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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17 시댁 이야기 8
신혼일기2011. 9. 17. 01:49








화요일 저녁7시에 상주에서 출발해 10시에 서울집에 도착했다.
잠든 두 아이를 한 사람이 하나씩 껴안고 집으로 올라왔다.
방에 들어가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보니 남편이 주차장을 오가며 올려놓은 짐들이 부엌에 가득했다.
그중에 이 상자를 보고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젖먹이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치른 명절의 고단함, 밤늦은 귀경길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청상할머니가 챙겨주신 고추, 큰 호박, 집에서 키우신 콩나물만 봐도 웃음이 나는데 
자른 수박조각까지 집에두면 먹을 사람 없다고, 아이들 잘 먹으니 가져가라고 부득부득 넣어보내셨을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상주시댁을 떠나기전에 청상외가에는 남편 혼자 다녀왔기때문에 나는 이 짐을 못 봤었다. 
시외할머니인 청상할머니는 큰 물김치 한통과 추석 전날 연수까지 아빠와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같이 캤던 고구마 한박스, 들기름 한병까지 챙겨보내 주셨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셨으리라.. 
당신 손으로 키워낸 여러명의 손주손녀들중에 비록 외손주이긴하지만 첫 손주며느리이자 하나뿐인 손주며느리에게 우리 시어머니가 챙겨주시는 것에 조금이라도 더 보태서 챙겨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증손주의 백일을 같이 보내려고 마음먹고 내려왔다가 그러지못하고 올라가게 된 손부와 증손주가 안쓰럽기도 하셔서 부득부득 더 뭔가를 챙겨주셨을지도.

우리 시어머니는 청상외할머니의 큰 딸이다.
위로 오빠가 둘인데 제일 큰오빠는 아주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큰외숙모님이 딸 셋을 키워서 위로 둘을 시집보냈고 막내시누는 올가을에 결혼을 앞두고있다. 두 딸은 모두 아이를 둘씩낳고 열심히 잘 산다. 돌아가신 큰외삼촌은 인물도 참 좋으시고 아주 똑똑하셔서 동네에서 다들 칭찬하는 재목이셨다는데 안양에 있는 가죽회사에 취직해 일하시다 과로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마음에 제일 큰 기둥이었을 큰아들을 일찍 잃은 청상외할머니의 마음이 어떠셨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둘째아들인 평택외삼촌은 언제뵈도 다정하고 참 좋은 분인데 외숙모께서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를 갖고 계셔서 명절이나 제사같은 집안행사에 일절 참가하지 않으신다. 외삼촌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셨는데 그중 큰 아들은 어머니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있어 병역을 거부해 대신 감옥살이를 했다. 작년 설인가에 그 사촌을 처음 보았는데 뽀얀 피부에 맑고 여린 인상이었다. 그댁 시누도 역시 조금은 핏기없는 하얀 얼굴에 고요하고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었어서 아마 내가 한번도 못뵌 외숙모님이 그런 분인가 짐작해보았다.
그리고 셋쨰가 우리 시어머니, 그 아래가 서울이모님, 그 아래는 구미이모님, 그리고 막내가 서울에 계시는 외삼촌이다.
서울이모님은 일찍부터 동대문에서 이모부님과 함께 가죽옷장사를 해오셨고 구미이모님은 아이들키워놓고 지금은 큰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신다. 서울외삼촌은 6남매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는데 그 첫등록금을 돌아가신 큰외삼촌이 직장다니실때 내주셨다. 본인이 돈이 없이 대학을 못간것이 큰 한이었던 큰외삼촌이 막내외삼촌만큼은 꼭 대학에 보내주겠다고 안양집으로 불러 데리고 살면서 대학 등록금도 내주셨던 것. 그러던 중에 큰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막내외삼촌은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다행히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실 수 있었다. 회사는 순조롭게 성장했고 막내외삼촌은 회사의 중역이 되셨다. 막내외삼촌은 돌아가신 큰외삼촌의 딸들, 특히 그 딸들이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돌잔치같은 대소사를 치를때는 자신이 그네들의 친정아버지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해주셨을만큼, 아니 그 이상의 재정적 후원을 하는 것으로 큰외삼촌께 받은 대학등록금의 오래된 정을 되갚고 계신다. 종교적인 이유로 제사를 모시지않는 둘째 외숙모를 대신해 막내외숙모께서 제사도 모시고 든든하게 집안살림을 꾸리고 계셔서 청상외할머니께 참 다행한 일이지만, 다른 자식들의 형편은 그리 좋지않은터라 청상외할머니는 그것이 또 마음이 많이 쓰이실 터이다. 






