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업'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8.21 여름 먹거리
  2. 2015.04.28 공동체텃밭, 우리의 위로 2
  3. 2014.10.23 농사짓는 마음
생명/한살림.농업2020. 8. 21. 15:29



우리 아파트 안에 작은 텃밭이 있다.
매해 이른 봄에 분양을 하는데 동별로 1~2 가구 정도가 추첨을 통해 선정된다.
경쟁률이 아주 높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많은 가정에서 신청을 하고, 해마다 알차게 농사를 지으신다.
관리사무소와 경로당, 작은도서관, 탁구장 등이 함께 있는 ‘커뮤니티 센터’ 옆에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아파트 텃밭은 스무개 남짓되는 작은 구좌들로 나누어져있고 각 구좌마다 ‘토끼네 텃밭’처럼 각 텃밭의 이름이 적힌 예쁜 팻말이 하나씩 꽂혀있다.

상추, 토마토, 고추, 깨, 가지, 오이, 감자, 고구마 등 다양한 작물들이 봄과 여름동안 쑥쑥 자랐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오며가며 눈으로 구경하는 즐거움이 컸고, 동네 이웃들이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어느날은 꼬마 아이들을 데리고 텃밭에 옹기종기 모여 얘기하고 물주는 풍경을 보는 것도 정겨웠다.

전부터 우리 옆 라인에 사는 이웃 언니가 “우리 텃밭에서 상추 좀 따다 먹어~” 하시더니, 얼마전에는 아침에 자전거타고 지나가는 나를 불러 오이를 두 개 따주었다.




상추도 따가라는걸 상추는 사놓은게 있어서 괜찮다고 하고, 언니가 텃밭에 풀뽑는 것을 옆에 서서 좀 구경했다. 토마토 밑으로 바질을 키우니까 바질 향 덕분에 토마토에 벌레가 덜 생긴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이 아파트로 이사온 첫 해에, 그 때는 내가 시이모님과 강일동에서 텃밭을 하던 마지막 해였던 것 같은데 올망졸망한 무를 한가득 푸대에 수확했었다.
그 때 둘째랑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있었던 언니네에게 무를 몇개 나눠드렸다. 아침에 아이들이 유치원 버스탈때 푸대째 들고나가서 같이 타던 서너명 되는 아이들 엄마들과 다같이 몇개씩 나눴다.

그 해 이후로 나는 텃밭농사를 접었는데 그 때 “아! 나도 텃밭 농사 짓고싶은데!”했던 언니는 그 다음 해부터 하남시에서 분양하는 도시농장 텃밭을 신청해 여러해 지어오셨다고 한다. 올해는 아파트 텃밭이 당첨되어 가까이서 일하니까 좋다고 말하며 웃는 언니네 밭을 보니 깔끔하고 튼실한 것이 도시농부의 내공이 착실히 쌓이신 것 같아 부러웠다.

사실 그전에 강일동에서 텃밭을 할 때 농사는 이모님이 다 지으시고 나는 아이들데리고 구경삼아 따라다닌 얼치기 농사꾼이었던 터라 텃밭농사를 잘 모른다.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지도 않았고.. 상상마루 작은도서관 친구들과 자연놀이동아리를 만들어 공동체 텃밭 농사를 지을때도 농사일은 영미언니가 다 맡아하시고 나랑 다른 엄마들은 그저 조금씩 일손이나 거들면서 지냈던 터라 이사온 후로 나 혼자 농사를 짓는 것은 생각도 안 했다.

근데 요즘에는 다시 텃밭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에는 나도 아파트 텃밭을 신청해봐야지.
아이들도 아파트 텃밭을 볼때마다 “엄마, 우리도 이거 하자”고 졸랐는데 내가 엄두가 안나서 신청을 못했었다.
이제 세 녀석도 제법 컸으니 텃밭에 물 주고 풀 뽑고 하는 일도 좀 거들겠지?
아파트 텃밭이 안되면 미사리 쪽에 있다는 하남시 텃밭이라도 신청해보자.





