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들'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18.02.02 할머니 안녕 2
  2. 2017.10.12 지난 여름
  3. 2017.08.23 제주도 여행 그림 #6 7
  4. 2017.08.20 제주도 그림 여행 #5 6
  5. 2017.08.20 제주도 그림 여행 #4
  6. 2017.08.19 제주도 여행 그림 #3
  7. 2017.08.18 제주도 여행 그림 #2
  8. 2017.08.18 제주도 여행 그림 #1
  9. 2015.02.01 휴식
  10. 2015.01.17 사랑하는 아버지께 4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2017년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겨울답지않게 햇살이 참 따뜻하고 포근한 날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길에 본 산자락에는 하얀 눈들이 덮여있었고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며칠 전까지의 매서운 추위가 잠시 한숨 고르는 듯 포근하고 아름다운 날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아프셨던 가을 동안 나는 가끔 할머니 생각을 하며 목이 메이곤 했다. 

가을이 깊어가며 날이 추워질때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보내고 떨면서 들어올 때는 

'병원에 계신 할머니는 이 추위를 모르시겠구나.. 날이 추워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도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할머니가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평생을 몸으로 느껴온 계절이 오고 가는 것, 시절의 변화에 따라 해야하는 크고작은 생활의 단도리들.. 이런 것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슬펐다. 


정 호자 원자, 정호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우리 할머니는 아흔두해를 사셨다. 

1925년, 강릉에서 가까운 주문진 행호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여덟살에 결혼해 모두 여섯명의 자녀를 두셨다.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은 갓난아기일때 잃은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 자라서 할머니 곁을 오래오래 지켰다. 많은 손주손녀들의 결혼과 증손주들까지 기쁘게 맞아주시고 생애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셔주셨다. 


바닷가가 멀지않은 농촌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일본어로 수업하던 소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할머니의 남자형제들이 모두 청소년기가 되자 서울로 가서 혜화동에 집을 마련하고 공부할 때, 할머니의 부모님은 할머니도 그 집에 가서 같이 지내기를 바라셨는데 할머니는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때 서울에 가지않은 것을 두고 할머니는 그 때 나이많은 친척 조카가 '고모는 천치야, 나같으면 당장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며 조금 후회스럽게 말씀하셨었다. 

어릴때 들은 그 얘기를 나는 자라서 가끔 혼자 생각해보곤 했었다. 할머니가 그때 서울에 가셨더라면 이화학당이나 연희전문 같은 곳을 다니셨을까.. 그럼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신여성이나 지식인이 되었을 수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때니 어려움을 겪을셨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할머니의 인생은 무척이나 달라지셨겠지..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버지를 낳고 우리들의 할머니가 되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니 가보지못한 할머니의 '신여성'으로서의 멋진 삶이 왠지 아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안도하게 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일찍 결혼을 하셨다. 우리 할아버지의 살림은 그당시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본래 땅과 재산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일제 초기에 토지 개간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땅을 모두 잃었다고 작은할아버지께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던 증조할아버지를 손목에 매를 앉혀서 다니시던 늠름하고 멋스러운 분으로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재력가였던 증조할아버지는 강릉의 이름난 부잣집이었던 강릉 최씨 '가매집'의 따님과 결혼했다. 평생 단정하고 고운 하얀 한복에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지내셨던 우리 증조할머니는 이 가매집의 이름난 수재였던 최장집 교수님의 고모이시기도 하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땅도 많이 잃어 살림이 어려울 때였는데 '가매집 외손'이라는 타이틀로 중신(중매)을 넣었었다고 할머니는 회고하셨다. 나는 대학원을 다닐때 최 교수님의 민주주의 관련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분은 나를 모르시지만 나는 생전에 나와 늘 가깝게 지내셨던 증조할머니의 조카분이라는 사실때문에 괜시리 큰 친근감을 느끼곤 했다. 