(이번 명절에는 사진을 찍지못했다. 이 사진들은 지난 3월 청상할머니 생신때 시댁식구들과 단양에 놀러갔을떄 연수삼촌이 찍어준 것이다.)



우리 시어머니는 식당일을 하신다.
올해 연세가 쉰일곱. 아주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녁6시부터 새벽2시까지 곱창불판을 닦고 서빙을 보고 아르바이트생들을 지휘해가며 장사잘되는 곱창집의 2층홀 전체를 책임지고 일을 하시는 것은 작은 어머니의 몸에 무리하고 고된 일이다.
남편이 어릴때 시아버지는 오토바이가게를 하셨다. 새오토바이도 팔고 오토바이 수리도 하는 '현대오토바이'란 간판이 걸린 작은 가게앞에서 어린 삼남매를 나란히 세워놓고 찍은 사진을 나도 보았다.
가게는 잘 되었고 어머니는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셨다. 우리 어머니는 요리를 참 잘하시는데 아마 그때 남편과 시동생들은 참 즐거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뚝딱뚝딱 오토바이 고치는 모습도 구경하고,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께 귀여움도 받으며 다정한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으며 작은 집이지만 깔깔거리며 함께 뒹굴었겠지.. 휴일이면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삼남매와 젊은 엄마까지 모두 같이 타고 시원한 바람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공원이나 절로 나들이를 갔을 것이다. 남편의 어린시절 사진에는 그런 모습이 가득하다.

남편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시아버님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술을 드신채로 오토바이를 타다가 그만 사고가 난 것이다.
시아버님은 오래 입원을 하셨고 오토바이가게도 접으시게 되었다. 그때 다치셔서 지금은 한쪽 다리를 살짝 저신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는 잠시 식당을 여셨다가 잘 되지않아 이내 접으셨다한다. 
그 뒤로 한동안이 우리 시댁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마침 그떄 시골집에 혼자 사시던 시할머님이 치매에 걸리셔서 시내에 있는 작은 아파트인 우리 시댁에 모셔와 시어머니가 시할머니 수발까지 드셔야해서 시어머니에게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말로 힘든 몇년이 흘러갔다.
그때 어머니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일찍 철든 딸, 바로 우리 시누였을 것이다.
남편과 시동생이 대학생이었던 시절, 시누는 여상을 나와 일찍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누이는 적은 월급을 쪼개 알뜰하게 저축하고 자기 생활을 꾸리는 한편으로 어려운 엄마에게 돈을 부쳐주었다. 
학생운동한다고 대학을 6년씩이나 다니는 오빠에게도 용돈을 보내주고 결혼한 후에는 한동안 같은 지역의 대학에 다니던 친정동생을 자기집에서 거두기까지했던 시누. 언제보아도 속깊고 현명하고 다정한 시누..







