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한살림.농업2020. 6. 30. 20:52


고향 부모님들이 감자를 캐서 보내주셨다.
감자가 오면 하지가 지났다는 것이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 것이고, 순하게 비가 잘 지나가기를 빌면서 어둑한 집에서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기며 감자전을 부쳐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4월 봄에 심어서 6월 하지 무렵에 캐는 고향집 감자가 익는 동안 앞산에서는 멧비둘기가 ‘구구우~ 구구’ 하고 여러번 울었을 것이고, 친정집 밭 옆에 있는 고속도로로는 차들이 씽씽 달렸을 것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오고가는 차들도 좀 적었으려나.. 고향집 밭 흙기운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은 감자를 만져보며 물어본다.





감자가 오면 아이들이 바쁘다.
큰 감자 사이사이에 섞인 작은 감자들을 찾아내 따로 양푼에 담는다.
호미에 찍힌 상처가 있거나 빨리 먹어야할 것 같은 감자들도 따로 담아서 오늘 감자전을 하기로 한다.
두고 먹을 감자들은 젖은 박스에서 빼내서 검은 자루에 담아둔다. 연호와 연제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잘 분류하고 잘 담았다.




연수는 오늘 먹을 감자를 씻어서 깍는 담당.
너무 잘하면 담에 강릉갔을때 외할머니가 자꾸 시킬 것같아서 안된다며 일부러 천천히 한다.




형이 필러로 깍아준 감자를 엄마가 칼로 쪼개주면 연호와 연제가 녹즙기로 간다.
그러면 건더기와 물이 따로 분리되서 나온다. 따로따로 큰 그릇에 모아준다. 감자 간 물 밑에는 뽀얗고 말캉말캉한 녹말이 잔뜩 고여있다. 윗물을 따라서 다른 그릇에 부어두고 처음 만졌을때는 딱딱하지만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면 말캉하게 떠올려지는 하얀 녹말은 감자 건더기쪽에 합쳐준다. 쫄깃한 감자전이 되도록..
올해로 감자갈기 경력이 최소 5년 정도 되는 연호는 이 과정을 잘 한다. 연제도 가르쳐가며...^^




이 과정을 위해 신문지 깔고 녹즙기 갖다놓고 조립하며 세팅하고, 뒷마무리하고, 중간중간 아이들 장난치는거 말리고, 자기만 많이 못 갈았다며 삐지는 막내 달래는 등의 수발드는 것이 내 역할이다.
한바탕 소동끝에 감자가 다 갈아지면 건더기 모은 것에 녹말과 물을 적당히 잘 섞고, 소금도 넣고, 야채가 있으면 좀 잘라 넣어서 감자전 반죽을 만들고 부친다.




식구가 여럿이니까 후라이팬을 두개 정도 놓고 부친다. 감자전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해먹는 것은 내가 강릉 사람이고, 아이들이 많고, 밖에는 장마비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멀리 살고 아이들 많은 막내딸을 위해 가장 큰 박스를 갖다놓고, 자꾸만 감자를 더 채우고 채워가며 자주 보지 못하는 딸 생각을 하셨을 부모님을 나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위 속에 고향집 밭에 앉아 감자를 캐고, 리어카에 싣고오셔서 차고 뒤에 깔아놓은 돗자리위에 감자를 쏟아 널어놓고 말린뒤에, 박스에 차곡차곡 넣고 신문지로 덮고, 박스를 닫은 후에 테이프를 단단히 붙여서 동네 택배 사무실까지 싣고가서 택배용지에 주소를 단단히 써서 붙여 보낼 때까지.. 다리가 아픈 아버지와 어깨가 아팠던 엄마의 손길과 발걸음을 따라가며 나는 아이들과 감자를 씻고 갈고 부쳐서 먹는다.




작은 감자들로는 알감자 조림을 했다.
두고먹을 수 있는 반찬이지만 냉장고에 넣었다 꺼내니 감자가 너무 쫀득해졌다. 만들어서 바로 먹었을때가 제일 포슬포슬하고 맛있었다.
땅은 정말 신기하다. 땅에서 온 먹거리들을 맛있게 먹을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런 먹거리들이 만들어질까.




감자가 도착한 날 저녁밥은 감자전으로 대신했다.
알감자조림에 밥도 조금씩은 먹고, 감자전을 배부르게 먹고 수박도 먹었다.
내년에는 아이들과 함께 감자를 심고, 감자를 캐보기도 했으면 좋겠다.
고생스런 일이기도 하지만 땅이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것을 준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또 농작물을 키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먹는 것은 가족들의 짭짤한 손맛,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 땀, 감자의 생명력, 택배기사님들의 수고, 지구의 온기, 고향의 바람과 비, 태양.. 그 모든 것.


