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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9 우중산책 11
umma! 자란다2010. 2. 9. 14:25










생후 21개월하고 7일.
연수, 처음으로 빗속을 거닐어보다.

엄마도 덕분에 21개월 7일만에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걸어보았다.

2주마다 아파트에 와서 재활용쓰레기를 싣고가는 기중기차를 마당에 내려가 구경하는 것은 우리 모자의 중요한 행사다.
꼭 로봇의 팔처럼 생긴 기중기 끝에는 여섯개쯤되는 손가락(집게)이 있는데
오므리면 꽃봉오리같이 되는 그 집게로 산더미같이 쌓인 재활용쓰레기들을 집어올리는 모습은 
세살 아이의 눈에도, 서른셋 엄마 눈에도 신기한 구경거리다.  
연수는 자주 그 차를 기억하며 보고싶어하고, 나는 며칠 지나면 그 차가 또 오는지 얘기해주곤한다.

둘째주 화요일, 오늘은 그 차가 오는 날이다.
점심을 먹고나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징~~~~!'소리가 현관 너머에서 들려오자
우리는 얼른 옷을 챙겨입고 복도로 나섰다.
아... 그런데 비가 오고 있었다.
잠시 멈칫 했으나 '차가 오면 꼭 보러가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않으려니 맘에 걸렸다. 
비를 맞지 않는 현관에 서서 보면 되겠지.. 생각하며 앞장서서 신나게 뛰어가는 연수를 따라 내려갔다.
잠깐 동안은 엄마 말대로 얌전히 현관안에 서서 기중기차를 보던 연수가 이내 마당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그럼 올라가서 우산을 가져오자."
연수는 얼마전 집안에서 우산을 가지고 놀면서 제 것이라고 점찍은 작은 비닐우산을 들고 내려왔다.
나는 내가 쓸 큰 우산을 들고 내려왔다.

연수는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꼭 쥐고 우산대를 어깨에 걸치고 잠시 비오는 마당에 혼자 서있었다.
나도 우산을 쓰고 그 곁에 섰다. 
톡톡톡... 우산으로 떨어지는 비소리가 새로웠다.
우산을 쓰고 비를 맞아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지난 20개월동안 비오는 날은 집안에만 있는 날이었다. 
제 손으로 우산 하나 받칠 수없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빗속을 나서야할만한 어려운 사정이 내게 없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오랫만에 다시 서보는 비속의 공기는 그만 살짝 뭉클해질만큼 반가운 것이었다.

엄마가 오래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익숙하고 그리운 감각이 돌아오는 감격에 잠시 빠져있는 동안 
어린 아들은 이내 제 우산으로 바닥을 탁탁 치며 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우산으로 아이에게 내리는 비를 막아주느라 아이 곁을 따라다니기 바빠졌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비오는 날의 그리운 정취들은 소리로, 냄새로 느낄 수 있었다.
혼자였던 시절, 비오는 날은 귀찮은 날이기보다는 설레는 날이었다.
걸을때마다 찰박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낮게 퍼지는 커피향을 맡고, 어딘지모르게 막막한 흐린 하늘을 바라보는게 좋던 날.

연수와 나는 걸어서 놀이터에도 가고, 아파트 입구까지 내려갔다 왔다.
올라올때는 어부바를 해달라고 해 아이를 업고 우산을 받치고 오느라 낑낑거려야했지만
오랫만에 해본 '우중산책'으로 마음은 훨씬 개운하고 평화로워졌다.
이제는 이렇게 비오는 날에도 둘이 같이 나와 걸어다닐 수 있을만큼 자란 아이가 새삼 고맙고
긴 시절 잘 견딘(?) 나도 괜히 대견했다. ^^:

언젠가는 이 아이와 고즈넉하게 팔짱을 끼고 빗속을 산책하는 날도 오리라.
그 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같이 철벅거리며 빗속을 뛰어다니며 놀게 되리라.
장화속에 물이 들어가고, 우산은 팽겨쳐놓고 깔깔거리며 신나게 비를 맞는 날들이 지나가야하겠지.

그나저나 오늘로 저 비닐우산은 생을 마감할 듯하다. 
오끼나와로 신혼여행을 갔을때 샀던 작은 비닐우산. 
호텔에 우산을 두고 나왔던터라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비싼 우산을 사긴 그렇고, 오늘 하루만 쓰자며 작은 가게에 뛰어들어가 샀던 우산이다.
그냥 두고 오자는 신랑의 만류에도 추억담긴 물건은 뭐든 버리지 못하는 내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고이고이 챙겨들고왔던 비닐우산은 한동안 집안에서 연수와 잘 놀때부터 살이 구부러지기 시작하더니 오늘 연수의 첫 우중산책을 함께 하고는 그만 아주 심하게 우그러져 버렸다.

추억이 쌓일수록 버리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나는 사진을 찍고 또 저 녀석을 우리집 신발장 구석에 세워놓고 말았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