결혼 초기 살림은 어렵고, 시동생들도 많고, 할아버지는 지역신문 기자일과 청년단체 활동으로 바쁘셨던 때에 할머니는 첫아이로 우리 아빠를 해방이 되던 1945년에 낳으셨다.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할머니는 어린 아기를 업고 아빠의 손목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셨는데 그 길에서 어린 둘째를 잃으셨다. 피난 떠나기 얼마전, 할머니의 친정 아버지께서 잠시 딸을 찾아오셔서 만나보고 가셨다는데, 그때 제일 큰 시동생인 우리 작은할아버지께 '자네가 이 집에서 제일 중요하네. 부디 잘 도와주게' 당부하셨던 것을 작은할아버지는 오래 기억하셨고 내게 이야기해주셨었다. 나는 만나본 적이 없는 아빠의 외할아버지. 어떤 분이셨을까. 할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오래동안 못 만났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셨을까. 시어머니와 남편도 만나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자유롭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무척 가부장적인 분이셨고 화도 잘 내셔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지내셨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시게 된다면 할머니가 더 당당하게 씩씩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부모님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노년에 가깝게 지내셨던 인쇄소집 할머니와도 다시 만나 좋아하시는 화투도 재미있게 치시면서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목소리가 참 예쁜 분이셨다. 살짝 장난기가 어린 것 같은 반짝이는 눈을 갖고 계셨고 얌전하고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할머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정말 재미있게 옛날 얘기를 잘 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매일 밤 할머니 곁에 누워 깔깔깔 웃다가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만 더 해줘~ 하나만~~" 하고 졸랐었다.

지금도 살짝 기억나는 이야기는 어떤 바보신랑이 장가들던 날 이야기. 신부집에서 처음 먹어본 가자미 식혜가 너무 맛있어서 밤에 몰래 일어나 정지(부엌)으로 가서 살금살금 식혜단지를 찾아 손을 쑥 넣었는데 그게 개똥그릇(?)이었던데다가 그만 들켜서 도망가는데 개는 쫒아오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손에 묻은 똥이 식혜인줄 알고 싹싹 핥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다는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너무 우습고 재미있었다. 

텔레비젼이 있다해도 아이들이 볼 것이 별로 없고, 밤이면 일찍 누워 모두 잠들던 시골 한옥집 사랑방에서 우리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속의 여러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긴 겨울밤을 즐겁게 보냈었다. 

사랑방 큰 창문밖으로는 밝은 보름달이 뜨고 별도 예쁘게 빛났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밤들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생고구마를 숟가락을 삭삭 긁어주시면 한 숟갈씩 돌아가며 맛있게 받아먹던 기억. 친감, 곶감, 큰 가마솥에 끓여주시던 엿, 그런 것이 어린 시절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들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잃었다. 

내가 유머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조금쯤은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건 우리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일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뒤 나는 길을 걷다가 이따금 눈물이 툭 쏟아졌다.  

며칠동안 털이 수북히 달린 패딩잠바의 모자를 덮어쓰고 저녁에 운동을 하러가면서 울었다.

할머니가 보고싶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립다. 

친정집에 가면 '욱이 왔나~'하고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실 것 같고, 한동안은 햇살이 환한 날이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원해계시던 요양병원, 그 병원에 가면 여전히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할머니를 본 날, 할머니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나에게 "욱아, 행복하게 잘 살아."하고 아파서 가늘어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할머니 말씀대로 하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늘 집과 마을회관을 오가며 정정하게 잘 지내주셔서 나는 더 오래 할머니가 우리 곁에 계실거라고만 생각했다. 조금 더 자주 뵈러가고, 할머니랑 좀더 놀껄.. 얘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랬듯이 할머니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낼껄... 그러면 할머니가 좋아하셨을거란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할머니를 참 좋아하니까.. 이제 더는 할머니와 놀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는 연수, 연호, 연제를 모두 갓난아기 시절에 많이 안아주셨다. 

팔십이 넘으셨어도 아이들을 폭 안아서 잘 재워주시곤 하셨고, 내가 어린시절에 할머니 품에서 들었을 자장가와 여러 노래들을 부르며 얼러주셨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친정에서 돌아올때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연수야, 외가에 또 와~"하고 다정하게 여러번 당부하시고, 용돈도 아이들 손에 쥐어주셨었다. 

친정집에서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때 할머니는 많이 아프셨던 때라 아이들이 인사를 하는데 꺼내줄 용돈이 옆에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게 미안하셔서 "연수야, 다음에 오면 꼭 용돈줄께. 외가에 꼭 또 와.."하셨다. 

