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들2014. 9. 4. 21:49





조용하고 작은 절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월문리에 있는 '묘적사'.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셨다는 천년고찰이다.


마음이 꽉 막혀 문득 숨쉬기가 갑갑하다 느껴질 때면 

천천히 가서 조용한 절집의 댓돌 한 끝에 오래도록 앉아있다 오면 좋겠다.








낮은 지붕, 낮은 계단. 

묘적사는 소박하고 정갈했다.

애써 소박하려 노력한 마음이, 손길이 느껴질 만큼.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 
아름다운 절이라는 이야기를 연수 친구 엄마에게 듣고 언제든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며 살았다.
어느 계절에 가도 참 좋다고 했었는데
여름 끝물, 초록이 조금은 지친듯한 지금 가보면 어떨까.. 싶었다.










작은 절집 묘적사는 몇해전에 가수 이효리 씨가 '템플 스테이'를 하고 간 것으로 유명(?)한 것 같다.
이효리 씨는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여러 기부활동을 진행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리해고 노동자들이나 파업노동자의 가족들이 손해배상과 가압류 등으로 고통받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에도 동참하는 연예인이라 나도 참 좋아한다.
환경과 생명, 농업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대안을 담은 글들을 실어온 계간지 '녹색평론'의 정기구독자라고도 해서 나는 '나, 이효리랑 같은 잡지 구독하는 사람이야~'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한 적도 있다. 
여기서 만나니 또 반가웠네. ^^   










묘적사 해우소 맞은편에는 차고와 함께 큰 개집이 두칸이나 있고, 
사자도 닮고 곰도 닮은 무지 큰 개들이 네 마리나 살고 있다.
누워서 졸다가 우리 애들이 다가가자 겨우 눈을 뜨고 '꼬마들이군.'하고 시큰둥하게 눈을 다시 감는 녀석, 
잠시 일어섰다가 다가오지는 않고 '구르릉, 구르르릉'하고 소리내던 녀석..
곰돌이, 사자, 복실이, 구릉이 라고 이름을 붙이고 한참 그 앞에서 놀았다. 
아이들은 절에서 여기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수로도 좋아했다.
묘적사 옆 계곡도 작지만 깨끗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절 안에도 대웅전 옆부터 작은 수로가 절 한켠으로 졸졸 흘러가 절 대문 앞까지 깨끗하게 씻어주고 있었다.










스님들 하얀 고무신이 깨끗해보였다. 
옛날 내 증조할머니도, 할아버지할머니도 하얀 고무신을 신으셨던 것이 생각났다.
뜨락에, 댓돌위에 놓여있던 흰 고무신.
복잡한 우리 일상에도 정갈한 정돈이, 색채의 유혹을 쫓지않는 담백한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묘적사 연못.
빨간 고추잠자리 여러 마리가 연못 안 물풀 줄기끝에 앉아있었다.

신기한 곤충들을 많이 보았고, 아기 다람쥐 여러 마리가 키큰 나무위 구멍속에 있는 집에서 나와 숲속을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모습도 아이들과 오래 구경했다. 

아이들은 부처님이 누군지 잘 모르고, 절이 무엇하는 곳인지도 잘 모르지만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넓은 흙마당을 오고가고, 수로를 따라 걸어보며 낯선 풍경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나는 오래도록 고개를 숙이고 빌었다.

성당에 가면 성모상 앞에서, 절에 가면 부처님 석상 앞에서 나는 한참씩 눈을 감고 서서 미음속으로 하고싶은 말들을 한다.

내 마음 안의 소요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감정들을 내가 버릴 수 있기를 빌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좀 더 의연히, 잘 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를 빌고, 

지금 이 순간,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묘적사 석굴암 안에는 '세월호 희생자 극락왕생'을 비는 꽃등이 부처님 제일 가까운 곳에 걸려있었다.


추석을 맞는 마음이 편치 않다.

봄에 세월호 참사가 있고나서 여름이 지나고 이제 가을이다.

계절이 두번이 바뀌도록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다.

국회의 국정조사도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고, 그저 시간만 자꾸 흘러서 유야무야 사건이 덮여지고 잊혀지기만 바라는 것일까.

'제 아이가 왜 죽었습니까' 하는 절박한 물음을 붙들고 겨우겨우 버티며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과 농성을 마다않고 애쓰는 유가족들을 '더 많은 보상을 바라고 떼쓰는' 사람들로 왜곡하는 파렴치한 여론몰이에 넘어가고,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언제 또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르는 위험하고 부도덕한 사회나 세상을 '어쩔 수 없지 뭐, 원래 그런걸'하고 체념하고 무심해져 버릴까봐 

내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럴까봐 걱정이다.


기억하는 일, 

이 무서운 사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꼼꼼히 따지고 살펴서 하나씩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일.

그 것이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수사권, 기소권을 가진 특별법 만이 제대로 진상을 밝힐 수 있고, 잘못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고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얼렁뚱땅 또 대충, 정치인들의 입발린 말들에 넘어가서는 미래를 장담하기 힘든 시절을 우리가 살고있다. 

140여일 전, 4.16 세월호 사고 직후, 무엇이라도 다 할 것 처럼 얘기했던 정치인들이 아닌가.

특별법도, 철저한 진상규명도, 대통령의 유가족 면담도 언제든, 얼마든지 다 할 것처럼 얘기했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무엇때문에 안되고, 무엇은 어렵고 하며 차 떼고, 포 떼고 그저 또 유야무야 제 몸 다치는 일 없게 넘어가자고 한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고, 무심해지면 안된다.

유가족은 스스로 돈(보상)의 유혹,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정말로 존경스럽게 맨앞에서 이 아프고 두려운 시절을 버티고 있다.  

보상으로 유혹하는 것은 정치권이고, 그 유혹을 유가족이 받아들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그 자신이 거대권력이고 기득권세력인 언론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광장과 거리를 지키고, 진실을 알리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멀리있어도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응원하며 함께 하고 있다.

그 마음이 그저 집에서 아이들 키우며 지내는 내게도 느껴진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람들, 진실과 정의와 연민과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존재가 우리 사회의 큰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세월호 이야기가 길었네..

부처님도 아마 지금 같은 마음이실거다.


눈 올 때쯤, 그때는 조금더 가벼운 마음으로 묘적사에 다시 가 볼 수 있기를 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주말,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강릉에 다녀왔다.


영동지방에 25년만의 폭설이 내렸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고향집에 가끔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곤 했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대체로 밝았지만 때때로 지치고 두렵고 걱정되는 기색이 느껴졌다. 

넓은 마당에 학생들 다닐 길을 치고,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계속해서 눈을 치우느라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눈이 계속 쏟아지던 2주 동안은 어린 아기들 데리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 속에 가겠다고 해도 부모님은 절대 못 오게 하셨을 것이다.

그 2주간 남편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자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토요일마다 출근을 했다. 

이래저래 부모님 곁에 가볼 수가 없었던 나는 걱정만 하면서 지냈다.








친정집은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외진 곳에 있거나해서 고립된 것도 아니고, 집이 낡거나 약해서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눈이 퍼붓는 동안 연로하신 할머니만 바깥 출입을 못 하셨을 뿐, 엄마 아빠는 마당에 길을 내고 찻길로 나가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농협마트에 가서 장도 봐오시며 다행히 아주 큰 어려움은 없이 지내셨다. 

하지만 그 시점에 강릉에 있었던 누군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끝도 없이 눈이 쌓이고, 어렵게 뚫어놓았던 작은 길마저 다시 또 눈속에 묻혀 사라져 버릴 때.


멀리 있는 자식들은 모두 전화기로만 가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까운 이웃들과도 하루나 이틀 걸러서야 한 번쯤 눈 속에서 걱정되는 안부만을 주고 받을 수 있을 때. 

 

비록 아무 힘도 안 되고, 눈치우는 것도 크게 거들 수 없고, 어린 자식들 잔뜩 데려가 되려 일거리나 더 늘려놓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얼굴을 보러, 

엄마 아빠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고, 손을 잡아보고, 안아보고 싶어서 강릉에 너무 가고 싶었다.


다행히 지난 주말에는 남편이 바쁜 일이 마무리되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연수가 감기를 심하게 앓았지만 거의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들은 모두 건강했다. 

토요일 아침, 어쩔까 망설이던 우리는 전격 결정을 하고 후다닥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엄마, 눈이 바다같아!!"

외가집 마당에 도착한 연호가 내게 소리쳤다.


^^

바다같았다. 

햇볕에 녹으라고 아빠가 헤쳐놓은 눈들이 마당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 좋아하는 연수가 그냥 있을리는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눈더미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자기 키보다 높은 눈더미 위에 올라선 연수는 살짝 무서워보였다. 

이내 발이 푹푹 빠졌고, 부츠도 눈 속에 깊이 박혀버려 연수는 금방 발을 적시고 집으로 철수했다.

대신 따뜻한 방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할아버지가 사다주신 간식을 냠냠 먹으며 제가 좋아하는 케이블 만화를 실컷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아픈 뒤에 이보다 좋은 휴식이 있으랴... 따뜻한 아랫목에 군것질거리 쌓아놓고 마음껏 TV보며 뒹굴거리기. ^^

오고가는 길이 멀어 고단했지만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보통 때보다 훨씬 즐겁고 여유로운 주말이 열린 것이다. 







대신 부모님은 엄청 바빠지셨다.ㅠㅠ


괜찮다고, 안 와도 된다고 해도 

걱정된다며 늘 못와봐서 애달파하던 막내딸이 

마침내 갑작스레 떠났다고 통보하자

두 분은 잠시 대책회의를 하시고는 신속하고 민첩하게 대식구 맞을 준비에 돌입하셨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연제의 첫돌을 축하하는 외가집 생일잔치. ^^;;


연제의 돌은 내가 어머님께 부탁드려 상주 시댁에 가서 하기로 했다.

연제의 돌잔치는 집에서 꼭 해주고 싶었다. 

집에서 돌상차려 따뜻하게 아이의 일년을 축하해주고, 아이를 잘 보살피고 지켜준 가족들과 집과 좋은 기운들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리는 시간으로 소박하고 뜻깊게 보내고 싶었다.

서울 우리집에서 하면 제일 좋겠지만 혼자 준비할 엄두가 잘 안났던지라 어머님께 부탁드렸고

어머님께서 그러자고 들어주셔서 다음 주말에 시댁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잘하는 일이라고, 어른들 곁에 가서 잘 하고 오라고 하셨던 친정부모님은

막상 연제 생일이 가까워오자 '외가에서도 뭘 좀 해줘야할텐데..' 하고 나와 통화할 때마다 걱정을 하시더니

마침 우리가 내려온다 하니 '아이구 잘 됐다, 이참에 외가집에서도 연제 생일상을 차려주자'고 의논을 하셨던 것이다.









수수팥떡과 삼색 경단을 올려놓고 

고운 과일들도 접시 가득 담은 예쁜 상 앞에

연제를 세워주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형들도 신이 나고, 연제도 싱글벙글 하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증조할머니도 함빡 웃으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증정되는 금반지! 두둥~~~! ㅎㅎㅎ








'금은 역시 깨물어봐야 제 맛이지~! 냠냠...' 맛을 아는 연제. ㅋㅋ








이런 순간은 자주 없다.

살면서 아주 드문 행복하고 고마운 순간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는 것이다. 

비록 사진에는 없지만 이 순간, 카메라를 들고 '하나 둘 셋~!'하며 웃고 있는 수호제 아부지까지 모두 함께 말이다.









외가에서 차려준 제 생일상을 잘 받고난 연제는 흐뭇하게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은 모두 제설작업에 동원!


두둥.... 이걸 모두 치우라고?!!!

ㅎㅎ


아이들이 외가에 올 때마다 신나게 놀던 모래언덕 자리가 주위의 눈속에 움푹 들어가보일만큼 눈이 많이 왔다.









두 삽뜨고 사진부터 챙겨서 찍는 나는야 전시행정가.. 아니 블로거. ^^;;;


웃고있는 아빠 모습이 좋다. 

어릴때, 그러니까 1m가 넘는 폭설이 왔던 25년전 그 때를 나도 기억한다.

12, 3살 무렵이니까 꽤 컸을 때인데 그때도 나는 이 집, 이 마당에 서있었다. 

연수가 올라섰던 차고옆 눈산에 그 때 나는 눈터널을 팠었다. ^^

그리고 우리집에서 지금은 마을회관이 있는 방앗간터까지 아빠가 길게 눈썰매 길을 다져주셔서

비료푸대를 깔고 신나게 눈썰매를 탔었지..

신나고 즐거웠던 그 겨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밝고 좋았다.

눈썰매를 타며 깔깔 웃던 볼이 빨간 소녀가 어느새 서른일곱 세 아이의 엄마라니.. 시간은 정말 장난꾸러기다.

  








어쨌든 나는 눈 좀 쳐본 뇨자!

연제 자는 한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마당 한 구석과 텃밭의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구덩이의 눈을 좀 판 것으로 

그래도 나도 눈 치는 것 거들었다고 있는대로 생색을 내고 

눈을 보며 엄마가 타오신 뜨거운 믹스커스 한잔도 분위기 제대로 내며 마시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강릉에 사는 친정언니 부부가 점심을 사주었다.

해물찜과 칼국수를 먹었는데, 국수까지 먹었으니 연제 생일은 제대로 한 셈이라고 엄마가 말해 모두 웃었다.

커피를 마시러갔던 카페 근처에 '순개 습지'라는 작은 습지가 있었다. 

강릉은 습지 복원사업이 한창인 것 같았다. 

저탄소녹색성장 시범도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빙상 경기들을 비롯한 여러 경기가 열리게되는 강릉.

대규모 토목사업은 필연코 환경을 해치기 마련이지만 '녹색'이라는 도시의 지향이 부끄럽지 않도록 새롭고 대안적인 발상과 크고 작은 노력들이 조금씩이라도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연수야, 잘 나아라.

