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 언덕'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3.29 백양로, 그 길 위에 서면 14
이웃.동네.세상2011. 3. 29. 15:38



3월 29일은 특별한 날이다.
90년대 후반, 연세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거나 학생회.동아리 활동을 하며 20대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1996년 3월 29일. 종로 거리에서 '등록금인상 반대, 교육재정 확보'를 외치며 시위중이던 청년 한명이 경찰의 진압에 쫓기다 목숨을 잃었다.
연세대 법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스물한살 노수석 군이었다.

나는 그 뉴스를 고3교실에 틀어져있던 TV에서 보았다. 워낙 먼 현실이라 깊이 생각할 여력은 없었지만 짧은 순간에도 앳된 청년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내가 이 교정에 처음 들어섰던 봄에 그의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2월, 연수를 데리고 오랫만에 다시 백양로를 걸어보았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시절의 짝꿍 친구와 학교에서 보자고 약속하고 나선 길이었다.

쌀쌀했지만 백양로에는 벌써 봄이 시작된 것 같았다.
마침 신입생들이 오리엔테이션을 떠나는 날이라 백양로에는 푸른 깃발을 앞세우고 무리지어 길을 내려가는 학생들의 행렬도 있었다.
14년이다. 벌써.. 새내기라는 풋풋하다못해 이제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워지는 저 고운 이름을 내가 지녀보았던 때로부터 벌써 14년이 지났다. 

오늘 노수석 열사의 15주기 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아침에 문자로 들었을 때,
그 문자 안에 '아버님'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있는 바람에 나는 한달도 더 전에 다녀왔던 학교나들이 사진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아버님 어머님이었던 그 분들 얼굴이 떠올랐다.
해마다 봄에 우리와 중앙도서관앞 민주광장에서, 한열동산에 마련한 노수석열사 추모공간에서, 법대 강당에서 만나셨던 분.
그리고 광주 망월동에서 버스 한대를 겨우 채워 내려간 우리를 버스 두대쯤 되는 인원이 먹어도 남을만큼의 밥과 국과 떡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
해마다 줄어가는 인원이 죄송해 고개 못들던 우리에게 괜찮다고, 이렇게 기억하고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한명씩 손잡아주시고, 등 두드려주시던 분들. 
부모님이 장만해주신 음식들을 전세버스에 싣고 학교에 돌아오면 학교안에서 살던 수배자들이 며칠동안 먹는 든든한 양식이 되었었다.     



















9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은 참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87년 6월항쟁으로 대표되는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시대가 지나가고,
동구의 몰락이라는 이념적 충격속에 소비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가 서서히 의식 전반을 지배해가던 90년대 초반. 그래도 그때까지는 대학은 적어도 다른 생각과 대안적 가치들이 존중받던, 어찌보면 대학 울타리안은 무한생존경쟁의 살벌한 전장에서 살짝 보호받고 있던 시절도 지나
IMF와 함께 시작된 90년대 후반의 대학은 더이상 한 시절, 술이든 운동이든 연애든 어떤 것에 젊음을 던졌어도 졸업할때쯤에는 걱정없이 취직자리를 찾아들어갈 수있는 성역일 수 없었다.    

그 9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 조직들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됐고 학생회장이 된 친구들은 수배자가 되어서 4년, 5년씩 대학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정보과형사들이 운동권 학생들의 뒤를 미행하고, 어머니들은 학교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셨다. 때로는 그 어머님들이 투사가 되어 오래오래 집회와 농성을 하시기도 했다. 
80년대 운동을 다룬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이나 1980년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나 봄직한 이야기들이 내 20대 초중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80년대가 아니라 90년대 후반, 새천년이라는 2000년대 초반에 벌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참 낯설고도 살벌한 시대의 희극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문과대로 올라가는 이 길에는 '골고다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왼편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적혀있는 '동주시비'가 있다.
늦잠 많은 대학신입생은 아침9시에 시작하는 교양수업 출석체크에 늦지 않기위해 늘 뛰어야했다.
8시 50분쯤 신촌 전철역에서 시작된 달리기는 정문, 백양로, 본관앞 삼거리를 지나 이 골고다언덕에서 정점을 맞는다.
여기서 포기하면 오늘도 지각이나 결강이고, 이 고난을 견디고 올라가 인문관 강의실에 앉으면 다행히 학기말에 D는 맞을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정문부터 걸어올라온 연수의 씩씩한 걸음도 여기서 고비를 맞았다.
운동화에 들어간 돌멩이를 터는 것으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올라간다. 아직 바보계단도 남았다. 그리 올라가는 모든 사람의 보폭을 어정쩡하게 만드는 낮고 넓은 계단.