시아버님은 오토바이가게를 접으신 후로 친척조카가 하는 작은 건설업체에 취직해 건설노가다를 해오셨다. 주로 시골별장같은 단독주택이나 황토집을 짓는데 아버님은 워낙 어떤 기계도 잘 다루시고 손놀림이 좋으셔서 일감은 늘 많으신 것 같다. 아버님 연세가 올해 예순. 조금만 더 있으면 집짓는 일이 힘에 부치실 것이다.
우리 아버님 성함이 김자 영자 구자, '김영구'이신데 젊은 시절 동네에서 별명이 '영구박사'였단다. 어떤 기계든, 어떤 일감이든 척척 잘 고치고 해내셔서 그랬다는데 어린시절 또 동네에서 참 알아주는 신동(?)이었던 남편도 꿈이 '박사'였다. '박사'란 굉장히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자기는 커서 꼭 박사가 되겠다고 말해서 열심히 사는, 그러나 가난한 젊은 부부였던 시부모님의 삶에 큰 희망이고 기쁨이었던 큰아들.   

큰아들은 오래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그 빈소에 내려가지 못했다.
대신 경찰서 형사들이 장례식장 주변에서 3일을 함께 보냈다.  
시아버지는 그때 얘기를 종종 하신다. 원래 말수가 별로 없으신 분인데 그 얘기는 워낙 마음에 맺히셔서 그런지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있다 남편이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어서 수배되었을때 이야기가 나오면 할머니 장례식 얘기를 빼놓지않고 하신다. 
막내외삼촌과 어머니도 남편을 데리러 학교에 오셨을때의 이야기를 하신다.
이번 명절에 그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연호가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연호의 등장으로 할머니할아버지가 온통 갓난아이에게 마음을 뺏기셨고, 연수와 시누의 두 아이들까지 이제는 넷이나 되는 손주들을 돌보고 그 재롱에 웃고 말썽에 야단치고 하다보니 명절 연휴가 휘리릭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에 어머니는 내게 명절쇠고 며칠더 시댁에 있다가 주말에 연호 백일상을 같이 차려서 하고 올라가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바로 '좋아요, 어머니. 감사합니다'했다. 그래서 시댁에서 일주일 지낼 요령으로 연호 기저귀며 아이들 옷같은 짐을 넉넉히 싸서 내려갔다. 연수 때는 백일에 시부모님과 시누 가족이 모두 서울 우리집으로 오셔서 같이 백일을 치뤘었다. 그때는 우리가 차가 없어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내려갈 방법이 없기도 했고 연수가 첫손주라 어른들이 꼭 오셔야겠다고 어렵게 일을 빼고 시간을 내서 찾아오셨었다.
연호때는 그냥 우리 가족끼리 서울에서 밥한끼 정성껏 지어서 먹자고 처음에 어머니랑 얘기했었는데 막상 백일이 가까워오니까 정많은 어머니께서는 둘째손주의 백일상도 직접 차려주고 싶으셔서 내게 내려와서 같이 지내자고 하신 것이었다.

시댁에 내려가 지내는 것이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는 편하다. 시어머님이 먹을 것을 다 챙겨주시고 낮에는 연수를 데리고 놀이터에도 틈나는대로 나가주실 것이니 나는 어린 연호만 돌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머님이 너무 힘드시다는 것..
어머니는 저녁6시에 출근해 새벽2시에 퇴근하시는데 씻고 이것저것 정리하고나면 새벽3시쯤 잠이 드신다.
아버님은 새벽6시반에 일어나 출근을 하신다. 보통때는 아버님은 거실에서, 어머님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아버님은 어머니를 깨우지않고 혼자 조용히 밥을 차려드시고 나가신다. 그러면 어머니는 조금 늦은 아침까지 잠을 주무시고나서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드시는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가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안방을 내주신다.
작은방이 하나 더 있지만 요즘은 일본지진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중단하고 돌아온 시동생이 잠시 다녔던 직장도 문을 닫는 바람에 다시 상주집에서 지내고있는터라 어머니는 천상 거실에서 주무셔야한다. 그러면 새벽에 아버님이 출근할때 잠을 깨시게되고, 또 연이어 아침일찍 일어나는 연수와 연호도 깨서 할머니를 찾을터이니 어머님이 제대로 쉬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어머님 성격에 손주들 돌보느라 평소에 너무 고생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를 며칠이라도 맛있는것 해서 먹여주고, 손주들하고 많이 놀아주려고 하실게 분명한데 그러면 낮에도 제대로 쉬지 못해 저녁일하는 어머니에게 너무 무리한 며칠이 될 것이었다.