여름 한 복판에 있을때 강릉에서 엄마아빠가 옥수수를 한 박스 보내주셨다. 사촌동생 올케네 친정에서 농사지으신 옥수수라고. ^^ 멀리 우리집까지 친정집 밭에서 자란 감자랑 대파까지 함께 넣어져서 고맙게 잘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집에 옥수수 공장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옥수수 1개당 100원씩 일당(?)을 받기로 하고 옥수수 껍질을 열심히 깠다ㅜㅜ




옥수수를 한 솥 삶아 몇개는 식혀서 냉동하고, 몇개는 이웃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우리도 실컷 많이 먹었다.
입맛없는 여름에 옥수수 같은 간식을 먹으면 배도, 마음도 따뜻하고 든든해진다.






자기가 먹을 음식을 자기 손으로 농사지을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하고 소중한 일이다.
먹지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농부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고마운 분들이다.
마트에서 쉽게 농작물을 사고, 또 그렇게 많이 산 것들을 다 못먹고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면서 살다보면
농작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것을 키우는 수고가 얼마나 고맙고 큰 것인지 잘 모르게 된다.

농작물을 직접 키워보고, 다양한 작물을 골고루 먹어보면서 아이들이 채소와 친해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먹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지금은 부모님들이 보내주시는 먹거리들, 한살림에서 오는 채소들을 아이들과 함께 다듬고 손질해 버리는 것 없이 잘 거두어 먹는 것이 우선 목표.






코로나와 기후위기 관련된 글들을 읽다보면 식량위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기후 위기가 불러온 기상 이변들로, 올여름에 우리 나라도 이미 많은 농가가 심한 비피해를 입은 것처럼 먹거리 생산에도 큰 어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나라처럼 식량 자급률이 23%(쌀을 제외하면 23%, 그나마 자급을 하고있는 주식인 쌀을 포함해도 46.7%로 50프로가 채 되지 않는다) 밖에 안되고, 식량에 대한 해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코로나같은 국제적 위기 속에 무역거래가 위축되고 기후위기로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식재료 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도시에 텃밭이 많아지고, 조금씩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농업을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농사를 짓고, 농촌에서 잘 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을 꿈꾸며...
우선은 세 끼 집에서 밥먹는 이 날들을 무사히, 밥 잘 지어먹으며 버텨내자.




Posted by 연신내새댁


어린 시절을 기억할때 자주 떠오르는 장면중 하나가 밭에서 놀다가 바라본 고향마을 풍경이다.
지금 친정집이 있는 그 자리가 내가 아주 어릴때는 완만하게 경사진 큰 밭이었는데
거기 적갈색 부드러운 흙에 쪼그리고 앉아서 놀다가 주위를 둘러보는게 대여섯살 무렵의 내게는 참 좋았던 모양이다. 
파란 하늘도 좋고, 건너보이는 땀봉의 키큰 소나무, 밭 뒷산의 나무들, 소꿉놀이 단골장소였던 길건너 옥계집 담장 밑에는 황매화 노란 꽃이 울타리처럼 무성했다. 석류나무도 있었고...

강일동으로 이사온 후에는 늘 텃밭농사를 지었다. 이모님이 지으시고 나는 젖먹이들을 안고 따라다니기만 한 것이지만 밭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 올해는 동네에서 자연놀이 함께 하는 이웃엄마들과 아이들데리고 같이 텃밭농사를 지어보기로했다.

강동구 공동체텃밭은 주민 5인 이상이 모임을 이뤄 신청하면 모임별로 5-6구좌를 분양해주는데, 무료인 대신 수확물의 70%를 기부해야한다. 우리가 기부한 채소는 강동구내 친환경농산물 판매매장인 '싱싱드림'에서 판매되고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분들을 돕게 되는 구조. ^^

아이들과 함께 농작물을 키워보는 것만해도 좋은 배움인데 어려운 이웃분들도 도울 수 있으니 정말 좋겠다.. 싶어 이웃엄마들과 마음을 모은 것이었다. 우린 1주일에 한번씩 자연놀이도 해야(?)하는데 텃밭에 가면 흙과 곤충과 풀나무가 천지니 자연놀이 프로그램도 따로 안짜도 되는 그야말로 1석 3조~~!! ㅎㅎㅎ

땅이 좋고 풍경도 좋아 인기가 많은 공동체텃밭인데 어린 애기엄마들이 모여서 해보겠다는 마음이 기특했던지 다행히 선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3월부터 우리의 공동체텃밭 농사가 시작되었다.