 

Posted by 연신내새댁
하루2020. 6. 23. 10:48



냉장고의 냉동실이 고장났다.
이 냉장고가 몇년이나 됐지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이 강일동으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때
강릉 엄마가 선물로 보내주셨던게 떠올랐다.
강일동에서 5년, 하남으로 이사와서 또 5년째가 되는 올해 정도면 얼추 10년이 되어가는 셈이다.
벌써 10년이라니.. 늘 새것같은 기분인데.

이사할때 한번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다른 짐들도 정리하느라 바빠
거의 빼냈던 것 그대로 다시 집어넣었을 것이다.
그후 5년이 흐르는 동안 한번도 완전히 비워본 적이 없었던 냉동실을 요며칠에 걸쳐 처음으로 정리해보았다.

곰탕이나 홍합삶은 물을 비닐에 넣어서 얼려두곤 했는데 그게 잘못됐는지 어느날부터 냉동실 한 칸 뒤쪽에 성에가 끼고 국물 얼려둔 것들이 녹아서 물이 자꾸 고였다.

며칠전에 맨아래칸에 국물 얼렸던 것들을 다 꺼내 버리고 물을 닦아냈더니 다시 물이 생기지는 않았는데
성에는 계속 두껍게 얼어붙었고 어떤 것들은 잘 얼지 않았다.

AS 센터에 전화했더니 예약이 밀려있어서 7월 초나 되어야 출장서비스 예약이 된다고 했다. 그거라도 일단 예약을 해두고, 어제는 외근후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드디어 냉동실의 모든 음식들을 꺼냈다.
얼마전에 냉동식품 많이 할인하는 온라인행사를 보고 아이들 좋아하는 반찬, 간식거리들을 많이 주문했더니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배송이 왔었다.
그 아이스 박스에 냉동실의 여러칸에 어지럽게 쌓여있던 수많은 봉지들을 꺼내 담았다.
몇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얼려진 야채들, 이미 한쪽이 녹아서 먹을 수 없게된 음식들은 버렸다.

그래도 그동안 가끔 조금씩이라도 정리해온 덕분에 많이 버릴 것은 없었지만 생기는데로 꾸역꾸역 넣어두기만 했던 식재료들이 뭐가 얼마나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올봄에 시댁과 친정에서 받은 떡봉지들을 한 바구니에 모아보니 쑥떡이 12봉지, 팥떡이 한 봉지.
청국장은 다 먹었고, 콩비지 얼려둔 것이 5봉지.
치킨, 돈까스 같은 냉동식품들은 맨 아래칸에 다 모아두었다.
곶감이 2봉지, 블루베리 얼린 것이 3봉지.
그외에는 국물멸치, 잔멸치, 오징어채가 1봉지씩.
이번주에 반찬할 돼지고기 얼린 것들, 국거리용 소고기, 생선 한봉지.
미숫가루 한봉지.


 

뭐가 얼마나 있는지 알게된다는 것이 이렇게 개운한 기분을 주는지 몰랐다.

어제 성에를 남편이 다 녹이고, 떼어내고 닦아낸 뒤로 냉동실은 우선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판 뒤쪽으로 성에가 더 얼어있는 것 같고, 문도 좀 헐거워진 것 같아 7월에 수리 예약해둔 것은 받아야할 것 같다.
특냉실이 특히 냉동이 안되고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기사님이 오시면 냉장고 전원을 끄고 냉동실을 한번더 다 비워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에 한번 정리를 해두고나니 기사님오셨을때도 훨씬 수월하게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 미리미리 냉동실에 있는 것들을 우선 많이 먹고, 냉장실 먹거리도 많이 먹어서 비워야지..

무엇이 얼마큼 있는지 알기도 어려울만큼 내가 정신없는 시간을 살아왔구나.. 싶다.
매일을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데리고 다니며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데만도 급급해서 정신없고 바쁠 때가 많았다. 집안 살림이든 내 마음이든, 아이들 자라는 모습이든 꼼꼼히 구석구석 살피기는 어려웠다.

십년쓴 냉장고가 살짝쿵 탈이 나면서 한번 그 속을 살펴보고 좀 숨이 통하게, 비우고 정리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 집에는 더 비워야할 곳들이 많다.
오래된 아이들 책이 쌓여있는 책장도 그렇고, 작아진 옷가지들도 계절마다 조금씩 비우긴하지만 더 많이 비워내야 한다.
묵은 장난감들도...
아이 셋이 만들어낸 온갖 미술작품들과 오래도록 가지고 놀다 망가진 장난감 쪼가리들도 나는 애틋해서 쉽게 버리지 못하고 다 모아두고 쌓아두며 살았다.
작은 구슬 한 알에도 우리들의 추억이 깃들어있고,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있으니 쉽게 버려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집이 온통 오래된 물건들로 꽉 차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 정리해서 내놓고, 꼭 필요한 것 말고는 물건을 너무 많이 사지않고.. 그래서 바람이 통하고 시원한 집을 유지해가야지.

집도 가볍게, 생활도 가볍게.
홀가분한 집에서 생각이, 마음이 자유롭고 깊게 오고갔으면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