주말동안 눈 속에서 많이 놀고 돌아와 고단해했던 연수는 오늘에는 거의 다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든 감기 잘 견뎌내고, 엄마 고향에도 함께 잘 다녀와준 연수. 고맙다. 까불고 밥 안먹는다고 화내서 미안..ㅠㅠ 









서울로 떠나기 전, 잠시 경포바다에 들렀다.

연호는 파도가 가까이 올까봐 무서워 자꾸 돌아보느라 사진기를 쳐다보질 못했다.


언젠가 남편이 어떤 블로그에서 읽었다며 해준 이야기를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한달에 한번, 주말 이틀 부모님 집에 내려간다고 해도 24일, 명절에 며칠 더해도 30일이 안된다는 얘기.

그러니까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님과 일년에 한달, 365일중에 30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렇듯이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있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엄마가 언제 오시나'하고 시장간 엄마를, 들일하는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고

주말에 잠시 예쁘게 차려입고 명승지나 유원지에 가서 엄마 옆에 형제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앞뒤로 올망졸망 올라 타고 즐겁게 시골길을 달렸고

엄마의 포근한 품에 안기는 것이, 아빠의 든든한 손을 잡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기쁘고 좋았었다.


그런 시절을 거쳐, 

그 시절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자랐다.

숱한 위험과 어려움이 따르는 거친 세상에서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준 그 분들이 있어서 우리는 유년기를 마치고 어른이 되었다.


한 때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보금자리이자 은신처이자 넘고 싶은 벽이기도 했던 

그 모든 것이었던 부모님의 품을 

가끔, 아니 자주 보고싶다.

이제는 날로 약해져가시는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든든하고 포근한 그 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고,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이제는 내가 낳은 아기들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토요일 아침, '엄마아빠가 그리 보고싶나?' 하면서 처가로 달려가준 남편, 고마워..^^









눈 덮힌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집 마당에 서서 오래오래 손흔들어주시던 엄마 아빠 할머니 모습을 마음에 담고.



눈이 소리없이 잘 녹기를 빈다. 

눈 속에 일어났던 많은 아픈 일들의 상처는 봄이 온다고 쉽게 아물지 않겠지만..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과 젊은이들

사랑으로 사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봄햇살이 고루 찾아와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설을 잘 쇠고 왔다.


어른들과 떨어져 살고 자연의 흐름에도 많이 무딘 도시의 엄마다 보니 

명절이나 절기같은 우리네 세시풍속에 대해서도 많이 둔감해진다.

설은 차례지내고 세배하고 떡국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 날이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며 옷가방안에 고운 한복을 챙겨넣었다. 

하지만 그 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 큰 명절을 맞는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한 며칠 아이들 데리고 시댁에 가서 지내다오는 시간. 

제사음식 준비며 대식구가 한데 모여 여러날 먹고 지내는 일로 고달프기도 하겠지만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랫만에 한자리에 모이니 반갑고 좋은 연휴.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종종거리며 큰 가방 여럿에 짐을 싸고 세 아이 씻기고 옷입혀 차에 태우고 숨차게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명절이 시작되고보니 마음에 다가오는 일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참 많이 컸고, 고왔다.

오랫만에 만난 사촌들끼리 다정하게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시아버님어머님께는 다섯명의 손주가 있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결혼한 아가씨네 아이들 둘, 그리고 우리 아이들 셋. 

아직 결혼 전인 도련님이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더 많은 아이들이 명절에 할아버지할머니를 찾아올 것이다. ^^


시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신다.

남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어린 삼남매가 환하게,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이 많다.

행복하게 자랐구나.. 부모님이 참 예뻐하며 키우셨구나.. 싶었다.

살림은 어렵고 일은 고단하셨겠지만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시부모님이 삼남매를 바라보며 이렇게 환하게 많이 웃으셨구나.. 짐작하곤 했다.








결혼전에 돌잔치에 가서 처음 보았던 시댁의 큰조카가 어느새 아홉살이 되었다. 

귀엽고 잘생긴 큰조카는 여전히 개구쟁이지만 그래도 이젠 살짝 의젓한 느낌도 든다. 

내 큰아이 연수가 일곱살인 것도 신기하다.

내 삶에 흐르는 시간을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며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20평 남짓한 작은 주공아파트인 시댁에 부모님, 우리 가족, 아가씨네 가족, 도련님이 모두 모이면 12명.

큰 방, 작은 방, 거실과 주방마다 아이들과 어른들로 넘쳐난다. ^^

남편이 학생이던 무렵에 임대로 들어와 2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은 낡고 좁다.

하지만 어머님이 워낙 깔끔하게 닦고 정리하며 살아오셔서 따뜻하고 깨끗하다.


처음 결혼해서 시댁에 왔을 때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우선 집이 너무 작아서 놀랐고, 집안 곳곳에 버리지 못한 오래된 세간들이 층층이 쌓여있어서 놀랐고, 그럼에도 또 그 낡은 집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고 늘 정리해온 부지런한 손길이 느껴져서 놀랐다.

가장 놀라운 것은 분명히 좁고 답답해보이는 집인데 좀 앉아있다보니 의외로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시댁에 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시댁에서 자고 나면 왠지 '아.. 내가 지금 부모님 품에 와서 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천천히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참 사랑하셨다. 

하나하나 사랑하셨고, 다정하셨다. 

삼남매는 다정하게 자랐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하시는 오토바이 가게에 붙은 단칸방에서 서로 살을 부대끼고 뒹굴고 안고 아끼며 자랐다.

커서도 여전히 집은 작고 형편은 어려웠으므로 서로 많이 챙겨주고 배려하고 염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명절에 만나면 어머님은 늘 어린 아기들을 키우고있는 나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셔서 제사음식 장만부터 설겆이까지 거의 내게 안 맡기고 본인이 다 하려 하신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명절날 오후에 친정으로 오는 아가씨는 역시 새언니인 내가 힘들까봐 설겆이며 우리 큰아이들 밥먹이는 것까지 다 살펴준다. 

명절지나고 좀 한가한 다음날 오전, 어머니가 아까워서 못 버리고 쌓아둔 낡은 세간살이들을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명절 지내느라 어질러진 부엌도 정돈하고, 좁은 수납공간들을 두루두루 훑어 숨통을 좀 틔워놓는 것도 아가씨다. 

명절이면 우리는 모두 아가씨네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함께 놀 사촌형누나를 기다리고, 남편은 좋은 술친구인 매제를 기다리고, 나는 속깊고 고마운 시누를 기다린다.  

얼굴도, 마음도 곱고 예쁜 딸인 아가씨가 오면 낡은 집은 더 환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다. 

집은 더 복닥거리고, 잠자리도 다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함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명절마다 두 밤, 세 밤씩 한데 모여 자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물론이요, 고모네와 삼촌이 한해 한해 더 살갑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형제가 다정한 것이 참 큰 복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시댁 형편이 넉넉치 않고,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늘 힘들게 몸써서 일하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걱정되지만 

가족들이 서로에게 다정하고 화목하게 지내왔다는 것은 정말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 참 큰 내 복임을 명절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모의 둘째인 예쁜 현서는 새해 다섯살, 우리 연호는 네살이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째들이 요리 조리 몰려다니며 깔깔거리고 장난치고 뒹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명절이면 아침 일찍 찾아가 함께 차례를 지내고 오는 큰댁에는 새해 세 살이 된 아기가 한 명있다. 

촌수로는 우리에게 조카뻘이지만 나이는 우리와 동갑인 큰댁 조카부부는 우리보다 두어해 일찍 결혼했지만 오래도록 아이가 없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명절마다 우리집에는 손주들이 하나둘 늘어 네 명이 되도록 큰댁에는 아이가 없는 것이 마음이 쓰이곤 했는데 

참 기쁘게도 연제 태어나기 얼마 전에 큰댁에도 첫 손주가 태어났다. 

돌지난지 석달쯤 된 그 아기가 올 설에는 한복을 곱게 입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세배 흉내도 내서 두 집 가족이 모두 크게 웃으며 세배돈을 고사리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

어른은 아이를 보살피고, 아이들은 제 힘껏 뛰놀고 웃으며 자라고, 어른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게 되는 것.

그게 참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가족이 모두 모인 명절에는 새삼 깊이 느끼게 된다. 

 

아이 키우고 돈 벌며 사는 일이 힘들고 정신없어 부모들은 별다른 새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새해의 감흥을 따로 찾을 여유도 없지만 

문득 이렇게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의 훌쩍 자란 모습을 볼 때

'아 나의 지난 시간이 저 속에 녹아있구나.' 생각하게 되고 

'올해도 저 아이들을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키워야지..' 언뜻 다짐하는 것으로 새해의 각오도 세워보게 된다. 









순둥이 막내와 할아버지. ^^

낯가림이 별로 없는 연제는 이번 명절에 할아버지와 짝꿍이 되어 잘 놀았다. 


말수가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한 경상도 분인 아버님은 조금 큰 아이들은 잘 데리고 놀지 못하신다. 

마음은 참 다정하신데 표현을 잘 못하시니 아이들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하시는 것이다. 

시댁 식구들이 모일 때면 아버님은 한번씩 큰 손주들 네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다녀오시며 슈퍼에서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과자를 사주시곤 했다. 

아이들도 그걸 알아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으레 장난감을 한번은 사주시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조르고 한다.  

그것이 거의 유일한 아버님의 애정표현이고, 큰손주들과 어울리시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돌도 안된 연제같은 아기 손주에게는 아버님도 그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실 수가 있다.

안아주고, 얼러주고, 좋아하시는 유행가 노래에 맞춰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흔들며 어깨춤도 추시고, 입에 맛난 것을 넣어주시면서 행복해하시고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참 좋았다.

연수는 어려서도 낯가림이 심해 할아버지께 거의 가지 않았다. 

연호는 지금의 연제처럼 아기시절에는 할아버지께 잘 갔지만 네살이 된 올해는 할아버지가 안아보려고 해도 몸을 빼고 도망을 다녔다. 어느새 많이 자라서 고집도 궁리도 커진 연호인지라 오랫만에 뵌 조금 엄한 인상의 할아버지께 금방 살갑게 대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자주 뵙고, 많이 같이 놀고 하며 다정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아이들이 할머니할아버지를 푸근하게 가깝게 느낄텐데.. 

내가 그걸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죄송했다. 이제 연제도 좀 컸으니 좀더 자주 시댁에 내려오고 해야지..   

연제가 자라서도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 할아버지 품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연수랑 연호도 할아버지와 차츰 더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면서 할아버지를 다정하게 대했으면 좋겠고.












아버님은 속정이 깊으시다.
내게도 그러시고, 아들들과 딸, 손주들을 대하시는 것을 보면 그 다정함을 알겠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께 속상해하실 때가 많다. 
명절이, 삶이, 아버님이.. 어머님을 고달프고 힘들고 속상하게 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어머님이 화를 내실 때 아버님은 별 대꾸는 않으시지만 좀 슬퍼보인다.
그 풍경이 결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님을 뵐 때 내가 가장 당황스럽고 마음 아픈 풍경이었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으니 젊으셨을 때는 아버님이 참 화를 많이 내셨었단다.
그러더니 몇해전부터는 화를 더이상 안 낸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화를 잘 내시던 시절을 마음 졸이며 견뎌내셨던 어머님은 
이제는 그 화를 아버님께 돌려주시려는 것처럼 한두마디 말끝에도 아버님께 울컥 화를 내시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익숙치 않아서 긴장하는 것일뿐
어머님아버님 사이에는 크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저 일상적인 대화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자주 조마조마했다.

자식들은 모두 아버님을 좋아한다. 
야무진 딸인 아가씨가 아버님께 술 좀 적게 드시라, 엄마 말 좀 들으라며 아버지께 이런저런 얘기를 시원하게 잘 하지만 
큰아들인 남편은 그런 말을 않는다.
대신 아버지와 함께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형편에서, 어딘가 비빌 언덕도, 특별한 기회도 없었던 
오토바이와 집짓는 기술 밖에 없었던 한 남자가 
어여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세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때로 큰 실수와 실패도 겪었고,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들을 참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자란 자식들은 
지금도 그들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나이든 아버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어머님은 아마도 아버님과 함께 살아온 긴 세월동안 우리가 미처 짐작하기도 어려운 많은 일들을 겪으시면서 애정 그 이상의 수많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니
지금 이렇게 아버님을 대하고 계실 것이다.
시간은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고, 삶은 계속 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께 힘이 좀 되어드리고, 그래서 부모님이 몸도 마음도 조금더 편안하고 푸근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보살펴드려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더 그렇게 할 것이다. 
손주들이 할아버지할머니께 드리는 행복만큼이나 다 큰 자식들도 부모님께 행복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작년에 고모네가 시댁의 TV를 3D 입체영상도 볼 수 있는 큰 것으로 바꿔드렸다. ^^

손주들에게 3D 안경을 씌어주시는 아버님의 즐거움이 내게도 전해졌다. 

이런 풍경이 있어서 명절이 좋다.








설날 큰댁 차례, 우리집 차례가 끝나고 나면 오후 느지막히는 어머니의 친정인 청상에 간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엄마인 청상 증조할머니께 세배를 했다.

우리도 외할머니께 세배를 하고 아이들과 똑같이 빳빳한 천원 새 지폐 한장씩 세배돈을 받았다.

청상할머니께 받는 천원은 늘 내게 복돈으로 여겨져서 나는 그 돈은 쓰지 않고 내 책상서랍속 지갑에 간직해왔다.

올해도 복돈을 받았다. 기뻤다. ^^ 아이처럼, 할머니께 받는 세배돈이 좋다. 










청상 진외가에 가면 아이들은 신이 난다. 
장작이 산더미같이 쌓인 어두운 광에 앉아 증조할머니와 같이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불을 떼보기도 하고..