다음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를 뵈러갔을 때 할머니는 나에게 "왜 아이들은 안 데리고왔냐.. 연수, 연호, 연제. 너희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내가 천원짜리를 따로 놔뒀는데.."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큰돈은 필요없다고 작은 동전지갑에 천원짜리 몇장만 넣어서 옆에 두고는 아이들이 오면 한 장씩 주려고하셨던 것이다. 지난 번에 용돈을 못 줬던게 마음에 걸리셔서 병원에 누우셔서도 잊지않고 챙겨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참고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올께, 할머니. 얼른 나아.."하고 대답했었다. 그때는 또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일찍 다시 갔었야했는데... 

그날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의 1층 로비까지 갔다가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들은 면역이 약해 면회가 안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지 못하고 로비에 기다리다 돌아왔다. 연호가 "난 증조할머니가 안 아픈게 좋아.. 그러면 증조할머니한테도 용돈을 받을 수 있잖아" 했다. 아이들이 외가집에 가서 증조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만원이든, 천원이든 그 돈은 증조할머니의 마음이고, 정이다. 아이들도 자라면 그 마음을 알 것이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와서 아이들 겨울 옷을 정리하다가 연제가 더 어릴때 입었던 겨울 파카를 꺼냈는데 거기에 빳빳한 새 돈 5천원짜리 두 장이 접혀서 들어있었다. 

그 돈을 보고 나는 많이 울었다. 연제가 외갓집 다녀올때 증조할머니가 주셨던 돈인 것 같아서였다. 설날 지나고 외가집에 갔을때 증조할머니가 연제에게 세배돈으로 주신 새 돈. 나는 그 돈을 잘 넣어놓고 쓰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가 찾아서 전해주신 돈같아서.


이 겨울동안 우리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은 아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엄마아빠는 언제 죽는지, 자기들은 또 언제 죽는지.. 100살까지 살거라고, 죽고나면 자기들은 다시 아이로 태어날 거라고.. 하루는 이 생각을 하고, 다음날에는 또 다른 생각이 났다며 조잘조잘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날 연호는 엄마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서 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기는 엄마의 아이로 다시 태어날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럼 되겠지, 엄마?"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얘기하며 연호의 어린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래, 그러자"하고 나도 대답하며 웃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중에 내 손녀로 다시 태어나.. 그럼 내가 재미있는 옛날 얘기 많이 해줄께. 

할머니가 늘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많이 예뻐해주고, 칭찬해주고, 대견해해줄께..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같이 놀아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할머니 안녕..!

Posted by 연신내새댁



지난 여름 친정에 갔을때
조카와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할머니방에 누워서 드라마보시는 엄마 모습을 그렸었다.
할머니는 오후에는 늘 그러셨듯이 마을회관에 놀러가시고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가 거실에서 북적거리면서 노는걸 봐주시다가
잠깐 할머니 방에서 쉬시는 참이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오후에 회관에 못가시고
할머니 방에도 매트리스와 작은 소파가 들어와
방 풍경이 바뀌었다.

그림을 그릴때만해도 바로 얼마후에 이렇게 달라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림으로만,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어떤 시절.

할머니가 조금씩이라도 부디 나으셨으면 좋겠다.
바깥 출입을 못하시는 할머니 곁을 지키며 보살펴드리고 있는 엄마도 힘내시길..!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7. 8. 23. 10:33



'9시 20분.
봄이 이제 일어났을까?
제주에서 보낸 일주일이 나에게 꿈같았던 것처럼
오늘 아침 일어난 봄이도 우리가 없는 도미토리실을 보며
우리랑 놀았던 일이 꿈같진 않을까?
한번 꼭 안아주고 올껄..
어제 밤에 졸린 봄이에게 그저 "잘 있어, 봄아. 우리 또 놀러올께"하고 말만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2017, 8, 13 티웨이 비행기'






돌아오는 아침
비행기안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봄이와 알렉스를 그리고 있는 나에게
옆에 앉은 연제가 바다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보지않고도 달물 바다가 슥슥 그려지게 살짝 손에 익었다는 것이
뿌듯하고 신기했다.
잘 그리진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풍경을 손이 기억해서 그릴수 있다는 것.

우리와 함께 놀았던 모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바다.
스노클링하는 연수와 파도타는 연호, 신나게 노는 아빠, 연제,
의자에 앉아 쉬는 엄마,
모래놀이하는 봄이와 멸치 주워주는 유준이.
유니콘타고 노는 깨봉삼촌과
연제와 바다에서 놀면서 친해진 다섯살 친구들 서준이와 채미, 우리 아이들과 3일 동안 함께 넘 재밌게 놀아주셨던 채미엄마.
언덕위 달물에 있는 광호삼촌, 수지이모, 원이, 알렉스^^

이 모두가 등장하는 한 장의 그림을 아이들은 두고두고 펼쳐보며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며
추억을 되짚어보곤 한다.
보잘 것 없는 그림이라도 우리에게 소중했던 여행의 기억을 담고있어서, 되살려주어서 참 좋다.