마침 어머님은 이번 명절 내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셨다.
갑상선이 안좋아 몇년째 약을 드시고계신 어머니는 피로가 많이 몰려오면 두통도 심해지시는 듯하다.
명절이란 것이 오랫만에 모인 가족들에게는 참 반갑고, 맛있는 음식에 거나에게 술잔 기울이며 취할 수도 있고, 아이들 재롱보며 즐거워할 수있는 시간이지만
대식구의 식사를 계속 차리고, 설겆이와 청소와 빨래를 해내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고된 노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명절 전날과 명절날 딱 이틀만 식당일을 쉬실 수 있었던 어머니. 그러나 그 이틀동안 식당에서 일할때보다 더 힘들게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가족들을 먹이고, 좁은 집에서 어린아이들의 칭얼거림에 밤잠을 설치셔야했던 어머니는 연휴 마지막날, 너무 힘들어서 안되겠다며 미안하지만 그냥 서울로 울라가는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미안해하시지 말라고, 괜찮다고, 어머니가 너무 힘드신데 제가 일을 덜어드리지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연휴 마지막 날, 어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못하고 식당으로 나가시면서 우리가 먹을 저녁밥을 다 차려주고 가셨다. 
설겆이는 힘드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고...

어머니가 볶아주신 불고기 반찬을 해서 우리 가족은 모두 든든하게 저녁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그 시간, 식당에서 반찬없는 저녁밥으로 식사를 하셨을 것이다.
나는 설겆이를 했다.
내가 조금더 단단한 사람이어서, 어머니께 부담을 드리지않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 시부모님께 차려드리고 내 아이들도 먹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껄... 그러면 어머니께서 우리가 시댁에서 지내는 것을 조금은 덜 걱정하셨을지도 모르는데..
내년 설에는 연호도 좀더 컸을 것이고, 나도 좀더 능숙한 주부가 되어서 어머니께서 내 밥 차려줄 걱정은 안하시게 하면서 시댁에서 지내다 와야겠다... 그런 생각도 했다.

상주를 떠나며 어머니께 문자를 썼다. '어머니 저희 인제 출발했어요 명절쇠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잘계셔요 어머니'
금방 답장이 왔다. '내가 많이 미안하구나 형편상어쩔수가 없구나 내체력도따라주지못해 보내니 마음이너무아프구나 조심해서가고 도착하면전화하렴 미안하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 쿵하고 내 마음에도 아프게 와서 부딪혔다.
집에서 우리에게 챙겨주실 전이며 과일보따리를 싸시면서도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보내놓고나면 또 마음이 그렇게 아파'라고 말씀하셨었다. 어머니.. 고된 일로 손가락끝이 모두 뭉툭하게 닳은 어머니가 더 해주지못해 마음이 아프시다고 한다. 어머니를 그렇게 마음아프시게했다는 사실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

다시 문자를 썼다. 
'어머니 힘드신데 저희가 더 보탬이 돼드리지못해 제가 더 죄송해요 건강조심하시고요 연호연수 모두 이번에 할머니할아버지 사랑을 많이받아서 더 잘 클것같아요 감사해요 어머니'하고 빨간 하트를 하나 붙였다. 

다음날 전화할때 어머니는 '괜히 보냈다 싶어 하루종일 마음이 안좋았다. 고단해도 며칠만 참으면 되는데.. 미안해서 어쩌나'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울음이 살짝 섞인것 같았다.