고모부와 사촌, 육촌들과 어울려 시골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한다. 









다리 위에서 냇물에 물고기가 있나.. 살펴보는 중이다.


길에서 올려다보이는 앞산 산등성이에는 외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거기서 '조기 내 증손주 녀석들이 뛰어가는구나' 하시며 굽어보실 것 같다.

논밭과 내를 건너 바라보이는 앞산에 봉긋하게 솟은 외할아버님의 무덤은 청상 외가집 마당에서도 잘 보인다.

예전에는 누구나 시외할아버님처럼 

자기가 태어나 태를 묻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살던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자리를 마련하고 누워 잠들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여러번 집을 옮기며 자라고, 고향이라 부를만한 동네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또 어느 낯선 자리에 누워 잠드는 대다수 요즘 사람들의 삶이

문득 참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공간의 안정감. 

어린 시절을 한 동네에서 오롯하게 보낸 나에게는 이것이 참 크게 다가온다.

지금도 강릉 고향집에 가면 내가 태어난 집 자리가 지금 집과 밭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고 

옛집의 눈에 익은 뒷산의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수런수런 반갑게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마음 깊이 찡한 감동과 평화를 느끼곤 한다. 

청상은 비록 시댁이지만 내게는 그런 친정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곳이다.

명절마다 찾아와 외할머니를 뵙고 시골집의 돌답과 감나무와 대나무숲과 앞산을 바라보면 왠지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워지곤 한다.


외할아버님은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만난지 얼마 되지않아 그저 호감만 조금 가지고 있을 때 전화통화를 하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며칠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어른들을 좋아하는 나는 잘 모르는 어르신이지만 그 날 일기장에 짧게 명복을 빌어드렸었다.

그 후 남편과 결혼을 하고

외가에 와서 할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새롭다.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알던 어르신처럼 '안녕하세요, 할아버지'하고 인사드리게 된다.









아이들은 굽이굽이 시골 마을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어릴때 시골에서 자란 우리 고모부가 

솜씨좋게 물고기를 여러 마리 잡아오셨다.

따라갔던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른다.

패트병 입구를 잘라 거꾸로 끼우고 그 안에 된장 한숟갈을 넣은 어항(?)을 작은 냇물에 쳐두었더니 

아이들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아홉마리나 잡힌 것이다. ^^


손을 넣어 만져보고, 세숫대야를 흔들어 공기를 섞어주던 연수와 연호는 

'엄마, 물고기 우리집에 데려가서 키우면 안 돼?' 했지만

물 좋고 공기 좋은 청상을 떠나는 것은 이 물고기들에게 못할 일.

국 끓여먹을 것도 아니어서 

한참 외갓집 마당의 세숫대야 안을 헤엄치던 물고기들은

고모부와 일군의 조무라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저희 살던 냇물로 돌아갔다. 










시골집에 오면 나만큼 신나는,

나보다 할 줄 아는 것은 훨씬 많으신 

시골출신 잘생긴 우리 고모부. ^^

아궁이에 군밤도 구워주고, 고구마도 척척 굽는다.

남쪽 섬 출신인 사촌고모부는 아이들 데리고 강아지풀 꽃다발 만들어가며 동네 한바퀴 산책도 다녀오시고..

시골집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다. 

TV만화 틀어주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 지켜보는 것말고 

추억과 이야기거리가 될만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바쁘시다.

가마솥에서는 대식구가 먹을 육계장이 끓고..








서울이모님은 명절 지내며 어수선해진 외가의 부엌과 마당을 통털어 살림살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신다.

외할머니께는 따님이 세 분 있는데, 이 분들이 모이면 정말 대단하시다.

어마어마한 청소와 정리를 척척 해내고, 어머어마한 양의 먹거리들을 끝도 없이 내놓고, 그리고 또 어마어마한 양의 짐보따리를 꾸려놓으신다.

도시의 자식들 가져가라고 외할머니가 마련해놓으신 먹거리들을 필요한 집집으로 분배해서 싸고 

혼자 지내시는 외할머니가 찾기 편하게, 드시기 편하게 부엌을 정리하고 음식을 마련해놓는 손길이 다라라락 움직인다.  

두 분의 며느님도 명절을 치르며 참 많은 일들을 하시지만

모두 모여 있을 때보면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도 명절이면 모두 엄마 곁에 모이는 

이 댁의 세 분 따님들이 척척 가장 익숙한 손놀림으로 집 안팍을 돌보는 것이 느껴진다. 









외할머니는 어마무시하게 많은 자손들을 위해

이 집에서 가마솥으로 도토리묵을 한 다라, 두부를 한 다라 손수 만들어두셨고

떡국떡을 또 엄청 많이, 배추와 무를 또 이만큼 땅속에 묻어두고(이건 가을에), 고구마에 밤에, 간장 된장 고추장에,

엿과 땅콩을 넣어 강정을 또 이따만큼 손수 만들어놓으셨다. 

그리고 따로 튀밥은 어린 연제 먹으라고 우리집으로 또 한봉지 싸놓으셨다.    

두부만들며 나온 비지도 또 봉지봉지...


아이들 옷 챙기고, 어른들드릴 선물 조금, 용돈 조금 챙겨 내려오는 것이 명절 준비의 전부인 내가 

외할머니가 이 시간을 위해 들이시는 공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자손들의 새해를 열어주기 위해 몇날 밤, 몇날 날을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얼마나 애를 쓰며 보내셨을까.


 








설 연휴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청상 외가에 갔다. 

상주시내에 있는 시댁에서 청상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가니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매일 새로운 친지들이 오고가며 함께 뭐 맛난 것을 먹자 부르고, 외할머니께 무엇을 받아오고, 가져다드리고, 또 아이들이 놀러를 가고 하느라 빠질 날이 없었다.  

마침 날도 따뜻해 마당에서 놀고 먹고 치우기에 참 좋았다.


그런데 작은 집과 마당 가득히 북적하던 자손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다시 할머니 혼자 남으시면 갑자기 너무 고요해진 집에서 쓸쓸하시겠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돌아오며 얘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할머니께 전화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돌아온지 일주일이 되도록 못 드렸다.ㅠㅠ









오랫동안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썼던 2014년의 설 이야기를 이제 끝내야겠다.

처음 컴퓨터의 사진 폴더에서 이 사진을 작게 봤을 때 나는 어머니와 큰댁 아주머니가 우리집에서 제사 지낸 뒤에 함께 설겆이하시는 사진인줄 알았다. 

그리고는 이걸 내가 찍은줄 알고 '에구.. 정말 일도 참 안 하더니만 어른들 일하는 사진찍을 여유까지 있었구나, 욱' 하고 살짝 민망해했다.

그런데 클릭해서 크게 보니

이게 왠 걸... 어머님 옆에 있는 사람이 나였다. 

나는 내가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인줄 몰랐던 것이다. ㅠㅠㅠㅠ

게다가 저 파마머리 하며.....

나는 정말로 과수원농사와 젖소 농장까지 크게 하시는, 우리 어머니보다 나이도 많으신 양촌 아주머니인줄만 알았다. 엉엉.


연제 키우며 젖을 많이 먹여서인가, 보는 사람마다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해서 나는 내가 정말로 살이 많이 빠진줄 알았는데 

역시 얼굴살만 빠진 것이지 몸의 골격은 삼형제 안고 업고 하며 키우는 엄마 아니랄까봐 어깨며 허리며 무슨 역도선수만큼 우람하네....

한참을 충격먹고, 착각한게 웃겨서 혼자 웃고 하다가

우리 어머님이 워낙 갸냘프셔서 내가 더 우람해보이는 것이란 생각도 해보았다.

그도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내가 뚱뚱하긴 뚱뚱한 것이다.

새해를 열며 스스로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서른일곱의 나는 이렇게 생겼구나.

 

어머님은 올해 설을 지내며 안방의 큰 침대를 버리셨다.

결혼하고부터 시댁에 내려갈 때면 어머님은 늘 시댁에서 제일 아늑한 공간인 안방을 우리에게 내주셨다. 

아버님은 평소에도 거실의 매트에서 주무시고, 어머님만 안방에서 주무시는데 

우리가 가면 어머님은 안방을 우리에게 주시고 어머님은 작은 방이나 거실에서 주무시곤 하셨다.

안방 침대는 낡았지만 튼튼했고 포근해서 식구들 모두 다 거기서 잠자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방방 뛰며 놀았고, 남자 어른들이 한가한 시간에 살짝 낮잠자는 곳도 그 침대였다. 

하지만 나는 연수가 아주 어렸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침대 밑에서 잤다.

침대와 장롱 사이에 어른 한사람 누울 만한 공간에서 어린 연호 젖을 먹이며 함께 잤고, 

연제가 태어난 후에는 연제 젖 먹여 재우고, 엄마 찾아 침대 밑으로 내려온 연호까지 어찌어찌 겨우 끌어안고 재우느라 좁은 공간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다.

거실에서 자면 조금더 넓긴 하겠지만 아기가 어려 밤에 자주 깨니 다른 식구들 자는데 방해도 되겠고, 좀 춥기도 해서 

거실은 늘 아가씨 가족과 부모님이 주무시고 우리는 안방, 도련님은 작은방을 썼다.

명절에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어머님은 집이 좁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이런저런 의논을 구하셨다.

좀더 외곽의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터에 새로 집을 짓자, 아니다, 이 집을 리모델링 수준으로 깔끔하게 고치면 공간이 좀더 넓어질거다...

주로 이 세가지 안이 내가 결혼하고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명절마다 도마에 올라서 설왕설래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실행은 잘 되지 않았다.

선뜻 움직이기 힘든 형편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명절 때가 아니면 부모님 두 분이 지내시기에는 전혀 좁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익숙하고 좋은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어떻게 이 논의의 결론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님은 우선 더는 안되겠다 하시며 내가 아이들과 청상 외가에 가있던 시간에 안방의 침대를 내다 버리셨다.

작은 방의 잘 쓰지않는 작은 책상과 역시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정수기도 이번에 같이 정리하셨다.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이 삶의 절대적인 자세가 되어있는 어머니께서 멀쩡한 물건들을, 게다가 어머니께는 요긴하고 좋은 물건을 버리시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많은 며느리가 불과 몇 밤이지만 불편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좀 편하게 자게 해주시려는 어머님 마음이 정말 감사했다.



가족이 특별한 것은 삶을 함께 살기 때문인 것 같다.

때로는 밉고 서운하고 싫은 순간도 있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있다.

슬픈 일도 함께 견디고, 기쁜 순간도 같이 맞으면서 점점 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많이 느낀다. 

형제가 있어서 처음부터 좋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싫고 밉고 싸우다가도 또 같이 웃고 뒹굴고 놀면서 점점 닮아가고 진하게 정이 드는 것. 

그게 형제이고, 가족인게 아닐까.  

결혼과 함께 새롭게 생긴 가족들인 시댁 식구들은 이름은 '가족'이지만 실제 함께 지낸 세월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느끼기가 힘들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은 쌓인다. 새롭게 사귄 친구와도 7년이면 긴 시간이고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될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어머님아버님은 정말 많이 노력해주셨다. 나를 좋아해주셨고, 아이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로 사랑하고 계시다.

이제는 나도 많이 다가가야할 때인 것 같다.

내 블로그를 보시는 어머님이 이 글을 보시면 '뭐 그리 부끄런 일까지 다 적었냐' 하실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 것이 내가 시댁 식구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오래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 관심가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게 된다.

솔직하게 쓰려고 노럭한다.  

내가 쓴 것을 나는 또 마음에 담는다. 

그래서 쓰는 것이 내게는 노력하는 것이 된다.



설이 잘 지나갔다.

부모님, 가족, 고향, 형제들, 아이들, 자연, 삶... 많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좋은 한 해를 살아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3. 11. 1. 00:33


아이들이 오래 감기를 앓았다.

중간에 나와 남편도 한차례씩 옮아 몸살과 기침감기로 고생을 했다. 

연수는 어린이집을 많이 쉬었고, 밤에는 아픈 세 아이가 번갈아가며 깨는 바람에 내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낮에도 밤에도 좀처럼 쉴 짬이 안나는 날들이었다. 집안일로 시댁에 내려갔다 온 주말을 제외하면 나는 아픈 아이와 집을 지키고 남편은 다 나은 아이들 데리고 바깥바람 쏘이며 조용히 몇 번의 주말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한낮에는 여름처럼 무덥던 초가을이 다 지나가고 어느새 낮에도 찬바람이 불고 노란 나뭇잎들이 비처럼 떨어지는 깊은 가을이 되어있었다. 


한동안 하늘이 정말 아름다운 날들이 계속 되었다. 아픈 아이들 안고 집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매일 조금씩 물드는 나뭇잎들과 구름 한점 없이 푸른 하늘이 눈이 부셨다. 아파도 밖에서 놀고싶어하는 아이들 따라서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면 그 푸른 하늘만 한참 쳐다보고 있어도 기분이 한결 좋아지곤 했다. 

아이들 감기가 거진 다 나아간다 싶던 어느 일요일, 오랫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람들처럼 나는 마음이 한껏 밝아져서 세 아이들 데리고 남편과 길을 나섰다. 두물머리가 한 눈에 보인다는 절, 수종사에 가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지 못해 소식 궁금해하고 걱정해주셨던 이웃들께 이 사진들로 인사드리려고 한다. 우리.. 잘 있다고. 세 아이들, 아픈것 잘 이겨내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노라고. 보고싶다고. ^^







수종사는 남양주시 조안면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찰이다. 

서울의 동쪽 끝, 강일동에 살고부터 한강을 자주 보고 그 강을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보는 일도 많아졌다.

남들은 어렵게 한번 시간내서 드라이브삼아, 여행삼아 찾아올법한 길을 동네 마실나가듯, 가까운 마트가듯 쓱 가게 된 것이 외곽에 살아서 누리는 좋은 점이다. 