8가족이 함께 짓는 6구좌 텃밭은 넓다.
공동으로 짓는 밭 2구좌에는 감자를 심었고, 가족별 밭에는 각자 심고싶은 씨앗들과 모종을 자유롭게 심었다. 땅을 고르고 비료도 뿌리고 심으며 몇주가 흘렀다. 아이들은 잘 놀고, 벌에 쏘이기고 하고, 옆집 텃밭의 새싹 밟아서 혼도 나지만 밭에 가고싶다고 자주 말한다. 밭도 아이들을 기다린다. 야트막한 수영산안에 포근하고 아늑하게 안겨있는 공동체텃밭에 들어서면 땅이 우리를 반겨주는 것만 같다. 
아이들은 새싹도 반가워하지만 보고싶어 하는게 또 있다.

 

바로 이 분들!

흰염소 가족, 검은 염소 가족, 토끼 가족이 텃밭 저 위, 산밑집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뜯어주는 싱싱한 풀을 "맛있음메~~"하고 오물오물 받아먹고 겅중 뛰어오른다. "킁!" 하고 콧김이라도 내뿜으면 애들은 깜짝 놀랐다가 깔깔깔~!!^^

아이들과 동물들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이번에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염소와 토끼에게 풀을 주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왜 예전에, 농경과 목축이 중요한 일이던 시절에 아이들에게 소나 양의 풀을 먹이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은 생명을 보살피는 일을 좋아하고, 또 특유의 부드러움과 생명력으로 동물들을 사랑하고 함께 어울린다. 아이들이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염소들이 풀을 잘 먹으니까 아이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풀을 뜯어먹였다. 염소집 근처에는 마침 부드럽고 여린 풀이 무성해서 아이들 손으로도 죽죽 잘 뜯어 먹일 수 있었다. 넓은 풀밭에 너희들도 나올 수 있다면 좋겠지.. 우리 꼬마들도 한나절 너희들을 데리고 들에 가 풀을 먹이며 놀 수 있으면 좋겠지. 나는 혼자 꿈을 꾸었다.

 

 




엊그제 아빠가 출근한 일요일에도 아이들이 하양이(아기염소)가 보고싶다고해서 밭에 다녀왔다. 공동체 텃밭은 집앞에서 버스 3정거장 거리다. 이제는 연제도 잘 걷고 버스도 잘 타서 유모차없이도 잘 다닌다. 된장국, 김, 김치에 밥만 싸서 밭으로 갔다.

아이들이 하염없이 염소에게 풀을 뜯어먹이는 동안 나는 염소우리 위쪽에 있는 원두막에 앉아 도시양봉팀이 키우는 벌통도 쳐다보다가 하늘도 보다가 했다.
이 곳은 어쩌면 이렇게 내 어린시절의 집과 뒷산 같을까.. 누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위로의 공간에 와있는 것처럼 나는 텃밭 원두막에 앉을 때마다 목이 살짝 메인다.

 




텃논에는 올챙이가 정말 많았다. 요즘 늘 장화를 신고다니는 연수는 올챙이 한마리를 손바닥 물웅덩이에 담아와 내게 보여주고는 쏜살같이 다시 논으로 뛰어갔다. 고향의 아빠도 지금 논물을 채우고 계시겠지... 밝은 햇살 아래서 고향 들판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아이들은 없는 찬에도 밥을 잘 먹고, 나도 성오언니네에서 받아온 고들빼기 김치해서 밥한그릇 잘 먹고 돌아왔다.

 

 

 

 


공동체텃밭에는 다같이 가도 좋고, 우리끼리 가도 좋다. 뒷산 한바퀴 산책해도 좋고, 그냥 가만히 밭에 새싹난 것만 보고와도 좋다. 우리보다 앞서 다녀간 누군가가 6개밭에 모두 물을 주고 갔구나.. 물기가 남은 흙을 보며 가만히 짐작하고 고마워할수있어 좋다.

