸은 참 무겁다. 
연수때는 이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누우면 온 몸이 뻐근하고 아파서 '아구구~'하는 신음이 절로 터진다. 

처음 겪어보는 마지막 7일, 혹은 그 이상의 날들이 된다해도 나는 잘 견디고 싶다. 고맙게 기다리고 견뎌야지...
내 몸안에 작고도 온전한 생명을, 하나의 세계를 품고있는 신비한 느낌, 뻐근하고도 묵직한 이 감동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루 더 걸을 수 있다면 그만큼의 햇살과 푸른 잎사귀와 꽃향기가 내게 주어진 것을 고마워하면서, 
하루 더 놀이터 그네에 올라탄 연수의 보드라운 등을 오래도록 힘껏 밀어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앞으로는 될 수 있는한 걸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이번에 걸어보니 어지간한 거리는 다 걸어다닐만 하고, 걸어가는 것이 참 좋았다. 
풍경과 사람들이 길을 따라 내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연휴동안 세식구가 유모차를 밀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고속도로나 큰 도로를 보면 어김없이 차들이 꽉 막힌 도로위에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행렬속에서 답답해하던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고, 지금 우리가 걷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걸어야겠다고, 이제는 곧 평화까지 네 식구가 되겠지만 최대한 많이 걸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빠와 연수가 노는 동안 혼자 오래오래 걷은 적도 있는데 근래에 드물게 마음이 고요해지고 짜증스럽고 답답하던 마음속이 천천히 정리되는 경험도 했다.  뭔가 속상한 일이 있어 씩씩거리며 걷기 시작해도 한참 걷다보면, 그런 후에 잠시 앉아 바람을 쐬며 땀을 식히고 있으면 속상했던 것들이 스르르 풀리기도 했다. 
걷는 동안 그런 변화가 가능헀다. 

걷기를 재발견하게 해준 이 시간들까지 평화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평화야, 고맙다.. 
고맙다.
사랑해.  
^^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