여행을 다녀오고나니 여름이 거의 끝난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여행후에
우리는 한뼘씩 자란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고 일상을 살아간다.

고맙다.
모두 참 고맙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7. 8. 20. 23:43



달물에서 바다로 가는 골목길에 작은 카페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책다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예쁜, 너무 예쁜 제주 전통집이 있었다.
​며칠을 지나가며 입맛만 다시다가
떠나기 이틀전인가에 잠시 점심거리 사러나온 길에 들렀다.





작은 서가가 있고 편하게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책다방.
한쪽에는 판매하는 책들이 진열된 작은 책장, 엽서들, 악세서리들이 있었다.
눈에 딱 띄인 책, 요즘 내게 딱 맞는 책 <그림 여행을 권함>(김한민, 민음사)을 샀다.
어쩜.. 이런 책이, 이 곳에, 이렇게 딱 있을까? ^^





그 책의 첫 부분을 읽는데 자기 '아바타'를 하나 그려보라고, 내 그림 속에 등장할 내 모습을 하나 정해보라는 말에
부끄럽지만 재미있어서 내 모습을 하나 그려보았다.
월정리에서 입고 다닌 원피스 차림으로,
실제보다는 통통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은 동그란 얼굴을 한
마흔살 귀여운 아줌마에게
나는 '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




린을 그리고 나니
그 전까지는 어려웠던(?) 내가 등장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연제랑 바다에서 춤을 추었다.

린, 행복하길..!




(책다방은 사실 이렇게 예쁜 집인데 내 그림으로는 미처 그리지 못했다. 미안해요~^^;;)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7. 8. 20. 22:50




바다 그림을 그려보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ㅠㅠ

연제가 생일선물로 받은 12색 색연필과
내 실력으로
에메랄드빛 월정리 바다를 그리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었지만..

그래도 바다 참 좋았다. ^^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았다.
머리를 편히 기댈수 있는 큰 캠핑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낮잠 한숨 잘 수 있는 것도 참 좋았다.

아이들은 몇 날 몇일, 바다에서 지치지도 않고 잘 놀았다.
아빠와 수영하고 파도타기하고
아빠가 의자에서 쉴때는 저희들끼리 모래놀이하고
물이 빠진 바닷가 검은 바위 사이로 돌아다니며 달랑게, 소라게, 고동들을 찾았다.

일주일 동안 비오는 하루를 빼고
매일 가서 만났던 바다야
잘 있니?
우리는 여기 서울에서 또 평범한 하루하루를 잘 보내..
그래도 보고싶다.
이렇게 쓰고 있으니 다시 또 그립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7. 8. 19. 22:47



비오는 아침.
달물 2층 휴게실이 공간 '고요'로 바뀌어있었다.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들의 전시회 도록을 읽었다.
사진집 <윤미네 집>도 보고싶었던 책인데 '고요'에 예쁘게 놓여있어서 반가웠다.
다음에 가면 보고 와야지..



빨래가 비에 젖는게 마음 쓰이길래
방에 내려와 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내가 그림을 종종 그리니까 아이들도 내 노트와 볼펜을 가져가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이 제주에서 그린 그림들~~



연제가 그린 무지개 사람.



연호의 꽃잎(?) 아이




연수가 작은달식당의 그림을 따라그린 얼굴.




연호가 그린 여자 사람. 봄이일까? 엄마일까? 스쟈 이모? ^^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7. 8. 18. 23:36



제주도의 아침은 참 선선했다.
월정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달물 마당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가는 아침.
아이들은 아직 자고
제비들은 분주히 날고
나는 아무 할일없이 달물 마당의 나무 의자에 한참씩 앉아있곤 했다.

광호가 조식을 준비하러 나오고
원이가 깨서 우는 소리가 들리고
봄이가 우리 도미토리실로 다다다다 뛰어 놀러가고
빨래줄에 빨래가 ​참하게 걸려있고.

서울에서는 거의 못봤던 제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그림을 그려볼까.


'제주에는 제비가 많기도 하지.

