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아 흘러흘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6.24 조르바와 함께 걷기
  2. 2016.06.10 아들과 연인 _ 모든 삶은 이야기할 만 하다 2
책/새댁 책2016. 6. 24. 10:43



'산다는 게 곧 말썽이요'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조르바가 혼자 지껄였다. 

'두목, 계산 같은 건 이제 그만하쇼. 숫자 놀이는 그만두고 저울은 부숴 버리고, 구멍가게는 문을 닫아 버리라고요....(중략)' (148-149쪽)


'하느님은 있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두목,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있다면(뭐,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목,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외다. 나는 하느님이 꼭 나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나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힘이 세고, 좀 더 돌았겠지요. 그리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있겠네. 부드러운 양피 무더기 위에 떡하니 앉아 있는데 그 양반 오두막은 하늘이야...(중략)... '제발 그만둬! 그런 소리라면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그러고는 처덕처덕 물 적신 스펀지로 문질러 죄를 몽땅 씻어 버리시고 혼령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천당으로 냉큼 꺼져라. 여봐라, 베드로. 이 잡것도 넣어 줘라!' 

아시겠지만 하느님은 굉장한 임금이십니다. 굉장한 임금이시란 게 뭡니까?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조르바가 이 심오한 객설을 지껄이던 그날 저녁, 기억하기로는,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굉장한 임금님>으로서의 하느님은 내 속에서 틀이 잡히면서 자비심 많은, 관대하고 전능하신 분으로 성숙을 거듭했다. (154-155쪽)



 

 

조르바를 읽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에는 가벼운 이야기에도 깊은 사색이 깃들어있고, 무겁고 처절한 주제 속에도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숨을 고르며 깊이 빠져 읽었습니다.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은 입에 착착 붙는 입말 그 자체여서 생생하게 크레타 해변에 저를 데려다주었고요.

 

조르바의 전반부를 읽고 있던 어느 밤, 문득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보니 노란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엷게 펼쳐진 흰 구름이 달 주위를 지나 푸른 밤하늘 멀리로 흘러가고 있었고요. 아름다웠습니다. 그 순간,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도 저 달을 바라보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달은 언제나 거기 있었지요. 우주가 태어나고, 지구와 달이 이렇게 자리를 잡은 이후,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많은 사람들이 올려다보고 그 달빛 아래를 걸었던 달이 이 밤에도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서울 강일동 냇가 옆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달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저는 많이 행복했습니다. '자연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한동안 일상에서 못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날밤은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조르바 덕분이구나.. 생각했어요.  

 

예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셋째 출산을 앞두고 밤에 냇가 옆길을 열심히 걸어다니며 운동을 했습니다. 눈이 아직 안녹아 미끄러운 곳을 피해 마른풀이 덮힌 흙땅을 밟았는데 뭉클했습니다. 흙. 이 흙 속으로 들어가면.. 지구의 중심을 지나 저 반대편 라틴아메리카 어느 땅의 흙으로 통하겠지. 그러니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흙은 지구 반대편의 흙과 이어진 흙, 내가 지구 반대편을 걷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나는 지금 아르헨티나 어디께를 걷고 있다.. 공기도 대륙과 바다를 넘어 흘러다니고, 땅은 이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밤, 어찌보면 매일 반복되는 정해져있는 일상의 틈바구니 안에서 무한한 연결감, 시공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떄는 우연히 한 생각이었는데, '조르바'를 읽으면서 문학이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새삼 알았습니다. 연결감. 세대를 넘고, 시공을 초월하는 연결감. 조르바를 읽는 동안 많이 느꼈습니다. 

 

날이 더워졌습니다. 열이 많은 아이들은 집에서 제일 시원한 곳을 찾아, 베란다 타일 바닥 위로 굴러가 잠이 듭니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와 열린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밤기운에 의지해 종일 뛰어놀아 고단해진 몸에 휴식을 줍니다. 잠든 아이들을 하나씩 방안의 이불위로 안아다 눕히면서 이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크레타 해변'에서 보내는 인생의 한 시절이, 몇 달이, 몇 년이 있기를 가만히 빌어보았습니다. 자기만의 '조르바'를 만나기를, 해변의 자갈 위에서 시원하게 잠들는 날이 있기를. 파도소리와 조르바의 산투르 연주와 이야기와 춤과 포도주와 스프 속에서 '인생에 대한 따뜻한 열정'이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적시는 날들이.