농사를 잘 지을줄 모르는 내가 그저 밭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자연 가까이 지내고싶어서 덥썩 벌인 일인데 잘될까.. 걱정될 때도 있다. 그래도 몇년 밭에 따라다녔다고 나를 믿는 다른 엄마들도 있는데 잘 안크면 어쩌지? 소복이 난 이런저런 새싹들은 언제, 어떻게 속아줘야하나? 이모님 밭에 따라갈 때 더 단단히 봐둬야지.. 이번에 강릉가면 아빠엄마한테 과외 많이 받고 와야지.. 속으로 다짐하고 있다. ^^





 
 

농사는 고단하고 힘든 일이다.

어린 아이들 키우는 엄마들의 일상도 힘든 순간이 많다.

그렇지만 밭에 와있을때 우리는 힘든 중에도 잠시 어떤 넉넉함과 고요함, 평화로움을 느낀다. 아주 짧은 찰나일지라도 '아' 하고 잠시 날선 마음을 내려놓고, 어깨에 힘을 빼고, 흙처럼 부드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공동체텃밭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 나만은 아니어서,
함께 하는 엄마들 아이들 모두 땅과 친구와 생명들 안에서 마음 한자락 따뜻하게 적시고 위로받으며 
같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맙고 좋다.

봄이 깊어가고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생명/한살림.농업2014. 10. 23. 21:27




농사를 왜 지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무슨 그런 우둔한 질문을 하느냐고,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사는데 
그것들이 다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들인데 
당연히 농사를 지어야지, 
안그러면 무엇을 먹고살 것이냐고..

누군가 이렇게 바른 말씀을 하시면 '네, 그렇죠'하고 대답하고 싶지만
현실은 자꾸 반대로 돌아가는 듯하다.

마트에 가면 신선한 채소와 과일, 곡식과 고기가 차고넘친다.
싸게, 잘 생긴 농산물을 구입해 먹을수만 있다면 
누가 그 농작물을 키우는지,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분은 어떻게 사시는지 
크게 관심갖지 않고 그저 맛있게 냠냠짭짭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수입개방 시대에 우리 농촌은, 농민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농민이 농업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는 것.
나라가 나서서 식량안보, 식량주권 같은 것은 생각도 않고 농업을 죽이고 있다는 것.
농사짓던 땅들이 메워지고 그 위에 상가와 아파트와 공장과 유흥업소가 세워지는 것을 '발전'이고 '성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런 시대에, 이런 나라에서 
농사를 짓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는 말이다.








아이들과 종종 인형극을 보러가는 '암사어린이극장'의 정원은 살뜰하게 가꾸시는 먹거리들이 가득한 텃밭이다.
지난 달에 갔더니 마당의 아치형 터널 안에 호박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같은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걸어들어가는데 호박은 꼭 등같기도 하고, 풍선같기도 했다.
그림책 '뒤집힌 호랑이'(김용철, 보리출판사)에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소금장수가 호랑이 뱃속 구경을 하며 뒤룽뒤룽 매달린 창자와 염통을 볼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극장에서는 아이들 구경하라고 아이스박스 논에 벼까지 심어놓으셨다.

토란, 배추, 깨... 이 모든 푸성귀들을 극장에서는 또 알뜰히 거두어 드신다.

오전 공연이 끝나고 오후 공연히 시작되기 전에 배우들과 스텝들이 모두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외곽 지역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어린이공연만 해오신 작은 극단의 열명 남짓한 식구들이 먹을 반찬거리들을 이 정원 텃밭에서 부지런히 키우고 계신 것이다.











사먹는 것보다는 부식비가 훨씬 절약될 것이기에 '있는 땅에서 키워먹으면 맛도 좋고 여러모로 훨씬 좋지 뭐' 하고 간단히 생각하고 말기에는 
키우고 거두는 수고와 노동이 작지 않기에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실까.. 이 농사를 짓는 마음은.
극단의 대표로 보이는 분이 늘 밀짚모자를 쓰고 부지런히 텃밭을 돌보고 계신데 채소마다 지지대를 세우고, 풍성하게 열매맺고 또 거둔것을 말리기까지 하시는 솜씨도 보통은 아니신 것 같다.