가만히 쳐다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참 사연도 많은 문독앞 복도.
 
저 벽에 담쟁이가 저렇게 무성했었나?
친구에게 물으니 예전에는 저정도는 아니었단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만 나이든게 아니고 담쟁이도 그 시간을 함께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갓난쟁이 키우는 후배가 아기를 안고 달려왔다.
단대 커플이었다 결혼한 둘이 중 남편은 문헌정보학과를 나와 지금은 학교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다. 그도 내 친구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전화를 했더니 얼른 나와 우리들에게 밥을 사주고, 새로 만들어진 도서관 건물도 구경시켜주었다.
그리고는 제 아내와 아기도 불러낸 것이다.























강의실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았던 과방.
노수석.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지금도 걸려있었다. 까마득히 어린 것만 같은 09학번, 10학번 후배들 지금 이 방의 주인인 낯모르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경찰의 과잉진압 과정에서 숨진 노수석 열사는 2006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뒤늦게라도 국가권력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보상에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고통, 나는 차마 다 짐작도 할 수 없는 그 아린 상처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엄마가 늘상 붙어살다시피 했던 과방 소파에 연수가 벌러덩 드러눕는 것을 보고 우리는 웃었다.
"옛날에 너희 엄마가 그 소파에 앉아서 수업도 참 많이 빼먹었지..." 
그랬지... 내가 대학시절중에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좋은 선생님들의 수업을 더 열심히 안 들은 것이다.   
소파에 앉아 기타를 배우고 짜장면을 시켜먹고 민중가요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부르다 밤이 되면 
이 소파가 이대로 하늘을 슝 날아서 나를 언니오빠와 함께 자취하던 반포집까지 좀 데려다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이 아득했다.  












원숭이 동산앞에서 친구와 사진을 찍었다.
이 날. 7, 8년만에 함께 한 학교나들이 뒤로 친구는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우리가 농활을 다녔던 경북 상주의 농촌마을로 아예 살림집을 옮긴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다 건강이 많이 안좋아진 친구는 잠시 쉴 곳이 필요했다.

우리와 함께 백양로에서 웃고 울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노동운동을 하기위해 노동자가 된 선배들과 친구들. 농민이 되어 농사를 짓고있는 사람들..
더러는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기도 하고, 통일운동이나 장애인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땀흘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어서 늘 고마운 생협에서 일하는 후배들도 있고, 진보정당에서 일하는 이도 있다.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공부를 계속 하면서 꿈을 향해 힘든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친구들도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가정을 꾸리고 코흘리개 아이들의 엄마아빠가 되었다.
바쁜 직장일에 쫓기고 어린 아이의 뒤치닥거리 하느라 참 정신없이 사는 와중에서도 아마 오늘 하루는 잠시 멍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은 그들 모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백양로에 한번씩은 다녀왔을 것이다.











학교 다닐때, 나는 백양로를 아무 일없이 천천히 한번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일정에 쫓겨 늘 종종걸음치며 오르내렸던 백양로를 아무 약속도 없이, 바쁜 일도 없이 천천히 걸어가보는 것. 
백양로 양쪽으로 오고가는 학생들과 삼삼오오 무리지어 앉아 웃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하릴없이 걸어보는 것.
서른넷, 이번에도 어린 연수가 찻길로 뛰어나갈까 마음졸이느라 꿈꿔왔던 걸음은 걷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내가 아주 나이가 많아지면 그런 날이 올까..
그때는 천천히 한열동산 벤취에 오래 앉아 보리라. 벚꽃이 날리는 청송대 길까지도 천천히 걸어보리라.
눈물이 난다면, 아마도 서글프거나 무엇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백양로에서 보냈던 내 이십대의 꿈결같은 날들이 애틋해서, 우리가 함께 꾸었던 그 꿈들이 아름다워서일 것이다.    


다시 아버님 어머님 생각을 한다.
그 분들이 내게 보여주셨던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오늘 저녁, 가서 뵙지는 못해도 멀리서 감사하다고, 건강하시라고... 마음으로 인사드린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