미사리와 덕소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팔당대교 즈음부터 한강은 아파트 그림자를 벗어나 산의 푸른 빛을 담고 반짝이는 깊고 아름다운 강이 된다. 두물머리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가까이 가면 한강은 습지이기도 했다가, 그 안에 여러 섬을 담고 굽이굽이 흐르는 넓고 유려한 곡선의 강을 보여준다. 

팔당생협과 슬로우푸드문화관이 있는 수종사입구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수종사 일주문까지 우리는 차로 올라갔다.

버스를 타고 와서 정류장부터 베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았는데 그 모습이 부럽고, 그 곁으로 흙먼지 일으키며 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죄송했다. 

어린 아가들 데리고 가는 길이라 어쩔 수 없다 생각했지만 미안하고 좀 부끄러웠다. 아이들이 좀 크면 우리도 평지에서부터 우리 발로 걸어서 올라가리라.. 그 전에 또 오게 되면 그래도 조금은 더 아래쪽에 차를 세우고 좀 더 많이 걸어가야지..^^;   








일주문 앞에 있는 작은 기념품가게에서 산 빵을 연호는 꼭 제가 들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는 정말 한참동안 잘 들고 걸어갔다. 일주문에서 절까지도 어린 아이 걸음으로는 꽤 먼 거리인데 두 돌을 지나며 아기티를 벗고 어린 아이 티가 물씬 나게 된 연호는 제법 의젓하게 잘 걸었다. 아빠가 반쯤 안아주고, 마지막 오르막길은 조금 위험하기도 해서 내내 안고 올랐지만 그만하면 세살치고는 훌륭한 여행자였다.







연제 아기띠해서 안고, 때때로 연호 손 잡고 연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걷는 산길.

세 아이와 함께 '걸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세 아이와 '함께' 키 큰 나무들이 가득한 숲길을 걸어가는 기분은 참 좋았다. 

오래된 숲의 푸른 나무들은 아름다웠고, 어린 나무들처럼 내 곁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고맙고 흐뭇했다. 

지나온 일상은 참 힘들고 고단했는데, 이렇게 찬란한 숲속에 너희들과 함께 서보니 그 시간들이 모두 소중하고 빛나는 과정임을 알겠구나. 











딱따구리 소리를 나도 처음 들었다.
닥 닥 닥 닥 조금 둔탁한 듯 하면서도 또 어쩌면 가볍게 나무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
연수 연호가 모두 귀기울여 들었고, 아빠가 정성껏 사진을 찍어주었다.







오랫만에 큰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선 남편은 이 날 나와 아이들 사진을 아주 많이 찍어 주었다.

본래 하늘이 이렇게 맑고 날씨가 좋아서 두물머리 풍경을 잘 볼 수 있는 날도 드물 거라며 망설이는 나보다 앞장서서 수종사 행을 결정한 남편이었다. 

모처럼 경치좋은 곳에 가니 풍경사진을 열심히 찍으실 줄 알았더니 식구들 사진을 정말 열심히 찍었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잘 나온 사진을 오랫만에 갖게 되었다.

아이 셋 낳고 키우느라 머리 손질도 제대로 못하고, 세수도 겨우겨우.. 옷도 대충대충 입는 영 관리 안되는 서른여섯 아줌마지만 

고운 아기 품에 안고 활짝 웃는 모습을 이렇게 빛나게 찍어주는 남편이 있으니 전욱은 행복한 여자네..^^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한강.


수종사 바로 아래있는 계단으로 된 가파르고 긴 오르막길은 그 위에 도착했을때 보게 될 풍경에 대해 미리 무척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했을 때

탁 트인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기대 이상이다.















셋째 젖먹인다. 















이 날 연수, 씩씩하게 참 잘 걸었다. 


연수를 생각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여러 곳을 씩씩하게 걸어주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게 대부분 연호 태어난 뒤의 일이니 연수가 세 돌이 지난 후다.

연호는 내년 여름이면 세 돌이 된다. 

그때쯤엔 두 형제가 함께 잘 걷겠구나. 

연제는 걸음마를 할 테고.

그러면 우리의 여행은 또 새롭겠구나.








운길산 수종사.

세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기쁨을 미리, 아주 달콤하게, 쵸코릿이 가득 든 상자를 살짝 열어 한 개 맛본 기분이다.

하지만 오랫만의 산행에(10kg 아가까지 안고-.,-) 돌아와서는 다시 엄마아빠는 병이 났고 아이들도 잘 나아가던 감기가 다시 쿨쩍..

연이어 지난 주말엔 시골에서 농사짓는 대학선배네로 친구들 여러 가족과 함께 1박2일 여행을 다녀와서 또 모두 감기 창궐..ㅠㅠ


빛나는 가을이 한 고비 넘을 때마다 쉽지않고나.

그래도 간다. 우리는. 힘내서. 





+ 혹시 이 글을 보고 '수종사'를 찾아가고자 하시는 분을 위한 팁.

점심은 조안IC 바로 옆에 있는 '기와집 순두부'가 맛있습니다. ㅎㅎ 직접 만든 뜨끈한 순두부 국물, 착한 가격, 맛있는 나물 반찬. 줄이 엄청 길지만 집이 커서 아주 오래 기다리진 않았답니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사랑받았던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가끔 우리 친정부모님을 떠올리며 '내가 참 복이 많구나.. 우리 엄마아빠같은 부모님을 만났으니..'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무슨 일이 잘 안되면, 내 우유부단한 성격이나 짧은 생각으로 덜컥 큰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이런저런 고질적이고 헤묵은 원인들을 다 끄집어내서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이게 다 울 엄마아빠 때문이야..ㅠㅠ'하며 애꿎은 엄마아빠를 탓한다. 
그런데 얼마전 문득 '우리 엄마아빠같(이 침착하고 꼼꼼한)은 분들이 어쩌다가 나같이 덜렁거리고 속썩이는 딸을 두셨을꼬...'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죄송해하다 못해 엄마아빠를 측은하게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내 나이도 삼십대 중반을 넘었다.
요전에 '민들레'를 읽다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이라는 작가가 '내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이 부모님 탓이라고 원망하는 태도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버려야합니다'라고 쓴 것을 읽고 한참 웃었다.
그래.. 나도 이제 그만 해야할 때가 되었어.. 하고. ㅎㅎ


우리 부모님이 이 글을 보시면 많이 억울하실 것이다.
사실 나처럼 말 안듣는 딸도 드물텐데.
스무살 이전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나는 단지 모범생스럽게 자랐다는 기억만 가지고 있지만 그때도 엄마아빠께 꾸중도 많이 맞고 걱정들은 일도 많을 것이다)  아마 지금 김연수를 보건데 필시 나도 조렇게 엄마아빠 말 안듣고 뺀질뺀질 까불거리던 미운 꼬맹이였을 것 같고, 
스무살 이후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엄마아빠 말씀을 안듣고 내가 하고싶은 일들만 하며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도 왜 저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내 부모님들이 내게 늘 참 큰 분들이어서 그랬다.
그 말씀대로 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말씀을 늘 아주 많이 의식하고 살았다.
싫든 좋든 많이 의식하다보니 때때로 부모님의 재촉에 쫓겨 마음이 급해지고, 조바심나서 실수하기도 했다고, 그게 내가 부모님 탓을 하는 내용들이다.
 
구체적인 삶의 여러 사안에 대한 생각이 다르더라도 
마음으로는 늘 깊이 사랑했고, 그런 내 사랑을 전해드리고 싶었고, 또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나보지 않았다.
부모님 말대로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바램이란 테두리에서 아직은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다. 
(요건 내 생각이고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실지도...^^;;)

그래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속상한 상황이 내 삶에 벌어질 떄 
실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한 일이고, 내 결정과 행동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하는 일들인 것이 분명한데도
어린 아이 투정부리듯, 6살 김연수가 뭐든 잘 안되면 '엄마 떄문이야!'하고 말도 안되게 화내는 것처럼
똑같이 나도 '엄마아빠 때문이야' 하고 억지로라도 한 끄트머리 원인은 부모님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나말고 누구라도 한 명은 탓할 사람이 있어야지.. 하는 심정인 것도 같다.
영향이 깊었든, 압력이 거셌든.. 어쨌든 결정은 늘 내가 했으며, 내 인생은 내 선택과 행동의 결과인 것인데.
 
억울하시겠다. ^^
나도 김연수가 뭐든 엄마아빠탓이라며 말도 안되는 억지쓸 떄 우스우면서도 화가 나던데 
우리 엄마아빠도 그러시겠네.. 
그래도 김연수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무려 서른여섯살이나 된 자식인 나는 이제 부모님 탓하는 일은 고만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원래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지만... 
기왕 쓴 이야기의 결론은 그래서 이제는 탓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런 말도 안되는 탓하기를 그만 하려면 이제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원하는데로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고 내게서 비롯된 일들에 대해 책임져야하고.. 

 
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냐면.... 
사랑받고 왔다는 얘기를 하려다 나온 것이다. 
아이들도, 나도. 

다른 부모님들도 다 그런지 모르겠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아주 매력있는 분들이시다, 적어도 내게는.
여기서 말하는 매력은 타인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란 면에서 권위와도 비슷하다.
닮고 싶고, 따르고 싶다.
사랑이 깊고, 부지런한 분들인 엄마아빠는 우리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손주들에게도 참 극진하시다.
마음으로 의지하고 싶고, 언제나 나를 위해 손을 내밀어주는 분들.
어린 손주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게임을 하고, 자전거를 태워주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향긋한 할아버지의 머릿기름으로 단정하고 예쁘게 손주들 머리를 빗겨주고 로션을 발라주시는 분들.


깊은 사랑을 받아보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말썽꾸러기 김연수가 외할아버지가 조근조근 일러주시는 말씀때문에 조금은 철든 모습을 보일만큼.
엄마도 속상해서 떠먹이다 만 밥을 여섯살 연수에게 한숟갈 한숟갈 떠먹여주시던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연수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강릉에서 지냈던 지난 일주일 동안  
몸과 마음을 모두 포근하게 다독여주시는 어른들의 정과 보살핌 속에
아이들도, 나도 무척 행복하게 지내다 왔다.

아이들에 대한 정이 깊으시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어하시는 외가 어른들께 다녀오면 
아이들은 오래도록 어른들을 그리워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아이들을 늘 반갑게 맞아주는(엄마아빠는 대개 졸려서 새아침을 맞아 싱싱하게 깨어나는 아이들한테 좀더 자라고 윽박지르거나, 종달새같이 재잘거리며 걸어오는 말에 비몽사몽간에 시큰둥하게 대꾸하기 일쑤인데...ㅜㅜ) 외할머니와 
해님이 많이 올라 아침 찬기운이 좀 가실 때쯤이면 맑은 공기 마시라면서 형들은 물론 어린 연제까지 따뜻하게 안고 마당에 데리고 나가 나뭇잎들 만지게 해주시고, 깔깔거리며 뛰게 해주시는 외할아버지.
이불 속에서 어린 시절처럼 맘껏 달콤한 게으름을 부리다가 뒤늦게 일어난 엄마가 세수하고, 아침상 차리는데 거드는 시늉을 하는 동안 
연제는 증조할머니 품에 폭 안긴채로 두 형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앵기댕기 가매꼭지 올라가다가 따깨똥!'하는 다리세기 놀이를 재미나게 하고
증조할머니 쳐다보며 벙글벙글 웃고 뒤집다가 '따로마' 하며 세워주시는 손길에 신나서 펄쩍펄쩍 뛰던 
사람 많은, 아니 아이들과 잘 놀아주시는 어른들이 많은 외가의 아침풍경.. 
자란 후에 우리 아이들은 기억할까.
연수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6년동안 여름 겨울로 한번씩 외가에서 일주일이나 이주일쯤 지낼 때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이 풍경을 세세히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속의 따뜻한 기운들은 아마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서 어른이 된 후에도 외가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포근해 질 것이다.

외가에서 돌아온지 나흘쯤 지났다.
돌아오는 날부터 언제 외가에 또 가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이번에 심는걸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지켜보았던 배추가 크게 자라 김장할 때쯤 다시 가자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잠시 하룻밤자러 다녀오는 것이 되겠지만 
아이들도, 나도 벌써 다시 외가갈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
(우리들 때문에 엄마는 또 밥도 제때 못드시고 나 밥먹는 동안 연제 안고 업고 종종거리시고, 아빠는 연수연호 차에 태우고 경포며 아이스크림 가게로 다니느라 분주해지시고, 가까이 사는 언니도 친정으로 자주 달려와 펄펄한 세 조카 데리고 놀아주느라 고단해지겠지만...ㅜㅜ 쓰고 보니 어쩌다 나는 이리 '민폐'의 삶을 살게되었는가 싶어 더 미안하고 서글프다ㅠ)





















아침저녁으로 잠깐 아빠와 함께 있는걸 제외하면 
거의 종일 어른이라고는 엄마밖에 없는 집에서 지내는 세 아이들은 모두 어른의 정이, 다정한 눈길과 손길이 그립고 아쉽다. 
저희들끼리 껴안고 뒹굴며 부족한 엄마손, 어른품을 채워보기도 하기만 
그래도 늘 온기가 부족한 것 같다.
식구들 밥 챙기고 청소며 빨래같은 기본적인 집안일도 다 못해 종종거리는 엄마는
어느 아이 하나 오래도록 원하는 만큼 안아주고 놀아주지도 못하다가 
하루를 마감할 즈음이면 고단하기만 엄청 고단해서 아이들보다 먼저 쓰러진다. 
그런 순간이면 나도 참 어른들이 그립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
어른들이 내게 주신 사랑이 있으니까.
내가 받은 사랑이 나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욱아 네 뒤에는 언제나 엄마아빠가 있다.
그러니 어깨 쭉 피고, 가슴 펴고 당당하게 살아라..'
아빠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아직도 참 모자라고, 좌충우돌 실수하고 좌절하는 딸이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 생각하는건 
그 마음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잘 헤쳐나갈 것이다.
세상에는 더 어렵고 고되고 힘든 일도 얼마나 많은데
세 아이 키우는 일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처럼 징징거리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들을 생각해야겠다. 
내 삶에도, 아이들에게도.. 마음에 중심을 잡고 다리에 힘을 주고 가는 것이다.
하는 일은 밥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씻기고 젖주고 재우는 일이 전부이지만
내 삶의 하루하루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다.