이른 아침, 달물 평상에서 바라본 제주 제비들의 비행.'


'이 아침,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하늘은 구름이 많아졌다가 없어졌다가 하며
참 자주도, 빨리도 변했다.
그런 하늘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문득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내 마음이 자주 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늘도 그렇잖아.'





사람 그리기는 어렵다ㅠㅠ
한 명도 어렵고, 여러명은 폭망..;;




'풍력발전기가 많은 월정리.
연호와 아침 산책을 하다가 말했다.
"연호야, 저 쪽에도 풍력발전기가 많다"
"응. 난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면 풍력발전기한테 '안녕~'해~."
오늘이 두번째 아침. ^^ '



Posted by 연신내새댁
여행하는 나무들2017. 8. 18. 22:51

얼마전부터 그림을 조금씩 그려보고 있다.
볼펜과 색연필로
내 작은 재생지노트에 잠깐씩.
재미있어서-^^
그림은 참 어설프지만 그림그리는 시간은 참 좋다.

아이들 방학과 남편의 여름 휴가를 맞아
다섯 식구가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

친구 광호와 수지, 봄이가 있는 월정리 '달에 물들다'에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매일 바다에 가서 놀았다.

차도 안 빌리고, 아무데도 가지않고
바다와 달물만 오가고,
나 혼자 점심식사 배달하러 월정리 식당들을 오가다 예쁜 가게가 있으면 들어가보고
아이들과는 월정리 마을 안쪽을 잠깐씩 산책하고
광호삼촌 차타고 장보러 김녕 마트와 그앞 초등학교 운동장에 한번씩 놀러갔다온게 다다.

달물에 앉아서, 바닷가에 앉아서 나는 짬짬히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은 아빠랑 봄이랑 잘 놀고 밥도 안하는 나는 시간이 많았다.

작은 노트를 깜빡하고 바다에 나온 날은
없는게없는 바닷가 편의점에 가서 연습장과 볼펜을 한자루 샀다.

아이들도, 나도, 준철도
자주 달물을, 월정리 바다를 그리워한다.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림속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통해 되짚어 가곤한다.



두근두근 출발!^^





오랫만에 탄 비행기는 살짝 무섭기도 했지만 아름다웠다.
하늘위에서 바라보는 구름, 일몰.
그림 그리려고 꺼내놨던 노트에 그림은 미처 못그리고 메모만.

'비행기 안에서 일몰을 봤다.
구름 속으로 내려가는 빨갛고 작은 해.
구름 아래에는 바다가 있고 작은 섬들이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던가.
해 주위로 물드는 여러가지 색들.
어린 왕자가 자기 별에서 해지는 풍경을 의자를 조금씩 옮기며 볼때의 일몰이 이랬을까.
우주에서 해는 어떻게 졌을까.
쌩 떽쥐베리의 상상력은 지구의 일몰 풍경을
우주의 아주 작은 혹성 위에서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어린 소년에게로 가져갔다. '

하늘 위에서 본 해질때의 색감은 슬프면서도 고운 차분하고 아련한 색들이었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데 사진을 제대로 못찍었다ㅜㅜ
그리기에는 내 실력이..ㅠㅠ




저녁 비행기를 탄 덕분에 밤10시에야 들어간 달물 우리방.
2층 침대 2개가 있는 도미토리실.
매트 하나를 바닥에 더 까니 다섯 식구에게 딱 맞았던.
아이들도, 나도 2층 침대의 자기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는 더없이 행복했다.
하루 신나게 놀고 돌아오면
조용히 편히 누워 쉴 수 있었던 우리들의 침대. 작은 그 방, 참 그립다.

Posted by 연신내새댁

일주일동안 강릉집에서 잘 쉬었다.
내 손으로 짓고 차리지않아도 삼시세끼 따순 밥이
나와 내 아이들의 입으로 (일주일이나!!) 들어오는 지구상에 몇 안되는 곳..^*^




근데 엄마를 너무 고생시켰다.
아침밥상 차려질때까지 이불속에 누워있기, 밤에 아이들 재워놓고 혼자 옆방에 이불펴놓고 쏙 들어가 책 읽고있자니
이 집에서 보냈던 소녀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
서른여덟살 아줌마는 혼자 슬며시 웃기도했다(헤헤~^^;)

엄마가 아니면 내가 어디서 이런 호사를 누릴까..
하지만 엄마도 어느새 예순여덟이란 낯선 나이의 예쁜 할머니.
엄마를 너무 고생시키면 안되는데ㅠㅠ
아직도 철부지인 딸은 펄펄한 외손주 셋을 할머니한테 다 맡겨놓고
주는 밥 받아먹고 뒹굴뒹굴 쉬었다.
언제 엄마한테 삼시세끼 맛있게 차려드리지..