묘적사에 갔을 때도 해우소 옆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텃밭이 있기에 눈이 갔다.
가지, 고추, 상추같은 채소들이 착실히 자라고 있었다.
스님들이, 어느 보살님이 가꾸셔서 절 공양에 쓰시는구나.. 싶었는데 역시 어떤 마음이실까.. 궁금했다. 
굳이 내 손으로 짓지 않아도 되기는 할텐데
그 시간에 수도를 더 하시고, 불자들과 행사를 더 하셔서 시주를 더 많이 받아서 절 재정을 윤택하게 할 수도 있을텐데 농사를 짓는다.
그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름 끝무렵에 우리 텃밭에서는 봄에 그저 씨만 뿌려두었던 당근을 수확했다. 
상추모종 사러갔던 모종가게에서 아이들이 당근 그림을 보고는 사자고 하도 졸라서 한봉지 사고는 '이게 되겠냐' 싶은 마음으로 그저 씨만 술술 뿌려두었던 것인데
가뭄속에 파리하게 어린 싹이 나고 조금씩 자라더니 비 몇번 맞고는 줄기가 쑥 자랐다.
신기해서 뽑아보니 진짜로 당근이 나왔다!









강일동으로 이사온 후부터 3년정도 텃밭 농사를 시이모님과 함께 짓고 있다.
10년 넘게 서울에서 텃밭농사를 지어오신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살뜰하게 키우고 거두어주시는 텃밭을 
우리는 그저 구경다니며 얻어먹기만 실컷 잘 얻어먹는다는게 맞는 얘기다.
이모님은 직접 키운 채소를 바로 수확해 드시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어디 가서도 이런 채소는 못 구한다는 말씀과 
약 안치고 키우니 얼마나 좋냐고 자주 말씀하신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늘 보고 해온 일이라 농사도 잘 지으시고, 건강에 관심도 많으시고, 또 무엇보다 부지런하시니 도시농업을 하실 수 있는것 같다.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지으신 올해 우리 텃밭은 암사동 도시텃밭에 있는 200여팀중에 '우수텃밭'으로도 선정되었다! ^^)

어느날 내가 연수에게 "연수야, 할아버지 하시는 것 잘 보고 잘 배워~"하고 말했더니 이모님이 "그거 배워서 뭐하게~?"하시면서 웃었다. 
"저희집 텃밭농사 연수가 책임지고 지어야죠~"하고 말하며 나도 웃었지만 
이 시대에 농사일을 배운다는 것이, 어린 아이에게 권하고 격려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다수인 시대가 된 것이 
씁쓸하고 마음 아팠다. 








농사를 왜 짓는가.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고, 부모님 봉양하고, 저축도 하고, 놀러도 좀 다닐 수 있을만큼 돈을 벌기위해서 농사를 짓는다면
이제 그런 것은 더이상 농사로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고, 날로 그렇게 되어간다.
도시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어 제철의 싱싱하고 맛있는 반찬거리를 얻는 정도, 
아이들이 채소가 이렇게 자라는구나.. 신기하게 바라보고 배울 수 있는 정도,
그리고 어른인 우리가 자연 가까이에서 땀흘리며 생명을 키우며 작은 보람과 명상과 기쁨을 얻는 정도...
그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오락거리, 소일거리, 여흥, 구도의 도구말고
농업이 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농업이 생업이 될 수 있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올해 채소값이 참 한결같이 쌌던 것 같다.
조금 값이 오를만하면 그 품목을 금세 수입해오니까 결국은 어떤 농산물도 싼 값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면 소비자에게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산자는 버티지 못한다.
값이 폭락하는 농산물에 대해서는 정부도, 시장도 무대책이다. 
채소를 밭째 버리고 수확하지 않고, 자르고 파헤쳐 또 다른 채소를 심어본들 어짜피 생산단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다가 결국 농민들은 두손 두발 다 드는 것이다. 
그 논밭을 메워 집짓겠다는 사람에게 파는 것이 제일 나은 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많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내년부터 쌀시장을 전면개방하겠다고 이 정부는 당당히 선포를 했다. 
고율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쌀산업 포기'에 다름아닌 '쌀시장 전면개방'을 선언하고 나선 나라한테 과연 국제기구가 잘도 '아구 무서워라'하고 고율의 관세에 동의해주겠다 싶다. 
쌀이 지키고 있던 이 나라 농업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쌀농사를 지어오셨다. 