사랑받은 기억의 힘으로 말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3. 1. 31. 22:45





하루가 저물 즈음이면 참 고단하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 고단한 게 아니고 그냥 매일 보내는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힘이 든다. 

특히 아이들과 세 끼 밥을 차려먹고 치우는 일. 

그래봐야 국 한가지를 새로 끓이거나 아이들 입맛에 맞는 반찬 한가지 새로 하는 것, 그도 아니면 볶음밥처럼 약간 별식같은 한그릇 음식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머리 맞대고 '맛있다' 하고 먹을 수 있게 하는 일... 그 일이 제일 힘들다. 

어찌어찌 저녁까지 잘 차려먹고 아이들 양치시키며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할 때, 

몸도 마음도 오늘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쓰고 이제는 정말 바닥에 조금 깔릴 정도밖에 힘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두 녀석 밥 해먹이는 일도 이런데 셋이 되면 어찌 다 먹이고 지낼꼬... 

새삼 어린 시절 기본 열은 되던 대식구 밥을 다 해내셨던 울엄마가 대단하게 느껴지고, 아이셋 어른둘 고작 다섯식구의 밥 해먹는 일도 큰 걱정이 되어 근심하는 내 짧은 실력이 안타깝다.


블로그도 꽤 오랫만에 쓴다.

저녁이 되면 고단하기도 하고, 그래도 또 이것저것 관심있는 책이나 영상 좀 찾아서 보고, 산모체조도 하고 낮에 하기 어려웠던 연락이나 인터넷  주문같은 일을 한두가지 하고나면 시간이 훌쩍 가서 12시 가까이 되어있곤 했다.

쓰고싶은 얘기는 참 많은데 쉽게 잘 써지지는 않고, 다른 할 일은 많은 요즘이다. 

바다가 태어날 때가 가까워오니 이것저것 준비하고 미리 정리해두어야할 것같은 일도 많이 생각나는데 요즘같아서는 영 쉽지가 않네... 

천천히, 마음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해두어야겠다. 

  









무튼 오늘 쓰려고하는 얘기는 지난 주말과 지지난 주말에 다녀온 기차여행 이야기. ^^


기차가 타고 싶었다.

우리집 옆으로 지하철이 다닌다. 

5호선 종점인 상일동역에서 운행을 마치고 차량기지로 천천히 들어가는 지하철, 차량기지에서 잘 쉬고 다시 일을 시작하러 상일동역으로 가는 지하철 기차를 

우리 아파트 놀이터와 냇가길을 산책하다보면 늘 보게 된다.


연호는 기차를 '치치'라고 부른다.

연수랑 연호랑 놀이터나 냇가길에서 지하철을 볼 떄 저녁 무렵이면 '치치가 아빠 데리러 가나보다' 얘기하곤 했다. 

아빠는 5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저 기차가 다시 상일동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하루 일을 마친 고단한 아빠를 태워가지고 올 지도 모른다. 

연호는 '치치'하고는 제 가슴을 톡톡 치곤했다. 연호도 기차 타보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 연호도 다음에 기차 타보자, 엄마랑 형아랑 아빠랑 같이 타보자~'하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치치, 아빠~'하면서 제 가슴을 두드리면 '연호도 치치타고 아빠한테 갈꺼야' 하는 말이 된다. 

놀이터에서 노는 동안 우리는 몇번씩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같은 얘기를 하고, 같은 꿈을 꾸고는 했다.


1월초에 외갓집에 다녀온 후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정이 많이 든 연호는 기차를 보고 부르는 이름도 더 늘었다.

그전에는 '치치, 아빠~'만 했는데 이제는 '치치, 하삐~, 치치, 할미~'도 한다.

치치를 타고 하삐(할아버지)한테도 가고, 할미(할머니)한테도 가자는 말이다.   

보고싶은 어른들이 계시는 곳으로 저 '치치'를 타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어린 마음이 짠하고 예뻐서 나는 늘 '그래, 나중에 치치 타고 하삐, 할미한테도 가자~'하고 대답해주곤 했다.









그런 얘기를 자주 나누다보니 정말로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태어나기 전에, 연수와 연호를 데리고 정말로 기차를 타봐야지. 

가까운 곳으로, 잠깐 다녀오는 여행이라도 괜찮아. 기차를 타자. 


그래서 궁리하다가 찾아간 곳이 우리집에서 가까운 '팔당역'이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처음 만나는 곳에 사는 우리는 집에서 조금만 가면 덕소고, 팔당이고, 양수리다. ^^

처음엔 춘천쪽으로 가는 기차를 탈까 하다가 그러러면 제법 먼 모란역까지 가야하고, 막상 춘천에 가서 크게 할 일은 없을 것같고 해서 

별일없이 쉬던 일요일, 점심까지 집에서 잘 챙겨먹은 뒤에 오후에 뭐할까.. 하다가 즉흥적으로 팔당역으로 떠났다.


20분 정도밖에 안걸리는 팔당가는 길에 연호가 그만 차에서 낮잠이 들었다.

팔당역에 가서 보니 '남양주역사박물관'이 바로 옆에 있었다. 

잠든 연호와 아빠는 차에서 좀 쉬기로 하고, 연수와 나는 박물관 구경을 하고 오기로 했다.

어른 입장료 천원을 내고 들어간 작은 박물관.

언젠가 라디오 국악방송에서 잠깐 소개되는걸 들은 적이 있긴 했지만 큰 기대는 않고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남양주 지역의 전통문화유산들을 아주 정성껏 소개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연수만한 어린 아이부터 재미있게 해볼만한 여러가지 문화체험들이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남양주 지역에 살았던 옛 문인들이 남긴 책과 글씨,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있었는데 비석글씨나 그림을 탁본을 해서 전시한 것도 많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면 아이들이 직접 건식탁본이라고 해서 벽에 새겨진 그림문양위에 종이를 대고 주걱으로 문질러서 탁본을 할 수 있는 체험 마당이 있는 식이다. 

양주 별산대놀이같은 마당극을 직접 들어볼 수도 있고, 그 탈을 점토나 모래그림으로 만들어보고 작품을 가져갈 수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 해서 정약용 선생이 개발한 거중기에 사용되었던 도르레 원리를 응용한 아이들 장난감도 직접 색칠해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연수는 도르레 꽃게를, 나는 연호 주려고 도르레 거북이를 하나씩 골라 색칠도 하고 바닥에서 굴리며 놀기도 했다. 

건식탁본도 재미나게 해보고, 점토 탈바가지도 하나 샀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여러가지 체험을 하며 오래도록 재미나게 놀고, 어른들과 아이들을 위해 커피와 한과, 떡같은 간식을 파는 휴게실도 있어서 '아 여기 또 오고 싶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음에 우리집에 연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한강을 따라 드라이브하며 팔당과 양수리도 구경한뒤 남양주역사박물관에 들러 같이 놀면 참 좋겠다. 

음.. 그러러면 내가 운전을 필히..! 아니, 그전에 바다를 좀 키워놓고.. 아, 할 일이 많고나.. 끙~~~^^;;   









박물관에서 신나게 놀다 시간이 너무 오래된 듯 해서 차로 가보니 방금 깼다는 연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호야, 우리 치치 타러 가자!'하니 좋아서 얼른 내려달라고 성화였다.

팔당역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장 찍고 교통카드를 안들고 나온 엄마 덕분에 기차표(사실은 전철표)를 직접 돈내고 끊는 '체험'까지 해보며(ㅎㅎ)

우리 꼬맹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 크고 으리으리한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탄 기차는 실은 '중앙선'이라 불리는 전철. ^^

우리는 팔당에서 양평까지 20분 남짓 되는 거리만 가보기로 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중앙선 종점인 '용문산역'인데 산에 갈 생각이라면 몰라도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야말로 기차타는 맛만 살짝 느껴보기로 했다. 

그래도 우리 동네쯤부터는 지하가 아니라 지상으로만 가기 때문에(터널은 여러번 통과하지만) 지하철이라기보다는 기차 느낌이 많이 났다. ^^


선로위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멀리 한강 건너로 보이는 높은 산들에도 눈이 덮여 아름다웠다. 

좋구나.. 집에서, 일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시원하고 아름답고 낯선 풍광속에 서있을 수 있구나... 

연호가 어느새 커서 유모차 없이도 이렇게 같이 걸어 기차를 타고 잘 구경하고, 잘 놀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날은 추웠지만 모처럼 콧바람을 쐰 엄마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기차가 왔다.

전철 앞에 서서 이렇게 사진까지 찍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게 신기하고 좋기만 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ㅋㅋ 

 

연호는 늘 먼발치서 지나가는 것만 보았던 기차에 진짜 타는 것이 무척 긴장되었던 모양이다.

전철안에 타서 빈자리에 앉혀주자 가는 길내내 꼼짝도 안하고 아빠 옆에 딱 붙어 앉아있었다. 

대부분 터널 속을 많이 달리던 전철은 잠깐씩 역 근처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작은 마을들을 보여주다가

딱 한번 잊을 수 없을만큼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양수리 근처쯤 될 것 같은데 한강 위에 놓인 다리를 아주 한참 동안 건넜다. 

얼어붙은 한강위로 눈이 하얗게 덮여있고, 다리의 양쪽 끝으로 큰산들이 아스라하게 서있던 그 풍경이 정말 아름다워서 핸드폰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갈때와 올떄 모두 넋놓고 보기만 하다 미처 찍지 못했다.ㅠㅠ

다음에 다시 이 중앙선 전철을 타게되면 그땐 꼭 찍어야지... 근데 그때도 이렇게 흰눈덮인 겨울강이려나.. 그 풍경은 일년뒤에나 다시 볼 수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양평역에 내려서 역사에서 제일 가까운 식당에서 잔치국수와 냉면을 한그릇씩 먹었다.

출출했던 오후, 저녁을 먹기는 좀 일러서 간식으로 먹었는데 재미나게 기차여행을 하는 중이라 그랬는지 뜨끈한 국물의 잔치국수가 참 맛있었다.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리며 아이들에게는 양평역 안에서 파는 와플을 하나씩 사주고 남편과 나는 큰 커피를 한잔 사서 나눠마셨다.

멀고 긴 여행도 좋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이렇게 짧고 가까운 여행도 소소히, 자주 떠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우리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보면 아이들도 다 자라겠지..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 부부 둘만 여행하는 날도 오겠지.

그때까지는 요 녀석들 안고, 손잡고 같이 걷고 맛있는 군것질거리도 사먹여가면서 같이 재미나게 다니자, 여보. 










다시 돌아온 팔당역.

모자라지도, 아쉽지도 않게 딱 좋았던 한나절의 기차여행이었지, 연수?









다섯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푸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팔당역사와 붙어있는 남양주역사박물관에 예쁜 불이 켜져 있었다.










두둥~~! 그런데 우리의 기차여행은 여기서 끝난게 아니다. ㅎㅎ

다음주에는 급기야 KTX를 타러 용산역으로 진출!!

팔당역 전철타기에서 너무 갑자기 건너뛴 것 같기는 하지만 

그전부터 연수가 고속열차를 타보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잠깐 다녀온 기차여행을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기도 해서 

그럼 이참에 멀리도 한번 슝~ 다녀와봐?! 하고 용감하게 길을 나선 것이다.


마침 늘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챙겨주고 좋아해주는 명이님과 연락이 되어 

벼르고벼르던 명이님 가족도 만나고, 기차도 재미나게 타러 토요일 아침, 광주로 가는 KTX에 올랐다. 











서울이 정말로 추웠던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있었던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아이들도, 어른들로 부지런히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짐은 최대한 줄이고, 먹을 것도 기차역에서 모두 사고, 우리 차대신 택시를 타고.. 어쩐 일인지 늦지않고 여유롭게 기차역에 도착해 크고 큰 기차역, 북적거리는 사람들 구경을 잘 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처음이라(연수는 어릴때 기차를 두번쯤 타봤지만 아기 시절이라 기억하기 어려워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신기하고 

오랫만에 이렇게 사람많은 곳에 나온 엄마도 예전에 지방출장 많이 다니던 직장생활 시절을 추억하며 아침 기차역에 모인 사람들의 낯설고도 애잔한 풍경을 한참씩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고속열차가 드디어 왔다. 

즐겁고 신나는 와중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하품이 나는건 어쩔 수 없구나, 우리 연수. ㅎㅎ










연수 신생아시절부터 블로그 이웃이 되어 연수 자라는 모습을 너무나 예쁘게, 다정하게 지켜봐주었던 명이이모와 미페이삼촌.

블로그를 통해 만난 이 두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고 사는 동안 

우리 가족과 이 가족 사이에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블로그라는 공간을 통해 오래도록 쌓아온 따뜻한 우정이 

아이들이 자라는 것 만큼이나 함께 무럭무럭 자라왔다.

그래서 명이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은 오랫 못본 친동기간을 만나는 것처럼, 말그대로 이모삼촌과 조카들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레고 좋았다. 

서로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늘 댓글로, 가끔 주고받는 편지들로 익히 알고 있어서 막상 만나니 별말없이 얼굴만 보아도 참 좋았다. 그리고 그 얼굴들이 많은 얘기들을 담고 있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느라 명이는 못 본 사이에 많이 말라있었다. 