아이들 청은 다 들어주시는 외할아버지는
경포호수와 바닷가를 한바퀴도는 마차를 태워주셨다.
모래사장에서는 언제 해도 아슬아슬 재미있는 파도 기다렸다 도망치기 놀이를 하고...

깔깔거리며 뛰는 연수연호 옆에는
막 대학생이 되었거나 아직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세명이 딱 붙어서서
우리 꼬마들과 똑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예뻤다.
얼마나 좋은가.. 친구들과 함께 동해바다를 보러왔던 젊은날의 추억은.

강릉에서 나고자란 나는 늘 바다보기를 좋아하지만 바다를 볼때의 마음은 그때마다 다르다.
세월호 생각이 나서 바다를 보는 마음이 슬펐다.
젊은 청년들을 보니 더 아팠다.





강릉에서 지내는동안 눈이 하루 왔다.
춥지않은 날씨에 금방 녹았지만 아이들과 많이 구경하고 마음에 시원하게 담아왔다.
올겨울은 가뭄이 심해서 봄에 물이 부족하진않을까.. 걱정된다.
땅과 멀리 떨어져사니 농사 물 걱정까지야 못하지만 아버지보시는 농민신문을 보니
벌써 강원도 산간지역은 지하수가 부족해 식수난을 겪고있다는 소식이 실려있어 걱정스러웠다.
작은 냇물, 강들이 마르면 큰강도 물이 줄어들겠지.. 도시의 뿌리없는 삶은 더 불안하다.



2월에는 포근한 눈이 한번에 너무 많이는 말고, 적당히 적절히 와줘서 마른 땅을 해갈해줬으면 좋겠다.

돌아온 서울집은 포근하다.
내 집, 다시 내 손으로 삼시세끼! 어설픈 실력이지만 내 아이들과 남편과 지지고볶고 밥상차리고 치우며 아옹다옹 지내는 소중한 일상, 다시 시작했다.

고향집의 엄마아빠 보고싶다. 오늘은 집이 오랫만에 다시 고요해졌겠네..
연제의 '하부느은~? 함미느은~?' 찾는 목소리가 귀에 선하실텐데.
사랑하는 엄마아빠, 편히 주무셔요.
건강하게 잘 자란 수호제 데리고 여름에 또 외가집 마당으로 뛰어갈께요.

Posted by 연신내새댁

사랑하는 아버지께


아버지. 오늘도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걸어나가 아버지 삶의 자리들을 찬찬히 짚어보고 돌아오셨는지요. 

"새벽에 길을 나서보면 불이 환하게 켜진 집들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른다." 

밖이 아직 어두운 겨울 아침, 부엌에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할 때면 아버지 이 말씀이 언제나 생각납니다. 

가족을 위해 밝히는 저의 작은 불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게됩니다. 


"아이들은 좋은 말을 자꾸 해주면서 키워야한다.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더 잘 하게된다."

나무라는 말, 질책하는 말보다 다독여주는 말, 바로 일러주고 깨우쳐주는 좋은 말로 아이들을 이끌고 키워줘야한다는 아버지 말씀이

어린 아이들 키우는 저희에게 더없이 귀중한 가르침이 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70회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지나온 시간동안 아버지의 아들, 딸이어서 정말 자랑스럽고 행복했어요. 

아버지와 함께 얘기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아버지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며 따라걸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 바른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의 비바람속에서 삶의 자리를 단단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가장.. 삶의 여러 자리를 흔들림없이 지켜오신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벼는 농사꾼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

새벽마다 부지런히 논두렁을 돌고 오시던 아버지처럼 저희들도 오늘 저희들이 일구는 소중한 삶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걷고, 생각하고, 보살피며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언제나 저희들을 다정하게 품어주셨던 깊고 넓은 품으로 이제는 손주들을 보듬어주고 계신 아버지와 함께

맛있는 커피, 따뜻한 이야기, 행복한 시간들을 더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2014년 1월 17일.

사랑하는 자식 일동 올림.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