어린시절에는 학교에서 나온 가구조사지의 아버지 직업란에 '회사원'같은 좀 폼나는 것 대신 '농업'이라고 쓰는 것이 조금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철든 뒤에는 내가 농민의 딸이라는 것, 아버지가 농부라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고 좋았다. 


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아이들중에 누군가가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연을 사랑하고, 계절과 생명의 순환과 이치를 알고, 부지런하고, 새벽에 풀숲에 내린 이슬을 밟으며 벼를 살펴보고, 밭을 가꿀 수 있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이들에게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내 손으로 내 먹을 것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나도 지금은 도시의 6평짜리 작디작은 텃밭 하나도 겨우 구경만 할 뿐이다.


농민은 점점 줄고 있다.

우리 땅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의 품목도 아마 많이 줄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3%, 그나마도 쌀 자급률이 80% 대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수치다. 

쌀시장 전면개방으로 많은 소농들이 쌀농사마저 포기한다면 우리나라는 스스로 부식은 물론 주식조차도 자급을 못하는 

그야말로 식량 예속국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먹는 전체 농산물중에 쌀을 제외한 채소, 과일, 고기 등의 식량은 단 3.7%만이 우리 땅에서 우리 농민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마저도 이제 포기 일로에 서있는 것이다.

농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그깟 쌀쯤, 그깟 식량쯤 핸드폰 팔아, 자동차 팔아 사다먹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누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을까. 

누가 남을까. 



유기농업에 평생을 바치며 한살림 생산자공동체를 꾸려온 농민분들이 계시고, 

오늘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거래로 매주 '꾸러미'를 보내주시며 자립하려는 귀농, 소농 생산자분들이 전국에 계시고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님을 봉양하며 정말로 묵묵히 귀한 농토와 농업을 지키고계신 농민분들이 정말로 많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농사를 왜 짓는가' 외람되게 묻고 싶었던 것은

이제 더이상 농사로는 먹고살 수가 없는데, 죽어라 죽어라 하는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살아라 살아라 해도 어렵고힘들고 중요한 일이 농사인데 

이런 떄에도 농사를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내가 꼭 들어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93년 우루과이라운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계화 협상의 고비들마다 쌀수입 개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농민분들의 지난한 투쟁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농민분들은 그만한 힘이 없으실 것 같다.

올해 7월 농림부장관이 달랑 기자회견 한번 열어 '쌀시장 개방 방침'을 발표했을 때 

농민단체에서는 세종시 정부청사 앞에서 상여를 메고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며 쌀을 뿌렸지만 

그 시잔은 우리 아버지가 받아보시는 농민신문의 1면에만 나왔을뿐 어느 TV방송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마침 순천 야산에서 발견된 유병언씨의 사체 소식과 그 아들의 체포 과정만 요란하게 방송에 넘쳐났을 뿐이다.

나는 고향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는데 '세월호 사건 100일'이기도 했던 시점이라 특별법 제정이나 100일 지나도록 지지부진한 진상규명, 실종자 수색 등에 대한 여론을 덮기위해 유병언 일가에 대한 언론보도가 집중되는 것 같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었다.

서울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때 같이 덮어졌던 정말로 중요한 또 한가지는 바로 '쌀시장 개방'이었다는 것을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못했구나... 혼자 후회했었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도하협상장 옆에서 쌀시장개방을 반대하는 한국농민 이경해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나라라,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300명씩 떼죽음을 당하고, 

공연을 관람하다가 또 죽고 하는 나라라 이제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그만 옷처럼 입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한 명의 죽음은 안그래도 숨쉬기 힘든 사람에게 그저 작은 짓눌림 하나 더 얹는 정도 같이 느껴지지만

2002년의 그 분 생각이 나는 요즘 문득문득 다시 나곤했다. 

그 자라에 내 선배 한분도 함께 있었는데.. 그 충격과 상처를 어떻게 안고 살아갈까. 자신이 보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목숨을 내놓는 장면과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어했던 가치들이 또다시 종잇장처럼 버려지는 현실속에서 그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