미페이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풋풋하던(?) 총각 얼굴에서 어느새 두 딸을 키우는 아빠의 책임감이 느껴지는 묵직한 생활인의 얼굴이 되어있었다. 나와 남편의 모습도 그렇게 달라졌겠지...^^

 

우리는 아이들 이야기, 서로의 사는 이야기, 가족들, 블로그 이웃들 이야기를 아이들 데리고 놀고, 먹이고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꽤 많이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명이님과 미페이님이 함께 하는 '실버스푼'에 대해서는 익히 그 맛있고 건강한 먹거리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있는 나인지라 그 사업을 일궈오며 두 사람이 팔았을 많은 발품과 수고와 마음고생과 기쁨에 대한 얘기들을 조금씩이라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참 고맙고 좋았다.  


명이님과 미페이님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옷입고 나오니 눈은 금새 그쳤다가 해가 났다가 다시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명이님 집 가까이에도 기차길이 있었다.

광주 송정역이 가깝다더니 정말로 우리집과는 달리 '진짜' 기차가 가끔씩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여섯살 연수, 네살 수민이.

두 가족의 큰 아이들이 어느새 이만큼 컸다.

기차가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이 아이들은 어느날 기차를 타고 찾아갔던 멀리 광주의 이모네와 

멀리 서울서 기차를 타고 찾아왔던 이모와 오빠와 동생을 기억할까.

마음안에도 기차길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길을 타고 서로에 대한 따뜻한 정들이 오고 가고, 오래오래 마음에 경적소리같은 그리운 여운들을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아이들을 데리고 내가 기차를 타는 이유라면 이유겠다.










명이님네 아파트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메타세콰이어같은 키큰 나무들 사이로 초록색 꼬마요정 하나가 아장아장 걸어간다. 

키큰 나무들 아래를 걷고 싶었던 나는 이 날 아침, 그런 나무들과 눈내린 나뭇잎위를 한참 걸으면서 오랫만에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행작가 오소희씨 말처럼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연호야. 치치 여행 참 좋았지?

다정한 사람들에게로 떠났던 여행이라 더 좋았어.. 

오고가는 기차 안에서도 잘 놀고, 잘 자고, 먼길 씩씩하게 잘 다녀와준 우리 꼬마, 고맙다.

형아는 이미 엄마의 든든한 여행 친구이고, 이제는 세살 연호도 엄마의 여행 짝꿍이 될만큼 컸구나.

아가 동생이 태어나면 우리 같이 힘들고도 행복한 날들을 잘 살아낸 뒤에, 많이 큰 아가동생을 데리고 또 함께 떠나자.

연호가 좋아하는 치치도 타고, 아방방(버스)도 타고.. 작지만 튼튼한 우리들의 두 발로 걸어서 아름다운 세상, 좋은 사람들 곁으로 많이 많이 찾아가자.

너희들 덕분에 만삭이 가까운 엄마도 이렇게 즐거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네. 힘도 많이 얻었고, 참 좋았다. 

고맙다, 고마워요.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가을에, 그러니까 10월 초에 충남 홍성에 사는 솔이네에 다녀왔었다.

그때 바로 사진만 올려두고 뒤이어 제주 여행과 이런저런 일들이 이어져 여지껏 글을 못 쓰고 있다가 

해가 바뀌고 눈에 파묻힌 한겨울이 되어서야 뒤늦게 갈무리해 올려본다.


토요일 낮에 마침 대전에서 대학시절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만으로도 꼭 가보고 싶었던 대학시절 친한 친구와의 귀한 만남이었는데 '충청도까지 가는 김에 솔이네에도 가볼까?' 싶어 연락했더니 흔쾌히 어서 오라는 솔이엄마의 대답. 

그래서 기쁘게 대전들러 홍성으로 1박2일의 짐을 꾸려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나선 길이었다.

 


그립다, 저 뜨락. 

활짝 웃는 순영씨. 

호연이 호승이 명진씨 모두 잘 있는지.. 이 겨울, 솔이네 시골집 풍경은 어떤지.

궁금해서 훌쩍 다시 찾아가고싶다.

 








호연이네 텃밭에서 수확한 땅콩.

농사일 거들기(?)를 좋아하는 연수는 땅콩 따는 재미에 푹 빠져서 솔이엄마의 '아구~ 잘한다~~'하는 칭찬속에 호연이랑 둘이서 엄마아빠가 마당에 뽑아두고 바빠서 못 따고 있던 땅콩을 거의 모두 땄다. 역시 시골에서는 아이들 고사리 일손도 무시할 수 없다. ㅎㅎ



솔이는 호연이의 태명이고, 태어난 후에도 솔이엄마가 가족블로그였던 '솔이의 도시자연육아'에서 늘 솔이로 불러 내게도 그 이름이 더 익숙하다. 

연수와 동갑내기인 솔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토피가 많이 심해서 솔이와 엄마아빠가 모두 고생을 많이 했다.

심한 아토피로 힘들어하는 솔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여러 자연치료와 병원치료, 음식조절을 해나가던 솔이엄마아빠의 블로그 일기를 나도 눈물 삼키며 읽곤 했다.


솔이네와 우리 가족과의 인연은 연수 아빠가 총각시절에 열심히 활동하던(지금은 거의 이름만 올려놓고 있어 죄송한ㅡ.ㅜ) 청년회에서 시작되었다. 

솔이아빠도 이 청년회의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낳아 키우던 솔이엄마와 나는 두 집 다 블로그를 쓴다는 공통점에 서로의 블로그를 오고가며 육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남편들을 통해 알게된 순영씨와 나지만 우리는 곧 남편들보다 더 가까운 친구이자 육아동료가 되었다.


나는 솔이엄마를 통해 '자연주의육아'라고 부를 수 있는 육아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출산 전에도 '황금똥을 누는 아기' 같은 책을 읽어서 자연주의 출산이나 육아에 대해 살짝쿵 알고는 있었지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알아보거나 내가 그렇게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수를 낳기 전에 내가 유일하게 준비하고 출산 후에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은 모유수유 뿐이었다.  

모유수유는 그 즈음에는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도 강조하고 있었고, 유명한 소아과 의사가 쓴 '삐뽀삐뽀 우리 아기 모유먹이기' 같은 책을 보고 나도 마음 단단히 먹고 어려운 고비들 헤쳐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순영씨를 통해 조산원 출산과 천기저귀 쓰기,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 '이유식 다시 쓰기'와 같은 책들을 알게 되었다.

솔이네 블로그에 올라오는 솔이의 아토피 치료를 위한 모유수유와 엄마와 아기 모두의 음식조절, 풍욕 같은 여러가지 자연치유 노력과 자연주의 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정말로 든든한 선생님이자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연수가 8개월 되던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천기저귀도 실은 순영씨가 솔이 신생아때부터 하는 것을 보고 '음..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할 수 있을거 같아.. 아니, 해야지..'하고 엄두를 낼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순영씨를 따라 용기내서 해보게 된게 참 많다.









음... 이 사진은 내가 너무 심하게 웃어서 영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순영씨가 그렇게 좋다구. ^^;;;

자주 보지 못해도 한번 만나면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들, 묻고 싶고 나누고 싶었던 고민들을 얘기할 수 있는 순영씨가 있어 참 좋다. 

명진씨께 전해들은 말로는 순영씨도 나 만나는걸 무척 기다리고 좋아한다 하니(ㅎㅎ) 그리운 벗이 멀리 있어 안타깝긴해도 멀리서 이렇게 그리워하다 가끔 찾아가 만나는 기쁨은 참 크다.   


 


서울 신림동의 도시살이에서도 자연육아를 해나가기 위해 따뜻하고 소박한 노력을 정성스레 기울이던 순영씨 부부는 

재작년 겨울, 솔이가 네살이 될 무렵에 충남 홍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평소 시골생활을 하고파했던 솔이엄마의 바램이 이뤄진 것이기도 하고, 솔이의 아토피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이주였다. 

서울에서 진보적인 인터넷언론의 기자로 일하던 솔이아빠가 마침 지역신문 기자라는 적절한 일자리도 찾을 수 있어서 솔이네는 마당과 텃밭과 감나무가 많은 시골집으로 떠났다.


한겨울에 시골의 한옥집에 둥지를 틀고는 기와지붕에 하얗게 눈을 덮어쓴 채로 나무보일러 가득 장작을 넣고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던 순영씨네 집 사진을 블로그로 보며 

나는 그 한옥집 마루에 앉아보는 날을 늘 상상해보곤 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연호를 낳았고, 또 그 해 겨울에는 순영씨가 둘째 호승이를 낳아서 우리는 둘째들도 어슷비슷하게 키우며 살게 되었지만 홍성으로 순영씨를 한번 보러가는 일은 그만큼 쉽지가 않았다. 


순영씨는 음식솜씨가 참 좋다. 

나같은 어영부영 초짜 주부와는 달리 순영씨는 요리를 정말 좋아하기도 하고, 맛과 건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 어렵지않게 슥삭슥삭 깊은 맛을 낼 줄 아는 내공있는 진짜 요리사다. 

각종 반찬, 나물, 생선조림, 찌개, 죽.. 몇번 못 만났지만 순영씨는 늘 그녀가 차려준 밥상의 따뜻하고 흐뭇했던 맛으로 함께 기억되는 사람이다.

명진씨는 우리 신랑과 똑같이 4대 위해식품(육식+인스턴트 음식+술+담배)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데(^^;;) 순영씨는 그런 남편에게도 맛있는 요리를 해주면서 아토피안인 아이와 모유수유중인 자신을 위해 다양한 채식요리를 건강하고 맛깔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다.

10월에 벼르고 벼르던 순영씨네를 찾아가면서 나는 순영씨가 만든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고인 침을 흐뭇하게 닦고 있았다. ^--------------------^


역시 내 예상대로 순영씨는 직접 담근 효소로 음료수를 만들어주었고, 녹두죽을 쑤어주고, 삼천포에 사시는 시아버님이 손수 잡아 보내주시는 물고기들을 맛있게 구워주었다. 

남편들은 모처럼 마당에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먹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었지만, 나는 순영씨가 내놓는 밑반찬들이 더 반갑고 맛있었다. 

시골집 뒷마당에 예전 주인이 쓰다 두고간 항아리들을 잘 살려서 올해는 장도 직접 담가보려고 하는 순영씨. 

그녀라면 능히 잘 해낼 일이고, 나는 그 곁에 한번이라도 더 가서 구경도 하고 장맛에 감탄도 하고 장독대 위로 떨어지는 단풍든 감나무 잎사귀나 쳐다보고 있어야하는데 

바다 낳고 그런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    










석유보일러와 나무보일러를 함께 쓰는 순영씨네가 가을이지만 밤으론 춥다며 임산부와 아이들을 위해 뜨끈뜨끈하게 난방을 해준 방에 누워 

나는 순영씨와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연수와 호연이는 어른들이 고기굽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오래도록 밤하늘의 별을 보고 저희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늦게사 잠에 곯아떨어졌고, 덩달아 신나서 젖을 물고도 자주 잠이 들었다 깼다 하던 둘째들도 겨우 잠든 뒤에 

그래서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순영씨와 나는 순영씨네가 시골와서 지냈던 지난 일년 이야기, 아이들 유치원 이야기-내가 초봄에 연수를 잠깐 유치원에 보냈다가 결국 다시 데리고 있기로 한 이야기와 호연이의 시골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이야기, 둘째들의 육아에 대해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영씨는 나와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더 열려있고, 더 경험이 많다.

유아교육과를 나와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순영씨인지라 내가 아직 내 아이 하나만 키우며 겪고 생각하고있는 여러가지들을 교사와 부모 모두의 입장에서 더 깊게 바라보고 얘기해주었다. 

우리는 대안교육의 장점들, 그러나 그런 대안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나 학부모가 빠지기 쉬운 협소함, 공교육 안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 고마운 선생님들께 배우게 되는 열린 자세,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 같은 것들을 얘기했는데 나는 이해받고 있다는 기분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잘 할 수 있을거라는 다독거림도 함께 많이 받았다. 


순영씨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진심이 담긴 그녀의 한 두 마디 말에 나는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확~ 풀리는걸 느끼곤한다.

이런 식이다. 

내가 셋째를 임신하고 나서 만나는 아기엄마들이나 할머님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고 여러 말씀들을 많이 하셨지만 주로는 '아고~ 힘들어서 어떻게 키우냐'하는 걱정을 담고 있어 듣는 나도 그 기운이 전염되어 의기소침해지거나 걱정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순영씨는 전화로 내 셋째 소식을 듣고는 바로 환하고 밝은 목소리로 축하해주면서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둘째들을 낳고보니 첫째와 둘째가 잘 놀 때는 엄마 마음도 흐뭇하고 엄마 손도 더 짬이 나서 아이 하나 키울때보다 좋다는 얘기끝에 나온 얘기였는데 순영씨가 "하나보다는 둘이 좋고, 둘보다는 셋이 좋지요"하고 말하며 다시 한번 내 셋째 임신을 축하해주어서 나도 기운이 나고 마음이 무척 밝아졌었다. 

힘이 있는 말, 힘들지만 굳은 의지를 가지고 헤쳐나가는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참된 행복과 보람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어서 들으면 힘이 나는 말. 그런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홍성의 도서관을 구경갔다. 

일전에 대안교육 잡지인 '민들레'에서 공간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된 홍성의 '홍동밝맑도서관'의 회랑 이야기를 읽으며 '아, 여기 솔이네 동네네!'하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날좋은 일요일 오전에 뭘할까.. 하다가 아이들데리고 도서관나들이 가지 않겠냐고 순영씨가 물어서 내가 '밝맑도서관이 여기 있지 않냐'고 했더니 '바로 거기 가자는 얘기였다'며 순영씨는 웃었다. 

'거기 바로 옆에 생협도 있는데 빵이랑 과자랑 참 맛있어요. 그리 가서 아이들도 맛있는것 먹이고 우리도 놀다와요' 하길래

시골집 나무문에 붙었던 한지 뜯는 일만 부랴부랴 끝내고 나들이에 나섰다. 