연호낳고 2주동안 어머니가 우리집에 와서 산후조리를 해주고 내려가실때, 엘리베이터앞에서 배웅하면서 나는 울었다.
감사해서, 그 다정한 정이, 우리를 위해 쏟아주신 수고가 감사하고 그리워서 펑펑 울었었다.
연수를 낳았을때도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해주러 오셨었다가 삼일만인가, 연수 황달떄문에 조리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서 일찍 내려가셨었다. 그때 병원에서 어머니와 헤어질때도 눈물이 났었는데 그때는 연수도 걱정되고 나도 왠지 무섭고 첫아이를 낳은후의 두려움에 어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서글픈 마음이 컸었다.
연호낳고 2주동안 함께 지낸 것이 시어머니와 내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지내본 것이었다.
그 기간동안 힘든 것보다는 고마운 것이 훨씬 많았고, 불편한 것보다 정겹고 든든한 마음이 훨씬 컸다.
우리 어머님이 워낙 며느리에게 잘해주려 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둘째아이라 그런지 내마음이 훨씬 여유롭기도 해서 어머님하시는 젖모자라지 않을까, 분유 좀 먹이지 하는 걱정같은 것도 신경곤두세우지않고 들을 수 있었다. 연수를 보살피는데는 철없는 연수가 할머니께 버릇없이 굴고 할머니 싫다 어쩐다해도 할머니만큼 든든하고 살가운 분이 없었다. 
그 2주가 지난후 나는 어머니를 지난3년보다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연호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고 하셨다. 
지난 명절동안 두통으로 힘들어하시면서도 연호를 볼 때만큼은 정말로 환하게, 아픈 것도 모두 잊은듯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나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명절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연호에게 젖을 먹이며 연수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으로.

서울집에 도착해, 신생아파트단지의 삭막한 콘크리트벽들 사이로 들어서며 문득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가붙이도, 다정한 친지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내가 왜 살고있지.. 하는 생각. 
가족들속에, 복도에만 나오면 상주를 둘러싸고있는 아름다운 산의 능선들과 하늘과 연호가 배속에 있었던 지난 설에는 정말 잘생긴 매 두마리가 멋지게 하늘을 나는 모습도 오랫동안 볼 수 있었던 상주시댁을 떠나온 직후라
서울, 그것도 이제 막 둥지를 튼 썰렁한 신축 아파트 단지가 참 쓸쓸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다시 지지고볶는 일상으로 돌아오니 서울집에 대해 느꼈던 이질감, 소외감같은 것은 빠르게 잊혀졌다.
더운 밥 해먹고, 아이들 키우고,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살림하는 집.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곳이지, 이 집은.
이웃들과 만나 담소도 하고 명절에 생긴 먹거리들도 서로 나누고.. 연수듣는 문화체육관 수업도 다녀오고 하다보니 주말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어머니도 일상으로 잘 돌아가셨기를..
오래 마음아파하시지말고, 잘 쉬시고.. 고단한 생활속에서도 작은 행복들을 느끼시기를.

명절 생각을 하다보니 시댁 이야기가 하고싶었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글이 너무 기니까.. 다음에 또 해야겠다.
시댁의 여러 식구들과 그 삶과 사연을 통해 나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는지, 얼마나 아픈 이야기가 많은지를 배우고 느끼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때로는 내게 힘이 되기도하고,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근심하게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이 더 커지고 깊어지기를 부디 바라고 있다.

나는 우리 시댁식구들이 좋다.
어쩌면 버거울수도 있지만 지금 내 작은 그릇안에 그 분들이 담아주시는 따뜻한 사랑이 고맙고 좋다.
속깊은 시누이와 꿈많은 시동생도 좋다.
사는 것이 너무 고단하다보니 서로에게 짜증내거나 퉁명스러울 때가 많은 시부모님의 모습이 안쓰럽기도하고 애잔하기도하다. 약주 좋아하시는 시아버님, 화도 잘내고 웃기도 잘 하시는 시어머님도 좋다. 

연수와 연호가 할아버지할머니를 더많이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이 글을 보고 할머니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와 많은 이모삼촌할머니할아버지들의 사연을 조금은 더 알고, 애정과 이해를 키울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요즘 할머니가 제일 보고싶으실 연호 얼굴을 한장 더 올린다. 사진으로나마 아이들 잘 크는 모습 많이 보여드려야지..)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