 

저에게 '조르바'는 단 한명 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이, 슬픔과 열정과 기쁨과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며 그 속에서 길어낸 보석같은 애정을 저에게 건네준 사람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저의 '조르바'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한 '조르바' 이야기를 함께 책읽은 분들께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그 분은 저희 마을 도서관 요가 선생님이세요. 올해로 나이가 일흔이세요. 유연한 몸, 씩씩한 마음, 끝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인상적인 분이세요. 주민자치센터에서 '사주명리학' 강의도 하십니다. '캘리그라피' 강사 자격도 가지고 계시지요. 쉰이 넘고, 거친 생업의 세계를 일정하게 마무리하신 뒤에 선생님은 해보고싶었던 여러가지를 한가지씩 해보셨데요. 하실 때는 꼭 '강사 자격'을 딸 때까지 하셨고요. ^^

남쪽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담배밭에서 일할때 너무 힘드셔서 '엄마, 나는 꼭 나중에 농사일 안하고, 다른 일 하면서 살꺼야' 하셨데요. 어머니가 '뭘 배워서 그렇게 할래?'하시면서도 '그래, 그럼 너는 그만 나가서 식구들 점심 준비해라' 하시면 밭일 안하는게 고맙고 좋아서, 집에와서 열심히 팥칼국수를 끓이셨데요. 그래서 팥칼국수를 엄청 맛있게 잘 끓이십니다. 저희 도서관 운영위원회때 한 냄비 끓여주셨지요. 칼국수 면도 직접 밀어 슥슥 자르신 것인데, 며느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을때 많이 끓였다가 남았다고 저희 집에 한 냄비 갖다주셔서 저는 진즉 그 맛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토요일 오전마다 도서관에서 요가하는 시간은 제가 딸린 아이들 없이 모처럼 홀가분하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예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는 동안에는, 집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나오면 되는 도서관 유아실 넓은 마루에서 요가매트에 앉아 저는 한시간 반쯤 크레타해변에 앉아있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팔 다리를 지그시 뻗고 누르며 호흡하는 힘든 시간 중에 선생님은 물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뭘까요?'

'황금?' '아이들?' 여러가지 답이 오고가는 중에 선생님이 내놓으신 답은 '자유!'

한 시간 반정도의 즐겁고도 힘든 요가를 마무리할 때 우리는 선생님이 틀어놓으신 트로트(?)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보는 거지요. 리듬을 타보려고 해도 저는 잘 안 돼요. 발도 꼬이고, 팔은 그저 막 휘젓는 수준입니다. ㅎㅎㅎ 선생님은 아름답게 움직이셔요. 한국무용과 밸리댄스도 배워보셨던 선생님의 몸짓은 가볍고 아름다워요. 신나는, 어찌보면 조금 슬프기도한 음률에 맞춰 춤을 추다가 선생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살면서 세 가지 정말 중요한 <금>이 있대요. 뭘까요?'

'소금', '황금' 요가를 함께 하는 마을 언니와 동생이 하나씩 잘 맞춥니다. 이제 제 차례인데, 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요. 역시 지혜로운 우리 언니가 마지막 답을 찾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소리지르며 선생님과 한데 모여 끌어안고 뱅글뱅글 돌며 웃었습니다.

지금! 지금!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운 적도 있었어요.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아오신 선생님은 아파트 옆 고덕천을 예전부터 많이 걸으셨데요. 때로는 외로움에 울며, 비오는 날 일부러 눈물이 가려지도록 비를 맞으며 걷기도 하셨데요. 사는 동안 괴롭고 아픈 날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쁜 모자를 쓰고 선생님이 도서관에 오시면 우리는 깔깔깔 재밌는 이야기를 주고받조으며 웃습니다. 지금. 웃을 수 있는 지금 함께 웃습니다.

겨울,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을때 우리는 작은도서관에서 작게나마 '신영복 도서전'을 열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윤독하는 시간을 가졌었어요. 우리 요가 선생님은 신영복 선생님에 대해 처음 들어보셨다고 하셨는데, <사색>의 편지글들을 읽으시면서 참 좋아하셨습니다. 탄복하고, 어린 시절 '시골 장' 이야기에 공감하고, 글씨의 '관계'에 대해 '정말 그렇다'며 좋은 작가, 글을 알게된 것을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내내 하고싶은 얘기가 참 많았어요. 좀 신기할 정도로요.. 저의 20대를 함께 보냈던 여러 그리운 이들과 많이 고민했던 주제들이 실은 100년 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 벌써(?) 썼던 내용이라는 것이 놀랍고 멋쩍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희가 굉장히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는줄 알았거든요. ^^;;;;

그래서 더 정리해두고 싶은데, 오늘은 이 정도 밖에 못 적겠어요.

다른 작품들을, 또 계속해서 읽어가면서 제의 여러 작은 경험들도 나름의 의미를, 자리를 잡아갈 수 있겠지요. 

<인문학 읽고쓰기>시간에 함께 하는 것은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인데 가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제 이야기만 보내서 죄송합니다.ㅠㅠ

다음 책, 또 함께 만나보아요.. 늘 감사합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책/새댁 책2016. 6. 10. 11:16
아들과 연인 1 - 10점
D.H. 로렌스 지음, 정상준 옮김/민음사

 

 

 

 

이야기가 될만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누구의 삶, 어떤 성장 과정, 어떤 경험도 이야기가 될 만하다. 될 수 있고, 그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보고, 그 경험 전체를 조금 떨어뜨려놓고 바라보면서 '아 이 삶에는 이런 면이 있구나' 생각하고 '나의 삶'을 그에 비춰 돌아볼 때 삶은 뜻밖의 위로를 얻기도 하고, 비통한 공감, 작은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이야기가 잘 정돈된 글로 쓰여진다면 더 수월하게, 두고두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다.