새벽부터 일어난 아이들데리고 나는 동네 산책도 한바퀴 했고 아침먹고 나서는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고 과일 깍아먹으며 겨울준비 얘기하다가 문풍지를 새로 바르고 비닐도 붙여야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 더 있을때 함께 하자고 내가 졸라서 겨울준비 중 큰 일의 하나인 문 손질에 나섰던 참이었다. 

고운 나무 문틀에 쌓인 먼지 닦는 일이 혼자 꾸역꾸역 하려면 힘들고 고단한 일이겠으나 모처럼 만난 친구랑 같이 닦고 긁어내고 하니 재미있기도 하였다. 

나는 왠지 내가 좋아하는 순영씨네와 그 시골집에 작은 일거리나마 거들 수 있는 것이 기분 좋고 오랫만에 나무 결을 만져보는 일도 즐거웠다.













밝맑도서관의 어린이열람실.

아이들 사이즈에 딱 맞는 작은 등나무 의자들(어른이고 살이찐 나는 살짝 엉덩이가 끼는)을 보며 '아 아이들이 여기 참 좋아하겠구나' 싶었다. 

아이에게 맞춰준 작은 세상, 그게 아이들에게 참 필요한 것 같다.



밝맑도서관은 오랜 역사를 지닌 홍성 지역운동의 기반 위에 서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풀무학교'와 그로부터 뻗어나온 지역 생협과 다양한 농업, 교육운동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에 뿌리내리고 생활을 함께 하는 생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홍동마을, 그 속에 있는 도서관이고 지역민의 사랑방이고 교육터다.


홍성 지역운동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도서관 브로셔와 풀무학교 홈페이지를 슬쩍 본 걸로만 많은 얘기를 하긴 어렵다. 

이 날 처음 듣다시피한 '풀무학교' 이야기도 워낙 깊은 배경과 의의를 지니고 있어서 나도 천천히 알아보고 공부를 좀 해보고 싶어졌다. 

아무튼 하나의 마을을, 유기농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협동조합, 생산체, 어린이집부터 고등대안학교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농업에 관한 대학교육기관인 풀무학교 전공부까지 교육기관을 아울러가며 꾸려낸 홍성의 역사와 사람들이 대단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어렵다고, 힘들다고 얘기하고 좌절하기 바쁜 도시의 소시민인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꿈꾸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만들어내고 있는걸..

그 안에는 다양한 고통과 좌절과 정체와 퇴보도 있겠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숲은 이렇게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돌 지나고 한층 의젓해진 연호의 16개월 무렵. 지금에 비해보면 또 한참 야기같다. ^^

여름 지낸후라 까맣고 머리는 짧고 눈은 땡글땡글하구나, 우리 아들. 

밝맑도서관에서 진짜 거하게 기저귀에 똥 한버럭 싸주셨는데... 아기 똥에는 복이 있다하니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던 밝맑도서관에 작은 힘이나마 됐으면 좋겠다..(실질적 도움은 못드리공.. 죄송죄송) ^^;;;









도서관에서 내려오면 바로 생협으로 이어진다. 

느티나무 참 좋다..










생협이나 지역운동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빵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홍성에 왔을 때는 풀무생협에 와볼 일이다.

홍성에서 맛있는 빵을 먹으려면 갓골에 오시라.

갓 구운 우리밀 빵과 과자, 그리고 풀무학교 학생들이 직접 키운 채소와 여러가지 식재료도 함께 구입할 수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하나로서, 

'맛있네..'를 연발하며 쿠키를 와삭와삭 먹으며 밝맑도서관에서 들고온 브로셔를 읽고 

작은 플랭카드로 만들어진 홍동마을 지도 속의 생협, 떡집, 쌀가루공장, 오리농법으로 짓는 풀무학교전공부 논, 수공업 가게, 갓골어린이집.. 등을 구경하다보니

따뜻한 가을햇살을 거저 쬐고 있는 것 같은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다. 










솔이네는 언제까지 홍성에 살까.

아직 잘 모르겠다. 곧 다시 올라올수도 있고 오래 살 수 도 있겠지..

순영씨는 명진씨가 너무 일이 많아 바쁘고 힘들어한다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면 서울로 돌아가는 것도 자기는 괜찮다고 했다.

근데 이제는 명진씨가 밭이 같이 있지 않는 집에서는 못 살겠다고 했단다.

일하면서 틈틈히 집앞의 텃밭 농사 짓는 일에는 순영씨보다 명진씨가 훨씬더 정이 들고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어디가 됐든 명진씨는 텃밭농사를 지을 수 있고, 순영씨는 아이들과 아빠와 함께 시간을 좀더 많이 보낼 수 있는 곳에서 자연육아와 자연스러운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겠지, 이 맑은 사람들은. 

나는 또 놀러갈 수 있을테고.

참 고맙고 좋다. 

순영씨, 겨울 잘 보내요. 이렇게 써놓고.. 조만간 전화할께요. ^^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3. 1. 1. 21:27

 

 

 

새해 첫날, 부모님과 아이들과 경포에 다녀왔다.

우리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이 호수와 바다를 나말고도 사랑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 안다.

그래서 오늘은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려 그 분들께 새해 첫 날의 경포 풍경을 보여드려야지.. 마음먹었는데

사진 실력이 영 부족해서 새해를 여는 선물이 되실지 모르겠다. ^^;;

 

이제는 희끗희끗해진 아빠의 머리칼 왼편으로 경포대 정자 지붕이 보인다.

경포대에 올라서서 보는 경포호수 풍경은 참 아름답다.

봄에 벚꽃필 때, 특히 밤에 와서 달이 비친 경포호수와 반짝반짝 아름다운 벚꽃 야경를 보면 참 좋다.

강릉 경포는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좋지만.. 4월 벚꽃 필때 봄호수, 봄바다도 참 좋다. 모두들 강릉에 놀러오세요~~^^

 

 

 

 

 

어릴때 나는 겨울이면 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내 블로그 오른편에 있는 대문사진이 바로 그 때 사진이다. 초등학교 무렵이었나.. 아빠에게 스케이트를 배우며 얼마나 신이 났던지...

지금은 아빠도 나이가 드시고, 나는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지만..

마음만은 아직 볼이 빨갛게 된 채로, 경포 호수위에서 스케이트를 씽씽 타던 그 어린 소녀인 것 같다.

 

오늘 가보니 오랫만에 다시 경포 호수가 살짝 얼어있었다.

아빠 말씀을 들으니 지난 몇년 간은 경포호수로 바닷물이 많이 유입되어 호수가 잘 얼지 않았다고 했다. 작년부터 경포호수로 유입되는 하천 공사를 하면서 민물 비율이 더 높아져서 하천 가까운 쪽은 얼기 시작한 것 같다는데 다시 호수에서 스케이트 타는 날이 올 수 있으려나...

경포는 아주 큰 호수여서 예전에는 지금 선교장이 있는 자리까지(와보시면 알지만 지금 호수에서 차로 5분쯤 갈 정도로 멀다) 모두 호수였다고 했다.

그래서 '선교장'이라는 이름 자체도 '배가 지나다니는 다리가 있는 큰 집'이라는 뜻으로 호수물이 찰랑찰랑하는 그 위에 지어져있던 그림같이 아름다운 누각과 아흔아홉칸 전통가옥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지금도 주요관광지가 되어있지만 호수만은 줄고 또 줄어 지금 정도의 크기만 남아 있다.

고향집이 있는 우리 동네의 옛 이름도 '못 가장자리'라는 뜻의 '모솔'인데 그 못이 바로 경포다.

호수가 얼마나 컸으면 지금은 차로 10여분을 달려야하는 그 큰 벌판이 모두 호수의 가장자리 땅이라고 불렸을까..

그러니 달밝은 봄밤에 강릉으로 배를 띄워 달맞이 가자는 옛노래도 불렸겠지.

그 옛날 풍경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다.

 


 

 

형아와 할머니가 달리기 경주를 하느라 저만치 뛰어가니

어린 연호도 할아버지 손을 잡고 부지런히 따라 간다. ^^

오늘 낮은 다행히 바람도 없고 포근해 아이들도 잘 뛰고, 어른들도 새해 나들이를 참 잘 했다.  

 


 

 

 

연호의 'V'~^^ 할아버지도 함께~~

 


 

 

 

솔밭길을 걸어 경포바다로 간다.

바닷가의 해송들은 그래도 키가 작은 편이다. 바닷바람을 많이 맞고 커서 옆으로 비스듬히 자란 것도 많다.

강릉의 보통 소나무들은 이보다 훨씬 키가 크고 늘씬하다.

 

키큰 나무들 아래를 늘 걷고 싶다. 한 두 그루 띄엄띄엄 서있는 신축 아파트, 신생 시가지의 보도블록길 말고

나보다 훨씬 오래 산, 키 크고 잎 많은 나무들이 여럿 서있는 숲속길을 오래오래 걸어보고 싶다.  

바다를 낳기전에 꼭 그런 산책을 해봐야지...

 


 

 

 

연호는 강릉에 와서 외할아버지의 짝꿍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하삐', 할머니는 '함미'라고 부르는데 병아리처럼 할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삐! 하삐!'하고 부른다. ㅋㅋㅋ

오늘은 좋아하는 하삐와 바다 나들이까지 와서 한층 신났다. ㅎㅎ

 


 

 

 

바다.

드디어 바다.

새해 첫 날의 동쪽 바다는 물빛이 이렇게 푸르렀답니다.

 

 


 

 

 

 

바닷물이 어찌나 맑고 푸른지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 이웃들께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다보니 무슨 자동보정이라는 것이 되어서 색감이 이렇게나 인공적(?)으로 되어버렸다.

연한 초록빛이 감도는 푸르고 푸른 바다였는데...

 

이 바다의 시원한 기운처럼

우리도 올 한해 이렇게 잘 살자고,

어렵고 힘든 시절 더 꿋꿋하게 우리 안의 바다를 깊고 푸르게 키우면서 잘 견디고 잘 자라자고

따뜻한 손 꼭 잡고 얘기하고 싶었다.

 


 

 

 

할아버지와 형아가 파도 바로 앞까지 가서 바다를 보고 있는 동안

연호는 할머니와 바닷가를 오고가는 무한궤도 바퀴를 단 보트끄는 트랙터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새해 해돋이 행사의 뒷정리가 얼추 끝나가는 바닷가에는 우리처럼 느지막히 바다를 보러나온 사람들이 한적해진 새해 첫 바다를 대면하고 있었다.

 



 

 

 

바다와 모래와 조개를 사랑하는 연수.

겨울이라고 그냥 갈 수는 없나보다. ^^ 

 


 

 

 

 

올한해 나는 어떤 걸음을 걷게 될까.

내가 걸어간 자리에는 어떤 발자국이 남을까.

연호 업고가시는 아빠 엄마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뒷모습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저렇게 파랬으면 좋겠고..

 

 

 

 

 

Posted by 연신내새댁





한동안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 많은 것들이 만족스럽지 않고 후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변화시킬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냥 수렁에 빠진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고 가라앉고 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전날밤 예매해둔 영화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종로의 오래된 극장을 리모델링했다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향해 혼자 점퍼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걸어가는 길은 어색했다. 

지하철을 혼자 타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3년? 


한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가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지하철을 타고 흔들리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의 고단함이 짙게 느껴졌다. 

내게는 이토록 오랫만이고, 모처럼의 일탈이라면 일탈인 이 공간이 매일의 일상인 사람들에게는 또 얼마나 피곤하고 지루한 공간일까. 

문득 매일 꼬박 2시간을 좁고 답답한 땅속 열차안에서 보내고 있는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집밖에 있는 시간, 특히 출퇴근 시간은 그저 자유롭고 홀가분한 '나만의 시간'일거라고 생각하며 부러워도 하고, 24시간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내 생활의 고단함도 모르고 집에 와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려한다고 못마땅해했는데 

지하철을 타는 시간이 근무시간처럼 긴장되진 않더라도, 그다지 편안한 시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몸과 마음을 지하철 좌석 깊이 파묻고 조용히 달렸다.     


영화가 참 좋았다. 

주간지에 실린 영화평을 보고 '이 영화, 봐야겠다..' 싶었던 '원데이'라는 영화.

커피 한잔을 마시며 보는 중간중간 웃다가 울다가 했는데 영화가 다 끝나자 그만 눈물이 펑펑 쏟아져버렸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원래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앉아서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노래도 듣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우느라고 불켜질때까지 앉아있어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눈물닦던 손수건에 코를 풀고 잘 그쳐지지 않는 울음을 어렵게어렵게 수습하고 일어나보니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두 분과 표받던 여직원이 모두 기다리고 계셨다. 

부은 눈을 한 배부른 임산부는 천천히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는 극장안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와 문밖으로 나왔다.

 








겨울이라 그런가.. 휴일 한낮의 극장앞은 한산했다.

여기, 이천년대 초반이었나.. 바닥에 안성기, 박중훈, 전도연 같은 배우들의 손바닥이 찍힌 금동판이 깔려 있던 곳.

너무 많이 변해서 여기가 정말 거긴가.. 영화들에도 자주 나왔던, 누군가를 기다리고 만나고 2층 까페에 앉아 하염없이 내려다보기 좋았던 그 영화관 마당이 맞나... 싶었다.









표지판의 '종로'라는 이름이 익숙하고도 반가웠다. 

20대에는 이 거리를 숨차게 뛰어다니던 날들이 참 많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바쁘게 걸어간 적도 많았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영화를 보았고, 많이 앉아있었고, 많이 걸었다. 


문득 종로 이 거리로부터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떨어져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시대로부터, 미우나 고우나 내 삶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이 이루어져 나가고있는 이 사회의 아프고 번잡한 속살로부터 너무 오래 비켜서 있었던것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다.

