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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09 설국의 새끼곰 8
umma! 자란다2011. 12. 9. 20:47








강릉에 눈이 많이 왔다.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눈은 오늘 오전까지 쉼없이 내렸다.

연수는 새끼곰처럼 눈속을 쏘다녔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나갈 때마다 양말과 장갑을 흠뻑 적셔서 돌아왔다.

따뜻한 아래목에 바지를 말리고 밥을 먹고 귤을 좀 까먹다가
새 바지와 양말을 찾아입고 또 나갔다.

눈속에 뒹구는 연수는 새끼곰같았다.
곰은 겨울잠을 잘텐데.. 어쩌다 잠 안든 새끼곰이 생전처음 보는 눈풍경에 신이 나서 정신없이 하루 논 걸로 해두자.








아침 7시. 아직 날도 채 밝기 전.
마당에서 눈을 치우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따라나오는 것으로 눈과의 첫만남 시작.









감기 걸릴까 걱정하시면서도 아빠는 연수에게 딱 맞는 작은 삽을 하나 찾아주셨다.
아이들과 노는 자세에 있어 나는 늘 아빠께 배운다.









아침에 남편과 전화하면서 '눈이 한 40cm는 온 것 같아' 라고 했는데 뉴스를 보니 강릉에 43cm가 왔단다.
강릉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이정도 눈대중은 할 수 있다는게 뿌듯하다. ^^
내가 자라는 동안 강릉에는 80cm쯤되는 그야말로 대설이 내린 적도 몇 번 있었다.
바로 이 마당에서 80cm 눈 속에 터널을 만들던 그 기억을 어찌 잊으리.
언젠가 연수도 그렇게 해보는 날이 올까.









새끼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속으로 걸어간다.
강릉에선 이런 일을 '생눈을 헤치고 간다'고 한다. 길을 만들어놓지않은 그냥 눈밭위를 걸어간다는 말이다.









매일같이 놀던 모래언덕이 눈에 덮혀 보이지 않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새끼곰.
자... 이제부터 이 신난 새끼곰의 활보를 한번 지켜보시라.



































태어나 처음으로 이렇게 큰 눈을 만난 네살 연수는 물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리며 지치지도 않고 눈속을 뒹굴었다.
그러고도 기침 한번 안하고, 아침밥 먹으러 들어가자는 어른들의 말에 서럽고 서럽게 울면서 더 놀겠다고 졸랐다.
밥먹고 와도 눈은 그대로 있다고, 앞으로 며칠은 눈이랑 놀 수 있다고 해도 연수는 '밥먹고 오면 녹을꺼야'하면서 엉엉 울었다.









형이 밖에서 새끼곰처럼 눈밭을 구르는 동안 연호는 따뜻한 거실에서 증조할머니와 '풀~미 풀~미'하며 놀았다.
다리힘이 생긴 아기를 일으켜 세워서 흔들어주는 놀이노래는 '세상~ 세상~'이다.
아침마다 근 1시간 가까이 증조할머니와 노는 연호.
할아버지와 엄마를 키워내신 그 손길, 그 노래로 증조할머니가 오늘은 연호를 키워주고 계시다.















아침먹고 엄마는 만두를 빚으셨다.
눈오는 날 먹는 따끈한 떡만두국을 위해 엄마는 어제부터 사골을 끓이고 떡을 썰어놓으셨다.
오전 내내 눈을 치고 오신 아빠와 눈밭에 구른 어린 외손주, 그리고 멀리서 온 딸이 모두 그 뜨뜻한 사골국물에 몸을 녹였다.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보니 우리 엄마의 삶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도 엄마처럼 식구들을 살뜰하게 거두어 먹이며 보살필 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다.












뒷산 소나무숲에서 우지끈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수수 눈쏟아지는 소리가 이어 들린다.
연수도 누워서 그 소리를 들었을까.

어린 시절, 지금 집 이전에 살았던 기와집 툇마루에서 나는 눈오는 하늘과 눈덮힌 소나무들을 한없이 올려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까치 소리가 맑게 울렸던 것 같고, 그 날은 설날이어서 나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날도 눈처럼 하얀 떡국을 먹었다.
눈이 많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것이 고맙다.
눈쌓인 소나무 숲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멀리 가지 않아도, 때때로 일상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에 살았다는 것은 축복인 것 같다.










이 감촉. 나도 안다.
연수도 언젠가 눈을 보면, 그 위에 저처럼 누운 누군가를 보면 제 온 몸에 와닿던 눈의 포근하고도 서늘한 감촉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빠. 겨울마다, 눈이 올떄마다 이 마당에 길을 내셨고 또 내실 아빠.
아빠가 내놓은 길로 이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고 돌아왔지.
길을 내는 사람.. 우리 아빠. 부디 건강하시기를..!









몇번이나 눈속에서 놀아 고단해진 연수는 저녁에는 평소에 비해 훨씬 얌전히(?) 밥을 먹고, 조용히 사부작거리다 7시반쯤 일찍 곯아떨어졌다.
눈에서 더 놀겠다고, 눈썰매가 제 뜻대로 안된다고, 손발이 젖어 춥다고 오늘 낮에는 꽤 많이 징징거려 어린 손주의 눈놀이 시중을 들어주던 외할머니외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연수..
내일은 좀더 나아지려나. 그래야할텐데..

연수 이녀석, 너 크면 네살 겨울에 외할머니외할아버지 엄청 애먹였다는 거 꼭 알아야한다. 
그럼에도 그 분들이 한없이 깊은 사랑으로 너를 한없이 보듬고 다독여주셨다는 것도. 
알았거든 외가집 쪽 쳐다보고 '감사합니다'하고 큰절 한번 올리렴. 
^^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