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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5 겨울, 골목길에서 만난 이웃들 10
이웃.동네.세상2008. 12. 15. 13:31

똑순이 독감 예방접종 하고 왔습니다.
새댁네가 사는 아파트의 옆문을 나와 경사가 심한 작은 골목길을 조심조심 걸어내려가서
큰길만나 조금만 걸어가면 똑순이 다니는 동네병원이 있습니다.

쌀쌀하지만 아주 춥지는 않은 겨울 공기를 마시며
병원이 한적한 때에 다녀오려고 오전 10시쯤 집을 나섰습니다.

골목은 조용합니다.
얼마전 구멍가게가 미용실로 바뀌었는데
작은 유리창에 A4지 출력해 붙여놓은 광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일반커트 4000원 학생커트 3000원'
참 착하고, 그래서 짠한 가격입니다.
새댁도 머리가 많이 길었는데.. 담에 여기와서 자를까 생각하며 안을 슬쩍 보니 손님이 2명 앉을까 말까 합니다.
신랑이랑 세식구가 오면 다 들어가 앉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은품 증정' 멋진 궁서체로 누군가 쓴 붓글씨도 붙어있습니다.
개업기념 수건이 좀 남았나봅니다.

병원이 있는 큰길에서 젊은 청년이 어깨를 움츠리고 새댁 옆을 지나가는데
어디서 밤을 샜나.. 까칠한 얼굴이 맘에 걸립니다.
새댁도 예전에 밤 많이 새고 다녔는데.. 그러면 얼굴이 꼭 저렇게 푸석하고
아침밥도 못 먹은 빈속은 참 허하고 그랬습니다.
저 청년에게도 이 겨울은 참 추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시험과 취직 준비로 힘들어하는 후배들의 얼굴이 낯선 청년의 어깨위로 오버랩됩니다.

주사를 맞고 한바탕 운 똑순이는 돌아오는 길에도 어깨때 안에서 코 잠이 들었습니다.
새댁이 자주 가는 큰 슈퍼에 가려면 좀 멀리 돌아가야하기 때문에
아까 내려온 골목이 시작되는 근처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러
새댁먹을 우유랑 똑순이 장난감에 끼울 건전지를 사기로 했습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계산대로 쓰는 책상앞에 앉아계시던 나이많은 주인아저씨가
아기안은 새댁을 보고 황급히 일어나 문을 잡아 주십니다.
이것참.. 서비스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우유냉장고문도 열어주시고, 건전지도 손수 갖다주십니다.
뭘 좀 더 사야할것만 같습니다.
작지만 물건들이 가지런히 잘 정리된 낡은 가게, 바코드 읽는 기계가 없는 가게는 참 오랫만이구나.. 생각하며
'혹시 이 가게에 오늘 내가 첫손님인건 아닐까' 문득 궁금했습니다.
문을 열어주시는 아저씨의 배웅까지 받으며 새댁, 담엔 뭘 좀 많이 사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골목은 오르막이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똑순이를 안고 걸었습니다.
꼭 달팽이가 된 것 같습니다.
앞에서 할머니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내려오시는게 보입니다.
한 분은 허리가 아주 심하게 휘셨고, 옆에 할머니도 만만치않지만 그래도 좀 덜 굽어지셔서
친구(인지 언니인지..) 할머니를 지탱해주고 계십니다.
두 분은 새댁 가까이까지 훠이훠이 엉금엉금 내려오셔서는 전봇대를 붙잡고 허리를 펴며 한숨 돌리십니다.

그 곁을 지나가며 옆 골목을 바라보니
검은 얼굴의 키큰 청년이 헌옷수거하는 트럭옆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왔을까.. 네팔? 파키스탄?
아주 짧은 순간 새댁과 눈이 마추쳤는데.. 조금 불안하고 슬픈 빛이 그 눈에 반짝했던 것 같습니다.
새댁만 그렇게 느꼈을까요. 
그 청년을 보니 얼마전에 똑순이 병원에서, 그 날도 6개월 예방접종하러 간 길이었는데
"예쁜 얼굴에... 세 군데나.. 아 너무 속상해요.." 라고 띄엄띄엄 간호사에게 얘기하던
예쁜 목소리의 젊은 아시아 여성이 생각났습니다.   

국제결혼이 참 우리 가까이에 와있다는 것을 새댁은 똑순이를 갖고 실감했답니다.
산부인과를 다니며 이주여성인듯한 젊은 엄마들을 종종 봤거든요. 
한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듯 그이들의 곁에는 강보에 쌓인 아가를 안은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꼭 함께 계셨지요. 
한국어를 잘못하는 그들을 대신해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간호사로부터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듣고, 
다음에 병원올 날을 듣고.. 함께 돌아가는 가족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이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은것 같았어요. 
아직은 많이 낯선 땅, 낯선 가족들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직후의 마음이 오죽할까.. 멀리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울까..
제 나라 제 땅에서도 갓난아이 키우다보면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데
이주여성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새댁 혼자 속으로 생각했지요.
  
이제 소아과에 오니.. 아이들이 자란만큼 그이들의 한국생활도 길어져서일까..
서툴지만 밝은 목소리로 아기가 아파 놀라고 속상했던 순간을 얘기하는 그 엄마를 보며 새댁도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아이와 엄마 둘만 병원에 온 것도 그이의 한국생활 적응도를 보여주는듯해 반가웠구요.
물론 예전 산부인과에서 본 이주여성들을 다시 본 것이 아님에도(다시 봐도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렵겠지만..) 
괜시리 혼자 반가워하며, 그이들도 지금 이 엄마처럼 밝게 지내고 있기를 속으로 빌었습니다.
그 엄마와 새댁은 서로의 아이를 바라보며 '참 예쁘다'고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엄마들의 만국 공통인사입니다.
그 녀석은 돌쯤 됐는지 아장아장 걷더군요. ^^

낯선 땅에 와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그 청년 곁을 지나며
그가 부디 건강하게, 무사히 일을 마치고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 곁으로 잘 돌아가기를 저도 바래보았습니다.
한국은 이주노동자들에게 결코 호의적인 나라가 아닌데.. 
그의 슬픈 눈동자가 마음에 자꾸 남습니다.
블로그에 쓰는 것이 주저될 정도입니다. 혹시라도 그 청년에게 해가 되는건 아닐까.. 조심스럽습니다.

짧은 길이지만, 별 외출이 없는 새댁에게 
똑순이 병원다녀오는 길은 
천천히 걸으며 이웃들을 만날 수 있는 드문 시간입니다.
시간은 겨울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춥지않게.. 우리 이웃들이 모두 이 겨울을 무사히 나고 봄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가을, 똑순이 유모차 태워 산책하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난 새입니다.
이녀석은 겨울을 무사히 잘 나고 있을까요..? 어디서든 건강히 있다가 봄에 다시 만나자..!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