공간에서 시작됐지만 실은 태도의 문제, 한발 물러나있고 싶어했던 내 자세에 대한 생각이었다.








영화 끝나는 시간에 맞춰 차를 타고 종로로 나온 아이들, 남편과 다시 만났다. 

단 몇 시간 떨어져있었던 것인데도 연호는 엄마를 많이 찾고 울었다하고, 남편은 두 아이 데리고 종종거리느라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영화도 영화지만 종로까지나 나와볼 생각을 하게된 건 이 집, '칼질의 재발견'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학시절 후배가 지난 가을에 새로 연 식당이다.







경복궁 옆 서촌의 작은 한옥집. 

마당 오른편에는 작은 화장실이 있고 그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있다. 

날이 따뜻하면 저 옥상에 놓인 탁자와 의자에 앉아 한옥집 기와지붕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년엔 내가 여기 오기 힘들 것이고, 식당이 번창해서 내후년쯤엔 나도 저 옥상에 올라가볼 수 있기를 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집처럼 소박하고 예뻤다. 

한낮에는 마당과 통창을 통해 주방 앞까지 햇볕이 참 잘 들었다. 

식당이 환하고 볕이 좋아서 그 볕을 바라볼 때는 매일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따순 밥을 차려주는 고단한 후배 맘이 때때로 밝고 편안해지기도 하겠구나.. 싶어 좋았다. 








'칼질의 재발견'은 후배가 요리사가 되고나서 처음으로 연 식당이다. 

칼질도 그렇겠지만.. 나는 그녀가 인생을 재발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무렵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모두 비슷하게 살았던 것 같다. 

책상앞에 잘 앉아있는 모범생들이었고, 펜을 잡는 일 외에는 손을 쓰는 일, 몸을 쓰는 일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서른을 조금 넘겼을 때 운명은 다양한 시련과 기회를 주었다. 

흔치는 않지만 또 우리 모두 언젠가 겪을 수 있는 큰 아픔을 겪고 후배는 잠시 떠났다. 

언론사라는 직장도, 한국이라는 나라도.

그리고 3년만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가 요리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뭉클했다. 

잘했네.. 참 잘했네.. 

그녀의 지난 3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돌아온 그녀가 따뜻한 밥을 짓는다는 사실이,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고마웠다.   









유럽, 미국, 다시 유럽을 오가며 요리학교를 다니고 우프 농장에서 유기농 채소키우는 일도 거들고, 여행을 하고 레스토랑에 취직해 일을 하기도했던 그녀가 지금 조용히 경복궁 서촌의 작은 한옥에서 만들고있는 음식은 빵, 스프, 스테이크 같은 양식요리들이다.

 







연수와 연호는 감자스프를 아주 잘 먹었다. 

빵도 참 맛있었다. 

후배는 대표세프를 맡고있고, 조리를 책임지는 요리사는 따로 계시다고 들었지만 여럿이 함께 손맞춰하는 일인만큼 '재발견' 식구들이 다함께 만들어 내놓으시는 맛들이 나는 아주 좋았다.


입맛이 예민한 남편은 스테이크 소스가 조금 느끼한 것 같다며 좀더 상큼한 맛이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러나 본인은 '양'에 대만족이라며 '고기가 이렇게 두툼하고 맛있으니 다 괜찮다'는 육식주의 특유의 요리관을 과시했다.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날이 있는가, 후배도 요리도 식당도.. 모두 말이다.

나는 그 미래가 더 기대되고 좋다.









아주 두툼한 호주산 소고기스테이크가 2만원이다. 

여느 화려한 레스토랑들의 스테이크에 비교해 손색없는 맛과 양인데 가격은 더 저렴하다.

후배는 '처음엔 너무 낮은 가격으로 시작해 아고 이렇게는 안되겠구나.. 싶어 올렸는데 이번에는 또 너무 올린 것 같다'며 곧 다시 조정해 가격을 더 낮출 생각이라고 했다. 

'칼질의 재발견' 홈페이지에 써놓은대로 지갑 얇은 학생도, 어깨 무거운 중년도 '오늘은 모처럼 칼질 한번 해볼까~!'하며 부담없이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양식당이 되고싶다는 바램이 이뤄지길 빈다.

 








나는 돼지고기를 먹어보았다. 토마토소스가 상큼했고, 저 시금치는 너무 맛있어서 집에 와서도 자꾸 다시 생각났다.

(고기가 아니라 시금치가 생각나는 나도 참... 그래도 난 풀이 좋은걸..^^;)  

두번째 갔을 때는 닭고기(11000원)를 먹어보았는데 내 입맛에는 담백한 닭고기가 더 좋았다. 

돼지고기도 정말 맛있었는데 기름기가 좀 많기 때문에 그 맛을 즐기는 분들께 권하고 싶다.









'칼질의 재발견'(http://www.restaurant-kaljil.com/)은 아주 작은 골목 안에 위치해있고 주차장이 따로 없다. 

가까운 곳에 '시립어린이도서관'과 '종로도서관'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를 해놓고 식당까지는 살살 걸어가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나들이라면 식사 후에 어린이도서관에 들러 책도 보고, 사직공원을 산책하거나 놀이터에서 놀 수도 있어 참 좋다.

경복궁에도 가보고, 그냥 한옥이 많은 사직동 필운동 골목들을 슬슬 걸어다니면서 작고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거나, 군것질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세 아들을 데리고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아줌마 욱의 모습을 그려보니 좋았다. 

걷다가 다리 아프면 다시 칼질에 와서 물 한잔 얻어마시고, 수다떨고 다시 나서고...  

그때까지 오래오래 번창하시길, 칼질..^^









전에 광호수지의 제주 게스트하우스에 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어찌 이 사람들은 이렇게 공간을 딱 자기느낌으로 잘 만들어낼까.. 신기하다. (달물은 딱 수지 느낌! ^^ 광호느낌이 안 나는건 다행이지싶다..ㅎ)

이제는 조 셒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은 이 후배의 느낌은 통통 튀고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속깊고 단단한 그런 느낌인데 

집도 참 그런 느낌이다. 

누군가는 울트라슈퍼땅콩이라 부르는 후배가 3년간의 외국생활과 요리 수련을 통해 얼마나 더 깊고 단단해졌을지.. 나는 요즘 후배가 그 기간에 썼던 블로그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다. (먹고 살기에 관하여 http://blog.daum.net/chajin_my_hand)


오랫만에 잡아본 후배의 손은 거칠고 두툼했다.

대학시절에 우리가 팔짱끼고 백양로를 함께 총총총 걸어내려갈 때 그 때의 후배 손은 곱고 부드러운 여대생의 손이었던 것 같은데.. 

거칠고 찬 손이 잠깐 안쓰러웠지만 세월이 묻어있는, 하나의 식당을 거뜬히 꾸려가고있는 작지만 큰 그 손이 참 좋았다. 









소외와 후회 없는 양식의 경험.

위축되지도 말고, 겉돌지도 말고.. 그저 따뜻하게 밥한끼 잘 먹은 푸근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수저를 놓고 다시 추운 세상으로 나설 수 있는 식당. 그런 양식당을 만들고 싶은가보다. 










눈부은 브이쟁이. 다음에 또 오자구.

이담에 크면 이모네 식당에서 알바도 좀 하시고. ^^



서른도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는 이제사 비로소 인생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는 기분이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나도, 후배도, 그리고 자기 몫의 인생을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들에게 위로와 따뜻한 포옹을 보내고싶은 밤이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2. 11. 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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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여섯째 날이었던 목요일에는 달물 식구들과 '에코랜드'에 다녀왔다. 

광호, 수지, 달물스텝 림과 우리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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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제주에 오기전에 육지에 일이 있어 나갔던 광호가 이런저런 중요한 일정들을 마치고 수요일 오후에 달물로 복귀했다.

오랫만에 보는 친구는 참 반갑고 익숙하고 또 낯설었다. 

광호는 내 십오년지기 친구다. 대학교신입생 2월부터 알기 시작해서 대학시절 내내 참 여러가지 활동을 함께 했고, 서로의 크고작은 개인사들도 많이 알고 지켜보았다. 이 친구 덕분에 대학시절에 즐거운 일도 참 많았고, 힘든 시절에는 위로와 용기도 많이 얻었다. 

그래도 실은 꽤나 먼 사이이기도 했다는걸 이번에 새로 알았다. 

우리들이 함께 또는 각자 많은 일들을 정신없이 겪고 해냈던 20대의 날들을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좋고도 슬픈 일이었다. 내가 몰랐던 일들과 미안한 일들, 아쉽고 안타까운 일들이 거기 참 많이 있었다. 더 많을 것이다, 더 얘기를 해보면..  

30대가 되어서도 삶은 모두에게 새롭고 힘든 도전의 날들이어서 나는 이제 세 아이의 엄마로, 광호는 결혼과 제주 이주와 집짓기와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헤쳐와서 새봄에 아빠가 될 준비를 하고 있고, 깨봉도 여러가지 변화와 경험과 도전속에 치열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20대의 절친들을 다시 만나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인생은 젊고 미숙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파도를 준비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파도가 기다리고 있을까.. 부디 우리가 그 파도들을 잘 넘을 수 있기를.. 때로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라도 잠시 후에는 다시 판을 붙잡고 하늘위의 햇볕에 몸을 말릴 수 있기를, 그리고 다시 파도를 타고 항해를 계속 할 수 있기를 빌었다. 

잠시라도 그들의 삶의 공간에 들어와 볼 수 있었다는게 감사했다. 이렇게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이정도의 이야기도 함께 진득하게 나누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후배친구의 결혼식장같은 경조사에서 짧게 안부를 나누고 서로의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놀라하고 대견해하다가 바쁘게 헤어졌겠지.. 그동안 우리들의 만남이 주로 그랬다. 

이번 제주여행은 어린 아이들 키우며 밖에서 친구들 만나기 어려운 내게는 쉽게 보기 힘든 소중한 친구들과 모처럼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사는 모습을 말없이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정말로 귀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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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를 참 행복하게 해줬던 에코랜드 얘기도 해야겠다.


구름이 정말 멋진 날이었다.

연수는 아침부터 '숲속기차'를 타러 간다는 사실에 들떠서 '언제 가냐' 묻고 또 물었다. 

달물 식구들이 아침 청소를 하는 동안 들뜬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동네 산책을 다녀왔다. 그 사이 수지이모는 맛있는 점심 도시락도 준비해놓고 있었다. 

'에코랜드'가 있는 조천읍은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속해있어서 동쪽 바닷가인 월정리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광호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새벽 일찍 일어난 연호는 낮잠이 들었고, 연수는 귤밭과 키큰 가로수들과 그 사이로 가끔 보이는 소와 말들을 구경하며 애써 졸음을 참았다. 

 

'에코랜드'는 제주에 있는 여러 유료관광시설(?, 무슨무슨 파크, 랜드들^^)중에 제일로 괜찮다는 평을 듣고 있다며 아이들 놀기에 참 좋을 것 같다고 수지가 함께 가보자고 제안했다. 수지도 전부터 한번 가보고싶었단다. 그 덕분에 우리도 뜻하지않게 좋은 구경을 나서게 된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좋았다. ^^ 

수지가 꽤 비싼 편인 입장료(어른 11000원?)가 아깝지 않다고 평했는데 나도 동감이었다.

연수는 제주에 가서 또 숲속기차를 타고 싶다고 여러번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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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윈 기관차공장에서 만든 증기기관차(연수가 좋아하는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에 나오는 바로 그 기차다!)가 등장하자 연수는 너무 기뻐서 폴짝폴짝이었다. 3번에 걸쳐 기차를 타고 꽤 오래동안 숲속을 달리게 되는데 기차에서 보게 되는 풍경들이 참 아름다웠다. 제주의 신비한 자연을 아기자기하게 잘 보여주는데 잠깐이지만 '아!'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도 여러차례 지나갔다. 

호수 위로 놓인 나무데크를 따라 걸으며 보게되는 호수 풍경은 무척 이국적이었다. 분명히 작은 테마파크 속에 있는데 순간 아주 큰 강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그런 강가에 와있는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는게 '에코랜드'의 힘인듯 했다. 


풍차곁에 있는 잔디밭에서 과일과 유부초밥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또 기차를 타서는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던 놀이터로 향했다. 아이들과 내가 들어가면 꽉 찰만한 작은 나무집들이 여러 채 지어져있고, 여러 가게와 관공서들도 다 작게 만들어져있던 작은 마을 놀이터에서 연수와 연호는 신이 나서 이 집 저 집 들어가보고, 역할놀이를 하고, 편안해했다. 아이들의 마을에서 어른들인 우리도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바라보던 세상은 딱 이만했지.. 딱 요만하면 충분했던 어린 마음의 놀이터에서 유년의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에게 이런 작은 집들을 선물해주는 꿈을 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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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를 떠나와 마지막으로 숲속 산책로를 조금 걸어보았다. 

'곶자왈'이라 이름붙은 한라산 중턱의 숲은 정말 신비로웠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요정들이 사는 숲 같달까.. 화산 암석들을 뚫고 자란 구불구불한 나무줄기들과 키큰 고사리 잎들.

그 사이에 놓인 화산송이 길을 천천히 맨발로 걷는 동안 발바닥은 쉼없이 따끔거리고 아팠지만 마음만은 무척 행복했다. 

짧은 코스를 걷고 나와 기차역에 있는 벤치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며 발바닥을 들여다보니 발바닥에 송이물이 발갛게 들어있었다. 

붉은 발바닥이 '나는 살아있어, 나는 건강해'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함께 잘 걸어준 바다도 '엄마, 나는 괜찮아요. 잘 크고 있어요'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마웠다. 

살아있다는 것이, 우리들이 여행의 하루하루를 무사히 잘 보내고 있다는 것이.. 친구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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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연수와 우리들 사진은 모두 수지이모가 찍어준 것이다. 예쁜 사진 정말 고마워, 스쟈~!^^)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