 

1910년대에 쓰여진 로렌스의 소설 <아들과 연인>을 한달 동안 즐겁게 읽었다.

읽는 동안에는 긴 이야기 속에서 조금 헤메는 듯이 고통스럽기도 했는데, 장편 소설, 고전소설들의 힘과 매력은 책을 마무리할 즈음에 비약적으로 커지는 것 같다. 중간중간 함께 책모임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게 특별히 깊이 와닿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책을 덮으면서는 긴 여행을 마치는 기분으로 내 감상의 갈피를 잡고 글쓰기도 조금은 수월해졌다.

 

<아들과 연인>의 영어 제목은 <Sons and Lovers>로 주인공 모렐 부인의 아들들(윌리엄, 폴, 아서)과 그들의 연인들을 뜻한다. 아들들이 성장하며 만나는 연인들과 그들 사이의 이야기가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어머니인 모렐 부인과 그 아들들이 맺는 깊은 정신적 관계, 성장기의 인생 전체를 통해 공유하게된 삶의 가치, 태도, 서로에 대한 깊은 의존과 애정, 그로인해 생겨난 질곡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가족간에는 어느 정도의 정신적 유대가 가능할까.

인간에게 있어 자기가 태어나 자란 가족, 가정은 어떤 의미에서든 '알'과 같다.

포근하고 따뜻한, 완벽하게 보호받는 곳으로서의 '알'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깨고 나가 세상속에서 내 발로 서야하는 '알'이기도 하다.  

 

완벽하게 따뜻한 알도, 완벽하게 엉망인 알도 세상에는 존재할 것이다.

행복뿐이거나 고통뿐인 삶도 존재하고, 순간순간 섞이기도 하고, 삶의 어느 기간은 주로 행복이, 어느 기간은 불행이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모렐 가'처럼 엄마가 '행복'을, 아빠가 '고통'을 주로 담당할 수 도 있다.

'엄마' 곁에서 절대적인 안정과 행복을 느끼고, '아빠'가 등장하는 순간 불안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형제들 안에서, 혹은 부모 전체와 아이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성장과정이 성인 이후의 삶을 떠받치는 바닥이 된다. 그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자기 모델이나 기준으로 삼아 애써 추구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배우자의 상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면..  자신의 부모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도 아빠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아내가 우리 엄마 같았으면..'하고 바랄 수 있고, 반대의 경우라면 '나는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지', '나는 아빠같은 사람이랑 결혼하지 말아야지' 할 수도 있다.

스스로 자신의 가정(의 한부분)이 이상적이라 느끼고, 너무나 깊이 의존하며 성장한 사람이 오히려 성인 이후의 삶과 관계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아들과 연인>의 주인공 폴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나에게 유사한 면에서는 슬픈 공감을 일으키고, 달랐던 부분에서는 위안을 주기도 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폴이 겪는 정신적 공황을 읽으며 나는 유교문화에서 존재했던 '시묘살이'를 떠올렸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동안 자식이 부모의 무덤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살며 부모를 모시던 의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을까.. 생각해보면 그만한 슬픔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당이 되지 않는 정신적 충격이 존재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공을 초월해 20세기 초반, 영국에서 살았던 로렌스(폴)에게도 어머니의 죽음은 정신적으로 깊이 의존했던, 깊게 결합되어있었던 존재가 사라지는, 자기 존재의 기반이, 자기가 속해있었고 성장해왔던 한 세계가 붕괴하는 것, 바닥이 무너지고 추락하는 것과 같은 상태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 충격이 작가에게 이 소설을 쓰게 하고, 소설에 폴의 이야기로 담겨있다고 나는 느꼈다.

 

어쩌면 인간에게 자기가 태어나고 속해있었던 존재와 세계가 '죽음'을 통해 사라지는 것은 오래오래, 두고두고 깊은 상처와 공포, 슬픔을 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로렌스로 부터 불과 10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가족의 유대는 많이 느슨해졌다. 자극을 주는 매체가 너무 많고, 사회에는 즐거움과 관심거리가 넘쳐나므로 우리는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적인 관계들에 대해서는 그 극진함과 집중도가 많이 약해졌다.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시묘살이는 하는 문화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슬픔과 충격의 정도가 갑자기 약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마음이 겪는 일에 우리가 더 무심해질 수 있을 뿐이다. 현대인의 삶의 여러 요소가 그런 망각, 외면, 회피를 돕는다.

그러나 조금 더 인간적 본질을 생각해보고 싶다면, 우리는 기쁨만큼이나 슬픔에도 응당한 시간을, 정신적 에너지를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붕괴 이후의 세계. 폴의 이후 삶.

궁금하고 불안하며 연민이 인다.

폴의 삶이 이야기되어서 고맙다.

읽고, 내가 생각해볼 수 있어서 고마웠다.

 

어떤 길을 걸어갈지는 그도, 나도 아직 모른다.

다만 살아갈 뿐. 때때로 아프게 추억하며.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